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1763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9.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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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을묘

일식(日蝕)이 있었다.

 

9월 2일 병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왕세손(王世孫)을 시좌(侍坐)하도록 명하고 《맹자(孟子)》의 우산장(牛山章)을 강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산(山)도 성품[性]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장차 사람의 성품을 말하려 했기 때문에 먼저 산의 성품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관동(關東)의 네 고을의 가장 극심한 수재(水災)를 입었으므로 도신(道臣)이 새 환곡(還穀)을 절반을 감하여 대봉(代捧)하게 해줄 것을 장청(狀請)하니, 임금이 먼저 구포(舊逋)를 모두 견감(蠲減)시킬 것을 허락하고, 왕세손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구포를 정지하는 것은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경용(經用)을 잇대지 못할 경우에는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백성이 넉넉하게 되면 임금이 어찌 넉넉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
"요순(堯舜) 이후에 다시 요순 같은 임금이 없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욕(私慾)이 〈본성(本性)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하자, 임금이 잘한다고 칭찬하고서 말하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너는 힘쓸지어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일찍 바치는 시권(試券)은 취하지 말고 일심(一心)으로 공정하게 하라고 증광 초시(增廣初試)의 고관(考官)들을 면대하여 계칙시켰다. 이때 경과(慶科)를 설행하였다.

 

9월 3일 정사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9월 4일 무오

청(淸)나라의 봉전 칙사(封典勅使)가 나왔다. 왕세손에게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하사하였다. 임금이 곤복(袞服)을 갖추고 모화관(慕華館)에서 칙사(勅使)를 맞이하였는데, 왕세손도 수가(隨駕)하였다. 돌아와서는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의식(儀式)대로 향례(享禮)를 설행하였다.

 

9월 5일 기미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임금이 관소(館所)에 거둥하여 청(淸)나라의 칙사(勅使)에게 위로연(慰勞宴)을 베풀었다. 저녁에 환궁(還宮)하였다. 진하(陳賀)하는 교서(敎書)를 반포하기를,
"왕은 이르노라. 청궁(靑宮)147)  의 호칭이 정하여졌으니 해동(海東)에 태양이 거듭 밝은 빛을 발하고 자고(紫誥)148)  의 큰 은혜 베풀기 위해 상국(上國)의 사신(使臣)이 멀리에서 이르렀다. 더없는 총광(寵光)을 받았기에 이를 널리 고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가 천만년토록 이어갈 것을 걱정하였는데, 다행히 문손(文孫)149)  이 12세가 되었다. 열성조(列聖祖)께서 상서로운 복을 내려주시는 경사(慶事)를 받들었으니 진실로 한관(漢觀)150)  에 어린 서기(瑞氣)와 합치되고, 만년(晩年)에 품에 안는 기쁨을 충족시켜 주었으니 실로 주가(周家)151)  의 통서(統緖)를 전한 것과 들어맞는 일이다.
아! 무럭무럭 숙성한 것은 뛰어난 자질을 타고 났고 애연(藹然)한 효제(孝悌)는 본심(本心)에 뿌리한 것이다. 총명하여 뛰어나게 달통한 식견(識見)은 하늘이 만들어준 것으로 어릴 때부터 그러하였으며, 온화하고 문아하여 일취 월장하는 공부가 날로 환히 드러나는 것은 몽양(蒙養)하는 방도를 극진히 해서인 것이다. 나라의 복록(福祿)을 태산의 반석처럼 튼튼히 한 것은 계체(繼體)의 표상(表象)에서 증험할 수 있고, 정기(鼎器)152)  를 이어갈 국본(國本)을 정한 것은 진실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는 마음에 부합되는 일이다. 원복(元服)을 입고 주량(舟梁)153)  의 의식을 거행하니 엄연(儼然)히 성인(成人)의 책임을 지게 되었고, 벽옹(辟雍)154)  에 들어가 반교(泮橋)에 둘러서서 강(講)하는 내용을 들으니 모두들 전학(典學)의 공부를 우러르게 되었다. 아름다운 자태가 이극(貳極)155)  의 존위(尊位)에 오르게 되었으니 큰 통서(統緖)가 삼종(三宗)156)  의 맥을 잇게 되었다. 정일(精一)의〈심법(心法)으로〉 서로 전수하니 우모(禹謨)157)  를 이어서 후손을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임금의 자리는 신인(神人)이 의지하는 것으로 경계하니 탕손(湯孫)158)   처럼 선대(先代)의 공렬을 크게 드러내게 될 것이다. 저위(儲位)는 잠시도 비워둘 수 없는 것이지만 봉호(封號)를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대방(大邦)159)  에 청하는 것은 예(禮)에 있어 옳은 일이고, 이전(彛典)을 헤아려보니 원하는 것은 반드시 따라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다행히 황화(皇華)160)  가 빨리 내림(來臨)하여 비로소 총명(寵命)을 크게 반강(頒降)하게 되었다. 사륜(絲綸)을 반포함에 있어 경사(經史)를 고증하여 명호(名號)를 정하였고, 고책(誥冊)을 환히 전하면서 비단 면복(冕服)까지 풍성하게 내렸다.
일인(一人)161)  의 경사(慶事)를 생각하니 준명(駿命)이 새롭고, 백록(百祿)을 끝없이 맞이하게 되었으니 홍업(鴻業)이 공고하여질 것이다. 전성(前星)162)  이 찬란한 빛을 더하니 법복(法服)의 무늬가 환히 눈부시고, 온 방역(邦域)이 기쁨을 함께 하니, 진심에서 우러난 융사(隆私)163)  의 송축(頌祝)이 넘쳐흐른다. 이제 성대한 의식(儀式)을 거행함을 당하여 어찌 큰 은택을 널리 베푸는 것을 늦출 수 있겠는가? 이달 초5일 새벽녁 이전부터의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유(赦宥)토록 하라. 아! 원대한 계책을 길이 이어가게 되었으니 종사(宗社)가 영묘(靈妙)하게 장구히 이어갈 복(福)이요, 인덕(仁德)의 교화가 널리 흡족하니 바로 뇌우(雷雨)가 비를 내려 가뭄을 해소시키는 때를 만났다. 때문에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의당 알고 있어야 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홍계희(洪啓禧)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45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외교-야(野) / 어문학-문학(文學)


