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기축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이당(李當)을 신문했는데, 공술(供述)한 바가 이의배(李義培)·임채우(林彩羽)와 같았다. 묻기를,
"주영흥(朱永興)이 밤에 정창욱(鄭昌郁)과 함께 서로 이야기할 때 그 흉언(凶言)이 또 6월이란 말보다 더 심한 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너는 그것을 들었는가?"
하니, 공술하기를,
"이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즉시 고발하지 않았느냐?"
하니, 공술하기를,
"처음부터 이의배와 임채우는 잡아서 바치고자 하여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의금부에 내렸다. 한덕빈을 신문하니, 공술이 이당과 같았다. 또 묻기를,
"6월에 난리가 일어난다는 말과 5월에 망측한 변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너는 들었는가?"
하니, 공술하기를,
"6월이란 말은 들었으나, 5월이란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에 조리가 있다 하여 특별히 풀어 주었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5월이란 말은, 말이 매우 흉녕(凶獰)하니, 비록 이 조목은 없앤다 하더라도 그 죄가 족히 일율(一律)020) 을 쓸 만합니다. 청컨대 세 번 생각을 더하시어 이 한 조목은 묻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약간척(若干尺)021) 을 위하여 마음이 항상 두려우니, 경의 말이 옳다."
하고, 이 조항은 묻지 말라 명하였다. 또 주영흥을 형신(刑訊)하자, 주영흥이 모두 직초(直招)하였다. 묻기를,
"너는 지금 대역(大逆)을 저질렀다. 네가 말한 공주(公州)의 도인(道人)은 어떤 사람이냐?"
하였으나, 주영흥이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정창욱과 면질(面質)시키니, 주영흥이 말이 꿀려 지만(遲晩)하였다. 또 묻기를,
"네가 부린 요술은 어떤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냐?"
하니, 공술하기를,
"김범갑(金范甲)의 아들에게 배웠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공주 도인이라 하는 자가 이 사람이냐?"
하니, 공술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 이름을 물으니, 공술하기를,
"아명(兒名)은 김호희(金虎喜)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김범갑은 현재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느냐?"
하니, 공술하기를,
"흉소(凶疏) 때문에 벼슬길이 막혔고, 지금은 이미 죽었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그 아들 김호희는 현재 어느 곳에 있느냐?"
하니, 공술하기를,
"현재 충청도에 살고 있다 합니다만, 상세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묻기를,
"그렇다면 네가 어찌 공주 도인이라고 지목했느냐?"
하니, 공술하기를,
"마음속으로 겁이 나서 난언(亂言)한 것입니다"
하였다. 판의금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김호희는 현재 교하(交河)에 있다고 합니다."
하니, 발포(發捕)하라 명하였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병조 참의 정하언(鄭夏彦)은 이름이 죄인의 입에서 나왔고, 그 생질 호희를 또 현재 발포하였으니, 시위(侍衛)의 반열에 그대로 둘 수 없다.’며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2일 경인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서 이당(李當)을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김호희에게 묻기를,
"너는 주영흥(朱永興)을 아느냐?"
하니, 공술(供述)하기를,
"압니다."
하였다. 묻기를,
"네가 어떤 술수를 가르쳤느냐?"
하니, 공술하기를,
"신이 일찍이 외숙(外叔) 정하언(鄭夏彦)의 원주(原州) 임소(任所)에 간적이 있는데, 그때 주영흥이 관주인(館主人)으로 마침 왔기 때문에 서로 만났던 것이고, 가르친 바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네가 어찌 노끈을 묶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단 말이냐?"
하니, 공술하기를,
"아이 적에 어떤 사람이 이 법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서로 장난삼아 해 본 것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쓴 글자를 알아내는 법을 가르쳤느냐?"
하니, 공술하기를,
"가르쳤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주머니 속의 돈이 가득 찼다가 줄어들게 하는 술수를 네가 가르쳤느냐?"
하니, 공술하기를,
"이것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묻기를,
"그렇다면 주영흥이 어찌하여 너를 공주 도인이라 지목했단 말이냐?"
하니, 공술하기를,
"이것은 신이 전혀 알지 못함을 그도 또한 평소에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신을 어찌 공주 도인이라 했겠습니까?"
하였다. 묻기를,
"주영흥의 공초에서는 여러가지 술수를 모두 너에게서 배웠다고 했고, 부도(不道)한 말을 공주 도인에게서 들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너도 또한 ‘공주에 왕래했다.’ 하였으니, 너는 혹 주영흥에게서 수상한 말을 들었는가?"
하니, 공술하기를,
"평생에 언어를 항상 조심하고 삼갔으니, 어찌 주영흥과 더불어 허무 맹랑한 말을 했겠습니까? 청컨대, 면질(面質)시켜 주소서."
하였다. 묻기를,
"주영흥은 전복(典僕)이니, 반드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배운 바가 모두 너에게서 나왔다 하니, 어찌 괴이하지 아니하랴?"
하니, 공술하기를,
"이것은 실로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공술이 명백하다."
하고, 또 주영흥에게 흉언의 근거를 물으니, 공술하기를,
"신이 스스로 망언(妄言)을 지어낸 것이고 언근(言根)은 실로 들은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누차 물었으나 처음 공술과 한결같았다. 임금이 ‘이의배는 공(功)과 상(賞)을 바라 정창욱으로 하여금 주영흥을 끌어들이고, 유혹해 부도(不道)한 말을 하기까지 하였다.’ 하여 엄중하게 한 차례 형신(刑訊)할 것을 명하였다. 또 주영흥에게 언근을 물었으나, 공술이 전과 같았으므로, ‘난언 부도(亂言不道)’로 승복을 받아 결안(結案)하였다. 임금이 차마 주륙(誅戮)을 가하지 못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쟁집(爭執)하였으므로 마침내 정법(正法)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이의배는 대정현(大靜縣)에 충군(充軍)시키고, 임채우는 단천부(端川府)에 정배(定配)하였으며, 정창욱은 임채우의 차인(差人)으로서 이의배를 위해 심부름을 한 데 불과하다 하여 풀어 주었다. 김호희 또한 풀어 주었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김호희가 이제 이미 백탈(白脫)되었으니, 정하언(鄭夏彦)을 전직(前職)에 그대로 유임(留任)시킬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죄인 김중광(金重光)을 삼수부(三水府)의 종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대계(臺啓)로 인해 김 중광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는데, 이날 친국(親鞫)했던 것이다. 그 종 유득(有得)의 일을 물으니, 공술하기를,
"유득은 도망간 지 이미 오래되어 잡으려 했지만 잡을 수가 없었으므로, 경조(京兆)에 정장(呈狀)했더니 입안(立案)을 내 주었습니다."
