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기축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고, 건공탕(建功湯)을 하루 세 번 진어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니, 종묘 도제조(宗廟都提調) 신만(申晩)이 청대(請對)하고 입시하여 말하기를,
"태묘의 삭제(朔祭) 때에 제2실(室)의 신독개(神櫝蓋)를 궁위령(宮闈令)이 떨어뜨려 틈이 생겼습니다."
하니, 임금이 곧바로 나아가 살펴보고 친림하여 희생(犧牲)을 살폈으며, 밤이 되어서야 환궁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해당 궁위령을 먼 변방으로 정배(定配)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2월 2일 경인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고 건공탕을 하루 세 번 진어하였다.
승지에게 죄가 가벼운 죄수를 풀어 줄 것을 명하였는데, 날이 추웠기 때문이었다.
12월 3일 신묘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고 건공탕을 하루 세 번 진어하였다.
김상중(金尙重)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양주(楊州)는 중요한 곳이니 가려서 뽑지 않을 수 없다. 승지 정광한(鄭光漢)을 제수하라."
하였다.
임금이 수찬 정창성(鄭昌聖)을 호남 암행 어사로 삼을 것을 명하고, 나주(羅州)와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을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물러갈 때 면려하고 신칙하여 말하기를,
"나주 목사 유언술(兪彦述)은 당초 궁문(宮門)에 임(臨)하여 보낼 때에도 싫어하는 기색이 보였는데, 지금 들으니 표류한 호인(胡人)이 지도(智島)에 들어와 머물렀는데도 친히 가서 양식을 주지 않았다 하니, 이와 같이 편할 도리만 취한다면 어떻게 백성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구휼하는 정치를 암행하여 살펴서 만약 혹시라도 근면하지 않았다면 곧바로 장계하여 파직하라. 옛날 급암(汲黯)230) 은 창곡(倉穀)을 교발(矯發)하여 백성을 구제한 일도 있으니, 편의에 따라 조치하여 나의 백성을 구제하라."
하였다.
이의로(李宜老)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12월 4일 임진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고 건공탕을 하루 세 번 진어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안집사(安集使) 홍인한(洪麟漢)이 아뢴 바를 들으니, 굶주려 누렇게 뜬 얼굴들이 잠시도 지탱하기 어려운 모습을 마치 친히 보는 듯하다. 진곡(賑穀)은 어디에서 나오며 농사 양식은 또한 어떻게 마련하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기운이 빠진다. 산산창(蒜山倉)의 남겨 둔 쌀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적당량(適當量)을 헤아려 백성을 구제케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북도의 교제창(交濟倉) 곡식의 조운은 한시가 급한데도 북평사(北評事) 김상익(金相翊)은 그 오는 것이 더딘지 빠른지를 알 수가 없으니, 이인배(李仁培)를 북도 독운 어사(督運御史)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5일 계사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입진하였고 건공탕을 하루 세 번 진어하였다. 좌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평안 감사의 장계를 보니 범월(犯越)한 사람을 이미 잡았다고 합니다. 해당 병사(兵使)나 변장(邊將)은 마땅히 죄를 논해야 하고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윤덕(李潤德)도 한결같이 형률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6일 갑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고 건공탕을 하루 세 번 진어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선전관(宣傳官)에게 명하여 유개(流丐)를 적발하여 선혜청(宣惠廳)에 맡기고, 양주(楊州)의 구걸하는 아이는 나이가 12세인데, 양주 목사에게 맡겨 구제케 하였다.
12월 7일 을미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고 건공탕을 하루 세 번 진어하였다.
김상복(金相福)을 예조 판서로 이창의(李昌誼)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이재협(李在協)을 관서(關西) 안핵 어사(按覈御史)로 삼았으니, 이때 범월(犯越)한 죄인을 잡은 때문이었다.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2월 8일 병신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청나라의 칙사를 맞이하였다.
민백흥(閔白興)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9일 정유
서명응(徐命膺)·이수덕(李壽德)·이의로(李宜老)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혼궁(魂宮)에 곡림(哭臨)하였는데, 칙사도 예에 따라 치제(致祭)하였다.
12월 10일 무술
임금이 모화관에 나아갔다가 환궁할 때 육상궁(毓祥宮)에 들렀다.
