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무오
우박이 쏟아졌다.
전 참의 신경(申暻)이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니, 다시 사관(史官)을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이에 앞서 신경이 고 상신(相臣)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의(公議)가 모두 그르게 여겼다. 그리고 지평 유당(柳戇)은 ‘신경은 박세채의 외손(外孫)이니 마땅히 이런 청을 해서는 아니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상소하여 논박(論駁)하고, 아울러 최재흥(崔載興)이 양녀(良女)를 강간한 일까지 논핵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박세채는 일찍이 조제(調劑)하는 논의를 폈는데, 유당이 고의로 침척(侵斥)하여 탕평책(蕩平策)과 취향을 달리하고자 한다.’ 하여 유당의 이름을 시종안(侍從案)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최재흥의 일은 도신(道臣)에게 복문(覆聞)할 것을 명했는데, 사건이 과연 사실이었으므로 마침내 최재흥을 초선(抄選)에서 삭제하였다가 오랜 뒤에 서용하게 했는데, 이때에 와서 또한 별유(別諭)를 내려 불렀다.
3월 2일 기미
어떤 별이 항성(亢星) 아래로 흘러갔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북관(北關)에서 돌아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두 능(陵)을 다시 봉축(封築)할 때 감동(監董)했던 대신(大臣)과 예관(禮官)·도신(道臣)·차사원(差使員) 및 공장(工匠) 등에게 차등 있게 상을 베풀라 명하였다. 신만이 나와서 말하기를,
"송명흠(宋明欽)이 와서 연석(筵席)에 올랐으니, 성상께서 베푸신 정성과 예의의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나치게 장후(奬詡)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됨이 온 얼굴에 화기(和氣)가 가득히 차 있었다."
하였다. 신만이, 철원(鐵原) 사람 황손(黃遜)이 가정에서 행의(行誼)가 있다고 천거하니, 해조(該曹)에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였다.
공조 참의 김원행(金元行)이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다시 사관(史官)을 보내 하유(下諭)하여 돈소(敦召)하였다.
필선(弼善) 정술조(鄭述祚)가 상소하여 송명흠(宋明欽)을 돈독한 예로 머무르게 하여 동궁을 보도(輔導)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칭찬하며 답하였다.
3월 3일 경신
헌납 현광우(玄光宇)가 상소하여 민막(民瘼)을 말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소민(小民)이 곤폐(困弊)하기가 근일보다 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 조목에 넷이 있으니, 하나는 부렴(賦斂)의 무거움에 시달리는 것이요, 하나는 일족(一族)에게서 징수하는 데 시달리는 것이요, 하나는 조적(糶糴)의 불편함에 시달리는 것이요, 하나는 부민(富民)의 겸병(兼幷)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부렴의 무거움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그 폐단이 전결(田結)의 고르지 아니함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개량(改量)의 정사(政事)를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환곡(還穀)을 징족(徵族)하는 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소민으로 하여금 도망갈 근심이 없도록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소민으로 하여금 도망에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통환(統還)의 법규로 통행(通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군포(軍布)를 징족하는 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군포를 혁파하고 호포(戶布)를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조적의 불편한 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관(官)에서 받는 법을 혁파하고 사창(社倉)의 법규를 시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부민의 겸병하는 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한전법(限田法)을 시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대보단(大報壇) 친향(親享)의 이의(肄儀)041) 를 행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유신(儒臣)이 문의(文義)를 진달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경연관(經筵官) 송명흠(宋明欽)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옛날 성현(聖賢)이 전수(傳授)한 심법(心法)을 오늘 다 말하도록 하라."
하니, 송명흠이 말하기를,
"제왕의 학문은 ‘인(仁)’이란 한 글자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인’이란 글자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논어》를 버리고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또 ‘효제 순덕(孝悌順德)’이라고 말한 것은 대개 효(孝)가 인(仁)의 단서이고 인이 효의 본체(本體)이기 때문이니, 인을 행하려 하는 사람은 반드시 효제(孝悌)로부터 공부해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언 영색(巧言令色)·강의 목눌(剛毅木訥) 두 장(章)을 참고해 본다면 인의 체단(體段)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남이 자기보다 나으면 싫어하게 되니, 하우(下愚)는 비록 자기보다 나은 벗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자기만 못하다고 여긴다."
하니, 대답하기를,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자기가 가르친 사람은 신하 삼기를 좋아하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신하 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대저 인군(人君)이 사람을 씀에 있어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에 대해 우왕(禹王)이 옳은 말에 절을 하고 순제(舜帝)가 비근한 말을 살폈던 것처럼 한다면, 어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할 염려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송명흠 이어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술을 빚는 것이 나라의 큰 금법(禁法)이 되어 태묘(太廟)에 술을 쓰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니, 이는 아마도 예(禮)에 크게 어긋나는 것인 듯합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저 구수한 향기여.’라고 하였고, 《서경》에는 이르기를, ‘제사에만 이 술을 쓰라.’고 하였으니, 흠향하는 도리는 오로지 울창주(鬱鬯酒)를 따루어 강신(降神)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주(神州)042) 를 바라보매 백년 동안 육침(陸沈)하여 술 향기가 날 곳이 없으니, 저 양양(洋洋)하게 척강(陟降)하는 혼령도 또한 반드시 동토(東土)043) 를 돌아보아 단소(壇所)에 강림(降臨)할 것입니다. 더욱이 이제 시향(時享)이 멀지 아니한데 번국(藩國)에서 금한다 하여 막중한 제사에 쓰지 않는다면 아주 예의(禮意)가 아닙니다. 신은 사사로이 술을 빚어서 회음(會飮)하는 것은 엄격히 금하고 향사(享祀)에만 쓴다면 진실로 마땅함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사에 맑은 술을 쓰는 것을 어찌 내가 하고 싶지 않겠는가? 옛날에는 단지 예락(禮酪)044) 만 있었기 때문에 바야흐로 예주(醴酒)를 쓰고 있는데, 초밀(椒蜜)로 빚어 맑고 깨끗함이 지주(旨酒)보다 낫다. 경영관의 말을 나는 들어줄 수 없다."
