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1권, 영조 39년 1763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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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기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여러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관원, 여러 승지와 정1품 종신(宗臣)을 소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성수(聖壽)가 칠순(七旬)에 올랐다 하여 천안(天顔)을 우러러 뵈올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승지에게 권농 윤음(權農綸音)을 써서 내려 8도의 도신(道臣)와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신칙할 것을 명하였다.

 

부제학 정존겸(鄭存謙)·응교 홍지해(洪趾海)·부응교 김종정(金鍾正) 등이 차자를 올려 진면(陳勉)하였다. 맨 먼저 ‘언로(言路)를 널리 열 것, 황발(黃髮)에게 물을 것, 청렴하고 정직한 사람을 권장해 쓸 것, 예(禮)를 갖추어 산림(山林)을 초치할 것, 진정(賑政)을 때에 맞게 의논하여 실제의 혜택을 강구할 것’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전학(典學)과 근정(勤政)은 서로 모름지기 일치하는 것입니다. 상종(商宗)001)  이 나라를 오래 누렸음은 시종 일관하는 배움이 있었기 때문이고, 주왕(周王)002)  이 수(壽)를 누렸던 것은 끊임없는 공부가 있었기 때문이니, ‘전학’ 두 글자는 비단 정사(政事)의 근본이 될 뿐 아니라 또한 만년토록 오래 수를 누릴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손수 비답을 써서 내리고 가납하였다. 이어 부제학을 입시(入侍)하게 하니, 명하여 친히 받았다.

 

임금이 태묘(太廟)를 배알(拜謁)하고 이어 영녕전(永寧殿)을 배알하였으며, 창덕궁에 들어가 진전(眞殿)을 봉심(奉審)하였다. 회가(回駕)할 때 종가(鍾街) 앞에 이르러 시민(市民)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임어(臨御)한 지 4기(紀) 동안 한 가지 혜정(惠政)도 없이 이제 칠순을 맞아 다시 너희들을 보게 되니, 내 심히 겸연쩍다."
하였다. 드디어 지나는 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러 영수각(靈壽閣) 섬돌 위에 나아가 승지에게 어첩(御牒)을 받들어 내오라고 명하여 임금이 직접 가늘게 쓰기를,
"옛날 영락(永樂)003) 갑신년004)  은 곧 우리 성조(聖祖)께서 춘추가 일흔이셨던 때이다. 지금 소자(小子)가 겨우 일흔이 되는 원조(元朝)에 공경히 영수각에 절하게 되니, 실로 소자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다. 배수(拜手)하고 기록하여 성열(盛烈)을 드날리노라."
하고, 쓰기를 마치자 다시 합(閤) 안에 봉안(奉安)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또 ‘기영각전 칠순군신(耆英閣前七旬君臣)’이란 여덟 글자를 손수 쓰고, 기당(耆堂)으로 하여금 화답(和答)해 올리라 명하였다. 또 육상궁(毓祥宮)으로 나아가 전배(展拜)를 마친 다음 어가가 신무문(神武門)을 경유하여 근정전(勤政殿)으로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고 반사(頒赦)하였다. 임금이 직접 반사문(頒赦文)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아! 비록 이 해를 만났으나 믿고 의지할 부모가 안 계시니, 아롱진 옷[斑衣]을 입고 즐겁게 해드림을 장차 어디에 베풀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양해하지 아니하고 옛 예(禮)를 준행하려 하기에 크게 벌리는 일은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 칭경(稱慶)하는 의절(儀節)은 억지로 따랐노라. 이에 이 해 정월 초하루에 삼가 종묘·사직에 고하고 근정전 터에서 반사하노라. 아! 옛 대궐에서 산호(山呼)하는 소리를 3백 년 뒤에 다시 듣고 칭경하여 추은(推恩)하는 일을 50년 사이에 재차 거행하니, 보잘것 없는 나 불곡(不穀)005)  이 어찌하여 이에 이르게 되었는가? 지금 이후로 양조(兩朝)의 성사(盛事)는 장차 만세(萬世)토록 민멸되지 아니할 것이며, 과매(寡昧)의 고심(苦心) 또한 천추(千秋)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뭇 신하들이 인협(寅協)할 것을 권면하고 삼농(三農)에 풍년이 들기를 축원하노라."
하였다. 대개 올해는 성수(聖壽)가 일흔인 것은 태조와 부합되고, 즉위한 연수가 마흔에 꽉 찬 것은 또한 숙종 계사년006)  의 경사와 같았으므로 교문(敎文)의 사의(辭意)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하교하기를,
"추은하는 한 가지 일을 이미 태실(太室)에 아뢰었고, 또 정축년의 고사가 있으니, 지금 어찌 다르게 하랴?"
하고, 마침내 전조(銓曹)에 명하여 동중추(同中樞)는 전례에 의거해 연부(連付)하게 하니, 이때 나이 여든으로 추은된 사람이 무릇 2백여 명이었다.

