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1권, 영조 34년 1758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6.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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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병술

정휘량(鄭翬良)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교정 당상(校正堂上)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경묘 애책문(景廟哀冊文) 가운데에 ‘권귀를 체결하여 몰래 불궤를 도모하였다[締結權貴陰圖不軌]’는 말이 있으니, 진실로 기록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가 지은 것인가?"
하니,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고(故) 판서 이덕수(李德壽)가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경하(元景夏)가 이런 의리(義理)에 엄절(嚴截)한데, 그때의 거조(擧措)를 어찌 생각하지 아니하였는가? 사판(仕板)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 가하다. 이 교시를 들으면, 충신의 자손은 반드시 눈물을 머금는 자가 있을 것이고 효경(梟獍) 같은 무리는 또한 반드시 웃는 자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5월 2일 정해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입직(入直)한 무신(武臣)에게 무경강(武經講)을 시험하는 데에 친림하여 도총 도사(都摠都事) 이서(李)를 순통(純通)으로써 승서(陞敍)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서 삼군문 대장(三軍門大將)을 소견하였는데, 훈장(訓將) 김성응(金聖應)의 아뢴 바로 인하여 의주(義州) 사람 최처(崔處)를 해조(該曹)145)  에 명하여 첨사(僉使)로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임금이 준천(濬川)146)  의 가부(可否)를 물었다.

 

5월 3일 무자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장지풍(張志豊)을 승지로 삼았다.

 

5월 4일 기축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하교하기를,
"아! 예전에 한(漢)나라 동해(東海)의 한 지어미[婦]가 원통함을 부르짖자 능히 가뭄을 이루었는데, 요사이 자못 가물 징조가 있으니, 애모(哀慕)하는 중에 마음이 더욱 민망스럽다. 억울함을 해소하는 방도를 소홀히 할 수 있는가? 형조(刑曹)로 하여금 시추(時推)147)  와 미완결(未完結)을 물론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깨끗하게 초록해 등대(登對)하여 품결(稟決)하게 할 것이다. 예조 판서가 이미 하교를 받들어 단(壇)을 설치하고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사제(賜祭)하였다. 근년에 해부(該部)에서 매장(埋葬)한 것이 비록 뼈는 묻었지만 족속(族屬)이 있는데 관아(官衙)에서 매장한 것에 구애되어 감히 옮기지 못하는 것을 옮겨 묻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허물이 없으면서 물고(物故)된 자가 어찌 없겠는가마는, 어찌 조관석(趙觀錫)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비록 휼전(恤典)을 거행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근래의 풍속이 한번 장전(帳殿)에 들어오면 하나의 스스로 빚어낸 잘못으로 간주되어 무릇 벼슬하는 길에 모두 장애를 당하니, 이와 같다면 위에 있는 자가 밀어서 구렁에 빠뜨리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이윤(伊尹)148)  의 뜻이겠는가? 만약 그 아들이 있으면 일체 보통 사람의 예(例)에 의하여 조용(調用)하라. 이기상(李麒祥)은 무고(誣告)를 입었다가 죄 없는 것이 판명되었는데, 그 뒤에 형(刑)을 받은 것은 그 거조(擧措)가 해패(駭悖)함으로 인한 것에 불과하니, 그 형벌이 지나쳤다. 내가 이미 이를 뉘우치고 또한 가엾이 여기니 특별히 직첩(職牒)을 주어 조용하고, 그 아들 이제현(李齊顯)의 작처(酌處)는 사체(事體)를 엄하게 함에 불과한데 형추(刑推)한 것을 또한 뉘우친다. 특별히 놓아 보내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종묘(宗廟) 앞에 놓아 둔 돌은 바로 일영대(日影臺)인데, 경 등은 이를 아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열성조(列聖朝)에서 미행(微行)할 때에 한 늙은 할멈을 만났는데, 그가 남편에게 이르기를, ‘세성(歲星)이 적성(賊星)에게 쫓긴 바가 되어 유성(柳星) 아래로 들어갔다.’고 하는 것을 보고는, 그때에 바로 그 할멈을 운관(雲觀)149)  에 예속하게 하였는데, 일영대는 이 할멈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하였다.

