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기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상참(常參)하고, 이어서 조강을 행하였으며,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대진(大賑)이 앞에 임하였는데, 지금 힘써야 할 것은 위에서 감손(減損)하는 것을 먼저해야 합니다. 어공(御供)을 만일 재감(裁減)한다면 공인(貢人)이 실업(失業)할 염려가 있으니, 진배(進排)에 응하는 이외에 더 쓰는 별무(別貿)에 간련된 것은 탁지(度支)의 신하로 하여금 뽑아 내어 아뢰게 하여 일체 생감(省減)한다면 용도(用途)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수찬 남현로(南玄老)는 이미 옥당(玉堂)에 염증을 느꼈으니, 백성을 구제토록 특별히 고령 현감에 제수하라."
하였다.
11월 2일 경신
정언 김낙수(金樂洙)가 상소하여 서유원(徐有元)을 석방하도록 청하였는데,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경기와 호서에 아울러 1천 결을 기준해서 급재(給災)를 더하라고 명하였다.
11월 3일 신유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제주에서 공납한 과일을 진전(眞殿)에 올렸다.
11월 4일 임술
임금이 극수재(克綏齋)에 나아가 동지(冬至) 삼 사신(三使臣)을 소견하고, 찬을 내렸다.
11월 6일 갑자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
11월 7일 을축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제주에 기근(饑饉)이 들었으니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고, 진곡(賑穀) 4천 석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은 평일에 나를 아주 깊게 연모하였다. 내가 매양 말하기를, ‘너는 할아버지의 잘한 일을 마땅히 본받고 좋지 않은 것은 마땅히 본받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 세손은 ‘녜녜’ 하였으니, 그 대답한 바가 옳았다. 또 항상 강독(講讀)을 자기의 일로 삼았으니, 이는 매우 기쁜 일이라 하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춘방(春坊)의 보도(輔導)는 지금 급선무이니, 특별히 황인검(黃仁儉)을 서용(敍用)하여 다시 빈객(賓客)에 제수하라."
하였다.
11월 8일 병인
동지일(冬至日)인 때문에 조정에서 정후(庭候)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임금이 동지일(冬至日)의 윤음을 지어 내렸다.
특별히 부수찬 김재순(金載順)을 평택 현감에 제수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평택은 사람을 얻었다."
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지일(冬至日)이 또 이르렀으니, 내 나이 한 살이 더하게 되었다. 《중용》에 ‘대덕(大德)은 장수(長壽)한다’는 말이 있다지만, 나는 얕은 덕으로 장수를 누리니 마음이 몹시 부끄럽다. 내년은 즉위한 지 39년이지만 여러 신하들은 반드시 40년이라고 할 것이다."
하니, 지경연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계사년208) 의 전례가 있으니, 뭇 신하들로 하여금 함께 경축하는 정성을 조금이라도 펴도록 하소서."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심정을 내가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마는 정축년209) 이후에 ‘하(賀)’ 한 글자는 내가 스스로 끊어버렸다. 설사 마땅히 하례할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어찌 축하 받을 때이겠는가?"
하였다. 특진관 이창수(李昌壽)가 말하기를,
"뭇 신하들의 정성스런 하례를 조금이라도 펴게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혈구(絜矩)의 도(道)에 흠결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수(歲首)에 마땅히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고 근정전(勤政殿) 옛터에서 반교(頒敎)하겠다."
하였다.
11월 9일 정묘
장지항(張志恒)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남 안집사의 장계(狀啓)를 보니, 빈궁한 백성의 참상을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팔도가 풍년이 들었다면 사관(史官)이 마땅히 크게 풍년이 들었다고 썼을 것인데, 삼남이 이와 같으니 밤낮으로 노심 초사하고 있다. 균역청(均役廳)이 없을 때에도 나라가 또한 지탱해 나갔는데, 내가 어찌 균역청 하나를 아껴서 삼남의 적자를 진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남 가운데 아주 심한 읍은 특별히 신포(身布)의 반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판중추 이정보(李鼎輔)가 말하기를,
"당초에 균역청을 설치한 것은 뜻이 있어서였습니다만 특은(特恩)으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고, 호조 판서 서지수(徐志修)는 말하기를,
"균역청에서 옮겨 쓰기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법이고, 흉년에 감하여 지급하는 것은 변통하는 규례이니, 특별히 감하여 지급하라고 허락하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판의 분수(分數)가 매우 명확하다."
하였다.