 

이시정(李蓍廷)을 정언으로, 이택진(李宅鎭)을 부교리로 삼았다.

 

1월 2일 경신

어사(御史) 김종정(金鍾正)에게는 영남의 진휼(賑恤)을 감독하게 하고, 윤사국(尹師國)에게는 양호(兩湖)의 조운(漕運)을 감독하게 하라고 명하여 모두 소견하고 면칙(勉勅)해 보냈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를 행하여 서울과 시골에서 각각 한 사람을 뽑았는데, 김재천(金載天)·현영조(玄永祚)는 모두 직부 직부 전시(直赴殿試)007)  하도록 하고 나머지에게는 각각 급분(給分)008)  하였다.

 

1월 3일 신유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과 함께 오도록 한 사관(史官)의 서계(書啓)를 보고나서 하교하기를,
"그대는 세상을 잊은 선비가 아니라 곧 세록지신(世祿之臣)이다. 만약 그대의 조부인 선정(先正)을 생각한다면, 어찌 한번 칠순의 임금을 보고자 하지 않겠는가? 아! 유신(儒臣)을 대신(大臣)처럼 대우해야 하니, 비록 하루에 몇 번 사신(使臣)을 보낸 고사(故事)를 본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어찌 형식을 따른 것이겠는가? 그가 이처럼 하고 있으니, 왕심(王心)이 게으르다 할 만하다. 그가 비록 쇠로(衰老)하였지만 결코 이렇게 해서는 안될 것이니, 이런 뜻을 일체 전유(傳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왕세손(王世孫)에게 시좌(侍坐)할 것을 명하고, 《맹자(孟子)》의 등문공장(滕文公章)을 외우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요순(堯舜)만을 일컫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왕(禹王)·탕왕(湯王)·문왕(文王)·무왕(武王)이 누가 성군(聖君)이 아니겠습니까만, 요순이 상성(上聖)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컫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진중자장(陳仲子章)을 외우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중자(仲子)는 어떠한 사람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어머니가 주면 먹지 아니하였으니,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어머니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자식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도 억지로 그 고기를 먹게 하여 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또한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능히 전유(前儒)가 나타내지 못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 왕세손의 나이 열두 살이었다.

 

1월 4일 임술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가 《중용》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흔이 지난 뒤 《중용》을 읽는데, 대순(大舜)이 자기 허물을 듣는 것을 기뻐하였으니, 성인(聖人)이 된 까닭이다. 지금 나도 또한 내 허물을 듣기를 좋아하고자 한다."
하였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주청 정사(奏請正使)의 임무를 갈아주라고 명하였다. 기전(畿甸)과 삼남(三南)이 흉년을 알려 시임 대신(時任大臣)이 연경(燕京)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을 주청 정사로 삼으라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이제 크게 진휼(賑恤)할 때를 당하였으니, 기민(飢民)을 정밀하게 뽑은 뒤에야 헛되이 소비하는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수령에게 전적으로 맡겨 두지 말게 하고 일일이 직접 점검하여 정밀히 가려 뽑게 하소서. 그리고 또한 묘당(廟堂)에 관유(關由)하도록 하여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살펴 권면하고 징계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5일 계해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춘향 대제(春香大祭)에 쓸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지관사(知館事)에게 강유(講儒)를 인솔해 입시(入侍)하여 《서전(書傳)》을 강(講)할 것을 명하였다. 왕세손이 시좌(侍坐)하니, 임금이 유생(儒生)에게 문제를 내어 각각 문의(文義)를 진달하게 하여 동궁(東宮)으로 하여금 듣게 하였다.

 