하였다. 더 엄중하게 형신(刑訊)할 것을 명하니, 공술하기를,
"유득의 죄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또 형(刑)을 더할 것을 명하였으나,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김중광은 이미 두 차례의 형을 베풀었으니, 족히 징계했다 할 수 있다."
하고, 마침내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3일 신묘
유수(柳脩)를 사간으로, 현광우(玄光宇)를 헌납으로, 홍성(洪晟)·이적보(李迪輔)를 정언으로, 홍양한(洪亮漢)을 지평으로, 변득양(邊得讓)을 장령으로, 홍지해(洪趾海)를 부응교로, 정창성(鄭昌聖)·이명환(李明煥)을 교리로, 이득배(李得培)를 부교리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니,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정언 김재록(金載祿)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장령 김시구(金蓍耉)는 전 목사 김치온(金致溫)의 살옥(殺獄) 사건을 논하면서 ‘부탁을 받아 원수를 갚은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이미 놀랄 만한 일입니다. 그리고 연원 찰방(連源察訪) 조문우(趙文宇)의 사건을 논하면서 협잡(挾雜)하여 탄핵·논박(論駁)하였으므로 전해가며 말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직(臺職)을 빙자하여 허황되게 말을 해 대각(臺閣)에 수치를 끼쳤으니, 청컨대 대망(臺望)에서 개정(改正)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예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은 일찍이 전임(銓任)으로 있을 때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방일(李邦一)의 달마(撻馬)를 받았으니 자신이 전지(銓地)에 있으면서 이런 비루한 비방이 있었습니다. 이방일은 그 사실이 누설된 데 노하여 말을 끌고 간 사람을 마구 몽둥이로 때려 죽게 만들었습니다. 청컨대 김상복은 개정(改正)하고, 이방일은 잡아다 신문하여 엄중하게 처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상복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이방일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한성 우윤(漢城右尹) 이은(李溵)은 석갈(釋褐)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였는데, 장용(奬用)함이 너무 빠르니, 청컨대 새로 내리신 자급(資級)을 빨리 도로 거둘 것을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엄중한 하교로 나무라고 윤허하지 않았다. 김재록이 마침내 인피(引避)하고 체직(遞職)을 청하니, 임금이 ‘그가 협잡을 했다.’ 하여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어용(御容) 두 족자를 경현당(景賢堂) 동쪽 벽에다 걸고,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에게 앞으로 나와 화상기(畵像記)를 읽으라 명하였는데, 곧 어제(御製)로서 문답(問答) 형식으로 된 것이었다. 왕세손에게 시좌(侍坐)하라 명하고, 이어 묻기를,
"왼쪽에 궤(几)를 두고 오른쪽에 장(杖)을 둔 뜻을 네가 아느냐?"
하매,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궤를 왼쪽에 둔 것은 기대는 데 편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장을 오른쪽에 둔 것은 부지(扶持)하는 데 적당토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니, 임금이 잘했다고 칭찬하였다.
임금이 양호 감운 어사(兩湖監運御史) 윤사국(尹師國)과 삼도 감운 어사(三道監運御史) 김종정(金鐘正)에게 장계(狀啓)를 읽으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비록 1천 포(包)의 곡식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호남(湖南)의 수천 기민(飢民)을 살릴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감운(監運)을 명한 것은 삼도(三道)의 기민을 위해 그랬던 것이다. 차후로는 호남에서 선운(船運)한 뒤 나머지 곡식은 창고에 남겨 두도록 하라."
하였다.
2월 4일 임진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5일 계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이 끝나자 임금이 왕세손에게 시좌(侍坐)하라 명하였다. 또 태학(太學) 및 사학(四學)의 재임(齋任)을 입시(入侍)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손(祖孫)·군신(君臣)·제유(諸儒)가 한 당(堂)에서 강송(講誦)하니,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너희들은 마땅히 공심(公心)으로 나라를 섬겨야 할 것이다."
하였다.
2월 6일 갑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서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고, 이어 기전(畿甸)과 삼남(三南)의 유민(流民)을 소견(召見)하였다. 나주(羅州)의 전 목사 홍역(洪櫟)과 해남(海南)·과천(果川)의 여러 수령들을 모두 잡아다 처리하라 명하고, 고양 군수(高陽郡守) 신희(申暿)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결장(決杖)하게 하였으니, 읍민(邑民) 중에 유산(流散)한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있다가 대신(大臣)의 아룀으로 인해 신희를 결장하라는 명은 도로 정지시켰다.
2월 8일 병신
상참(常參)을 행하고 겸하여 조강(朝講)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제도(諸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매달 말에 아무 고을에 기민(飢民)이 얼마나 되는지, 분진(分賑)한 것이 몇 차례였는지, 그리고 유망(流亡)의 유무(有無)를 비국에 상세히 보고해 부지런하고 태만한 것을 상고하는 바탕으로 삼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헌부 【지평 홍양한(洪亮漢)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상 좌병사 김범로(金範魯)는 일찍이 충청 수영(忠淸水營)을 맡았었는데, 체지(帖紙)를 내어 강상(江商)·해고(海賈)에게 금송(禁松)을 허락하고는 사선(私船)을 많이 만들어 군향(軍餉)을 도중(島中)의 부민(富民)들에게 몰래 발매(發賣)하여 이식을 불려 자신을 살찌웠습니다. 그리고 금정 찰방(金井察訪) 조강규(趙康逵)는 징봉(徵捧)할 즈음에 태장(笞杖)이 낭자하여,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심지어 스스로 목을 메어 죽은 자까지 있었습니다. 청컨대 모두 잡아다 신문하여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박사해(朴師海)를 부수찬으로, 이담(李潭)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9일 정유
편차인(編次人)과 세 대신(大臣)·비국 당상·원주 어사(原州御史)를 입시(入侍)하라 명하고, 찬(饌)을 내리라 명하였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균역청(均役廳)의 어전법(漁箭法)이 근래에 점차 해이해져 외방(外方)의 토호(土豪)가 사사로이 스스로 세(稅)를 걷는 폐단이 있으니, 청컨대 엄중하게 조사·구명(究明)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사해가 아뢰기를,
"원주의 이집(李㙫)은 여덟 살 때 아비의 병을 위해 하늘에 기도하였고 또 손가락을 벤 피로 아비를 회생시키게 되었다 합니다. 신이 미복(微服)으로 찾아가 보았더니, 대개 고궁(固窮)한 선비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아뢴 바를 듣건대, 여덟 살 때 한 행동에서 그 정성을 볼 수 있고 조용히 지내며 글을 읽는 데서 그 조행(操行)을 볼 수 있다. 옛날 당(唐)나라의 동생(董生)022) 은 자사(刺史)가 능히 천거하지 못하였지만, 지금 이집은 도신(道臣)이 능히 천거하였으니, 만약 문밖에 아전이 와서 조세를 독촉하고 다시 돈을 요구한다면 이는 지금 군주의 허물인 것이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데 정려(旌閭)하는 것은 효자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니, 특별히 복호(復戶)를 주고 조세를 면제시킬 것이며, 또한 도신으로 하여금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하게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강원도 도신이 이집의 효행을 장문(狀聞)하였는데, 임금이 그 포장(褒奬)한 것이 실상에 지나친 것일까 염려하여 어사를 보내 염탐(廉探)하게 하였다. 그런데 박사해의 아룀을 듣고 가상히 여겨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2월 11일 기해
정언 이적보(李迪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함경 감사 조돈(趙暾)이 조명정(趙明鼎)의 일을 논하여 비국(備局)에 보고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과연 범한 것이 있다면 마땅히 그 형률(刑律)을 더해야 할 것이고, 이것이 혹시 사실과 틀린 것이라면 또한 그 죄가 있어야 할 것인데, 곡직(曲直)을 논하지 아니하고 모두 견삭(譴削)을 베풀었으니, 조정의 형정(刑政)은 마땅히 이처럼 두리뭉실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번 사실을 조사하여 명백하게 처분함이 마땅합니다.