지평 유광국(柳匡國)이 말로써 죄를 입은 자를 모두 석방하기를 청하였는데, 전계(傳啓)할 즈음에 거조가 황란(慌亂)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말로써 죄를 입은 자가 누구인가?"
하니, 유광국이 말하기를,
"김시찬(金時粲)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만약 상설(象設)을 멀리 바라보듯 눈에 군부(君父)가 있었다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겠는가? 유광국은 온성부(穩城府)에 원찬하고, 통청(通淸)한 정관(政官)은 파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아뢰기를,
"성수(聖壽)가 이미 칠순이 되었고, 임어하신 지가 4기(紀)210) 에 차신 일은 나라에 드물게 있었던 큰 경사이며, 지난 사첩에도 없었던 성대한 일입니다. 더구나 계사년211) 에 이미 행한 전례가 있으니, 빨리 윤허를 내려 주셔서 온 나라 신민들의 바라는 바에 부응하소서."
하였고, 좌의정 홍봉한(洪鳳漢), 우의정 윤동도(尹東度) 및 비국의 많은 재신과 삼사의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힘써 청하였는데,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절손(節損)하는 정사를 어찌 평년(平年)에 비할 수 있겠는가? 내전(內殿)에서부터 뭇 여러 사궤(賜饋)하는 물건을 감생(減省)하고, 삼명일(三名日)의 의대차(衣襨次)는 각기 1필만을 두고 상방 무역(尙方貿易)도 모두 내년 가을을 한정하여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0일 무진
영의정 신만(申晩), 좌의정 홍봉한(洪鳳漢),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예관(禮官)과 비국의 여러 재신을 거느리고 구대(求對)하였으며,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도 여러 종신을 거느리고 구대하여 나라에 이런 경사가 전에 없었음을 일제히 진달하였고, 욕의(縟儀)를 거행함이 마땅함을 힘써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스물 여덟 글자 이외에 어찌 감히 한 글자라도 더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고(固)’ 한 글자가 있으니, 여러 신하들은 물러가라."
하였다.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경기 유생 안구(安構) 등이 상소하여 고(故) 집의(執義) 김창흡(金昌翕)을 석실 서원(石室書院)에 추배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숨어 있는 뛰어난 선비이다. 먼 곳으로 은둔할 때에 그 집안이 얼마나 현혁(顯赫)한 가문이었던가? 그런데도 높은 관직을 진흙처럼 하찮게 여기고 산 높고 물 맑은 고장에 살면서 산수의 풍류를 즐겼으니 세상에서 이른바 은일(隱逸)이란 어찌 이 사람보다 낫겠느냐? 어질도다."
하였다.
11월 11일 기사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빈청(賓廳)에서 온 나라가 함께 기뻐하는 정성으로 서로 이끌고 나아가 진하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초(國初) 〈갑신년212) 태조(太祖)의〉 성주(聖籌)와 옛날의 〈계사년213) 숙종(肅宗)께서 즉위한 지 40년이 됨에 대한〉 성덕(聖德)은 곧 《중용》에 이른바 ‘대덕(大德)은 반드시 수(壽)를 얻는다.’는 이치이며, 《시경(詩經)》에서 이른바 ‘어찌 장수하지 않겠는가?’라는 뜻인데, 외람되이 어려운 일을 이어받아 하나도 계술(繼述)한 것이 없었다. 아! 예전에 대단히 어진 혜택이 중외(中外)에 넘쳤으나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을 사서(史書)에 능히 기록하지 못했고 다만 계사년214) 의 전례(典例)가 있을 따름이다. 나 같은 불초한 사람을 추상(追上)하여 칭양(稱揚)함에 있어 어찌 헤아리는 글자가 넓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릇 문자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항상 부끄러운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여덟 글자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또 여덟 글자이겠는가? 한 글자로 결정한다면 연중(筵中)에서 이미 유시한 ‘고(固)’ 자이다. 이는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고(固)’가 아니라 택하여 잡는다는 ‘고(固)’ 자이다. 이 기전(畿甸)과 삼남의 백성들을 생각하면 음식인들 어찌 달겠는가? 아! 군신(君臣)이 강론하며 갈고 닦아 내 백성들을 구제한다면 어찌 장황(張皇)하게 형식(形式)에 응하는 여덟 글자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각도의 굶주린 백성들을 소견(召見)하여 국수를 먹이고 유의(襦衣)를 하사한 뒤 해당 읍으로 호송하게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이품(二品) 이상의 대신을 불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조정 신하는 국초(國初)의 갑신년215) 과 지난 계사년의 성대했던 일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이번의 이 청을 누가 과하다 하겠느냐? 