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1권, 영조 39년 1763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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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정사

임금이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이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5월 3일 기미

공조 판서 윤봉구(尹鳳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접때 강연(講筵)에서 신의 아우를 앞으로 나오라 명하시고 신에게 올라올 것을 하유하셨는데, 성교(聖敎)가 진지하여 ‘감반(甘盤)의 옛 스승은 지금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신이 전하는 바를 듣고 황연(怳然)히 지척(咫尺)을 어기지 못하였습니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군자는 나아감을 같이 하지 않아도 물러남은 같이 한다.’ 하였습니다. 신은 전 찬선(贊先) 송명흠(宋明欽)과 같이 소명(召命)을 받았는데, 송명흠이 부름에 나아갔다가 급작스레 곧 물러나 돌아왔으니, 신으로 하여금 비록 이미 명을 받들었다 할지라도 의리상 마땅히 같이 돌아가야 할 처지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거취(去就)는 다시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고, 이어 인병(引病)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산림(山林)의 선비들이 서로 잇달아 이와 같이 하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곧 내가 성실하지 못한 소치로다. 경의 병이 이와 같으니, 본직(本職)의 체직을 허락한다."
하였다.

 

삼수(三水)의 전 부사(府使) 강계주(姜啓周)와 갈파(坡)의 전 첨사(僉使) 장제윤(張齊尹)을 모두 충군(充軍)하라 명하였다. 피인(波人)이 범월(犯越)한 일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지금 북백(北伯)과 남병사(南兵使)의 장문(狀聞)을 보건대, 그 글을 받을 즈음에 만약 활을 쏘아 전한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구해낼 때 받아온 것이다. 저들이 말을 몰아 강을 건넌 것이 이미 스스로 변금(邊禁)을 중히 여기는 뜻을 손상시킨 것이니, 우리 쪽에서 무엇 때문에 잠수(潛水)하여 가서 구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곳에 부교(浮橋)를 놓는다면 수십 보(步)에 불과할 것인데, 어찌하여 이처럼 해괴한 행동을 하여 스스로 변금을 훼손시키고 뒷날의 폐단을 여는가? 지금 범월을 조사하면서 도리어 그 범하는 것을 가르치니, 파수(把守)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부교가 글을 받은 것보다 갑절이나 중요하다 생각하니, 교대한 뒤 수신(帥臣)은 병위(兵威)를 크게 베풀고 변민(邊民)을 모아 세 둘레를 돌려보인 뒤 곤장을 치고 충군시키라."
하였다.

 

5월 4일 경신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와 각릉(各陵)·전(殿)의 단오제(端午祭)에 쓸 향을 공경히 맞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홍인한(洪麟漢)을 이조 참판으로, 남운로(南雲老)를 헌납으로, 엄인(嚴璘)을 수찬으로, 성천주(成天柱)를 강원 감사로, 신회(申晦)를 형조 판서로, 남태제(南泰齊)를 공조 판서로, 조운규(趙雲逵)를 한성 판윤으로 삼았다.

 

나성추(羅星樞)를 조용(調用)하고, 조봉원(趙鳳源)을 찬배(竄配)하라 명하였다. 나성추와 조봉원은 모두 호서(湖西) 사람인데, 나성추는 곡식 1천여 석을 바쳐 진휼(賑恤)을 도왔으나, 조봉원은 관(官)에서 권분(勸分)082)  하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스스로 그 곳간을 불태웠다. 감운 어사(監運御史) 정창순(鄭昌順)이 복명(復命)하여 그 정상을 아뢰니, 드디어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5월 5일 신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서 보리를 받았다. 이때 동적전(東籍田)의 보리가 갓 익자 예조 판서 이정보(李鼎輔)에게 섭행(攝行)해 벨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다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의식을 갖추고 받았는데, 왕세손에게 시립(侍立)하여 보라고 명하였다.

 

비인현(庇仁懸)의 백성 다섯 명이 익사(溺死)하고 담양부(潭陽府)의 백성 세 명이 소사(燒死)하였다고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니, 휼전(恤典)을 명하였다.

