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경인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하향 대제에 쓸 향을 공경히 맞이하였는데, 왕세손에게 명하여 같이 공경히 맞이하게 하였다.
임금이 태묘에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이어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봉심하고 희생과 제기(祭器)를 살펴본 뒤 재실(齋室)로 들어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해 들으니 현희(玄犧)065) 는 본디 몸집이 작다 하길래 마음 속으로 그러려니 하였는데, 이번 현희는 몸집이 크다. 이로써 보건대, 단지 몸집이 작은 것으로 희생을 봉해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전생서 제조(典牲署提調)와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차후로 만약 다시 몸집이 작은 것으로 구차하게 충당한다면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날 여러 집사(執事)를 소견(召見)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김종수(金鐘秀)가 여러 사람 가운데서 홀로 단중(端重)하였다"
하고, 현궁(弦弓)을 내리라 명하였다.
임금이 태묘에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이어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봉심하고 희생과 제기(祭器)를 살펴본 뒤 재실(齋室)로 들어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해 들으니 현희(玄犧)065) 는 본디 몸집이 작다 하길래 마음 속으로 그러려니 하였는데, 이번 현희는 몸집이 크다. 이로써 보건대, 단지 몸집이 작은 것으로 희생을 봉해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전생서 제조(典牲署提調)와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차후로 만약 다시 몸집이 작은 것으로 구차하게 충당한다면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날 여러 집사(執事)를 소견(召見)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김종수(金鐘秀)가 여러 사람 가운데서 홀로 단중(端重)하였다"
하고, 현궁(弦弓)을 내리라 명하였다.
4월 4일 신묘
임금이 태묘 하향을 친히 행하였다. 예(禮)가 끝나자 승지 김응순(金應淳)에게 어제문(御製文)을 써서 망묘루(望廟樓)에 걸라고 명하였다. 누(樓)는 종묘서(宗廟署)의 직소(直所)이다. 이어 1본(本)을 써서 춘방관(春坊官)으로 하여금 동궁에게 읽어 아뢰게 하였다.
4월 4일 신묘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들러 배알(拜謁)하였다.
4월 5일 임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경기 어사 김상집(金尙集)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소견(召見)하고 양천 현감(陽川縣監) 김이고(金履固), 과천 현감(果川縣監) 권유(權瑜)를 파직하라 명하였다. 김상집의 서계(書啓)로 인한 것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해부(該府)에 명하여 김해 부사(金海府使) 구정환(具鼎煥)을 잡아다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감운 어사(監運御史) 김종정(金鍾正)이 그가 관직에 있으면서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였다고 논계(論啓)했기 때문이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 지평 이봉상(李鳳祥)이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돈소(敦召)하였다.
4월 6일 계사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공경히 맞이하였다.
어사 이재간(李在簡)을 보내 충주(忠州) 양진창(楊津倉)의 곡식 장부를 안렴(按廉)하게 하였다.
4월 7일 갑오
안흥군(安興君) 이숙(李埱)이 졸(卒)하였다. 정1품 종신(宗臣)의 예(例)에 의거해 그 상사(喪事)를 치루어 주라 명하였다.
4월 9일 병신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이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도 암행 어사 홍양한(洪亮漢)이 태인현(泰仁縣)에 이르러 갑자기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중독(中毒)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특별히 패초(牌招)를 어긴 대신(臺臣)과 입시(入侍)한 대신(臺臣)을 파직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양사(兩司)의 전계(傳啓)가 번거롭고 자질구레함이 많으며 오랜 세월 동안 쟁집(爭執)한다는 것으로써 대각에 하유(下諭)하여 정지하도록 했는데, 여러 신하들이 서로 미루어 떠넘기고 또 패초를 어김이 많았으므로 임금이 노하여 모두 파직한 것이다. 민백흥(閔百興)이 나아가 말하기를,
"처분이 중도(中道)에 지나칩니다. 차후로 눈치를 보며 뜻에 영합하는 사람이 이것을 경계로 삼는다면 뒷날 폐단이 됨이 클 것입니다. 청컨대 대신(臺臣)을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고 민백흥을 체직시켰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구원하니, 임금이 이에 단지 대신(臺臣)만 체직(遞職)시키고, 민백흥은 추고(推考)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경기 감사 홍낙성(洪樂性)을 소견(召見)하여 각 고을의 진정(賑政)에 대해 물었다.