1월 6일 갑자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한 다음 주청사(奏請使)로 가는 세 사신(使臣)을 소견(召見)하고 위로·권면하여 보냈다. 진청 당상(賑廳堂上) 이창수(李昌壽)가 아뢰기를,
"본청(本廳)의 은(銀) 천 냥을 통신사(通信使)의 원역(員役)에게 빌려 주라는 명이 있었는데, 본청의 은은 원래 통신사에게 빌려 주도록 허락하는 전례가 없습니다."
하자, 유신(儒臣) 엄인(嚴璘)이 말하기를,
"전에는 3천 냥 중에서 혹 호조·병조와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두 영(營)에서 나누어 빌린 전례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례에 의거해 나누어 빌려 주라고 명하였다. 이때 엄인이 통신 부사(通信副使)의 임무를 띠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칠순을 당하여 양조(兩朝)의 고사(故事)를 추종(追踵)하고 그것을 유양(揄揚)·계술(繼述)함에 있어 우선 육편(六編)의 《속대전(續大典)》〈권수(卷首)에다〉 수서(手書)로 신칙한 것이 있는데, 과연 체행(體行)하고 있는가?"
하고, 이어 칙유(勅諭)를 내렸다. 도승지 심수(沈鏽)가 육조(六曹)의 세 당상(堂上)이 앞으로 나아가 직접 받게 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옳게 여겼는데, 형조·공조의 두 장관(長官)이 병으로 입참(入參)하지 못하였다 하여 모두 체직을 허락하라 명하고 특별히 조운규(趙雲逵)를 형조 판서로, 신회(申晦)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간원 【대사간 홍자(洪梓)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대본 급무(大本急務)’란 네 글자로 진면(陳勉)하기를,
"이른바 대본이란 단지 전하의 본원(本源)의 바탕에 있는 것으로서 귀한 것이 함양(涵養)에 있습니다. 이른바 급무란 동궁(東宮)을 성취시키는 방도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서 요점이 보익(輔翼)에 있습니다."
하였는데, 그 보익하는 방도에 대해 논하기를,
"궁료(宮僚)를 초선(抄選)하고 강연(講筵)을 부지런히 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유현(儒賢)을 초치(招致)하여 보도의 책임을 맡겨 어진이를 쓰는 실효(實效)가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마음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헌부 【장령 이태정(李台鼎)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사람이 타고난 재주는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맹공작(孟公綽)이 대부(大夫)에 적합하지 못했던 것009)  과 황패(黃覇)의 공명(功名)이 군(郡)을 다스릴 때보다 못하게 되었던 것010)  은 옛부터 이미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사람을 쓰는 것은 한번 명환(名宦)을 거치면, 보불 황유(黼黻皇猷)와 전곡(錢穀)·갑병(甲兵)을 맡는 자리에 천거하고 뒤섞어 제수하니, 재주에 따라 벼슬을 맡기는 뜻이 아닙니다. 청컨대 전조(銓曹)에 신칙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본부(本府)에서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죄인 배윤현(裵胤玄)에게 형신(刑訊)을 가하였으나, 공사(供辭)는 전과 같았다.

 

1월 7일 을축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참국(參鞫)한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을 입시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배윤현의 일을 순문(詢問)하니,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용모를 살펴보니, 참으로 실성(失性)한 사람이었습니다"
하고, 판의금 홍상한(洪象漢)은 말하기를,
"호적을 조사해 보았더니, 배윤명(裵胤明)의 겨레붙이가 아니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 공사(供辭)를 보니, 미친 것이 의심할 나위가 없고 또한 ‘부도(不道)’가 아니었다. 특별히 참작하여 흑산도(黑山島)로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 【장령 한필수(韓必壽)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배한 죄인 배윤현이 요언(妖言)·망설(妄說)로 제주 목사(濟州牧使)에게 정장(呈狀)한 것은 먼 지방 백성들의 마음을 선동하지 아니한 것이 없는데, 이제 그 정적(情跡)을 캐지 않고 갑자기 먼 섬에 정배하였으니, 실로 일후의 염려가 있습니다. 청컨대 다시 추국(推鞫)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정언 홍응보(洪應輔)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배윤현이 당초 제주 목사에게 정장한 것은 그 글의 내용이 너무나도 요악(妖惡)하였고, 추문(推問)할 때에 이르러서는 말이 황괴(謊怪)하며 요사스런 말로 뭇사람들을 미혹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정적(情跡)은 채 구명(究明)하기도 전에 작처(酌處)가 갑자기 내려졌으니, 청컨대 엄중하게 추국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정창수(鄭昌壽)를 충청 도사(忠淸都事) 겸 감운 어사(兼監運御史)로 삼고, 유서(諭書)와 절목(節目)을 만들어 주었다. 이어 입시하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거쳐 지나가는 진읍(賑邑)은 반드시 잠행(潛行)한 연후에야 수령(守令)들을 깨우쳐 조심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민사(民事) 때문에 내가 진실로 침식(寢食)이 불안하니, 모름지기 이 뜻을 깊이 유념하여 한밤중에 눈물을 삼키며 내렸던 하교를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비록 사공(沙工)과 격군(格軍)일지라도 만약 한 사람이라도 돌아오지 못한다면 내가 백성을 사랑한다고 하기 어렵다."
하였다.

 

1월 8일 병인

임금이 건춘문(建春門)에 나아가 문무 기로과(文武耆老科)를 설행하여 이종령(李宗齡) 등 여섯 명을 뽑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해운(李海運)을 장령으로, 남운로(南雲老)를 헌납으로, 김낙수(金樂洙)를 정언으로, 황인검(黃仁儉)을 좌윤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우참찬으로 삼았다.