 

5월 6일 임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인군(人君)이 경계할 것으로는 여색(女色)보다 더한 것이 없다. 내가 도화(圖畵)를 보건대, 명신(名臣)이 곁에 있는 사람은 모두 현군(賢君)이었고 우물(尤物)083)  이 곁에 있는 사람은 모두 나라를 망친 군주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간 한사직(韓師直)을 원주목(原州牧)에, 사간 이기덕(李基德)을 단천부(端川府)에 찬배(竄配)하고, 헌납 남운로(南雲老)와 정언 김상집(金尙集)을 삭직(削職)하였다. 이때 임금이 정신을 가다듬고 정치에 힘써서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는데, 이날 조강(朝講)에 대간(臺諫)들이 모두 나오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노하여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남태회(南泰會)를 대사헌으로, 홍준해(洪準海)를 대사간으로, 박기채(朴起采)를 사간으로, 변득양(邊得讓)을 장령으로, 이중해(李重海)·이세연(李世演)을 지평으로, 현광우(玄光宇)를 헌납으로, 윤홍렬(尹弘烈)·서병덕(徐秉德)을 정언으로, 박지원(朴志源)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정언 서병덕을 출보(黜補)하여 연원 찰방(連源察訪)으로 삼았다. 서병덕이 상소하여 두 대신(臺臣)을 투비(投畀)084)  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 소장(疏章)을 돌려주라 명하고, 척보(斥補)한 것이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관서(關西)에 가뭄이 들었는데, 도신(道臣)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라 명하였다.

 

5월 7일 계해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5월 8일 갑자

부교리 이득배(李得培)와 수찬 이재간(李在簡)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서병덕(徐秉德)의 상소는 참으로 소회(所懷)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저 어찌 두 대신(臺臣)을 영호(營護)함이 있었겠습니까? 진실로 우악하게 용납하심이 마땅한데, 도리어 위벌(威罰)을 가하셨으니, 지금부터 이후로 비록 지나친 거조(擧措)가 있을지라도 누가 감히 전하를 위해 말하겠습니까? 대신(臺臣)을 견보(譴補)하라는 명을 빨리 정지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리고 모두 체차(遞差)시켰다.

 

함경도에 우박이 내려서 보리와 조를 손상시켰다. 우역(牛疫)이 크게 번졌다.

 

운관(雲館)085)  에 명하여 《어제속경세문답(御製續警世問答)》을 인쇄해 올리라 명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경세문답》 원편(原編)을 지어 내렸는데, 이때에 와서 또 속편(續編)을 지었던 것이다.

 

5월 9일 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간 홍준해(洪準海)를 거제부(巨濟府)에 찬배(竄配)하였다. 홍준해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일전에 여러 대신(臺臣)들을 혹은 찬배하고 혹은 출보(黜補)한 것은 처분이 지나쳤으니, 마땅히 광구(匡救)함이 있어야 할 것인데, 등연(登筵)한 유신(儒臣)들이 능히 즉시 쟁집(爭執)하지도 못하고 또 능히 모두 도로 거둘 것을 청하지도 못했던 것은 논사(論思)의 체모가 아주 부족하여 마침내 구간(苟簡)의 실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렸던 바 옥당(玉堂)의 차자에 대해 회책(誨責)이 엄준(嚴峻)하여 한 글자의 비답도 없었으니, 가만히 성명(聖明)을 위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옛날 선조조(宣祖朝) 때 옥당에서 깊은 밤에 차자를 올렸는데, 하룻밤을 지내도록 비지(批旨)를 내리지 않았다가 다음날 아침에 하교가 있기를, ‘기운이 마침 편안하지 못하여 미처 답하지 못하였으니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승정원에서는 나를 위해 옥당에 사과하라.’ 하였으니, 아름답고도 거룩합니다. 전하의 계술(繼述)하시는 정성으로 반드시 이에 깊이 유념하는 바 있을 것이기에 신이 감히 전하를 위해 아뢴 것이오니,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곧 비지를 내리시어 두 유신을 체차하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그리고 옥당의 차자에 비답을 내리지 아니함은 일찍이 있지 않았던 바였으며 경악(經幄)의 신하와 후설(喉舌)의 임무를 맡은 곳에서 진실로 마땅히 경계를 올려야 할 것인데 아직까지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신은 유신과 승선(承宣)을 모두 견파(譴罷)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려 책망하고, 마침내 투비(投畀)하라 명하고 배도(陪道) 압송하게 하였다.