한사직(韓師直)을 대사간으로, 여선응(呂善應)을 집의로, 정항령(鄭恒齡)을 사간으로, 정문주(鄭文柱)·한필수(韓必壽)를 장령으로, 정언섬(鄭彦暹)·정경인(鄭景仁)을 지평으로, 이시건(李蓍建)을 헌납으로, 윤득맹(尹得孟)·임성(任珹)을 정언으로, 홍술해(洪述海)를 응교로, 이은(李溵)을 호조 참판으로, 정존겸(鄭存謙)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정언 윤석주(尹錫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르고 어기는 즈음에 있어서 명찰(明察)이 지나쳐 도리어 공정히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쌍방을 아울러 보는 도(道)를 해치며, 꺾어버림이 지나쳐 도리어 거두어 들이시고 널리 베푸시는 덕이 부족합니다. 일을 논한 것이 조금 절엄(切嚴)한 경우는 그것이 교격(矯激)인가 의심하시고 사람을 논한 것이 조금 준절(峻切)한 경우는 그것이 배알(排軋)인가 의심하시어, 책망하는 것도 부족해 삭출(削黜)하고 삭출도 부족하여 혹 찬배(竄配)하기도 하십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이 모두들 말하는 것을 조심하니, 이로 말미암아 기강은 더욱 무너지고 기절(氣節)은 더욱 저상(沮喪)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위가 높은 자는 스스로 방자하게 굴고 세력이 강성한 자는 거리낌이 없으며, 재상의 권한은 무거워지고 대각의 지위는 가벼워 집니다. 저 조의(朝衣)를 입고 조관(朝冠)을 쓴 자는 언의(言議)를 토자(土苴)066) 같이 여기고 명절(名節)을 파리(笆籬)067) 로 여긴 채 권문(權門)에 빌붙어 기어오르고, 영도(榮途)를 차지하고자 도모해, 조경(躁競)·탐오(貪汚)의 버릇으로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고 일시적으로 임시 변통을 하니, 뭇 신하들의 죄야 진실로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만, 또한 전하께서 능히 간언(諫言)을 용납하지 못하는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큰 계책을 세워 후손에게 편암함을 물려주시고자 정성을 다해 어진 이를 구하시매 열 번 사신을 보내 정초(旌招)하여 마침내 산림(山林)이 뜻을 바꾸도록 만드셨고, 이어 특별한 은혜와 전에 없던 예(禮)를 독서·궁리(窮理)하는 선비에게까지 두루 미치게 하셨으므로, 성심(聖心)을 계옥(啓沃)하고 충덕(沖德)068) 을 보도(輔導)하며 조정에는 어진 이가 있고 산야(山野)에는 쓰이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마당의 망아지를 채 잡아매기도 전에 야인(野人)의 옷을 입은 어진 이가 급작스레 돌아갔으니, 다만 성심(聖心)이 처음의 예우(禮愚)를 계속하지 못하셨을 뿐아니라, 비지(批旨)도 또한 예(禮)로 대우함이 부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더욱 이 정초를 바로 거두어들이고 의논하라 명하신 것을 도로 정지시켰으니 한 가지 약이 입에 쓴 것을 싫어하여 바구니에 가득찬 삼(蔘)과 삽주[朮]를 버리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아! 산림에서 독서한 사람은 우악하고 남다른 은혜에 감격한 나머지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을 다 바칠 것을 생각하였으니, 대저 어찌 선비란 이름으로 선비의 행동을 하면서 남의 지시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실로 전하께서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고요한 대각(臺閣)에서는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김낙수(金樂洙)가 성명(成命)대로 하기를 청한 것은 어진 이에게 벼슬을 맡기자는 뜻이었고, 서병덕(徐秉德)이 비지(批旨)를 고치라고 청한 것은 선비를 예(禮)로써 대우하라는 도리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두 대신(臺臣)이 청한 바를 결단코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애초 임금이 송명흠(宋明欽)에게 내린 비답에 ‘부박(浮薄)하고 시끄러운 자들이 공동(恐動)시켜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윤석주가 상소에 언급한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비답을 내려 엄중하게 책망하고, 체직(遞職)시키라 명하였다.