수부(水部)의 1년 지용(支用)은 단지 사소한 전포(錢布)에 의지하고 있을 뿐인데, 새로 거둔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경비가 이미 줄어들었다고 전해지는 말이 매우 낭자합니다. 청컨대 해당 당상을 파직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전 정언 김재록(金載祿)을 삭직(削職)하라는 명을 빨리 도로 거두도록 명하시어 거리낌없이 말하는 문을 열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비답을 내려 엄하게 질책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대신(大臣)과 예관(禮官)에게 같이 입시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숙릉(淑陵)과 지릉(智陵)을 수개(修改)하는 일을 하순(下詢)하고, 영의정 신만(申晩)을 보내 가서 그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내가 이미 능히 직접 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경(卿)에게 중대한 일을 맡기는 것이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깊이 유념하여 내가 직접 가는 것과 차이가 없이 하도록 하라."
하니, 신만이 말하기를,
"감히 성명(聖命)에 삼가 복종하여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2일 경자
주청사(奏請使)로 가는 세 사신(使臣)인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과 부사(副使) 홍중효(洪重孝), 서장관(書狀官) 홍지해(洪趾海)를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행하는 바가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에 왕세손으로 하여금 시좌(侍坐)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 위면(慰勉)하여 보냈다.
예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 겨울 참군(參軍) 이의석(李義錫)을 통해 들었는데 ‘영흥(永興)의 관예(官隷)가 전 부사(府使) 이달해(李達海)를 찾아가 뵈니, 이달해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자, 「이조 판서 집에서 말을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였습니다. 대개 이의석은 신의 옛 막비(幕裨)로서 마침 이달해와 한 자리에 있다가 곁에서 그 말을 듣고 신에게 이처럼 말했던 것입니다. 신이 듣고서 매우 놀라고 괴이쩍게 여겨 이달해를 불러 물어보았더니 과연 이의석의 말과 같았는데, 영흥의 관예가 이미 내려가 버렸으므로 신이 함경 감사 조돈(趙暾)에게 편지를 써 보내 사실을 조사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영흥 부사 이방일(李邦一)이 그 관예를 몽동이로 쳐서 조사하는 일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방일에게 만약 잘못한 바가 없고 관예가 전관(前官)에게 말한 것이 진실로 허망한 것이라면 이 방일로서는 오직 조사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할까를 두려워해야 할 것인데, 이에 도리어 그 관예를 먼저 다스려 그대로 경폐(經斃)하게 한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요? 신이 외람되게도 육경(六卿)의 반열에 있으면서 한 무변(武弁)에게 속고 모욕을 당했으니, 다만 신 자신의 수치가 될 뿐만이 아니고, 조정에서 마땅히 몹시 미워해야 할 바였으므로 신이 과연 비국 당상이 서로 모이는 곳에서 말했던 것인데, 진실로 대신(臺臣)이 도리어 이것을 가지고 신을 논할 죄안(罪案)을 만들어 낼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개석(開釋)하였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처럼 하는가?"
하였다.
2월 13일 신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전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과 함께 오게 한 사관(史官)의 서계(書啓)를 읽으라 명하였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유현(儒賢)이 이미 길에 올랐으니, 성상께서 성심으로 돈소(敦召)한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봄철을 당하니, 내 마음이 홉족하다. 그리고 그 기회(機會)를 살펴보니, 애연(藹然)히 만물과 함께 봄을 누릴 희망이 있게 되었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유현(儒賢)은 곧 덕(德)을 이른 군자(君子)입니다. 이제 한번 들어오면 사림(士林)들도 또한 많이 긍식(矜式)할 것이니, 어찌 나라의 다행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산야(山野)의 사람은 본디 저어(齟齬)023) 한 것이 많으니, 성상께서 마땅히 일에 따라 굽어 양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홍봉한이 아뢰기를,
"관서백(關西伯)이 ‘강계 부사(江界府使) 심의희(沈義希)를 발송(發送)시키지 말라는 일을 편지로 비국(備局)에 통보해 왔는데, 편지가 채 도착하기 전에 심의희가 이미 사조(辭朝)하여 이 소식을 중로(中路)에서 듣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마땅히 변통(變通)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체직(遞職)시키라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심의희가 과연 변쉬(邊倅)에 적합하지 않다면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로 파직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사서(私書)로 비국에 보고하였고, 대신이 또 사서로써 아뢰어 체직시켰으니, 조정의 체모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 대신과 도신이 모두 잘못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2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註 023] 저어(齟齬) : 기대에 어긋남.
사신(史臣)은 말한다. "심의희가 과연 변쉬(邊倅)에 적합하지 않다면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로 파직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사서(私書)로 비국에 보고하였고, 대신이 또 사서로써 아뢰어 체직시켰으니, 조정의 체모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 대신과 도신이 모두 잘못한 것이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4일 임인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공경히 맞이하고, 홍릉(弘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2월 17일 을사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을 전배(展拜)하였는데, 비가 새기 때문에 봉심(奉審)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그대가 길에 올랐다는 것을 듣고 날짜를 꼽으며 기다리고 있다. 지금 내가 그대를 생각함은 가뭄에 무지개를 바람과 같다. 주강(晝講) 때 명이 있었으니, 즉시 들어오도록 하라. 내가 마땅히 동궁과 더불어 그대를 만나 보리라."
