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을유
남태제(南泰齊)를 대사헌으로, 홍중일(洪重一)을 대사간으로, 원의손(元義孫)을 부교리로, 김노진(金魯鎭)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가서 죄인 원덕소(元德昭)·윤득명(尹得明)·권유(權褎)·윤몽정(尹夢鼎)·김제해(金濟海)·윤연(尹戀)·임천대(林天大)·이능효(李能孝)·기언표(奇彦杓)·이창익(李昌翼)·이익좌(李翼佐)·이양조(李陽祚) 등을 친국(親鞫)하였는데 윤득명·권유·기언표·이창익·이익좌·이양조는 복주(伏誅)되었다. 이날 원덕소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윤득명·이익좌 등과 항상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스스로 ‘마땅히 좋은 때가 있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조경수(曹敬修)는 관청(官廳)의 쌀을 조영득의 집으로 수송(輸送)하였습니다."
하였다. 윤득명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좋은 때가 있을 것이라고 한 이야기는 일찍이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여 다시 추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세(身世)가 견디어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나라를 원망하였습니다. 신의 조부(祖父)는 협박에 의해 따른 것인데도 괴수(魁首)와 똑같이 죄를 받았기 때문에 나라를 원망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결안(結案)하였다. 권유를 신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형신을 가하여 다시 추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유동혼의 무리가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듣고 그들과 함께 수작(酬酌) 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역 부도로 결안하였다. 윤몽정을 신문하니, 공초는 전과 같았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김제해를 신문하니, 공초는 전과 같았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윤연을 신문하니, 공초는 전과 같았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임천대를 신문하니, 공초는 전과 같았다. 이능효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그들과 수작한 적은 있었습니다만 나라를 원망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형신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기언표를 신문하고 나서 실정을 알았다는 것으로 결안(結案)하였다. 이창익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윤광철(尹光哲)과 혼인을 맺었습니다."
하였다. 장전(帳殿)에서 친문(親問)하는데도 직초(直招)하지 않고 자중(藉重)하기 위해 남을 무함했다는 것으로 임금을 속이고 남을 무함했다고 결안(結案)하였다. 이익좌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의 조부(祖父)가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교문(敎文) 때문에 역률(逆律)을 받은 것은 애매한 일이기 때문에 항상 나라를 원망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역 부도로 결안하였다. 하교하기를,
"죄인 이양조는 다시 물을 만한 단서가 없으니 참작(參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서(文書)를 살펴보고 그의 공사(供辭)를 열람하여 보니 쓴 것마다 염불(念佛)이고 말마다 불어(佛語)였으니, 역종(逆種)일 뿐만이 아니라 곧 하나의 괴물(怪物)이다. 지난번 해서(海西)에 미륵불(彌勒佛)이라고 일컫는 자가 있었으므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법으로 다스렸었다.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방도에 있어 준례에 따라 구문(究問)할 수 없으니, 빨리 방형(邦刑)에 처하라."
하였다.
헌부 【지평 이보(李普)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법 죄인(正法罪人) 조경수(曹敬修)가 조영득(趙榮得)과 주무(綢繆)한 정상에 대해 대신(臺臣)이 된 사람은 의당 법에 의거 조사할 것을 청해야 하는데도 임금이 순문(詢問)하는 앞에서 모호하게 이야기하였으니, 전 대사헌 정광충(鄭光忠), 전 대사간 김시영(金始煐)은 파직만 시키고서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삭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윤광찬(尹光纘)은 경향(京鄕)의 장적(帳籍)에 모두 위훈(僞勳)에 의한 증직(贈職)을 썼으며, 과장(科場)의 비봉(秘封)에도 모두 썼으니, 정상이 교묘하고도 밉상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왕장(王章)을 피하여 단지 도배(島配)되는 것만으로 그쳤습니다. 이번의 대사(大赦) 때 특별히 광탕(曠蕩)시키는 은전(恩典)을 썼는데도 아무도 쟁집(爭執)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여정(輿情)이 더욱 격해지고 있으니, 청컨대 윤광찬을 풀어 주라는 명을 환수하시고 전대로 도배(島配)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정언 이택징(李澤徵)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제도(諸道)의 수재(守宰)들 가운데 역종(逆種)을 돌보아 구휼하는 자와 향품(鄕品) 가운데 폐족(廢族)과 혼인(婚姻)하는 자는 나타나는 대로 중죄(重罪)로 다스리겠다는 것으로 신칙(申飭)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조갑빈(趙甲彬)은 그의 형의 딸을 유동혼(柳東渾)의 아내로 삼는 것을 허락하여 기꺼이 과갈(瓜葛)185) 의 친의(親誼)를 맺었으니, 그의 마음이 이창익(李昌翼)과 같습니다. 잡아다 국문하여 엄중히 신문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을해년186) 이전인지 이후인지 알 수 없으니, 뒤에 있었는지를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소회를 진달하기를,
"윤광찬은 죄를 진 것이 가볍지 않으니, 갑자기 풀어 주어서는 안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날 죄인 권유(權維)가 물고(物故)되었다. 심지복(沈志復)을 교형(敎刑)에 처하였는데, 심 지복은 곧 심내복(沈來復)의 아우이다. 원덕소(元德昭)는 풀어 주었다.
