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을유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서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전관(銓官)을 계칙하여 심일진(沈一鎭)을 서용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심일진은 윤리(倫理)를 해치고 풍교(風敎)를 손상시켜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그리고 송명흠(宋明欽)도 상소하여 공척하였는데 홍봉한이 이와 같이 극력 청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42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심일진은 윤리(倫理)를 해치고 풍교(風敎)를 손상시켜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그리고 송명흠(宋明欽)도 상소하여 공척하였는데 홍봉한이 이와 같이 극력 청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의 사인(士人) 서문배(西門培)의 아내 정씨(鄭氏)와 양인(良人) 임동삼(林東三)의 아내 오조이(吳召史)의 마을에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였다. 또 능주(綾州)의 사인(士人) 이광리(李光离)·이광곤(李光坤)과 장성(長城)의 사인 공필장(孔弼章)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제도(諸道)에 명하여 효열(孝烈)이 특이한 사람을 조사하여 아뢰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호남(湖南)의 전 도신(道臣)인 원경순(元景淳)이 계문(啓聞)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정씨는 행실이 깨끗한 것으로 향리(鄕理)에 소문이 났는데 갑자기 강포한 자의 겁침(劫侵)을 당하여 치마를 찢기기에 이르자 정씨가 큰소리로 외치니, 이웃 사람이 달려가 구해주어 드디어 모욕을 당하는 것을 면하였다. 정씨가 말하기를,
"분변하지 않고 죽으면 누가 나의 뜻을 밝혀줄 수 있겠는가?"
하고, 즉시 관(官)에 고발하여 그 강포한 자를 장살(杖殺)케 하였다. 그리고나서 울면서 말하기를,
"나의 몸은 비록 더렵혀지지 않았으나 한쪽 팔은 그에게 비틀렸었으니, 이를 그대로 두면 온몸이 더러워진다."
하고, 칼을 가져와 베어내고 드디어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오조이는 일찍 과부(寡婦)가 되어 시부모를 봉양하면서 수절(守節)하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개가(改嫁)시키려 하자, 오 조이가 말하기를,
"남편의 무덤에 가서 한번 곡(哭)한 다음 허락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젖먹이 어린아이를 업고 가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당신이 왜 먼저 가서 나로 하여금 이런 말을 듣게 합니까?"
하면서, 이에 손으로 얼어 붙은 무덤을 마구 파니 열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그리하여 아기와 어머니가 드디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나무하는 여인(女人)이 그것을 보고 불쌍하게 여겨 부축하고 남편의 집안 사람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위로하고 달래었으나 끝내 듣지 않고 약(藥)을 마시고 죽었다. 이광리 형제는 거상(居喪)을 잘 하였는데, 밤에 실화(失火)하여 시체가 든 관(棺)이 타게 되자 이광리가 불속으로 뛰어들었고 그 아우도 따라서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관을 아래 위에서 끌어안은 채 함께 불에 타서 죽었는데, 관은 아무 탈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된 소치라고 일컬었다. 공필장은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는데, 어버이가 돌아가게 되자 피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장사지내고나서는 손수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고서 초동(樵童)들에게 경계시키기를,
"이것이 바로 공효자(孔孝子)의 무덤이니, 나무를 베지 말라."
하였다.
경상도 안핵 어사(按覈御史) 이수봉(李壽鳳)이 복명(復命)하였다. 이에 앞서 예천군(醴泉郡)에 의옥(疑獄)이 있었으므로 이수봉을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돌아와서 아뢰기를,
"이충국(李忠國)의 딸이 권조언(權朝彦)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 시어미의 병이 위급하였는데도 미처 와서 근알(覲謁)하지 않았으므로 시어미가 한을 품고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권조언의 누이동생이 준절히 나무라자 이녀(李女)가 부끄러워 원한을 품고서 드디어 스스로 자결(自決)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부인(婦人)의 성품이 좁은데 연유되어 그런 것이다. 심각하게 죄줄 수 없는 것이다."