 

5월 5일 경인

임금이 효소전에 나아가서 단오제(端午祭)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명정전(明政殿) 뜰에 나아가서 대조(大朝)가 출궁(出宮)할 때에 공경히 맞이한 뒤에,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서 단오제를 행하고, 인하여 명정전 뜰에 나아가서 대조가 대내(大內)로 돌아올 때에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휘령전에 나아가서 편차인(編次人)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하교한 뒤에 비가 곧 쏟아졌으니, 내가 그들을 위해 진휼(軫恤)함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감응(感應)하는 이치는 명명(冥冥)한 가운데 어긋나지 아니하여 그러한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 감응한 소치라고 우러러 진달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어제(御製) 가운데 춘궁(春宮)으로 계실 때 편집한 시편(詩編)이 없음은 진실로 잘못된 일이 되는데, 어제 춘궁 때에 곽사부(郭師傅)에게 내린 편지 두 통[度]을 찾았으니 책에 기록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갑오년150)  에 비로소 글짓는 것을 알았는데, 이는 남에게 받은 것이다. 이미 내가 지은 것이 아닌데 기록할 필요가 있는가? 이는 진실로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감반(甘盤)151)  의 친구로는 전(前) 찰방(察訪) 곽시징(郭始徵) 하나이다. 그 봉사손(奉祀孫)을 전조(銓曹)로 하여금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6일 신묘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부관(部官)과 오부 방민(五部坊民)을 소견하고, 준거(濬渠)152)  의 가부(可否)를 물었다.

 

5월 7일 임진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형조 당상을 소견하였다.

 

5월 8일 계사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좌의정·우의정을 소견하였다.

 

5월 9일 갑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입번(入番)한 향군(鄕軍)을 소견하고, 농사 형편을 물었다.

 