4월 10일 정유
홍문관에 명하여 명패(命牌)를 고쳐 쓰게 하였다. 이에 앞서 양사(兩司)를 부를 적에는 모두 명패를 쓰고 홍문관의 경우는 분판패(粉板牌)를 썼는데, 이때에 와서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옥당관(玉堂官)을 젊은 벗으로 여기고 있으니, 예대(禮待)함이 마땅히 양사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명패로 부르는 것을 정식(定式)로 삼으라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도우(屠牛)의 금법(禁法)을 거듭 엄중히 하였는데, 감률(勘律)에는 차등을 두었다. 범한 자가 관사(官司)일 경우 입직관(入直官)에게는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고 해당 당상관은 파직하며, 사대부가(士大夫家)일 경우 가장(家長)을 입직관과 같은 형률(刑律)로 시행하고 내수사(內需司) 및 사궁(四宮)일 경우 해당 중관(中官)을 또한 이 형률과 같이 시행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1일 무술
사서(司書) 심욱지(沈勗之)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홍경안(洪景顔)이 신의 몸을 막된 말로 헐뜯는 것은 전적으로 ‘화신(化身)’이란 두 글자에 있습니다. 신이 외람되게도 설서(說書)에 통의(通擬)된 것은 조재홍(趙載洪)이 전조(銓曹)에 들어갔을 때 있었는데, 대개 듣자니, 조재홍은 신이 징토(懲討)에 엄격하다 하여 극력 주장했다 합니다. 이른바 첫 번째 ‘화신’이란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작년 여름 분수에 맞지 않게도 언지(言地)에 있을 적에 조재호(趙載浩)를 토죄(討罪)하는 두 차례의 계사(啓辭)를 맨먼저 발론(發論)하였으나, 그 이후 외람되게도 영관(瀛館)069) 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재차 ‘화신’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허물을 속이고 망(望)을 바꾼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일찍이 이조 낭관(郞官)으로 누차 친정(親政)에 참여하기는 했습니다만, 서전(西銓)070) 의 망초(望草)는 처음부터 동전(東銓)071) 에 상관하지 않으니, 신이 어떻게 능히 그 사이에 손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그 전지(銓地)를 공갈·협박하였다는 등의 말은, 신이 가을 무렵에 논핵을 당한 뒤 첫번의 정사(政事)에서는 간직(諫職)에 의망(擬望)되었고 재차의 정사에서는 관직(館職)에 의망되었으니, 전조에서 신을 대우함이 곡진(曲盡)하다 할 만한데 그가 이른바 ‘첫 번째 두 번째 정사에서 즉시 조의(照擬)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 어찌 그리도 허무 맹랑합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개석(開釋)하였다.
전 집의 김양행(金亮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찬선 송명흠(宋明欽)이 조정에 나아간 지 얼마 안되어 창황하게 물러나자 성상께서 누차 미안(未安)한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대저 송명흠의 온윤(溫潤)·간측(懇惻)함으로도 그 말이 오히려 천심(天心)을 감동시키지 못하였거늘, 신처럼 화급(禍急)한 사람이야 더욱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건대, 현묘(顯廟)의 세대에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은 일에 따라 진계(陳戒)하였으니, 언사(言辭)가 격절(激切)하여 혹은 한(漢)나라 애제(哀帝)가 자주 형법(刑法)을 쓴 것을 인용하였고, 혹은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간사(奸邪)한 신하를 알지 못했던 것을 인용하였으며, 혹은 진(晉)나라 평공(平公)이 사시(四時)를 동일(同一)하게 한 것을 인용하기도 하면서 임금이 깊이 징계하고 엄격히 반성할 것을 바랐으니, 옛날 군자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이와 같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송명흠이 진달한 바는 선정에 비하여 위곡(委曲)할 뿐만이 아닌 정도인데, 성상께서 지나치게 의심하시어 넉넉하게 용납하지 않으시니, 이제부터 초야(草野)의 사람은 반드시 군덕(君德)이나 조정의 정상에 대해 과감하게 말함이 없고, 단지 침묵하며 승순(承順)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며 비답을 내려 엄중하게 책망하였다. 이때부터 정초(旌招)는 드디어 정지되었다.
임금이 친히 문신과 무신의 강(講)을 시험하였다. 문신 중에서 수석을 차지한 설서(說書) 유지양(柳知養)은 6품으로 올려 주고, 무신 중에서 수석을 차지한 무겸(武兼) 임붕한(林鵬翰)에게는 말을 내렸다. 불통(不通)한 사람은 모두 본사(本司)에 입직(入職)하여 능히 외운 뒤에 입직을 갈아주게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동지사(冬至使)가 가지고 온 비단[緞]과 초피(貂皮)를 해조(該曹)에 내려서 경비(經費)에 보태어 쓰도록 명하였다.
개국 공신(開國功臣) 조준(趙浚)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라 명하였다.
4월 12일 기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함계군(咸溪君) 이훈(李櫄)과 부사(副使) 이규채(李奎采)가 청(淸)나라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소견하여 위로하였다. 이어 중국의 사정을 묻고 연신(筵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황하(黃河)의 물이 맑아질 소식은 가망이 없구나."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장령 한필수(韓必壽)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괴원 분관(槐院分館)072) 이 공정하지 못하여 재주가 없는데도 끼어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주가 있는데도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청컨대 권점(圈點)을 주관한 사람을 파직하고 공정하게 다시 권점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뒷날 폐단이 있다 하여 권점을 다시 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고 단지 파직하라는 청만 따랐다. 그 뒤에 영의정 신만(申晩)이 아뢰기를,
"대신(臺臣)이 이미 이름을 지적하여 드러내 놓고 논척(論斥)하지 아니하였으니, 권점을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편안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한필수를 불러 물었다. 한필수가 ‘신섬(申暹)·이갑룡(李甲龍)’이라고 대답하자, 임금이 두 사람을 권점 친 것에서 빼 버리라고 명하였다.