[註 147] 청궁(靑宮) : 동궁(東宮).[註 148] 자고(紫誥) : 칙서(勅書).[註 149] 문손(文孫) : 왕세손(王世孫).[註 150] 한관(漢觀) : 한(漢)나라 궁중(宮中).[註 151] 주가(周家) : 주(周)나라 왕실(王室).[註 152] 정기(鼎器) : 임금 자리.[註 153] 주량(舟梁) : 혼인(婚姻).[註 154] 벽옹(辟雍) : 태학(太學).[註 155] 이극(貳極) : 왕세자(王世子).[註 156] 삼종(三宗) : 효종·현종·숙종.[註 157] 우모(禹謨) : 우왕(禹王)의 모유(謨猷).[註 158] 탕손(湯孫) : 탕왕(湯王)의 후손.[註 159] 대방(大邦) : 청(淸)나라.[註 160] 황화(皇華) : 중국 사신.[註 161] 일인(一人) : 임금을 가리킴.[註 162] 전성(前星) : 왕세손을 가리킴.[註 163] 융사(隆私) : 융숭한 사은(私恩).

 

9월 6일 경신

예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이 아뢰기를,
"변두(籩豆)의 체양(體樣)에 대한 분촌(分寸)은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되어 있는데도 근래 제향(祭享) 때 사용하는 변두는 길이와 너비가 같지 않으니, 청컨대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이정(釐正)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이번에 제전(祭典)을 이정한 뒤에는 의당 기록하여 하나의 책(冊)으로 만들고 《태상지(太常誌)》라고 명명하여 영구히 준행하는 법제로 만드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선행(金善行)을 대사헌으로, 조석목(趙錫穆)을 정언으로, 홍낙인(洪樂仁)을 교리로 삼았다.

 

9월 7일 신유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고 육언(六言)으로 된 하나의 시구(詩句)를 써서 내렸다. 이는 곧 꿈속에서 지은 어제(御製)인 것으로 바로 존주 대의(尊周大義)의 뜻이다. 이어서 소지(小識)를 붙이고나서 연신(筵臣)에게 갱진(賡進)하라고 명하였다.

 

9월 8일 임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꿈에 인원 성모(仁元聖母)를 배알(拜謁)하고나서 추모(追慕)하는 하교를 내리기를,
"꿈속에서 자성(慈聖)을 모신 것이 마치 시탕(侍湯)할 때와 다름이 없으니, 어떻게 이 회포를 써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자성의 지친(至親)은 단지 두서너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고, 이어서 전 참판 김기대(金器大)를 조용(調用)하고 전 군수 윤동석(尹東晳)을 모두 입시하게 하였다. 김기대는 일찍이 대직(臺職)에 있다가 대처분(大處分)을 내릴 때 삭직(削職)된 사람이다. 그때 같이 죄를 받은 사람들은 아직 사유(赦宥)를 받지 않았는데 김기대만이 특은(特恩)으로써 먼저 서용된 것이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이 일을 말하니 임금이 노하여 파직시키자, 홍봉한은 황공하여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이 구해(救解)하자 임금이 드디어 그 명을 정지시키고 재촉하여 도로 들어오게 하였다. 홍봉한이 명을 받들고 나오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신은 함께 천직(天職)을 같이하는 사람이니 그 진퇴(進退)는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홍봉한은 경솔히 말한 한마디 말 때문에 갑자기 견척(譴斥)을 당하였다. 반나절 사이에 금방 파직시켰다가 금방 정지시켰는가 하면 이미 물러갔다가 다시 나아왔으니, 상하(上下)가 다같이 잘못한 것이다. 따라서 대신의 체모가 이제야 더욱 가벼워지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45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신은 함께 천직(天職)을 같이하는 사람이니 그 진퇴(進退)는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홍봉한은 경솔히 말한 한마디 말 때문에 갑자기 견척(譴斥)을 당하였다. 반나절 사이에 금방 파직시켰다가 금방 정지시켰는가 하면 이미 물러갔다가 다시 나아왔으니, 상하(上下)가 다같이 잘못한 것이다. 따라서 대신의 체모가 이제야 더욱 가벼워지게 되었다."