 

여섯 승지를 체차(遞差)하라 명하고, 남소(南所)의 위장(衛將) 김상건(金尙健)을 가승지(假承旨)로 삼았다.

 

한광조(韓光肇)·이의철(李宜喆)·서명응(徐命膺)·홍자(洪梓)·박도원(朴道源)·김화진(金華鎭)을 승지로 삼았다.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내렸다. 한사직(韓師直)·이기덕(李基德)·홍준해(洪準海) 등을 투비(投畀)하라 했던 것과 서병덕(徐秉德)을 외직(外職)에 출보(黜補)하라는 명을 정지하고 단지 삭출(削黜)만 시행하였다. 대신(大臣)의 말을 따른 것이다.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연제(練祭) 때 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의 소선(素膳)은 당일 봉진(封進)하고, 혜빈궁(惠嬪宮)·동궁(東宮)·빈궁(嬪宮)의 소선은 닷새 전에 봉진(封進)케 하였다.

 

이조 판서 한익모(韓翼謨)를 파직시켰다. 임금이 지평과 정언의 통의(通擬)가 효잡(淆雜)하다 하여 처음에는 월봉(越俸)을 명했다가 곧 파직시켰다. 그리고 차후로는 일찍이 한원(翰苑)을 거친 사람이 아니면 정언의 망(望)에 통의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대신(臺臣)의 언사(言事)가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번번이 전조(銓曹)를 책망하곤 했는데, 서병덕(徐秉德)이 상소함에 미쳐서는 죄가 전조에 파급되니, 이로부터 주의(注擬)할 때 더욱 더 두려워하였으며, 대각(臺閣)의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도 더욱 쇠퇴하였다.

 

귀후서 제조(歸厚署提調) 송창명(宋昌明)과 강화 유수(江華留守) 심성진(沈星鎭)을 파직하라 명하였다. 대개 귀후서는 송금(松禁)을 관장하기 때문에 송창명이 이예(吏隷)를 풀어 해구(海口)에 이르러 잠상(潛商)의 송판(松板)을 형착(詗捉)했는데, 심성진이 선재(船材)라 하며 빼앗아 차지하였다. 마침내 서로 싸우고 꾸짖어 계달(啓達)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므로, 임금이 둘 다 죄준 것이다.

 

윤급(尹汲)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윤급은 젊어서부터 시망(時望)을 짊어지고, 지론(持論)이 자못 준엄하였므로 임금이 끝내 전형(銓衡)을 맏기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대신(大臣)이 그가 노성(老成)하여 맡길만 함을 아뢰었기 때문에 드디어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5월 10일 병인

왕세손이 창덕궁에 나아갔다.

 