하고, 권조언과 그에 관련된 사람들을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이것이 비록 한 가지 일이지만 세 가지 경계를 남겼다. 남의 아내가 되어서는 마땅히 시부모에게 성효(誠孝)를 극진히 해야 하고, 소고(小姑)가 되어서는 마땅히 오빠의 아내와 화목해야 하고, 남편이 되어서는 마땅히 아내에게 모범을 보이는 도리를 극진히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을 모두 추로(鄒魯)의 고장인 경상도에 효유하여 각기 스스로 면려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일 병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영희전(永禧殿)의 다섯 번 제향(祭享)에 쓰이는 과품(果品)이 다르고 승수(升數)도 같지 않은데 각 릉(各陵)의 기신제(忌辰祭) 때에도 또한 그러합니다. 다섯 번의 제향과 각 릉 기신제에 들어가는 것은 2승(升) 3홉(合)을 기준으로 삼고 고제(告祭)에 쓰는 것은 1승(升) 반을 기준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고 각종 유과(油果)를 높이 벌여놓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정해진 척수(尺數)가 있으니, 이를 담는 그릇과 되는 두승(斗升)을 모두 교정(較正)하여 그 고하(高下)를 고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 뒤로는 소현궁(昭顯宮)을 똑같이 묘(廟)라고 일컫도록 명하였는데, 명칭에 다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조 참의 심이지(沈履之)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례(古例)에 전관(銓官)의 통의(通擬)를 거치지 않고 특별히 중비(中批)로 제수한 경우는 혹 한때 사람이 모자란 탓에서였습니다만, 요당(僚堂)131) 이 출사(出仕)하기에 이르러서는 번번이 인의(引義)하여 반드시 해임(解任)되었습니다. 전배(前輩)들이 진퇴(進退)에 대해 엄중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하고, 이어서 체직시켜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신오청(申五淸)·구수국(具壽國)을 장령으로, 윤승렬(尹承烈)·김위(金㙔)를 지평으로, 남언욱(南彦彧)을 헌납으로, 이일증(李一曾)·홍성(洪晟)을 정언으로, 정이환(鄭履煥)을 교리로, 원인손(元仁孫)을 공조 참판으로, 윤급(尹汲)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가을비가 곡식에 해를 입힌다는 이유로 영제(禜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원옥(冤獄)을 다스리고 부렴(賦斂)을 견감하였다.
8월 3일 정해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사단 고유제(社壇告由祭)와 사문(四門) 영제(禜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통신 정사(通信正使) 조엄(趙曮), 부사(副使) 이인배(李仁培), 종사관(從事官) 김상익(金相翊)이 사폐(辭陛)132) 하니, 임금이 소견하였다. 친히 이릉(二陵)의 송백(松柏)이란 글귀를 읊고 한동안 감동하였다가 이윽고 ‘잘 갔다가 잘 오라.[好往好來]’는 네 글자를 어필(御筆)로 세 폭(幅)을 써서 나누어 주고 위유(慰諭)하여 보냈다.
8월 4일 무자
조강(朝講)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군감(君鑑)》을 열람하고 하교하기를,
"송나라 인종(仁宗)이 모란꽃으로 귀비(貴妃)의 머리에 얹는 옥구슬에 대신하자 며칠이 안되어 서울의 옥구슬 값이 폭락하였으니, 그 빠른 효과는 본받을 만한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무늬 있는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즐겨하지 않아서 이미 제거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주옥(珠玉)의 허비가 무늬 있는 비단보다 더하니, 이것이 바로 굶주린 이에게 밥을 먹일 수 없게 된 이유인 것이다. 이제 칠순(七旬)의 나이에도 글에 임하니 감동되는 점이 많다. 남송(南宋)의 임금도 오히려 황금(黃金)을 흙같이 여겼는데, 더구나 만년(晩年)에 스스로 면려하는 때인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이 뒤로 왜인(倭人)에게 옥구슬을 사는 자에게는 잠상률(潛商律)을 시행할 것은 물론 나라 안에서도 또한 감히 사고 팔지 못하게 함으로써 내가 이미 북쪽의 비단을 금하고 나서 남쪽의 옥구슬도 아울러 금하게 한 뜻을 드러내어 보여라."