윤대관(輪對官)을 소견(召見)하였다.
특별히 이조의 세 당상관을 파직하니, 정주(政注)073) 에 부억(扶抑)하는 폐단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김상복(金相福)을 이조 판서에 제수하고, 한광회(韓光會)를 참판으로, 정존겸(鄭存謙)을 참의로, 윤동섬(尹東暹)을 도승지로, 조명정(趙明鼎)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조명정이 버티며 명을 받들지 아니하니, 금오(金吾)에 내려 추고(推考)하고 조금 있다가 체직을 허락하였다.
4월 13일 경자
박취원(朴取源)을 정언으로, 홍낙명(洪樂命)을 필선으로, 윤동승(尹東昇)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 【장령 한필수(韓必壽)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중화 부사(中和府使) 구명겸(具明謙)이 서관(西關)의 노상에서 전적(典籍) 오덕일(吳德一)을 만나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써 그 말을 끈 종을 매질하였습니다. 오덕일이 ‘시임(時任) 조관(朝官)은 마땅히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하자, 구명겸이 하례(下隷)를 많이 풀어 말 앞으로 쫓아내어 관문(官門)에 이르러서야 놓아주었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청컨대 구명겸을 잡아다 신문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어 하교하기를,
"근래 무변(武弁) 중에 연소한 자가 많다. 구명겸이 중화 부사가 된 것도 너무 빨랐기 때문에 이런 폐단이 있는 것이다."
하고, 전조(銓曹)에 명하여 세력 있는 무변이 빨리 주군(州郡)에 오르는 폐단에 대해 각별히 신칙토록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4월 14일 신축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창수(李昌壽)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특별히 특진관(特進官) 김성응(金聖應) 등 14명을 파직시켰다. 이때 임금이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는데, 특진관이 미루고 핑계대며 들어오지 않으니, 임금이 모두 파직하라 명하고, 드디어 좌차(座次)대로 입시(入侍)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전 집의 김양행(金亮行)을 파직하라 명하니, 일전의 상소로 임금이 격뇌(激惱)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뢴 바로 인해 마침내 그 명을 정지하였다.
임성(任珹)을 지평으로, 안표(安杓)를 헌납으로, 구상(具庠)을 정언으로, 이득배(李得培)를 부교리로, 이성규(李聖奎)·윤득맹(尹得孟)을 수찬으로, 김치양(金致讓)을 사서(司書)로, 이정보(李鼎輔)를 예조 판서로, 송창명(宋昌明)을 판윤으로, 신위(申暐)를 형조 참판으로, 이정보(李鼎輔)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4월 16일 계묘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갔다. 사간 정항령(鄭恒齡)과 지평 정언섬(鄭彦暹)을 파직하였다. 이에 앞서 이조의 서리(書吏) 이덕홍(李德泓)이 어보(御寶)를 위조하여 죄가 사형에 해당되었으나, 참작하여 처분할 것을 명하였는데, 양사(兩司)에서는 입시(入侍)해 있었지만 쟁집(爭執)하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와서 시독관(侍讀官) 이명환(李明煥)이 참작해 처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입시했던 양사의 신하들은 파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참작해 처분하는 것은 비록 도로 거두기 어렵지만 파직을 청한 것은 체모를 얻었다 하여 아뢴 대로 하게 한 것이다.
이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을 특별히 호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전지(銓地)에 한번 염우(廉隅)를 펴주려 한 것이었다.
동경연(同經筵) 황인검(黃仁儉)이 아뢰기를,
"사학 교수(四學敎授) 정창성(鄭昌聖)은 노자(老子)의 일을 가지고 제목을 내걸어 선비들에게 과제를 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특별히 서용하지 아니하는 법을 시행하라 명하였다.
