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1763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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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정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간원(諫院)에서 【 헌납 정술조(鄭述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갑빈(趙甲彬)의 계사(啓辭)에 대한 일에 이르러 정술조가 아뢰기를,
"근래 이 계사 때문에 잇따라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그 조어(措語)를 고쳤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조갑빈은 조태억(趙泰億)의 아들로 성품이 교활한데다 자취도 음비(陰秘)스럽습니다. 그의 아비의 직첩(職牒)을 환수한 뒤에는 으레 자취를 숨기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도 평인(平人)처럼 조금도 두려워하여 징계하는 기색이 없이 도성(都城)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윤광소(尹光紹)와 친밀하게 왕래하면서 은연중 폐족(廢族)의 영수(領袖) 노릇을 하고 있으니, 청컨대 먼 변방에 정배(定配)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변록(辨錄)을 엄중히 한 뒤에 영수가 또 두 사람이니, 이것이 어찌 옳은 것이겠는가? 과연 윤광소와 사사로이 몰래 교결하여 영수가 되려고 하였다면 또한 의당 모두 거론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한 사람만 청하는가? 한 사람을 거론하면서 두 사람을 모두 죄에 빠뜨리는 것이 지금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어서 조어를 고친 내용에 대해 하순(下詢)하니, 정술조가 말하기를,
"조재호(趙載浩)·김홍복(金弘福)에 관한 한 구절은 산삭(刪削)했습니다."
하고, 이어서 인피(引避)하면서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이유수(李惟秀)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임금이 정술조(鄭述祚)가 조갑빈(趙甲彬)에 대한 계사(啓辭)를 정지하지 않은 것 때문에 또 엄중한 하교를 내리자, 승지 김화진(金華鎭)이 아뢰기를,
"대계(臺啓)의 정계(停啓)와 연계(連啓)는 의당 공의(公議)에 붙여야 하는 것인데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제방(隄防)이 점점 해이해질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갑빈이 조태억의 아들로서 행신을 삼가지 않았다는 것으로 아뢰었다면 내가 의당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윤광소(尹光紹)를 끌어들인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승지가 아뢴 ‘제방(隄防)’이란 두 글자는 또한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고, 이어서 엄중한 하교를 내린 다음 체직시켰다.

 

6월 2일 무자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영부사 홍봉한(洪鳳漢)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70세의 임금이 종사(宗社)를 키가 수척(數尺)인 어린아이에게 부탁했는데 신하들이 사정을 살피지 않으니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화진(金華鎭)의 ‘제방(隄防)’이란 말은 더욱 괴이한 것이었다."
하고, 이어서 대신(臺臣)의 성명(姓名)을 낱낱이 거론하면서 책망하기를,
"적자(赤子)가 사나운 용사(龍蛇)로 변하였는데 이들이 떨며 발을 포개고 서서 ‘대계(臺啓)가 정지되지 않으면 우리들의 목숨이 언제까지 붙어 있을지 모르겠다. 뒷날 위에서 바람 같은 덕이 있어 아래에서 풀같이 쏠리게 될 것인지는 매우 우려스럽다.’고 하고 있다. 대신(臺臣)들은 유독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하였다. 이때 임금이 전계(前啓)를 정지시키려 하였으나, 양사(兩司)에서 망설이면서 정계(停啓)하지 않았으므로 임금의 노여움이 갈수록 격해져서 이런 하교가 있게 된 것이었다.

 

대사간 신위(申暐)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이어서 권강(權綱)101)  을 총람하고 낭묘(廊廟)102)  를 책망하고 면려함으로써 전철(前轍)을 답습하는 경박한 습관을 통렬히 제거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의주(義州)의 난민(亂民) 가운데 이득이(李得伊)란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표류되어 온 호인(胡人)이라고 했기 때문에 포도청(捕盜廳)에 명하여 그 실상을 조사하게 한 다음 형배(刑配)하였다.

 

6월 3일 기축

석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4일 경인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홍계희(洪啓禧)를 파직시키고 이창수(李昌壽)를 대신시켰다. 홍계희가 석고 대죄하면서 명을 받지 않고 극력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남태제(南泰齊)를 병조 판서로, 정존겸(鄭存謙)을 부제학으로 삼고, 특별히 이지억(李之億)을 발탁하여 공조 판서로, 유수(柳脩)를 사간으로, 박지원(朴志源)을 헌납으로, 조중명(趙重明)을 장령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정언으로, 이인배(李仁培)를 교리로 삼았다.