 

1월 9일 정묘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신은(新恩)011)  들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두 전조(銓曹)의 장관(長官)을 입시하라 명하여 하유하기를,
"문무의 신은을 며칠 안으로 빈자리에 따라 즉시 부직(付職)시키라."
하였다. 대개 그들이 늙은 것을 딱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을 마치고 특진관(特進官) 윤봉오(尹鳳五)에게 이르기를,
"경은 옛날 춘방관(春坊官)의 자격으로 입시하라."
하였다. 그리고 동궁에게 시좌(侍坐)할 것을 명하여 《맹자》를 강(講)하게 하고 윤봉오로 하여금 듣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0일 무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가솔 군관(假率軍官)은 원래 정액(定額)이 없어 매번 더 정해 포(布)를 거두는 폐단이 있습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영읍(營邑)에서 더 정하는 액수(額數)를 비국(備局)에 조사 보고하도록 하고, 양역(良役) 실총(實總)의 예를 대략 모방해 그 폐단을 막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원 【대사간 홍자(洪梓)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지평 신일청(申一淸)은 전 북병사(北兵使) 이방좌(李邦佐)가 부임하여 폐단을 고친 것을 크게 칭찬했습니다만, 신일청은 그 당시의 판관(判官)으로서 무릇 옛 곤수(閫帥)의 득실(得失)에 관계된 것을 진실로 마땅히 망령되게 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추포(麤布)를 민간(民間)의 정포(精布)와 바꾼 것 때문에 어사(御史)가 사문(査問)하여 그 죄가 죄다 드러났으니, 신일청의 사정(私情)을 두어 아름다움을 과장하고 아랫사람에게 아부하여 윗사람을 속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관직을 삭탈(削奪)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방좌가 여러 번 부유한 고을과 큰 곤직(閫職)을 맡았지만 집에는 담석(儋石)012)  도 없었으니, 세상에서 무변(武弁) 가운데에서 청렴 결백한 자를 일컬으면 반드시 이방좌를 먼저 꼽았다. 조영순(趙榮順)은 종성 부사(鍾城府使)로서 이방좌에게 불평을 쌓아 왔는데, 홍술해(洪述海)가 어사(御史)로서 조영순의 뜻을 맞추어 이방좌를 탐오(貪汚)하다고 탄핵하자, 공의(公議)가 이미 만족하지 아니하였는데도, 홍자와 같은 사람까지 또한 그 투식을 답습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혜빈궁(惠嬪宮)과 빈궁(嬪宮)이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왔다.

 

1월 11일 기사

문신 전강(文臣殿講)을 설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진형(李鎭衡)·김상집(金尙集)을 정언으로, 윤면헌(尹勉憲)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1월 12일 경오

임금이 재학(齋學)의 도기 유생(到記儒生)013)  의 강(講)을 직접 시험하여 수석을 차지한 주만리(朱萬离)는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고, 나머지에게는 각각 급분(給分)하였다.

 

1월 14일 임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북도 감진 어사(北道監賑御史) 홍술해(洪述海)를 입시하라 명하였다. 홍술해가, ‘병사(兵使) 이방좌(李邦佐)가 억지로 세포(細布)를 바꾸어 강계(江界)로 운반해 들였고 심술이 바르지 못하여 오로지 궤비(詭秘)한 것만을 일삼는 정상’을 상세히 논하였다. 또 말하기를,
"강계에 있을 때 한 고을의 호삼(戶蔘)을 남김없이 죄다 받았으니, 청컨대 엄중하게 구핵(究覈)하여 탐오(貪汚)와 교활함을 징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중하게 신문하여 아뢰게 하였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북백(北伯) 조돈(趙暾)과 전 감사 조명정(趙明鼎)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여 제각기 헐뜯고 배척하는데, 조돈이 비국에 보고한 조사(措辭)는 말을 가려 하지 아니한 것이 많아 체대(遞代)하며 서로 대우하는 체모를 온전히 입었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삭직(削職)하라 명하였다. 조명정은 호서(湖西)와 관북(關北)에 부임하여 염간(廉簡)하다는 이름이 없었는데, 조돈이 교대하면서 다 살펴보고 알게 되어 오랫동안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던 터라 적발 핵실(覈實)하여 주사(籌司)에 보고하자, 조명정이 분노하여 또한 마구잡이로 비방하고 헐뜯었으므로 홍봉한이 주청(奏請)하여 둘 다 파직시킨 것이다.

 