10월 3일 병술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이능효(李能孝)를 친국(親鞫)하니, 공초하기를,
"조영득(趙榮得)이 감히 《천의소감(闡義昭鑑)》을 그르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그와 함께 난만하게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조영득이 스스로 점장이가 ‘40세 뒤에는 반드시 부귀(富貴)해진다.’고 했기 때문에 불측한 마음을 품었는데, 신이 조영득·유동혼과 주무하여 은밀히 교결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역 부도(大逆父道)로 결안(結案)하였다.
임금이 숭례문(崇禮門)에 나아가 죄인 이능효(李能孝)·윤몽정(尹夢鼎)·신정관(申正觀)·김운해(金運海)·윤연(尹戀)·김제해(金濟海) 등을 주참(誅斬)하였고, 모두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게 하였다. 회가(回駕)할 때 혜정교(惠政橋)에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죄인 임천대(林天大)는 전에 공초한 것과 다른 것이 없고 또 참작하여 처리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특별히 일률(一律)187) 을 용서한다. 종성부(鍾城府)의 종으로 삼으라."
하였다.
예조 참판 이은(李溵)이 아뢰기를,
"을해년188) 숭례문(崇禮門)에 전좌(殿座)하여 죄인을 정법(正法)에 처한 뒤에 즉시 고묘(告廟)·진하(陳賀)·반교(頒敎)를 행하였으니, 지금도 마땅히 전례에 따라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곧이어 익위사(翊衛司)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지금은 국시(國是)가 이미 정하여졌으니 《천의소감》이 더욱 분명하여졌다. 내일 금상문(金商門)에 전좌(殿座)하여 마땅히 백관(百官)과 유생(儒生)을 대대적으로 모아 놓고 반교(頒敎)하겠다."
하였다.
이수봉(李壽鳳)을 제주 위유 어사(濟州慰諭御史)로 삼고 이어서 시재(試才)하게 하였다. 이는 대개 새로 역변(逆變)을 겪어 도민(島民)들이 의구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역적 이훈(李壎)의 이름이 추대(推戴)한다는 데 거론되었으니 법(法)에 있어 의당 목을 베어야 하지만 그가 종친(宗親)이기 때문에 차마 법에 의거하여 처치하지 못하고 감사(減死)하여 거제(巨濟)에 찬배(竄配)하라고 명하였다.
헌부 【대사간 남태제(南泰齊)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이훈(李壎)은 역적 이탄(李坦)의 아우인데, 역괴(逆魁)로 추대하였다는 이야기가 심내복(沈來復)의 공초에서 긴요하게 거론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처 구문(究問)하기도 전에 갑자기 도배(島配)하라고 명하였으니, 청컨대 도배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이어서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히 국문(鞫問)하여 정법(正法)에 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대사간 홍중일(洪重一)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이훈이 조영득 등 8명의 역적과 난만하게 교통(交通)하였다는 정절(情節)이 심내복(沈來復)의 공초(供招)에서 이미 탄로가 났으니, 청컨대 죄인 이훈을 다시 국문하여 정법(正法)에 처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4일 정해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반교(頒敎)하기를,
"임금은 이르노라. 아! 방운(邦運)이 어려움이 많아서 난역(亂逆)이 멋대로 행해지고 있다. 신축년189) 에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가 나왔는데 이것이 한번 바꾸어져서 임인년190) 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이 되었고 이것이 다시 바꾸어져서 무신년191) 의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심유현(沈維賢)·박필몽(朴弼夢)이 되었고 이것이 세 번째 바꾸어져서 을해년192) 의 윤지(尹志)·이하징(李夏徵)·신치운(申致雲)·심악(沈)이 되었다. 그러나 상천(上天)이 묵묵한 가운데 돕고 조종(祖宗)의 영령(英靈)들이 오르내리면서 보살펴주심을 힘입어 전후의 역적들이 모두 왕장(王章)에 의해 복주(伏誅)되었으며 《천의소감(闡義昭鑑)》이 이루어지게 되자 의리가 아주 밝아져 태양이 하늘에 떠 있는 것과 같게 되었다. 따라서 여대(輿儓)193) 와 부유(婦孺)들도 환히 깨닫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조태구·유봉휘의 유종(遺種)들이 효경(梟獍)같은 마음을 고치지 않고 은밀히 흉역을 도모할 마음을 품을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다행히도 단서가 다 드러나서 역적들이 주륙(誅戮)을 받아 쾌히 전형(典刑)을 바루었으므로,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장보(章甫)들에게 고하노니, 분명히 잘 듣기 바란다.
