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0권, 영조 38년 1762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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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신묘

임금이 건명문에 나아가 반교(頒敎)하고 백관의 진하(進賀)를 받았으니, 동궁(東宮)의 위호(位號)를 정했기 때문이었다. 교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아! 주창(主鬯)155)  은 나라의 큰 근본이니, 삼종(三宗)156)  의 혈맥(血脈)과 만세의 통서(統緖)가 단지 세손에게 있도다. 공자께서 말하기를, ‘반드시 이름을 바로 이루어야 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무겁지 않으면 권위가 없다.’ 하였는데,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위로는 이미 선조(先祖)께 고하고 아래로는 중외(中外)에 유시하였으니, 의리(義理)가 세워지고 명위(名位)가 정하여졌도다. 홍무(洪武)157)   때 〈의문 태자(懿文太子)의 이자(二子)158)  로 황태손(皇太孫)을 삼았던〉 전례를 조심스럽게 따라 우리 세손에게 동궁의 위호를 정하였으니, 무릇 여러 의식과 절차는 한결같이 상례(常例)를 따르도록 하라. 지금 이후로는 주창이 의탁할 곳이 있으니, 나라의 근본이 크게 정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 원량(元良)이 있으면 천하가 다 바르게 된다.’는 말이다. 아! 이극(貳極)159)  이 다시 바르게 되었으니 지난 달의 마음이 다소 위로가 되며, 동궁(東宮)이 거듭 새로워졌으니 만년(萬年)의 국운(國運)이 길이 굳건하였다.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모두 다 알게 하라."
하였으니, 어제(御製)였다.

 

8월 2일 임진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고, 이방엽(李邦曄)을 승지로 삼았다.

 

동궁의 의장(儀仗)은 세제(世弟) 때의 의장을 사용토록 명하였다. 이때 호조 판서 김치인(金致仁)이 세손의 의장을 다시 만들 것을 청했던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의장이 비록 색깔은 변했어도 할아버지의 물건이다. 그것을 다시 쓴다면 어찌 귀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8월 3일 계사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친히 정사(政事)160)  를 행하여 정홍순(鄭弘淳)을 이조 참판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좌빈객으로, 김양택(金陽澤)을 우빈객으로, 황인검(黃仁儉)을 좌부빈객으로, 정실(鄭宲)을 우부빈객으로, 홍계능(洪啓能)을 자의(咨議)로, 송명흠(宋明欽)을 찬선(贊善)으로 삼았다. 임금이 병조 판서에게 이르기를,
"오늘 친히 정사를 한 것은 다 뜻이 있었으니,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은 다 엄격하게 가려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고, 한광조를 석방(釋放)하고,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은 도정(都政)161)  에 의거하여 승륙(陞六)시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응협(李應協)은 그 일이 지나쳤고, 김광국(金光國)·김면행(金勉行)은 처분이 지나쳤다. 조명채(曹命采)는 국체(國體)를 존중한 바 있고, 윤광소(尹光紹)는 전후로 배척받음이 너무 심하였다. 이만회(李萬恢)는 이미 석방하였는데 대간의 청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모두 석방하고, 이현중(李顯重)도 특별히 석방하며, 김보순(金普淳)에게는 부첨(付籤)162)  의 명을 특별히 정지하라."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윤숙(尹塾)·임덕제(林德躋)를 석방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호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윤숙은 진실로 통분하오니, 가볍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드디어 그 명을 정지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임덕제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니, 감등(減等)하라고 명하였다.

 

윤급(尹汲)을 특별히 판의금부사로 제수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의 하교는 내가 후회한다. 그 마음은 본래 착한 것이었고 또 준론(峻論)도 아니었다."
하였다. 좌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저 중신(重臣)들은 그 전과는 크게 다릅니다."
하자, 마침내 이런 명이 있게 되었다.

 

8월 7일 정유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고, 신은(新恩)을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주강을 행하고 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상로(金尙魯)의 부처(付處)를 특별히 석방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크게 탕척(蕩滌)하였는데, 더구나 대관(大官)을 지낸 자이겠는가? 지난 일은 누가 옳다고 하겠는가마는, 수십 년간 형제가 나를 도와 준 마음을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8월 8일 무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예조 판서·병조 판서를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 부왕(父王)을 뵈었는데, 마치 생시와 같았다. 놀라 깨어나 그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고, 창덕궁으로 나아가 먼저 황단(皇壇)에 참배하고 진전(眞殿)의 재실로 돌아왔다.

 

8월 9일 기해

임금이 옛 홍문관에 나아가 승지에게 감회의 윤음(綸音)을 적도록 명하였다.

 

조영진(趙榮進)을 대사헌으로, 박치륭(朴致隆)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한권(翰圈)163)  을 행하여 유언호(兪彦鎬) 등 16인을 뽑았다.

 

임금이 춘방(春坊)의 입시(入侍)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의 끝없는 많은 일은 오직 국가의 근본을 보호하는 데 있다. 마땅히 각기 마음을 다해 보도(輔導)하고, 위호가 이미 정해졌다 하여 소홀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석강(夕講)은 내가 동궁으로 있을 때에 하던 예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0일 경자

