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0권, 영조 38년 1762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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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경인

번개가 쳤다.

 

10월 2일 신묘

유성(流星)이 천량성(天良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승지 조중회(趙重晦)가 말하기를,
"근래에 재주를 헤아려 직(職)을 제수하는데 흠이 있어서 조경(躁競)하고 부효(浮囂)하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아마도 전하께서 또한 인도하셨음이 있는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경하고 부효한 것이 어찌 내가 인도한 바이겠는가? 승지는 바깥만을 품평하였다."
하였다.

 

10월 3일 임진

번개가 쳤다.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윤방(尹坊)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는데, 동궁이 시좌하여 문의(文義)를 발란(發難)하라고 명하였다.

 

김시묵(金時默)을 경기 안집사로, 윤동섬(尹東暹)을 호서 안집사로, 홍인한(洪麟漢)을 호남 안집사로, 이이장(李彛章)을 영남 안집사로 삼았다. 이때에 4도에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이산(離散)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사자(使者)를 나누어 보내어 안집하도록 책임지웠다.

 

10월 4일 계사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황인검(黃仁儉)을 이조 참판으로, 홍명한(洪名漢)을 승지로 삼았다.

 

삼남(三南)의 삼명일(三名日)201)   및 삭선(朔膳) 진상을 지난해에 의거하여 임시로 감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윤음(綸音)을 지어 내려 경기와 삼남 백성들을 위유(慰諭)하였다.

 

10월 5일 갑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경기 및 삼남 백성들로서 서울에 올라온 자들을 부르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너희들을 초유(招諭)한 것은 유산(流散)하는 데에 이르지 말고 조가(朝家)의 제활(濟活)을 기다리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부덕하여 비록 지난해에 애휼하던 백성들을 저버렸지만, 동궁이 여기에 있으니 반드시 너희들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이 좋겠다."
하고, 동궁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너는 장차 어떻게 우리 백성들을 구제할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군상(君上)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유신 김종정(金鍾正)이 말하기를,
"이번에 재변을 만나 구조(求助)하는 때를 당하여 전석(前席)에서 말 한 마디 없이 갑자기 물러갔으니, 의당 송나라 인종(仁宗)이 천장각(天章閣)을 열었던 고사202)  를 본받아 비국의 여러 당상으로 하여금 조정의 득실과 민사의 이해를 견해에 따라서 조목별로 아뢰게 하고, 임금께서 대신에게 하순(下詢)하여 채택하신다면 실효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0월 6일 을미

장령 정운유(鄭運維)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돈후(敦厚)한 사람을 숭장(崇奬)하면 떠들썩하고 시끄러움이 그치게 되고, 겸손하고 고요한 선비를 간발(簡拔)하면 조경(躁競)의 풍습이 그치게 되니, 증세에 대한 처방(處方)은 이를 버리고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무릇 임금은 모든 백성의 부모이고 백성은 인군(人君)의 적자(赤子)입니다. 불행히 올해 남쪽 땅에서 흉년이 들었는데, 지금 온전히 살리는 대책은 오직 전하에게 달려 있습니다. 구황(救荒)의 방술은 생재(生財)보다 지나침이 없고 생재의 요령은 절용(節用)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10월 8일 정유

계복(啓覆)203)  을 행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계동(季冬)에 계복(啓覆)을 행하는 것은 옛부터였다. 이때에 이명숙(李命肅)의 옥사가 있었는데, 임금의 뜻은 당률(當律)을 빨리 쓰고자 하여 계동을 기다리지 않고 10월로 앞당겨 행하여 하루만에 삼복(三覆)을 겸행하였으니, 거조(擧措)가 급작스러워 계복을 상세히 하는 본뜻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안옥(按獄)하는 신하가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으니,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태백산사고본】 68책 100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15면
【분류】사법-재판(裁判) / 역사-사학(史學)