하였다.
귀양간 사람들의 아들들을 부거(赴擧)에 구애하지 말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하찮은 죄로 귀양갔을 경우 그 아들들이 방목(榜目)에 끼이게 되면 임금이 발거(拔去)하라고 명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이렇게 하는 것은 전규(前規)가 아니라고 아뢰니, 임금이 부거를 허락하고 이어서 법제(法制)로 정하게 하였다.
8월 5일 기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에게 향사(享祀)의 품식(品式)을 이정(釐正)하고 이어서 법제(法制)로 정하여 태상시(太常寺)133) 와 예조(禮曹)에 보관하게 하였다. 처음 태상시에서 쓰는 유밀(油蜜)의 공미(貢米)가 점점 증가되어 거의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식(定式)하니, 해마다 공미 수천 곡(斛)이 줄어들었다.
헌부 【장령 구수국(具壽國)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소회를 아뢰기를,
"근일 이래 위노(威怒)가 너무 갑작스럽고 형상(刑賞)이 중도에 어긋나 경재(卿宰)로부터 시종(侍從)에 이르기까지 찬축(竄逐)되거나 삭파(削罷)된 사람이 거의 수백인이나 됩니다. 대신(大臣)은 천직(天職)을 함께 하는 사람인데 견척(譴斥)하는 것이 서료(庶僚)와 다름이 없으니, 이는 매우 구경(九經)134) 의 뜻을 본받는 의의가 아닌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무너진 기강을 진기시켜 엄숙하게 할 수 없다고 여기시겠습니다만, 기강을 확립시키는 것은 법을 엄중히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정사를 하면서 기강을 확립시키는 것은 학자(學者)가 의(義)를 축적시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하였는데, 선정의 이 말은 참으로 오늘날 본받아야 할 말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구수국이 또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린 윤음(綸音)에서 따르는 사람은 충신이요 따르지 않는 사람은 충신이 아니라는 하교가 있으셨는데, 신은 성의(聖意)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순(堯舜) 같은 성인(聖人)으로서도 오히려 말하기를, ‘나의 잘못을 그대가 보필하여 주고 나의 앞에서만 면종(面從)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는데, 진실로 신하된 사람으로 하여금 명령을 봉행하고 하교를 받들기만 하는 것이 죄를 받지 않게 되는 방법으로 여기게 만들 뿐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을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하교는 후세에 본보기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청컨대 전일의 하교를 정지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구수국이 또 아뢰기를,
"인군(人君) 혼자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관직(官職)을 나누어 놓고 각각 유사(有司)를 두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권강(權綱)을 총람(摠覽)하여 일심으로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만, 간혹 몸소 잗단 사무를 친히 하기도 하고 유사가 할 일을 행하는 사례가 없지 않았습니다. 지금 태상시(太常寺)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건대, 변두(邊豆)의 일은 곧 그를 관리하는 유사가 있는 것이니, 유사에게 맡기면 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성념(聖念)을 번거롭혀 가면서 정신(精神)을 지치게 하십니까? 지금부터는 모든 정령(政令)에 대해 잗단 일로 노신(勞神)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숨김없이 말했다는 것으로 우악하게 답하였다.
임금이 《군감(君鑑)》을 보고서 하교하기를,
"공성(孔聖)이 조심한 것은 재계(齋戒)이다. 황조(皇朝) 홍무(洪武)135) 때에도 또한 백집사(百執事)들에게 계칙하기를,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것은 오직 성(誠)과 경(敬)뿐인 것이다.’ 하였다. 내가 비록 성의는 부족하지만 사전(祀典)에 감히 소홀히 한 적이 없었으니, 나의 뭇 신하들은 모든 사전(祀典)에 대해 항상 이 훈계를 외우도록 하라."
하였다.