아! 지금의 이 옥정(獄情)은 실상 심내복(沈來復)에게서 연유되어 발각된 것이다. 심내복은 을해년194) 의 역적 심정연(沈鼎衍)의 종자(從子)로서 연좌(緣坐)되어 탐라(耽羅)에 정배되었는데, 거기에서 여러 흉적의 유얼(遺孼)들과 한덩어리를 이루어 음모를 주무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흉악한 짓을 하였다는 것을 지난번 신국(訊鞫)할 즈음 흉역들 가운데 가장 완악하고 교활하여 큰 흉모(凶謀)를 품고 있던 자는 곧 일곱 명의 역적으로 조영득(趙榮得)은 조태구(趙泰耉)의 손자이고, 유동혼(柳東渾)은 유봉휘(柳鳳輝)의 손자이고, 윤득명(尹得明)은 윤성시(尹聖時)의 손자이고, 이익좌(李翼佐)는 이거원(李巨源)의 손자이고, 권유(權褎)는 권첨(權詹)의 손자이고, 권유(權維)는 권익관(權益寬)의 손자이고, 이능효(李能孝)는 이진유(李眞儒)의 종손(從孫)이고, 이흥효(李興孝)의 아우이다. 윤혜(尹惠)의 아우와 조카인 윤연(尹戀)·윤몽정(尹夢鼎), 김일경(金一鏡)의 조카인 김제해(金濟海)·김운해(金運海), 신천영(申天永)의 조카인 신정관(申正觀)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일곱 명의 역적에게 빌붙어 같이 해도(海島)에 있으면서 주무하여 서로 친하게 지냈다. 그리하여 머리를 모으고 은밀히 모의한 것과 우러러 살피고 굽어 획책한 것이 모두가 나라를 원망하는 말이고 흉역을 부릴 계책이 아님이 없었다. 더욱 통분스러운 것은 조영득·유동혼이 이에 감히 그들의 할아비의 흉역스런 소차(疏箚)를 변명(辨明)하면서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한 그것이다. 그리하여 《천의소감》에서 의리를 환히 변석(辨析)한 것을 원수처럼 여겨 서로 그르다고 하면서 공척(攻斥)하였다. 그리고 조영득·이능효가 은밀히 서로 주고받은 말은 지극히 흉악하고도 참혹한 것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진실로 신축년(辛丑年)·임인년(壬寅年) 이래 여러 흉적(凶賊)들의 음흉하고 패역스런 속마음이 하나로 관통되어온 소치인 것이니, 아! 차마 말할 수가 있겠는가?
윤득명·이익좌·권유·권유의 무리와 윤연·윤몽정·김제운·신정관의 부류들이 떼 지어 모여 취마(揣摩)195) 하고 뱀과 지렁이처럼 덩어리지어 뭉쳐졌다는 것이 남김없이 죄다 드러났다. 이창익·기언표에 이르러서는 윤지(尹志)의 인친(姻親)이요 혈당(血黨)이며, 이양조는 이명조(李明祚)의 아우로 또한 모두 정절(情節)을 숨기기 어려워 빨리 현륙(顯戮)에 처하였으니, 천리(天理)를 속일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내가 더욱 통분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는데 심내복이 일곱 명의 역적들과 함께 은밀히 모의하여 밤중에 이훈(李壎)을 방문한 지의(旨意)가 너무도 음흉하고 참혹하여 마치 조덕정(趙德鼎)이 은밀히 이탄(李坦)의 뜻을 염탐한 것과 너무도 가깝다. 그러나 나는 옛날을 생각하는 뜻에서 법대로 집행하라는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경수는 일찍이 대정현(大靜縣)을 맡고 있던 사람으로 조영득과 동서(同婿)가 되어 그에게 식량을 주어 먹게 하고 현리(縣吏)에게 부탁하여 숨기려 했는데 원덕소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를 알 수 있었겠는가? 그의 마음을 따져보면 조영득보다 더한 점이 있다. 애석한 것은 죄다 자백받지 못하여 해당되는 형률(刑律)을 통쾌히 시행하지 못한 그것이다.