[註 203] 계복(啓覆) : 임금에게 상주(上奏)하여 사형수(死刑囚)를 심리하는 일. 1차 심리를 초복(初覆), 2차 심리를 재복(再覆), 3차 심리를 삼복(三覆)이라 함.
사신(史臣)은 말한다. "계동(季冬)에 계복(啓覆)을 행하는 것은 옛부터였다. 이때에 이명숙(李命肅)의 옥사가 있었는데, 임금의 뜻은 당률(當律)을 빨리 쓰고자 하여 계동을 기다리지 않고 10월로 앞당겨 행하여 하루만에 삼복(三覆)을 겸행하였으니, 거조(擧措)가 급작스러워 계복을 상세히 하는 본뜻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안옥(按獄)하는 신하가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으니,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돈녕부 낭관(敦寧府郞官) 이명숙(李命肅)을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명숙의 종형(從兄)인 이명덕(李命德)의 아들이 이미 장가들었었는데 요사(夭死)하자, 그의 처인 유씨(兪氏)가 청상 과부로서 자식이 없어 남편의 집안인 이섭(李𤫙)의 어린 자식을 양자로 삼았는데, 이명숙이 유씨가 이섭과 사통(私通)하였다고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유씨를 핍박하여 자진(自盡)케 하니, 유씨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에 이르러 이섭의 아들인 이경룡(李慶龍)이 어가(御駕) 앞에서 상언(上言)하여 그 아비의 무고와 아울러 유씨의 억울하게 죽은 연유를 밝혔는데, 임금이 이명숙을 옥에 가두고 안험하여 승복(承服)을 받아 무인 핍살율(誣人逼殺律)로써 계복(啓覆)하여 교형에 처하게 하였고, 어사 이득배(李得培)를 보내어 유씨에게 치제(致祭)하였다.

 

10월 9일 무술

윤면교(尹勉敎)를 우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대신과 비국 유사 당상·기사 당상(耆社堂上)을 소견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10월 10일 기해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신만이 아뢴 바로 인하여 강도미(江都米) 1천 5백 석을 교동부(喬桐府)에 획급하여 진자(賑資)에 보태고, 가을을 기다려 도로 갚도록 명하였다.

 

소대를 행하고,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10월 11일 경자

좌참찬 홍계희(洪啓禧)가 상소하여 호서·호남·기내의 흉년의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신해년204)  의 예에 의거하여 급재(給災)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고, 대신과 경기 구관 당상(句管堂上) 및 안집사를 소견하였다.

 

10월 12일 신축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동궁이 한 말을 듣자니, 매우 훌륭하다. 등 문공(滕文公)을 으뜸으로 삼고, 제 선왕(齊宣王)을 다음으로 삼았으며 양 혜왕(梁惠王)을 끝으로 삼았는데, 전관(銓官)이 의망(擬望)을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10월 13일 임인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어의궁(於義宮)에 나아갔다.

 

임금이 윤음(綸音)을 내려 기전(畿甸)과 삼남 백성들에게 효유하여 어루만져 보호하고 안집시키려 한다는 지극한 뜻을 보였다.

 

10월 14일 계묘

임금이 어의궁 기회문(於義宮紀懷文)을 지어 내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본궁(本宮)에 나아가 노대(露臺)를 보고 또 말구유[馬槽]를 보니, ‘날이 저물고 길이 멀다.’고 하신 하교와 철장 목마(鐵杖木馬)205)  의 의리가 추억(追憶)되어 슬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하였다. 어의궁은 효묘(孝廟)의 잠저(潛邸)인데, 효묘께서는 일찍이 북벌(北伐)에 뜻을 두셨으나 중도에서 붕조(崩殂)하시어 지사(志士)의 한(恨)을 품게 하였다.

 