8월 6일 경인
임금이 《군감(君鑑)》을 보았다. 황명(皇明)의 문황(文皇)136) 이 계칙한 일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아! 내가 군민(軍民)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옛날의 뜻을 우러러 본받기 위한 것이다. 장교(將校)가 된 사람이 초군(哨軍)을 노예처럼 부리는데 고시(考試)할 때를 당하여도 한결같이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있으니, 이렇게 하고서 뒷날 전진(戰陣)에 임하여 어떻게 고락(苦樂)을 함께하면서 그들의 힘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 뒤로는 군무(軍務)가 아닌데도 마음대로 군졸을 부릴 경우 장신(將臣)은 이를 염찰(廉察)하여 심한 자는 태거(汰去)시키고 그 다음에 해당되는 사람은 전최(殿最)에 하고(下考)를 적용토록 할 것으로 각 군문(軍門)에 신칙시키라."
하였다.
사찰(寺刹)의 축원패(祝願牌)를 철거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승도(僧徒)들이 수만세(壽萬歲)라고 쓴 패(牌)를 불우(佛宇)에 두루 걸고서 밤새도록 기축(祈祝)하여 설만스러움이 심했는데도 금하지 않았었다. 임금이 그것을 듣고서 미워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어필(御筆)로 ‘오늘날의 뭇 신하들이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무슨 일인들 못할 것이 있겠는가.[今日群臣其若孜孜甚事不做]’라는 열 두 글자를 써서 이를 새겨 주사(籌司)137) 에 걸어둠으로써 각기 스스로 면려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8월 7일 신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8월 8일 임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나리포(羅里鋪)에 대한 일은 이제 절목(節目)이 완성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하순(下詢)하니, 모두들 절목이 잘 만들어졌다고 대답하자, 절목을 즉시 계하(啓下)하라고 명하였다. 탐라(眈羅)에서 나오는 양곽(凉藿)과 기타 물종(物種)을 절반은 양호(兩湖)의 각 고을에 주고 절반은 본포(本鋪)에서 발매(發賣)하게 하되 때에 따라 신축성 있게 하라는 것으로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일체로 행회(行會)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8월 9일 계사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를 행하였다.
8월 10일 갑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소대를 행하고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을 대사간으로, 서유원(徐有元)을 교리로, 조계태(趙啓泰)를 경기 수사로 삼았다.
다시 이정보(李鼎輔)를 대제학에 임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정보가 누차 지공거(知貢擧)138) 를 맡았었는데 공평하게 수행했다는 칭송이 있었다. 그리하여 사직하여 체차된 지 얼마 안되어 다시 임명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4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註 138] 지공거(知貢擧) : 고시관(考試官).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정보가 누차 지공거(知貢擧)138) 를 맡았었는데 공평하게 수행했다는 칭송이 있었다. 그리하여 사직하여 체차된 지 얼마 안되어 다시 임명한 것이다."
지평 김위(金㙔)가 상소하여 여섯 가지 조항으로 진계(陳戒)하기를,
"가뭄과 홍수가 서로 농사에 재해가 되고 있으니 하늘의 뜻을 대월(對越)하는 정성이 극진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가난한 백성들이 수심과 고통에 젖어 민산(民産)이 고갈되었으니,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것처럼 하는 은혜가 끝까지 닿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국계(國計)가 애통스럽게 되어 공세(貢稅)가 이미 바닥이 났으니, 부당하게 허비되는 것을 잘 막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여항(閭巷) 사이에 사치를 서로 숭상하고 있으니 검소함을 숭상하는 덕이 아직도 미덥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부지런히 동칙(董飭)하시는데도 제사(諸司)의 실정(實政)은 아직도 제대로 거행되지 않고 있고 언로(言路)가 열려 있는데도 대각(臺閣)의 곧은 말이 아직도 들리지 않고 있으니, 모두 풀 위에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덕화(德化)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소를 봉입(捧入)한 때가 밤 2고(鼓)였는데, 임금이 불러들이라고 명하여 영외(嶺外)의 농사일에 대해 하문하고, 비답을 내리기를,
"진달하여 면려한 여섯 가지 조항의 내용은 매우 절실한 것이므로 만년(晩年)의 약석(藥石)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었다.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는데, 장유(奬維)한 것이 매우 진지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위(金㙔)가 진달한 여섯 가지 내용은 말이 매우 모호하여 노생(老生)의 평범한 대책(對策)과 다름이 없는 것인데도 임금은 김위가 영남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장유(奬諭)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4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위(金㙔)가 진달한 여섯 가지 내용은 말이 매우 모호하여 노생(老生)의 평범한 대책(對策)과 다름이 없는 것인데도 임금은 김위가 영남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장유(奬諭)한 것이다."