 

6월 5일 신묘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갔다. 친히 동궁(東宮)을 경계시키는 글을 지어서 춘방(春坊)의 관원인 김종정(金鍾正)·홍검(洪檢) 등을 불러 하유하기를,
"나의 고심(苦心)은 백성을 위한 것이고 세신(世臣)을 위한 것이니, 이것을 왕세손(王世孫)에게 전하라. 이어서 여의(餘意)를 진계(陳戒)하고 상하가 주고받은 말을 문자(文字)로 기록하여 아뢰라."
하였다. 김종정 등이 기록하여 아뢰게 되자 임금이 왕세손의 문답(問答)이 정밀하고 절실한 것을 가상히 여겨 드디어 《군감(君鑑)》 1편(篇)을 지어서 내렸다. 또 어필(御筆)로 ‘이 군감을 가지고 너의 총명한 데에 대한 상으로 준다[將此君鑑賞爾穎悟]’는 여덟 글자를 써서 권두(卷頭)에 붙인 다음 가서 전하라고 하유하였다.

 

전 사관 이성경(李星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이름자에 대해 애당초 살펴 헤아리지 못했던 탓으로 실로 혐명률(嫌名律)을 범했으니, 분의(分義)를 헤아려 봄에 황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에 이름을 고쳐 이헌경(李獻慶)이라고 하였으니, 준허(準許)를 내려주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간원 【대사간 신위(申暐)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갑빈(趙甲彬)의 계사(啓辭)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리고 신위(申暐)를 체직시켰다. 대신(臺臣)이 장차 전계(傳啓)하려 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장주(章奏)도 의심스런 내용은 오히려 금하고 있는데 더구나 전계(傳啓)이겠는가? 이 뒤로는 무신년103)  ·을해년104)  과, 중률(重律)에 대한 작처(酌處), 탐관 오리에 관계된 것 이외에 의심스러운 내용을 가지고 발계(發啓)할 경우에는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105)  을 시행하겠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호남(湖南)의 모맥(牟麥)을 운반하여 제주(濟州)의 기민(飢民)들을 구제하라고 명하였다.

 

조운규(趙雲逵)를 호조 판서로 삼았다.

 

6월 6일 임진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 재실(齋室)에 임어하였다. 명릉(明陵)의 기신(忌辰)이 모레이기 때문이었다.

 

6월 7일 계사

임금이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명릉 기신제(明陵忌辰祭)에 쓸 향(香)을 전하였다. 돌아올 적에 재실에 임어하였다.

 

6월 8일 갑오

임금이 환궁(還宮)하면서 육상묘(毓祥妙)에 들러 배알(拜謁)하였다.

 

6월 9일 을미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갔다. 이날 《논어(論語)》의 강을 끝마치고 계속해서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왕세손에게 시강(侍講)하도록 명하고 《맹자(孟子)》의 존현장(尊賢章)을 강하게 하였다. 임금이 반복하여 글의 뜻을 하문하니, 왕세손의 대답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어서 역대(歷代)의 치란과 현사(賢邪)의 진퇴에 대해 언급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어진 것은 알기가 쉽지 않은데 간사한 것도 또한 분변하기 어렵다. 아첨하는 사람은 분변하기가 진실로 쉽지만 겉으로는 정직한 체하면서도 속은 실지로 아첨하는 자의 경우에는 어떻게 분변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분변하려고만 한다면 다만 자신이 분명해야만 하는 것뿐입니다."
하자, 임금이 잘한다고 칭찬하였고 연신(筵臣)들도 모두 칭하(稱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의당 부지런히 배워야 할 것이니 오늘의 하교를 잊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어필(御筆)로 ‘영원히 이 재사(齋舍)에 의지하리라[永依舍].’는 세 글자를 써서 내리고 나서 승지에게 명하여서 선원전(璿源殿)의 재실(齋室)에 걸게 하였다.

 

함경도 북청(北靑) 등 세 고을에는 우박이 내렸고, 함흥(咸興) 등 일곱 고을에는 황충(蝗蟲)의 재해가 있었다.