 

임금이 친히 억계잠(抑戒箴) 1편(編)을 지었는데,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내용164)  을 모방한 것이다. 그 잠(箴)에 이르기를,
"작고 작은 이 한몸이 삼재(三才)165)  에 참여되었는데 귀한 이나 천한 이나 품부받은 본성(本性)은 똑같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바로 이치와 욕심인 것이니, 털끝만한 차이로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이 결판난다. 본심(本心)은 지키면 보존되고 지키지 않으면 잃는 것이니 어떻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아!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엄격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옛 사람에게서 찾아보면 위나라 무공이 억시(抑詩)를 지었다. 스스로 경계(警戒)하기 위해 주야로 좌석의 곁에 붙여 둔다."
하였는데, 문장이 모두 여덟 구(句)로 되었다.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라고 명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9일 계해

어떤 별이 규성(奎星) 아래로 지나갔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청(淸)나라 칙사(勅使)를 전송하니, 칙사가 감격하여 우러러 사례(謝禮)하였다. 이어서 반송사(伴送使)에게 교자(轎子)를 타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흠차(欽差) 칙사가 모두 말을 타고 있는데 빈신(儐臣)이 어떻게 감히 교자를 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칙사가 간절히 청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청나라의 황제(皇帝)가 연로(沿路)에 폐단을 끼칠 것을 우려하여 칙사에게 말을 타고 갔다오게 하였으므로 임금이 빈사(儐使)도 또한 교자를 타지 못하게 한 것이다. 회가(回駕)할 때양경리(楊經理)166)  의 비각(碑閣)에 들렀는데 9월 9일에 양경리의 비(碑)를 보게 되었다는 것으로 느낌이 있어서 감(感)자를 압운(押韻)으로 하여 십운(十韻)을 짓고나서 수가(隨駕)한 여러 신하들에게 지어올리게 하였다.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선무사(宣武祠)167)  를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9월 10일 갑자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갔다. 강을 마치고나서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관동(關東)에 수재(水災)가 든 것 때문에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의 곡식 1만여 곡(斛)을 운송(運送)시켜 진구(賑救)하고 영남의 구포(舊逋)는 절반을 견감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또 호남의 재결(災結)로 9천 결(結)을 더 획급(劃給)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1만의 수량을 윤허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조문우(趙文宇)를 홍원(洪原)에 귀양보냈는데, 대직(臺職)에 대해 망설였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원인손(元仁孫)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11일 을축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갔다. 《중용(中庸)》의 구경장(九經章)을 강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한 이 말은 좋은 말이다. 주(周)나라의 유왕(幽王)이나 여왕(厲王) 같은 경우에는 훌륭한 신하가 있어도 또한 어떻게 할 수 없었으니, 임금이 있은 연후에야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얻느냐 잃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흥망이 결판나는 것이다. 이것이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저토록 훌륭한 문왕과 무왕으로 된 이유이고 유왕과 여왕이 저토록 나쁜 유왕과 여왕으로 된 이유인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을 마치고나서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집의 이수봉(李壽鳳)이 아뢰기를,
"청컨대 외방 고을의 기녀(妓女)를 데리고 사는 것을 금하는 법을 엄중히 신칙시켜 범하는 자가 있으면 중률(重律)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9월 12일 병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삼남(三南)의 수재(水災) 때문에 삼남의 도신(道臣)에게 칙유(飭諭)하여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게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정실(鄭實)이 아뢰기를,
"초지진(草地鎭)은 실로 해로(海路)의 요충지에 해당되는데 진졸(鎭卒)이 단약(單弱)하고 수비가 허술합니다. 이는 대개 목관(牧官)이 나뉘어 거처하고 있어 목자(牧子)로 들어간 진졸이 많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만호(萬戶)를 승격시켜 첨사(僉使)로 삼아서 목장(牧場)을 겸하여 관장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변이 없을 적에는 말을 먹이게 하고 사변이 있을 적에는 방수(防守)하게 하소서."
하니,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온편하겠다고 하니, 드디어 허락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변장(邊將)이 감목관(監牧官)을 겸하게 되면 태복시(太僕寺)의 수세(收稅)가 매우 허술하게 되니, 태복시로 하여금 자벽(自辟)168)  하여 택의(擇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그리고 타도(他道)의 변장으로서 감목관을 겸하는 경우에도 모두 자벽하게 하고 이어서 기록하여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김면행(金勉行)을 대사간으로, 홍낙순(洪樂純)을 부응교로, 김노진(金魯鎭)을 부교리로, 이보관(李普觀)을 보덕으로, 심발(沈墢)을 형조 참판으로, 이달(李鐽)을 전라도 병사로 삼았다.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가 ‘말을 삼가고 위의를 경건히 지니라.[愼話敬儀]’ 내용의 잠(箴)을 지어 어제(御製)에 갱진(賡進)하였고, 우참찬 홍계희(洪啓禧)도 팔언구(八言句)의 잠(箴)을 상소에 붙여서 진달하니, 임금이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9월 13일 정묘

우레하였다.

 

이날은 곧 성상(聖上)의 탄신(誕辰)이었다. 겸양하는 덕에 의거하여 칭하(稱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大臣)·종신(宗臣)과 2품 이상의 여러 신하들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직접 구장명(鳩杖銘)을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賡進)하게 하였다.