윤광섬(尹光暹)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교정 당상(校正堂上) 김치인(金致仁)을 소견하고 온릉(溫陵)153)  을 복위(復位)할 때의 사적(事蹟)을 읽으라 명하였는데, 고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이 중묘(中廟)에게 올린 상소에 이르러, ‘전하가 강경한 신하에게 제재를 받았다.’는 말이 있자, 임금이 말하기를,
"늠연(凛然)154)  하다. 지금 세상에는 이와 같이 곧은 말을 하는 이가 없다. 온릉의 복위는 열조(列朝)에서 미처 하지 못한 것인데, 숙종 24년에 이르러 전 현감(縣監) 신규(申奎)의 소청(疏請)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 의논이 있었고, 나에게 미쳐 또 유학(幼學) 김태남(金台南)의 소청으로 인하여 기미년155)  에 황단(皇壇)의 일을 논하다가 이에 온릉 복위가 언급되어 드디어 궐전(闕典)을 거행하였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성상이 한번 박상(朴祥)의 상소를 보자 안색을 고치고 감탄을 일으켰으니, 이는 바로 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세 신하를 출향(黜享)할 기회였다. 조정에 가득한 공경(公卿)이 한 사람도 건백(建白)한 자가 없었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는가? 아! 우리 전하의 밝으신 성지(聖旨)로 이미 온릉을 복위하고 태묘(太廟)의 향사(享祀)를 성대히 올렸으면, 저 세 신하는 실로 온릉의 원수인데 한 묘(廟)에 배향(配享)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세 신하라는 자는 과연 보천 욕일(補天浴日)156)  의 공이 있으면 그 작상(爵賞)을 빼앗지 말고 그 자손을 폐하지 않으며 녹용(錄用)하는 것은 가하겠지만, 묘정(廟庭)의 배향만은 불가하다. 신(臣)이 마침 종신(宗臣) 하릉군(夏陵君) 이적(李樀)의 상소를 보건대, 세 신하를 출향함이 마땅함을 대단히 논하였는데 승정원의 막음을 당하였다. 아! 당당한 바른 의논이 한직(閑職)·산관(散官)에 있는 늙은 종신(宗臣)에게서 나왔음은 조정의 부끄러움이 이미 지극한데, 하물며 승정원의 여섯 승지가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견식(見識)이 없음이 이처럼 심한가?"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88면
【분류】왕실(王室) / 변란(變亂) / 인사(人事)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153] 온릉(溫陵) : 중종비 단경 왕후 신씨(愼氏).[註 154] 늠연(凛然) : 늠름한 모양.[註 155] 기미년 : 1739 영조 15년.[註 156] 보천 욕일(補天浴日) : 나라와 임금에게 큰 공로가 있음.
사신(史臣)은 말한다. "성상이 한번 박상(朴祥)의 상소를 보자 안색을 고치고 감탄을 일으켰으니, 이는 바로 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세 신하를 출향(黜享)할 기회였다. 조정에 가득한 공경(公卿)이 한 사람도 건백(建白)한 자가 없었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는가? 아! 우리 전하의 밝으신 성지(聖旨)로 이미 온릉을 복위하고 태묘(太廟)의 향사(享祀)를 성대히 올렸으면, 저 세 신하는 실로 온릉의 원수인데 한 묘(廟)에 배향(配享)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세 신하라는 자는 과연 보천 욕일(補天浴日)156)  의 공이 있으면 그 작상(爵賞)을 빼앗지 말고 그 자손을 폐하지 않으며 녹용(錄用)하는 것은 가하겠지만, 묘정(廟庭)의 배향만은 불가하다. 신(臣)이 마침 종신(宗臣) 하릉군(夏陵君) 이적(李樀)의 상소를 보건대, 세 신하를 출향함이 마땅함을 대단히 논하였는데 승정원의 막음을 당하였다. 아! 당당한 바른 의논이 한직(閑職)·산관(散官)에 있는 늙은 종신(宗臣)에게서 나왔음은 조정의 부끄러움이 이미 지극한데, 하물며 승정원의 여섯 승지가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견식(見識)이 없음이 이처럼 심한가?"

 

5월 10일 을미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5월 11일 병신

사간 심익성(沈益聖)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번에 분관(分館) 때에 홀로 김낙수(金樂洙) 한 사람만 괴원(槐院)157)   선임에 누락되었습니다. 대저 김낙수의 사화(詞華)158)  와 지벌(地閥)이 무슨 벼슬을 하지 못하겠습니까마는, 구슬을 빠뜨린 한탄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물정(物情)이 이를 애석해 합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김낙수을 괴원에 조용(調用)할 것을 특별히 허락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상서의 말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문신 전강(文臣殿講)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최창윤(崔昌潤)에게 말[馬]을 하사하는 상전(賞典)을 특별히 베풀었다. 병조 참지(兵曹參知) 홍득후(洪得厚)는 70의 나이에 능히 경서(經書)를 외었으므로 특별히 녹비(鹿皮)를 내려 주었다.

 

임금이 덕성합에 나아가서, 좌·우상(左右相)과 좌·우 포장(捕將)을 소견하였다. 비국(備局)에 명하여, 기호(畿湖)의 제언(堤堰)에 대해 제비를 뽑아서 적간(摘奸)하게 하였다. 명하여 왕세자의 생신(生辰)에 상의원(尙衣院)에서 바치는 복색(服色)을 연제(練祭) 전에는 흰색으로, 상제(祥祭) 후 담제(禫祭) 전에는 청백색(靑白色)으로 봉진(封進)하도록 명하였다.