아! 나는 늘 함육(涵育)하여 감싸줄 마음을 지니고서 효경(梟獍)같은 무리들로 하여금 마음을 고치기를 기대하여 왔는데도 추악한 종자들이 그래도 뒤를 이어 일어났다. 앞서는 역적 이색(李嗇)에 연유하여 발각되고 뒤에는 역적 심내복(沈來復)에 연유하여 탄로가 났으니, 건도(乾道)는 밝고 밝으며 천망(天網)은 넓고 넓어서 조마경(照魔鏡)을 높이 걸어놓은 것과 같아 도깨비가 피하여 도망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의소감》을 지은 것은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선하게 하여 장차 흉추(凶醜)들이 자취를 감추고 귀역(鬼域)들이 형체를 숨기게 되기를 바라서였는데, 어찌하여 요망한 난역의 무리가 또 번번이 기강을 간범하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다행스러운 것은 한번 심내복에 대한 계청(啓請)을 윤허하자 흉역의 정상이 한결같이 모두 드러났다는 그것이다. 이는 내가 아니라 곧 저 하늘이 시킨 것이다. 이제부터 효경의 남은 종자들이 장차 두려운 마음을 지니게 될 것이니, 《천의소감》의 의리가 더욱 환히 빛나게 될 것이다. 아! 중외(中外)에 있는 나의 대소 신료와 장보(章甫)들은 나의 이 말을 분명히 듣고 각기 스스로 면려하여 함께 마음과 힘을 합쳐 방가(邦家)의 일을 돕기 바란다. 때문에 이렇게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의당 잘 알고 있으라."
하였다. 【홍문관 제학 홍계희(洪啓禧)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48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어문학-문학(文學)
[註 18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190]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191]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192] 을해년 : 1755 영조 31년.[註 193] 여대(輿儓) : 하인(下人).[註 194] 을해년 : 1755 영조 31년.[註 195] 취마(揣摩) : 자기의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림.
임금이 교서(敎書)를 선포할 때에 유생(儒生)이 반열에 참여한 것은 3백년 동안에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으로 별과(別科)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서울에서는 임희증(任希曾)을 뽑고 지방에서는 정수덕(鄭粹德)을 뽑았는데,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특별히 이정철(李廷喆)을 대사간에 제수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 【대사헌 남태제(南泰齊)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심양복(沈陽復)은 심내복(沈來復)의 아우로 의술(醫術)에 정통하다고 하면서 이훈(李壎)의 집을 왕래하면서 심내복이 가서 염탐할 수 있는 계제(階梯)를 만들었으니, 그 사이의 주무한 자취에 대해 엄중한 구핵(究覈)을 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정의현(旌義縣)의 연좌 죄인(緣坐罪人) 심양복을 왕부(王府)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중히 국문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간원 【대사간 이정철(李廷喆)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임천대(林天大)를 이미 잡아왔다가 곧이어 정배시킨 것은 성상(聖上)의 살리기 좋아하는 덕에 나온 것입니다만, 이런 등류의 흉도(凶徒)들은 결단코 한결같이 용서만 하여주어서는 안됩니다.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환수하고 형률(刑律)에 의거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재차 참작하여 처리한 뒤에도 다시 쟁집(爭執)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정법(正法) 죄인 조경수(曹敬修)의 아들·아우·조카들을 권유(權維)의 예(例)에 의거하여 흩어서 정배(定配)시켰다.
특지(特旨)로 고몽성(高夢聖)을 승지로 삼았다. 고몽성은 기로과(耆老科)에 참방(參榜)되었는데, 자급(資級)을 뛰어 올려 이 직책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늙고 잔약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으로 비웃는 사람이 많았다.
10월 5일 무자
헌부 【지평 임일원(任一源)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무녀(巫女)가 사람에게 화를 끼치고 재물을 낭비시키게 하는 것은 실로 큰 폐해이니, 청컨대 전의 법금(法禁)을 신명(申明)시켜 도성(道城) 밖으로 쫓아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강원 도사(江原都事) 안겸제(安兼濟)는 과시(科試)를 관장함에 있어 공평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추잡한 비방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청컨대 삭직(削職)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잡아다가 신문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경수(曹敬修)는 죄를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곧 남쪽 지방의 천족(賤族)인데도 외람되이 기랑(騎郞)196) 을 거쳤으니, 관방(官方)197) 을 욕되게 한 것이 큽니다. 청컨대 그를 검의(檢擬)한 전관(銓官)은 파직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간원 【정언 이택징(李澤徵)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광사(李匡師)는 곧 이진유(李眞儒)의 조카이고 이능효(李能孝)의 숙부(叔父)이므로 속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역적 윤지(尹志)와 친밀하고 윤광철(尹光哲)과 주무(綢繆)하였으니, 이번에 이능효를 계칙한 글이 또 헤아리기 어려운 흉모(凶謀)가 아닌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청컨대 잡아다가 국문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6일 기축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처음에 윤광찬(尹光纘)이 위훈(僞勳)의 증직(贈職)을 쓴 일 때문에 경조(京兆)에 명하여 호적(戶籍)을 조사하여 아뢰라고 명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판윤(判尹) 구선행(具善行)이 호적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그가 위훈의 증직을 호적에 쓴 것은 다만 한 식년(式年)뿐이었습니다. 과시(科試)의 비봉(秘封)에 이르러서는 애당초 쓰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번의 식년뿐이었으면 이는 그의 아비가 살피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아비의 불찰로 인하여 그 아들에게 죄를 추급(推及)시키는 것은 왕정(王政)이 아니다. 처음 발계(發啓)한 사람이 사실과 틀리게 한 것이니, 연계(連啓)한 대신(臺臣) 임일원(任一源)을 체직시키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위훈에 의한 증직을 호적에 쓴 것은 조사하여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과시의 비봉에다가 썼는지 쓰지 않았는지를 호적을 조사하여서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구선행이 비봉에는 애당초 쓰지 않았다고 아뢴 것은 혹 풍문에 전해 들은 것에 의거하여 해명하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하구나, 장신(將臣)의 기탄없는 짓이여!"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49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위훈에 의한 증직을 호적에 쓴 것은 조사하여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과시의 비봉에다가 썼는지 쓰지 않았는지를 호적을 조사하여서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구선행이 비봉에는 애당초 쓰지 않았다고 아뢴 것은 혹 풍문에 전해 들은 것에 의거하여 해명하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하구나, 장신(將臣)의 기탄없는 짓이여!"