하였다. 송명흠이 또 말하기를,
"권극(權極)은 ‘살(殺)’ 자로 인군(人君)을 인도하였으니, 신은 권극을 죄주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위로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법을 쓴 것인데, 어찌하여 억울하게 죽였다 하는가?"
하였다. 송명흠이 말하기를,
"윤구연(尹九淵)의 죄는 영(令) 전에 있었기 때문에 신이 감히 진달한 것인데, 말이 망발에 관계되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의 말을 쓰셨기에 전후에 걸쳐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자들이 많이 석방되어 사면을 받았는데, 김시찬(金時粲)·윤시동(尹蓍東)·서형수(徐逈修)·유당(柳戇) 등은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다시 말하지 말라. 오늘 바람 기운이 몹시 나쁘더니, 경연관이 진달한 바가 오늘 바람부는 날씨의 징험이 될 만하다."
하였다. 잠시 후에 송명흠을 앞으로 나오라 명하여 말하기를,
"말을 쓰지 않는다 하여 급작스레 돌아가지 말라."
하고, 이어 손을 잡으며 돈면(敦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관북(關北)의 올해 봄 선세(船稅)를 감해 주라 명하였다. 이때 삼남(三南)의 기황(饑荒) 때문에 선운(船運)으로 곡식을 옮기는 역사(役事)가 있었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아뢰기를,
"북로(北路)의 배들이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곡식을 운반하느라 어채(漁採)의 생업을 완전히 잃었으니, 그 세를 감해 줌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원 【대사간 이담(李潭)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장령 이양원(李養源)은 학술이 바르지 못하여 전에 이미 탄핵을 받았고, 역신(逆臣) 조태구(趙泰耉)와는 추삭(追削)한 뒤에 혼인을 맺었습니다. 청컨대 초선(抄選)을 개정(改正)하고 소명(召命)을 도로 정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중비(中批)045) 로 특별히 주사(籌司)에 제수함은 매우 과중(過中)한 데 관계됩니다. 청컨대 조명채(曹命采)를 비국 당상에 특별히 제수한다는 명을 도로 정지하소서."
하니, ‘너무 심하다’고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어사(御史) 홍양한(洪亮漢)을 보내어 호남(湖南)을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정창순(鄭昌順)·윤사국(尹師國)·김종인(金鍾仁)·이인배(李仁培)를 삼남(三南)과 함경도에 보내 북관(北關) 교제창(交濟倉)의 곡식을 운반하여 삼남의 기민(飢民)을 구제하게 하고, 이어 수령의 유능 여부를 염찰하게 하였다. 또 정창성(鄭昌聖)을 호남에, 이재협(李在協)을 호서(湖西)에 보내 잠행(潛行)하며 여러 고을을 염찰하게 했는데, 응접(應接)에 지쳐 실효(實效)가 없었다.
서명신(徐命臣)을 대사헌으로, 송덕중(宋德中)을 사간으로, 김상집(金尙集)을 정언으로, 조엄(趙曮)을 부제학으로, 홍낙인(洪樂仁)을 부교리로, 엄인(嚴璘)을 겸사서(兼司書)로, 윤봉구(尹鳳九)를 공조 판서로, 이달해(李達海)를 전라 우수사로 삼았다.
3월 5일 임술
임금이 대신과 예조 판서·호조 판서·선혜청 당상을 인견하여 여러 궁방(宮房)에서 절수(折受)를 청해 얻는 것을 금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송명흠(宋明欽)이 ‘여러 궁방의 절수가 너무 범람하여 거의 호조의 실총(實摠)과 상당(相當)하다.’고 아뢰고 재감(裁減)할 것을 청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전 찬선 송명흠이 그저께의 연교(筵敎)로 인해 하직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나갔다. 부제학 조엄(趙曮)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송명흠을 힘써 머무르게 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아! 본래부터 스스로 정성이 얕은데다 또 노쇠한 나이인지라 비록 유림(儒林)을 초치한다 한들 마음이 미덥지 아니하여 전석(前席)에서 종용(慫慂)해도 능히 서로 감응하지 못하니, 스스로 부끄러워할 뿐이다."
하였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 돈유(敦諭)하여 전 찬선 송명흠을 힘써 머무르게 하였다. 송명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총명과 예성(睿聖)이 백왕(百王)보다 휠씬 뛰어나시어, 효제(孝悌)는 신명(神明)에 통하였고 인은(仁恩)은 해우(海宇)에 두루 젖었습니다. 40년 동안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셨고 칠순의 연세에 학문에 힘쓰시니, 무릇 신민(臣民)이라면 누군들 찬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실을 찬찬히 살펴보면, 기강은 날이 갈수록 더욱 해이해지고 민생(民生)은 날이 갈수록 더욱 곤췌(困瘁)해지며 풍속은 날이 갈수록 더욱 무너지고 있으니, 위망(危亡)의 화(禍)가 장차 조석간(朝夕間)에 닥친 듯합니다. 이것은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은 어리석게도 죽을 죄를 짓는 것입니다만, ‘전하께서는 입지(立志)함에 있어 능히 탈연(脫然)히 당우(唐虞)와 삼대(三代)로 기약하지 못하시고, 학문을 함에 있어 능히 순수하게 격물(格物)·치지(致知)와 성의(誠意)·정심(正心)을 요령으로 삼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자(天姿)가 이미 높으시니 이치를 봄이 매우 쉽고, 신기(神機)를 홀로 운용(運用)하심이 보통보다 휠씬 뛰어나시어 여러 신하들이 오로지 쫓아가며 승순(承順)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외연(巍然)히 스스로 성인(聖人)인 체하여 온 세상을 낮추어 보시는 것이니, 하고자 하시는 뜻은 곧 정밀한 의리가 되고, 입 밖에 내시는 말은 곧 성법(成法)이 됩니다. 