하고, 이어 사관(史官)을 보내 전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에게 전유(傳諭)하여 함께 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2월 18일 병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임금이 사서(司書) 정술조(鄭述祚)에게 묻기를,
"동궁이 오늘 무슨 장(章)을 강(講)하였는가?"
하고, 이어 세손에게 묻기를,
"공자(孔子)가 어찌하여 자주 물에 대하여 일컬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것이 밤낮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나 도랑을 혹 사람의 힘을 써서 틔우기도 하고 파기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더러운 것들이 막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능히 몸에 공부(工夫)를 하기를 마침 내를 틔우는 것처럼 할 수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마땅히 거울을 닦는 것처럼 마음을 씻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거울의 본질이 어두워 닦는다는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본질이 어찌 일찍이 어두웠겠습니까? 먼지에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닦으면 밝아질 것이니,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잘한다 칭찬하고, 여러 신하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장차 너를 위하여 자성편(自省編)을 문답 형식으로 만들어 춘방(春坊)에 내릴 터이니, 너는 그것을 좌우(左右)에 두고 경계하며 반성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사판(祠版)이 석담(石潭)으로부터 도성(都城)에 들어온다는 것을 듣고,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고, 제문(祭文)은 유신(儒臣)에게 지어 올리게 하였다.
판돈녕 한사득(韓師得)이 이적보(李迪輔)가 상소하여 논척(論尺)한 것 때문에 상소하여 대변(對辨)하기를,
"본조(本曹)에서 새로 받는 것 및 공가(貢價)의 응하(應下)는 언제나 겨울 석달 동안에 있는데, 각양의 진배(進排) 및 원역(員役)에게 내리는 것이 모두 이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 겨울 가정(加定)한 공가는 거의 별도의 예(例)와 같았으니, 새로 받은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경비가 이미 줄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에 근거하여 발설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재임하고 있을 때 받은 바와 쓴 바는 모두 부록(簿錄)에 있으니, 한 번만 살펴보면 핵실(覈實)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2월 19일 정미
전 현감 송명흠(宋明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는 말을 듣건대, 전하께서 천신(賤臣)에 대해 언급하시어 혹시 유현(儒賢)이란 이름을 더하셨다고 하니, 신은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옛날 선정신 이황(李滉)이 소명(召命)을 받고 나아갈 적에 기대승(奇大升)이 미리 청하기를, ‘이황이 오더라도 예대(禮待)를 너무 융숭(隆崇)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고 책임을 너무 무겁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이황은 반드시 불안해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황은 대현(大賢)이요, 기대승은 문인(門人)이었는데, 그가 말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당시 군신(君臣)·붕우(朋友) 사이에 성실했던 의리는 진실로 후세에 모범으로 삼을 만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의 고심(苦心)을 헤아리시어 전 현감의 복색(服色)으로 진대(進對)하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실로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바야흐로 지금 국세(國勢)는 누란(累卵)의 위기가 있고 민생(民生)은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궁의 예학(睿學)이 날로 새로워져 그 보익(輔翼)·훈도(薰陶)하는 바를 하루라도 늦출 수 없으니, 이는 바로 깊은 근심이 성인(聖人)을 계도(啓導)하고 많은 어려움이 나라를 부흥시킬 일대 기회입니다. 오늘날 현재(賢才)는 적임자가 없지 않고 기덕(耆德)·대유(大儒) 중에는 정력(精力)이 아직도 강성하며 또한 몸에 강직(講職)을 가지고 근기(近畿)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덕음(德音)을 환발(渙發)해 널리 군언(群彦)를 부르시어 신으로 하여금 무리지어 나아가는 성대함을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신의 가고 오는 것도 또한 영광이 있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누차 송명흠을 징소(徵召)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송명흠이 교외(郊外)에 이르러 이 상소를 올리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전날 있었던 복색(服色)으로 입시(入侍)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이어 직접 ‘옷을 가다듬고 기다려 장차 면유(面諭)하고자 한다.[整衣以侍將欲面諭]’는 여덟 자를 써서 사관(史官)에게 주며 말하기를,
"그대는 이것을 가지고 가서 유현에게 전하여라. 내가 ‘정좌(整坐)하고’라고 쓰고 싶다만, 원기(元氣)가 또 편안하지 못하니, 유현이 들어오기 전에 만약 능히 앉아서 기다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를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옷을 가다듬고[整衣]’라고 썼으니, 이 뜻을 아울러 유시(諭示)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서 기다렸는데, 이때 시각이 이미 4고(鼓)를 지났다. 송명흠이 사관을 통해 아뢰기를,
"진퇴(進退)가 명백한 것은 옛 현인(賢人)이 귀하게 여겼던 바였고, 전도(顚倒)된 의상(衣裳)은 시인(詩人)이 기롱(譏弄)한 바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진신(進身)하는 처음에 먼저 예의(禮儀)를 잃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마땅히 조의(朝衣)를 입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엄명(嚴命)을 받들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현조(李顯祚)를 사간으로, 김화중(金和中)을 지평으로, 이택진(李宅鎭)을 정언으로, 홍낙명(洪樂命)을 부응교로, 조명정(趙明鼎)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조돈(趙暾)을 한성 우윤(漢城右尹)으로, 홍낙성(洪樂性)을 경기 감사로, 신위(申暐)를 대사성으로, 김종정(金鐘正)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신광익(申光翼)을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2월 20일 무신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갔다. 왕세손에게 시좌(侍坐)하라 명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 찬선 송명흠을 선소(宣召)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중용》을 강(講)하였는데, 송명흠에게 먼저 문의(文義)를 진달하게 했으나, 송명흠이 사양하였으므로 마침내 부제학 정존겸(鄭存謙)에게 먼저 진달하라 명하였다. 송명흠이 말하기를,
"신의 상소에 이미 진달하였거니와 유현(儒賢)이란 칭호는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경연관(經筵官)이라 일컬어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라고 명하였다. 송명흠이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중용(中庸)’의 뜻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요?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을 일러 ‘중(中)’이라 하고, 평상(平常)을 일러 ‘용(庸)’이라 하니, 날마다의 행위에 있어 그 하는 일에 마음이 있는 것은 또한 ‘중’이 아닙니다. 제왕(帝王)의 학문은 필서(匹庶)와 다르니, 이제 이 장(章)의 지성(至誠)의 도리로 말씀드린다면, 진실로 마땅히 정성으로써 힘써 시종 일관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털끝만큼도 스스로 성인(聖人)이라 여기시는 마음 없이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아흔 살에도 스스로 경계했던 것을 모범으로 삼으시어 성인의 자질이 더욱 성인이 되는 경지로 나아간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간략하고도 극진하니, 나도 모르게 흠탄(欽歎)한다. 나의 공부는 비록 독실(篤實)하지는 못하나, 그 아는 바는 어두운 데 이르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번 이 글을 강(講)하였건만, 글은 글대로이고 나는 나대로였으니, 나도 모르게 절로 부끄러워진다. 지극한 정성을 가진 사람은 진실로 논할 것도 없지만, 비록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의 중주(中主)라 할지라도 흥망(興亡)의 기미를 모두 능히 스스로 알았을 것이다. 상상(祥桑)024) 과 구치(雊雉)025) 의 재앙에도 측신(測身)하며 행실을 닦았으므로 재앙을 변화시켜 복으로 만들었던 것이고, 그 나머지 인군은 비록 능히 알았다 하더라도 측신하여 행동을 닦지 못하는 데야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송명흠이 말하기를,
"요얼(妖孼)은 장차 망하려고 하는 나라에는 발생하지 아니하고 다스릴 만한 세상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송(宋)나라 경공(景公)의 한마디 말에 형혹성(熒惑星)이 자리를 옮겼던 것026) 입니다. 성상께서 다만 마땅히 실질로서 하늘의 경고에 응답하시고 경척(警惕)·수성(修省)하신다면 사람의 힘으로 조화(造化)를 빼앗을 수 있으니, 그 전이(轉移)하는 기틀은 인주(人主)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언로(言路)의 열리고 닫힘이 곧 하나의 재앙이자 상서입니다. 지금 말 때문에 죄를 얻어 오랫동안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만약 모두 풀어주라고 명하신다면, 언로를 열 수 있을 것이니, 또한 재앙을 상서로 전환시키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어찌 힘써 따르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고심(苦心)이 있어 갑자기 변경시키기 어려운 점이 있다. 또 어진 사람이라야 능히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는 뜻에 지키는 바가 있다."