12월 11일 기해
김양택(金陽澤)을 이조 판서로 삼고, 홍봉한(洪鳳漢)을 사은 겸 주청사(謝恩兼奏請使)로 삼고 곧바로 체직을 허락하였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호조 판서 및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소견하였다.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에게 전유(傳諭)하기를,
"이미 선비로 있기를 허락했으니 어찌 직명(職名)에 구애 받겠는가? 너를 본 후에야 장차 뒷날 지하(地下)에 돌아가 아뢸 말이 있겠다."
하고, 이어서 수서(手書)를 덧붙여 말하기를,
"마땅히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상설(象設)을 바라보라. 칠순이나 되는 임금의 기대는 오직 호서(湖西)에 있고 동궁의 보도(輔導) 또한 산림(山林)에 있다. 글로는 뜻을 다할 수 없고 오직 ‘반드시 보고 싶다.[必欲見]’라는 세 글자가 있을 뿐이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하였다. 송명흠은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손자로서 학문에 힘쓰고 징소(徵召)에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이 그 이름을 듣고 반드시 불러 보고자 하여 항상 말하기를, ‘유현(儒賢)을 대하는 것이 어찌 대신(大臣)과 다름이 있겠는가?’ 하고, 항상 이름을 부르지 않고 관직을 일컬었으며, 연달아 서찰로 부르기를 거의 열 번이 넘었는데, 말씀이 더욱 간곡하고 정성으로 예를 다하기를 힘썼다. 또 직명(職名)을 해제하여 그 뜻을 편안케 해주니, 송명흠이 사양하다 못하여 다음 해에 이르러서 비로소 명을 받들었다.
장령 유서오(柳敍五)가 장단 부사(長湍府使) 황채(黃寀)와 나주(羅州)의 전 목사 김인대(金仁大)를 모두 잡아다 처분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였다. 황채는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를 시켜 대동미를 환롱(幻弄)하게 하였고, 김인대는 도신(道臣)이 장계로 먼저 파직하고 뒤에 잡도록 청하였는데, 특별히 잡지 말라고 명하였다. 다른 장청(狀請)에 비교하면 처분의 다름이 없지 않았는데, 김인대는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친척인 때문이었다.
12월 12일 경자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전랑(銓郞)을 택차(擇差)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신진(新進)들의 쟁탈하는 풍습을 못마땅히 여겨 특별히 한림(翰林)과 전랑의 선발을 혁파하였으니, 이로부터 전랑은 도리어 싫어하고 회피하는 자리가 되었고, 단지 먼 시골의 한미(寒微)한 자로서 구차히 차출하였으므로 윤동도의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허락은 하였으나 또한 고쳐 바로잡은 바가 없었다.
12월 13일 신축
장령 한필수(韓必壽)가 아뢰기를,
"승지 이수덕(李壽德)과 병조 낭관 남용현(南龍見)은 칙사의 수행인과 더불어 먼저 실수했다고 서로 다투어 스스로 모욕을 당했으니, 모두 파직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사판(仕版)에서 삭제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14일 임인
임금이 광달문(廣達門)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연향대(宴享臺)에 나아가 칙사를 보내고 돌아올 때에 저경궁(儲慶宮)에 들렀다. 칙사가 명첩(名帖)을 보냈는데, 모화관에 있는 사람이 대신 썼기 때문에 영의정 신만(申晩)이 임금에게 아뢰니, 도감 당상을 파직케 하였다.
임금이 대신(臺臣) 홍자(洪梓) 등 5인이 지방에 있다고 핑계를 댄 때문에 가까운 역(驛)에 도형(徒刑)으로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장령 유서오(柳敍五)의 말로 인하여 이 명을 환수하였다.
12월 15일 계묘
임금이 각사(各司)에서 전최(殿最)231) 를 하지 않은 사람은 정 일품 대신을 제외하고는 제조(提調)까지 모두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수찬 임희교(林希敎)를 동복 현감(同福縣監)에 제수하였는데, 그가 어버이를 위하여 걸군(乞郡)232) 하였기 때문이었다.
선부(選部)233) 에 명하여 대신(大臣)이나 국구(國舅)가 아니면 영중추(領中樞)를 맡기지 못하게 하고 비록 보국(輔國)의 품계가 있어도 총재(冢宰)234) ·종백(宗伯)235) ·사마(司馬)236) 를 거치지 않은 자는 판중추(判中樞)에 차임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때 원임 대신(原任大臣)은 없고 보국의 품계를 가진 중신들은 많았던 때문에 특별히 바로잡은 것이었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 각도의 전최(殿最)를 열어 보았다.
12월 16일 갑진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김효대(金孝大)를 승지로 삼았다.