8월 11일 을미
조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특별히 조명정(趙明鼎)을 형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윤학동(尹學東)을 대사간으로, 이보관(李普觀)을 사간으로, 임희효(任希孝)를 정언으로, 홍계희(洪啓禧)를 판의금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우빈객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8월 12일 병신
임금이 친히 《효제편(孝悌篇)》을 지어 간인(刊印)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반사하라고 명하였다.
8월 13일 정유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인현 왕후(仁顯王后)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8월 14일 무술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와 각 능전(陵殿)의 추석제(秋夕祭)에서 쓸 향을 지영(祗迎)하였다.
특별히 교리 홍낙순(洪樂純)을 응교에 임명하였다. 《효제편》을 감인(監印)한 공로 때문이었다.
8월 15일 기해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명릉(明陵) 친제(親祭)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이날 임금이 곤복(袞服) 차림으로 선원전(璿源殿)을 전알(展謁)하고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융복(戎服)으로 고쳐 입고 말을 타고서 연은문(延恩門)에 이르러 다시 교자(轎子)를 타고 명릉(明陵)으로 나아갔다. 재실(齋室)에 들어가서 천담복(淺淡服)으로 갖추어 입고 의식대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는 또 보여(步輿)로 익릉(翼陵)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다. 경릉(敬陵)에 들러 배알(拜謁)하고 순회묘(順懷廟)를 봉심(奉審)한 다음 밤이 되어서야 환궁(還宮)하였다.
대사성에게 지영(祗迎)한 유생(儒生)들의 거안(擧案)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봉사손(奉祀孫)인 전 현감 김두추(金斗秋)를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대개 익릉(翼陵)에 친제(親祭)함을 인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8월 16일 경자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의 추향제(秋享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으로 나아가 경외(京外)에서 지영(祗迎)한 유생(儒生)에게 친시(親試)하고 구일제(九日製)를 설행하여 강완(姜俒)·안성빈(安聖彬) 2인을 뽑아서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8월 17일 신축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숭릉(崇陵)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8월 18일 임인
승지 심발(沈墢)을 발탁하여 동중추(同中樞)로 삼았다.
8월 19일 계묘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수가(隨駕)한 군병(軍兵)들을 시사(試射)하였는데 다음날에야 비로소 파하였으며 차등 있게 상을 나누어 주었다.
찬선 신경(申暻)이 상소하기를,
"지금의 이 직책은 효종[孝廟]께서 특별히 설치하여 선정신(先正臣) 김집(金集)을 대우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臣)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여기에 의의(擬議)될 수 있으며, 또 더구나 공의(公議)를 벗어나 특별하게 제수하여 물정(物情)이 놀라고 조정의 체모에 손상이 되게 한단 말입니까? 신보다 앞서 제수된 사람들은 또한 한 두 가지의 기덕(耆德)과 영명(令名)이 있어 모두 당세의 명망을 지니고 있는데도 전하께서 바야흐로 견척(譴斥)하고 소외시키고 있으니, 이는 군덕(君德)에 관계된 것으로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걱정하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처럼 못나고 용렬한 사람이 도리어 잘못 은혜를 받았으니, 사방 사람들이 들으면 의혹이 가중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특별히 제수하는 것은 선정(先正)을 추모해서인 것이니, 속히 올라와서 나의 어린 아들을 보도(輔導)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1일 을사
정언 홍성(洪晟)이 과장(科場)에서 시권(試券)을 일찍 바치는 폐단을 금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에 앞서 지공거(知貢擧)가 된 사람이 일찍 바친 글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오루(午漏)를 치기도 전에 장옥(場屋)이 거의 텅 비었었다. 그리하여 다투어 먼저 바치는 것을 서로 숭상하게 되었고 그것이 고질적인 습속(習俗)이 되어 있었으므로 홍성이 아뢴 것인데, 임금도 또한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 폐단은 끝내 바로잡지 못하였다.