 

6월 12일 무술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친히 글을 지어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영제(禜祭)를 설행하게 하였는데, 장마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최중(李最中)을 이조 참의로, 이규채(李奎采)를 대사간으로, 김양택(金陽澤)을 예문 제학으로, 안표(安杓)를 헌납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집의로, 이홍직(李弘稷)·이택징(李澤徵)을 장령으로, 이득배(李得培)를 수찬으로, 김상복(金相福)을 판윤으로, 이택수(李澤遂)를 설서로 삼았다.

 

6월 14일 경자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택수(李澤遂)를 하번(下番)에 강부(降付)하도록 명하였으니, 관규(館規)를 따른 것이다. 이에 앞서 이택수를 검열(檢閱)에 부직(付職)했는데 영사(領事)와 친혐(親嫌)이 있다는 것으로 사은(謝恩)하지 않았으므로 체직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맡겼는데 차례에 따라 승부(陞付)된 사람이 이미 3원(員)이나 되었으므로 이택수가 하번이 되려고 하지 않았고 승부된 여러 관원들도 또한 그의 아래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로 상소하여 쟁변(爭辨)했는데, 봉교(奉敎) 홍검(洪檢)이 아뢰기를,
"사신(史臣)은 단지 사서(史書)를 찬수하는 것만을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은(謝恩)도 하지 않고 사서를 수찬하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상번(上番)으로 승부(陞付)시키는 것은 관규(館規)에 어긋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드디어 강부(降付)하라는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6월 15일 신축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6일 임인

임금이 영제(禜祭)를 이미 지냈는데도 장마가 그치지 않는다는 것으로 3일 동안 감선(減膳)하라고 명하였다. 기간이 되자 예조에서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장마가 개지 않았다는 것으로 또 3일 동안 감선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윤동도(尹東度), 이조 판서 이창수(李昌壽), 도승지 한광조(韓光肇)를 파직시켰는데, 이는 부응교 홍술해(洪述海)가 약원(藥院)의 일로써 상소하여 논핵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앞서 대가(大駕)가 창덕궁(昌德宮)에 거둥하였을 적에 탕제(湯劑)를 드실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는데도 즉시 올리지 않았다. 이는 미처 달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10일이 지났는데도 홍술해가 달이는 것을 감독하지 않고서 드실 것만 권한 것은 약을 맛보는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 성실히 하지 않은 죄가 있다는 것으로 세 제조(提調)를 모두 공척(攻斥)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삼사(三司)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임금이 홍술해도 또한 그때 삼사로 있었으면서도 즉시 논계(論啓)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여러 날 헤아리다가 권위(權威)를 빙자하여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공척함으로써 경알(傾軋)하고 고감(敲減)하는 습관을 부렸다는 것으로 노하여 나무라고 이어서 삭직(削職)시켰는데, 승지 이담(李潭)이 독계(獨啓)를 올려 간쟁하니, 임금이 또한 체직시켰다. 그리고 논한 것이 국체(國體)에 관계된다는 것으로 약원의 여러 신하들까지 모두 파직시켰다. 홍봉한(洪鳳漢)을 다시 좌의정에 임명하고 서지수(徐志修)를 이조 판서로, 이득종(李得宗)을 대사헌으로, 이의철(李宜哲)을 대사간으로, 이시정(李蓍廷)을 헌납으로, 김치양(金致讓)을 수찬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원경순(元景淳)이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자, 체직을 허락하고 박상덕(朴相德)을 대신시켰다.

 

6월 17일 계묘

특명(特命)으로 윤동도(尹東度)를 서용하여 우의정으로 삼고, 노성중(盧聖中)을 장령으로, 김위(金㙔)를 지평으로, 홍낙명(洪樂命)을 교리로, 이득배(李得培)를 부교리로, 엄인(嚴璘)을 부수찬으로, 이재간(李在簡)을 수찬으로, 윤급(尹汲)을 우참찬으로, 원경렴(元景濂)을 형조 참판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좌윤으로, 정형복(鄭亨福)을 판돈녕으로, 서명응(徐命應)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6월 18일 갑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권도(權噵)를 이조 참의로, 이최중(李最中)를 부교리로, 김종정(金鍾正)을 특별히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수찬 김치양(金致讓)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승선(承宣)106)  이 홍술해(洪述海)에 대한 처분을 되돌린 것은 바로 그 직분인 것입니다. 정원에서 독계(獨啓)한 것은 또한 구례(舊例)가 있는 것인데 견책을 받아 체직되기에 이른 것은 청납(聽納)하는 도리에 있어 흠결이 됩니다. 전 승지 이담(李潭)을 체차시키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려 책망하였다.