전 현감 송명흠(宋明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접때 한 통의 상소를 올리고는 석고(席藁)한 채 명(命)을 기다렸는데, 비지(批旨)의 총우(寵遇)가 더함이 있었습니다. 또 더욱이 친히 쓰신 한묵(翰墨) 세 글자의 훈유(訓諭)는 정녕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바야흐로 상소를 써서 보잘것 없는 정성을 다하고자 하는 차에 뜻하지 않게도 신의 종질(從姪) 지례 현감(知禮縣監) 신 송부연(宋溥淵)이 와서 입시하라고 선유(宣諭)했을 때 천어(天語)를 삼가 받들었는데, 엄절(嚴切)·순간(諄懇)하여 더욱 신자(臣子)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신은 구구하게 지키는 바가 있어 마침내 차지할 수 없는 직임을 무릅쓰고서, 이 격외(格外)의 은혜를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단지 신이 일찍 전야(田野)로 물러나 본의상 조귀(朝貴)와 소원했던 관계로 말미암아 한 사람도 신을 위해 개인적인 사정을 도달(導達)해줌이 없어서 한갓 헛된 이름으로써 위로 성명(聖明)을 속여 은례(恩禮)를 산만(散滿)하게 만들었으니, 만약 그 까닭을 찾아본다면 신의 죄가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신의 직명(職名)을 해임시켜 조용히 올라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감히 감격하여 보답할 바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며칠 전에 또 돈소(敦召)하였는데, 이제 그대의 소장을 보니, 어찌하여 정지(情志)가 미덥지 아니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던 말인가? 아! 선비는 어려서 배우고 장성해서 행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의 조부인 선정(先正)을 생각한다면 어찌 그 임금을 한번도 보려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비록 직명을 가지고 말을 하지만, 지금 동궁을 위해 부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직명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그대를 올라오게 하기 위해 이 직명을 해임해 준다면 그것이 과연 성실한 것이 되겠는가? 듣자니 이 직명은 두 성정을 위해 둔 것이라 하는데, 그대의 고조(高祖)는 두 선정 중 한 사람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즉시 길에 올라 나의 바람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이어 함께 오게 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해 기필코 함께 오도록 하였다.

 

1월 15일 계유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갔다. 이어 대보단(大輔壇)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예(禮)를 행한 뒤 영숙문(永肅門)으로 들어갔다. 이어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한 뒤 환궁(還宮)하였다.

 

1월 16일 갑술

정술조(鄭述祚)를 장령으로, 구상(具庠)·정환유(鄭煥猷)를 정언으로, 홍중효(洪重孝)를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월 17일 을해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강을 마치자,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서울과 지방에 노직(老職)의 가자(加資)가 남잡(濫雜)한 것이 많으니, 청컨대 지금부터는 상한(常漢)의 품계가 정헌 대부(正憲大夫)인 자는 숭정 대부(崇政大夫)를 제수하지 못하도록 드러나게 정식(定式)으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득맹(尹得孟)을 교리로, 남태회(南泰會)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1월 18일 병자

무신 전강(武臣殿講)을 행하였다. 임경업(林慶業)의 후손 임정섭(林廷燮)을 전조(銓曹)로 하여금 주(註)를 달아 복직(復職)시키고 조용(調用)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헌부 【장령 정언섬(鄭彦暹)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경무(李敬懋)는 일찍이 삼화 현감(三和縣監)을 지냈는데, 남장(濫杖)으로 죽게 한 사람이 많았으며, 본영(本營)에 부임해서는 자질구레한 일로 영속(營屬)을 박살(撲殺)하였습니다. 또 송금(松禁)을 핑계대어 세살 난 아이의 무덤을 파헤치고는 생소나무를 몰래 베었다고 하여 그 아비를 장살(杖殺)하였습니다. 이처럼 잔혹한 부류는 곤임(閫任)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잡아다 신문하여 엄중하게 처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9일 정축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0일 무인