이기경(李基敬)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한림 소시(翰林召試)164)  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집의 박치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지난 일을 끄집어내는 것은 오늘의 조정 신하로는 감히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그 일이 종사(宗社)와 국가에 관계가 있으니, 어찌 가히 침묵하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3일의 처분은 실로 우리 성상의 천만번 부득이한 거조에서 나온 것이지만, 보도(輔導)를 잘못한 자가 분명히 있고 오늘의 일을 양성(釀成)한 자도 분명히 있는데 감히 말하기를, ‘만사는 다 끝났다.’ 하면서 일체를 세자의 죄과로 단정하여 일을 그렇게 양성한 근본을 찾지 않고 시종 처분을 독단(獨斷)한 데로만 돌린다면 장차 나라는 나라 노릇을 못하고 사람은 사람 노릇을 못할 것이며 사람들은 서로 끌고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질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저 두 재상은 보필하는 직책과 사부(師傅)의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어찌 편안하게 다스리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만은, 다만 그 재주와 국량이 모자라고 학식이 천박(淺薄)하여 큰 계책이나 앞을 내다보는 계획은 아예 도외시하고 짐짓 구차스럽게 편안한 것만을 만족한 계책으로 삼아 두 궁(宮) 사이를 왕래하며 하는 말마다 감추었으며 하는 일마다 비밀로 하였습니다. 구윤옥(具允鈺)이 글을 고친 것과 이영휘(李永暉)가 면전에서 거짓말을 한 것들은 모두 시켜서 그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침내 세자로 하여금 한 가지도 정직한 말을 듣지 못하게 하고 한 가지도 착하고 어진 간쟁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아침과 낮에 하는 일은 다 세자를 과실로 인도하는 것이며, 밤낮 경영하는 일은 세자를 잘못된 곳으로 이끄는 것이니 후설(喉舌)165)  의 신하로 하여금 잘못을 덮어주는 것이 습관이 되게 하고 이목(耳目)166)  의 신하로 하여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풍습이 되게 하여, 마침내 천만번 부득이한 처분이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박문흥(朴文興)·박필수(朴弼燧)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이는 바로 임금을 그릇되게 하고 나라를 그르친 신하들이니 모두가 종사(宗社)의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가벼운 죄에 부회(傅會)하여 단지 부처(付處)의 율을 시행하였는데, 겨우 열흘이 지나자 벌써 용서를 받았으니, 형벌을 엄히 하고 법을 신칙한다는 뜻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신은 들으니, 부처된 뒤에도 죄를 자책할 생각은 않고 더욱 방자하고 난폭하여 그 곳의 수령에게 고함을 쳐서 열읍(列邑) 수령들이 두려워 떨었다 하였습니다. 이는 가벼운 유배를 비웃으며 조정을 멸시한 소치가 아님이 없으니, 조재호의 발호(跋扈)함은 이에 비교도 안됩니다. 하나는 보도(輔導)를 잘못한 죄는 이루 다 셀 수도 없고, 오늘의 화를 빚어내게 한 죄는 몇 배가 넘는데도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고 오히려 좌상(左相)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반(朝班)에서 날뛰었습니다. 또 총호사(摠護使)의 임무까지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미 〈고 세자(世子)〉 보도의 직책을 맡았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재궁(梓宮)의 앞을 오고 갈 것이며, 이미 과오(過誤)를 양성했다는 죄를 졌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동궁의 앞에 가서 뵐 것입니까?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하늘이 두렵지 않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가장 가까운 척신(戚臣)인 때문에 혹 동궁에게 보탬이 될까 하여 물리치고자 하지 않으셨던 것이 아닙니까?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이 사람으로 하여금 동궁을 보도케 하여 마치 전날과 같이 한다면 곧 4백 년 종사(宗社)는 반드시 이 사람의 손에서 망하게 될 것이고 또한 척신을 보전하는 방도도 아닌 것입니다.
아! 품계 높은 중신은 비록 외방의 도백(道伯)으로 나가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임금이 계신 대궐에 걸려 있어 슬픔과 기쁨을 같이해야 하는데, 이런 전고에 없던 일을 당해서 진실로 마땅히 경계하여 마지 않고 진면(陳勉)하는 데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도 도리어 예의가 아닌 행동과 옳지 못한 물건으로 반드시 현혹시키려고만 하니, 그 죄상을 논하는 데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 역시 임금을 그르치고 나라를 그르친 신하이며 종사의 죄인입니다. 아! 도성이나 근기(近畿)의 백성들은 그 누구가 13일의 처분이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임을 모르겠습니까마는, 깊은 산골이나 궁벽한 골짜기에 있는 백성들은 혹 자세히 알지 못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근원을 미루어 찾고 뿌리를 추적해서 반드시 이 세 신하가 임금을 그르치고 사태를 양성한 죄를 밝히어 쫓아내는 것을 명확히 보이고 중외에 효유하여, 사도 세자의 황천에 있는 혼을 위로하며 온 나라 신민들이 다 아는 분노에 사의를 표하신다면, 깊은 산속이나 궁벽한 골짜기에 사는 백성이라도 다 환히 이해할 것입니다. 아! 경기의 서쪽 길가의 수령과 병사(兵使)들은 태연히 관아에 그대로 앉아 있어 세자를 무시하는 듯한 죄가 있으니 큰 견책을 받음이 합당한데,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견책이나 처벌이 가해지지 않았으니 전일 대신(臺臣)의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만일 이미 지난 일이니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 조선에는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운 의로움은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조재호(趙載浩)가 몰래 흉모를 꾸미고 왕실을 엿본 것은 실로 무신년167)  의 역적보다도 심하였으니,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하는 대역적입니다. 다행히 먼저 탄로나 비록 왕법에 복주되었지만, 저 목중도(睦重道)와 같은 지엽(枝葉)의 천한 것들에게 먼저 대역의 율을 적용하였는데 괴수인 조재호에게는 어찌 단지 사사(賜死)에만 그친단 말입니까? 수노(收孥)의 율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는데 아래에서는 청한 바 없고 위에서는 신칙한 바가 없으니, 신은 이에 더욱더 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조지명(趙祉命)·조재만(趙載萬)이 설사 쓸 만한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추천받을 만한 차례가 아니니, 잠시 역옥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들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그런데 바야흐로 대역을 미처 마무리하기도 전에 역적 괴수의 지친을 급급하게 발탁하여 혹은 낭서(郞署)에 복직시키고 혹은 수령으로 승품하였으니, 이러한 정사(政事)의 격식은 전고에 없었던 바입니다. 이는 오로지 기강이 퇴폐해져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그 때의 전조 당상(銓曹堂上)에게 어찌 견책의 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종명(李宗明)은 먼 지방 사람으로서 자리에서 나와 일을 말한 것은 비록 취할 만한 것이 있다고는 하나, 원 글은 보지 못하였지만 대략 들은즉 그 내용이 패악스러워 가리지 않고 나온 말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 이처럼 패악스러울 수가 없으며 그 글을 거절당한 후에도 후원(喉院)을 들락거리며 승선(承宣)을 모욕함이 한정 없었다고 하니, 조정의 진신(搢紳)들이 서로 공경하는 도리가 진실로 이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 후원은 오로지 가리고 덮는 마음만을 일삼아 혹 위에 상달될까 겁을 내어 끝내 아뢰지 않았고 단지 다른 일에 의거해서 억지로 낭서의 직을 체차시켰습니다. 이종명의 해괴한 거조와 승선의 기만 행위는 모두 잘못된 것이니,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전 정언 이종명은 대간의 망을 개정(改正)하고, 당시의 승지도 또한 삭직하라는 명을 결단코 말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읽도록 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마땅히 오르내리시는 선왕의 혼령께 사과해야 하겠다."
하고, 뜰 아래로 내려가 엎드려 아뢰기를,
"이러한 박치륭의 일이 있었던 것은 모두 신이 불충하고 불효한 탓입니다."
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과 우의정 윤동도(尹東度) 등이 울면서 내전(內殿)으로 들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교리(校理) 강필리(姜必履)가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우리 선왕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된다.’ 하였는데, 이 깊은 밤에 이슬을 맞으며 차가운 뜰에 엎드려 있으니, 어찌 오르내리시는 선왕께 근심을 끼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신만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죽을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고, 양쪽에서 어깨를 부축하여 일으키니, 임금이 비로소 재실(齋室)의 전헌(前軒)에 올라서 아뢰기를,
"이는 장차 조선을 그르치려는 징조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2품 이상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가? 내가 방금 선왕께 사과하느라 이슬을 맞고 뜰에 있었는데, 승지가 곧바로 두 상신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정원에 있는 승지를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대신이 내전(內殿)으로 들기를 힘써 청하니, 임금이 파루(罷漏)한 후에 비로소 내전으로 들어왔다. 임금이 두 대신이 궐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승지에게 명하여 같이 들어오게 하였고, 다시 예조 판서에게 전유하여 같이 들어오게 하였다. 전 집의 박치륭을 면관(免官)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흑산도로 천극(栫棘)하라고 명하였다가 하교하기를,
"내가 박치륭을 한 번 문초하려 하였으나 명색이 언관이니, 복정(復政)하는 처음에 형문(刑問)을 다시 열 수는 없다. 이것도 또한 세손을 너그럽게 하는 방도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만약 오늘날 북면(北面)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나이 늙어 복정하는 때에 어찌 감히 날뛸 수 있는가? 윤재겸(尹在謙)의 소장을 주워 모아 대신에게 앙갚음하고 조정(朝廷)을 경알(傾軋)하여 진신(搢紳)들을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려는 계획을 품고 있으니, 그 마음을 예측할 수 없어 차마 바로 볼 수가 없다. 동궁에게 정호(定號)한 뒤로 처음 있는 소장(疏章)인데 이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言及)함이 없었으니, 이미 신하로서의 분수가 없다고 하겠다. 13일 이전에는 이것을 할 수 있는데도 여러 대각(臺閣)들이 하나도 하지 않았다. 추율(追律)하자는 청을 금령(禁令)이 있은 뒤에 어찌 감히 다시 아뢰겠으며, 또 13일 이전 일을 도대체 어떤 심보를 가졌길래 동궁에게 정호(定號)한 뒤에 차마 끌어댈 수 있단 말인가?
그 소장 중에 ‘세자의 아래 죄라는 한 글자로써 단정했다.’고 하였는데, 나도 13일 처분할 때에 차마 그 글자를 쓰지 못하였거늘 그가 감히 대신을 무함하고 방자하게 썼다. ‘돌렸다.[歸之]’는 두 글자는 그가 스스로 한 것인데, 비록 복위하기 전이라도 신자(臣子)로서 감히 장주(章奏)에 넣을 수 없는 것이어늘, 더구나 복위한 뒤이겠는가? 이는 한(漢)나라 법에 이른바 ‘크게 불경하다.’는 것이니, 마땅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들이게 하여 행례(行禮)를 치른 뒤에 친히 신문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가 비록 무상(無狀)한 자라 하더라도 명색이 간관(諫官)인즉, 삼가 살펴 신중히 하는 것이 마땅하니, 그런 일을 후손에 전할 수는 없다. 비록 십분 참작하여 먼저 뜰 앞에서 자책하고 선조께 사죄하였으나, 그 제방(隄防)을 엄하게 하고 의리를 바르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전례에 따라 그냥 둘 수 없다. 박치륭은 우선 체차하고 영원히 서인(庶人)으로 삼아 흑산도로 천극 정배하라. 그 소장을 나라 안에 머물러 두면 사도 세자가 반드시 지하에서 눈물을 흘릴 것이니, 정원(政院)에서 곧바로 뜰 앞에서 불태우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박치륭은 나이 늙고 집안이 가난했으며 사람됨이 강직하고 개결(介潔)하여 무리에서 초월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말이 임금을 거슬러 멀리 유배되었다."