 

5월 12일 정유

어석윤(魚錫胤)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홍인한(洪麟漢)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호남의 오래 묵은 땅에 이제 만약 속전(續田)을 허락하면, 이른바 양전(良田)의 묵는 것이 반드시 크게 개간될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오랜 진전(陳田)을 개간하는 자에게 강등(降等)·강속(降續)의 명을 특별히 내리시면, 양전(量田)한 뒤에도 진전 가운데 조금 경작할 만한 곳은 모두 힘써 개간할 것입니다. 대개 양전하기 전에는 옛 진전을 개간하면 세(稅)가 있고 개간하지 아니하면 세가 없었는데, 양전한 뒤에는 지금 진전으로 있는 땅을 경작하거나 경작하지 않거나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일체 모두 세를 거두기 때문에, 백성들이 반드시 지금의 진전을 힘써 개간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가을 뒤 호조(戶曹)에서 절목(節目)을 반포해 내림에 미쳐, 이른바 양전한 뒤에 지금 진전을 개간 경작하는 곳은 하나도 강등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이와 같으면서 백성이 어떻게 영(令)을 믿겠습니까?"
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상서의 말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함안재(咸安齋)에 나아갔다. 좌·우 포장이 청대(請對)하였는데, 포청 죄인(捕廳罪人) 김봉갑(金鳳甲)을 금부(禁府)에 명하여 국청(鞫廳)을 설치해 구문(究問)하게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관학 도기 유생(館學到記儒生)에게 전강(殿講)을 설행하고 색장(色掌)에게 제술(製述) 시험에 응시할 것을 허락하여, 제술에 수석을 차지한 생원(生員) 유언수(兪彦脩)와 전강에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김상권(金尙權)·유방영(劉邦榮)에게 모두 급제(及第)를 내렸다.

 

기우제(祈雨祭)를 15일에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5월 14일 기해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전 제주 목사 이윤성(李潤成)의 아뢴 바로 인하여 청차(淸差)159)  의 개시(開市) 때에 서북 도신(西北道臣)으로 하여금 매년 호마(胡馬) 2, 30필을 무역하여 제주도에 들여보내 방목(放牧)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가 각도 감사(各道監司)와 삼도 유수(三都留守)에게 분부하여 죄인의 문안(文案)을 취해다가 반복해 열람하여, 만일 의심스러운 단서가 의논할 만한 것이나 정범(情犯)이 용서할 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참작해 처리한 뒤에 열록(列錄)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5일 경자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나아가서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왕세자는 대조(大朝)께서 출궁(出宮)할 때에 공경히 맞이한 뒤에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서 예식을 행하고, 곧 명정전(明政殿) 뜰에 나아가 대조께서 환궁(還宮)할 때에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의 중삭제(仲朔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 지장(誌狀)을 찬집(纂輯)함으로 인하여, 이에 고(故) 판서 김정(金淨)과 고 승지 박상(朴祥)이 온릉 복위(溫陵復位)의 일로써 능히 연명(聯名)으로 봉장(封章)함에 말이 엄하고 의리가 바름을 보니, 백년 뒤의 사람으로 하여금 늠연(凛然)하게 한다. 기미년160)  에 단지 그 후손만 녹용(錄用)하였으니, 흠전(欠典)이라고 이를 만하다. 김정에게는 의정(議政)을 증직(贈職)하고 박상에게는 정경(正卿)을 증직하되, 박상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서 〈시호를 내리고〉, 김정은 비록 정경이라 하더라도 만약 시호를 내리지 아니하였으면 일체로 거행하라."
하였다.

 

5월 16일 신축

경기 어사(京畿御史) 홍양한(洪良漢)이 복명(復命)하였다. 명하여 금천(衿川)·과천(果川)·양천(陽川)의 수령(守令)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처(拿處)하게 하였다. 사단(社壇)의 신실(神室)을 보수하지 아니한 때문이다.

