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병진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동경연(同經筵) 서지수(徐志修)가 나아가 말하기를,
"지난번 송명흠(宋明欽)의 상소에 대해 한마디도 취택(取擇)되지 않자 갑자기 물러가기를 고하였으니, 실로 처음의 대우를 계속하지 못했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찬선(贊善)과 대관(臺官)은 곧 산림(山林)들의 직책인 것인데 전조(銓曹)에서 감히 의망(擬望)하지 못하고 있고 혹 의망했더라도 낙점(落點)을 아끼고 있으니, 미명(美名)은 아래로 돌아가고 누덕(累德)은 위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신(史臣)이 기록하기를, ‘모년(某年) 아래 조정에 유자(儒者)들의 자취가 끊겼다.’고 쓴다면, 어찌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비록 지닌 회포를 숨김없이 말하였으나, 조후(曹侯)113) 로써 그 군주에 비유하고 또 즐겨하는 것을 생각하라고 한 것은 차마 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산림(山林)이 또 하나의 당(黨)을 만들어 내게 될까 염려스럽다. 나는 의망(擬望)하지 말라는 하교를 한 적이 없었다 의망하는 것은 전관(銓官)에게 달려 있는 것이고 낙점하는 것은 군주에게 달려 있는 것이므로 이는 아랫사람이 감히 말할 만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서지수는 평소부터 정직하여 중망(重望)이 있었고 성품도 또 아첨을 하지 않았다. 이 때 사림(士林) 출신들이 모두 쫓겨났는데 임금의 노여움이 그래도 풀리지 않았으므로 온 조정의 신하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서지수가 혼자서 말했기 때문에 사론(士論)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40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註 113] 조후(曹侯) : 《시경(詩經)》 조풍(曹風)의 후인장(候人章)을 가리키는 말로, 임금이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는 것을 풍자하여 지은 시임.
사신(史臣)은 말한다. "서지수는 평소부터 정직하여 중망(重望)이 있었고 성품도 또 아첨을 하지 않았다. 이 때 사림(士林) 출신들이 모두 쫓겨났는데 임금의 노여움이 그래도 풀리지 않았으므로 온 조정의 신하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서지수가 혼자서 말했기 때문에 사론(士論)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일 정사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간원 【대사간 송문재(宋文載)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광사(李匡師)의 계사(啓辭)에 이르러서는 나국(拿鞫)이라는 ‘나(拿)’자를 고쳐서 엄국(嚴鞫)이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리고 삭직(削職)시켰다.
원인손(元仁孫)을 대사간으로, 홍지해(洪趾海)를 사간으로, 이헌묵(李憲默)을 집의로, 이택징(李澤徵)을 장령으로, 정환유(鄭煥猷)를 지평으로, 최태형(崔台衡)을 헌납으로, 이수훈(李壽勳)·임성(任珹)을 정언으로, 순제군(順悌君) 이달(李炟)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삼았다.
이조 참의 권도(權噵)를 해남 현감(海南縣監)으로 내보냈는데, 패소(牌召)를 어기고 명을 받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언 정창성(鄭昌聖)을 해남(海南)으로 귀양보냈다. 임금이 특지(特旨)로 정창성을 정언에 제수하고 그로 하여금 명을 받들도록 재촉하였으나, 정창성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계(臺啓)의 정계(停啓)·연계(連啓)는 절로 공의(公議)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군부(君父)의 존엄함으로도 지사(指使)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대신(臺臣)이 엄명에 질려서 나아와 억지로 정계할 경우 목전의 일이 줄어드는 통쾌함은 있겠으나 이는 실로 뒷폐단의 근원에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원계(院啓)는 애당초 의심스러운 것을 발계(發啓)한 것이 아님은 물론 을해년114) 의 옥사(獄事)에 관계된 것으로 간신(諫臣)이 등전(謄傳)한 것은 법을 집행하는 준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삭직시키기도 하고 귀양보내기도 하여 견벌(譴罰)이 잇따르고 있으니 전일 대각(臺閣)에 보낸 성교(聖敎)와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 성상께서 내리시는 정령(政令)과 시조(施措)는 모두가 후손들에게 너그러운 법을 전해주는 모유(謨猷)인 것인데, 더구나 바른 말을 해야 하는 직임을 그저 임금의 명령만을 승순(承順)하는 자리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애석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대체(臺體)이고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언로(言路)이고 우러러 면려해야 하는 것은 이모(貽謨)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를 봉입(捧入)하자 임금이 의도가 규피(規避)에 있으면서 일부러 일을 말하는 것이라 여겨 노하여 책망하였다. 처음에는 출보(黜補)시키라고 명하였다가 곧이어 또 귀양보내게 하였다.
이날 저녁 세 대신을 사현합(思賢閤)에서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합문(閤門)을 닫고 찬선(饌膳)을 물리치는 것은 범용(凡庸)한 군주도 하지 않는 것인데 내가 유독 하는 것은 당습(黨習)을 제거하고 세신(世臣)을 보존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정신(廷臣)들이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있으니, 내가 무슨 얼굴로 다시 경 등을 대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다시 하유하지 않겠다."