【태백산사고본】 68책 10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09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역사-사학(史學)


[註 165] 후설(喉舌) : 승지.[註 166] 이목(耳目) : 헌부.[註 167]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사신은 말한다. "박치륭은 나이 늙고 집안이 가난했으며 사람됨이 강직하고 개결(介潔)하여 무리에서 초월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말이 임금을 거슬러 멀리 유배되었다."

 

임금이 좌의정 홍봉한의 상직(相職)을 허부(許副)하였다. 임금이 두 상신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손을 잡고 위로하니, 판부사 정휘량(鄭翬良)이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당한 바는 비록 좌상과 다르지만, 차라리 죽어 아무것도 모르고 싶습니다."
하였고, 홍봉한이 울면서 아뢰기를,
"세자의 아래 ‘죄’라는 한 글자는 쓸 수 없는 말이니, 신은 진실로 애통하여 웁니다. 게다가 ‘무슨 낯으로 동궁을 뵙느냐’는 말에 이르러서는 뜻이 매우 깊으니, 이는 오늘날 신이 아뢸 수 있는 말이 아니오나, 장차의 깊은 근심거리입니다. 신이 우상에게 말하기를, ‘이 한 몸이 배척당하는 것은 족히 애석할 것이 없으나 세도(世道)를 위해 근심한다.’ 하였습니다. 소신이 비록 죽더라도 어찌 전하께 누를 끼치겠습니까? 염의(廉義)를 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홍봉한이 이어서 상직을 면직하기를 바라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과 혜빈(惠嬪)이 있는데, 어찌 버리고 떠나려는가?"
하매, 정휘량이 말하기를,
"이는 성상께서 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신만이 말하기를,
"이 말은 뜻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내가 깨닫는 바가 있다."
하고, 이어서 좌상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내가 허부(許副)하겠지만, 경이 멀리 떠나지는 않겠는가?"
하니, 홍봉한이 대답하기를,
"신이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마땅히 명을 좇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그대로 따랐다.

 

윤동섬(尹東暹)·정광한(鄭光漢)·홍자(洪梓)를 승지로 삼았다.

 

8월 11일 신축

임금이 진전(眞殿)의 재실에 나아가 소시(召試)의 과차(科次)를 정하여 이계(李溎) 등 5인을 뽑았다. 동궁이 시좌(侍坐)하였는데, 임금이 동궁에게 시권(試券)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합(盍)’ 자의 뜻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논어(論語)》의 ‘어찌 각기 제 뜻을 말하지 않느냐?[盍各言其志]’의 주(注)에 ‘어찌 아니하느냐?[何不]’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즙희(緝熙)’ 두 글자의 뜻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대학(大學)》에 ‘아! 끊임없이 빛나도다. 공경하지 않음이 없으니 있는 바에 편안하도다[於緝熙敬止]’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탕반(湯盤)’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탕왕(湯王)의 반명(盤銘)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석촌음(惜寸陰)’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학(小學)》 도간(陶侃)의 말에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기뻐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찬(饌)을 내리고 말하기를,
"이것은 세손이 가지고 온 것이다."
하였다.

 