서지수(徐志修)를 이조 판서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헌으로, 이기덕(李基德)을 사간으로, 윤사국(尹師國)을 지평으로, 홍상한(洪象漢)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영의정 신만(申晩)과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윤석주(尹錫周)가 상소하여 논척(論斥)한 것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사면(辭免)하니, 임금이 모두 돈면(敦勉)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기전(畿甸)·삼남(三南)·관동(關東)·관북(關北) 등의 여러 도에 하유(下諭)하기를,
"아! 삼남의 적자(赤子)를 위해 비록 5도(道)에다 돌아가며 운반하라고 명하였다만, 허다한 사공(沙工)과 격군(格軍)도 또한 나의 적자이니, 10만여 석의 곡식을 운반할 즈음에 비록 한 사람이라도 바다에 빠져 죽는다면 어찌 다만 이윤(伊尹)이 ‘내가 밀어서 도랑 속으로 넣는 것 같다.’고 한 것뿐이겠는가? 그래서 특별히 바다의 그림을 그려 항상 좌우에 두고 보매 5도의 선운(船運)이 마치 손 안에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 운반을 마쳤다는 장문(狀聞)을 보게 되었다. 아! 하늘에서 척강(陟降)하시는 조종(祖宗)께서는 이처럼 돌보아 주시는데, 보잘것 없는 나의 비덕(否德)으로 어떻게 우러러 보답할 것인가? 아! 그대들 삼남의 도신(道臣)들은 나의 이 뜻을 깊이 유념하여 진정(賑政)에 각별히 뜻을 더 기울일 것이며, 사공과 격군이 모두 그 집으로 돌아간 뒤에 지방관은 비국(備局)에 보고하여 전주(轉奏)하도록 하라. 그리고 비단 사공과 격군 뿐만이 아니라, 포구(浦口)로 운반할 즈음에 동쪽·남쪽·북쪽의 백성들이 또한 노고(勞苦)하였을 것이니, 여러 도(道)로 하여금 특별히 신역(身役)을 견감(蠲減)하는 정사를 베풀게 하라. 감운 어사(監運御史)의 장계는 유중(留中)하여 스스로 면려(勉勵)토록 하겠노라. 아! 이번에 곡식을 운반한 것은 전적으로 경외(京外)의 모갈(耗竭)에서 비롯되어 그런 것이니, 이것이 내가 앞의 일을 징계하여 뒷날을 삼가는 까닭인 것이다. 아! 유사(有司)의 신하들과 여러 도의 방백(方伯)들은 또한 이 뜻을 깊이 유념하여 비용을 줄이고 아끼는 데 조석(朝夕)으로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조선(漕船)이 바다에서 운반하는 모양을 그림으로 그리라 명하여 그것을 보았었는데, 이때에 와서 또 이렇게 하유한 것이다.
4월 17일 갑진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서 왕세손에게 시좌(侍坐)할 것을 명하였다. 강(講)을 마치고 임금이 경의(經義)를 물었는데, 세손의 응대(應對)가 마치 메아리같고, 사지(辭旨)가 몹시 통창(通暢)하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내 이미 노쇠하였고,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는 마땅히 힘써야 한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특별히 충원 암행 어사(忠原暗行御史) 이재간(李在簡)을 파직하고 해당 현감 신확(申㬦)을 먼저 파직한 뒤 잡아오게 하였다. 이때 이재간이 양진창(楊津倉)을 살펴보고 복명(復命)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앙진창의 6천여 석의 곡식이 단지 16석만 있으니 일이 지극히 한심하다. 그런데도 번작(反作)074) ·나이(那移)075) 함은 모두가 불법(不法)에 관계된다. 어사는 그가 진정(賑政)을 잘한다 하여 비록 죄를 청하지는 않았지만. 순전히 포장(褒奬)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고, 마침내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북도 어사 이인배(李仁培)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이인배가 조목별로 진달한 것이 모두 타당성을 얻었다며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즉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삼남(三南)의 여러 도(道)에 교제창(交濟倉)을 두었다. 처음에 삼남에 큰 기근이 들자 임금이 북관(北關) 교제창의 곡식 10여 만 석을 배로 운반하여 진휼(賑恤)하라 명하였는데, 바닷길이 험하고 멀어 왕왕 표류하거나 전복되었다. 그래서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북도의 예에 의거하여, 양남(兩南)에 각각 좌우 두 창(倉)을 두고 호서에는 마땅히 한 창을 두며, 관동은 남북 사이에 또한 마땅히 한 창을 두어 흉년에 대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북도의 취재(臭載)076) 한 배의 격인(格人) 등을 풀어 주라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마음을 오로지하여 곡식를 운반하느라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혹시 약간 취재한 것이 있으면 곧 본처(本處)로 하여금 곡식을 대신 보충하게 하였으니, 이는 선격(船格)077) 에게서 징수하지 않으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어사가 아뢴 바를 듣건대, 그것을 건져내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갇혀 있는 자가 많이 있다고 한다. 아! 몇 달 동안 마음을 썼던 것이 하나는 기민(饑民)이었고, 하나는 선격이었으니, 기민이 혹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을세라 두려워하였고 선격이 혹 한 사람이라도 물에 빠질세라 두려워하였는데, 5도(道)에서 곡식을 운반하면서 한 사람도 물에 빠지지 않았다. 어제 삼남 감운 어사(三南監運御史)의 장문(狀聞)을 듣고 마치 스스로 면한 듯 하여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었다. 사공과 격군이 물에 빠짐을 면한 것은 진실로 애초부터 헤아리지 않았던 일인데, 겨우 살아난 백성이 비록 곡식을 훔치려고 한들 어찌 될 수가 있었겠는가? 곡식을 운반한 뒤 선격이 무사히 집에 돌아갔는가의 여부를 어제 지방관에게 보고하라 명하였는데, 아! 이 바다 가운데서 겨우 살아난 사공과 격군이 아직도 갇혀 있으니, 듣건대 매우 측은하다. 아! 10여 만 석의 곡식을 운반하였는데, 수백 석의 물에 빠진 곡식을 내가 어찌 아까와하랴! 한결같이 모두 탕척(蕩滌)하고 사공과 격군은 즉시 풀어 주어 각각 돌아가 그 부모 처자를 만나게 하라."