 

5월 18일 계묘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갔다. 옥사(獄事)를 국문(鞫問)한 대신이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봉갑(金鳳甲)은 본 사건이 황잡(荒雜)할 뿐만 아니라 전번의 송시택(宋時澤)과는 크게 차이가 있는데, 포교(捕校)가 앞질러 바로 잡아 와서 일을 크게 벌려놓았으니, 놀랠 만하다. 그것은 공(功)을 바라는 경솔한 무리이니,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중하게 결곤(決棍)하게 하라."
하였다.

 

명하여 어사(御史) 이경옥(李敬玉)을 황해도에 보내어 요녀(妖女)를 효시(梟示)하게 하였다. 이때 황해도 금천(金川)·평산(平山)·신계(新溪)에 요녀 네 명이 있어, 스스로 생불(生佛)이라고 일컬으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시키자, 사람들이 모두 무당을 배척하고 이를 몹시 지나치게 믿어서, 무녀(巫女)의 기용(器用)을 헐값으로 주전소(鑄錢所)에 팔아 치운 것이 거의 만냥의 재물에 이르렀고 〈요녀의〉 한마디 말이 능히 일도(一道)로 하여금 쏠리게 하였으니, 그 선동에 현혹됨을 알 만하다. 그러므로 이 명령이 있었다.

 

5월 19일 갑진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내 얼굴이 비록 수척하나 천하가 반드시 살찔 것이다.[貌瘦天下肥]’라고 한 말을, 《술편(述編)》에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 그 얼굴의 수척함은 이미 개원(開元)161)  ·천보(天寶)162)   때와 판이(判異)한 장본(張本)이며, 당나라 태종(太宗)이 ‘한 말의 쌀이 서 돈[三錢]에 가득하나, 아깝게도 봉덕이(封德彛)163)  로 하여금 보게 하지 못한다.’는 말은 자만(自滿)하는 뜻이 있으니, 이것이 태종다운 까닭이다."
하였다.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서 김경약(金景躍)을 친국(親鞫)하였다. 김경약은 연산(連山) 사람으로 한 요탄(妖誕)한 글을 지어서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의 집에 전하였는데, 홍봉한이 연중(筵中)에서 아뢰니, 나치(拿致)하여 김경약을 국문하기를,
"무슨 마음으로 장신(將臣)의 집에 글을 바쳤느냐? 이른바, 문답한 말은 더욱 음흉하고 간사하니, 결코 꿈속에서의 문답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지주(指嗾)하여 그렇게 하였느냐?"
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아비가 주수(主倅)164)  에게 모진 매를 맞고 신음한 지 월여(月餘) 만에 이로 인하여 죽었기 때문에, 원통함을 호소하려고 하나 상언(上言)과 격고(擊鼓)가 모두 길이 없었는데, 밤 꿈에 금강산에 가서 노는 중에 한 누른 옷을 입은 사람이 흐느끼며 크게 한숨 쉬는 것을 보고, 해몽(解夢)하여 시를 지어서 신원(伸冤)할 계책을 하려고 이런 거조(擧措)가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이 한 꿈을 과연 꾸며서 지었으므로, 가탁(假托)한 일도 많이 있었다. 형문(刑問)을 두 차례 하자, 허망(虛妄)함을 자복하였다.

 

임금이 본부(本府)에 명하여 추국(推鞫)하게 하였다.

 

5월 21일 병오

이조 판서 윤득재(尹得載)를 병조 판서로, 홍계희(洪啓禧)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5월 22일 정미

이성중(李成中)을 특별히 제수하여 병조 판서로 삼고, 이창수(李昌壽)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거둥하여 기우제(祈雨祭)를 친히 행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흑원령포(黑圓領袍)를 갖추고 선농단에 나아가서 봉심(奉審)한 다음, 성기위(省器位)에 나아갔다가 이어서 성생위(省牲位)에 나아가 희생(犧牲)을 살펴본 뒤에, 막차(幕次)에 들어가서 좌윤(左尹)에게 명하여 농민(農民)을 거느리고 입시하게 하였다.