하니, 대신들이 극력 그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정원에서 명을 되돌리겠다고 아뢰고 대사헌 남태회(南泰會), 교리 이명식(李命植) 등이 또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간쟁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고 그 소장은 되돌려 주었다.
7월 4일 기미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이어서 선원전(璿源殿)·황단(皇壇)·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가 저녁에 환궁(還宮)하였다.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조령(朝令)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으로 특별히 칙유(飭諭)를 선포하였다.
병조 판서 남태제(南泰齊)를 파직시켰는데, 금훤랑(禁暄朗)115) 을 가려 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지(特旨)를 내려 이지억(李之億)에게 대신하도록 하였다.
특지(特旨)를 내려 영의정 신만(申晩)을 파직시켰다. 이에 앞서 신만이 차자를 올려 면직(免職)시켜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어서 입시하라고 명하였으나 신만이 명을 받들지 않았다. 임금이 문재(文宰)와 비국 당상 가운데 입시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삭직시키라고 명하자 신만이 드디어 인의(引義)하고 도성(都城)을 나갔는데, 이날 영상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사복(嗣服)한 처음부터 유림(儒林)에 대한 일은 감히 조정으로 올리지 못하게 하였었다. 이제 처분(處分)을 내린 뒤에 감히 다시 이를 이유로 갈등을 야기시키는 경우 조관(朝官)은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사자(士子)는 유적(儒籍)에서 영원히 삭제시키겠다는 뜻으로 이미 전(殿)에 고하였으니, 모두들 이런 내용을 알고서 방헌(邦憲)을 범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조후(曹侯)를 인용한 것에 대해서는 개의(介意)할 것이 없더라도 군주 앞에서 침상을 폈다고 하더라도 또한 한번의 웃음거리도 못된다. 그러나 적불(赤芾)116) 을 한 소인이 3백 명이고 그들의 마음이 부정(不正)하다는 것을 무심히 풍설(風說)처럼 이야기했으니, 천극(天極)117) 을 업신여긴 것이다. 초선(抄選)된 사람이 한갓 이 사람뿐만이 아닌데 전관(銓官)을 위하여 감히 비호하려 했으니, 서지수(徐志修)에게 빨리 삭출(削黜)시키는 형벌을 시행하라."
하였다. 곧이어 금오(金吾)에 내리라고 명하였다가 제주(濟州)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전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의 한 통의 소장이 임금의 노여움을 촉발시켰는데 계속해서 초선(抄選)된 여러 사람들의 상소가 있었으므로 임금이 산림(山林)의 당(黨)이 있는가 의심하여 오래도록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유림(儒林)이라는 이름 때문에 죄주지 않고 있었다. 누차 대신(臺臣)들을 풍유(諷諭)하였으나 대신들도 또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서지수(徐志修)가 강연(講筵)에서 한번 아뢰었으나 말이 뜻을 통달시키지 못하여 도리어 아부하고 영호(營護)하는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서지수에게 죄를 가하였는데 밤이 새도록 임문(臨門)하여 있으면서 드디어 여러 신하들을 찬출(竄黜)시키는 대처분(大處分)이 있게 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40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註 116] 적불(赤芾) : 붉은 색의 앞가리개로 대부(大夫)차림의 복색임.[註 117] 천극(天極) : 임금.
사신(史臣)은 말한다. "전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의 한 통의 소장이 임금의 노여움을 촉발시켰는데 계속해서 초선(抄選)된 여러 사람들의 상소가 있었으므로 임금이 산림(山林)의 당(黨)이 있는가 의심하여 오래도록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유림(儒林)이라는 이름 때문에 죄주지 않고 있었다. 누차 대신(臺臣)들을 풍유(諷諭)하였으나 대신들도 또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서지수(徐志修)가 강연(講筵)에서 한번 아뢰었으나 말이 뜻을 통달시키지 못하여 도리어 아부하고 영호(營護)하는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서지수에게 죄를 가하였는데 밤이 새도록 임문(臨門)하여 있으면서 드디어 여러 신하들을 찬출(竄黜)시키는 대처분(大處分)이 있게 된 것이다."
전 대신(臺臣) 이심원(李心源)·이헌경(李獻慶)·정술조(鄭述祚)·홍낙명(洪樂命)·정항령(鄭恒齡)·송문재(宋文載)를 육진(六鎭)으로 귀양보냈는데, 전계(前啓)를 정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윤동섬(尹東暹)·이담(李潭)·김치양(金致讓)을 삭직(削職)시키고나서 또 하교하기를,
"아비는 아들을 가르치지 못하지만 임금이 어찌 〈신하를〉 계칙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홍계희(洪啓禧)·홍상한(洪象漢)을 삭직시켰는데, 홍술해·홍 낙명의 일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지난 여름 이후 양사(兩司)를 제외하고 외방에 있으면서 소명(召命)을 어긴 자는 삭직시키라."