하였다.
4월 18일 을사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당상 무신의 삭시사(朔試射)에 친림하였다. 어필(御筆)로 ‘희우관덕 잉축유년(喜雨觀德仍祝有年)’ 이라 써서 내리며, 승지·옥당·춘방(春坊)·한림(翰林)·주서(注書), 기성(騎省)의 입직 당상관·낭관에게 7언(七言) 10운 배율(十韻排律)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도(道)에 우택(雨澤)을 장문(狀聞)한 것을 재촉하라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바라는 바는 오로지 양맥(兩麥)078) 에 있을 뿐인데, 가뭄이 들 징조가 없지 않다. 은하수를 바라보매 마음이 안절부절하고 밤에 별을 보매 더욱 몹시 마음이 답답하다. 이런 때에 때맞추어 내리는 비가 갑자기 쏟아진다면 우리 백성들이 거의 살아날 수 있을 것이나, 나의 한결같은 마음이 어찌 비를 얻었다 하여 해이해질 수 있겠는가? 기영(畿營)에 분부하여 우택의 장문을 일제히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듣는 대로 아뢰게 할 것이며, 또한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여러 도에 똑같이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4월 19일 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삼수(三水)의 범월 죄인(犯越罪人) 이원삼(李元三)을 우리 나라에서 엄중하게 조사·즙나(緝拿)할 일로 저들이 자문(咨文)을 보내왔습니다. 마땅히 연변(沿邊)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즙나를 행한다는 뜻으로 회자(回咨)를 지어 만부(灣府)에 보내 입송(入送)할 근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특별히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의 묘를 수축(修築)하라 명하였다.
신응현(申應顯)·이택징(李澤徵)을 장령으로, 박대유(朴大有)를 정언으로, 황인검(黃仁儉)을 부제학으로, 이인배(李仁培)를 수찬으로, 홍낙인(洪樂仁)을 문학으로, 조명정(趙明鼎)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4월 20일 정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운 배율(排律)을 지으라고 명하여 수석을 차지한 보덕(輔德) 이상지(李商芝)에게 지필묵(紙筆墨)을 주고, 나머지에게도 각각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이방일(李邦一)을 단천부(端川府)에 찬배(竄配)하였다. 이에 앞서 이방일이 달마(撻馬)를 뇌물로 준 일 때문에 대언(臺言)으로 인해 잡아다 핵실하였는데, 이방일은 공사(供辭)를 바치며 말하기를, ‘말 한 마리를 이익정(李益炡)의 집에 보내 갚았는데, 와전(訛傳)되어 이판(吏判)의 집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이익정의 아들 이성규(李聖圭)가 수찬이 되어 상소하기를,
"이방일이 연전에 신의 집의 말을 빌려가 죽게 만들고는 지난 겨울 노마(駑馬) 한 마리를 보내 갚았습니다. 그런데 준마(駿馬)를 뇌물로 주었다는 말에 있어서는 귀가 있는 사람이면 모두 들었고 심지어 대계(臺啓)에까지 오르게 되자, 이방일이 이에 의사(疑似)한 단서를 찾아 뇌물을 준 자취를 덮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니, 다시 이방일을 잡아와 엄하게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최후에 이방일이 공술(供述)하기를, ‘구세겸(具世謙)이 달마를 샀는데, 본부(本府)에서 올려보냈기 때문에 이처럼 전해지는 말이 있게 되었다.’고 하자, 임금이 드디어 찬배하라 명하였다.
4월 21일 무신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갔다. 강(講)을 마치고 윤대관(輪對官)을 소견(召見)하였다.
다시 이장오(李章吾)를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김시묵(金時默)을 수어사(守御使)로 삼았다.
김상익(金相翊)을 부수찬으로, 이재협(李在協)을 교리로, 이택진(李宅鎭)·이재간(李在簡)을 수찬으로, 이휘중(李徽中)을 부수찬으로, 김상익(金相翊)을 겸사서(兼司書)로, 심수(沈鏽)를 좌윤(左尹)으로 삼았다.