여러 신하가 분주하니 마치 추위가 몸에 있는 듯하다. 오늘 굶주린 백성들을 소견한 뒤에 원일(元日)의 하례하는 의식을 쾌히 허락하고 양조(兩朝)의 성대했던 일을 다시 거행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누가 내린 것인가? 선조(先朝)께서 주신 것이다. 마땅히 창업했던 옛터에 나아가 백관과 기로소(耆老所)의 사람으로 하여금 광정문(光政門) 안에서 진하(陳賀)하게 할 것이니, 크게 벌림을 버리고 예식만 받들어 위로 옛일을 유양(揄揚)하고 아래로 여러 사람의 심정에 굽어 부응한다면 의식은 비록 간략히 해도 예(禮)를 다한 것이 될 것이다. 어찌 옛날을 빛내고, 후손에게 넉넉함을 전하는 도리가 아니겠느냐? 한결같이 병자년216) 의 전례에 의거하여 관직이 있는 자는 70세 이상, 서인(庶人)들은 80세 이상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편차인(編次人) 조명정(曹明鼎)이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의 이 처분은 온화하고 정문(情文)은 갖추어졌으나 나라의 쓰임은 모자라고 경비(經費)는 지탱하기 어려우니, 크게 경동(警動)하고 크게 진작(振作)할 것이 아닌 것을 제한다면 비록 작은 절약이라 해도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 바로잡고 고쳐 기반(基盤)을 삼지 않는다면 신의 생각에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반드시 토붕 와해(土崩瓦解)의 형세가 있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말한 바가 절실하니 내가 장차 책임지고 일을 맡겠다. 오늘날 군신(君臣)과 상하(上下)는 마치 어지러운 전쟁(戰爭) 중에 있는 것처럼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조명정이 말하기를,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장공예(張公藝)217) 의 1백 번 인(忍) 자 쓰는 공부를 하시고, 무릇 하사(下賜)하는 절차에 관해서는 각별히 감손(減損)을 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좋다."
하였다.
11월 13일 신미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윤동승(尹東昇)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14일 임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대궐에서 산호(山呼)218) 하는 소리가 삼백 년 후에 다시 들리게 되었으니, 이는 군신(君臣) 상하가 만반(萬般)의 태세를 갖추고 한마음으로 경계하고 삼가서 나랏일을 할 때이다. 어제 조명정(趙明鼎)이 아뢴 것이 매우 좋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번 반교문(頒敎文)은 문형(文衡)을 시켜 지어 올리게 한다면 반드시 ‘큰 덕이 수(壽)를 누렸다.’고 할 것이니, 내 스스로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반인(泮人)219) 이 금주령(禁酒令)을 위반했기 때문에 대사성(大司成)을 삭직하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러한 때에 사유(師儒)의 장(長)은 마땅히 능숙한 자에게 맡겨야 한다."
하고, 이조 참판 조명정(趙明鼎)을 특별히 대사성에 제수하였다.
11월 16일 갑술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 및 호서 안집사(湖西安集使)를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삼남의 백성들을 구제한 뒤라야 마음이 편하겠다."
하고, 명하여 북도의 교제창(交濟倉) 곡식 10만 석을 덜어내어 영남에 3만 석, 호서에 3만 석, 호남에 4만 석을 획급하도록 하였다.
지평 신일청(申一淸)이 춘방(春坊)의 신료들로 하여금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에 관한 사적을 널리 조사하여 책자로 만들어 동궁이 항상 볼 수 있는 자료로 만들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나라 인종(仁宗)이 태자로 있을 때의 일과 태조(太祖)가 전벽(殿壁)에 《대학》을 써놓았던 일들을 아울러 기록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춘방으로 하여금 편집케 하여 이름하기를, 《역대감계초략(歷代監戒抄略)》이라 하였다.
11월 17일 을해
임금이 강화에 있는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뽑아낸 춘추관 당상과 낭청을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홍낙성(洪樂性)이 말하기를,
"갑신년220) 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칠순이 되신 해인데 그때에 헌수(獻壽)하고 죄수를 사면하였으며, 옷감을 올리는 등의 절차가 있었고, 헌수할 때에는 지극히 즐거워하여 밤이 되어서야 마쳤습니다. 그리고 을유년221) 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제생원(濟生院)에 명하여 환과 고독(鰥寡孤獨)들을 극진히 구휼하도록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몇 줄 안되는 글이라도 그때의 사적(事蹟)을 보는 듯하다."