 

9월 14일 무진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태묘(太廟)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15일 기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이는 대개 탄신(誕辰)의 하례(賀禮)를 물려서 행한 것이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이번 문과(文科) 초시(初試)의 일소(一所)에서 시권(試券)을 거둘 적에 매우 난잡했다고 하니, 감시관(監試官)과 수권관(收券官)은 의당 모두 태거(汰去)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초시(初試)의 방(榜)에서 유생(儒生) 홍범구(洪範龜)를 발거(拔去)하라고 명하였다. 홍 범구가 일소(一所)에서 입격(入格)되었는데, 비봉(秘封)은 그의 성명(姓名)이었지만 전자(塡字)169)  는 여덟 군데[八唐]이었으며 시권(試券)은 다른 사람의 글인데다가 전자는 아홉 군데[九唐]이었다. 홍범구가 상시관(上試官) 조명채(曹命采)에게 이런 사실을 자백하였는데, 이때 조명채가 어떤 일 때문에 좌죄(坐罪)되어 파직되었으므로 상소하여 진달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시관(試官)인 안집(安𠍱)·김노진(金魯鎭)·홍검(洪檢) 등이 상소하여 스스로 잘 살피지 못한 죄를 송변(訟辨)하고 이어서 홍범구를 발방(拔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뒤 장령 이명훈(李命勳)이 상소하여 일소(一所)의 시관들을 모두 파직시키고 감찰(監察)·차비관(差備官)은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처리하게 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대체(臺體)에 맞는 말이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부수찬 윤면헌(尹勉憲)을 관동 위유 어사(關東慰諭御史)로 삼았는데, 원주(原州) 등 여러 고을에 수재(水災)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민인(民人)들에게 선유(宣諭)하여 안주(安住)하게 함으로써 유산(流散)되게 하지 말라고 하교하였다. 이어서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위무(慰撫)하여 안집시키게 하였고 또 정협(鄭俠)의 고사(故事)170)  에 의거하여 그림으로 그려서 올리게 하였다.

 

원의손(元義孫)을 응교로, 황인검(黃仁檢)을 판윤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대사성으로, 조돈(趙暾)을 좌윤으로, 김기대(金器大)를 우윤으로 삼았다.

 

9월 16일 경오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친림(親臨)하여 경조(京兆)의 사민(四民)들 가운데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차등 있게 쌀을 하사하였다. 하교하기를,
"왕자(王者)가 백성을 보살핌에 있어 어떻게 서울과 지방을 달리할 수 있겠는가?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분부하여 경오년171)  의 전례에 의거하여 저치미(儲置米)와 상진미(常賑米)로 서울과 똑같이 사민(四民)을 구휼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함경 감사 이창의(李昌誼)가 녹용(鹿茸)을 봉진(封進) 하면서 올린 장계(狀啓)를 열람하고나서, 하교하기를,
"제사에 녹해(鹿醢)를 쓰던 것을 장해(獐醢)로 대신하도록 할 것을 《태상지(太常誌)》에까지 기재하였는데, 이는 매우 명분을 바르게 하는 뜻이 아니다. 이제 녹용의 봉진으로 인하여 사슴이 없는데도 녹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따라서 《태상지》 가운데 노루로 대신하게 한 한 구절은 말거(抹去)하도록 이정(釐整)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가(貢價)를 참작하여 더 내림으로써 제향(祭享)에는 명분이 바르지 않은 탄식이 없게 하고 공인(貢人)에게는 억울함을 일컫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뒤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사슴은 노루와 달라서 많이 잡을 수가 없습니다. 황단(皇壇)과 종사(宗社)·문묘(文廟) 이외에는 청컨대 전대로 대봉(代捧)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을 보내어 경기전(慶基殿)의 영정(影幀)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는데, 이는 호남(湖南) 도신(道臣)의 장문(狀聞) 때문이었다.

 

9월 17일 신미

우레하였다.

 

임금이 석강(夕講)에 나갔다. 강을 마치고 나서 동경연 이은(李溵)이 예조 당상으로서 장릉(莊陵)을 봉심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한식(寒食)에 쓸 향과 축문(祝文)을 서리(書吏)를 시켜 보내는 것은 사체에 있어 미안스럽습니다. 청컨대 다른 능(陵)의 준례에 의거하여 본릉(本陵)의 관원으로 하여금 배진(陪進)하게 하소서. 그리고 예관(禮官)이 5년에 한 번씩 봉심하고 도신(道臣)이 춘추(春秋)로 봉심하게 되어 있는 것은 이미 기간이 너무 머니, 이 뒤로는 지방관(地方官)으로 하여금 3개월에 1차례씩 참봉(參奉)과 함께 봉심하여 도신(道臣)에게 전보(轉報)하면 도신은 그에 따라 즉시 장문(狀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청령포(淸冷浦)는 곧 당시에 〈단종(端宗)께서〉 임어하셨던 구기(舊基)인데 시든 풀과 거친 언덕뿐이어서 길가는 사람들이 서글픈 탄식을 하고 있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비(碑)를 세우게 해서 표지(表識)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월 18일 임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무신(武臣)의 삭시사(朔試射)를 행하였다.