하였다. 송명흠이 말하기를,
"성교(聖敎)에 이른바 ‘고심’이란 과연 무엇을 이르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조정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내가 동인 협공(同寅協恭)토록 만들어 대도(大道)를 함께 하고 싶다."
하였다. 송명흠이 말하기를,
"어진 사람이라야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진실로 지극히 공정한 데서 나오는 것인데, 전하의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심은 간혹 지극히 공정함을 잃기도 하니, 어찌 나라의 복이겠습니까? 또 올해 나라의 경사는 전에 없던 것이니, 한결같이 모두 탕척(蕩滌)하여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게 해 준다면, 이것이 어진 사람의 일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공부가 공정하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송명흠이 말하기를,
"격물(格物)·치지(致知)의 공부가 극진하지 못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공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을 광구(匡救)하는 자는 충(忠)이고 임금의 잘못에 아부하고 순종하는 자는 충이 아니니, 이것을 미루어 나가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저절로 공정해질 것입니다. 무릇 진언(進言)에 대해서는 말이 쓸 만하면 쓰고 쓸 수 없으면 쓰지 않을 뿐입니다. 어찌 갑작스레 벌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천천히 강구(講究)해야 할 것이니 모름지기 말을 쓰지 않았다 하여 떠나지 말라. 내가 경연관(經筵官)을 얻은 것이 마치 밝은 촛불을 얻은 것과 같으니, 모름지기 상세히 문의(文義)를 진달하라."
하였다. 이어 앞으로 나오라 명하고, 세손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네가 유현을 알았으니, 공경하고 잊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세손에게 《맹자(孟子)》를 외우라 명하니, 송명흠이 문의를 진달하였다. 송명흠이 장차 물려나려고 하자, 임금이 그의 손을 잡고는 말하기를,
"경연관이 이미 왔으니, 자주 동궁을 보고 모름지기 보도(輔導)하는 방도를 다하도록 하라. 만약 승락을 받지 못한다면 이 손을 놓기 어렵다."
하니, 송명흠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어찌 감히 급히 돌아가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 차례 상소하고 떠나가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니, 송명흠이 말하기를,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손을 놓으며 말하기를,
"내가 승락을 얻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유현(儒賢)이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들을 석방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다만 김시찬(金時粲)만은 갑작스레 석방할 수 없다."
하니,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단지 감등(減等)만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석방하는 것이지 어찌 감등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말 때문에 죄를 입은 사람이 한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니, 석방할 만한 사람을 석방한다면 또한 유현을 대우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박치륭(朴致隆)은 족히 책망할 것도 없으니, 석방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 상신(相臣) 김재로(金在魯)가 일찍이 이언세(李彦世)를 그르다 하더니, 그 말이 진실이었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박치륭의 상소는 그가 스스로 변명한 것이 아니고 남의 사주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신의 노여움은 박치륭에게 있지 않았으니, 이언세의 일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치륭은 석방할 수 없다."
하였다. 홍봉한이 또 유당(柳戇)·윤시동(尹蓍東)·서형수(徐逈修)에게 언급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논하지 말라."
하였다. 홍봉한이 서유원(徐有元)·유광국(柳匡國)의 일을 진달하니, 임금이 석방하라 명하고, 이어 한익모(韓翼謨)·황경원(黃景源)의 직첩(職牒)을 돌려주라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임덕제(林德躋)·윤숙(尹塾)은 말로 죄를 얻은 사람과는 다름이 있으니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또 종성 부사(鐘城府使) 조영순(趙榮順)을 내지(內地)에 옮겨 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르고, 드디어 삭판(削版) 이하의 여러 죄명을 탕척(湯滌)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옛날 문언박(文彦博)027) 은 정승이 되어 당개(唐介)028) 를 소환(召還)할 것을 자주 청했는데, 홍봉한은 박치륭에 대해 소환을 청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상소와 아울러서 사주를 받은 것으로 돌려보냈으니, 이는 노국공(潞國公)029) 의 죄인이라 이를 만하다. 이러고도 오히려 어찌 군주의 청문(聽聞)을 능히 감동시키고 언로(言路)가 열려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9책 101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26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註 027] 문언박(文彦博) : 송(宋)나라 명상(名相).[註 028] 당개(唐介) : 송나라의 직신(直臣).[註 029] 노국공(潞國公) : 문언박의 작호(爵號).
사신은 말한다. "옛날 문언박(文彦博)027) 은 정승이 되어 당개(唐介)028) 를 소환(召還)할 것을 자주 청했는데, 홍봉한은 박치륭에 대해 소환을 청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상소와 아울러서 사주를 받은 것으로 돌려보냈으니, 이는 노국공(潞國公)029) 의 죄인이라 이를 만하다. 이러고도 오히려 어찌 군주의 청문(聽聞)을 능히 감동시키고 언로(言路)가 열려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간원 【대사간 이담(李潭)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도신(道臣)이 돌아 올 적에는 수령의 파직을 청하는 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교하 군수(交河郡守) 정경순(鄭景淳)의 파출(罷黜)은 앞도 뒤도 아니요 체임(遞任)된 이튿날에 있었으니, 그 곡순(曲循)한 자취를 가릴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경기 감사 김기대(金器大)를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흥(永興)의 전 부사(府使) 이방일(李邦一)을 의금부에 내리고, 그 달마(撻馬)를 뇌물로 준 일에 대해 핵문(覈問)하였는데, 이방일이 이미 납공(納供)하였으므로, 임금이 이방일을 단지 파직만 시키라고 명하였다.