 

6월 19일 을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윤음(綸音)을 써서 조급하다는 것으로 뭇 신하들을 계칙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왕세손(王世孫)이 시좌(侍坐)하고 있었는데, 임금이 하문하기를,
"한(漢)나라 소제(昭帝)는 어떠한 군주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현명한 군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그가 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곽광(霍光)의 충성을 알았고 상관걸(上官桀)의 거짓을 분변했기 때문107)  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그의 거짓을 분변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상관걸이 글을 올린 사람을 체포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 원인을 알았으니, 이것이 현명한 것이 됩니다."
하자,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한나라 소제를 따라가기가 어려운 이유인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대정(大政)을 장차 행해야 하는데, 너는 균일하게 기용하고 싶은가, 치우치게 기용하고 싶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의당 균일하게 기용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현명함과 무능함을 모르는데 어떻게 균일하게 기용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현인(賢人)을 얻어서 전직(銓職)을 맡기면 현인을 모두 거용할 수 있는 것이므로 사람을 균일하게 기용할 수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요점이 되는 방법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만일 굶주리는 사람을 보았다면 옥식(玉食)을 먹기가 편안하겠는가, 편안치 못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비록 나의 밥을 덜어서 주더라도 준 뒤에야 먹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백성은 모두 조종(祖宗) 때의 적자(赤字)인 것이다. 뒷날 밥을 덜어주겠다는 마음을 잊지 말고 확충시켜 나가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여러 신하들에게 하유하기를,
"경 등은 힘써 보좌하라. 사신(史臣)은 이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라."
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아뢰기를,
"경자년108)   이전에 절사(節使)가 연경(燕京)에 갈 적에는 당상관(堂上官)·당하관(堂下官)의 역관(譯官)이 모두 합쳐 20원(員)이었는데 그뒤 청학(淸學)과 몽학(蒙學)을 하는 사람 가운데 총민(聰敏)한 사람 및 삼등(三等)으로 급제한 사람을 특별히 선발하여 원수(元數) 이외에 5, 6원(員)을 더 내었습니다. 이제 《통문관지(通文館志)》에 기재된 대로 시행한다면 제반 명색(名色)을 절로 감손하여야 하는데 천문학(天文學)에 이르러서도 《통문관지》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중(彼中)의 역법(曆法)이 자주자주 바뀌는데 이제 감손하여 파기시킨다면 새로 고쳐진 역법을 장차 얻어올 길이 없게 됩니다. 화원(畵員)과 함께 1년을 사이하여 차송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3년에 한 번씩 보내라."
하였다.

 

특별히 홍자(洪梓)를 대사간으로, 남태기(南泰耆)를 대사헌으로, 김양택(金陽澤)을 형조 판서로, 이이장(李彛章)을 형조 참판으로, 이은(李溵)·윤득우(尹得雨)·정운유(鄭運維)를 승지로 삼았다.

 

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가 아뢰기를,
"지금 경비(經費)가 고갈되었습니다. 다섯 창고에 남아 있는 수량이 겨우 3만 2천 석(石)뿐이어서 10월부터 내년 3월까지 백관(百官)·군병(軍兵)의 늠료(廩料)를 나누어 지급할 길이 없습니다. 다시 3만 석이 있은 연후에야 비용을 계속 잇댈 수 있겠습니다."
하니,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청컨대 먼저 관서(關西)의 세미(稅米) 2만 석을 획급(劃給)하고 그 나머지 1만석은 다시 상세히 살펴서 품하게 하소서."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원 【대사간 홍자(洪梓)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갑빈(趙甲彬)의 계사(啓辭)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대사간이 이미 영갑(令甲)을 어겼으니 우선 체차시키고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조율(照律)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 김종정(金鍾正)이 말하기를,
"조율하도록 정식(定式)한 것은 새로 발계(發啓)하는 경우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것은 전계(前啓)이므로 정식과 다릅니다."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6월 20일 병오