4월 22일 기유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사전(祀典)은 크고 작은 것을 논할 것없이 소홀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들으니, 내국(內局)079) 에서 신농씨(神農氏)를 제사지내는 일이 있는데, 평상시에 위판(位版)을 간직해 둠이 매우 소홀하다고 한다. 이후로는 대청(大廳)에 장(欌)을 설치하여 기름을 먹인 독(櫝)으로 덮어 간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조(前朝)080) 의 옛 능(陵)과 단군(檀君)·기자(箕子)·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始祖)의 능을 수축(修築)하라고 명하였다.
4월 23일 경술
상참(常參)을 행하고, 겸하여 조강(朝講)도 행했다.
이조 판서 서지수(徐志修)를 체직하였다. 서지수가 병조 판서 이창수(李昌壽)와 종남매(從娚妹)의 인혐(姻嫌)이 있다 하여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익모(韓翼謨)를 이조 판서로, 윤급(尹汲)·서지수(徐志修)를 참찬(參贊)으로, 홍술해(洪述海)를 응교로, 이인배(二仁培)를 교리로, 조운규(趙雲逵)를 동경연(同經筵)으로, 김상복(金相福)을 홍문 제학으로 삼았다.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간원 【대시간 한사직(韓師直)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접때 어사 홍양한(洪亮漢)이 태인현(泰仁縣)에 당도하여, 아전의 포흠(逋欠)이 많게는 수천 여 석에 이름을 듣고 여러 방면으로 형찰(詗察)하여 장차 출도(出道)·안치(按治)하려고 하던 즈음에 점심밥을 먹는 것으로 인해 갑자기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의심하고, 전해지는 말이 낭자합니다. 청컨대 어사가 데리고 간 서리(書吏)를 형조(刑曹)로 하여금 잡아 가두어 사문(査問)케 하고, 태인의 주인(主人)도 또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하게 핵문(覈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형조에서 그 서리와 겸인(傔人) 등을 사문했더니, 그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어사는 단지 탕반(湯飯) 몇 숟갈을 먹었을 뿐이고, 남은 밥은 겸인들이 먹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 공사를 보고 모두 풀어주라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호남(湖南) 여러 고을의 굶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라 명하였다. 이때 삼남(三南)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호남이 더욱 심하여 임금이 북관(北關)의 곡식을 배로 운반해 진휼(賑恤)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방백(方伯)과 수령에게 뜻을 다하여 주제(賙濟)할 것을 신칙했는데, 군민(軍民)의 부역(賦役)을 모두 견감(蠲減)해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활하도록 하여 길에는 유개(流丐)가 없고, 들판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없도록 하였다. 이때에 와서 보리가 익자, 도신(道臣)이 상문(上聞)했는데, 한 도(道)의 기민(飢民)으로서 죽은 자가 도합 1백 17명이었다. 임금이 그래도 측은히 여기며 마음 아파하고 관(官)에서 그 시체의 매장을 도와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승지 강필리(姜必履)에게 형조(刑曹)의 문안(文案)을 읽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비록 추국(推鞫)하여 형(刑)을 가하는 자라 할지라도 공사(供辭) 가운데다 「전의 공초(供招)와 가감(加減)이 없다[與前招無加減]란 여섯 글자를 쓰는 것은 죄수에게는 절박하다 할 만하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진실로 옳다. 형을 가한 뒤에는 비록 억울함을 일컫는 말이 있다 할지라도 절대 쓰지 않으니, 수인(囚人)이 비록 뱃속 가득히 원통하고 억울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어떻게 하소연할 것이며, 듣는 사람도 또한 어떻게 세밀히 구명(究明)하겠는가? 해부(該府)·해조(該曹)를 논할 것 없이 수인의 공초를 사실에 의거하여 기록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4일 신해
주강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석강에 나갔다. 시독관(侍讀官) 이명환(李明煥)이 말하기를,
"도(道)가 있는 세상을 당하여 가난하고 천한 것은 진실로 선비의 부끄러움이지만, 선비가 만약 재주가 있는 데도 가난하고 천하다면 또한 군주(君主)의 부끄러움입니다. 이는 마땅히 군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곳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4월 25일 임자
임금이 유생의 전강(殿講)에 친림하여 수석을 차지한 이진복(李鎭復)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나머지에게는 각각 급분(給分)하라 명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6일 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여러 도(道)의 환곡(還穀)을 번작(反作)·나이(那移)하는 데 대한 금법(禁法)을 거듭 엄중하게 하였다. 이때 몇 고을의 수령이 환곡을 번작하는 죄과를 범하였으므로 찬배(竄配)·금고(禁錮)의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大臣)의 주달(奏達)로 인해 다시 더 엄중하게 신칙케 하고, 양진창(楊津倉)의 전해져 오는 포흠곡(逋欠穀) 수천 석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상문(上聞)케 하였다.