금부(禁府)에서 조갑빈(趙甲彬)을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조갑빈이 공초하기를,
"유동혼(柳東渾)과 혼인을 맺은 것은 계해년198) 에 있었으니, 을해년199) 뒤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참작하여 단지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킬 것만 명하였다.
예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이 경기전(慶基殿)을 봉심(奉審)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영정(影幀)의 뒷면에 좀이 쓴 부분은 의당 배접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내년에 수보(修補)하라고 명하였다. 구윤명이 또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호남(湖南)으로 갈 적에 금오(金吾)의 나졸들이 연로(沿路)에 폐단을 끼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해당 도사(都事)는 의당 엄중히 조처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도사들은 잡아다가 신문하고 나졸들은 엄중한 형신을 가한 다음 정배시키게 하였다.
10월 7일 경인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동향제(冬享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탐라(耽羅)의 군민(軍民)들을 위유(慰諭)하는 글을 친히 지었다. 그 내용은,
"왕은 이르노라. 아! 저 탐라섬은 실로 호남(湖南)의 웅주(雄州)로 열성조(列聖朝)의 깊은 인애(仁愛)가 영구히 남아있어 왕년의 성덕(盛德)이 아직도 흡족히 젖어 있는데, 능역(陵役)이 있을 때 와서 흙을 져나른 일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전(慈殿)께서 쌀을 하사한 일도 마치 어제의 일인 것만 같다. 아! 불곡(不穀)200) 에 수십 년 동안 임어(臨御)하였는데도 능히 그 덕의(德意)를 본받지 못하고 또한 음양(陰陽)을 잘 조화시키지 못하여 해마다 흉년이 겹쳤으니, 이는 나의 부덕한 소치인 것이다. 아! 저 작은 섬에 보리 농사가 또 흉년이 들었다고 하니, 장문(狀聞)을 읽을 적마다 그 고통을 내가 직접 겪는 것만 같은 마음이다. 저축된 곡식이 고갈되었으니 옥식(玉食)이 어찌 달갑겠으며, 죄적(罪謫)이 서로 잇따랐으니 주객(主客)이 함께 지쳤다. 그런데 효경(梟獍)의 유종(遺種)들이 숨어서 죄를 짓고 또 도민(島民)을 속여 미혹시켰으므로 체포가 좌수(座首)와 관리(官吏)에게까지 파급되었으니, 온 주(州)의 백성들이 어찌 소요(騷擾)스럽지 않았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잠을 자도 편안치가 않다. 이에 어사(御史)를 보내어 먼저 위유(慰諭)하고 이어서 시재(試才)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본주(本州) 백성들의 나라를 위한 충정을 깊이 유념해서인 것이니, 어찌 털끝만큼인들 의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 그대 도중(島中)의 대소 백성들은 모두 이 유시(諭示)를 듣고 각기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하라. 때문에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잘 알고 있도록 하라."
하였다. 이를 써서 어사 이수봉(李壽鳳)에게 주어서 보내고 이어서 연좌되어 귀양가 있으면서 죄과를 범한 사람을 염탐하여 먼저 효시(梟示)하고 나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10월 8일 신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증광과(增廣科)의 강경(講經)에 입격(入格)된 사람을 불러 들여서 잘 외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인적(李仁迪)·심흡(沈潝) 2인을 발거(拔去)하였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대술장(代述狀)을 조사하게 한 다음 고시(考試)를 엄중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시관(試官)들을 파직시켰다.