12월 19일 정미
달이 태미원(太微垣)의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전 나주 목사(羅州牧使) 홍역(洪櫟)을 멀리 유배할 것을 명하였다. 이 때 호남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나주는 환곡(還穀) 4만 곡(斛)을 하나도 저축하여 둔 것이 없어 백성들이 호구(糊口)할 길이 없으므로 온 고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들이 모두 분통하게 여겼다. 홍역이 옥에 갇히어 있었으나 마침 추위를 당하여 석방하는 가운데에 혼동해 들었으므로 임금이 깨닫고 고율(考律)을 명하였으며,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엄중히 징계할 것을 다시 청하여 드디어 예천(醴泉)에 정배하고 금고(禁錮) 5년에 처하였다.
이득룡(李得龍)에게 엄형을 가하여 연한을 정하지 말고 흑산도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이 득룡은 이천(利川) 백성으로서, 그 수령에게 원망을 품고 흥화문(興化門) 기둥에 익명서(匿名書)를 붙였는데, 포도청(捕盜廳)에서 그 무고(誣告)의 실상을 살펴 체포한 것이었다.
하례의 의식이 가까왔으므로 피죄인(被罪人)들을 모두 급첩(給牒)하고 서용하였는데, 오직 한익모(韓翼謨)·황경원(黃景源)·이현중(李顯重) 만은 논의하지 말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익모는 그때 일이 대단히 그른 것이다. 일의 본말을 알지 못했을 때는 비록 관(冠)을 벗는 것이 옳다고 하겠으나, 이미 알고 난 뒤에 문자를 짓지 않았으니, 신하의 직분이 아니다. 따지고 비교하지 않았다면 곧 신하의 분의가 없는 것이다. 황경원은 어둡고 혼미하여 어리석은 소치이고, 이현중은 만고(萬古) 소인(小人)의 작태이다."
하였다.
유신(儒臣)에게 《한사(漢史)》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12월 20일 무신
정언 김이희(金履禧)가 소를 올려 심일진(沈一鎭)이 파양(罷養)한 잘못을 논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이희가 드디어 등대(登對)하여 스스로 이끌어 말하기를,
"심일진이 처음부터 심사순(沈師淳)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만이지마는, 이미 그에게 입후(入後)하였으니 천륜(天倫)이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그는 마땅히 심사순과 더불어 같이 파출(罷黜)의 죄를 입어 부자의 윤리를 보전하여, 김광진(金光進)의 죄인됨을 모면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자기가 입후한 양부(養父)를 반부(班祔)237) 에 내리고, 그 본생 부모는 예위(禰位)에 들이고서도 그는 의연하게 종손이라 하니, 이는 그 아비에게 누(累)가 있다고 하여 끊어버린 것입니다. 심일진으로 하여금 진실로 떳떳한 천성(天性)이 있다고 한다면 사당에 들어가 제사 지낼 때에 위 아래를 둘러보고 능히 두렵고 불안해서 등에 땀이 차지 않겠습니까? 심일진의 도리는 그 양모(養母)와 더불어 심사순의 신주를 끌어안고 몸을 마칠 때까지 죽음으로 기약한 연후에야 윤기의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臺臣)된 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소중한 바가 따로 있고 처분이 이미 정해졌는데, 부효(浮囂)에 동요되어 오로지 성내어 떠들어댐을 일삼는다고 책하고, 이어서 영원히 사판에서 간삭할 것을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심일진(沈一鎭)은 심사순(沈師淳)의 계자(繼子)이며 심사순은 심익창(沈益昌)의 손자인데, 청평 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의 뒤를 이은 자이다. 임금이 심익창의 죄가 크다고 하여 그 친손자로 하여금 귀주(貴主)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심일진을 심사순에게서 파양(罷養)하여 그 신주를 반부(班祔)하고 심일진의 본생친(本生親)을 도위묘(都尉廟)에 들여서 제사를 받들도록 명하였다. 명을 내린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의논하는 자들이 더욱 준절하니, 심일진이 감히 갑자기 명을 따르지 못하였다. 임금이 문장(門長)으로 하여금 곧바로 거행토록 하고 중관(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한 후 복명(復命)하도록 하였으므로, 김이희가 쟁집(爭執)하여 마침내 죄를 입었으니, 사람들이 애석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68책 100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19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가족-가족(家族)
[註 237] 반부(班祔) : 자식이 없는 사람의 신주를 조상의 사당에 같이 모시는 일.