 

대제학 이정보(李鼎輔)를 불러서 빈청(賓廳)에서 월과(月課)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한후락(韓後樂)이 으뜸을 차지하였고 그 다음을 차지한 사람은 이숭호(李崇祜)·유언호(兪彦鎬)인데,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임금이 우레의 이변이 있었다는 것으로 자신을 책망하는 하교를 내렸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좌의정 윤동도(尹東度), 우의정 김상복(金相福) 등이 모두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시켜줄 것을 청하고 이어서 상하가 서로 수성(修省)하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였다. 부제학 정존겸(鄭存謙)도 또한 차자를 진달하여 성덕(聖德)을 힘쓰고 간쟁(諫諍)을 받아들이고 기강을 진작(振作)시키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고 충신(忠信)을 힘쓰는 다섯 가지 조항으로 면계(勉戒)하니,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정원에서도 또한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이변을 없애는 계책에 대해 계진(啓陳)하였다. 그런데 옥당(玉堂)과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은 응문(應文)하는 차자를 올리지 않은 잘못으로 모두 파직시켰다.

 

부제학 정존겸(鄭存謙)을 파직시켰는데, 패초(牌招)를 어겼기 때문이었다. 조명정(趙明鼎)을 대신시켰다.

 

9월 19일 계유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서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박성원(朴盛源)을 집의로, 조경(趙擎)을 사간으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으로, 이정렬(李廷烈)을 지평으로, 남언욱(南彦彧)을 헌납으로, 조진형(趙鎭衡)을 정언으로, 홍낙인(洪樂仁)을 부교리로, 이재협(李在協)을 겸 문학으로, 황인검(黃仁儉)을 형조 판서로 삼고 홍명한(洪名漢)을 동지 부사(冬至副使)에 도로 차임하였다.

 

9월 20일 갑술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26장을 강하였다. 참찬관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이 장(章)에서 이른바 고명(高明)하고 박후(博厚)하다는 것은 바로 천도(天道)요 지도(地道)인 것인데, 끝에는 문왕(文王)의 〈덕으로써〉 결론지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군사(君師)의 지위에 계시니 마땅히 문왕을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점은 상하가 서로 면려해야 될 부분이다. 이제 장차 《맹자(孟子)》를 계속해서 강하려고 하는데 맹자가 사람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으면 〈천하를 통일시킬 수 있다고〉 한 말은 제선왕(齊宣王)과 양양왕(梁襄王)을 깨우친 것일 뿐만이 아니라 마치 나를 면대하여 한 말인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래에서 반드시 그런 마음을 받드는 사람이 있은 뒤에라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하늘이 덮어 주어도 땅이 실어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유최기(兪最基)를 판윤으로, 김선행(金善行)을 좌윤으로 삼았다.

 

도배 죄인(徒配罪人) 윤광찬(尹光鑽)을 석방하였다. 윤광찬은 그의 아우 윤광소(尹光紹)와 함께 위훈(僞勳)에 의한 증직(贈職)을 호적(戶籍)에 썼다는 것으로 좌죄되어 여러 해 동안 귀양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유(赦宥)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공의(公議)가 그래도 통분스럽게 여겼는데 뒤에 과연 대계(臺啓)가 발론되었다.

 

9월 21일 을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여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감시(監試)의 초시(初試)에 《소학(小學)》을 두 번 응강(應講)하게 하는 것은 《중용(中庸)》의 너그럽게 하고 급박하게 하지 않아서 용납하는 도량이 있다고 한 뜻이 아닌 것이다. 그 의도는 학문을 권장하는 데 있는 것인데 까다롭고 각박하게 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초장(初場)에 입격(入格)되었으면 다시 강하게 하지 말고 초장에 불통(不通)을 받았을 경우에는 종장(終場)에서 강할 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정식(定式)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우윤 조돈(趙暾)이 앞서의 일을 원인(援引)하여 상소하고 또 치사(致仕)시켜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상소를 물리치고 책유(責諭)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사간 조경(趙擎)이 상소하여 황해 병사 이주국(李柱國)이 편하고 가까운 것을 취택하여 칙행(勅行)이 있을 때에 어첩(御帖)을 군뢰(軍牢)들이 거접(居接)하는 방에다 봉안(奉安)하고 그 가운데서 기생(妓生)을 끼고 음악을 연주하며 놀았으니, 너무도 설만한 짓이었다고 탄핵하였다. 그리고 봉산 군수(鳳山郡守) 이길유(李吉儒)는 어첩 차원(御帖差員)으로서 함께 놀라운 거조를 했다는 것으로 모두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풍문(風聞)이라서 그대로 다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9월 22일 병자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갔다. 이날 《중용(中庸)》의 강을 끝마치고 계속해서 《맹자(孟子)》를 강하였다. 손수, ‘계미년 9월 22일 시강했는데 어린 세손이 시좌하였다.[癸未九月二十二日始講沖子侍坐]’는 열 네 글자를 책면(冊面)에 쓰고 나서 왕세손(王世孫)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내가 사복(嗣服) 한 처음에 이 책을 강하였는데, 네가 또 초도(初度)172)  의 달에 이 책을 시강(侍講)하였다. 할아비와 손자가 함께 강하게 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내가 너와 문란(問難)하려 하는데 되겠는가? 인(仁)은 무슨 물건이고 의(義)는 무슨 물건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측은(惻隱)이 인(仁)이고 수오(羞惡)가 의(義)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이(利)자가 원형 이정(元亨利貞)의 이(利)자와 뜻이 같은가, 다른가?"
하니, 대답하기를,
"원형 이정은 하늘의 네 계절을 가리키는 것이고 여기의 이(利)자는 곧 이욕(利慾)의 이(利)자입니다. 글자는 같지만 뜻은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잘한다고 칭찬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9월 23일 정축

소대(召對)를 행하고, 각사(各司)의 구임(久任) 낭관(郞官)을 소견하였다.