이재협(李在協)을 필선으로, 홍계희(洪啓禧)를 예문 제학으로, 원의손(元義孫)을 겸 문학으로 삼았다.
8월 22일 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강세윤(姜世胤)의 직첩(職牒)을 돌려주고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처음 강세윤이 이천 부사(利川府使)로서 무신년139) 의 변란을 당하여 적괴(賊魁) 임서호(任瑞虎)를 체포하여 바쳤었다. 그리고 나서는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이름이 거론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오래도록 풀려나지 못하였다. 그뒤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에 의거하여 호현(湖縣)에 정배되었는데, 대신(臺臣)이 그의 이름이 누차 역적의 공초에 나온다는 것으로 다시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무오년140) 에 이르러 비로소 귀양에서 풀려났고 경오년141) 소결(疏決)할 때 탕척(蕩滌)시키라는 명이 있었으나, 정원의 복주(覆奏)로 인하여 그 명을 중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강세윤의 종자(從子)인 강완(姜俒)이 급제(及第)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그의 억울함을 아뢰자 임금이 문안(文案)을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판의금 홍계희(洪啓禧)가 아뢰기를,
"강세윤은 무신년에 적괴(賊魁)를 체포하였고 경오년에 탕척되었습니다. 대계(臺啓)에서 이른바 누차 역적의 공초에서 나왔다는 것은 바로 적괴 정세윤(鄭世胤)이 강세윤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잘못 전하여 들은 것이니, 뒤섞여 여러번 거론된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상세히 알고 있다. 이제 조사하여 아뢴 내용을 들어보니 대계(臺啓)의 간쟁은 과연 이름이 같기 때문이었다."
하고, 드디어 직첩을 돌려주라는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장령 구수국(具壽國)이 아뢰기를,
"일이 제방(隄防)에 관계된 것이니, 갑자기 고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의 이 청을 내가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하고, 드디어 체직시켰다.
칙사(勅使)가 도착해 있는 곳에 중로 문안사(中路問安使)를 보내라고 명하였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이 원접사(遠接使)의 이문(移文)을 의거하여 아뢰기를,
"경외(京外)에서의 연향(宴饗)·유관우(遊觀牛)·헌가(軒架)·나례(儺禮) 등의 절차를 칙사가 모두 감할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니, 청컨대 사신(使臣)을 보내어 치사(致謝)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23일 정미
홍명한(洪名漢)을 대사헌으로, 이최중(李最中)을 이조 참의로, 이명준(李命俊)을 장령으로, 이헌묵(李憲默)을 필선으로, 이보온(李普溫)을 문학으로, 윤광소(尹光紹)를 공조 참의로 삼았다. 윤광소는 곧 윤광찬(尹光纘)의 아우인데 그의 형이 섬으로 귀양가 있다는 것 때문에 오랫동안 사적(仕籍)에 저지당하여 왔었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을 하고 우의정 김상복(金相福)도 또한 덧붙여 진달하니, 임금이 윤광찬은 감등(減等)시켜 육지로 나오게 하고 윤광소는 조용(調用)에 구애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호남(湖南)의 경시관(京試官) 정이환(鄭履煥)을 호연(湖沿)으로 귀양보냈는데, 역마(驛馬)를 함부로 탔기 때문이었다.
비국(備局)에 명하여 황구(黃口)의 첨정(簽丁)을 금하는 것을 엄중히 신칙하게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4일 무신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의릉(懿陵)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8월 25일 기유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장렬 왕후(莊烈王后) 기신제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임금이 춘방관(春坊官) 이헌묵(李憲默)을 소견하였는데, 그가 선정(先正)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옥산 서원(玉山書院)의 산수(山水)의 경치가 좋은 것에 대해 묻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도산 서원(陶山書院)의 예(例)에 의거하여 그림으로 그려서 올리게 하였다.