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내년의 나라의 경사는 실로 지난 사첩(史牒)에서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증광시(增廣試)를 설행한 것은 선조(先朝)의 계사년에도 이미 전례가 있었고, 또 춘추관 당상 홍낙성의 말을 들으니 선묘조(宣廟朝)에도 역시 증광시를 설행했다고 합니다. 양조(兩朝)에서 이미 행한 예가 이와 같으니, 내년의 경과(慶科)는 마땅히 증광시로 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양조의 고사(古事)가 있었다면 내 어찌 사양하겠느냐? 다만 경외(京外)가 모두 재정이 탕갈되었으니,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라."
하였다.
11월 18일 병자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감귤을 나눠주고 선비들을 시험하여 으뜸을 차지한 이성원(李性源)에게는 고강(考講)한 뒤에 급제를 내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찬(饌)을 내려 주었다.
11월 19일 정축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동춘추(同春秋) 홍낙성이 말하기를,
"명을 받들고 강화로 갔을 때에 연해의 서너 개 면이 흉년으로 적지(赤地)를 면하지 못하였고, 섬 백성들이 수백 명이 무리를 이루어 말 앞에서 호소하였습니다."
하였고, 시독관(侍讀官) 엄인(嚴璘)은 말하기를,
"광주(廣州)의 흉년도 강도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엄인을 광주 순심 어사(廣州巡審御史)로, 강필리(姜必履)를 강화 순심 어사(江華巡審御史)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명하여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을 파직하고, 윤급(尹汲)으로 대신케 하였다.
11월 20일 무인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행하여 금주법(禁酒法)을 어긴 죄인 이원상(李原尙)을 노량진의 모래 사장에서 효시(梟示)하였다.
정광한(鄭光漢)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21일 기묘
송형중(宋瑩中)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김성우(金聖遇)를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한학(漢學)의 전강(殿講)과 이문(吏文)의 제술(製述)을 행하고, 으뜸을 차지한 이숭호(李崇祜)에게 반숙마(半熟馬)를 하사하였다.
이유수(李惟秀)를 승지로, 심수(沈鏽)를 도승지로 삼았다.
장령 김시구(金蓍耉)가 아뢰기를,
"연원 찰방(連源察訪) 조문우(趙文宇)는 수백 포(包)나 되는 둔전의 곡식을 모두 배의 운임(運賃)으로 돌렸으며, 임기가 끝난 후에도 공전(貢錢)을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그대로 쭈그리고 있으니, 청컨대 삭직하소서."
하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한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무더위 때 시사(視事)를 중지하는 것은 옛날부터 전해 오는 법전이다. 그런데 복정(復政)하기 전에 세 번 강(講)을 할 때는 이를 따지지 않았으나 복정한 뒤에는 마땅히 옛 제도를 준수해야 한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한겨울에는 탈품(頉稟)을 허락하겠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루 이틀 만기(萬機)를 다스리다 보니 늙었도다. 이미 백성과 나라에 바친 몸인데 어찌 감히 스스로 편하겠는가.’ 하였으나 한겨울과 한여름의 시사 탈품은 전례에 의거해 승낙하겠다. 전례에 따른 경연은 비록 옛 법제를 따라 탈품을 허락하겠지만, 옛날에 없던 차대(次對)는 실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더구나 한 달에 세 번하던 것을 여섯 번으로 하는 것임에 있어서랴? 옛날의 성대한 일은 날마다 정례적으로 계품하였으니, 옛 예(例)를 비록 따른다 해도 세 번의 강(講)을 추모(追慕)하는 것을 어찌 빠뜨릴 수 있느냐? 또 늙어서 책 읽는 것을 옛사람이 촛불을 밝히는 데 비유했으니, 복정 후에 마땅히 조금 고치는 것이 옳다. 한겨울과 한여름에는 탈품한 뒤 다시 열기 전까지 매달 초1일·초6일·11일·16일·21일·26일은 응탈(應頉) 이외에는 전례에 의거하여 계품하라. 이것으로써 후손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또 옛날에 학문을 권장했던 성명(聖明)의 뜻을 우러러 체득케 하라."
하였다.
11월 23일 신사
남태회(南泰會)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고, 세 정승이 같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오적산(五積散)222) 을 진어(進御)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가래가 응결되어 얹힌 것 같은 증상이 있으나 추위를 만나 응어리진 것에 불과한 듯하니, 정후(庭候)는 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남한 산성 군량미의 수봉을 정지토록 명하였는데, 순심 어사(巡審御史) 엄인(嚴璘)이 아룀으로 인한 것이었다.