전 좌윤(左尹) 조돈(趙暾)을 간성군(杆城郡)에 부처(付處)하였다. 처음에 조돈이 북번(北藩)에 있을 때 전 북백(北伯) 조명정(趙明鼎)의 일을 비국(備局)에 논보(論報)했다가 견파(譴罷)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상소하여 신변(申辨)하였다. 그가 교제창(交濟倉)의 돈과 포목(布木)을 사사로이 탕감한 일에 대해서 논하기를,
"조명정은 돌아올 때 임하여 영전(營錢) 2만 냥과 포목 20동(同)을 사사로이 탕감했는데, 그 중 교제창의 돈 3천 7백여 냥과 방군포(防軍布) 13동이 탕감하는 데로 뒤섞여 들어갔습니다. 영채(營債) 또한 공채(公債)인데 어찌 하루아침에 탕감을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교제창의 돈과 포목을 탕감한 수량을 또한 어찌 현재 있는 장부에 곧바로 기록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전세(田稅)로 더 거둔 일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신이 도임(到任)한 처음에 조명정이 한 일을 조사해 보았더니, 상정(詳定)의 초본(草本)을 고치면 마음대로 증가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수령이 보장(報狀)하여 증가시킬 것을 청하면 증가시켜 주고 하리(下吏)가 정장(呈狀)하여 증가시켜 주었던 것이니, 열 고을에 부세(賦稅)를 증가시킨 것이 어찌 그리도 심하게 범람(汎濫)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사천(私賤)의 도시(都試)에 대한 일을 논하기를,
"도시는 곧 한 도(道)의 군정(軍政)에서 중대한 것입니다. 우등(優等)한 자는 직부(直赴)시키고, 차위(次位) 및 이미 출신(出身)한 자는 변장(邊將)·승전(承傳)이 되는데, 조명정은 사정(私情)에 끌려서 바꾸었으며, 내노(內奴)로서 이름이 선두안(宣頭案)030) 에 있는 자를 억지로 사천으로 만들어 그의 부족(婦族)에게 주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은 불행하게도 조명정과 재차 교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명정은 호서(湖西)에 부임했을 적에 재결(災結) 7천여 결을 제멋대로 분급(分給)했습니다. 재정(災政)의 문부(文簿)야말로 얼마나 긴요하고 중대한 것입니까? 그리고 관원(官員)이 없는 고을에는 친비(親裨)를 대신 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란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엄중한 하교로 책망하고, 드디어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상소를 봉입(捧入)한 승지를 파직하였다.
한광조(韓光肇)를 도승지로 삼았다.
전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에게 식물(食物)을 하사하였다. 송명흠이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2월 21일 기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2일 경술
임금이 ‘한식(寒食) 날 동풍(東風)에 어원(御苑)의 버들가지가 비스듬히 누었다.[寒食東風御柳斜]’로 제목을 내어 은대(銀臺)·옥서(玉署)의 한림(翰林)·주서(注書), 춘방(春坊)·기성(騎省)031) 의 당상관과 낭관(郞官)에게 10운(韻)의 7언 배율(七言排律)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뜰에 나아가 각 릉(各陵)의 한식(寒食) 때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공경히 맞이하고, 무신 향관(武臣享官)은 향을 받을 때 군복(軍服)을 벗으라고 명하였다. 무신으로서 재직(在職)하고 있는 사람은 비록 공복(公服)이라 하더라도 항상 군복을 껴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2월 24일 임자
전 북병사(北兵使) 이방좌(李邦佐)를 양양부(襄陽府)에 찬배(竄配)하고 10년을 금고(禁錮)시켰다. 어사 홍술해(洪述海)의 아룀으로 인해 이방좌를 잡아다 신문하였으나 이방좌는 승복하지 아니하였고, 엄형(嚴刑)을 시행하여 엄중하게 묻자 이에 자수(自首)하였다. 좌의정 홍봉한(洪奉漢)이 아뢰기를,
"이방좌는 평소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으니, 좌죄(坐罪)된 것에 그 진위(眞僞)를 알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가벼운 형률(刑律)을 쓴 것이다.
임금이 경학(經學)으로 초선(初選)된 사람은 법강(法講)에 들어가면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서연(書筵)에 들어가면 서연관(書筵官)이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 구례(舊例)에는 경연관과 서연관을 반드시 계하(啓下)했는데, 임금이 자의(諮議)나 남대(南臺)032) 에 통청(通淸)하면 경연관·서연관이 본디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하여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에 명하여 드러나게 정식(定式)으로 삼게 한 것이다.
2월 25일 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묘유법(卯酉法)033) 은 단지 낭청(郞廳)에게만 해당되고 당상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하여 승정원으로 하여금 예(例)를 상고하여 품(稟)하게 하였다. 드디어 호조·형조·경조(京兆)·백부(柏府)034) ·사예원(司隷院)의 당상관과 낭청의 묘유법을 정해 옛 제도를 보존하게 하였다.
우참찬 홍계희(洪啓禧)가 아뢰기를,
"듣건대 송명흠이 서연(書筵)에 입참(入參)하고자 하나 이미 찬선(贊善)을 체직시켰기 때문에 찬선의 예(禮)로 뵐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궁의 유현(儒賢)을 예우(禮遇)하는 도리로서는 마땅히 배례(拜禮)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헌부에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존겸(鄭存謙)을 이조 참의로, 신오청(申五淸)을 지평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좌윤으로, 이경옥(李敬玉)을 사서(司書)로, 홍술해(洪述海)를 부응교로 삼았다.