하였다. 이에 삭직당한 사람이 수백인이나 되어 조정이 거의 텅 비게 되었다.
김상복(金相福)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때 정석(鼎席)118) 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복상(卜相)119) 하라고 명하였는데, 김상복은 자헌 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가복(加卜)120) 에 들었다가 드디어 대배(大拜)된 것이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추천한 것으로 시망(時望)은 아니었다.
이창수(李昌壽)를 이조 판서로, 서명응(徐命應)을 이조 참의로, 한광회(韓光會)를 대사헌으로, 이세택(李世澤)을 대사간으로, 안겸제(安兼濟)·고유(高裕)를 정언으로, 홍명한(洪名漢)을 경기 감사로, 이재간(李在簡)을 교리로, 김상익(金相翊)을 수찬으로, 심이지(沈履之)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장령(掌令)을 통청(通淸)시키는 법규를 다시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장령의 통청(通淸)을 금하면 지평(持平)·정언(正言)의 통청(通淸)이 난잡해지기 때문이었다.
7월 5일 경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전 대사간 송문재(宋文載)를 대정(大靜)으로 귀양보냈는데, 이는 이광사(李匡師)에 대한 계사(啓辭)를 정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간원 【정언 안겸제(安兼濟)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광사의 일은 정지하였다. 이항연(李恒延)·한명후(韓命垕)·심내복(沈來復)을 엄중히 국문하라는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초2일에 내리신 과중한 전교는 정지하소서."
하고, 또 오부(五部)의 관원으로 하여금 방민(坊民)을 모아 위유(慰諭)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도하(都下)에 난민(亂民)들이 많아서 금주령을 범하는 사람이 잇따르고 있다는 것으로 일전에 동가(動駕)할 적에 부관(部官)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몰아내어 감히 길 양쪽에 서서 구경하지 못하게 하였었다. 안겸제(安兼濟)가 말하기에 이르러 임금이 직접 시민(市民)들을 불러서 칙유(飭諭)하여 보내었다.
특지(特旨)로 전 영장(營將) 구현겸(具顯謙)을 승지에 제배하였다. 구현겸은 구선행(具善行)의 아들인데 어리석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웃는 사람이 많았다.
한익모(韓翼謨)를 예조 판서로, 윤급(尹汲)을 홍문 제학으로, 황인검(黃仁儉)을 예조 참판으로, 구선행(具善行)을 판윤으로, 신회(申晦)를 황해 감사로, 이인배(李仁培)를 통신 부사(通信副使)로, 홍낙인(洪樂仁)을 종사관(從事官)으로, 황인검(黃仁儉)을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이헌묵(李憲默)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의손(元義孫)을 장령으로, 심익성(沈益聖)을 사간으로, 유사흠(柳思欽)을 집의로, 남언욱(南彦彧)을 헌납으로, 이재협(李在協)을 교리로 삼았다.
7월 6일 신유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칠일제(七日製)를 거행하였는데, 서명선(徐命善)·심이지(沈頣之)가 입격(入格)하였으므로, 모두 불러들여 강(講)에 응하게 하였다. 심이지는 강을 잘하였으므로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고 서명선은 강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직부 회시(直赴會試)에 나가도록 명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조 참판 황인검(黃仁檢)이 아뢰기를,
"무진년121) 통신사(通信使)의 사행(使行) 때에는 경윤(京尹)의 예단(禮單)에 응자(應子) 1련(連)을 집정(執政)의 예(例)에 의거하여 지급하였었는데, 이번에도 마땅히 그것을 준례로 삼아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대사간 이세택(李世澤)을 삭직(削職)시켰다. 이세택은 승지로서 밤새도록 입시(入侍)하여 있었는데, 간장(諫長)을 제수하게 되자 상소를 올리고 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광사(李匡師)의 계사(啓辭)가 정지되고 나서야 이세택이 비로소 출사(出仕)하였으므로 임금이 삭직시키라고 명하였다. 곧이어 대청(臺請)에 따라 문외 출송(門外黜送)시켰다.
헌부에서 【집의 유사흠(柳思欽)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최수인(崔守仁)·전효증(全孝曾)의 일은 임금이 감률(減律)하여 모두 절도(絶島)에다 노예로 만들게 하라고 명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해서(海西)의 여러 고을에 충재(蟲災)가 있었으므로, 포제(酺祭)122) 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7일 임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간원 【정언 안겸제(安兼濟)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유생(儒生)들을 시강(試講)하는 것은 법의(法意)가 진실로 아름답습니다만 연로(年老)한 사람은 총명이 점차 줄어들어 기억하여 외우기가 매우 어려우니, 청컨대 문신(文臣)의 《노걸대(老乞大)》·《이문(吏文)》의 예(例)에 의거하여 연한(年限)을 정식(定式)하소서."
하니, 임금이 법을 어기고 경솔히 청했다는 것으로 삭직시켰다.