임금이 도정(都政)에 친림(親臨)하였는데 왕세손(王世孫)에게 시좌(侍坐)하도록 명하였다. 한광조(韓光肇)를 대사간으로, 이은(李溵)을 대사성으로, 김상익(金尙翼)을 지경연으로, 이헌경(李獻慶)을 집의로, 이택진(李宅鎭)을 부수찬으로, 이상지(李商芝)를 부교리로, 박사해(朴師海)를 수찬으로, 정항령(鄭恒齡)을 사간으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으로, 윤사국(尹師國)·박취원(朴取源)을 지평으로, 임성(任珹)·신익빈(申益彬)을 정언으로, 정문주(鄭文柱)를 장령으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서지수(徐志修)의 정사(政事)109)  였다.

 

이날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임어하여 오부(五部)의 백성들을 모아 놓고 폐막(弊瘼)에 대해 순문(詢問)하였고 금주령(禁酒令)을 엄중하게 신칙하였다. 포도 대장 정여직(鄭汝稷)을 남양(南陽)으로 귀양보내고 형조와 한성부의 여러 당상(堂上)들을 파직시켰다. 이때 술을 금하는 법령이 엄중하여 이를 범한 사람은 모두 무거운 죄를 받았다. 전 장성 부사(長城府使) 최홍보(崔弘輔)의 기첩(妓妾)이 금주령을 범한 것 때문에 부관(部官)에게 태형(笞刑)을 받았는데, 그 기첩이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홑이불로 얼굴을 덮고 스스로 도랑물에 빠져 죽었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연석(筵席)에서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금령이 해이한 탓이고 또 유사(有司)가 숨기고 아뢰지 않았다는 것으로 모두 죄주었다. 또 술과 여색(女色)은 모두 사람을 미혹시킬 수 있는 것인데 최홍보의 첩은 기류(妓類)로서 방금(邦禁)을 범하였으니, 의당 《예기(禮記)》의 음성(淫聲)과 난색(亂色)은 이목(耳目)에 접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모방하여 도하(都下)의 사대부 가운데 기첩을 데리고 있는 사람은 자식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원적(原籍)으로 쇄환(刷還)시킨 다음 그 수효를 아뢰게 하라고 하였다.

 

헌부 【장령 이득배(李得培)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사간 홍자(洪梓)를 조율(照律)하라는 명은 비록 법을 믿게 하기 위한 뜻에서 나온 조처이겠습니다만, 당초의 하교는 의심스런 내용을 발계(發啓)한 대신(臺臣)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의 이 홍자는 이미 발계된 것을 연계(連啓)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곧바로 조율을 시행하는 것은 정식(定式)과 다른 점이 있으니, 청컨대 조율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리고 이득배를 체직시킨 다음 해부(該府)로 하여금 같은 형률(刑律)로 시행하게 하였다. 간원 【 헌납 홍낙명(洪樂命)이다.】 에서 전계(傳啓)하기 전에 소회를 아뢰기를,
"지난번 의심스런 내용에 의거하여 발계(發啓)한 경우에 조율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대각(臺閣)은 풍문(風聞)으로도 발계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으므로 혹 일이 발생하기에 앞서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발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심스러운 내용으로 발계하는 것에 대해 금령을 설치함으로써 뒷날의 폐단을 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조율하라는 하교를 환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서 말하기를,
"내가 노쇠하기는 했으나 태아검(太阿劍)110)  이 손에 있으니, 대신(臺臣)은 즉시 전계(傳啓)하라."
하였다. 홍낙명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갑빈(趙甲彬)의 일에 이르러서는 이전 대로 연계(連啓)하니, 임금이 엄중하게 하교하기를,
"감히 각승(角勝)하고 나서니 군부(君父)가 안중에 없는 것이다. 먼저 체차시키고 홍자와 똑같이 감률(勘律)하라."
하였다. 승지 김종정(金鍾正)이 세 대신(臺臣)의 처분을 일체 모두 환수할 것을 청하니, 또 엄중한 하교를 내려 특별히 김종정을 체차시켰다. 또 하교하기를,
"홍술해(洪述海)·김치양(金致讓)·홍낙명(洪樂命)은 임금의 명을 본받지 않고 시류(時類)들과 추축(追逐)하였으니,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라."
하였다.