 

5월 23일 무신

임금이 선농단 판위(先農壇板位)에 나아가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네 번 절한 뒤에, 막차에 도로 들어가서 익선관·시사복(視事服)으로 바꾸어 입고, 환궁(還宮)할 때에 어의궁(於義宮)에 역림(歷臨)하여, 임금이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의 집이 서로 가깝다는 말을 듣고 승지를 보내어 함께 와서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돌아와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각사(各司)에서 입직(入直)한 낭관(郞官)을 소견하고 소회(所懷)를 물었다.

 

5월 25일 경술

비변사에서 김치인(金致仁)을 천거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다.

 

경상도 유학(幼學) 채관휴(蔡觀休)가 상서하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기를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이 일은 이미 유시(諭示)하였으니,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서, 하교하기를,
"최복(衰服)을 벗고 희생(犧牲)을 대신하였으나 어찌 감히 하늘을 감격하게 하겠는가만, 새벽에 빗소리를 들으니 이는 누가 준 것인가? 황천(皇天)과 척강(陟降)이 주신 것이다. 능히 우러러 보답하지 못하면, 이는 황천을 저버리고 척강을 저버리는 것이다. 내일 입시(入侍)하는 것을 오늘로 당겨서 정하라."
하였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이천보가 말하기를,
"해서(海西)에 혹세 무민(惑世誣民)하는 일이 있었는데, 도신(道臣)이 능히 효시(梟示)하고 장문(狀聞)하여 일도(一道)의 인심을 진정하지 못하였으니, 파직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병사(兵使) 또한 일체로 파직하고, 지방관(地方官)도 아울러 나처(拿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홍경해(洪景海)가 아뢴 바는 박상면(朴相冕)을 이른 것이 아니다. 박지원(朴志源)의 제문(祭文) 가운데, ‘그의 마음으로써 그 조카를 속였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연중(筵中)의 담화에서 홍경해가 ‘한을 머금었다[飮恨]’고 상주한 것이 잘못 전해져 그 관계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제 영상(領相)이 아뢴 바를 들으니, 근래에 연중의 말이 몹시 맹랑(孟浪)하다. 처분하려고 하여 그때의 주서(注書) 홍윤(金錀)에게 물었는데, 감히 변명[分疏]하기를, ‘두 사관(史官)이 한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른 것은 방자하고 무엄(無嚴)하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서 홍윤과 부응교 홍경해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하게 물어서, 구초(口招)를 주달하게 하라."
하였다.

 

빈청(賓廳)에 모여서 회권(會圈)하여, 남유용(南有容)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윤봉조(尹鳳朝)가 상소하여 천거한 것이다.

 

5월 26일 신해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농민(農民)을 소견하고 농사 형편을 물었다.

 

권상일(權相一)을 특별히 제수하여 대사헌으로 삼았다.

 

5월 27일 임자

임금이 북교(北郊)에 거둥하여 친히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흑원령포(黑圓領袍)를 갖추고 친히 향(香)을 전한 후, 보련(步輦)을 탐에 일산[率]을 펴지 아니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비가 오고 아니오는 것이 어찌 일산을 펴는 여부에 매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여(小輿)를 타는 것도 지나치다. 내가 의지하는 바는 백성인데, 백성이 만약 죽게 되면 내가 장차 무엇을 의지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단상(壇上)에 나아가서 봉심(奉審)하고, 곧 성기위(省器位)에 나아갔다가 또 성생위(省牲位)에 나아가서 희생을 살펴본 뒤에, 막차(幕次)에 들어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래 가물던 나머지에 비가 지금 두루 흡족하니, 내가 감사함을 보답하는 예식을 겸하여 행하려고 한다."
하니, 우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지극하신 정성이 하늘에 다다랐으니, 감응(感應)이 소소(昭昭)합니다."
하였다.