11월 24일 임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여 오적산(五積散)을 올렸다.
고(故) 좌의정 정휘량(鄭翬良)에게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 대신 및 호남 안집사(湖南安集使) 홍인한(洪麟漢)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호남 안집사가 아뢴 바를 들으니 무슨 마음으로 수라를 들겠느냐? 교제창(交濟倉)의 1만 석을 먼저 더 획급(劃給)하여 올해 안에 진휼을 베풀도록 하라. 비록 금령(禁令)이 있다 하나 어찌 상례(常例)를 따르겠느냐? 그 중 한 읍은 먼저 접제(接濟)하라. 전주(全州)·나주(羅州) 두 고을은 전벽(殿壁)에 써 붙이고 두 고을의 수령을 신칙(申飭)하여 구임(久任)시키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굶은 뒤라야 호남의 백성들이 살 수 있다. 호남의 대동미(大同米)를 줄이고 전세(田稅)도 역시 줄이도록 하라."
하니,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구제하여 살게 하여 주심이 이와 같으니 성덕(聖德)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그러나 전세는 체모가 중대하니 줄이기 어렵고, 대동미는 줄일 수 있습니다."
하였다.
11월 26일 갑신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여 건공탕(建功湯)을 하루 세 번 진어(進御)하였다.
강화의 환곡(還穀) 중 아직 수봉하지 않은 것 가운데 절반을 정봉(停捧)할 것을 명하였으니, 순심 어사 강필리(姜必履)의 아룀으로 인한 것이었다.
하교하기를,
"북도(北道)의 곡식을 호남으로 운송하는 일은 이미 하교하였으니, 마땅히 물에 빠진 것을 건져내듯 하라. 포항창(浦項倉)의 5만 석은 호남에 배로 운반한 뒤에 마땅히 북곡(北穀)으로 보충하게 하되 특별히 김종정(金鍾正)을 차출(差出)하여 감운 어사(監運御史)로 삼아 곧바로 거행케 하고, 북평사(北評事) 김상익(金相翊)을 북도 독운 어사(北道督運御史)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공(御供)을 먼저 줄인 뒤에야 백관의 급료를 감할 수 있으니, 어공(御供) 1백 석 이상은 30석을 줄이고 1백 석 이하는 10석을 줄이라. 백관의 급료는 신축년223) 의 예(例)에 의거하여 거행하고, 삼남(三南)의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곧바로 복구하라."
하였다.
금위 대장(禁衛大將) 이장오(李章吾)를 파직하고, 김시묵(金時默)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으며, 어영 대장(御營大將) 정여직(鄭汝稷)를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7일 을유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여 건공탕(建功湯)을 하루에 세 번 진어(進御)하였다.
부원군(府院君) 김한구(金漢耉)를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아뢴 바를 듣고 5백 결을 더 급재(給災)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태복시(太僕寺)에서 말 안장에 5색 구슬 다는 것을 지금부터 영원히 폐지할 것이니, 이 또한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말을 물리친 뜻224) 을 본받은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푸주를 멀리한다 하였으니, 나 또한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겠다. 진상한 붕어 같은 것은 궁 안의 연못에서 기르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8일 병술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여 건공탕(建功湯)을 하루 세 번 진어(進御)하였다.
임금이 《최효일전(崔孝一傳)》을 읽으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최효일이 의종(毅宗)의 재궁(梓宮) 앞에서 7일 동안 통곡하고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으니 그 절의(節義)는 삼학사(三學士)보다 못하지 않다. 이 책을 《수열천추전(樹烈千秋傳)》이라 이름하도록 하고, 호조(戶曹)에 명하여 2부를 베껴 1부는 궁중에 들이고, 1부는 사고(史庫)에 보관케 하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최효일은 의주(義州) 사람으로 정축년225) 이후 설치(雪恥)하려는 계획을 품고,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가 오삼계(吳三桂)226) 의 휘하에 있었다. 의종 황제가 순사(殉社)하자 최효일은 7일간 단식하고 의종의 능(陵) 앞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들은즉 고군산(古群山)의 무사(武士) 김상건(金尙建)이 1천 포대의 곡식을 관가에 납입하여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했다 하니, 마땅히 한 사람을 권장하여 백 사람을 용동(聳動)시켜야 한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첨사(僉使)를 의망토록 하고, 만약 그 자리가 없으면 오위 장(五衛將)의 자리를 만들어 의망하라. 또 들으니, 진주(晉州) 사람 하명상(河命祥)이 일찍이 1천 포대의 곡식으로 백성들을 구휼하였다고 하여 조용(調用)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아직도 조용하지 않고 있다하니 또한 자리를 기다려 주(註)를 달아 조용하라."