여러 신하들에게 산산창(蒜山倉)과 연행(燕行) 때의 비포(比包)에 관한 일을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산산창의 일은 끝내 백성과 이익을 다툼에 가까우니, 근일의 정식(定式)에 의거하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구관(句管)하게 하라. 비포의 일은 끝내 조정을 욕되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니, 각별히 서장관(書狀官)과 만윤(灣尹)에게 신칙하여 그 영(令)을 거듭 엄중하게 밝히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김해(金海) 명지도(鳴智島)에 산산창을 두어 관(官)에게 해마다 환곡을 지급하고 염분미(鹽分米)를 받치게 했는데, 소금을 받을 즈음에 그 폐단이 많았으므로 본부(本府)에서는 감영(監營)으로 돌리고 감영에서는 비국(備局)으로 돌리니, 임금이 사체(事體)가 잗달고 명목이 바르지 않다 하여 마침내 다시 순영(巡營)에 소속시키라고 명했던 것이다. 비포의 일은, 애초 상역(商譯)이 청한 바에 기인한 것으로, 팔포(八包)081) 로 사들인 수량을 가지고 피인(彼人)의 수표(手標)를 받으면 서장관이 그 문권(文券)에 서인(署印)하고 만부(灣府)에 비준(比準)하여 팔포의 수량보다 증가시키지 못하게 한 것인데, 상역은 농간을 부려 문권을 증가시켜 꼭 서로 합치시키려 하고 만부에서는 비준하는 데 게을러 금령(禁令)이 점차 해이해지니, 임금이 수표를 받고 서인하는 것은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킨다 하여 엄중하게 금하고 다시 상역에게 신칙하여 더 교역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복평군(福平君) 이인(李㮒)의 관작(官爵)을 다시 복구시켰다. 애초에 이인은 이정(李楨)·이남(李柟)의 역옥(逆獄)에 연좌되어 귀양가 죽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 손자 이진복(李鎭復)이 등제(登第)하자,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임금께 아뢰어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또 임금이 친히 글을 지어 제사지냈다.
김화중(金和中)을 지평으로, 김상집(金尙集)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27일 갑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정언 박대유(朴大有)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도적을 잡는 행정(行政)이 날이 갈수록 점차 해이해져, 무뢰배 7,8명이 야음(夜陰)을 타 김씨 성을 가진 과부의 집에 돌입하여 전재(錢財)를 빼앗고 부녀자를 구타하여 이를 부러뜨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도성(都城) 안에 이처럼 겁략(劫掠)하는 일이 있으니, 해당 포장(捕將)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그날 밤 순찰을 돌았던 포교(捕校)는 각별히 엄중하게 곤장을 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4월 28일 을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나리포(羅里舖)는 전적으로 탐라(眈羅) 제주(濟州)를 위한 것이니, 양곽(凉藿) 등의 물건이 나온 뒤에라야 곡식을 갖출 수 있다. 만약 본주(本州)를 접제(接濟)할 일이 있으면 스스로 수응(酬應)할 수 있으니, 비록 설치한 법은 아름다우나 기강이 무너져 준행(遵行)하지 아니하여 본포(本舖)에 곡식이 없어 다른 관청에서 곡식을 운반하는 폐단이 있게 만들었다. 차후로 본포에 엄중히 신칙하여, 만약 곡식이 텅 비게 만든다면 도신(道臣)은 중죄(重罪)로 다스리고, 해당 현령(縣令)에게는 금고(禁錮)의 형률을 시행케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남쪽의 포항창(浦項倉)과 북쪽의 교제창(交濟倉)은 곧 남과 북이 서로 구제하는 뜻이었는데, 올해는 심지어 양호(兩湖)의 곡식까지 운반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몇 달 동안 애를 써서 속을 태우게 하였다. 지금 남과 북에 각각 창고가 있고 또 다른 도에도 창고를 둘 것을 명하였으니, 그것이 서로 고대(苦待)하는 것보다는 남쪽의 곡식으로 남쪽을 구제하고 북쪽의 곡식으로 북쪽을 구제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차후로는 남과 북을 논할 것 없이 창고를 설치할 곳은 상평창(常平倉)의 예(例)에 의거하여 모두 ‘제민창(濟民倉)’이라 이름하라. 비록 ‘교(交)’자는 없지만, 이것은 곧 서로 널리 구제하는 뜻이다."
하고,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여러 도(道)에 신칙하여 창고를 설치한 뒤 창고의 곡식이 혹시라도 부족하거나 줄어듦이 있으면 도신과 지방관을 나리포의 예에 의해 다스리게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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