조중명(趙重明)을 장령으로, 이행원(李行源)·김재록(金載祿)을 정언으로, 김광백(金光白)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장령 정술조(鄭述祚)가 상소하여 맨 먼저 성정(性情)을 휴양(休養)하는 도리를 진달하고, 또 왕세손을 교도(敎導)하는 방도를 논하기를,
"전하께서 몸소 교솔(敎率)하시되 반드시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어떤 물건을 만나면 이를 태자(太子)에게 가르치는 것[遇物之論]처럼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옥식(玉食)을 대해서는 반드시 ‘밭 가운데에서 땀방울을 흘려가며 낱낱이 모두 신고(辛苦)하여 얻은 것이다.’라고 하시고 금의(錦衣)를 입을 적에는 반드시 ‘베틀 위에서 손가락이 터져가며 올올이 모두 수고를 쌓아 이룬 것이다.’라고 하시며, 넓은 집에 거처할 적에는 반드시 ‘우리 백성들 중에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고 하시어 일마다 물건마다 교회(敎誨)하신다면 그것이 보고 느끼는 도리에 얻음이 있을 것이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문신(文臣)의 삭시사(朔試射)를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1일 기묘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어기(御器)를 훔친 죄인 유득(有得)·상욱(尙郁)·강시현(康時賢)·이성래(李聖來)를 친국(親鞫)하였다. 국문(鞫問)을 마치자, 경중을 나누어 혹은 정법(正法)하고 혹은 작처(酌處)하였다. 유득은 중관(中官) 김중광(金重光)의 종으로서 고군(雇軍)으로 금중(禁中)에 드나들다가 집상전(集祥殿)에 둔 금은(金銀) 어기를 훔쳐 가졌던 것이다. 일이 발각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곧 심양(瀋陽)에서 얻은 것으로 궐내(闕內)에서 1백여 년 동안 세전(世傳)하던 물건이다."
하고, 좌우 포청(左右捕廳)으로 하여금 기형(譏詗)하게 하여 과연 유득 등을 잡았던 것이다. 국청(鞫廳)을 설치해 자복(自服)을 받은 뒤, 유득을 본부(本府)에 내려 정법하고, 상욱은 종성부(鍾城府)의 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강시현은 삼수부(三水府)의 종으로 삼고, 이성래는 울진현(蔚珍縣)에 년수(年數)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定配) 하도록 하였으며, 그 나머지 관계된 사람인 박창윤(朴昌潤)·김명현(金明鋧)·조덕창(趙德昌)·김명오(金明五) 등은 모두 수직(守直)을 성실히 하지 않았다 하여 모두 산배(散配)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진도(珍島)의 종으로 삼은 죄인 김중광은 범한 죄를 이미 용서할 수 없는데다가, 그 당시의 차비 중관(差備中官)으로서 복식(服飾)과 기명(器皿)을 훔쳐 가지고는 그 종 유득을 시켜 방자하게 팔도록 하였으니, 감운 어사(監運御史)로 하여금 엄하게 세 차례 형(刑)을 가하고 흑산도(黑山島)의 종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간원 【대사간 홍자(洪梓)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상욱(尙郁)이 유득(有得)과 정(情)을 통하고는 도둑질을 가르쳐 이익을 나누고, 손으로 도금을 한 금기(禁器)를 마구 쓴 정상을 그가 이미 자복(自服)하였으니, 유득이 정법(正法)된 뒤 의당 홀로 피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형률(刑律)에 의거해 처단(處斷)토록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장령 정술조(鄭述祚)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상욱이 유득과 함께 금기를 훔쳐내어 도금을 녹여 이익을 나눈 정상을 그가 이미 자복하였으니, 청컨대 유득과 함께 똑같이 정법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김중광(金重光)은, 차비 중관(差備中官)이었을 때 금기를 훔쳐 내어 그 종을 시켜 몰래 스스로 판 정상이 이미 죄인의 초사(招辭)에 나왔으니, 형(刑)을 더하여 배소(配所)를 옮기는 데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하게 국문(鞫問)하여 정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1월 22일 경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호남 어사 정창성(鄭昌聖)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정창성에게 서계(書啓)를 읽으라 명하였는데, 은진(恩津)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곳이 봉고(封庫)한 고을인가?"
하니, 정창성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매, 드디어 은진의 전 현감 서광수(徐廣修)를 잡아다 신문하라 명하였는데, 획급(劃給)한 결전(結錢)을 진자(賑資)에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나주(羅州) 등 세 고을의 공세(貢稅) 중 4분의 1을 정퇴(停退)시키고, 결전 또한 균청(均廳)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정퇴시킬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주(羅州)·무안(務安)의 종곡(種穀)은 요컨대 수만 석(石)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본도(本道)에서 획급한 바 결전·포세(浦稅) 10만 냥 가운데에서 그 먼저 바친 것으로 1만여 냥을 빌려 주고, 파종하여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본색(本色)으로 환보(還報)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어사의 별단(別單)에 청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 헌납 남운로(南雲老)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율봉 찰방(栗峰察訪) 전성천(全性天)은 역노비(驛奴婢)의 가을 신공(身貢)을 다 바친 뒤 역속(驛屬)들이 비로소 조령(朝令)을 듣고 절반을 돌려줄 것을 청하자, 이미 바쳤다고 핑계대며 끝내 내주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금 있다가 잡아다 처리 하라고 명하였다.

 

이창의(李昌誼)를 함경 감사로, 이윤성(李潤成)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1월 23일 신사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원계영(元啓英)·박대유(朴大有)를 지평으로, 홍술해(洪述海)를 부교리로, 정술조(鄭述祚)를 필선으로, 남언욱(南彦彧)을 장령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우참찬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1월 24일 임오

어떤 별이 동정성(東井星) 아래에서 나왔다.

 

주강을 행하였다.

 