 

6월 21일 정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장마로 인한 재해(災害)가 발생하였다. 도성(都城) 안의 민가(民家)가 표류된 것이 2백 70호(戶)이고 퇴압(頹壓)된 것이 3백여 호인데,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김영섭(金永燮)을 장령으로, 구상(具庠)을 지평으로, 이세연(李世演)·이진규(李晉圭)를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무더위 때문에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다.

 

6월 22일 무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서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왕세손(王世孫)이 시좌(侍坐)하여 《맹자(孟子)》를 강하였다.

 

유선양(柳善養)을 보덕으로, 조숙(趙肅)을 필선으로, 이휘중(李徽中)을 겸 사서로, 이숭호(李崇祜)를 설서로, 한광조(韓光肇)를 대사간으로, 윤동섬(尹東暹)을 대사헌으로, 이치중(李致中)을 정언으로 삼았다.

 

사간 정항령(鄭恒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시종신(侍從臣)을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는 것은 사체가 지극히 중한 것입니다. 만일 언어(言語)가 지나치고 주착을 저지른 잘못이 있다는 것으로 번번이 이 형률(刑律)을 시행한다면 조정에 완전한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대신(臺臣)에게 죄가 있으면 파삭(罷削)시키는 것은 옳지만 곧바로 왕부(王府)로 하여금 조율하게 하는 것은 또한 후손들에게 너그러운 법을 전해주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세 유신(儒臣)을 사판에서 삭제시키라고 한 명과 여러 대신(臺臣)들을 조율하라고 한 하교를 모두 환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이어서 홍자(洪梓)·홍낙명(洪樂命)에게는 삭출(削黜)만을 시행하고 이득배(李得培)는 단지 파직만 시키며, 조율하게 한 하교와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한 명은 모두 특별히 정지시키게 하였다.

 

임금이 윤음(綸音)을 내려 조정에 있는 뭇 신하들에게 하유하기를,
"아! 군주는 조종(祖宗)의 부탁을 받들었고 아! 신하는 바로 교목(喬木)의 세가(世家)이니, 나라와 존망(存亡)을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아! 그 군주의 정치가 잘 거행되지 않아서 은혜가 아래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명령이 행해지지 않아서 칙교(飭敎)가 준행되지 못하고 있으며, 신하는 게으르고 오만한 것을 고상하게 여기고 정성스럽고 부지런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합심 단결하여 국사에 전념할 기약이 없음은 물론 경박하고 조급한 것이 풍습으로 굳어져 있다. 그리하여 대청(臺廳)을 열지 않고 당습(黨習)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짠 것을 신 것으로 인정하여 두드려 한덩어리로 뭉쳐 군주를 위에서 고립(孤立)되게 하였다. 지난번의 선유(宣諭)는 물에다 돌을 던지듯이 하찮게 여겼으니 오늘의 이 거조도 어찌 그 효과(效果)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나의 나이는 비록 늙었지만 법은 쇠약하지 않았으니, 다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조갑빈(趙甲彬)의 계사를 정지시키기 위해 누차 대신(臺臣)에게 풍유(諷諭)하였는데, 대신들은 계사는 정지해도 되지만 임금의 명을 받고 정계(停啓)하는 것은 임금의 마음에 영합(迎合)하는 데 가깝다는 것으로 견축(譴逐) 당하는 사람이 서로 잇따랐어도 끝내 정지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의 노여움이 갈수록 격해져 사교(辭敎)가 더할 수 없이 엄중하였다.

 

간원 【사간 정항령(鄭恒齡)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갑빈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헌부 【지평 구상(具庠)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배윤현(裵胤玄)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이어서 의금부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는데 그가 광란(狂亂)스러워 성실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참작 처리하여 해도(海島)에 유배(流配)하라고 명하였다.