 

9월 24일 무인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송감(宋鑑)》을 강하였는데, 왕세손에게 시좌(侍坐)하라고 명하였다. 어필(御筆)로 써서 내리기를,
"나이 70세에 사서(史書)를 강하니, 글에 따라 감개(感慨)가 일어나서 특별히 너를 불러서 면칙(面飭)한다. 아! 원우(元祐)173)  ·소성(紹聖)174)   때의 일은 감계(鑑戒)가 될 만한 것이니, 너는 오늘의 이 하교를 마음에 새겨 잊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를 새겨 춘방(春坊)에 걸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송나라 영종(英宗)의 일에 대해 느낀 점이 있다. 영종은 번저(藩邸)에서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이었는데 나도 또한 그와 같으므로 매양 ‘삼가 나의 집을 잘 지키라.[謹守吾舍]’고 한 말을 외우고 있다. 송나라 신종(神宗)도 또한 훌륭한데 다스려지기를 구하는 것이 너무 급하여 그만 왕안석(王安石)175)  을 위임(委任)했다가 나라가 망할 뻔하였다. 선인 황후(宣仁皇后)가 어머니로서 아들이 한 일을 고친다고 하면서 가혹한 법을 제거하고 어진 이들을 진용(進用)하였으므로 이때를 원우지치(元祐之治)라고 일컫고 있다. 선인 황후가 붕(崩)할 때에 사반(社飯)을 먹게 되면 노신(老身)176)  이 생각날 것이라고 한 말은 그 말이 매우 슬프다. 철종(哲宗)이 또 선인 황후의 정치를 변경시키게 되자 송나라가 드디어 혼란하여졌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혜빈(惠嬪)은 훌륭한데 너의 외조부(外祖父)177)  가 지난번 차자(箚子)에서도 국가의 일에 대해 고심(苦心)하고 있었다. 너는 안으로는 어진 어미가 있고 밖으로는 외조부가 있는데 내가 40년 동안 조제(調劑)해온 것도 또한 고심한 데서 나온 조처인 것이다. 따라서 너의 외조부가 나를 섬기던 자세로 너를 섬기지 않는다면 이는 나라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부디 오늘의 이 하교를 잊지 말라."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감히 삼가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책에다 기록하게 하였다.

 

심이지(沈履之)를 대사성으로, 김재순(金載順)을 수찬으로, 홍낙인(洪樂仁)을 보덕으로, 이계(李溎)를 사서로, 심발(沈墢)을 대사간으로, 조문우(趙文宇)를 지평으로, 이택징(李澤徵)을 정언으로, 신응현(申應顯)을 장령으로 삼았다.

 

9월 25일 기묘

임금이 대신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근일 양사(兩司)에서의 계사(啓辭)가 없었습니다. 마침 선묘조(宣廟朝) 때의 저보(邸報)의 등본(謄本)을 보건대 양사에서의 계사가 없는 날에는 계사가 없다고 써서 대각(臺閣)의 거취(去就)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였었으니, 청컨대 지금도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조지(朝紙)에 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전민(廛民) 박무행(朴務行) 등 5인이 사사로이 주은(鑄銀)한 것 때문에 복주(伏誅)되었다. 이때 간민(奸民)이 은공(銀工)과 교결하여 야용(冶鎔)을 설치하고 연철(鉛鐵)을 섞어서 주조(鑄造)하였는데, 분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가 한 해가 지난 뒤에야 일이 발각이 났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고율(考律)하게 하니 사주전(私鑄錢)과 죄가 같다고 하였다. 임금이 상위(象魏)178)  에 법을 게시하였던 뜻에 의거하여 전인(廛人)들을 다 모아 놓고 정법(正法)에 처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사죄하는 뜻을 보였다.

 

9월 26일 경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엊그제 주은(鑄銀)한 죄인을 밤에 행형(行刑)한 것은 고법(古法)이 아니라는 것으로 형조 판서를 불러 책망하고 이어서 감형관(監刑官)을 죄주었다. 이 뒤로는 국수(鞫囚)라 할지라도 날이 어두울 경우에는 아침을 기다려 행형하게 하도록 구전(舊典)을 거듭 엄중히 신칙시켰다.

 