10월 15일 갑진

장령 이수일(李秀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진신(搢紳)들의 사이에 예양(禮讓)의 절차를 알지 못하고 오로지 조경(躁競)의 풍습을 숭상하였으며 오직 벼슬 구하는 것을 일삼아 간알(干謁)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여항(閭巷)의 백성들은 각박(刻薄)을 능사로 여기고 사기(詐欺)를 좋은 계책으로 삼아 이욕(利慾)이 횡류하고 염치가 모두 상실되었으니, 성명(聖明)의 세대(世代)에 이러한 쇠계(衰季)의 기상(氣象)이 있을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기강을 세우고 세우지 못하는 것은 오직 법제가 일정(一定)한 데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그윽이 보건대, 요즈음 법제를 거듭 고쳐서 지중(持重)하는 데에 크게 결흠이 됩니다. 그리하여 혹은 아침에는 갑(甲)이라고 하였다가 저녁에는 을(乙)이라 하고, 혹은 어제는 사나웠다가 오늘은 해이해 지고 있으니, 법은 일정(一定)함이 없고 백성들에게는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정은 이로 말미암아 높여지질 않고 체통은 이로 말미암아 엄정(嚴正)하지 않습니다. 금년 삼남의 재황(災荒)은 근래에 없던 일인데, 조정에서 빨리 지휘(指揮)를 내려 견감(蠲減)할 만한 것이면 견감하고 변통(變通)할 만한 것이면 변통하여 때에 뒤지는 한탄이 없도록 하고 봄을 기다려 진휼(賑恤)하는 것도 또한 그 극진한 도리를 쓰지 않음이 없었다면 비록 안집하라는 명령이 없었더라도 어찌 유산(流散)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여러 군문(軍門)의 군액(軍額)이 아주 많아서 경비가 한정이 없고 매달의 늠료(廩料)가 오로지 백성들의 고혈에서 나오는 것인데, 유군(游軍)의 공비(供費)가 오히려 부족하니, 국용(國用)이 탕갈(蕩竭)하고 태창(太倉)이 텅 비어 있는 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여러 군문으로 하여금 정장(精壯)한 자를 가려 뽑아 교련(敎鍊)시키고 늙고 쇠잔한 사람을 태거(汰去)하여 줄인다면 경비가 넉넉해지고 무비(武備)가 굳건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은 효(孝)로써 다스려야 하니 호조 판서 김치인(金致仁)은 체직을 허락하고, 그 대신에 서지수(徐志修)를 임명하라."
하였다.

 

임금이 각사(各司)의 입직관(入直官)을 소견하였다. 장악원(掌樂院) 관원이 이륙 좌기(二六坐起)206)  를 오래 폐지하였다는 것으로써 잡아다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황해도에 급재(給災)를 가하여 1천 결에 준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이장오(李章吾)에게 주전(鑄錢)을 주관하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신만이 아뢴 바로 인한 것이었다.

 

10월 16일 을사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유생 전강(儒生殿講)을 설행하고, 으뜸을 차지한 윤양승(尹陽昇)에게 급제를 내렸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서지수(徐志修)가 천극(栫棘) 중에 있을 때인데 탁지(度支)207)  의 장관(長官)이 된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에서 나의 편벽되이 후하게 하는 것도 없고 박하게 하는 것도 없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영의정 신만이 말하기를,
"단지 성덕(聖德)의 포용(包容)만 보였을 뿐만 아니라 탁지는 사람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늙어 가면서 젊었을 때의 일을 생각하니 후회되는 일이 많이 있다. 내가 스스로 겸양(謙讓)하는 것이 아니라, 석년(昔年)의 1만분의 하나라도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깊은 밤에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느껴진다. 선정신(先正臣)이 일찍이 소학 동자(小學童子)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나 또한 차라리 《소학》을 읽고자 한다. 30의 나이에 입학하여 바야흐로 《소학》을 읽고 보니, 마음에 항상 부끄러움이 있다."
하였다.

 