8월 12일 임인

임금이 진전(眞殿) 재실에 나아갔다. 판부사 홍봉한이 말하기를,
"조재호(趙載浩)의 일은 마땅히 《천의소감(闡義昭鑑)》처럼 한 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아! 만고(萬古)에도 없는 때를 당해 만고에 없던 일을 행하였는데, 이는 종사(宗社)와 국가를 위한 큰 의리(義理)가 되는 것이니, 곧 하나의 의에 합당한 것이다. 저 조재호의 일이 마침 이때에 있었으니, 그때 여러 공초 중에 이른바 ‘보호한다.’, ‘불리하다.’는 말은 진실로 천만 뜻밖이다. 아! 13일 이전에는 무슨 보호할 일이 있으며 무슨 불리한 일이 있단 말인가? 이는 바로 조재호의 무장(無將)168)  한 마음이니, 아! 저들의 세상에 어찌 두 조재호가 있단 말인가? 이후로 사람들이 혹시 이것을 가지고 조작하고 의심하여 현혹시킨다면, 이는 정말 두 마음을 가진 자이니, 조재호보다도 우심한 자이다.
한번 당파를 없앤 뒤로 옛 생각에만 골몰한 무리들이 할 일이 없어 적막한 가운데 이런 기회를 맞아 마치 기화(奇貨)를 얻은 듯이 여겨, 둘을 가지고 하나로 만들고 앞의 것으로 뒤에 합하려 하니, 그 흐르는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이에 《천의소감》의 예에 의거하여 《수의편(垂義編)》이라 이름하여, 문형(文衡)169)  과 양관 제학(兩館提學)을 당상으로 삼고, 교리 강필리(姜必履), 수찬 이재간(李在簡), 문학 김상익(金相翊)을 낭청으로 삼아 금오(金吾)의 문안(文案)을 취하여 편성한 뒤 대신에게 나아가 교정하게 하고 이 하교(下敎)로서 서문으로 삼아 첫째 권의 머리에 실리려 한다."
하였다. 임금이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교정 당상·낭청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것으로써 말하고 싶은 것은 또한 세 단계가 있습니다. 그때에 영빈(暎嬪)께서 아뢴 것은 오로지 전하를 위한 것이었으니 성상께서 단행하시는 것이고, 그 다음은 신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며, 그 다음은 여러 신하들이 받들어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장래의 인심이 오늘 전하의 앞에 있는 것과는 다를 것이 염려되니,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방도를 먼저 마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다시 홍봉한(洪鳳漢)을 좌의정에 임명하였다.

 

8월 13일 계묘

임금이 진전(眞殿) 재실(齋室)에 나아가 《수의편(垂義編)》의 서두에 있는 윤음(綸音)을 개서(改書)할 것을 명하였다. 지난번 국안(鞫案)을 안험(按驗)한 대신들에게 문안(文案)의 아래에 총령(總領)하여 논단(論斷)할 것을 명하였다.

 

8월 14일 갑진

김효대(金孝大)를 승지로 삼았다.

 

밤에 임금이 진전에서 예를 행하고,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8월 15일 을사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가 예를 행하고, 익릉(翼陵)에 나아가 전배하였으며, 이어서 소녕원(昭寧園)에 나아갔다. 임금이 고양군에 도착하여 백성들을 불러 농사의 형편을 물었다.

 

8월 16일 병오

원소(園所)에서 예를 행하고 소회의 윤음을 내렸으며, 밤에 환궁하였다.

 

8월 19일 기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서 조강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판윤 홍상한(洪象漢)의 파직을 명하였다. 이때 홍상한이 나아가 말하기를,
"소나무 가지가 껍질이 벗겨져 말라 죽는 일이 많으니, 청컨대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申飭)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참(常參)은 사체(事體)가 특별히 다른 것인데, 판윤(判尹)이 겨우 소나무 가지 따위의 일로 나와 아뢰는 것이 옳은가?"
하고, 드디어 파직을 명하였던 것이다.

 

다시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유신 강필리(姜必履)와 이재간(李在簡)에게 이르기를,
"주자(朱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동안(同安) 승사(僧舍)에 있다가 종소리를 들으니, 홀연히 마음이 일어나 달리는 듯하였다.’ 하였는데, 내가 전번에 연을 타고 종로를 지나다가 머물러 종소리를 듣고서 들뜬 생각은 불러 일으켰으나 달리는 듯한 일은 없었다. 이것이 과연 도(道)가 이루어지고 덕(德)이 세워져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삭연(索然)하여 환기시킬 사물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하니, 강필리와 이재간이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전하께서 본원(本源)의 힘을 함양(涵養)하신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8월 20일 경술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거둥하여 추수(秋收)하는 것을 관람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游冠)과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먼저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에 전배한 뒤에 단(壇)에 나아가, 음악을 연주하라 명하였다.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앞에 나와 적전(籍田)의 추수 관람을 고하고 백인환(白仁煥)으로 하여금 도량(稻粱) 베는 것을 고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적전은 농민으로 하여금 베고 거두게 함이 옳다. 기민(耆民)은 20명인가?"
하니, 윤동섬(尹東暹)이 말하기를,
"40명이니, 농민과 합하여 80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자성(粢盛)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이 옷을 입었다. 내가 기미년170)                  에 처음 밭갈고 계유년171)                  에 두 번째로 해 보았는데, 그 때에 전답은 처음이었고 지금은 1백 묘(畝)의 밭이 되었다. 당시에는 자성에 쓸 줄 몰랐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였다. 경적사(耕籍使) 김치인(金致仁)이 추수한 기장을 바쳤고, 승지        정광한(鄭光漢)이 받들어 향안(香案) 앞에 바치니, 임금이 또 자리에서 내려가 무릎을 꿇고 받았으며, 경적사가 또 추수한 벼를 바치니, 임금이 또 자리에서 내려가 무릎을 꿇고 받았다. 이세택(李世澤)이 말하기를,
"정전법(井田法)172)                  은 천하에서 거의 없어지고 오직 우리 나라의 평양(平壤)에만 홀로 기자(箕子)가 만든 정전의 제도가 남아 있으나 지금 거의 없어지려 합니다. 이제 이 적전(籍田)을 만약 평양 정전(井田)의 유제를 모방해서 한다면 기자의 법이 비록 피국(彼國)에서는 폐해졌어도 이쪽에서는 행하여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곳에서도 또한 그 제도를 행할 수 있겠느냐?"
하니,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지세(地勢)가 좁아서 그 제도를 행하기에는 어렵습니다."
하매,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임금이 늙은 백성들에게 찬(饌)을 내리고 가장 나이 많은 자에게는 무명을 하사하였으며, 또 찬을 내려 주었다. 여러 신하가 예를 마치자 환궁하였다.

 

8월 21일 신해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한 뒤에 이어서 효장묘(孝章廟)와 의소묘(懿昭廟)에 나아가 친히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돌아왔다.

 

임금이 추수를 보고 돌아올 때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이 길가에서 지영(祗迎)하는 것을 보고 승지에게 명하여 거자(擧者)의 명부를 가져오게 하고 이날로 경희궁(慶熙宮)에서 과거를 설행하였다. 대제학에게 명하여 시취(試取)하도록 하였는데, 으뜸을 차지한 민광엄(閔光曮)이 강(講)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회시(會試)에 나가도록 명하였다.

 

8월 22일 임자

남옥(南玉)의 찬배를 풀어 주도록 명하였는데,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아룀으로 인한 것이었다.

 

8월 23일 계축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임금이 좌의정 홍봉한의 아룀으로 인하여 전 호서 감사(湖西監司) 윤동섬(尹東暹)의 파직을 명하였는데, 호서의 군읍(郡邑)이 결전(結錢)과 어염세(魚鹽稅)를 기한 내에 내지 않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심원(李心源)을 승지로 삼았다.

 

8월 24일 갑인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경현당(景賢堂)에서 유신(儒臣)을 소견하고, 〈《시경(詩經)》의〉 상체장(常棣章)을 강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이 경묘(景廟)의 기제일(忌祭日)에 치재(致齋)하는 날 상체의 시를 강하도록 명하여 슬퍼하는 뜻을 붙였으니, 천성(天性)에서 우러나온 동기간의 우애(友愛)는 수많은 제왕(帝王)에서 뛰어났다."