세손 책봉 주청사(世孫冊封奏請使)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 등이 돌아왔으므로, 임금이 인접하고 위유(慰諭)한 다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이조 판서 이창수(李昌壽)를 해남(海南)으로, 참의 서명응(徐命應)은 종성(鍾城)으로 귀양보내었다. 처음 이조 참판 조명채(趙命采)가 조재호(趙載浩)와 서로 친하다는 것으로 체포되어 옥(獄)에 갇혔었는데, 임금이 친문(親問)하여 그런 사실이 없자 즉시 사면(赦免)하였다. 뒤에 전조(銓曹)에서 좌이(佐貳)123) 의 전망(前望)을 정지시켰는데, 이때에 이르러 마침 궐원(闕員)이 나게 되자 임금이 다시 의망(擬望)하라고 명하였다. 이창수·서명응이 연명 차자를 올리기를,
"천관(天官)124) 의 아석(亞席)125) 은 그 직임이 가볍지 않은 것이어서 발망(拔望)과 의망(擬望)에는 절로 공의(公議)가 있는 것인데, 이제 어떻게 갑자기 오랫동안 정지했던 끝에 의망할 수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평상시에 조명채와 더불어 어찌 정리(情理)가 형제와 같지 않았었는가? 그런데 이제 도리어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특별히 윤급(尹汲)을 이조 판서에, 조명채(趙命采)를 참판에, 심이지(沈履之)를 참의에 제수하였다.
원인손(元仁孫)을 대사헌으로, 홍중효(洪重孝)를 대사간으로, 현광우(玄光宇)를 집의로, 이명환(李明煥)을 사간으로, 이우철(李宇喆)을 지평으로, 이재협(李在協)을 겸 필선으로, 구윤명(具允明)을 공조 판서로, 홍인한(洪麟漢)을 호조 참판으로, 이익선(李益烍)을 설서로, 신경준(申景濬)을 정언으로, 박사해(朴師海)·김재순(金載順)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7월 8일 계해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금상문(金商門)으로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예조 판서 한익모(韓翼謨)를 삭직(削職)시켰다. 한익모가 처음에 조명채(趙命采)의 전망(銓望)을 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구윤명(具允明)으로 대신시키고 유언국(兪彦國)을 발탁하여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정상순(鄭尙淳)을 통신사(通信使)로 삼고 황인검(黃仁儉)을 발탁하여 공조 판서로 삼았다. 황인검은 황재(黃梓)의 아들이고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의 형이다. 비록 자취가 금액(禁掖)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성품이 염근(恬謹)하여 시망(時望)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경재(卿宰)의 반열에 사람이 모자라서 드디어 이 직책에 발탁된 것이었다.
여러 신하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근래 정사(政事)의 득실(得失)에 대해 하순(下詢)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하순하는 것은 송나라의 천장각(天章閣)의 천장각(天章閣)의 고사(故事)126) 를 모방한 것이니, 의견이 같든 다르든 각기 소회를 속이지 말고 진달하라."
하니, 교리 이재협(李在協)이 말하기를,
"선유(先儒)들의 말에 기강(紀綱)은 호연지기(浩然知氣)와 같은 것이어서 의(義)가 축적되어 생겨나는 것이요 일조 일석(一朝一夕)에 갑자기 취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참으로 격론(格論)인 것입니다. 위벌(威罰)을 너무 지나치게 하는 것은 기강을 확립시키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위벌이 지나친 것은 병자(病者)에게 독한 약제(藥劑)를 쓰는 것과 같아서 목전의 증세는 제거되지만 반드시 원기(元氣)의 손상이 있게 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주부자(朱夫子)가 비유한 대승기탕(大承氣湯)은 또한 독한 약제가 아닌가? 완급(緩急)은 시기에 따라서 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사예(司藝) 문명구(文明龜)가 전관(銓官)을 찬축시킨 것은 중도에 지나친 것이라고 진달하니, 임금이 노하여 퇴척(退斥)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들 꺼리면서 감히 대답을 못하였는데, 대사간 홍중효(洪重孝)가 문명구를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킬 것을 청하고 또 조참(朝參)과 상참(常參)에는 조종조(祖宗朝)의 정제(定制)를 모방하여 단지 주사관(奏事官)만 전상(殿上)으로 올라오게 함으로써 당폐(堂陛)의 근엄함을 보존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받아들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조경(趙擎)을 사간으로, 박해윤(朴海潤)을 장령으로, 원의손(元義孫)을 부교리로, 이상지(李商芝)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7월 9일 갑자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학도(學徒)들을 데리고 입시하도록 명하고 동궁(東宮)에게 시좌(侍坐)하라고 명하였다. 동몽 교관에게 《소학(小學)》을 강하게 한 다음 동궁에게 글 뜻을 질문하게 하였다. 찬물(饌物)을 선사(宣賜)하고 상으로 지필(紙筆)을 차등 있게 주었다.
권상룡(權相龍)을 장령으로, 이인배(李仁培)를 수찬으로, 서명빈(徐命彬)을 판의금으로, 원의손(元義孫)을 교리로 삼았다.