2월 26일 갑인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중용》을 강(講)하였는데, 지성무식장(至誠無息章)에 이르러 전 찬선 송명흠이 말하기를,
"‘도(道)’란 것은 천지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니, 사람은 ‘도’를 떠날 수 없고 ‘도’ 또한 능히 사람을 떠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극한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가 응집되지 아니하고 또한 사람을 기다려 행해짐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면서부터 아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학문에 힘입어야 하니, ‘덕성(德性)을 높이고 문학(問學)하는 데 말미암는다.’고 한 것은 ‘도’로 나아가는 절차를 말한 것입니다. ‘윗 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는 것’은 순제(舜帝)가 묻기를 좋아하고 살피기를 좋아하며 남에게서 좋은 점을 취하여 선(善)한 일을 한 것과 같은 것이니 모두가 이러한 뜻입니다. 교만하지 아니하면 아랫사람이 정성을 다할 것이고, 배신하지 아니하면 윗사람이 예를 다할 것입니다. ‘그 침묵이 족히 용납된다.’고 한 것은 그 말을 겸손하게 함으로써 화(禍)를 면하는 것이니, 그 말을 겸손하게 하는 것이 어찌 좋은 세상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성문(城門)은 열려 있는데 언로(言路)는 막혀 있다.’는 경계가 있었다. 직언(直言)을 상서로 여기고 아유(阿諛)를 요얼(妖孼)로 여긴다면 어찌 좋은 세상이 아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아뢴 바 또한 이 뜻이었습니다."
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송명흠이 말하기를,
"신이 서연(書筵)에 출입하면서 삼가 예학(睿學)을 보았는데, 보통보다 휠씬 뛰어났으니, 전 유선(諭善) 박성원(朴聖源)의 공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관제(官制)에 구애되어 춘방관(春坊官)이 될 수 없으니, 마땅히 따로 춘방에 당상(堂上) 한 자리를 만들어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혹 한 자급(資級)을 빌어 빈객(賓客)으로 삼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문의하게 하였다. 송명흠이 또 말하기를,
"서연에 나아가서 뵈올 때 세손이 먼저 배례(拜禮)하니, 신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현종(顯宗)께서 동궁에 계실 적에 신의 선조(先祖)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이 나아가 뵈었는데, 읍(揖)하여 뵈라는 하교가 있자, 선정신이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습니다. 읍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배례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禮)는 지나친 것은 해롭지 아니하고, 부족하면 예절에 어긋나는 것이다."
하고, 차후로는 선정(先正)이 성조(聖祖)를 뵌 예로 행하라 명하였다.
하유(下諭)하여 초선(抄選)한 여러 사람들을 부르고 급하지 아니한 경비를 줄이게 하니, 전 찬선 송명흠의 말을 따른 것이다. 애초에 지돈녕 윤봉구(尹鳳九), 전 참의 김원행(金元行)·신경(申暻), 집의 김양행(金亮行), 진선(進善) 홍계능(洪啓能), 전 장령 이양원(李養源), 전 지평 이봉상(李鳳祥)·최재흥(崔載興), 자의(諮議) 송덕상(宋德相)은 모두 경학(經學)으로 초선(抄選)되었는데, 누차 징소(徵召)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송명흠이 부름을 받들어 맨 먼저 기덕(耆德)을 마땅히 불러야 함을 말하고, 이미 전석(前席)에 올라서는 다시 재주가 빼어난 선비를 널리 불러 동궁을 보도(輔導)하는 방도로 삼을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기덕이 누구냐고 묻자, 송명흠이 윤봉구·김원행이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이에 사관(史官)을 보내 부르면서 아울러 여러 사람들까지 언급했던 것이다. 이때 삼남(三南)에 기근이 들어 나라의 저축이 바닥이 났다. 송명흠이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마땅히 먼저 절용(節用)하시어 민력(民力)을 넉넉히 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여러 가지 긴요하지 아니한 경비를 줄이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삼길가(蔘䓀價) 및 삼명일(三名日)035) 의 갑주가미(甲胄價米)와 각 군문(軍門)에서 해를 걸러 받는 월과미(月課米)를 모두 풍년이 들 때까지 한정해서 감제(減除)하고, 올해 증광시(增廣試)와 내년 식년과(式年科)의 강제시(講製試)의 책(冊) 및 무릇 여러 곳에 쓰이는 종이는 등급을 낮추며, 긴요하지 않은 것은 제감하게 하였다. 선혜청(宣惠廳)의 호표피가(虎豹皮價)로 이미 내린 것 외에는 풍년이 들 때까지 한정하여 정지시키도록 하고,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묘묘(廟墓) 이하 경외(京外)의 도회(塗灰)·포진(鋪陳) 등의 물건은 풍년이 들 때까지 한정하여 수개(修改)하지 말게 하였으며, 비록 3년 안이라 하더라도, 묘묘(廟墓)의 도회·포진·장병(帳屛)·유둔(油芚) 등의 물건을 또한 수개하지 말게 하였다. 종부보략(宗簿譜略)으로서 마땅히 수정(修正)해야 할 것은 풍년이 들 때까지 품(稟)하지 말게 하였고, 종부시(宗簿寺)·돈녕부(敦寧府)의 가현록(加現錄)은 다음 식년(式年) 때에 겸해서 행하도록 하였다. 무릇 여러 각사(各司)는 비록 정례(定例)에 들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부득이한 것 외에는 한결같이 모두 그대로 두게 하였다. 내궁방(內弓房)의 반백조우(半白雕羽)는 계하(啓下)한 것 외에는 영원히 줄이고, 배설방(排設房)의 서방색(書房色)에서 정례(定例)로 응하(應下)하는 것은 내년 봄까지 한정하여 반을 줄이게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봉진(封進)하는 당사향(唐麝香)은 영원히 줄이고 당작설(唐雀舌)036) 은 3분의 2를 감하게 하였다. 송명흠이 ‘나라를 다스리는 급무는 보도(輔導)하는 방도와 절성(節省)하는 도리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이 두 가지 일을 진달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따랐던 것이다, 송명흠이 물러날 때 임금이 다시 손을 잡고 돈면(敦勉)하였다.
임금이 석강(夕講)에 나아가서 특진관(特進官) 윤봉오(尹鳳五)에게 이르기를,
"감반(甘盤)037) 과 같은 옛 스승으로는 오직 경의 형이 있을 뿐이다. 듣건대 정력이 아직도 강장(强壯)하다 하니, 모름지기 돌아가 나의 뜻을 전하고 한번 와서 나를 보게 하라."
하였다. 이때 윤봉구(尹鳳九)의 나이 여든 둘이었다.
2월 27일 을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함께 오게 한 사관(史官)의 서계(書啓)를 보고 다시 공조 참의 김원행(金元行)과 전 참의 신경(申暻)에게 돈유(敦諭)하라 명하였다.