【태백산사고본】 68책 100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1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이 경묘(景廟)의 기제일(忌祭日)에 치재(致齋)하는 날 상체의 시를 강하도록 명하여 슬퍼하는 뜻을 붙였으니, 천성(天性)에서 우러나온 동기간의 우애(友愛)는 수많은 제왕(帝王)에서 뛰어났다."

 

8월 26일 병진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강도(江都)의 쌀 1만 석과 남한 산성의 쌀 1만 석을 호조로 이송(移送)하여 경비에 이어 쓰도록 명하였으니,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아룀으로 인한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동궁에게 정호(定號)하였으므로 사체가 자별(自別)하니 마땅히 심제(心制)의 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니,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예경(禮經)》에는 어떠한지 신들이 미처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번저(藩邸)에서 대통을 이었다 해도 일이 자별(自別)한 것인데, 더구나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이었음에랴. 밖에 있는 유신(儒臣)들에게 문의(問議)함이 옳다."
하였다.

 

좌의정 홍봉한이 임금께 직접 차자(箚子)를 바쳤다. 임금이 홍봉한에게 그 차자를 읽어 아뢰도록 명하였는데, 말하기를,
"신이 상신(相臣)의 직책을 어찌 다시 무릅쓸 이치가 있겠습니까? 직에 나아가고자 하면 염치가 크게 무너지고, 물러나고자 하면 은혜를 설만하게 되니, 방황하고 주저하여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마침 사세가 급박하여 부득이 명령에 응하였으나 정석(鼎席)173)  에 얼굴을 들고 있기가 다만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신의 거취(去就)는 신이 자유(自由)로 하지 못하니, 그 본심을 궁구해 보면 공(公)을 위하고 나라를 위할 뿐입니다. 천백 가지 기괴(奇怪)한 것이 있어 깜짝 놀랄 일이 있다해도 오직 성상께서 위에 계시니 신은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마는 다만 신이 깊이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근심이 깊은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간절하여 밤낮으로 가슴에 맺혀서 불안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관계된 것이 지극히 중하여 말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서 머뭇거려 지금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신의 죽을 죄입니다.
아! 13일의 일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무신년174)   이후 나라의 근본이 오랫동안 비어 온 나라가 의지할 바가 없더니 을묘년175)   봄에 사도 세자(思悼世子)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천품(天稟)이 뛰어나시고 덕과 기량이 관후하여 성상께서도 걱정이 없으시고 신·인(神人)의 기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혼례(婚禮)가 이루어지고 나서는 전하께서 나에게 훌륭한 아들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신도 사모하고 받드는 정성이 다른 사람에 비해 자별하였습니다. 서무를 대리(代理)함에 미쳐서는 전하께서 또 나에게 훌륭한 아들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신의 옹축(顒祝)하는 마음이 또한 남보다 갑절은 되었을 것이며, 온 나라 신민들이 누가 목을 늘이고 세자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는 정성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10여 년 이래로 불행히 병이 있어 집증(執症)할 수가 없었으며 또한 지적할 만한 형상도 없어 병아닌 병이 더했다 덜했다 끝이 없었고, 조정에 임하여 정신을 차리면 의식(儀式)에 실수하지 않는데, 내전(內殿)에 있어 임의로 맡겨두면 실로 숨겨진 근심이 많았습니다. 성상께서 몇 번이나 가르침을 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조정 신하들이 사이사이에 경계의 말씀을 드려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된 것이니 이것이 어찌 본심이겠습니까? 신은 그 사이에 날마다 애태우는 것만 일삼아 위로 성상을 기만하려 한 것이 아닌데도 때로는 스스로 덮어 가리게 되고, 허물을 가리려 한 것이 아닌데도 때로는 스스로 덮어 가린 적도 있었습니다. 끝내 목을 찌르고 배를 갈라 옛사람처럼 죽음으로 간하는 의로움을 본받지 못했으니 첫째도 신의 죄요, 둘째도 신의 죄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아직 혈기(血氣)가 왕성하니 지금은 비록 이와 같아도 1, 2년이 지나면 하늘의 도우심을 받고 신명(神明)의 도움을 입어 환하게 탁 트여 본래의 성품이 나타나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아! 점점 도가 지나쳐 마침내 감히 말할 수도 없고, 차마 말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러, 우리 성상으로 하여금 13일의 처분이 있게 될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아! 그날 성상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신에게 유시하시기를, ‘세자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다. 경은 오로지 병 때문이라고 하나 나는 오로지 병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병도 또한 광기(狂氣)이며 광기도 또한 병이니 병과 광기 때문에 온전한 도리를 잃고 변(變)도 없잖아 있어서 점차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내가 몸소 말하기 어려운 위태로움이 경각(頃刻)에 닥치게 되었으니 진실로 두려움이 느껴진다. 나의 몸이야 비록 돌아볼 것이 없으나 종사와 국가에는 어찌 하겠으며 백성들에게는 어찌 하겠는가? 혹시 정리에 구애되어 참고 견디어 결말을 짓지 않고 그 말로 하기 어려운 변란이 일어나는 데 맡겨둔다면 동방의 신하와 백성들이 장차 그 질병과 광기(狂氣)의 소치(所致)라고 하여 용납할 수 있겠는가? 이미 용납하지 못한다면 사리(事理)로 논하더라도 장차 그 뒤에 일이 어느 지경에 이르겠는가? 그런즉 삼종(三宗)176)  의 혈맥은 보전하지 못할 것이요, 4백 년 종사도 또한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이러한 사세를 돌아보건대, 가히 법을 굽혀 보호할 수 있는데도 보호하지 않았다면, 지극한 정리에 있어서 어찌 이럴 수가 있으며, 또 비록 보호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선처(善處)할 도리가 있는데 선처하지 않았다면, 상리(常理)에 있어서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변란의 기미가 이미 급박하고 위태로운 염려가 극에 달했으니 부득이 만고에 없던 일을 행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변고를 느슨하게 하고 위험을 구제할 수 없었으니, 내가 어찌 자애롭지 않아서 그랬겠으며 내가 어찌 참지 못해서 그랬겠는가? 진실로 종사를 위한 것이요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내가 처분을 내린 뒤에는 이른바 말로 하기 어려웠던 변란은 이미 할 말이 없으나 내 몸이 편안함을 얻었고 종사가 안전함을 얻었으며, 뒷날 나를 이어 국가를 다스릴 사람도 그의 자손이다. 설령 가버린 사람이 그 몸을 위해서 따진다 하더라도 살아서 저와 같이 될 바에는 차라리 죽어서 이와 같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또 고유(固有)한 본심으로 논하더라도 오직 내 몸에 근심 없음이 다행하고 종사를 의탁할 데가 있는 것이 기쁘니 어찌 그 한 몸의 불행을 한하겠느냐? 비록 그 자손일지라도 이 어려운 위기를 마음 속으로 생각해보고 부득이한 고심(苦心)을 깊이 유념해 보면 속으로는 애통함이 있겠지마는 도리로써 헤아려 본다면 오늘의 처분을 감히 나무라지는 못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만세의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하늘의 법도와 땅의 올바름을 정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셨으니, 아! 왕의 말씀이시여, 정녕하고 간곡하여 경도(經道)와 권도(權道)가 중용을 얻고 의리가 바름을 얻었습니다. 신은 창황하고 두려운 가운데서도 울면서 말씀을 받들어 듣고 지금도 엄숙히 외고 있습니다.