7월 10일 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정하언(鄭夏彦)을 대사간으로, 한종제(韓宗濟)를 장령으로, 김양택(金陽澤)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전 전라 감사 원경순(元景淳)을 발탁하여 공조 판서로 삼았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원경순이 앞서 호남(湖南)에 있으면서 잘 진구(賑救)한 공로가 있다고 아뢴 때문이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원경순은 척분이 궁액(宮掖)과 닿아 있어 묘당(廟堂)에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재결(災結)에 대해 장청(狀請)한 것이 여러 번이었는데 대신(大臣)이 곡진하게 그를 위해 아뢰었으므로, 임금이 번번이 청하는 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전후 허락을 얻은 것이 30여 만 결(結)이나 되었는데, 부호(富戶)들만 치우치게 그 이익을 받았을 뿐 소민(小民)르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 또 총애하여 발탁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특별히 전 영의정 신만(申晩)을 서용하여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호서(湖西)에 수재(水災)가 나서 민가(民家) 4백여 호(戶)가 퇴압(頹壓)되고 2백여 호가 표류(漂流)되었다. 도신(道臣)이 이런 사실을 장문(狀聞)하니,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정실(鄭實)이 상소하여 강도(江都)의 폐막(弊瘼)을 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강도는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으로 진양(晉陽)127) 에 해당되는 곳인데도 저장해 놓은 군량(軍糧)이 하나도 없어 앉아서 빈 창고만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당초 창고에 유치되어 있던 것은 18만여 석(石)이었는데, 각처(各處)로 옮겨다 대여(貸與)한 것을 제하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단지 3만여 석뿐입니다. 청컨대 각사(各司)로 하여금 대여해간 것을 환납(還納)하게 하고 지부(地部)에서 독운(督運)해 가기로 되어 있는 5천 석도 또한 정지시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복주(覆奏)하도록 명하였는데, 해마다 향미(餉米) 5백 석씩을 첨가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게 하였다.
7월 12일 정묘
주강(晝講)을 행하고 이어서 무신(武臣)의 강(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양택(金陽澤)을 이조 판서 겸 수어사로, 이은(李溵)을 참판으로 삼았다. 이때 윤급(尹汲)·조명채(曹命采)가 인의(引義)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아서 모두 파직시켰기 때문이었다.
서명신(徐命臣)을 대사간으로, 이익보(李益輔)를 우참찬으로, 이응협(李應協)을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삼았다.
7월 13일 무진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서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예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이 왕세손(王世孫)의 봉전(封典)과 영칙(迎勅)할 때의 의절(義節)에 대해 앙품(仰稟)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칙서(勅書)는 교외(郊外)에서 영접하고 고명(誥命)은 전정(殿庭)에서 받고 복색(服色)은 왕래할 때는 진현(進見)할 때의 복색으로 사용하고 행례(行禮)할 때는 흉배(胸背)가 없는 흑단포(黑團袍)·청정 소옥대(靑鞓素玉帶)로 사용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통신사(通信使) 정상순(鄭尙淳)을 김해(金海)로 정배(定配)하였다. 정상순이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써 먼 길을 떠나는 것을 꺼려하여 누차 계칙(戒飭)해도 명을 받들지 않자 임금이 말하기를,
"명을 받은 사람이 모두 규피(規避)하고 있으니, 정상순을 죄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면려시킬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조엄(趙曮)에게 대신하게 하였는데, 종사관(從事官) 홍낙인(洪樂仁)이 조엄과 친혐(親嫌)이 있다는 것으로 김상익(金相翊)을 홍낙인과 대신하게 하였다.
홍낙인(洪樂仁)을 부교리로, 이정철(李廷喆)을 대사간으로 삼고, 특별히 이은(李溵)을 예조 참판으로, 홍낙성(洪樂性)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특별히 신경(申暻)을 시강원 찬선으로 삼았다. 신경은 곧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외손(外孫)이다.
7월 14일 기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통신 정사(通信正使) 조엄(趙曮)이 아뢰기를,
"교린(交隣)하는 도리는 의당 성신(誠信)을 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진년128) 의 통신사가 떠날 때 집정(執政)의 액수(額數)에 대한 가감(加減) 때문에 사행(使行)이 오랫동안 부산(釜山)에 머물러 있었는데, 강호(江戶)에 도착하게 되자 여섯 명의 집정이 상좌(上座)에 나와 앉았으므로 마지 못해서 예단(禮單)을 지급하려 하였는데, 왜인(倭人)들이 서계(書契)에 그런 내용이 없다는 것으로 고집하여 말하였으므로 가까스로 미봉하였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집정(執政)과 종실(宗室) 등에 관한 일로 다시 역관(譯官)을 보내어 강정(講定)하게 하였으나, 끝내 그쪽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한 명의 종실을 증가하는 것이 뒷폐단이 있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집정은 곧 그들의 대신(大臣)이고 종실은 곧 관백(關白)의 친아우입니다. 그들이 비록 교활하기는 합니다만 어떻게 사소한 예단(禮單) 때문에 없는 것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의견은, 집정 한 명의 서계와 예단을 예조로 하여금 전례에 의거하여 지급하게 하소서. 종실에게 지급하는 것은 이것이 사신(使臣)의 사사로이 하는 예단이니, 이에 대해서는 신이 마땅히 그 사세를 살펴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지평 이일증(李一曾)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보(御寶)를 위조한 죄인이 중로(中路)에서 도주한 것은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세기(世起)는 형조에서 체포하였고 양채(良彩)는 해청(該廳)에서 기포(譏捕)하였는데 아직도 동정(動靜)을 모르고 있으니, 좌우 포도 대장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세기·양채를 참작 처리하여 배소(配所)로 떠나게 하였는데, 중로에서 도주한 것이다. 그런데도 포도청에서 아직껏 체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청이 있게 된 것이었다.