일에 응하심에 있어서는, 대개 견강 부회(牽强附會)함이 많아 애초부터 허심 탄회한 마음과 겸손한 뜻으로 의리와 공사(公私)의 구분을 정밀하게 살피시지 아니하고 한갓 선입견에 의거하여 기준으로 삼으시므로, 조정에 감히 다른 논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 가끔 구주(口奏)한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따르거나 어기는 대절(大節)로 삼으시는데, 구주에 대한 거조(擧措)가 진실로 성상의 갱장(羹墻)046) 하시는 효사(孝思)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예(禮)는 경전(經傳)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한(漢)나라 때 능침(陵寢)에서 주알(奏謁)했던 것에 대해 선유(先儒)가 오히려 독만(瀆慢)한 것을 비평했거늘, 하물며 청묘(淸廟)047) 의 숙목(肅穆)한 곳에 평상시 응접(應接)하실 즈음에도 번번이 이처럼 근거없는 예(禮)를 행하시어 천하 후세로 하여금 전하께서 정(情)에 이끌려 예(禮)를 잃는 결과가 된 것을 의심하게 만드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천하 만사의 근본은 인주(人主)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니, 마음이 진실로 바르지 못하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바로 하는 도리를 한마디 말로 포괄(包括)하여 말한다면, ‘편사(偏私)를 제거하고 천리(天理)를 회복하는 것’일 뿐입니다. 대개 이 마음은 본디부터 광대하고 한량이 없어 천지와 더불어 본체(本體)를 같이 하는 것이나, 한번 사의(私意)에 싸잡히게 되면 협소해짐을 면하지 못하게 되니, 만약 능히 하루아침에 그 사의를 제거하고 확충한다면 그 광대하고 한량이 없는 본체가 저절로 마땅히 온전히 회복되어 천지와 더불어 그 공용(功用)을 같이할 것입니다. 학자가 이것을 마음속에 보존해 두면 절로 향상되는 이익이 있을 것이니, 보통 사람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군주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혹시라도 털끝만한 사사로움을 두어 그 한량없는 본체를 해친다면 무엇인가를 하려는 마음이 정사(政事)를 해치고 곳곳마다 병을 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약 부시(婦寺)048) 를 몹시 연연해 하거나 사장(私藏)을 치우치게 아낀다면 장차 공가(公家)의 소유가 죄다 사문(私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것이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양주(梁州)·익주(益州)의 절반이 오(吳)·위(魏)의 전체를 도모할 수가 없다.’는 것이 될 것이고, 근습(近習)에 정(情)을 두거나 인척(姻戚)을 사사로이 좋아한다면 장차 덕망 있는 이를 임명하는 관작이 모두 사인(私人)에게 돌아가는 것을 볼 것이니, 사신이 비평한 바 ‘저 소인들은 적불(赤芾)049) 을 한 자가 수백 명인 어리고 예쁜 소녀들이야 굶주리는 수밖에’라고 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나간다면 온갖 일이 그러할 것입니다.
대개 인군(人君)이 높디높은 자리에 거처하고 억조(億佻)의 민중에게 군림하여 하루에 만기(萬機)를 처리하매 숱한 사욕이 앞에서 엇갈립니다. 따라서 반드시 그 마음을 넓게 가지고 안목을 높고 크게 하되, 항상 한량없는 마음의 본체를 알아서 취하여 천지와 더불어 유통(流通)되게 하고, ‘경(敬)’이란 한 글자에 마음을 가라앉혀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채 발동하기 전에는 ‘경’으로 이 마음의 본체를 보존하고 그것이 이미 발동해서는 ‘경’으로 이 마음의 쓰임을 살펴, 나의 마음을 항상 탁연(卓然)하게 광명 쇄락(光明灑落)한 곳에 두고 털끝만큼이라도 사린(私吝)·편체(偏滯)의 뜻이 없게 하소서. 그런 뒤에라야 안팎이 시원하게 통하고 전체가 환히 융합되며, 사욕은 물러나고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넓디 넓게 천지와 더불어 그 크기를 같이 해 요(堯)가 되고 순(舜)이 될 것이니, 어느 사람이 결점을 지적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의(聖意)에 깊이 유념하시고 본원(本源)을 함양하시어 확연(廓然)히 크게 공평한 마음을 가져 원기(元氣)를 가지고 회노(喜怒)를 돕지 않고, 자질구레한 일로 대체(大體)를 해치지 않는다면, 성궁(聖躬)을 이양(頣養)하고 반년의 정사를 밝히는 데 힘쓰는 것에 있어서 어찌 양쪽으로 그 요령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일이 윤상(倫常)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한번 진달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것을 감히 덧붙여 진달하겠습니다. 대저 남의 후사(後嗣)가 되는 예(禮)는 본디 엄중한 법인데, 후세에 와서 이 길이 점차 넓어져서 예(禮)와 율(律)의 본래 뜻을 완전히 잃어 헤어짐과 만남이 수시로 이루어지고 아비와 자식의 관계가 정해지지 아니하여,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생각한 지 진실로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 심일진(沈一鎭)의 집안 일은 윤리를 해치고 풍교(風敎)를 손상시킨 것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성상의 처분은 비록 인척(姻戚)에게 화목하고 망하는 것을 보존시키려는 성의(盛意)에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유독 그것이 성정(聖政)에 누를 끼치고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됨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신은 마땅히 개정(改正)을 더하여 법으로 만들되, 다시 이 전례를 끌어대는 자가 있다면 사예(四裔)로 물리쳐 인류(人類)에 끼지 못하게 하여 대방(大防)을 보존토록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장차 비답을 내리려고 승지에게 읽을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그가 ‘적불(赤芾)’이란 말을 인용한 데 노하여 하교하기를,
"내 비록 덕이 없지마는 어찌 조후(曹侯)050) 와 같은 데 이르렀겠느냐?"