8월 26일 경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과장(科場)에서 시권(試券)을 일찍 바치는 폐단을 안타깝게 여겨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하였다. 이제부처 친림(親臨)하는 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 이외의 모든 대과(大科)·소과(小科)의 초시(初試)·회시(會試)에 시각을 정하여 시각이 되기 두 시간 전에 수권관(收券官)을 불러서 들어오게 한 다음 바치라고 외친 뒤에 바치게 하며 바치라고 외치기 전에 시권을 바친 자는 시각 뒤의 예(例)에 의거하여 거두어가지 말게 하였다. 그리고 다섯 구(句) 이상이 순전히 똑같은 경우에는 주객(主客)을 막론하고 모두 낙과(落科)에 두게 하였다. 이상과 같이 과조(科條)를 엄격히 제정하도록 명하였다.
특별히 윤학동(尹學東)을 대사간에 제수하였다.
8월 27일 신해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죄인 심내복(沈來復)을 국문하였다. 심내복은 곧 을해년142) 의 역적 심정연(沈鼎衍)의 조카이다. 처음에 연좌(緣坐)되어 해도(海島)에 귀양가 있었는데 대계(臺啓)가 누차 국문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잡혀옴에 이르러 임금이 친히 국문하니, 심내복이 공초하기를,
"정축년143) 부터 연좌 죄인(緣坐罪人) 조영득(趙榮得)·유동혼(柳東渾) 등 섬에 같이 있는 자들과 함께 교결하여 나라를 원망하면서 불궤(不軌)를 도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군대를 모집하여 상고(商賈) 모양으로 위장시켜 몰래 바다를 건너가서 먼저 호남(湖南)의 고을을 습격하고 거기에서 군기(軍器)와 군량(軍糧)을 취득한 다음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묘사(廟社)를 범하여 불을 지르고 귀양가 있는 종신(宗臣) 이훈(李壎)을 추대(推戴)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겨울 신이 과연 이훈을 찾아가서 만났습니다만, 계획이 성사되기도 전에 먼저 나포(拿捕)되었습니다. 역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밤에 혜정교(惠政橋)에 나아가 다시 심내복을 국문하면서 내응(內應)하기로 한 사람은 누구이냐고 신문하니, 심내복이 좌의정 윤동도(尹東度)를 원인(援引)하였다. 이는 대개 윤동도가 을해년 간장(諫長)으로 있을 때에 그의 숙부(叔父)인 심정연(沈鼎衍)을 논계(論啓)하였기 때문에 원한을 품어서인 것이다. 임금이 엄중히 형신(刑訊)하니, 곧이어 사람을 무함했다고 자복하였다. 윤동도가 반열에서 나와 거적을 깔고 엎드려 명(命)을 기다리니, 임금이 인견하고 위유(慰諭)하였다. 이어서 심내복을 정형(正刑)144) 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할 것을 명하였다.