 

6월 23일 기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 【지평 구상(具庠)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송문현(宋文鉉)·이세호(李世壕)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이어서 왕부(王府)에 명하여 문안(文案)을 조사하여 아뢰어 율명(律名)을 정하게 하였다. 다 아뢴 다음 구상(具庠)이 또 소회를 아뢰기를,
"지난번 대망(臺望)에 대해 먼저 아뢰고나서 통의(通擬)하라고 하신 하교는 실로 대각(臺閣)의 관원을 신중히 가리려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대간(臺諫)의 통망에 대해서는 유사(有司)가 있는 것이니, 잘못 가렸을 경우에는 책벌(責罰)을 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가리지 못할까 우려하여 반드시 재품(裁稟)을 거치게 한다면 이는 국체(國體)에 손상이 있게 됩니다. 청컨대 앞서의 하교를 환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대간의 체통에 맞는 말이라는 것으로 윤허하였다. 구상이 또 아뢰기를,
"금주령(禁酒令)을 범한 사람을 일률(一律)111)  로 처단하게 한 성의(聖意)는 반드시 범하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익이 있는 곳에는 아무리 엄중한 법과 가혹한 형벌을 가하더라도 백성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이것은 사율(死律)이 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을 죽인 자와 같은 죄를 주는 것을 영구한 상전(常典)으로 만드는 것은 후손들에게 너그러움을 전하는 모유(謨猷)가 아닙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금주령을 범한 무리들은 감사(減死)로 감단(勘斷)하여 조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곧바로 감사할 것을 청하는 것을 나는 그르게 여기고 있지만, 대체(大體)는 옳다."
하고, 드디어 법조(法曹)에 명하여 금주령을 범한 술의 양의 다과(多寡)로써 등급을 나누어 죄를 정하게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권극(權極)이 금주령을 범한 사람은 효시(梟示)할 것을 청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남태회(南泰會)가 아뢰기를, ‘남병사(南兵使) 윤구연(尹九淵)이 법을 범했다.’고 아뢰니, 임금이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수색하여 오게 하였으나 단지 빈 술병 뿐이었다. 그러나 윤 구연은 이 때문에 주참(誅斬)되었다. 그런데도 범하는 사람이 서로 계속 잇따라서 전후로 사형을 당한 사람이 매우 많았으므로 조야(朝野)가 모두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구상이 능히 한마디 말로 임금의 마음을 감회(感回)시켜 비로소 감률(減律)하라는 의논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식자(識者)들이 〈구상을〉 훌륭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39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정론-간쟁(諫諍) / 사법-법제(法制)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註 111] 일률(一律) : 사형.
사신(史臣)은 말한다. "권극(權極)이 금주령을 범한 사람은 효시(梟示)할 것을 청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남태회(南泰會)가 아뢰기를, ‘남병사(南兵使) 윤구연(尹九淵)이 법을 범했다.’고 아뢰니, 임금이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수색하여 오게 하였으나 단지 빈 술병 뿐이었다. 그러나 윤 구연은 이 때문에 주참(誅斬)되었다. 그런데도 범하는 사람이 서로 계속 잇따라서 전후로 사형을 당한 사람이 매우 많았으므로 조야(朝野)가 모두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구상이 능히 한마디 말로 임금의 마음을 감회(感回)시켜 비로소 감률(減律)하라는 의논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식자(識者)들이 〈구상을〉 훌륭하게 여겼다."

 