7월 15일 경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16일 신미
임금이 남쪽 교외(郊外)로 거둥하여 벼농사를 살펴보았고 농민(農民)을 불러 위로하고 질고(疾苦)를 하문하였는데, 이는 전야(田野)가 물에 잠긴 곳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제도(諸道)에 명하여 재·실(災實)을 상세히 조사하여 부족한 것을 도와주게 하였다. 또 삼남(三南)이 갓 큰 흉년을 겪었다는 것으로 수륙(水陸)의 조련(操鍊)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7일 임신
주강을 행하였다. 이날 《대학(大學)》의 강을 끝내고 계속해서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18일 계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금영(禁營)과 어영(御營)의 기사(騎士)들에게 시사(試射)를 행하였는데, 기사를 새로 뽑아서 설치했으며 향군(鄕軍)은 오랫동안 입번(立番)을 정지하여 상사(賞射)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나서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년이 〈명나라가 망한 지 주갑(週甲)이 되는〉 갑신년인데, 황하(黃河)가 맑아졌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북쪽의 칙서(勅書)가 또 도착하였다. 이를 읽노라니 애오라지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감회를 북돋운다."
하고, 오래도록 감탄하였다.
7월 19일 갑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태학(太學)의 강유(講儒)를 불러들여 《주역(周易)》을 강하게 하고 제생(諸生)들에게 서로 질문하고 변론하게 하였는데, 저녁때가 되어서야 파하였다.
조돈(趙暾)을 대사헌으로, 이상지(李商芝)를 사간으로, 원의손(元義孫)을 집의로, 조태상(趙台祥)·강시현(姜始顯)을 장령으로, 안겸제(安兼濟)·이익보(李益普)를 지평으로, 김재순(金載順)을 헌납으로, 조석목(趙錫穆)·조진형(趙鎭衡)을 정언으로, 홍계희(洪啓禧)를 우참찬으로, 조명채(曹命采)를 우윤으로, 원경순(元景淳)을 지경연으로, 이은(李溵)을 동경연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7월 20일 을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고 《군감(君鑑)》을 강하였다.
7월 21일 병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행례(行禮)를 끝마치고 나서 망배례기(望拜禮記)를 지어서 내리고 황단(皇壇)의 봉실(奉室)에 써서 걸라고 명하였다.
주강를 행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태상시(太常寺)의 맥아(麥芽)는 원공(元貢)인데 〈그 대가(代價)로〉 쌀 2백 곡(斛)을 지급하고 있습니다만 술을 만드는 것을 파하고 단술을 만들고 있으므로 소용되는 것이 30석(石)에 불과합니다. 적전(籍田)에서 거두는 것만으로도 그 소용에 잇대기에 충분하니, 청컨대 원공을 혁파하여 절약하고 줄이는 뜻을 보이소서. 그리고 근래 과일을 제기(祭器)에 벌여놓는 높이가 척수(尺數)의 정식(定式)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니, 청컨대 이정(釐整)하여 고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식자(識者)들은 홍봉한이 제수(祭需)의 감손을 청하였다는 것으로 시끄럽게 떠들면서 공척(攻斥)하였는데. 그것이 국체(國體)를 손상시켰기 때문이었다.
국청(鞫廳)의 죄인 이항연(李恒延)·한명후(韓命垕)를 감사(減死)하여 멀리 정배(定配)시키게 하였다. 이항연 등은 지난번 대계(臺啓)를 인하여 잡아다가 국문했는데, 임금이 그 문안(文案)을 가져다가 보고나서 다시 조사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으로 드디어 이런 명령이 있게 되었다. 대사간 이정철(李廷喆), 지평 안겸재(安兼濟)가 상소하여 그 명을 정지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모두 파직시켰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본사(本事)의 시비에 대해 잘 모르면서 단지 국정(鞫庭)으로 들어온 사람은 살아서 나갈 수 없게만 하고 있다. 이미 참작하여 처리한 사람을 번번이 다시 신문하는 것은 이것이 어찌 왕자(王者)가 형벌을 신중히 하는 정사이겠는가?"
하였다.