김시영(金始煐)을 대사간으로, 이보관(李普觀)을 집의로, 임일원(任一源)을 지평으로, 안윤행(安允行)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익보(李益普)를 지평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27일 신사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9월 28일 임오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죄인 이훈(李壎)·조영득(趙榮得)·유동혼(柳東渾)·윤득명(尹得明)·권유(權維)·권유(權褎)·이능효(李能孝)·신정관(申正觀)·이익좌(李翼佐)·윤연(尹戀)·윤몽정(尹夢鼎)·김제해(金濟海)·김운해(金運海)·이양조(李陽祚)·기언표(奇彦杓)·이창익(李昌翼)·임천대(林天大) 등을 친국(親鞫)하였다. 처음 역적 심내복(沈來復)이, 조영득 등이 흉얼(凶孼)로서 연좌(緣坐)되어 절도(絶島)에 귀양가 있으면서 매양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하였고 귀양가 있는 종신(宗臣) 이훈을 가서 엿보고서 그를 추대(推戴)하려는 모의를 하였다고 하니, 임금이 심내복(沈來復)을 주살(誅殺)한 후에 역적들을 체포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 잡아왔다. 조영득의 문서(文書)에 군기(軍器)에 관한 치부(置簿)가 있었는데 현리(縣吏) 김만거(金萬車)가 이를 빼어내려고 도모한 정상이 체포하러 간 금오랑(金吾郞)에게 현발(現發)되었다. 임금이 모두 친문(親問)하였다. 이훈이 공초하기를,
"신이 연전(年前)에 섬에서 병이 들었는데 치료할 수가 없었습니다. 역적 심정연(沈鼎衍)의 서질(庶姪)이 의리(醫理)를 자못 잘 안다고 하기에 과연 맞이하여 만났었습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따라왔었는데 누구냐고 물어보니 그의 적형(嫡兄)이라고 하였으며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조영득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군도목(軍都目)과 군기(軍器)에 관한 문서는 값을 받고 군기시(軍器寺)의 색리(色吏)에게 써서 주었는데, 이것이 회안 문서(會案文書)이기 때문에 다시 써서 바친 것입니다. 심내복은 애당초 서로 몰랐습니다."
하였다. 다시 형신(刑訊)을 가하여 추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윤득명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점고(點考)할 때 심내복을 보기는 하였습니다만 애당초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습니다."
하였다. 권유(權維)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심내복의 얼굴을 알지만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다시 추문하니, 권유가 공초하기를,
"심내복과는 마주 대하여 이야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조영득과는 서로 친합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권유(權褎)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심내복을 모릅니다. 점고할 적에 단지 그의 얼굴만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능효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어미 상(喪)을 당했을 적에 심내복이 조상(弔喪)하러 왔었습니다만, 이미 서로 조문(弔問)해야 하는 의리가 없었기 때문에 조문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뒤 신이 채복인(採鰒人)을 찾아서 그의 집에 갔었고 8년 동안 네 차례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마음 속이 썩은 고기를 먹은 것과 같아서 매양 스스로 좋지가 않았습니다."
하였다. 신정관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문서 속의 윤석(潤碩)은 곧 대정현(大靜縣)의 관노(官奴)인 조윤석(曹潤碩) 입니다. 그놈이 와서 대신 써주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과연 써서 두었었는데 그것이 수괄하는 문서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도류안(徒流案)의 일은 대정현의 하리(下吏)들이 쓸 수가 없어 승미(升米)를 신에게 주고 써서 달라고 했기 때문에 신이 써주었습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이익좌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심내복의 면모(面貌)를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니까?"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다시 이익좌를 추문(推問)하니, 공초하기를,
"조영득은 신이 과연 알고 있습니다. 군기책(軍器冊)은 색리(色吏)가 신에게 대신 써달라고 했기 때문에 책으로 매기 위해 두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조영득에게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윤연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점고할 때 심내복은 과연 서로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이 광주(光州)에 있을 적에 윤혜(尹惠)가 춘천(春川)에 있었는데 그들의 일을 어떻게 서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윤몽정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심내복의 면목(面目)을 신이 과연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김제해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곧 상한(常漢)과 똑같아서 남의 집 농사를 지어 주고 있기 때문에 글자를 하나도 모릅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김운해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만일 아는 일이 있으면 어찌 직고(直告)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이양조에게 문서 속의 괴탄(怪誕)스러운 글과 좌도(左道)179)  에 관한 글에 대해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물욕(物慾)을 없애려 했기 때문에 매양 염불(念佛)했던 것이요 사심(邪心)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윤지(尹志)·윤광철(尹光哲) 등 여러 역적과 혼인(婚姻)을 맺은 일에 대해 마음속으로 항상 한스럽게 여겼으므로 역적 윤지가 귀양가 있을 적에도 서찰을 왕래한 적이 없었습니다. 옥추경(玉樞經)180)  은 일찍이 읽은 적이 없었으며 주인(主人)이 기도(祈禱)하기 위해 두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기언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을해년181)  에 역적 윤지의 흉서(凶書)를 보았다는 것으로 추국(推鞫)을 받았었습니다만, 단서가 없다는 것으로 참착하여 처리하라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만일 진달할 것이 있었다면 을해년(乙亥年)에 친문(親問)할 적에 어찌 죄다 진달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였다. 이창익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윤지의 손녀(孫女)를 통혼(通婚)하여 왔는데 신은 문장(門長)이 아니기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서 신의 오촌숙(五寸叔)에게 문의하겠다고 말을 했더니, 과연 자중(藉重)하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임천대(林天大)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망화루(望華樓) 아래 시장(市場)에서 망화루 위의 괘서(掛書)를 박순재(朴順才)란 자가 떼어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때마침 관(官)이 텅비어 있었기 때문에 신이 좌수(座首) 유이태(柳頣泰)에게 전하였습니다. 신이 윤지와 함께 참여했었기 때문에 그때의 일을 죄다 알고 있었으므로 을해년(乙亥年)에 이미 모두 직초(直招)했습니다."