이은(李溵)을 대사간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사간으로, 홍상직(洪相直)·정환유(鄭煥猷)를 지평으로, 심욱지(沈勗之)·신익빈(申益彬)을 정언으로, 홍낙명(洪樂命)을 응교로, 이재협(李在協)을 교리로, 이인배(李仁培)를 부교리로, 이명환(李明煥)을 수찬으로, 김치양(金致讓)을 부수찬으로, 홍계희(洪啓禧)를 좌참찬으로, 윤급(尹汲)을 지경연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오늘 빈대(賓對) 때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의 본기(本紀)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관동(關東)에서 이전(移轉)한 각종 곡식으로서 물에 빠져 채 건져내지 못한 1천 2백여 석을 탕감하였다. 감운 어사(監運御史) 김종정(金鍾正)의 장문(狀聞)으로 인해 영의정 신만(申晩)이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신만이 또 아뢰기를,
"호서 감운 어사 정창순(鄭昌順)이 ‘감색(監色)과 사격(沙格)의 양식으로 처음에 환곡(還穀)을 가져다 썼는데, 이제 와서 도로 징수하니, 딱하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모두 탕감해 주소서. 곡식을 운반한 선가(船價)는 매 백 석(石)에 13석을 주는데, 영남·호남에서 15석으로 하는 규정에 견주어 볼 때 약간 가볍고, 병조(兵曹)의 대변선(待變船)은 본시 선가를 주지 않았으니, 모두 백성들이지만 또한 전혀 주는 것이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청컨대 선가를 양남(兩南)의 예에 의거하여 더 지급하고, 대변선도 또한 수를 나누어 그 값을 계산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5월 11일 정묘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육상궁(毓祥宮)의 중삭제(仲朔祭)에 쓸 향을 공경히 맞이하였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칙유(飭諭)를 내렸다. 그 글의 대략에 이르기를,
"요사이 건조한 바람이 연일 불고 비가 올 기미는 아득하니, 이 마음이 어찌 해이해 질 수 있으랴? 어제는 곧 헌릉(獻陵)086)  께서 예척(禮陟)087)  하신 날이었다. 이날은 비가 오지 않는 해가 없으니, 그때의 유교(遺敎)가 《국조보감(國朝寶鑑)》에 기재되어 있고, 그 비에 이름을 붙였다. 그 옛날 백성을 애휼(愛恤)하시던 성의(盛意)로 어찌 오늘의 백성들을 돌아보지 않으시겠는가마는, 내가 불초함으로 인해 비가 이처럼 시기를 어기어서 가슴을 쓰다듬으며 자책(自責)하고 단지 하늘만 바라보았었는데 해가 진 뒤 빽빽한 구름이 비를 빚었으므로 자다가 깨어 빗소리를 들으니,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더하였다. 마음이 만약 조금이라도 해이해 진다면 어찌 ‘효(孝)’라 할 것인가? 아! 그대 방백(方伯)·수령 들은 비덕(否德)이 무능하다 하지 말고, 우러러 헌릉께서 3백 년 뒤에도 여전히 백성들을 돌보시는 성의를 본받아 비록 소홀히 하고 싶더라도 감히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진정(賑政)이 이미 끝나고 보리농사도 또한 여물었으니 이때 백성을 보호하는 것을 더욱 어찌 해이하게 할 수 있겠는가? 권농(勸農)의 정사(政事)는 부지런해야 하는 법이니, 비록 관아(官衙)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척강(陟降)하시는 조종(祖宗)이 하늘 위에 계심을 두려워하고, 우러러 내려 주신 은혜에 보답하여 널리 백성들을 보호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2일 무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고려 왕의 여러 능(陵)에 투장(偸葬)하는 폐단을 금하라 명하였다. 이때 투장하는 자가 많았는데, 하교하기를,
"이미 햇수가 오래된 것은 지금 비록 그냥 두지만, 차후로 새로 범하는 자는 범하는 대로 즉시 제거하고 투장한 사람은 형배(刑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3일 기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감운 어사(監運御史) 김종정(金鍾正)이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각종 곡식 2백 50석이 바다에 빠졌는데, 이는 영남(嶺南)의 원곡(元穀)에 관계된 것이나 이미 지적하여 징수할 곳이 없으니, 조정에서 마땅히 구별하여 처리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탕감하라 명하였다.

 

5월 14일 경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갔다. 강(講)을 마치자, 임금이 친정(親政)을 행하여, 조명정(趙命鼎)을 대사헌으로, 서명응(徐命膺)을 부제학으로, 김종정(金鍾正)을 부응교로, 박사해(朴師海)를 교리로, 황간(黃榦)을 보덕으로, 유선양(柳善養)을 필선으로, 이휘중(李徽中)을 사서(司書)로, 김효대(金孝大)를 공조 참판으로, 정운유(鄭運維)를 승지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5월 15일 신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아뢰기를,
"관서(關西)의 장십부(壯十部)를 5년을 기한으로 편오(編伍)를 고치는 것이 본래 절목(節目)인데, 갑술년088)  에 개안(改案)하고는 이제 10년이 되도록 인순(因循)하며 버려두고 있어 도망·물고(物故)의 폐단이 많이 있습니다. 금후로는 청컨대 한결같이 절목에 따라 5년을 기한으로 개안하되, 반드시 겨울과 봄 사이의 농한기에 편리한 대로 거행하여 민폐(民弊)를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5월 16일 임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고,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진강(進講)하였다. 이에 앞서 소대에 《근사록(近思錄)》을 강하였는데, 채 끝나기 전에 하교하기를,
"아! 서른에 《논어(論語)》를 강하였는데, 일흔에 거듭 강하게 되었다. 대저 경사(經史)란 섞어서 공부한 뒤에야 자신을 닦고 정사(政事)를 행하는 데 이익됨이 있는 것이다."
하고, 이어 《통감강목》으로 소대의 강책(講冊)을 정하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명식(李命植)을 부교리로, 홍계희(洪啓禧)를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삼았다.