안복준(安復駿)을 집의로, 원의손(元義孫)을 사간으로, 조문우(趙文宇)·이종명(李宗明)을 지평으로, 이석재(李碩載)를 부교리로, 홍명한(洪名漢)을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10월 9일 임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특별히 이헌묵(李憲默)을 사간으로, 조경(趙擎)을 집의로 삼았다.
10월 10일 계사
지평 이종명(李宗明)이 상소하여 첫머리에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요도(要道)를 말하고 잇달아 북로(北路)의 흉황(凶荒)에 대해 진달하였으며 이어서 정평(定平)의 전 부사(府使) 조덕진(趙德鎭)·정극제(鄭克濟)와 현재 부사(府使) 황인영(黃仁煐) 등이 탐욕을 부리고 함부로 살인(殺人)한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언급하니 해부(該府)에다 잡아다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1일 갑오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이 역적 이훈(李壎)에게 해당되는 형률(刑律)을 시행하라는 것으로 구대(求對)하였으며, 옥당(玉黨)에서 또 차자(箚子)를 올렸으나, 임금이 모두 체칙시키라고 명하였다.
10월 12일 을미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이어서 근정전(勤政殿)의 구지(舊址)에 나아가 생원(生員)·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한 유생(儒生)들을 면시(面試)하여 정보환(鄭普煥) 등 12인을 발거(拔去)하였다. 이때 과시(科試)를 자주 설행하여 사습(士習)이 점점 경박하여졌고 간간이 글을 팔거나 대신 지어주는 폐단이 있었는데, 강(講)에 응하는 데 이르러서도 또한 사람을 시켜 대신하게 하였으므로 이따금 발각이 나서 죄를 받았다. 임금이 이를 매우 우려하였으나 면시(面試)가 박절(迫切)한 데 가깝다는 것으로 어렵게 여기자 단지 스스로 현고(現告)하라고만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이 아뢰기를,
"향유(鄕儒)들은 수고(首告)201) 하였는데 세가(勢家)의 자제들이 면하게 된다면 국가의 기강을 휴손시키는 것이 큽니다. 송나라에서 도곡(陶穀)202) 을 시험보인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면시법(面試法)을 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날 각각 장막(帳幕)을 설치하여 간사한 짓을 방지하였으며 차술(借述)을 수고(首告)한 자와 백문(白文)으로 시권(試券)을 바친 자에게는 모두 충군율(充軍律)을 적용하였다.
이응협(李應協)을 대사헌으로, 정하언(鄭夏彦)을 대사간으로, 남학종(南鶴宗)을 사간으로, 임희효(任希孝)·지응룡(池應龍)을 지평으로, 송담(宋霮)을 정언으로, 김노진(金魯鎭)을 부교리로, 김재순(金載順)을 부수찬으로, 송징계(宋徵啓)를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장령 신응현(申應顯)이 상소하여 삼사(三司)를 체직시키라고 한 명을 환수하라고 청하고 또 역적 이훈(李壎)을 형률(刑律)에 의거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엄중한 비답을 내렸다.
10월 13일 병신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제주(濟州)의 아전인 김만거(金萬車)·이완흥(李完興)을 친국(親鞫)하였다. 김만거·이완흥은 모두 읍리(邑吏)로서 조영득(趙榮得)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군기시(軍器寺)의 장부와 도류안(徒流案)을 조영득의 집에 두었다가 현발(現發)된 자들이다. 조사하여 본 결과 숨긴 실정이 없었으므로 모두 참작 처리하여 정배(定配)시켰다.
특별히 윤붕거(尹鵬擧)를 장령으로, 이재협(李在協)을 헌납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윤붕거(尹鵬擧), 교리 김노진(金魯鎭), 헌납 이재협(李在協), 수찬 김재순(金載順) 등이 번갈아 역적 이훈(李壎)에게 빨리 해당되는 형률을 시행하라고 청하였으며, 대신과 금오(金吾)의 여러 당상(堂上)들도 또 극력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4일 정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간과 옥당의 여러 신하들이 또 번갈아 역적 이훈(李壎)에게 빨리 해당되는 형률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5일 무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남학종(南鶴宗)을 집의로, 유사흠(柳思欽)을 사간으로, 홍낙순(洪樂純)을 보덕으로, 김노진(金魯鎭)을 겸 사서로, 정상순(鄭相淳)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심도(沁都)의 고(故) 충신 황선신(黃善身)·구원일(具元一) 두 사람의 자손을 변장(邊將)에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6일 기해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이훈(李壎)을 친문(親問)하였는데, 이훈이 오래도록 체옥(滯獄)되었는데, 죽지 않고 있었다. 임금이 차마 법에 의거하여 처치하게 할 수가 없어서 자처(自處)하게 하라고 하유하였으나,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팔의법(八議法)203) 을 논할 수 없고 삼척법(三尺法)은 엄중하여 굴할 수 없다는 것으로 또 연계(連啓)하면서 극력 간쟁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고 드디어 삼사를 모두 파직시켰다.