헌납 현광우(玄光宇)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지금 진언(進言)하는 사람들이라면 성궁(聖躬)을 보색(保嗇)하고 저궁(儲宮)을 교도(敎導)하는 것을 제일가는 선무(先務)로 삼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보색의 요령은 수응(酬應)을 끊고 간편(簡便)에 힘쓰며 인접(引接)과 강학(講學)을 드물게 하는 데 있지 아니하니, 반드시 모름지기 성정(性情)을 함양하고 심신을 수습해서, 분노와 사욕(私慾)을 참고 억제하며, 사심(邪心)을 막고 성실(誠實)을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이 이르면 널리 그리고 자세하게 수응(酬應)하여 나 자신이 피로하지 않고, 일이 지나가면 생각을 모으고 사려(思慮)를 그쳐 내가 예전처럼 회복되어 섭위(攝衛)의 방도에 구애되지 아니하고 절로 심기(心氣)가 화평(和平)해질 것이니, 그런 연후에야 보색의 근본을 얻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교도하는 방도는, 그 방도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전하께서 몸소 가르치시는 것이요, 하나는 궁료(宮僚)가 보도(輔導)하는 것입니다. 몸소 가르치시는 방도의 경우, 이것은 전하께서 더욱 힘쓰시는 데 달려 있고, 보도하는 책임에 이르러서는 전적으로 궁관(宮官)에게 달려 있는데, 지금 유현(儒賢)을 구하여 저궁을 보도하시고자 하는 뜻이 사륜(絲綸)038) 에 넘치니, 이는 실로 성대한 일입니다. 더욱 성의(誠意)를 독실히 하고 특이한 예절을 더한 뒤에야 뜻을 돌이켜 함께 끊임없이 주연(胄筵)에 나올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기를,
"진달한 두 조목은 말이 매우 절실하다. ‘내가 스스로 피로하지 않고 나는 다시 옛과 같이 된다.’는 등의 말은 나에게 또한 하나의 좋은 약이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야(山野)의 선비를 지금 바야흐로 돈소(敦召)하고 있으나, 성의가 얕은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 할 뿐이다. 더욱 힘쓰겠노라."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2월 28일 병진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대보단(大報壇)의 친향(親享)을 행하고, 서계(誓啓)를 받았다.
2월 29일 정사
전 교리 정이환(鄭履煥)을 회령부(會寧府)에 찬배(竄配)하라 명하였다가 곧 중지하라 명하였다. 정이환은 일찍이 향관(享官)으로서 엄지(嚴旨)를 받았는데, 이때에 와서 황단(皇壇)의 축사(祝史)에 차임(差任)되었으나 버티고 나오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중지시키고 다만 삭직(削職)만을 명하였다.
전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이 상소하여 동궁을 보도(輔導)하는 요령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날 신의 선조(先祖) 신 송준길(宋浚吉)이 효종(孝宗)께 품(稟)하여 좌강(坐講)의 제도를 정하였는데, 당시에 아름다운 일이라고 일컬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니, 신은 실로 개탄하고 애석해 합니다. 삼가 주자(朱子)와 여러 선정(先正)이 논한 바에서 한두 가지 긴요한 말을 상소 끝에 써 올리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어 재단해 취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이어 고사(故事)를 상고해 내도록 명하시어 다시 좌강의 제도를 정하시되 그 연체(筵體)를 간략히 하여 정지(情志)가 유통되게 한다면, 어찌 보도하는 데 만에 하나라도 보탬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칭찬하며 답하고, 좌강의 제도를 회복시키라 명하였다.
송명흠의 원소(原疏)의 부록에 이르기를,
"주자가 말하기를, ‘근세(近世)에 제왕(帝王)들이 자식을 가르치는 법이 소략하다. 무릇 용모와 말씨, 의복과 기용(器用)은 지극히 사치스러우나 일찍이 억제한 적이 있지 아니하고, 요속(僚屬)은 인원을 갖추었으나 보부(保傅)의 엄격함이 없으며, 강독(講讀)은 예(禮)를 갖추었으나 잠규(箴規)의 이익됨이 없으니, 이는 집에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壁)이 있는데도 이를 네거리의 길섶에 버린 것과 같다.’고 하였고,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말하기를, ‘후세에 저궁(儲宮)을 가르치는 법이 진실로 몹시 소략하니, 반드시 도덕이 있는 선비를 선택해 스승으로 삼아 보고 느끼며 모범을 심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요속(僚屬)은 모두 단정하고 학문에 뜻을 둔 선비를 선발해 좌우에서 협보(夾輔)하여 세자(世子)로 하여금 마음이 항상 겸손 신중하며 스스로 게을러질 겨를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야 학문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이고 덕이 날로 향상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정신 조광조(趙光祖)는 아뢰기를, ‘원자(元子)를 교양(敎養)하는 것은 그 일이 지극히 중대하니, 모름지기 재상 가운데서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선택해 친근(親近)하게 하고 훈자(薰炙)되게 만들어 덕성(德性)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 경연(經筵)에서는 좌석 곁에서 조정의 시비와 민생(生民)의 휴척(休戚)을 듣게 하여 어려서부터 조신(朝臣)을 몸소 접근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지금의 교양(敎養)은 급박하게 하는 데 지나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조용히 훈회(訓誨)하여 차츰차츰 성취되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선정신 이언적(李彦迪)이 여덟 가지 규잠(規箴)을 만들어 올리며 이르기를, 「신이 삼가 《예경(禮經)》을 상고해 보건대, 삼대(三代)039) 의 제왕들이 세자를 가르칠 적에 반드시 예악(禮樂)으로 하였으니, 태부(太傅)는 앞에 있고 소부(少傅)는 뒤에 있었으며, 들어가면 보(保)가 있고, 나가면 사(師)가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교유(敎諭)하여 덕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유의하시어 무릇 교양·교유하는 방도를 한결같이 삼대의 법과 같이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여러 설(說)을 살펴보건대, 바르게 교양하는 방도와 몸소 가르치는 뜻에 정성스러워 거의 여온(餘蘊)이 없되, 조광조가 진달한 바 ‘지금의 교양은 급박하게 하는데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니, 마땅히 조용히 훈회(訓誨)하여 차츰 차츰 성취되도록 해야 한다.’고 한 것이 더욱 깊고 간절합니다. 강학(講學)의 과정(科程)에 이르러서는 또한 혹시라도 몸을 옴츠리며 싫어하고 괴로와한다면 흥기(興起)하고 기뻐하는 맛이 없게 되어 덕과 학문을 성취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될 것입니다. 신은 지나치게 헤아려 보는 근심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이와 같이 덧붙여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여 《논어》를 강(講)하였다.
파주(坡州)의 열부(烈婦) 문씨(文氏)를 정려(旌閭)하였다. 열부는 천인(賤人)인데, 어떤 자에게 강제로 겁박을 당하여, 온몸이 난자(亂刺)되어 배가 찢어져서 창자가 솟아나온 지경에 이르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죽었다. 대신(大臣)의 연주(筵奏)로 인해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해 보고하게 하고는 특별히 작설(綽楔)040) 의 은전을 베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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