1월 25일 계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과 함께 오게 한 사관(史官)의 서계(書啓)를 보고 하교하기를,
"내가 춘방관(春坊官)의 이름으로 구속하고 풀어주지 아니하는 것 또한 성실한 도리에 모자람이 있으니, 이제 우선 체직을 허락하여 그대의 뜻을 굽혀 따른다. 즉시 길에 올라 밤낮 바라는 바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 헌납 남운로(南雲老)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상방(尙方)의 아전이 ‘계(啓)’자를 위조하여 상공(上供)하는 솜을 징색(徵索)하므로 공인(貢人)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전설(傳說)이 낭자합니다. 청컨대 형조(刑曹)에 이송하여 법에 의거해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한(漢)나라 때 ‘효렴천(孝廉薦)014)  이 있었으니, 융성했던 시기의 일이라 할 만하다. 남의 자식이 되어 어버이를 섬기고 남의 신하가 되어 임금을 섬김은 직분(職分)에 있어서 당연한 일인데, 근래에 빙어(氷魚)015)  ·동순(冬筍)016)  ·선침(扇枕)017)  ·황작(黃雀)018)  의 일이 사람마다 모두 있으니, 이 어찌 효도를 장려하는 도리이겠는가? 따로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지금부터 일체 금하도록 하고, 오직 실사(實事)만을 장문(狀聞)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6일 갑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7일 을유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전 찬선 송명흠(宋明欽)에게 하유하기를,
"아! 내 비록 정성은 알지만 그 돈면(敦勉)한 것이 이제 이미 열 번이 되었으니, 옛날의 헌(軒)에 임하고 열 번 사신을 보낸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모름지기 이 뜻을 깊이 유념하여 즉일(卽日)로 길에 오르라."
하고, 이어 사관(史官)에게 다시 돈면(敦勉)하여 기필코 함께 오도록 하였다.

 

심익성(沈益聖)을 사간으로, 이항조(李恒祚)를 정언으로, 남태기(南泰耆)를 판윤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지경연(知經筵)으로 삼았다.

 