특별히 조숙(趙)·안집(安𠍱)을 승지로 삼았다.
전조(銓曹)의 당상(堂上)을 파직시켰다. 장통(掌通)204) 을 복구시킨 뒤 대선(臺選)이 난잡스러워 지응룡(池應龍)·박종량(朴宗亮)의 무리는 모두 향곡(鄕曲)의 천품(賤品)인데도 바야흐로 지평과 정언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월 17일 경자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 구대(求對)한 대신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이 이훈(李壎)을 주찰함으로써 왕법을 신장(伸張)시키라고 청하였다. 이로부터 연일 구대(求對)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관동 안집 어사(關東安集御史) 윤면헌(尹勉憲)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어사(御史)의 계문(啓聞)을 들으니 어떻게 옥식(玉食)을 먹을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견감(蠲減)시키는 정사가 없으면 이는 백성을 속이는 것이 된다. 일곱 고을의 결전(結錢)과 군포미(軍布米)는 감하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하라. 강릉(江陵)·영월(寧越)의 삼가(蔘價)는 사분의 일로 제감(除減)하여 받고 각처의 둔세(屯稅)도 또한 정퇴(停退)시키고 본도(本道)의 삭선(朔膳)과 삼명일(三名日)의 물선(物膳)도 내년 가을까지를 한정하여 봉진(封進)을 정지시키라."
하였다.
고(故) 대장(大將) 조동점(趙東漸)에게 증직(贈職)하고 관원을 보내어 사제(賜祭)하라고 명하였다. 처음 조동점이, 그의 사촌 조동정(趙東鼎)이 을해년205) 역옥(逆獄)에서 죽은 것을 통분스럽게 여겨 7일 동안 먹지 않다가 드디어 굶어서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그 정상을 아뢰니, 임금이 이를 불쌍히 여겨 직접 글을 지어 사제(賜祭)하였다.
10월 18일 신축
대사헌 이응협(李應協) 대사간 정하언(鄭夏彦) 등이 상소하여 이훈(李壎)을 주참(誅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 소장을 되돌려주고 모두 파직시켰다.
문과(文科) 복시(覆試)의 시관(試官)이 입시(入侍)하였다. 사간 유사흠(柳思欽)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광사(李匡師)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10월 19일 임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갑산(甲山) 등 고을에서 육사(六司)에 바치는 인삼(人蔘)·황기(黃芪)와 세폐(歲幣)를 감하라고 명하였는데, 도신(道臣)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다.
강원도의 첩별미(帖別米)·상진미(常賑米) 1천 석(石), 상별 잡곡(常別雜穀)·상진곡(常賑穀) 각 5천 석, 수어청(守禦廳)에서 관할하고 있는 둔세곡(屯稅穀), 양향청(糧餉廳)에서 관할하고 있는 둔곡(屯穀)을 일체 모두 본도(本道)에 획급하게 하였다. 그리고 공명첩(空名帖) 8백 장(張)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만들어 보내어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였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입격(入格)한 사람들을 면시(面試)하였다.
이조 참의 정상순(鄭尙淳)이 누차 소명(召命)을 어기고 명을 받들지 않자 파직시키고, 심이지(沈履之)를 대신시켰다.
10월 20일 계묘
어떤 별이 규성(奎星) 아래로 지나갔다.
황인검(黃仁儉)을 이조 판서로, 이창수(李昌壽)를 형조 판서로, 서명신(徐命臣)을 대사헌으로, 홍중효(洪重孝)를 대사간으로, 원의손(元義孫)을 사간으로, 강시현(姜始顯)을 장령으로, 김광위(金光緯)를 지평으로, 김회원(金會元)을 헌납으로, 김노진(金魯鎭)을 부교리로, 이재협(李在協)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0월 21일 갑진
우박이 내리면서 우레하였다.
대사헌 서명신(徐命臣), 사간 원의손(元義孫) 등이 연명(聯名)으로 소(疏)를 올려 역적 이훈(李壎)을 안율(按律)하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경기·황해 두 도(道)의 유생(儒生) 이현진(李顯禛) 등이 상소하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향(從享)시키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2일 을사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이 우레의 이변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시켜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 등의 허물이 아니다.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는 것이니, 서로 면려하는 방도를 상하가 함께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입시한 양사(兩司)에서 재이(災異)를 만났는데도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사간 원의손(元義孫) 등을 파직시켰다.