하고, 대신·승지·옥당을 불러 각각 소견을 진달하라 명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은 임금이 진정하기를 청하고,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이것은 문장을 끊어서 뜻을 취할 것이니, 반드시 무심코 인용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와 여러 옥당이 대답한 것도 모두 대신의 말과 같았다.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 이에 비답를 내렸는데, 사지(辭旨)가 몹시 엄중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송명흠은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현손(玄孫)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士林)이 추앙하는 바 되었다. 정초(旌招)051) 를 누차 내렸으니 뜻을 지키고 나오지 않더니, 은례(恩禮)가 갈수록 융성해지자 감격하여 조정에 나왔다. 전석(前席)에 출입하면서 애연히(藹然)히 서로 믿음이 있었는데, 마침내 처음의 예우(禮遇)를 계속하지 않기에 이르자 진소(陳疏)하고 지레 돌아감으로써 그 쓰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론(士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1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2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註 046] 갱장(羹墻) : 전왕(前王)을 사모한다는 말임. 옛날에 요제(堯帝)가 별세한 후에 순제(舜帝)가 3년 동안을 앙모(仰慕)했는데, 앉으면 요제를 담[墻] 안에서 보고, 밥을 먹으면 요제를 국[羹] 그릇에서 보았다는 고사(故事)가 있음.[註 047] 청묘(淸廟) : 종묘(宗廟).[註 048] 부시(婦寺) : 궁인(宮人)과 환자(宦者).[註 049] 적불(赤芾) : 적불(赤芾)은 붉은 무릎 가리개로, 대부(大夫)이상의 관원은 적불을 착용하고 초헌(軺軒)을 탔음. 《시경(詩經)》 조풍(曹風) 후인장(候人章)에 조(曹)나라 군주가 군자(君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였으므로, 대부가 5인인 제후(諸侯)의 제도를 무시한 채 그 복색(服色)을 한 자가 수백 명이었으며 어진 이는 도(道)를 지키느라고 도리어 빈천(貧賤)하게 되었다는 뜻임.[註 050] 조후(曹侯) : 조(曹)나라 임금.[註 051] 정초(旌招) : 선비를 초빙하는 예절.
사신(史臣)은 말한다. "송명흠은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현손(玄孫)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士林)이 추앙하는 바 되었다. 정초(旌招)051) 를 누차 내렸으니 뜻을 지키고 나오지 않더니, 은례(恩禮)가 갈수록 융성해지자 감격하여 조정에 나왔다. 전석(前席)에 출입하면서 애연히(藹然)히 서로 믿음이 있었는데, 마침내 처음의 예우(禮遇)를 계속하지 않기에 이르자 진소(陳疏)하고 지레 돌아감으로써 그 쓰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론(士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3월 6일 계해
태학(太學) 유생(儒生)의 도기(到記)를 거두어 먼저 한 가지 경서를 강(講)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장차 삼일제(三日製)를 설행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이 송명흠을 위해 진소(陳疏)할 것을 염려하여 말하기를,
"유생 무리들이 반드시 시끄러움을 일으킬 것이니, 마땅히 과거를 설행하여 이를 진정시켜야 하겠다."
하고, 그들에게 강독(講讀)에 전념하게 한 것이다.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봉심(奉審)한 뒤 친림(親臨)하여 희생을 살펴보고, 다시 재실(齋室)로 들어갔다.
특별히 홍양한(洪良漢)을 대사간에 제수하였다.
3월 7일 갑자
임금이 대보단에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면복(冕服)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었다.
임금이 김원행(金元行)과 함께 오게 한 사관(史官)의 서계(書啓)를 보고, 사관에게 먼저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당상 겸보덕(堂上兼輔德)을 다시 설치하는 의논을 정지하라 명하였다. 이 의논은 전 찬선 송명흠(宋明欽)에게서 나온 것인데, 대개 장차 박성원(朴聖源)을 위해 설치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호조 판서 서지수(徐志修)도 또한 ‘세종조(世宗朝)에 윤상(尹祥)이 당상으로서 겸보덕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여 다시 설치하라는 명이 있었던 것인데, 송명흠이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되자 마침내 정지시킨 것이다. 경연 좌강(坐講)의 규례도 역시 송명흠의 건백(建白)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또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3월 8일 을축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예(禮)를 행하였으니, 다음날이 기신(忌辰)이었기 때문이었다.
3월 9일 병인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들렀다가 저녁 때가 되어 환궁하였다.
3월 10일 정묘
경기 통진(通津)의 백성들이 물에 빠져 죽은 일을 강화 유수(江華留守) 심성진(沈星鎭)이 장문(狀聞)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차자를 올려 인구(引咎)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송명흠(宋明欽)을 정초(旌招)하자는 청을 신이 일찍이 누차 진달하자, 전하께서 능히 정성과 예(禮)를 부지런히 다 하시어 반드시 초치하고야 말았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단이 층층이 생겨나 성조(聖朝)의 은례(恩禮)를 끝맺지 못하게 하고, 사류(士類)들의 경색(景色)을 수저(愁沮)052) 하게 만들었으니, 그 까닭을 따져 본다면 신이 망령되게 청한 연고가 아님이 없습니다. 그의 상소에서 조목별로 진달한 것은 문장을 끊어서 뜻을 취한 것에 불과하였으니,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의도가 있었겠습니까만, 연충(淵衷)053) 이 갈수록 격뇌(激惱)하여 감히 받들어 듣지 못할 하교가 있게 되었고, 오랫동안 탕제(湯劑)를 정지시키게 되었으니, 전하의 천지와 같은 도량으로 유독 한 사람의 송명흠을 용납하지 못하시어 이에 이런 과중한 거조를 하시게 만들었습니다. 신의 직책은 보필(輔弼)에 있는데도, 끝내 능히 광구(匡救)하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또 신의 죄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이때 임금이 송명흠의 상소에 격뇌하여 연달아 엄중한 하교를 내렸기 때문에 신만의 차자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이섭원(李燮元)을 대사간으로, 이시건(李蓍建)을 장령으로, 홍상직(洪相直)을 지평으로, 김낙수(金樂洙)를 정언으로 삼았다.
공조 참의 김원행(金元行)이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그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옛날에 군주가 신하를 부르고 신하가 그 부름에 나아가는 데는 반드시 그 의리가 있었으니, 관직이 있는 자는 그 관직으로 부르고 서인(庶人)으로서 역사(役事)에 가는 자는 그 역사로 불렀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신을 부르시는 바는 하나는 ‘한번 그대를 보고자 한다.’는 것이요, 하나는 ‘어찌하여 칠순의 군주를 보고자 하지 않는가?’라는 것이니, 은혜가 지극하고 영광도 또한 지극합니다. 하지만 식자들이 논하며 혹시라도 전하께서 신을 부르시는 바가 옛날의 의리와는 다름이 있고, 신이 부름에 나아가는 것이 구차한 도리를 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의심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직명(職名)을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사관(史官)은 이미 올라오라고 명하였다만, 본직(本職)에 얽매임이 과연 그대의 상소와 같다면, 특별히 그 해직(解職)을 허락하겠노라. 그대는 안심하고 길에 오르라."