1월 28일 병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30일 무자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목릉(穆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였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강가에 사는 사람인 이의배(李義培)란 자가 와서 말하기를, ‘그의 사돈 임채우(林彩羽)의 집에 어떤 괴인(怪人)이 있어 찾아와 돈을 빌려 줄 것을 청했는데, 혹은 요술(妖術)을 부리기도 하고, 혹은 위험한 말을 발설하기도 하여 종적이 수상하였으므로 결박해 두고 와서 고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그냥 두고 묻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친국(親鞫)하겠다는 명을 내렸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이의배를 친국하였다. 이 의배가 공술(供述)하기를,
"신이 임채우의 집에 갔더니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리에 있었고, 이웃 사람 정창욱(鄭昌郁)도 또한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창욱이 신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저기 와 있는 자는 지극히 수상하다. 처음에 돈을 빌려 달라 청하였고, 또 요술이 있으니, 매우 괴이하다.’ 하길래, 신이 그 시말(始末)을 물었더니, 정창욱이 ‘그 사람이 처음에 돈 천 꿰미를 빌려 줄 것을 청했는데, 주인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그 사람이 을러대기를, 「6월 무렵에는 반드시 난리가 있을 것이니 앞으로 나를 따라 마전(麻田)·적성(積城) 사이로 간다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또 칼로 종이를 잘라 노끈을 만들어 단단히 묶어 주인의 앉은 자리 밑에 넣어 두었는데, 조금 있다가 꺼내 보니 죄다 풀려 있고 묶은 곳이 없습니다.
또 말하기를, ‘능히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써서 봉한 글자를 알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과연 ‘금도(金刀)’란 두 글자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써 가지고 손으로 문질러 와서 그 앞에 두었더니, 그 사람이 한참 동안 침음(沈吟)하다가 곧 연적(硯滴) 위에 그 글자를 썼으므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이 또 주머니를 열고는 더듬어 보게 하였으므로 손을 넣어 더듬었더니 단지 5문(文)의 돈만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맨 손으로 그 주머니를 열고 움켜낸 것이 50전(錢)에 가까왔고, 그 돈을 거두어 그 주머니에 넣게 한 뒤 사람을 시켜 다시 더듬어 보게 했더니 단지 5문의 돈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또 신의 관상이 6월 난리 때 이로 인해 벼슬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듣고서 벌벌 떨며 정창욱에게 ‘말이 이와 같으니 놓아 보낼 수 없다. 우선 머물러 있게 하여 그 말을 더 들은 뒤에야 고변(告變)할 수 있다.’ 하고, 드디어 머물러 있게 하였습니다. 저녁밥을 먹은 뒤 정창욱이 임채우의 외사(外舍)에서 그와 함께 자며 다시 이야기를 나눴더니, 그 사람이 또 ‘비단 6월에만 난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이어 망측한 말을 발설하였으며 심지어 감히 말하지 못할 곳까지 언급하였습니다. 신이 듣고는 심히 놀라고 당황하여 파루(罷漏) 후에 장차 결박해 와서 고하려고 하자, 정창욱이 ‘고변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 저자가 만약 말을 바꾼다면 반드시 반좌(反坐)019)  될 염려가 있으니, 우선 기다렸다가 그 말을 바꾸는 단서를 본 연후에 고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그 말을 믿고 기다렸다가 이제야 비로소 와서 고하게 된 것입니다."
하니, 묻기를,
"이미 불측(不測)한 말을 들었다면 어찌하여 편시(片時)를 기다렸던가? 그놈이 만약 도망쳤다면 장차 어찌할 셈이었는가?"
하매, 공술하기를,
"항상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도망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채우에게 물으니, 공술하기를,
"이달 10일 무렵에 일찍이 서로 알지 못하는 주영흥(朱永興)이라 이름하는 자가 갑자기 찾아와 천 냥의 돈을 빌려 줄 것을 청하였는데, ‘5백 냥은 오늘 빌리고 5백 냥은 또 3월 16일에 빌려 장차 공주(公州)의 도인(道人)에게 주어 액막이[度厄]를 할 것인데, 이와 같이 하면 5월 무렵에 비록 난리가 있더라도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듣고 매우 두려운 나머지 돈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주영흥이란 자가 또 묶인 노끈이 저절로 풀어지는 법과 주머니 속의 돈이 가득 찼다가 줄어드는 술수와 글자를 써서 스스로 알아내는 재주로 그 재능을 자랑하였습니다. 또 ‘난리’ 등의 말로 을러대기도 하고, 또 관상술로 꾀기도 하였습니다."
하니, 묻기를,
"너는 그 말을 듣고 누구에게 말했는가?"
하매, 공술하기를,
"먼저 정창욱에게 말하고 다음으로 이의배에게 말했더니, 이의배가 주영흥에게 신술(神術)을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주영흥이 처음에는 사피(辭避)하다가 끝에 가서 보여주니, 이의배는 깜짝 놀라 괴이쩍게 여기며 신에게 ‘그 하는 짓과 하는 말이 매우 몹시 흉녕(凶녕)하니 결박해서 고변하는 것이 옳다.’ 하였고, 정창욱은 ‘경솔하게 발고(發告)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만류하여 자게 하고 밤에 정창욱으로 하여금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게 하였는데, 이의배는 협실(夾室)에 앉아 있었고 신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닭이 울 때 정창욱이 나와서 ‘그 사람이 「6월에는 반드시 난리가 있을 것이고, 5월에는 반드시 망측한 변(變)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이의배와 함께 결박하려고 했더니, 정창욱이 또 ‘경솔하다.’ 하였으므로 이제야 비로소 와서 고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포장(捕將) 이장오(李章吾)가 아뢰기를,
"주영흥의 근각(根脚)을 탐문(探問)했더니 본래 태학(太學)의 전복(典僕)으로서 곧 정하언(鄭夏彦)의 주인(主人)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원(南原)의 이우(李㷒) 또한 주영흥의 동생의 집에 주거을 정하고 있다 합니다."
하였다. 주영흥에게 물으니, 주영흥이 공술하기를,
"장차 임채우에게 돈을 빌리려 하였으므로 이런 꾀고 농락하는 법을 써서 그 마음을 움직이려 했고, 또 공갈하고 을러대는 말을 하여 그 안색을 살펴보려 했던 것입니다. 5월이니 6월이니 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신은 당초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자, 드디어 정창욱과 면질(面質)시켰는데, 정창욱이 주영흥을 향해 말하기를,
"네가 어찌 요술(妖術)로 노끈을 묶어 방석 밑에 두자 노끈이 저절로 죄다 풀리고, 주머니를 풀어 돈을 꺼내보였는데 경각지간에 가득 찼다가 줄어들게 하지 않았단 말이냐?"
하니, 주영흥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정창욱이 말하기를,
"네 어찌 나로 하여금 안보이는 곳에서 글자를 쓰게 하고서는 네가 연적에다 쓰며 ‘이것은 곧 「금도」 자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단 말이냐?"
하니, 주영흥이 말하기를,
"이 또한 옳다. 하지만 곧 궤술(詭術)이지 요술은 아니었다."
하였다. 정창욱이 말하기를,
"네 어찌 6월에는 난리가 있다는 말과 초사흗날에 기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란 말이냐?"
하니, 주영흥이 말하기를,
"기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였다. 정창욱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공주(公州)의 금강(錦江)가에 도인(道人)이 있는데 3월 16일이면 갔다 올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더란 말이냐? 너는 또 5월에 반드시 큰 변(變)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니, 주영흥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런 말을 했단 말이냐?"
하였다. 정창욱이 말하기를,
"흉악한 말을 너는 처음에 임채우에게 했고, 재차 나에게 말하였으며, 또 한덕빈(韓德彬)에게도 하였다."
하니, 주영흥이 말하기를,
"너무 허무맹랑한 말이다."
하였다. 정창욱에게 묻기를,
"너는 망측한 말을 들었으니, 비록 하룻밤을 지냈다 하더라도 그래도 지정율(知情律)이 있다. 더욱이 5월이란 말을 네 어찌 차마 듣고도 즉시 고발하지 않았느냐?"
하고, 정창욱과 이의배를 모두 형신(刑訊)하라 명하였다. 이날 이의배를 임채우와 면질시키니, 이의배가 ‘이당(李當)·한덕빈이 참여해 들었다.’고 납공(納供)하였으므로 발포(發捕)할 것을 명하고, 여러 죄수를 모두 의금부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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