사신은 말한다. "심일진(沈一鎭)은 심사순(沈師淳)의 계자(繼子)이며 심사순은 심익창(沈益昌)의 손자인데, 청평 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의 뒤를 이은 자이다. 임금이 심익창의 죄가 크다고 하여 그 친손자로 하여금 귀주(貴主)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심일진을 심사순에게서 파양(罷養)하여 그 신주를 반부(班祔)하고 심일진의 본생친(本生親)을 도위묘(都尉廟)에 들여서 제사를 받들도록 명하였다. 명을 내린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의논하는 자들이 더욱 준절하니, 심일진이 감히 갑자기 명을 따르지 못하였다. 임금이 문장(門長)으로 하여금 곧바로 거행토록 하고 중관(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한 후 복명(復命)하도록 하였으므로, 김이희가 쟁집(爭執)하여 마침내 죄를 입었으니, 사람들이 애석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12월 21일 기유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 친히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특별히 이은(李溵)을 승진시켜 우윤(右尹)으로 삼고, 강필리(姜必履)를 호조 참의로 삼았다. 충신 홍익한(洪翼漢)의 손자인 홍술조(洪述祖)를 장릉 랑(長陵郞)으로 삼고, 오달제(吳達濟)의 손자인 오재문(吳在文)을 명릉 랑(明陵郞)으로 삼았다.
장령 한필수(韓必壽)가 청백리(淸白吏)와 효절인(效節人)의 자손은 지손(支孫)·적손(嫡孫)을 막론하고 매번 도정마다 녹용하도록 계청하였는데, 뒤에 좌의정 홍봉한의 아룀으로 인하여 이전의 제도에 의거하여 단지 적장손(嫡長孫) 이외에는 혼의(混擬)함이 없도록 하였다.
12월 22일 경술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 새로 제수된 수령·변장(邊將)·우관(郵官)을 소견하였는데, 온성 부사 이계(李堦)가 주대(奏對)함이 분명하지 않았으므로, 개차(改差)를 명하였다.
반송사(伴送使) 남태제(南泰齊)가 장계로 황해 병사 장지항(張志恒)을 파직할 것을 청했는데, 영송(迎送)할 때 융복(戎服)과 궁시(弓矢)를 착용(着用)하지 않고 사모 관대(紗帽冠帶) 차림으로 와서 보고 읍이나 절도 하지 않았으니 사체를 손상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순(尹淳)이 감호사(監護使)였을 때 이광덕(李匡德)이 도백(道伯)이었는데, 갑주(甲胄)를 입고 뵈었다. 그런데 무신의 방자한 행동과 교만한 기습이 평상시에도 이와 같았으니, 뜻밖에 일이 있을 때에 어떻게 논하겠는가?"
하고, 잡아다 신문하여 엄중히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3일 신해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 밤에 유신(儒臣)을 불러 《숙야잠(夙夜箴)》을 읽도록 명하였다.
12월 24일 임자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평안 감사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재읍(災邑)에 대한 진곡(賑穀)을 1만 석에 한정하여 획급하여 진자(賑資)에 보충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 신상권(申尙權)이 장통(掌通)238) 을 복구(復舊)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대통(臺通)239) 은 옛날에는 정(正)·지(持)·장(掌) 3층(層)이 있었는데, 이때에 장통을 폐지하자 정통·지통의 일이 지극히 혼잡스러웠으므로, 신상권이 옛 제도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수서(手書)로써 찬선 송명흠(宋明欽)을 돈독히 유시하였다.
12월 25일 계축
장령 한필수(韓必壽)가 아뢰기를,
"지금 뭇 신하가 모두 보색(保嗇)을 청하였는데, 신은 소회(所懷)가 있습니다. 옛날에 주자(朱子)는 천안(天顔)이 전에 비하여 수척함을 깊이 느꼈으나 이양(頤養)하고 절선(節宣)하는 방도를 진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성상의 나이가 비록 많으시나, 위(衛)나라 무공(武公)의 나이에 비교하면 3분의 2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컨대 억계(抑戒)의 시240) 를 본받아 촛불을 켜놓고, 밤 공부에 더욱 힘쓰소서."