10월 17일 병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무신 당상(武臣堂上)에게 삭시사(朔試射)를 행하고, 또 여러 신하로 하여금 입시하도록 하여 십운 배율(十韻排律)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홍명한(洪名漢)이 아뢰기를,
"정경(正卿)을 구전(口傳)으로 차출하는 것은 《속전(續典)》과 다름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관(銓官)을 추문(推問)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8일 정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대제학 김양택(金陽澤)에게 과차(科次)를 명하고, 제술(製述)에 응시하여 입격(入格)한 사람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홍주 어사(洪州御史) 이득배(李得培)가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보는 사람마다 모두 말하기를, ‘성상의 밝음이 해와 달 같아서 유씨(兪氏)의 억울함이 소설(昭雪)되었고 이명숙(李命肅)의 죄가 비로소 통쾌히 바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10월 19일 무신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교리 강필리(姜必履)가 동궁과 한 궁에서 같이 거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형세를 보아 처분하겠다."
하였는데, 좌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지금은 평상시와는 다르니 한 궁에서 같이 거처할 필요가 없고 두 궁궐을 왕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남 백(湖南伯)의 장계에 지도 만호(智島萬戶)가 표류한 호인(胡人)을 결박하였다고 하는데, 일이 매우 놀랍고 해괴하다. 나주 영장으로 하여금 결곤(決棍)하게 하고, 표류한 호인은 이미 대국(大國) 사람이니 그 교린(交隣)의 도리에 있어서 강박(强迫)하여 쫓아 보낼 수 없다. 넉넉히 양자(糧資)를 주고 순풍을 기다려 역관(譯官)을 보내어 데려오도록 해서 사신이 가는 편에 되돌려 보내도록 하라. 그 행장(行裝) 가운데 가지고 온 불상(佛像)은 정자(程子)가 소상(塑像)을 피한 뜻을 본받아 우리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밟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10월 20일 기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있어야 정사를 거행할 수 있으니, 사람을 얻는 것이 상책(上策)이 된다.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한 것은 백성을 위하여 나온 것인데, 이 법을 설정함에 있어 세 번 전(殿)에 임하고 세 번 문에 나아가 비로소 강정하였다. 만일 이와 같이 하지 않았다면 이 법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행하였겠는가? 1필(疋)의 역(役)을 정하므로 백성의 힘이 펴질 수 있으며, 어호(漁戶)도 또한 의지됨이 있을 것이다. 만일 혹 다시 2필로 한다면 이는 조선(朝鮮)이 없어지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효(浮囂)와 조경(躁競)은 오늘날의 고질(痼疾)이 되었는데, 일자 반급(一資半級)도 문득 분경(奔競)을 하니 참으로 개연(慨然)스럽다. 그러나 동궁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신료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듣게끔 하지 말도록 하라."
하니, 영의정 신만이 말하기를,
"정주(政注)하는 사이에 염정(恬靜)하고 박아(博雅)하며, 문학(文學)과 식견(識見)이 있는 자를 등용한다면, 이는 조경하는 일단(一端)을 누를 수 있을 것 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러한 때에 강학(講學)을 여러 생무지[生手]에게 맡길 수 없으니, 윤면헌(尹勉憲)을 사서(司書)에 제수하라."
하였다. 내년 양남(兩南)의 절선(節扇)의 상공을 반으로 감하라고 명하였으니, 대개 아랫사람에게 유익함이 있도록 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10월 21일 경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고, 관장하는 직임을 하순하였다.

 

10월 22일 신해

영부사 정휘량(鄭翬良)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몇 해 동안 나를 섬겨 충직(忠直)한 한마음으로서 정성을 다하여 조제(調劑)하고 나에게 협찬(協贊)하였는데, 어찌 오늘 이 부음(訃音)을 들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무릇 여러 가지 절차를 고 좌상과 우상의 예에 의거하여 똑같이 거행하고, 관재(棺材)도 또한 곧바로 택송(擇送)하도록 하며 녹봉(祿俸)은 3년을 한정하여 그대로 지급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예는 빠뜨릴 수 없으니, 마땅히 자정전(資政殿) 월대(月臺)에서 거애(擧哀)를 하겠다."
하니,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이 조섭(調攝)하시는 때를 당하여 결단코 거애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서거(逝去)한 이가 앎이 있다면 어찌 척연(慽然)히 민망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아뢴 바 서거한 자를 위로하는 한마디 말에서 마음 속에 감동함이 있다.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제문(祭文)은 친히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정휘량은 정수기(鄭壽期)의 아들이며 정우량(鄭羽良)의 동생이었다. 정수기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혈당(血黨)으로서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지만 정우량 형제는 조현명(趙顯命)에게 붙어서 탕평(蕩平)으로서 인진(引進)되었고, 다시 척신(戚臣)에 의탁하여 모두 대관(大官)의 지위에 이르렀다. 또 대제학을 거쳐 자못 문명(文名)이 있었는데, 그의 형만은 못하였다.