 

5월 28일 계축

임금이 단상에 나아가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네 번 절한 뒤에, 막차(幕次)에 들어가서 포익선관(布翼善冠)과 시사복(視事服)으로 바꾸어 갖추고 회란(回鑾)할 때에 육상궁(毓祥宮)에 전배(展拜)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영어(囹圄)165)  에 달려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임금이 의금부에 역림(歷臨)하여 홍경해에게 묻기를,
"박지원(朴志源)의 제문(祭文)에 없는 글을 네가 과연 어디에서 들었느냐?"
하니, 홍경해가 말하기를,
"홍낙명(洪樂命)이 와서 전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홍경해가 사람을 무고(誣告)한 것과 박상면(朴相冕)의 씻기 어려운 부끄러움과 박지원이 사람축에 끼지 못함이 한꺼번에 판명되었다. 세 사람이 모두 시종(侍從)하는 신하인데, 어찌 애매하게 둘 수 있겠는가? 왕자(王者)가 세도(世道)를 위하는 도리로 사실을 구핵(究覈)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가 젊은 명관(名官)이 구천(九泉)에서 한(恨)을 품고 유복(遺腹)의 부인이 있어 하늘에 부르짖고자 하니, 이것도 역시 가뭄을 이루는 한 이치이다. 이제 박상면에게 만약 사실 무근으로 죄가 없으면 그 억울함이 저절로 밝게 씻어질 것이며, 홍경해가 아뢴 바는 그가 비록 아비를 위하여 말을 가리지 아니하였음이 깊이 비난할 것은 못되더라도 이미 이 일이 없는 것에 견주겠는가? 그러나 본부(本府)에서 구초(口招)할 때에 비록 절박함을 인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조정에 오른 자가 아니기 때문에 간략하게 징계하고 놓아 보냈는데, 이른바 말한 것은 역시 그 사람의 주작(做作)166)  이 아니고 효효(曉曉)167)  한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니, 물을 길이 없다. 전번에 박지원을 다시 처분한 것은 대개 이에 말미암은 것인데, 제문에 이미 그 말이 없고 홍경해도 눈으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두 세속(世俗)이 부효(浮囂)168)  한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다. 당초의 처분을 그가 어찌 감히 마다하겠는가? 끝에 율(律)을 더한 것은, 몸소 왕부(王府)에 임하여 사실을 조사한 뒤에 사람을 애매한 과(科)에 둘 수 없으니, 그전의 율(律)에 의하여 특별히 투비(投畀)했던 곳으로 쫓아내어 몸소 임한 뜻을 보이고, 아울러 시수 죄인(時囚罪人)을 놓아 보내라."
하였다.

 

5월 29일 갑인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가 앉았는데,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입대(入對)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재작년 5월에 입시(入侍)한 뒤 이튿날 빈대(賓對)하여 신이 울면서 진달하니, 저하(邸下)께서도 울면서 하령(下令)하셨습니다. 저하께서 지금 어찌 이를 잊으셨겠습니까? 작년 가을 이후로 신이 병으로 자리에 엎드려서 비록 듣는 바가 있었으나, 일이 지난 뒤에야 입시하여 마치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음이 있으니, 이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는 것이 약이고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였으니, 오직 원하건대,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기(氣)를 화(和)하게 하시어, 조섭(調攝)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소서."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두 차례의 일은 진실로 나의 과실이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삼가 허물을 뉘우치시어 하령하신 글을 보건대, 착한 마음의 단서가 애연(藹然)합니다마는, 무릇 형벌은 한번이라도 신중히 하지 아니하면 뉘우쳐도 미칠 길이 없습니다. 종사(宗社)가 편안하고 위태로움이 오로지 저하의 한 몸에 있으니, 저하의 병환이 쾌히 나으신 연후에야 위로는 대조(大朝)께서 부탁해 맡기심의 중대함에 보답할 수 있고, 아래로는 신민(臣民)이 원하여 바라는 정성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말이 전부 속마음에서 나왔으니, 감히 명심(銘心)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기우제(祈雨祭)의 헌관(獻官) 이하에게 상을 내렸는데, 차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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