일이 지나간 후에 전하께서 빨리 위호를 복구하라는 명을 내리시고 이어서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푸셨으며, 혼궁(魂宮)의 예식과 묘소(墓所)의 의식에도 국제(國制)를 적용하여 조그마한 흠절도 없게 하셨습니다. 장례에 임하시어 제문을 지으시고 신주(神主)를 써서 소회(所懷)를 펴셨으니, 이는 대개 자손을 위하여 법을 굽혀 은의(恩義)를 둘 다 온전히 하려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에 신은 더욱 감격을 못이겨 감탄하였습니다. 아! 성상께서 나라를 위하는 염려는 깊고도 멀며, 성상의 인자하신 덕의(德義)는 높고도 지극합니다. 신이 만약 받들어 선양(宣揚)하고 밝게 내보이는 바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이는 전하를 저버리고 신의 마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아! 성상의 이번의 거조는 진실로 부득이한 것이었고 그날의 교시(敎示)도 역시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비록 우매하나 오히려 능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고, 조정의 여러 신하들도 신과 마음이 같았으며, 온 나라의 백성들도 조정의 신하들과 마음이 같았을 것입니다. 무릇 오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자들은 또한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마는 세상의 변화는 무궁하고 인심은 예측하기 어려우니, 혹시 시간이 흐르고 일이 지나간 후에,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기회를 틈타는 데 급급하고 화를 옮기는 것이 교묘하여 오늘의 사실을 가리우고 별다른 논의를 창출해 내어 감히 성상의 처분을 지적해서 뒷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킨다면 우리 종사와 국가를 여지(餘地)없이 무너뜨릴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 자들은 기사년177)  의 남은 흉적의 무리가 아니면 곧 무신년178)  의 여당(餘黨)들이니 그 흉악한 심장은 진실로 논할 나위도 없습니다.
신이 염려하는 바는, 이치를 보고도 밝게 알지 못하고 수시로 흔들리는 자가, 성상의 이 조치가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왔다고는 하나 오히려 유감(遺憾)이 없을 수 없으며, 여러 신하가 뜻을 받든 것도, 비록 어찌할 수는 없었으나 오히려 책임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지 않을 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인정(人情)이나 천리(天理)의 밖에서 그릇된 논의를 고집하며, 위로는 견제하고 아래로는 협박하는 사이에 횡의(橫議)를 주창하면서 곧바로 ‘생부(生父)179)  를 위하여 마땅히 변명해야 한다.’는 말로써 종용하고 현혹시킨다면 그 추세를 막기 어려울 것이고 그 말이 마음에 쏠려 들기가 쉬울 것이니, 오늘날 전하의 신하들은 일망 타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면 신은 늙어서 이미 죽게 될 것이고 설사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먼저 배척 당할 것이니, 비록 의지하여 구제하고 바루려 해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즉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스스로 전하를 등지는 데로 돌아가는 것인데, 어찌 전하를 배신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고 도리어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자손에게 정성을 다하는 자가 되겠습니까? 비록 그 본심이야 흉적들이 앙갚음하는 마음으로 난(亂)을 선동하는 것과는 다르나 필경은 나라에 화를 미치게 될 것이니, 장차 모두 같은 형적으로 돌아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진실로 기운이 움츠러들고 마음이 떨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날 처분하던 때에 어찌 좌우에 여러 신하들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전하의 마음을 알고 전하의 명을 받든 것은 신입니다. 대개 전번에 초조하고 절박한 단서는 한 둘에 그치지 아니하여 궁궐 안에는 경색(景色)이 황황(遑遑)하며 여염 사이에서는 떠도는 말이 두려웠었습니다. 진신(搢紳)과 사대부에 이르러서는 들은 것이 상세하고 소략한 차이가 있고 아는 것도 얕고 깊은 차이가 있었으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은 중외(中外)가 마찬가지였는데, 그날 전교가 있은 뒤에 비로소 확연히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신은 처한 바가 달라 경험한 바도 많았는데, 인명(人命)이 서로 이어져 울부짖는 데에 마음이 놀랐고 여러 사람의 들끓는 감정이 그칠 바 없음에 낙담하여, 안으로는 귀천(貴賤)이 없고 밖으로는 높고 낮음이 없이 신이 이들을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허다한 사단과 허다한 세월 동안 가슴을 치지 않으면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근심이 늦춰지면 차라리 머리를 풀고 산에 들어가기를 원하였고 비통이 극에 달하면 곧바로 물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고자 하였으나 신이 능히 이렇게 하지 못하고 부끄럽게도 구차히 살아왔습니다. 이는 한갓 죽는 것이 필부의 고집스러움이 될 뿐만 아니라 진실로 크고 작은 우려와 책임이 신의 한 몸에 있으니, 신이 없다면 더더욱 조금이라도 믿을 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이렇게 말하기 어려운 변란을 당하고 이렇게 난처한 경우에 처했을 때 옛날의 대신이라면 어떻게 조처했을 지 모르겠지만, 성상께서 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니 신은 대의(大義)가 있는 바에 다만 성상께서 계시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성상께서는 울며 결단하셨고 신은 울면서 따랐습니다.
아! 사도 세자가 친히 믿을 사람이라고는 신만한 이가 없었고, 사도 세자는 내가 모시는 임금의 아들이니, 신이 어찌 전하를 섬기는 마음으로 사도 세자에게 충성하지 않으려 했겠습니까? 옛날에도 태자를 위해서 죽은 자가 있었는데, 그때의 일과 정상이 이토록 망극한 데에 이르지 않았더라면 신이 대궐의 섬돌에 머리를 부수어 죽음으로써 잇는 것을 어찌 애석하게 여기겠습니까? 다만 잡은 바가 지엄(至嚴)하고 명을 받들기에 겨를이 없어서였으니, 이 어찌 사도 세자를 잊어서 그런 것이었겠으며, 한번 죽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한스러운 것은 단지 신이 배우고 아는 바가 노둔하고 운명이 기구(崎嶇)하므로 말미암아 처음에 바른 도리로 보도(輔導)하지 못하고 마침내 이런 사변(事變)이 망극한 데에 이르렀으니, 이 몸이 더욱 부끄럽고 슬퍼서 차라리 죽어 아무 것도 모르고자 하나, 앞날의 근심이 다시 또 여러 가지로 마음을 애태우니 신의 정경은 한탄스럽고 또 애처럽습니다. 신의 한결같은 이 마음은 저 하늘이 위에서 굽어보시고 귀신이 곁에서 질정(質正)하니, 천만년 뒤에라도 또한 반드시 오늘의 불행을 슬퍼하고 신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헤아려 줄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건대 신은 바깥의 신하이니 족히 말할 바가 못됩니다만, 또한 안에서 말미암아 바깥을 깨우칠 수가 있으니, 아! 영빈(暎嬪)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어머니이십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이 모두 같지만 부인(婦人)은 더욱 심한 것입니다. 사도 세자를 낳아 길러 세자의 지위에 올랐으며 또 뒷일을 맡아 부탁할 다른 아들도 없었으니 그 자애스럽게 보살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사세가 말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르렀으나 부득이 전하를 위하여 울면서 고하였으니 대의(大義)를 당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끊는 것은 남자도 하기 어려운 바를 부인으로서 이를 해낸 것입니다. 성상을 보호하고 종사(宗社)를 편안케 한 그 지극한 정성과 통달한 식견은 진실로 후세에까지 내세울 말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혜빈(惠嬪)과 세손 이하 모두가 온전히 편안함을 얻은 것은 실로 다 우리 성상의 지극하신 덕을 힘입은 것인데, 성상의 덕을 우러러 본받아 좌우에서 묵묵히 감싸준 것은 또한 누구의 힘입니까? 