하였다.
대사간 홍양한(洪良漢)·정언 김상집(金尙集)·장령 변득양(邊得讓)·지평 이태정(李台鼎)을 삭직(削職)하였으니, 소명(召命)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그들이 송명흠의 일을 위하여 우물쭈물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모두 특별히 삭직을 명한 것이다.
3월 12일 기사
진선(進善) 홍계능(洪啓能)을 파직하였다. 홍계능이 상소하여 소명을 사양하고, 이어 송명흠의 일을 언급했는데, 그 상소에 이르기를,
"유현(儒賢)이 서울을 떠나가니 조야(朝野)가 실망하고 있습니다. 말을 하여도 따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만둘 수가 있는 것인데, 이제 또 문자(文字)에서 꼬집어내었으니, 그 확연(廓然)하게 순응(順應)하는 도리에 있어서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한(漢)나라 고조(高祖) 때의 주창(周昌)은 면전에서 그 임금을 걸(桀)·주(紂)라고 배척하였으니, 후세에 전하여 미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걸·주 이하는 무엇이라도 인용 못할 것이 없으니, 이제 ‘걸·주에 대해서는 괜찮고 조후(曹侯)에 대해서는 안된다’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시겠습니까? 양(陽)은 만물의 발생(發生)을 주관하기 때문에 천둥가 땅에서 나오고 만물이 작흥(作興)하나니, 때에 있어서는 봄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仁)이 됩니다. 그런데 선정(先正)의 봄은 왕정(王庭)에 드날려져 알면 말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고 말하면 극진히 하지 아니함이 없어 지금까지 본보기가 되고 유택(遺澤)이 사람에게 남아 있습니다만, 뒷사람의 봄은 한결같이 옹용(雍容)054) 하기만 하여 그 말하는 바가 땅 밑의 잔양(殘陽)처럼 가늘게 이어질 뿐이니, 또한 슬퍼할 만합니다. 전하께서는 휘확(揮廓)하여 한 겨울의 나머지에 석과(碩果)055) 를 남겨 두실 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이에 도리어 꺾고 막기에 여력(餘力)은 남기지 않으시니, 《주역》의 양(陽)을 부지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큰 바람은 무심한 것이니 어찌 유현(儒賢)을 알아보겠습니까? 또 유현은 한 사람의 유현일 뿐입니다. 말이 미처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면 군신(君臣)이 낯빛을 바꾸며 서로 기뻐하기를, ‘유현이 왔기 때문에 바람 또한 온화하고 날씨 또한 화창하다.’라고 하다가, 그가 입을 열어 말한 것이 있으면 또 ‘바람 또한 사납고 날씨 또한 나쁘다.’라고 하시니, 어찌 이른바 ‘한번 좋게 생각하자 상서로운 별과 경사스런 구름이 나타나고 한번 나쁘게 생각하자 질풍(疾風)·뇌우(雷雨)가 휘몰아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어찌하여 그리도 빠르게 감통(感通)하는 것인지요?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자신을 돌이켜 수성(修省)하시어 하늘을 두려워하는 실질을 다하신다면 바람이 이에 그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같은 대현(大賢)으로서도 그가 진퇴(進退)할 즈음에 오히려 능히 원리(元履)056) 를 표준으로 삼아 그와 더불어 소식(消息)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원리를 표준으로 삼은 것이 아니요, 조정에서 선비를 대우한 것이 어떠한가를 표준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원리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러했거늘 하물며 원리가 될 수 없는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주자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러했거늘 하물며 주자가 아닌 자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과 같은 사람은 천 명 백 명 있어도 진실로 원리의 털끝만한 영향(影響)을 감당하지 못하니, 오늘날 유현의 무거움이 또 절로 한 세상의 바라보는 바가 되었으니, 그 영향의 영향 격인 사람이 스스로 망령되게 움직여 형체와 소리가 있는 곳을 찾아서 소식의 표준으로 삼지 아니하는 것은 본디 이런 이치가 없습니다. 이는 바로 피모(皮毛)057) 의 설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간판(刊版)058) 의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힘써 구하니, 단지 파직만을 명하고, 그 소장(疏章)은 돌려 주게 하였다.
홍계능은 성품이 광패(光悖)하여 능히 큰 소리를 쳐 온 세상을 기롱(譏弄)함으로써 남들이 자기에게 쏠려오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공공연하게 욕하고 꾸짖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명리(名利)를 탐하는 자들이 많이 추부(趨赴)하였다. 선비로서 속임을 당한 사람들도 또한 가끔 그와 더불어 사귀었으므로, 식자들이 우려하였다. 이때에 와서 상소하여 유현을 구제하였으나 그 문사(文辭)에 괴상하고 섬숙(閃倐)함이 많아 사람들이 더욱 해괴하게 여겼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와 충신 송상현(宋象賢)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의안 대군은 개국(開國) 때의 좌명 공신(佐命功臣)이고, 송상현은 임진년059) 왜변(倭變) 때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사절(死節)한 사람이다.
3월 13일 경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차자를 올려 송명흠의 상소 뒤에 내린 엄중한 하교를 도로 거둘 것을 청하고, 또 홍계능의 상소에 대해 답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부제학 조엄(趙曮) 등이 차자를 올려 엄중한 하교를 도로 거두어 후손(後孫)에게 편안함을 끼쳐주는 도리로 삼을 것을 청하고, 또 홍계능의 상소를 도로 들여와 비답을 내리고 우악하게 용납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책망하는 비답을 내렸다.
정언 김낙수(金樂洙)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였다. 김낙수가 상소하여 전후의 엄중한 하교를 도로 거둘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박성원(朴聖源)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삼는 일에 대해 문의(問議)하게 한 것은 대개 동궁을 보도(輔導)하기 위한 것이었고, 김원행(金元行)을 사관(史官)과 함께 오게 한 것은 또한 유현(儒賢)을 예로 대우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는데, 모두 도로 정지하라 명하셨습니다. 마치 격노하여 그런 것과 같음이 있으니, 실로 회확(恢廓)의 도리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하고, 또 홍계능(洪啓能)의 상소를 도로 돌려 주게 한 일의 중도에 지나침을 논하니, 임금이 그 소장(疏章)을 돌려주며 매우 나무라고 삭직의 법을 시행하였다.