유사흠(柳思欽)을 사간으로, 홍낙순(洪樂純)을 부응교로, 윤면헌(尹勉憲)을 부수찬으로, 임일원(任一源)을 지평으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으로, 윤승렬(尹承烈)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증광 전시(增廣殿試)에 친림(親臨)하여 조덕성(趙德成) 등 53인을 뽑았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역적 이훈(李壎)을 빨리 왕부(王府)에 명하여 형률에 의거하여 처단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4일 정미
임금이 근정전(勤政殿) 구지(舊址)에 친림(親臨)하여 문무과(文武科)의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10월 25일 무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문무과(文武科) 출신(出身)들을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은 국기(國忌)여서 재계(齋戒)하는 중이기 때문에 술을 하사할 수가 없다. 대신 귤(橘)을 내리겠다."
하고, 손수 사언(四言) 한 구(句)를 써서 조덕성(趙德成)·서명선(徐命善)·김귀주(金龜柱) 등에게 각기 하사하였는데, 모두 예전에 면칙(勉飭)한 뜻을 생각해서였다.
특별히 삼가 현령(三嘉縣令) 조덕성(趙德成)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고, 김양택(金陽澤)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금영(禁營)·어영(禦營)의 향군(鄕軍)에 대해 이미 입번(立番)을 정지시켰으니, 훈국(訓局)의 군졸로 하여금 그 역사(役事)를 대신시켜야 합니다. 이는 참으로 치우친 고통을 당하는 것이어서 의당 참작하여 정하는 조처가 있어야 합니다. 양영(兩營)의 여수전(旅帥錢)을 훈국에 획급하여 그 노고에 보답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홍봉한이 또 아뢰기를,
"청천강(淸川江) 한 줄기가 안주(安州)를 둘러싸고 있어 하나의 큰 성지(城池)를 이루고 있습니다. 최초에 병영(兵營)을 그곳으로 옮겨서 설치한 것은 관방(關防)을 웅장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일찍이 강줄기가 길을 어긴 탓으로 선조(先朝) 무진년206) 에 대충 쌓는 역사(役事)가 있었습니다. 근래 듣건대 강물 줄기가 길을 어겼고 백성들이 생업(生業)을 잃게 되었으며 금대(襟帶)207) 의 형세로 또한 지리(地利)를 잃게 되었다고 하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공역(工役)이 거창하기는 하지만 의당 개축(改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특별히 김응순(金應淳)을 승지에 임명하였다.
임금이 정원에서 직무를 제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특별히 차대 승지(次對承旨)를 체직시켰다. 고사(故事)에 특교(特敎)가 있지 않으면 국기(國忌)의 정일(正日)에는 감히 차대(次對)를 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도, 이날은 일차(日次)라는 것으로 품하지 않고 모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다시 구전(舊典)을 신명(申明)시키라고 명하였다.
10월 26일 기유
금부의 죄인 이훈(李壎)이 물고(物故)되었다.
이은(李溵)을 이조 참판으로, 송문재(宋文載)를 대사간으로, 유사흠(柳思欽)을 집의로, 원의손(元義孫)을 사간으로, 이형준(李亨俊)·홍응보(洪應輔)를 지평으로, 남언욱(南彦彧)을 헌납으로, 임희효(任希孝)를 정언으로, 이상지(李商芝)를 부교리로, 김재순(金載順)을 수찬으로 삼았다.
10월 28일 신해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순강원(順康園)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해도 장차 저물어 가는데 내년은 곧 〈명나라가 망한지 2주갑(周甲)이 되는〉 갑신년이다. 어의동(於義洞)에 사는 한인(漢人)들은 곧 옛날 데리고 와서 머물러 살도록 명한 사람들이다. 내가 의당 소견하겠으니,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차등 있게 쌀을 하사하게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0월 29일 임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10월 30일 계축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지영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송원통감(宋元通鑑)》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길게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송나라 고종(高宗)이 악비(岳飛)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천재(千載) 뒤에도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분개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하고, 이어서 제문(祭文)을 지어 내린 다음 승지 정상순(鄭尙淳)을 보내어 영유(永柔)의 와룡사(臥龍祠)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와룡사가 예전에는 이름이 없었는데 이날 임금이 삼충사(三忠祠)라고 명명하고 어필(御筆)로 그 편액(扁額)을 썼다. 이는 제갈 무후(諸葛武侯)208) 악무목(岳武穆)209) 문신종(文信公)210) 을 아울러 제향(祭享)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양택(金陽澤)을 판윤으로 삼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1763년 12월 (0) | 2025.10.09 |
|---|---|
|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1763년 11월 (0) | 2025.10.09 |
|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1763년 9월 (0) | 2025.10.09 |
|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1763년 8월 (0) | 2025.10.09 |
|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1763년 7월 (0) | 2025.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