마땅히 끊을 것은 끊고 마땅히 사랑할 것은 사랑하여 양쪽이 다 그 올바름을 다했으니 사람들이 누가 그 사이를 이간(離間)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있어 스스로 사도 세자를 위한답시고 온갖 방도로 오늘날의 잘못을 찾는다 해도 차마 사도 세자를 낳은 이에게까지 배척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 그때를 당하여 신은 명을 받들고 혜빈(惠嬪)을 뵈었는데 혜빈이 세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처로서 이런 경우를 당하고, 너는 자식으로 이런 경우를 만났으니, 다만 스스로 운명을 슬퍼할 뿐이다. 장차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허물하겠느냐? 또 나와 네가 지금까지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상 때문이며 우러러 의지하고 목숨을 맡길 분도 오직 성상뿐이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정성스럽게 성상의 뜻을 받들어 더욱 스스로 격려하여 어질게 되고 성스럽게 된다면 이것이 성은(聖恩)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것이며,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도리도 바로 여기에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말이 슬프고 애절하여 곁에서 듣는 데도 애처로왔는데, 털끝 만큼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진실로 전하의 수신 제가(修身齊家)하신 효험이 나타난 것입니다. 비록 슬프고 애통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 가운데서도 사랑하고 효도하는 독실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신(臣)이 전하의 가법(家法)이 처하는 바에 따라 더욱 빛남을 흠앙(欽仰)하는 바입니다. 혜빈의 오늘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훗날 세손의 마음을 가히 알 수 있으며, 무릇 전하의 신하와 전하 신하의 자손들도 또한 그 사이에 한마디라도 별다른 의논이 용납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리(義理)는 단지 한쪽 모퉁이인 청구(靑丘)에 밝게 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짐이 없을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 이런 처분이 계셨으나 애통해 하는 마음이 있었고, 영빈(暎嬪)이 차마 숨기지 못했으나 애통해 하는 마음은 있었으며, 신과 조정 신하들이 명을 받들었으나 애통해 하는 마음은 있었으니, 우리 나라의 백성들이 그 누가 군신 상하 모두가 애통해 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애통해 하는 것은 애통해 하는 것이고 의리(義理)는 의리이니 사사로운 애통으로 인하여 공적인 의리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비록 성인(聖人)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또한 이 말은 바꿀 수 없습니다. 지나간 사첩(史牒)을 두루 살펴보건대, 지극히 위태롭고 지극히 어려운 것이 지금처럼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성상께서 조용히 운영(運營)하시고 변통하여 백성의 떳떳한 도리가 장차 끊기려 하다가 다시 이어지고 나라의 형세가 거의 위태롭다가 다시 안정해져 한 때의 권도를 행하여 만세(萬歲)의 대통(大統)을 이었으니, 진실로 전하께서 한 바가 평범한 데서 만 갑절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오늘이 오늘이 됨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하가 친히 겪으신 바이니, 신이 다시 전하의 앞에서 아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후일 이 일을 논하려 한다면 정말 차마 못할 것이요 감히 못할 일입니다. 신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다른 신하이겠습니까? 지금 대신(大臣)의 지위에 있는 사람 중에서 신의 나이가 약간 적은데 외람히 관직이 높아 근심과 두려움을 여러 번 겪다보니 전신은 혼미해지고 몸은 쇠잔해졌으니, 얼마 안에 아침 이슬처럼 먼저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세월은 쉽게 지나 직접 보고 들은 자들은 점점 멀어질 것이니, 혹시 간사한 소인배들이 그 틈을 타서 꾸미고 얽어 전하의 큰 처분을 가리워서 나타나지 않게 하면 졸지에 세도(世道)의 해독이 무궁하게 되고 종사와 국가는 장차 어느 지경에서 탈가(稅駕)180)  하게 될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일마다 염려되지 않음이 없으며, 생각마다 지극하지 않음이 없어서 반드시 지금에 미쳐 통렬히 진달하고자 하여 이에 감히 간담(肝膽)을 털어 놓고 목욕 재계하고 차자(箚子)를 지어 눈물을 흘리며 올리니, 대개 당세(當世)에 성지(聖旨)를 밝히고 뒷세상에 분란의 근원을 막고자 하는 바입니다. 신을 아는 것도 여기에 있고 신을 죄주는 것도 여기에 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연람(燕覽)하시어 밝게 비지(批旨)를 내리시고, 이어서 이 차자를 사관(史官)에게 맡기어 천고(千古)의 징표로 삼으소서. 아! 현실(玄室)이 이미 닫혔고 만사가 모두 끝났으니, 지난 일을 끄집어 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만 안위(安危)와 관계 있는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굽어 보면서 목이 메어 이를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비답을 내리기를,
"신축년181)   이후로 어렵고 고된 일을 겪었으며 견디기 어려운 일을 만났는데, 머리에 사모를 쓰고 허리에 관대를 띠고 있는 자는 교목 세신(喬木世臣)182)   아닌 자가 없었으니, 만약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생각해서 동인 협공(同寅協恭)해 나간다면 비록 나라에 원한을 품은 무리들이 있다 하더라도 제 스스로 마음이 녹아버릴 것이고, 비록 효경(梟獍)183)  과 같은 무리들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딴 마음을 내겠는가? 내가 비록 덕이 없고 의리를 잘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13일의 일은 종사와 국가를 위한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의(義)로써 은혜를 절제(節制)한 것이니, 이는 바로 일에 수응(酬應)하고 나면 나는 예전과 같이 〈태연한 데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함이 있었는데 어찌 다시 끄집어 내겠는가? 진실로 내가 친애(親愛)에 빠져 어두웠기 때문이 아니다.
나라에 아무 일도 없을 때 태어나 조금도 어렵고 고된 것을 몰랐으므로 《상훈(常訓)》·《훈유(訓諭)》·《자성편(自省編)》·《심감(心鑑)》·《정훈(政訓)》 등의 책은 이로 인하여 지은 것이다. 그러나 능히 몸으로써 가르치지 못했으니 어찌 효과가 있었겠는가? 처음에는 가르침을 받아들여 깨닫는 것이 많았는데 재작년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했다. 비록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마치 보고 듣는 것과 같았으니, 등불 아래 앉아서 다만 마음을 태우고 눈물을 삼키며 구름만을 바라보았다. 〈은(殷)나라〉 태갑(太甲)이 저지른 바는 아형(阿衡)184)  을 따르지 않은 것에 불과하였는데도 오히려 내쫓았는데, 하물며 아비된 자가 오히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어찌 내 한 몸만을 위해 그랬겠는가? 일이 부득이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는 종사를 위해 의(義)로써 결단한 것이다. 내 마음을 보고자 한다면 21일 즉석에서 위호(位號)를 복구하라는 명을 내리고 상여(喪轝)에 따라가 애도를 표했으며 특별히 신주(神主)를 썼으니, 그것이 은(恩)과 의(義)를 아울러 베푼 것이다. 경의 차자를 기다리지 않고도 친히 가서 보았을 때 이미 물어보았는데 혜빈(惠嬪)은 효성스러웠으니, 참으로 젊은 부인의 몸으로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어진 어미가 있는데 어찌 그 자식을 염려하겠는가마는 주공(周公)의 충성과 성왕(成王)의 현명함으로도 금등(金縢)185)  을 열어 본 후에 깨달았다. 13일의 하교와 경의 차자 및 비답을 사각(史閣)에 간직하여 소인들의 참언(讒言)을 막고 뒷세상에 의리(義理)를 엄하게 하겠다."
하였다.