경기 감사 홍명한(洪名漢)을 파직시키고 광주 부윤 김응순(金應淳)을 잡아다 신문하게 하였다. 부민(府民)이 금주령(禁酒令)을 범했기 때문이다.
7월 22일 정축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현광우(玄光宇)를 사간으로, 이명준(李命俊)을 장령으로, 심성진(沈星鎭)을 경기 감사로, 윤급(尹汲)을 지경연으로, 김노진(金魯鎭)을 부교리로, 홍낙순(洪樂純)을 부수찬으로, 이최중(李最中)을 대사성으로, 이유신(李裕身)을 대사간으로, 이해진(李海鎭)을 지평으로, 윤동승(尹東昇)을 광주 부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항연(李恒延) 등을 다시 정배(定配)한 뒤 대신(臺臣)이 또 다시 강력히 간쟁하자 누차 엄중한 하교를 내렸다. 각도(各道)에서 계문(啓聞)하였으나, 또한 복주(覆奏)를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大臣)이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자, 드디어 물러가 명을 기다렸다. 임금이 다시 2품 이상의 관원과 시종(侍從)및 경조(京兆)의 부로(父老)를 불러서 입시하게 한 다음 당습(黨習)을 일삼지 말 것과 금주령을 범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글을 지어 선유(宣諭)하고 드디어 그 명을 정지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관서(關西)에 가뭄이 들었으므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홍중일(洪重一)을 대사간에 제수하였다.
7월 24일 기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통신사(通信使) 조엄(趙曮)·이인배(李仁培)·김상익(金相翊) 등을 소견하였다. 하유하기를,
"교린(交隣)은 중대한 일이다."
하고, 칙교(飭敎)를 써서 내리기를,
"약조(約條)를 어기고 조정에 수치를 끼치는 자, 기이하고 교묘한 물건을 사서 은밀히 많은 이익을 노리는 자, 저들과 술을 마시어 감히 나라의 법금(法禁)을 어기는 자는 모두 사신(使臣)으로 하여금 먼저 목을 베고 나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군감(君鑑)》을 강하였는데,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태배법(笞背法)을 제거한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국수(鞫囚)가 아닌 경우 조사(朝士)나 또는 이름이 종적(宗籍)에 들어있는 자로서 편배(編配)되어 물고(物故)된 사람에 대해서는 검험(檢驗)하는 법을 영구히 제거할 것을 법령으로 제정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5일 경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26일 신사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장령 강시현(姜始顯)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대(專對)하는 임무는 가볍지 않고 중한 것인데, 정사(正使) 순제군(順悌君) 이달(李炟), 부사(副使) 이응협(李應協)의 제목(除目)이 내려지자 물정(物情)이 모두 놀라고 있으니, 청컨대 체차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이응협만 체차하라고 명하고 이달은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조돈(趙暾)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이어서 조명정(趙明鼎)이 호얼(湖臬)·북번(北藩)에 있으면서 불법을 저지른 일에 대해 언급한 것이 모두 수천언(數千言)에 달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교제창(交濟倉)의 전목(錢木)을 멋대로 감한 것, 열 고을의 부세(賦稅)를 임의로 더 거두어 들인 것, 무사(武士) 최여창(崔汝昌)에게 소첩(小帖)을 만들어줌으로써 도시(都試)에 사정(私情)을 쓴 것, 피인(彼人)들이 변방 고을을 범월(犯越)하였는데도 성문(城門)을 낮에 닫아 놓고 즉시 상문(上聞)하지 않았다는 것 등이었다. 이어서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조명정과 혼인을 맺어 사돈이 되었으므로 조명정을 돕고 자신을 돕지 않은 것을 공척(攻斥)하였는데, 비난하는 말이 많았다. 그리고 이어서 치사(致仕)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한(漢)나라 때 구순(寇恂)과 가복(賈復)129) 의 일을 인용하여 누차 책망하는 하교를 내렸다. 처음에는 함께 가두라고 명하였다가 또 함께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여 손수 두개의 ‘잊을 망[忘]’자를 써서 내리니, 조돈과 조명정이 모두 명을 받들고 물러나왔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돈이 조명정을 대신하여 남번(南藩)과 북번(北藩)을 맡은 것은 큰 혐원(嫌怨)이 있는 것이 아닌데 상소하여 탐오한 정상을 진달하고 함께 조정에 서지 않으려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구준과 가복이 단지 사사로운 혐의만 있었던 것과는 다르다. 의당 그 허실(虛實)을 조사하고 호오(好惡)를 밝혀야 하는데 이에 버려두고 불문에 부쳤다. 둘다 옳다고 한 성의(聖意)는 진정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를 연유하여 종핵(綜核)하는 정사가 실종되었고 염방(廉防)의 중대함이 무너졌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이를 걱정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42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재정-전세(田稅) / 금융-화폐(貨幣) / 구휼(救恤) / 역사-사학(史學)
[註 129] 구순(寇恂)과 가복(賈復) : 중국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구순이 가복의 부장(部將)을 죽였으므로, 가복은 이를 수치로 여겨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광무제가 이것을 듣고 두 사람을 불러, 천하(天下)가 안정되지 않은 이때에 사사로운 싸움을 해서는 안된다고 타일러 화해시키서, 드디어 두 사람은 친우(親友)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함.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돈이 조명정을 대신하여 남번(南藩)과 북번(北藩)을 맡은 것은 큰 혐원(嫌怨)이 있는 것이 아닌데 상소하여 탐오한 정상을 진달하고 함께 조정에 서지 않으려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구준과 가복이 단지 사사로운 혐의만 있었던 것과는 다르다. 의당 그 허실(虛實)을 조사하고 호오(好惡)를 밝혀야 하는데 이에 버려두고 불문에 부쳤다. 둘다 옳다고 한 성의(聖意)는 진정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를 연유하여 종핵(綜核)하는 정사가 실종되었고 염방(廉防)의 중대함이 무너졌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이를 걱정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탄신(誕辰)에 칭하(稱賀)하지 말고 제도(諸道)에서는 전문(箋文)을 올리지 말게 하였다. 대개 《군감(君鑑)》으로 인하여 당나라 태종(太宗)이 생신(生辰)에 음악을 연주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감동한 점이 있어서였다.