 

10월 25일 갑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뜰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10월 27일 병진

조명정(趙明鼎)을 이조 참판으로, 조엄(趙曮)을 이조 참의로, 윤급(尹汲)을 홍문관 제학으로, 이방엽(李邦曄)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사간 이헌묵(李憲默)이 상소하여 영남에 흉년이 든 상황을 갖추어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헌묵의 백성을 위한 소장을 보고 또 호남·호서 안집사의 장문을 열람하니, 굶주린 백성의 정상을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우심(尤甚)이나 초실(稍實)을 물론하고 마땅히 실지 혜택을 베풀어야 한다. 삼남(三南)의 우심한 면(面)은 금년의 환곡(還穀)을 특별히 절반을 정봉(停俸)하고 그 다음 면은 삼분의 일을 특별히 정봉하도록 하라. 아! 기전(畿甸)은 방기(邦畿)의 근본이다. 우심한 곳의 백성들은 어찌 우리 임금을 기다리는 바람이 없겠는가? 한결같이 삼남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어젯밤에 꿈속에서 안집사 이이장(李彛章)을 보았는데, 인하여 호남의 백성들이 생각이 나서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았다. 내년 단오의 절선(節扇)을 진상하는 것을 모두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서지수(徐志修)·이창수(李昌壽)·김상복(金相福)은 모두 성상께서 의지하는 사람들이니, 임무를 맡겨 책임을 이루게 한다면 거의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사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지금 사람을 얻는 것이 급선무인데, 고 영부사 정휘량(鄭翬良)의 후임으로 가히 쓸 만한 자는 이은(李溵)·민백흥(閔百興)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은은 내가 쓸 만하다는 것을 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간 이헌묵(李憲默)은 선정신의 후예이다. 지금 많고 많은 일들 가운데 동궁의 강학(講學)보다 지나친 것이 없다. 강관(講官)은 처지(處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장현광(張顯光)의 연비 어약(鳶飛魚躍)하는 방언(方言)은 매우 귀중하다. 이헌묵을 특별히 사서(司書)에 제수하라."
하고, 임금이 이헌묵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동궁은 단지 서울 사람만을 보고 시골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특별히 너를 강관에 제수하는 것이니, 너도 또한 장현광처럼 방언을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0월 28일 정사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남해 현감 허엄(許儼)을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그 사람됨을 보건대, 이러한 때에 남해를 여러 생무지[生手]에게 맡기기가 참으로 어렵다. 오위 장(五衛將) 이언휴(李彦休)를 특별히 남해 현감에 제수하라. 나주는 노숙(老熟)한 이를 놓아 두고 누구를 먼저 하겠는가? 병조 참지 유언술(兪彦述)을 특별히 나주 목사에 제수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소대를 행하고,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통신사(通信使) 이득배(李得培)가 호조(戶曹)의 은 3천 냥을 빌려 역관(譯官)이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어공미(御供米)란 명색(名色)이 있다는 것을 듣고, 하교하기를,
"산성(山城)은 말할 나위도 없고, 비록 이 성 안이라 하더라도 삼군(三軍)과 도민(都民)이 함께 고락을 같이 할 때인데, 결단코 차마 홀로 갱미(粳米)를 먹을 수 없다. 더구나 산성이겠는가? 향미(餉米) 또한 쌀이며 유사시에는 스스로 먹을 쌀이 있는데, 더구나 아무 일이 없는 때에 소민(小民)들에게 폐를 끼치겠는가? 지금부터 이후로는 특별히 ‘어공’ 두 글자를 없애도록 하라. 그리고 이천(利川)에서 납공하는 쌀은 전례에 의거하여 탁지(度支)에 속하게 하고, 북한 산성(北漢山城)도 또한 이 예에 의거하며, 강도(江都) 또한 이 이름을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기 안집사 김시묵(金時默)은 내가 그 사람됨을 상세히 알지는 못하여서 범연(泛然)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오늘 입시하여 그 구획(區劃)한 것을 보니, 이로부터 내가 신임하게 되었다."
하였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지금의 국사(國事)를 돌아보건대 의탁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 재신(宰臣)은 처지가 어떠하고 인망이 어떠합니까? 오늘 상(上)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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