3월 14일 신미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설행하고, 진사 이동우(李東遇)를 뽑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자의(諮議) 송덕상(宋德相)이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유의(儒衣)로 부름에 나아올 것을 허락했는데, 송덕상이 상소하여 사양하니, 우악한 비답으로 돈소(敦召)하였다.
승정원에서 송명흠(宋明欽)·홍계능(洪啓能)의 일을 계론(啓論)하여 엄중한 하교를 도로 정지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소 신공(臣工)들에게 하유(下諭)하였다. 송명흠(宋明欽)의 상소가 있고 난 뒤 성심(聖心)이 격뇌(激惱)하여 심지어 항상 진어(進御)하던 탕제(湯劑)를 물리치기까지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주강(晝講)·빈대(賓對)의 명이 있었으나, 삼사(三司)에서 모두 부름을 어겼기에, 임금이 여러 신하들이 송명흠을 영호(營護)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하교하여 유시한 것이다. 대략 이르기를,
"아! 의리가 캄캄하게 막히고 옛 버릇을 뉘우치지 아니한 나머지 본분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조경(躁競)을 일삼고 알양(訐揚)을 즐기는 자는 부박하게 떠드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있다. ‘3백 적불(赤芾)’이니 ‘어리고 예쁘다.’느니 한 것은 곧 시인(詩人)이 그 임금을 풍자한 것으로, 진후(晉侯)가 이것을 가지고 조후(曹侯)를 책망했던 것이다. 전국 시대(戰國時代)에는 신하의 분수가 정해지지 아니하였으나 한(漢)나라·당(唐)나라 이후로는 분의(分義)가 아주 엄격하였으므로, 비록 한나라의 관인(寬仁)함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대불경(大不敬)의 형률(刑律)이 있었다. 따라서 위에 있는 사람이 새알[鳥卵]을 아끼는 뜻으로 비록 처분하지는 않았지만 아래에 있는 사람이 한갓 죄주기를 청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니, 무슨 마음으로 영호했겠는가? 내가 다시 말하지 않거니와 만약 시끄럽게 군다면 마땅히 그 근본을 다스릴 것이니, 대소 신공들은 모름지기 이 하유(下諭)를 깊이 유념하여 방헌(邦憲)을 범하지 말라."
하고, 이어 언사(言事)의 소장(疏章)은 봉입(捧入)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남태회(南泰會)를 대사헌으로, 정순검(鄭純儉)을 대사간으로, 유수(柳脩)를 집의로, 황간(黃榦)을 사간으로, 한필수(韓必壽)·남학종(南鶴宗)을 장령으로, 임성(任珹)·서병덕(徐秉德)을 지평으로, 김치양(金致讓)을 헌납으로, 이휘중(李徽中)·곽진순(郭鎭純)을 정언으로 삼았다.
3월 15일 임신
정언 곽진순을 경성(鏡城)에 찬배(竄配)하고, 교리 정창성(鄭昌聖)을 출보(黜補)하여 중림 찰방(重林察訪)으로 삼았다. 곽진순이 패초(牌招)를 어기고 정창성이 어버이의 병을 이유로 경출(徑出)하자, 임금이 규피(規避)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특별히 윤면헌(尹勉憲)을 제수하여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이 끝나고나서 검토관(檢討官) 윤면헌(尹勉憲)이 언사소(言事疏)를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명을 정침(停寢)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일전의 여러 승지들이 복역(覆逆)060) 한 계사(啓辭)는 대신(大臣)과 옥당(玉堂)이 차자를 올린 뒤에 나왔으니, 일이 매우 성실하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윤면헌이 이어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뭇 신하들이 비록 무상(無狀)하지만 어찌 차마 성덕(聖德)을 조후(曹侯)에 견주겠습니까? 전 찬선(贊善)의 상소는 문장을 끊어 뜻을 취한 데 불과한데, 전하께서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시고 순문(詢問)하는 거조까지 있었습니다. 홍계능(洪啓能)의 상소에 대해서는 또 비답을 내리지 않으시고 연달아 엄중한 하교를 내리셨으니, 어찌 성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후의 엄중한 하교를 모두 도로 거두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윤면헌이 말하기를,
"이것은 후손(後孫)들에게 편안한 계책을 남겨주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 동궁이 보고 본받을 것은 오직 전하에게 있는데, 어찌 생각이 이에 미치지 않으십니까?"
하고, 검토관 엄인(嚴璘)도 또한 그렇게 말하니, 임금이 이에 하교하기를,
"아! 저가 비록 그르다 해도 내 어찌 마음을 좁게 가져 후손들에게 편안함을 남겨주는 것에 폐를 끼칠 것인가? 윤면헌이 아뢴 바는 그 조부를 저버리지 아니하였으니, 깊이 가상하게 여기노라. 엄인이 아뢴 바에는 그 정성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전날 내린 엄중한 하교를 정지하노라."
하고, 드디어 홍계능의 상소에 비답을 내렸다. 이어 승지·유신(儒臣)·대신(臺臣)을 파직·삭출(削黜)하라는 명을 정지하라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바야흐로 언지(言地)를 피하고 있는데, 윤면헌은 이에 과감하게 꺼리지 아니하였으니, 모름지기 이런 마음으로 동궁을 섬기도록 하라."
하였다. 윤면헌은 고(故) 판서 윤양래(尹陽來)의 손자이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6일 계유
임금이 문신(文臣)의 한학 강경(漢學講經)과 이문 제술(吏文製述)을 직접 시험하였다. 왕세손이 시좌(侍坐)하니, 임금이 세손에게 강(講)했던 《맹자》를 외우라 명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제(齊)나라 사람을 지금 세상 사람에 비교한다면 어떠한 사람이겠느냐?"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한밤중에 애걸하는 부류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밤중에 애걸하는 것은 그 사람의 허물인가? 아니면 그 군주의 허물인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비록 그 사람이 더럽고 낮은 것을 스스로 취하였지만, 교화하고 인도하는 책임이 또한 군주에게 있습니다."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낙명(洪樂命)을 보덕(輔德)으로, 홍술해(洪述海)를 응교로, 홍낙인(洪樂仁)·박사해(朴師海)를 교리로, 정창성(鄭昌聖)을 부교리로, 이택진(李宅鎭)을 부수찬(副修撰)으로, 한집(韓鏶)·신익빈(申益彬)을 정언으로 삼았다.