7월 27일 임오
왕세손(王世孫)을 책봉(冊封)하는 칙사(勅使)가 나온다는 소식이 도착하였다. 황인검(黃仁儉)을 원접사(遠接使)로, 홍계희(洪啓禧)를 관반사(館伴使)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8일 계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경상·전라·충청 3도(道)의 진정(賑政)이 끝났으므로 진정한 고을의 수령(守令)들에게 포상(褒賞)을 가하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구선행(具善行)을 형조 판서로, 남태제(南泰齊)를 한성 판윤으로 삼았다.
사간 현광우(玄光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전하의 번뇌가 격해진 데서 행해진 거조로 인하여 삼대신(三大臣)이 파체(罷遞)된 것이 3, 4번이나 되었으며, 4개월 안에 대총재(大冡宰)130) 가 체개(遞改)된 것이 또한 8, 9번이나 되었는가 하면, 1일 사이에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삭직 또는 파직된 것이 1백여 인이나 되었으니, 좌죄(坐罪)된 내용의 경중과 천심(淺深)에 대해서는 우선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 개체(改遞)가 잦고 견벌(譴罰)이 중도에 지나치게 된 것은 이것이 뭇 신하들이 잘 봉직(奉職)하지 못한 죄입니다만, 전하께서 조처하신 것도 또한 온화하고 너그럽게 하는 도리에 흠결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특별히 정존겸(鄭存謙)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김재순(金載順)을 부수찬으로, 홍계희(洪啓禧)를 지경연으로, 윤면헌(尹勉憲)을 수찬으로, 이응협(李應協)을 대사헌으로, 홍명한(洪名漢)을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조제태(趙濟泰)를 경기 수사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만년(晩年)에 《군감(君鑑)》을 강하노라니, 송나라 태조(太祖)가 한더위에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고통을 염려했던 것에 대해 나도 모르게 감동되었다. 아! 이제 늦더위를 당하여 이렇게 넓은 집에서도 오히려 견뎌낼 수가 없는데 더구나 감옥에서이겠는가? 옛날 어진 관리가 한더위에 냉수(冷水)를 마시면서 스스로 탄식하기를, ‘감옥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것을 마실 수 있겠는가.’ 했는데, 내가 일찍이 이에 대해 감탄한 적이 있었다. 감옥을 깨끗이 청소하게 하고 크게 관계된 것이 아닌 사람은 날짜를 넘기지 말고 처결하게 하라. 각사(各司)에서는 경솔히 패(牌)를 쓰지 말게 하라. 한번 패(牌)가 가게 되면 한 집안이 곤욕을 당하고 심지어 여러 날 체류되는 죄수는 다방면으로 곤욕을 당하고 있으니, 이런 뜻에 의거하여 특별히 중외(中外)에 신칙시키라. 그리고 포도청(捕盜廳)에서 구류(拘留)하는 것이 매우 잔인한데, 물건 하나를 도둑맞으면 많은 사람을 연관시키고 있다. 더구나 난장(亂杖)으로 신문하고 주뢰(周牢)를 트는 형벌은 지난 사첩(史牒)에도 없는 것이다. 해청(該廳)에 신칙하여 잗단 일에 대해서는 경솔히 이런 형벌을 가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사조(辭朝)하는 수령들을 소견하고 면려·계칙시켜서 보내었다.
7월 29일 갑신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1763년 9월 (0) | 2025.10.09 |
|---|---|
|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1763년 8월 (0) | 2025.10.09 |
|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1763년 6월 (0) | 2025.10.09 |
| 영조실록101권, 영조 39년 1763년 5월 (0) | 2025.10.09 |
| 영조실록101권, 영조 39년 1763년 4월 (1) | 2025.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