 

5월 17일 계유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 조강(朝講)에 나갔다. 강(講)이 끝나자, 이조 판서 윤급(尹汲)이 아뢰기를,
"연제(練祭)의 헌관(獻官)에 대해서,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은 정2품으로 채워 넣게 되어 있으나 초헌관(初獻官)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초헌관을 몇 품으로 채워 넣어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정2품으로 채워 넣으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5월 18일 갑술

주강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장령 신응현(申應顯)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이덕홍(李德泓)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이어 해조(該曹)에 명하여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초사(招辭)를 받게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양호 감운 어사(兩湖監運御史) 윤사국(尹師國)이 복명(復命)하니, 수령 중에서 치적(治績)이 있는 사람은 혹은 승서(陞敍)하고 혹은 말을 하사하라 명하였으며, 다스리지 못한 사람은 혹은 파직시키고 혹은 잡아다 신문하게 하였다.

 

5월 19일 을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정창성(鄭昌聖)을 부교리로, 윤승렬(尹承烈)을 설서(說書)로, 이성경(李星慶)을 사간으로, 이명환(李明煥)을 집의로, 이수일(李秀逸)·황최언(黃最彦)을 장령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지평으로, 이득배(李得培)를 헌납으로, 윤사국(尹師國)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청나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왔다. 처음에 변방의 백성 김순경(金順京) 등이 범월(犯越)하였으므로, 사유를 갖추어 자문을 보내고 또 변신(邊臣)을 혁직(革職)할 것이라고 진달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청(淸)나라에서 회자(回咨)하여 그만두게 하였던 것이다.

 

5월 20일 병자

2품 이상의 관원과 일찍이 춘방(春坊)·계방(桂妨)을 거친 옛 관료들에게 모두 내일 연제(練祭)에 진참(進參)할 것을 명하였다.

 

5월 21일 정축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거둥하였다.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연사(練祀)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유년089)  의 전례(前例)에 의거해 수묘관(守墓官)과 수위군(守衛軍)에게 모두 한 자급을 올려주고, 나머지에게는 각각 차등 있게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저녁에 환궁(還宮)하였다.

 

5월 22일 무인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갔다. 강(講)을 마치자, 대신(大臣)과 판의금(判義禁)·삼사(三司)에게 대신(臺臣)이 아뢴 여러 죄인의 문안(文案)을 가지고 입시(入侍)하라 명하여, 최수인(崔守仁)·전효순(全孝順)·전효증(全孝曾)을 모두 사형을 감하여 종으로 삼게 했으니, 모두 전계(前啓) 가운데서 추국(推鞫)을 청했던 죄인들이었다. 처음에 대신(臺臣) 신상권(申尙權)이 여러 죄인의 문안을 상세히 살펴 그 형률(刑律)을 정할 것을 청했다가 대체(臺體)를 훼손시켰다 하여 체직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신상권의 말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간원 【사간 이성경(李星慶)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이광사(李匡師)·김양채(金良彩)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곽정후(郭禎垕)를 청컨대 빨리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하게 핵실(覈實)하여 감처(勘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대개 곽정후가 남쪽 고을의 수령이 되어 불법(不法)한 일이 있었고, 또 옛 명신(名臣) 곽재우(郭再祐)의 직손(直孫)이라고 사칭(詐稱)했기 때문이었다. 헌부 【장령 황최언(黃最彦)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청(臺廳)의 일제히 모이는 법을 거듭 밝히도록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臺臣)에게 이르기를,
"내 일찍이 ‘허물을 듣기를 좋아한다.[喜聞過]’란 세 글자에 유념하였다. 할 말이 있으면 모름지기 진달하도록 하라."
하매, 황최언이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매번 오부(五部)의 방민(坊民)을 불러 물으시는데, 이것이 비록 백성의 고통을 살피시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다만 사체(事體)가 자질구레할 뿐만이 아니라 어가(御駕) 앞에서 호소하는 일이 가끔 있으니,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백성의 고통을 아시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책임지울 것이요, 반드시 직접 부순(俯詢)하실 것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5월 23일 기묘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건원릉(健元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공경히 맞이하였다.