 

정언(正言) 권극(權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조재호(趙載浩)가 효걸(梟傑)처럼 발호(跋扈)한 것을 영웅이라 일컫고 이를 의탁하여 우익(羽翼)이 된 자는, 어찌 잔약한 늙은이로서 장차 죽게 된 한 목중도(睦重道)와 용렬하고 쓸모없는 한 이현섭(李賢涉)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알지 못하는 가운데 반드시 어떤 사람이 있어 목중도와 이현섭은 도리어 지엽(枝葉)이 되고 조재호는 바로 그 괴뢰(傀儡)인데, 신은 난족(欒族)을 모두 금고(禁錮)186)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징토하지 않으면 안될 자는 전 도사(都事) 이언충(李彦忠)이니, 본래 간사하고 요망하며 거짓되고 망령된 자로서 조상을 잊고 아비를 저버렸으며 처를 내쫓고 자식을 버려 명의(名義)에 죄를 입은 지 오래입니다. 그 형을 위해 충훈부 도사(都事)에 차정되기를 도모하여 조재호가 있는 곳을 왕래하면서 말할 때는 반드시 춘상 대감(春相大監)이라 칭하였으며 뜻을 잃은 무리들과 몰래 통하였습니다. 또 영남(嶺南)에 집을 지어 축첩(蓄妾)하였으며, 남을 속이고 선동하는 형적이 온 세상에 떠들썩 했습니다. 조재호가 북쪽으로 찬배를 당하자 압송을 자청하였다가 판서의 질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대간(臺諫)을 멸시하여 아이들을 시켜 격고(擊鼓)하여 상소하려다가 이루지 못하자 방자하게 길거리에서 호소하여 다시 서용되는 은전을 입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이언충을 빨리 절도에 안치하라는 명이 있어야 합니다.
전에 원찬(遠竄)했던 죄인 이만회(李萬恢)는 범죄의 주모자로서 어진 이를 죽인 이수징(李壽徵)의 손자이고 조재호와는 친척입니다. 그 형제와 숙질이 모두 길러준 은혜를 입었으며 추천하고 감싸준 것은 그의 힘 아님이 없었습니다. 장전(帳殿)에서 친히 국문하실 때에도 끝내 곧바로 공초하지 않았는데, 그 때 대신(臺臣)들이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지 않고 바로 원찬을 청한 것은 이미 옥사의 체통을 잃은 것이었으며, 유배에 처한 지 얼마 안되어 다시 석방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만회를 석방하라는 명은 우선 환수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사사(賜死) 죄인 조재호의 아들 조완진(趙完鎭)은 아직도 수노(收孥)의 율을 아끼시니 절도에 안치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죄인을 감싼 조명채(曹命采)와 숨겨준 이응협(李應協)에 이르러서는 모두 보통 일이 아니므로 조명채·이응협을 석방하라는 명을 마땅히 거두셔야 합니다. 지평 홍성(洪晟)은 교문(敎文) 가운데 용서하라는 말을 넣기를 청하여, 은연중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은혜를 구하는 자취가 있으니,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8월 27일 정사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서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동궁에게 시좌(侍坐)를 명하고, 빈객(賓客)과 춘방(春坊)으로 하여금 서연(書筵)의 예에 따라 임금의 앞에서 개강(開講)하게 하여 어려운 문의(文義)를 발문(發問)하였다. 임금이 동궁에게 묻기를,
"‘저는 작위로, 나는 내 뜻으로[彼以其爵 我以吾義]’라는 말에서 내 뜻이란 무슨 말이냐?"
하니, 동궁이 대답하기를,
"인의(仁義)가 내게 있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말이므로 내 뜻이라 한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조선(朝鮮)은 이제 잘 될 희망이 있다."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신만(申晩)에게 말하기를,
"존현각(尊賢閣)은 옛날 정유년187)   대리(代理) 때에 강습하던 곳이니, 이제 수리하여 동궁으로 하여금 그 곳에서 강습하도록 하고 경은 모름지기 기문(記文)을 지어 벽에 걸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8일 무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9일 기미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동궁을 데리고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동궁을 앞에 나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너로 하여금 제사(祭祀)를 지내는 전례(典禮)의 중요성을 알게 하려고 너를 데리고 지영을 행한 것이니, 이 뜻을 잊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동궁에게 시좌를 명하였다. 임금이 동궁에게 묻기를,
"이른바 임금은 백성들에게서 취하여 먹는 것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백성들로부터 먹을 것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백성을 먹이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백성을 먹이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먹을 것이 풍족하면 바로 백성을 먹이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해야 먹을 것이 풍족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백성을 침탈하지 않는 것이 바로 먹을 것이 풍족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요순(堯舜)을 배울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착한 일을 하면 가히 요순이 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입시(入侍)한 사관(史官)은 이 말을 상세히 기록하였다가 뒷날에 만약 허물이 있으면 모름지기 오늘의 말로써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삼남(三南)에서 흉년을 고하였으니 어떻게 백성들을 구할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곡식을 내주면 구제할 수 있으니, 양혜왕(梁惠王) 때의 일과 같이 하면 가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 대답이 재주가 있구나."
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 좌의정 홍봉한(洪鳳漢),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탄신일에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동궁에게 이르기를,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에서 혹시 이것으로 너에게 권하여도 듣지 말라."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부모 섬기기를 증자(曾子)처럼 하는 것188)  이 옳다고 했는데 무슨 뜻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증원(曾元)은 입과 몸만을 봉양하였고, 증자는 뜻을 받들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너도 또한 증자처럼 어버이를 섬기거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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