3월 17일 갑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문신의 삭시사(朔試射)를 행하고, 하직하는 수령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선전관(宣傳官)에게 길거리에 있는 외읍(外邑)의 유개(流丐)를 데려오라 명하여 양식을 주어 돌려보내고, 본읍(本邑)의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돌보아 안접(安接)시키게 하였다.
3월 18일 을해
사방이 어둡고 흐릿하여 마치 먼지가 내리는 것 같았다.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가 왕세손에게 시좌(侍坐)할 것을 명하였다. 세손에게 강(講)했던 《맹자》를 읽으라 명하고, 임금이 세손에게 이르기를,
"내가 송명흠(宋明欽)·홍계능(洪啓能)의 일에 대하여 모두 도로 거두게 하여 너로 하여금 본받게 하고 싶다."
하였다. 동경연(同經筵) 정실(鄭實)이 송명흠의 상소에 대해 내린 비답 가운데서 엄지(嚴旨)를 고쳐 내릴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지경연(知經筵) 이창수(李昌壽)가 거듭 말하였으나, 임금이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 【장령 한필수(韓必壽)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대신(臺臣)으로서 하유(下諭)하였음에도 기한을 넘긴 자에게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검토관(檢討官) 엄인(嚴璘)이 이르기를,
"이것은 곧 금오(金吾)061) 에서 의언(議讞)하는 율(律)인데, 대신(臺臣)이 정식(定式)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으니, 진실로 아주 잘못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특별히 그 명을 정지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3월 19일 병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니, 곧 의종 황제(毅宗皇帝)가 순사(殉社)062) 한 날이었다. 임금이 예를 행하기를 마치자 고(故) 충신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의 후손 4명을 소견(召見)하고, 이어 기회문(記懷文)을 지어 내리며 말하기를,
"1본(本)은 춘방(春坊)에 주어 동궁으로 하여금 오늘 예를 행한 것이 대명(大明)을 위해 행한 것임을 알게 하라."
하였다.
태학(太學) 유생 박휘진(朴徽鎭) 등이 상소하여 송명흠(宋明欽)을 소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박휘진을 불러 하유하기를,
"너희들이 진소(陳疏)하고 싶었다면 어찌하여 일찍 하지 않았느냐? 매우 성실하지 못하다."
하였다.
3월 20일 정축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길보(李吉輔)를 대사헌으로, 김상중(金尙重)을 대사간으로, 정항령(鄭恒齡)을 사간으로, 홍성(洪晟)을 장령으로, 이휘중(李徽中)을 헌납으로, 이세연(李世演)을 정언으로, 남태제(南泰齊)를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서북 강 연안의 변장(邊將)에게 파수(把守)를 더 엄하게 하라고 신칙하였다. 이때 우리 나라 사람 이원삼(李元三)이 범월(犯越)하자, 청나라 사람이 추포(追捕)하여 우리 나라 경계에 이르러 장차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면서 우리 나라에 길을 가르쳐 줄 것을 요구하였다. 평안 병사 이주국(李柱國)이 상문(上問)하였는데, 임금이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하니, 영의정 신만(申晩)이 이르기를,
"저들이 이미 배를 탔으니 아마도 국경을 범할 우려가 있을 것이므로 예방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서지수(徐志修)는 말하기를,
"수신(帥臣)의 장계(狀啓)에 이른바 ‘호송(護送)’이라 한 것이 참으로 좋습니다. 보호하는 것은 실로 대비하는 바인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임금이 마침내 이런 명을 내렸던 것이다.
제주에서 바치는 비자나무 판[榧板]을 정지케 하라고 명하였다. 제주에서 해마다 비자나무 판 10부(部)를 바쳤는데, 재해가 든 해라 하여 5년을 한정하고 바치는 것을 정지하게 한 것이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각사(各司)의 입직(入直)한 관원 50여 명을 소견(召見)하여 직장(職掌)을 두루 물어보았다. 사직단(社稷壇) 담의 수리와 소제를 부지런히 하지 않았다 하여 사직 영(社稷令) 노언방(盧彦邦)을 태거(汰去)하고,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 김인서(金麟瑞)는 전조(銓曹)에 수령으로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였다. 무신년063) 의 공신(功臣) 언성군(彦城君) 김중만(金重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3월 21일 무인
임금이 종신(宗臣)의 강경(講經)에 친림하였다. 안창 령(安昌令) 이경(李燝)이 수석을 차지하자 가자(加資)하라 명하고, 나머지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어사 김상집(金尙集)을 보내어 기읍(畿邑)을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3월 22일 기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기덕(李基德)을 사간으로, 홍응보(洪應輔)를 지평으로, 이택징(李澤徵)을 정언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부제학으로, 서지수(徐志修)를 지경연으로, 이익보(李益輔)를 좌참찬으로 삼았다.
3월 23일 경진
태학의 유생들이 대신(臺臣)의 상소로 인해 권당(捲堂)하니, 임금이 하유하여 도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때 정언 신익빈(申益彬)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유현(儒賢)이 서울을 떠나면 태학에서 먼저 창도하여 머무르게 할 것을 청하는 것이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인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잠자코 한 마디 말도 없이 며칠을 지내고는 비로소 대충 책임을 메웠습니다."
하니, 유생들이 이에 권당하여 소회(所懷)를 써서 진달하여 ‘신익빈이 관직은 간관(諫官)이란 이름을 가지고서 광구(匡救)한 바는 없이 도리어 유생을 배척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대사성(大司成)에게 유생을 거느리고 입시하라 명하여 유시해 도로 들어오게 했던 것이다.
이조 참의 정존겸(鄭存謙)를 파직하였다. 정존겸이 스스로 판서 김양택(金陽澤)과 척의(戚誼)가 있다며 누차 소명(召命)을 어기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경(躁競)하는 때에 홀로 능히 지키는 바가 있다."