구선복(具善復)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6월 24일 경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서장관(書狀官) 박필규(朴弼逵), 의주 부윤(義州府尹) 송형중(宋瑩中)을 강연(江沿)으로 귀양보냈는데, 만상(灣商)들이 법을 범했는데도 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인(嚴璘)·이명환(李明煥)을 교리로, 정창성(鄭昌聖)·박취원(朴取源)을 부교리로, 이휘중(李徽中)을 수찬으로, 정창순(鄭昌順)을 지평으로, 정경인(鄭景仁)을 정언으로, 김상익(金相翊)을 문학으로, 홍양한(洪良漢)을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강원도에 큰 홍수가 나서 민호(民戶)가 표몰(漂沒)되고 사람과 가축이 많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도신(道臣)이 장문하니,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광사(李匡師)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본사(本事)의 내용을 알 수가 없는데 등사(謄寫)하여 전하여 온 고지(故紙)로써 억지로 국문하여 죽이는 것은 왕정(王政)에 있어 할 만한 것이 아니다."
하고, 이어서 대신과 양사(兩司)·금부 당상을 빈청(賓廳)에 회좌(會坐)하게 한 다음 문안을 상세히 조사하여 이광사에게 신문할 만한 것이 있으면 구대(求對)하여 청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연계(連啓) 여부는 다만 대각(臺閣)에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6월 25일 신해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송문현(宋文鉉)·이세호(李世壕)를 참작하여 처리할 때의 문안(文案)을 가져다 열람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본정(本情)을 신문할 수가 없으니, 변방에 정배(定配)시키는 것이 당률(當律)이다. 이전 대로 침작 처리하여 시행토록 하라."
하고, 이어서 이광사(李匡師)의 일에 대해 하순(下詢)하였다. 대사헌 윤동섬(尹東暹)이 아뢰기를,
"이광사가 역적(逆賊) 윤지(尹志)를 척절(斥絶)하지 못하고 서사(書辭)를 왕복한 것이 이토록 낭자한데, 어떻게 연좌율(緣坐律)만 작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정언 정경인(鄭景仁)은 아뢰기를,
"그는 이미 역적 이진유(李眞儒)가 숙부(叔父)이니 진실로 의당 움츠리고 있으면서 죄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서찰을 난만하게 왕복하였으니, 어찌 의심스런 자취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사간 정항령(鄭恒齡)을 불러 입시하게 한 다음 누누이 하교하여 정계(停啓)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사간 정항령(鄭項齡), 정언 정경인(鄭景仁)이다.】 에서 전계(傳啓)하기 전에 아뢰기를,
"이광사의 일에 대해서는 그 조어(措語)를 고쳤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이광사는 역적 이진유의 종자(從子)로서 원독(怨毒)을 평상시부터 가슴속에 스스로 쌓고 있었습니다. 그의 초사(招辭)에 의거하여 말하건대, ‘역적 윤지와 서찰을 왕복할 적에 재삼 주저하다가 하는 수가 없어서 답하였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서찰의 내용에 혹 정실(情實)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례에 따라 수응(酬應)했을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교묘한 말로 이렇게 꾸며냈습니다만 친밀한 정상을 숨길 수가 없었으니, 다시 잡아다가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승지 김종정(金鍾正)이 말하기를,
"역옥(逆獄)에 관련된 사람을 감히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는 것은 대간(臺諫)의 체통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니, 청컨대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정항령(鄭恒齡)이 인피(引避)하였는데, 아뢴 대로 허락하였다. 조금있다가 하교하여 삭직(削職)시키게 하고 정경인은 파직시켰다.

 

6월 26일 임자

남태회(南泰會)를 대사헌으로, 이성규(李聖圭)를 헌납으로, 박기채(朴起采)를 사간으로, 김보순(金普淳)을 정언으로, 이항조(李恒祚)·정언섬(鄭彦暹)을 지평으로, 현광우(玄光宇)·이홍직(李弘稷)을 장령으로, 여선응(呂善應)을 집의로, 이명식(李命植)을 교리로, 이득배(李得培)를 부교리로, 이명환(李明煥)을 부수찬으로, 이재간(李在簡)을 문학으로, 홍검(洪檢)을 설서로 삼았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대신·여러 재신(宰臣) 및 시종신(侍從臣)을 인견하고서 금주령을 범한 자를 감률(減律)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에 대해 하문하니, 정신(廷臣)들이 모두 일률(一律)112)  은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임금도 또한 뉘우치고 일률을 감하게 하고 사대부로서 범한 사람은 서인(庶人)을 만들고 서인으로서 범한 사람은 형배(刑配)하는 것을 드디어 정제(定制)로 삼게 하였다.

 

영제(禜祭)를 설행하였는데, 임금이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지냈다.

 

6월 27일 계축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인목 왕후(仁穆王后)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6월 28일 갑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선의 왕후(宣懿王后) 기신제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6월 29일 을묘

어떤 별이 방성(房星) 아래로 지나갔다.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태묘(太廟)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이헌경(李獻慶)을 집의로, 이진항(李鎭恒)·노성중(盧聖中)을 장령으로, 유수(柳脩)를 사간으로, 안표(安杓)를 헌납으로, 신익빈(申益彬)·이태정(李台鼎)을 정언으로, 정창성(鄭昌聖)을 부교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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