하였다.
여러 상사(上司)·정원(政院)·옥당(玉堂)·각사(各司)에서 경자년227) 이전에 없었던 것을 추가하여 진배(進排)한 것은 풍년이 들 때까지 한정하여 제감(除減)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9일 정해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고, 건공탕을 하루 세 번 진어(進御)하였다.
정언 홍경안(洪景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주전(鑄錢)하라는 영(令)은 비록 흉년에 재물을 만들기 위해 나온 것이지마는, 신(臣)은 그 혜택이 아래에 미치기도 전에 해가 먼저 따를까 두렵습니다. 농사가 조금 풍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의논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궁(東宮)의 시강(侍講)은 그 책임이 매우 중대하여 하루라도 비워 둘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빈객(賓客) 정실(鄭宲)은 한결같이 외방에 나가 있으니, 중추하여 경계함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전(前) 수찬(修撰) 심욱지(沈勗之)는 마음이 음험(陰險)하고 행실이 비루하여 한낱 장쾌(駔儈)228) 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난양(爛羊)·도위(都尉)는 옛날에 혹시 있었다지만 이마(理馬)·학사(學士)는 지금 처음 봅니다. 사판에서 영원히 삭제하는 율을 이들에게 시행함이 합당합니다. 그리고 전형(銓衡)의 자리에 있으면서 진압할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헛된 공갈에 겁을 먹고 자신을 변명하기 위하여 여러 말을 떠들썩하게 늘어놓았으니, 대총재(大冡宰)229) 로서 자중(自重)할 도리를 크게 잃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이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을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대간(臺諫)의 계사를 정지하거나 계속하는 것은 스스로 공의(公議)가 있는데, 더구나 대신(臺臣)이 말로써 죄를 입은 데 대하여 환수하시라는 청이 이미 대각으로부터 나왔으면 뒤따르는 논의는 갑자기 멈추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전 지평 신일청(申一淸)은 조금도 주저하거나 어려움 없이 선뜻 정계(停啓)하였으니, 빨리 삭직(削職)의 율을 시행하시어 대간의 기품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경안 상소 가운데 주전(鑄錢)에 대한 것은 그 뜻이 진실로 백성을 위한 것이고 또한 이미 행한 일이다. 정실(鄭宲)을 추고하라고 청한 것은 일의 체모는 비록 옳다 해도, 심욱지(沈勗之)에 관한 일은 이미 그 논척이 과함을 알고 있다. 요즈음 옥당(玉堂)이 또한 검의(檢擬)하지 않는 까닭에 한번 하교하고자 했는데, 앞에서 부르고 뒤에서 호응하여 헐뜯기를 마지 않으니 그 뜻이 아름답지 못하고, 말이 총재에까지 미쳤으니 억누르지 않을 수 없다. 신일청(申一淸)의 일은 아! 유광국(柳匡國)이 만약 서쪽의 저문 구름을 바라보았다면 어찌 감히 이와 같았겠는가? 오늘날 북면(北面)하는 자가 누가 감히 연계(連啓)하겠는가? 그런데 감히 이런 청을 하였으니, 그 소장을 돌려 주고 사판(仕版)에서 영구히 간삭하라."
하였다.
11월 30일 무자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는데, 대신과 비국 당상 및 육조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건공탕을 하루 세 번 진어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경안(洪景顔)의 일은 이 어찌 된 것인가? 백발 늙은 나이에 이런 사람에게 기만을 당했으니 이제부터 나는 장차 한림 주서(翰林注書)는 믿지 않겠다. 사람을 알아보기 어렵구나"
하매,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사람을 논함이 이렇게 가혹하고 여파가 총재(冡宰)에까지 미쳤으니 참으로 괴이합니다. 그러나 홍경안을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간삭하는 것은 지나친 일입니다."
하고,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사람을 논함에 이와 같이 애매(曖昧)함은 부당하니, 이 역시 떠들썩한 소문에 동요된 것입니다. 근래에 비록 색목(色目)은 없다고 하나 간혹 이와 같은 일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색목(色目)이 그 장본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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