하였다. 죄수들을 모두 의금부(義禁府)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조재민(趙載敏)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조재민은 을해년의 역옥(逆獄)에 들어가게 되어 누차 형신(刑訊)을 받은 뒤에 참작하여 처리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하문하기를,
"지난번 윤광찬(尹光纘)을 육지로 나오게 할 적에 영상(領相)이 조재민의 일을 말하였었는데, 우선 버려두었었다. 여러 대신(大臣)들은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
하니, 영부사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당초에 참작하여 처리하였으니 죄명(罪名)이 심중(深重)한 데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동래(東萊)의 현판(懸板)에 대한 일은 마땅히 참작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신은 지난 기묘년182)  에 진달할 적에도 항상 용서하여 주라는 의논을 주장하였었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은 말하기를,
"범한 것이 관계되는 데가 없다면 어떻게 종전의 지론(持論)을 따라 일생토록 찬배(竄配)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감등(減等)시키는 예(例)에 따라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9월 29일 계미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죄인 윤득명(尹得明)·조영득(趙榮得)·신정관(申正觀)·유동혼(柳東渾)·이익좌(李翼佐)·권유(權褎)·기언표(奇彦杓)·권유(權維)·윤연(尹戀)·이창익(李昌翼)·윤몽정(尹夢鼎)·조경수(曹敬修) 등을 친국(親鞫)하였는데, 조영득·유동혼·조경수는 복주(伏誅)되었다. 윤득명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외촌(外村)에 거접(居接)하고 있었고 조영득 등은 성내(城內)에서 보수(保授)183)  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친밀 여부를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다시 추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윤득명을 원덕소(元德昭)와 면질(面質)시켰다. 원덕소는 대정현(大靜縣)의 아전이다. 원덕소가 말하기를,
"네가 우리들에게 마땅히 좋은 때가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하니, 윤득명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다. 조영득을 신문하니 공초는 전과 같았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신정관과 조영득을 면질시켰다. 신정관이 말하기를,
"네가 유동혼 등과 날마다 서로 왕래하면서 강익주(姜翊周)의 딸로 관기(官妓)가 되어 있는 월중매(月中梅)를 첩(妾)으로 만들어 속량(贖良)시키지 않았는가?"
하니, 조영득이 말하기를,
"속량은 그의 아비가 시킨 것이다."
하였다. 신정관이 말하기를,
"너의 삼형제가 서로 왕래하지 않았는가?"
하니, 조영득이 말하기를,
"우리 어미의 상사(喪事) 때 잠시 모였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기첩(妓妾)을 얻어서 면천(免賤)시켜 데리고 살았는데 본현(本縣)의 쉬재(倅宰)와는 첩동서(妾同婿)가 되어서 재물과 곡식을 서로 바꾸어 먹었습니다. 여러 죄인들과도 왕래하면서 주무(綢繆)하였습니다."
하니,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결안(結案)하였다. 신정관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조영득이 기녀(妓女)를 첩으로 삼았는데 기녀의 아비 강익주가 좌수(座首)였기 때문에 조영득이 관노(官奴)가 되어 있었으면서도 입역(入役)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읍쉬(邑倅)는 조경수(曹敬修)인데 조영득의 첩의 동생을 조경수가 첩으로 만들어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의 모의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이능효를 신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윤동혼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애당초 교결하여 모의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신정관과 유동혼을 면질시켰다. 신정관이 말하기를,
"네가 점고(點考)할 때 조영득의 무리와 같은 줄에 같이 앉아 있었지 않았느냐?"
하니, 유동혼이 말하기를,
"같이 점고를 받았기 때문에 같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니, 공초하기를,
"조영득과 같이 관노(官奴)가 되었기 때문에 이내 함께 주무(綢繆)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결안(結案)하였다. 이익좌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의 할아비가 정법(正法)에 처하여졌습니다만 어떻게 감히 억울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다시 형신을 가하여 추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권유(權褎)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유동혼의 무리와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왕래는 하였습니다만, 신은 그들의 동아리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권유(權褎)와 조영득을 면질시켰다. 권유가 말하기를,
"네가 마음 아프고 통분스럽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조영득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아프고 통분스러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게 되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기 쉬운 법이니 너는 조급하게 굴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권유가 말하기를,
"그렇다."
하니, 조영득이 말하기를,
"내가 너와 심내복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은 시기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기언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만일 알고 있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 감히 숨기고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권유(權維)를 신문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형신을 가하면서 추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윤연을 신문하니 공초는 전과 같았고 승복하지 않았다. 이창익을 신문하니 공초는 전과 같았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윤몽정을 신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조경수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엿본 읍기(邑妓)가 조영득 첩의 아우인 줄 알면서도 소생(所生) 때문에 데리고 왔으니,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전 대정 현감(大靜縣監) 조경수는 감히 죄인 조영득과 첩동서(妾同婿)가 되어 관곡(官穀)을 나이(那移)184)  하여 환급(換給)하였으니, 이는 국법을 무시한 것이다. 만일 방형(邦刑)을 빨리 시행하지 않는다면 쇠퇴한 세도(世道)를 어떻게 면려시킬 수 있겠는가?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
하고, 이어서 조영득의 아우 두 사람과 강익주·월중매도 모두 잡아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정광충(鄭光忠), 대사간 김시영(金始煐)을 파직시켰다. 정법 죄인(正法罪人) 조경수(曹敬修)의 형률(刑律)을 의논함에 있어 정광충 등의 의논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특명으로 파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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