 

집의 이명환(李明煥)이, 황최언(黃最彦)이 칭한 바의 ‘일제히 모이는 법’은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상소해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각(臺閣)에서 논계(論啓)할 때는 그것에 해당하는 일정한 법이 있습니다. 발계(發啓)할 적에는 한 사람의 견해로 마련하고 정계(停啓)할 때는 한 사람의 의견으로 마무리를 지어, 그 기풍이 곧고 그 절도가 준엄하니, 간적(奸賊)을 겪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는 바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의(謀議)함이 넓다면 쉽게 위곡(委曲)한 데로 돌아갈 것이요, 물어보는 것이 두루 미친다면 쉽게 깎여 느슨해지는 데로 돌아갈 것이니, 이는 묘당(廟堂)의 의논이지, 대각의 논의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듣자니, 연중(筵中)에서 전계(前啓)를 정지하느냐 계속하느냐 하는 것으로 양사(兩司)의 신하가 아뢴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혼자만의 견해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일제히 모여 대각에 나아가 충분히 헤아려 처리해야 한다.’ 하였다 합니다. 아! 이 무슨 말입니까? 마땅히 옛 규정을 준행하여 혼자만의 견해로 판단해야 할 것인데, 이렇게 하지 않고 짐짓 ‘충분히 헤아린다[熟量]’이란 두 글자로 목전에서 미봉할 계책을 삼았으니, 어찌 구차하고 유약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어 입시(入侍)했던 대신(臺臣)을 견삭(譴削)할 것을 청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양쪽을 모두 파직시켰다.

 

김시묵(金時默)을 대사헌으로, 이명식(李命植)을 집의로, 이정오(李正吾)를 사간으로, 신이복(愼爾復)을 장령으로, 이휘중(李徽中)을 지평으로, 박사해(朴師海)를 헌납으로, 원계영(元啓英)을 정언으로, 홍검(洪檢)을 설서로, 윤득맹(尹得孟)을 수찬으로 삼았다.

 

이광사(李光師)를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시켰다. 이때 임금이 막 대계(臺啓)를 윤허하고, 다시 금오(金吾)와 양사(兩司)의 신하에게 국안(鞫案)을 가지고 입시하라 명하여 마침내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5월 24일 경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날 임금이 참포(黲袍) 차림으로 강연(講筵)에 나갔는데, 건원릉(健元陵)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윤급(尹汲)을 파직시켰다. 윤급이 영의정 신만(申晩)의 아들 신광집(申光緝)을 초사(初仕)의 망(望)에 주의(注擬)하였다 하여 특별히 파직한 것이다.

 

홍계희(洪啓禧)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이명환(李明煥)을 삭직(削職)하였다. 임금이 이명환의 상소가 뒷날 폐단이 있을 것이라 여겨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인데, 곧 정지시켰다.

 

5월 25일 신사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평안 감사 정홍순(鄭弘淳)이 장계(狀啓)를 올려 ‘봉황성(鳳凰城)에 빨리 통보하여 우리 나라 국경에 지체하며 머무르고 있는 청나라 배를 잡아가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청나라 사람이 범월(犯越)한 사람을 추포(追捕)한다는 이유로 우리 나라 국경에 나왔었는데, 이미 일을 끝내자 장령(將領)은 이미 돌아갔으나, 그 양식을 실은 배는 삼(蔘)을 채취한다는 핑계로 강 연안에 지체하며 머무르고 있었으므로, 변진(邊鎭)의 장졸(將卒)들이 강을 사이에 두고 책유(責諭)했지만 끝내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정홍순이 계해년090)  의 전례를 끌어대며 만윤(灣尹)으로 하여금 빨리 봉황성에 통보하여 심양(瀋陽)에 전통(轉通)해 갑군(甲軍)을 보내어 수포(搜捕)케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심성진(沈星鎭)을 대사헌으로, 이재간(李在簡)을 사서(司書)로, 정창성(鄭昌聖)을 부교리로, 김종정(金鍾正)을 교리로, 신위(申暐)를 대사간으로, 이익보(李益輔)를 좌참찬으로 삼았다.