하고, 또 무일편(無逸篇)을 정밀하게 베껴 좌우(座右)에 두고 항상 보는 바탕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녹비(鹿皮)를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주서(注書)로 하여금 그 아뢴 말 1통(統)을 써서 유중(留中)하게 하고, 옥서(玉署)의 장으로 하여금 무일편을 써서 병풍(屛風)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구장명(鳩杖銘)을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도록 명하였으며, 다시 자강명(自强銘)을 지었다. 이때 상방(尙方)에서 입춘일이 성상의 나이가 칠순이 되는 날이라 하여 장(杖)을 올렸다. 임금이 스스로 경계하는 것으로 명(銘)을 짓고 승사(承史)·상신(相臣)·봉조하(奉朝賀)·기사(耆社)·관각(館閣)·옥서(玉署)·춘방(春坊)·주사(籌司)의 여러 신하들에게 모두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윤음을 내려 금주(禁酒)를 거듭 밝혔는데, 한 해가 저물기 때문이었다.
12월 26일 갑인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유사 당상을 소견하였다.
지평 이태정(李台鼎)이 김이희(金履禧)를 사판에서 간삭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윤음을 내려 감운 어사(監運御史)·도사(都事)·도신(道臣)에게 거듭 신칙하였다.
12월 28일 병진
간원(諫院) 【정언 신상권(申尙權)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고지(故紙)에 등전(謄傳)한 것의 잘못됨을 논계하고, 대신과 금오(金吾)·추조(秋曹)에 명하여 일제히 회의하게 하되, 혹은 윤허하고 혹은 정지토록 하여 등전하는 폐단을 영원히 없앨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강동 현령 홍낙명(洪樂命)은 그 처지와 기대가 어떠한데 옥서(玉署)와 춘방에는 한번도 명에 응하지 않다가 먼 땅의 작은 고을에 갑자기 부임하였으며 또 공론과 물의가 있는데도 돌아보거나 거리낌이 없었으니, 특히 사대부의 염의(廉義)에 흠이 되었습니다. 곡산 부사 구윤옥(具允鈺)은 이름이 백간(白簡)241) 에 올랐으니, 일이 비록 누명을 벗었다 하나 그가 맑은 조정에 공경의 반열에 있으면서 탄핵을 받고도 태연히 머물러 있으니 자못 구차스러운 데에 관련됩니다. 또 지난번 이경룡(李慶龍)이 억울함을 호소했을 때 상언(上言)에 계자(啓字)를 찍은 것을 승선(承宣)이 사사로이 빼어버렸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몇 십 년 동안 상지(相持)해 오던 것을 대신(大臣)과 유사(有司)가 감단(勘斷)하여 법으로 조치한다면 어찌 임금이 있다고 하겠으며, 감단하여 정지(停止)하는데도 대신(臺臣)이 곁에서 방관만 한다면 어찌 대각이 있다고 하겠는가? 홍낙명과 구윤옥을 하나는 지나치게 포장(褒奬)하고, 하나는 죄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맺는 말을 서로 어긋나게 이리 저리 돌려가며 열었다 닫았다 조화를 부리니, 그 마음이 하나인가 둘인가? 하나가 아니라면 계교(計較)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신상권이 처음 대각에 들어왔을 때 전계(前啓)한 문안을 취하여 상고하지도 않고 예에 따라 등전(謄傳)한 것으로서 스스로 인혐(引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아뢰어, 반드시 잘못된 관습을 바로잡고자 한 것도 또한 의견이 없지 않았다. 장령 한필수(韓必壽)가 말하기를,
"전계(前啓)는 모두 악역(惡逆)에 관계되는데 신상권이 당초 먼저 인피(引避)하였으니, 진실로 가히 의심할 만하며 또 회의를 청한 것도 미루는 뜻이 있는 듯하였으니, 청컨대 대망(臺望)을 개정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얼마 되지 않아 양사의 모든 장계를 모두 마무리 지었고, 승선은 파직을 명하였는데, 바야흐로 동래 부사에 있었으므로, 도로 그대로 두었다.
12월 29일 정사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조명채(曹命采)를 다시 비국 당상에 차임하도록 명하였다. 이 때 조명채가 풀려나 돌아와 있었는데, 선부(選部)에서 오랫동안 의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이 특별히 차임하여 차대(次對)에 참여토록 하였다.
12월 30일 무오
조정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유양성열록(揄揚盛烈錄)》을 내일 반포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이 해에 경중 5부의 원호(元戶)는 3만 9천 9백 26호이고, 인구는 18만 3천 7백 82명 【남자가 8만 8천 9백 98명, 여자가 9만 4천 7백 84명이다.】 이고, 팔도의 원호는 1백 65만 1천 1백 14호이고, 인구는 6백 79만 7천 8백 16명 【남자 3백 36만 4천 5백 4명이고, 여자 3백 43만 3천 3백 12명이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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