사헌부 【대사간 홍명한(洪名漢)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기언표(奇彦杓)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역적 심내복(沈來復)의 공초(供招)에서 지난 겨울 이훈(李壎)을 만나기 위해 갔었다고 한 것은 더욱 흉악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어서 그의 아우에게 왕래한 것에 견줄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두 고을의 수령(守令)이 방자한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둔 것은 참으로 한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청컨대 정의(旌義)와 대정(大靜)의 전후 수령을 모두 잡아다 신문하여 엄중히 조처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역적 심내복이 섬에 있는 흉얼(凶孼)들과 함께 체결하여 모의(謀議)한 자취가 남김없이 탄로가 났으니, 어찌 상고할 만한 문서(文書)가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잡아올 때에 한 장도 수색하여 가지고 온 것이 없으니, 일이 매우 허술합니다. 청컨대 해당 도사(都事) 정계(鄭棨)를 잡아다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어서 제주(濟州)의 여러 죄인들 가운데 심내복의 공초에 거론된 자들은 모두 체포하여 오게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천대(林天大)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문사 낭청(門事郞廳) 홍낙순(洪樂純)이 아뢰기를,
"역적 심내복은 곧 하나의 효경(梟獍)145) 의 종자인데 대정 현감(大靜縣監) 최종신(崔宗信)이 평민(平民)과 똑같이 대우하여 준례에 따라 적곡(糴穀)을 나누어 주어 편안히 거처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잡아다 신문하여 엄중히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8월 28일 임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탄신(誕辰)의 하례(賀禮)를 올릴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홍봉한 등이 입대(入對)하여 극력 청하니, 임금이 드디어 탄신일 2일 뒤에 하례를 받겠다고 명하였다. 위로는 추모(追慕)하는 뜻을 펴고 아래로는 뭇 신하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엊그제 친히 국문하여 죄인을 잡아내어 쾌히 왕법(王法)을 바루었으니, 이는 실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단지 여러 역적들이 체포된 뒤에 혹시 원한을 품고 독기(毒氣)를 부려서 죄없는 이에게 미치게 된다면 실정에는 비록 의심이 없지만 자취는 실로 밝히기 어렵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예컨대 김화진(金華鎭)이 이우화(李宇和)의 지친(至親)이 되고 송문재(宋文載)가 저 무리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은 탓으로 지금 바야흐로 함께 제주(濟州)에 정배(定配)되어 있습니다만, 역적들 가운데 혹시 이 사람들에게 원혐(怨嫌)을 품고 무망(誣罔)하기에 이른다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이런 점을 성충(聖衷)에 유념하시어 역적의 공초가 외람스레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않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헌부 【집의 이수봉(李壽鳳)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삼가 대사헌 홍명한(洪名漢)이 아뢴 내용을 보건대 지난 겨울의 정의(旌義)·대정(大靜) 두 고을의 수령이었던 자를 잡아다 신문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제주는 이미 두 고을로 나누어 관할하고 있으니 모든 죄인에 대한 조절(操切)과 금방(禁防)의 책임을 유독 두 고을에만 떠맡기는 것은 부당합니다. 청컨대 해당 목사(牧使) 신광익(申光翼)을 잡아다 신문하여 엄중히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전계 가운데 이창익(李昌翼)·이양조(李陽祚)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고 추후에 명하였다.
이창수(李昌壽)·서명응(徐命應)·이심원(李心源)·김화진(金華鎭)·송문재(宋文載)·홍낙명(洪樂命)·정창성(鄭昌聖)·정항령(鄭恒齡)·정술조(鄭述祚)·이헌경(李獻慶) 등을 귀양에서 석방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大臣)의 말을 따른 것이다.
8월 29일 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을해년146) 의 일에 연좌(緣坐)된 것은 이것이 어떤 역적인가? 그런데 그런 그들을 사사로이 왕래하면서 서로 서찰을 통하게 하였으며 적곡(糴穀)을 나눠준 데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제도(諸道)에 엄중히 계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른 경계(境界)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라. 비록 노예로 만들지는 않았으나 또한 토반(土班)과의 결혼은 금하고 있으니, 이를 범하는 자는 드러나는 대로 엄중한 형신을 가하고 해당 수령(守令)은 종신(終身)토록 금고(禁錮)시키라."
하였다. 집의 이수봉(李壽鳳)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연좌된 역얼(逆孽)들을 먼 섬에 나누어 정배(定配)하여 서로 교통하는 것을 방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김주태(金柱泰)의 일은 정지하였다.
8월 30일 갑인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뜰에 나아가 태묘(太廟)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이정철(李廷喆)을 대사간으로, 유사흠(柳思欽)을 사간으로, 남학종(南鶴宗)을 헌납으로, 홍응보(洪應輔)를 정언으로 삼았다.
행공(行公)하는 대간(臺諫)이 출입할 적에는 공복(公服)을 착용하라고 명하고, 이를 어기는 경우에는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게 하였다. 대저 대신(臺臣)이 조정을 출입할 때에는 감히 공복을 벗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구전(舊典)이다. 중간에 폐기하고 행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회복시키라고 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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