 

5월 26일 임오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고, 글로 뭇 신하들에게 하유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부덕(否德)하고 무능하면서 어려운 대업(大業)을 받들어 40년 동안 임어(臨御)했지만, 한 가지도 계지(繼志)한 것이 없고 한 가지도 술사(述事)한 것이 없어, 기강은 날이 갈수록 무너지고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며, 온갖 법도는 해이해지고 뭇 정사(政事)는 번쇄해지고 있다. 그리고 사실(私室)에서는 부박하게 떠들며 조경(躁競)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공조(公朝)에서는 우물쭈물하며 가차(假借)하는 것을 고치(高致)로 여기고 있으니, 장차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나라는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피곤함을 꺼리지 않고 세 번의 강(講)과 여섯 차례의 차대(次對)에서 감히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건만, 직무를 게을리하고 임시 방편으로만 하는 것이 오히려 다시 전과 같으니, 실로 나의 허물이다. 만약 이런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하루에 비록 다섯 번 강을 하고 한 달에 비록 열 번 차대한다 할지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마치 위사(衛士)를 시켜 밥[餐]을 나르게 하고091)  , 형석(衡石)으로 문서의 무게를 한정하는 것092)  과 같을 것이다. 아! 임금은 비록 부덕하다 할지라도 신자(臣子)된 사람이 정백(精白)한 마음으로 자신의 노쇠한 임금을 돕는다면, 그 할아비와 아비가 이 세상에서나 지하에서 반드시 장차 ‘훌륭한 아들과 손자가 있도다.’라고 할 것이니, 어찌 한갖 우리 나라만이 희망이 있을 것인가? 여러 신하들에게도 또한 영광이 되지 않겠는가? 아! 용어(龍馭)093)  를 더위잡을 수 없었던 날이 단지 11일을 사이에 두고 있으니, 아! 이 마음을 갑절이나 누르기 어렵다. 그래서 상참에 문재(文宰) 2품 이상과 옥서(玉署)094)  ·백부(柏府)095)  ·미원(薇垣)096)  의 신하를 크게 모으라 명하여 마을 속을 상세히 하유한 것이다. 대소 신공(臣工)들이 모두 이 하유를 들었으니 그 힘쓰고 힘쓰지 않고는 아랫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윗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선교(宣敎)를 명하여 마친 뒤 대신 이하의 관원에게 모두 전상(殿上)에 올라 앉게 하고, 다시 거듭 하유하였다.

 

이현조(李顯祚)를 사간으로, 박대유(朴大有)를 지평으로, 정술조(鄭述祚)를 헌납으로, 이장로(李長老)를 정언으로, 김상익(金相翊)을 부수찬으로, 이규채(李奎采)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헌부 【집의 이명식(李命植)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서울에 있는 승니(僧尼)를 쫓아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신만(申晩)을 파직하고,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을 면직시켰다. 신만은 윤급(尹汲)이 죄를 입은 일 때문에 인입(引入)하였는데, 임금이 누차 사관과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홍봉한은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면직을 바랐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신만과 동시에 인고(引告)하니, 임금이 노하여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5월 27일 계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간원 【 헌납 정술조(鄭述祚)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기강을 세우고, 대신(大臣)을 예대(禮待)하며, 허물을 되풀이 하지 말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이때 삼공(三公)이 자주 견파(譴罷)되었다가 곧 다시 견배(甄拜)되어 서료(庶僚)와 다름이 없었으므로, 정술조가 언급했던 것인데, 임금이 비록 가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시 전과 같았다. 대개 대신이 군상(君上)에게 존중받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으니, 식자들이 우려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정언 이장로(李長老)가 상소하기를,
"보상(輔相)의 직책이야말로 얼마나 존귀하고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특별히 좌직하라는 명까지 있었으니, 구경(九經)097)  의 뜻에 있어서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어제 삼사(三司)의 신하에게 하순(下詢)하셨으나 우물쭈물하며 즉시 우러러 대답하지 않다가 엄중한 하교를 입은 뒤에야 비로소 억지로 진주(陳奏)하였으되, 위곡(委曲)하고 두리뭉실하게 하여 감히 명백히 말하지 않았다고 하니, 신은 입시했던 삼사를 경책(警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받아들이고, 특별히 삼사를 파직시켰다.

 

해서(海西)에 충재(蟲災)가 있으니 포제(酺祭)를 설행(設行)하라 명하였다.