하고, 전례에 따라 파직하고 조엄(趙曮)을 대신 시켰다.
하교하기를,
"접때 처분(處分)한 것은 칙려(飭勵)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미 조명정(趙明鼎)을 썼으니, 조돈(趙暾)은 부억(扶抑)할 수는 없다.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3월 24일 신사
전 판서 남태기(南泰耆)가 졸(卒)하였다.
3월 25일 임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3월 26일 계미
특별히 한광회(韓光會)를 도승지에 제수하였다.
3월 27일 갑신
정언 신익빈(申益彬)이 상소하여 유생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처음 유생이 입시하였을 때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려 진소(陳疏)한 유생인 박휘진(朴徽鎭)을 준절(峻切)하게 나무랐는데, 박휘진이 이미 물러나와서 그대로 식당(食堂)에 참석하니, 임금이 염우(廉隅)에 관계됨이 있다 하여 유적에서 이름을 삭제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조익빈이 유생에게 배척을 당했다며 진소하여 스스로 인책(引責)하고, 이어 말하기를,
"박휘진은 비록 물러가라는 명을 받들었지만, 이미 도로 들어가겠다는 뜻을 우러러 아뢰었기 때문에 감히 식당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그 명을 정지시켰다.
임금이 유생의 전강(殿講)에 친림하여 하교하기를,
"과규(科規)를 이미 바로잡은 뒤이니 요행의 문을 의당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전강의 순통(純通)은 너무 과람(過濫)함이 없지 않으니, 지금부터 이후로는 도기 유생(到記儒生)의 비교는 3명을 넘지 않게 하고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비교는 2명을 넘지 않게 정식(定式)을 만들어 과제(科制)를 엄중히 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접때 유생들을 보니 그 버릇이 해괴하였다. 이제 전강을 하는 것은 사습(士習)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다."
하고, 여러 유생 중에 실의(失儀)한 자는 모두 정거(停擧)시키라 명하였다. 입격(入格)한 사람인 이민후(李敏垕)에게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내 생각으로는 진실로 급제를 내리고 싶지 않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제학 조명정(趙明鼎)을 체직하였다. 조명정이 조돈(趙暾)의 상소로 인해 스스로 변명하려고 상소하여 조사할 것을 청하였지만, 일찍이 피차의 소장(疏章)을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승지가 품(稟)하니, 임금이 특별히 조명정을 체직하였다. 임금의 뜻은 두 사람을 화해시켜 따지고 다투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임금이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에게 묻기를,
"조명정이 조사를 청한 것은 무슨 일이냐?"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첫째는 도시(都試)의 일이요, 둘째는 공천(公賤)의 일이며, 셋째는 재결(災結)의 일입니다."
하였다. 홍봉한이 또 말하기를,
"조정의 의논은 조사를 하면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킬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사는 할 수 없다."
하였다.
밤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하향 대제(夏享大祭)의 서계(誓戒)를 친히 행하였다.
3월 28일 을유
사대문에다 영제(禜祭)를 설행하였다. 장맛비가 보리를 손상시켰기 때문인데, 영제를 행한 지 3일 만에 장맛비가 그쳤다.
지평 서병덕(徐秉德)이 상소하여 진계(陳戒)하고, 또 송명흠(宋明欽)의 상소에 대해 내린 비답을 고쳐 내릴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흘 동안 감선(減膳)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호남 도신(道臣)의 계본(啓本)을 보았는데, 기민(飢民)의 총수가 많게는 48만 3천 7백 10여 구(口)에 이르고, 53고을에서 죽은 자가 4백 50여 명이나 되니, 크게 슬퍼하며 하교하기를,
"옛날 이윤(伊尹)은 한 사람이라도 알맞은 지위를 얻지 못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허물을 삼았는데, 하물며 인군(人君)이 되어 능히 한 도(道)의 백성을 살리지 못하여 죽은 자가 5백 명이나 되게 했으니, 이것은 척강(陟降)하신 조종(祖宗)을 저버린 것이다. 만약 스스로 경책(警責)함이 없다면 어떻게 우러러 답할 것인가? 스스로 신칙하고 아랫사람들을 신칙함이 마땅하다. 오늘부터 특별히 사흘 동안 감선하도록 하고, 해도(該道)의 도신은 석 달 동안 월름(月廩)을 3분의 1을 감하도록 하라. 아! 세전(歲前)에 이미 진휼(賑恤)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전에 굶어 죽는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더욱이 몇 백명이 물고(物故)하였으니, 어찌 한 사람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겠는가마는, 교묘하게 명목(名目)을 꾸며 죄과(罪過)를 면하고자 하니, 또한 근거가 없는 데 관계된다."
하고, 마침내 기민의 많고 적음을 보아 해읍(該邑) 수령의 월름을, 혹은 3분의 2를 혹은 3분의 1을 감하여 칙벌(飭罰)을 보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번의 이 일은 한편으로는 척강하는 조종에게 사죄하고 한편으로는 굶주려 죽은 혼령을 위로코자 하는 것이니, 수령이 된 자가 만약 소홀하게 하다면 어찌 청구(靑丘)064) 의 신하라 할 것인가?"
하고, 비국으로 하여금 기전(畿甸)과 삼남(三南)에 신칙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이장(李彛章)을 대사헌으로, 유언국(兪彦國)을 대사간으로, 이상지(李尙芝)를 보덕으로, 이운해(李運海)·이홍직(李弘稷)을 장령으로, 조중명(趙重明)을 헌납으로, 이시정(李蓍廷)을 지평으로, 윤석주(尹錫周)를 정언으로 삼았다.
3월 30일 정해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공경히 맞이하였다. 이어 건명문(建明門)으로 나아가 하향 대제(夏享大祭)의 이의(肄儀)를 친히 행하였다. 국기(國忌)의 재계(齋戒) 때문에 헌가(軒架)는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북병영(北兵營)의 습조(習操)를 정지시켰다. 임금이 도신(道臣)의 장청(狀請)을 보고 하교하기를,
"올해 곡식을 운반한 나머지에 그 어찌 습조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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