 

조영진(趙榮進)을 대사헌으로, 이덕해(李德海)를 사간으로, 황간(黃榦)을 집의로, 변득양(邊得讓)·최태형(崔台衡)을 장령으로, 김보순(金普淳)을 지평으로, 조석목(趙錫穆)을 정언으로, 이상지(李商芝)를 부교리로, 이진규(李晉圭)를 수찬으로, 박사해(朴師海)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부산진 첨사(釜山鎭僉使) 이응혁(李應爀)을 파직하여 호남(湖南) 바닷가에 충군(充軍)하라 명했다가 곧 정지하였다. 처음에 통신사(通信使) 서명응(徐命膺)이 이응혁을 군관(軍官)으로 삼아 일본에 데려가려 하자, 이응혁이 수행(隨行)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서명응이 이를 아뢰니, 임금이 그가 꾀를 써서 피하려고 하는 것을 미워하여 죄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하교하기를,
"듣건대 왜인(倭人)들은 항상 부산 첨사를 부성 대장(釜城大將)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러니 만약 군관으로 들어간다면 아마도 왜인이 첨사를 업신여기는 단서를 열 듯하다."
하고, 특별히 충군하라는 명을 정지하고, 일찍이 부산 첨사를 지낸 사람은 군관에 차정(差定)하지 말아서 변방을 중시하는 뜻을 보이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8일 갑신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갔다. 강(講)을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신문(晨門)과 하궤(荷蕢)098)  는 비록 좌도(左道)099)  는 아니지만, 또한 색은 행괴(索隱行怪)100)  의 부류이다. 오늘날 사람들 중에는 혹 모발(毛髮)을 깎고 종신토록 소식(素食)을 행하는 자가 있으니, 심하도다! 좌도가 세상을 미혹시킴이여."
하니, 동경연(同經筵) 서명신(徐命臣)이 말하기를,
"이것은 불씨(佛氏)의 해(害)입니다."
하고, 마침내 ‘명심(明心)’·‘견성(見性)’·‘천당(天堂)’·‘지옥(地獄)’ 등의 말을 끌어 대며 그들이 속이고 유혹하는 폐단을 부연해 진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내가 말의 단서를 내어서 강석(講席)의 체모에 결점이 있으나, 경연관(經筵官)의 말은 살피지 않은 것인 듯하다."
하고, 특별히 파직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칠순에 다시 강(講)을 하게 되었으니, 어찌 상례(常例)를 따를 것인가? 비록 한 겨울이나 한여름이라 할지라도 탈품(頉稟)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김응순(金應淳)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5월 29일 을유

임금이 주강에 나갔다. 강을 마치자 하교하기를,
"지금 자공(子貢)이 인(仁)을 물은 데 대해 공자(孔子)께서 ‘대부(大夫) 중에 현명한 이를 섬기고 선비 중에 어진 이를 벗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어찌 자공에게만 해당될 것인가? 마치 내가 직접 들은 듯 하니, 이로 인하여 나도 모르게 감개(感慨)가 일어난다. 지금 끝없는 만 가지 일이 오로지 약간척(若干尺)의 동궁에게 달렸으니, 빈료(賓僚)와 강우(講友)를 만약 가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구슬을 모래와 돌에 던지는 것과 다르랴? 동궁을 위해 요속(僚屬)을 가리라는 뜻을 각별히 전조(銓曹)에 신칙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자, 호남(湖南)의 곡식을 운반해 진휼(賑恤)하라고 명하였다.

 

5월 30일 병술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除)에 쓸 향을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광주 부윤 김응순(金應淳)에게 온조왕(溫祚王)의 묘(廟)를 중수(重修)하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유진하(柳鎭夏)를 삭직(削職)하였다. 유진하가 변방에 있을 때 청(淸)나라 사람이 어떤 일로 인해 국경에 와서 모욕하고 업신여기는 말을 많이 하였다. 유진하가 겁을 내어 수신(帥臣)에게 등보(謄報)하고 전문(轉聞)하니, 임금이 수신으로 하여금 강변에서 유진하를 곤장으로 다스리고 삭직하게 하였다.

 

여선응(呂善應)을 집의로, 현광우(玄光宇)·남운로(南雲老)를 장령으로, 정창순(鄭昌順)을 지평으로, 홍술해(洪述海)를 부응교로, 이휘중(李徽中)을 교리로, 정창성(鄭昌聖)을 부교리로, 김종정(金鍾正)을 보덕으로 삼았다.

 

다시 신만(申晩)을 영의정에 제배(除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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