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1763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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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갑인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서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헌부 【장령 박규수(朴奎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군자 정(軍資正) 이정중(李廷重)이 찬선(饌膳)을 감한 봉가(捧價)로 하배(下輩)들에게 대신 잘 차려 먹도록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장령 윤붕거(尹鵬擧)가 상소하여 향사(享祀)할 때 전사관(典祀官)은 능관(陵官)과 함께 공복(公服)을 갖추고 향수(享需)를 살피게 함으로써 사전(祀典)을 중하게 할 것을 청하였고, 또 경향(京鄕)에서 상중(喪中)에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풍속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고, 또 금오(金吾)의 군졸 가운데 연로(沿路)에서 폐단을 끼친 자를 조사하여 다스림으로써 해도(海島)의 민인(民人)들을 위로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였다.

 

이최중(李最中)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본관록(本館錄)211)  을 행하라고 명하여 이헌묵(李憲默) 등 7인을 뽑았다.

 

황해도 감사가 중국 배[唐船]가 표류되어 왔다고 계문(啓聞)하니, 사행(使行)에게 맡겨 데리고 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일 을묘

한림 권점(翰林圈點)을 행하라고 명하여 유언호(兪彦鎬) 등 38인을 뽑았다. 승문원 정자 이진복(李鎭復)이 그 권점에서 누락되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진복은 선파(璿派)인데 ‘문무를 널리 선양했다.[文弘武宣]’고 한 것이 곧 옛날의 수교(手敎) 내용이다. 이후달(李厚達)도 또한 특별히 영선(瀛選)212)  에 제수하라. 이는 내가 사은(私恩)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곧 친척을 돈독히 한 성대한 뜻을 우러러 본받은 것이다."
하고, 이어서 어필(御筆)로 그의 이름에 권점을 치고 부시(赴試)하도록 재촉하였다. 소시(召試)에 친림(親臨)하기에 이르러서는 조준(趙㻐) 등 5인을 뽑았는데, 이진복은 백지(白紙)로 바쳤다. 그리하여 다시 설서(說書)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이진복은 곧 종신(宗臣)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의 아들이다.

 

김응순(金應淳)을 대사간으로, 김귀주(金龜柱)를 정언으로 삼았다.

 

도당록(都堂錄)213)  을 행하라고 명하여 김귀주(金龜柱) 등 7인을 뽑았다. 김귀주는 곧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아들인데, 급제(及第)한 지 10일도 안되었다. 서명선(徐命善)·이성원(李性源)·김익(金熤) 등도 또한 함께 선발되었는데, 모두 신방(新房)이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보다 앞서 한천(翰薦)214)  과 정랑(銓郞)의 선발을 파하고나서 관방(官方)215)  이 비로소 난잡하고 외람스러워졌으며, 옥당(玉堂)도 또한 무무(貿貿)216)  하게 되었다. 그러나 급제한 지 1년도 못되어 입록(入錄)되는 것을 당년록(當年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이것마저도 드디어 다 없어져 버렸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5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註 213] 도당록(都堂錄) : 의정부에서 홍문관의 교리·수찬을 선임하기 위한 제 2차의 추천 기록. 의정·참찬·이조 판서·참의 등이 모여 홍문록에 오른 명단에서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어 그 찬반(贊反)을 보이며, 이 결과를 임금에게 올리면 득점의 순위대로 교리·수찬에 임명함.[註 214] 한천(翰薦) : 한림(翰林)의 추천.[註 215] 관방(官方) : 관리가 자기 직무를 관장하는 법례.[註 216] 무무(貿貿) : 격식과 질서가 없음.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보다 앞서 한천(翰薦)214)  과 정랑(銓郞)의 선발을 파하고나서 관방(官方)215)  이 비로소 난잡하고 외람스러워졌으며, 옥당(玉堂)도 또한 무무(貿貿)216)  하게 되었다. 그러나 급제한 지 1년도 못되어 입록(入錄)되는 것을 당년록(當年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이것마저도 드디어 다 없어져 버렸다."

 

원의손(元義孫)을 응교로, 이성원(李性源)을 교리로, 김익(金熤)·서명선(徐命善)을 부교리로, 김귀주(金龜柱)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이들에게〉 나와서 숙배(肅拜)하라고 재촉하니, 김익 등이 모두 취직(就職)하였다. 이때 임금이 바야흐로 군강(君鋼)을 진작시키기 위해 위엄으로 동솔(董率)하였기 때문에 뭇 신하들이 모두 교령(敎令)을 봉승(奉承)하는 것으로 죄받는 일이 없기를 바랐기 때문에 비록 청요(淸要)의 선발이든 격외(格外)의 제수이든 또한 감히 사양하지를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침에 명을 들으면 저녁에 출사(出仕)하게 되었다.

 

11월 4일 정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11월 5일 무오

어떤 별이 북두성(北斗星) 아래로 지나갔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11월 6일 기미

임금이 육상궁에서 친제(親祭)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통신사(通信使)가 타는 배의 치목(鴟木)217)  이 부러져서 위험한 지경을 고루 겪었다고 하니, 배를 만드는 것을 구관(句管)한 자를 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통제사(統制使)와 감조관(監造官)은 의당 잡아다 처리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완진(趙完鎭)을 도배(島配)에서 옮겨 육지(陸地)로 나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조완진은 조재호(趙載浩)의 아들인데 일찍이 대계(臺啓)로 인하여 도배(島配)되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감등(減等)되었는데 며칠 안되어 곧바로 사유(赦宥)시켰다. 이는 그의 할아비인 조문명(趙文命)의 훈로(勳勞)를 생각하고 또 효순빈(孝純嬪)을 추념(追念)해서인 것이었다.

 

특별히 송문재(宋文載)를 승지에 임명하였다.

 

11월 8일 신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득일(李得一)을 정언으로, 윤승렬(尹承烈)을 교리로, 윤면헌(尹勉憲)을 보덕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우윤으로, 김귀주(金龜柱)를 겸 문학으로, 서명선(徐命善)을 겸 사서로, 이진복(李鎭復)을 설서로 삼았다. 이진복은 곧 특명에 의해 조용(調用)된 사람인데, 창제(唱第)218)  가 있은 지 겨우 10일이었다.

 

11월 9일 임술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체계(髢髻)의 구제(舊制)를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부인(婦人)들이 체계를 쓰는 것은 사치를 힘쓰는 것이고 허비되는 것이 많다는 것으로 일체 금지시키고 대신 족두(簇頭)의 법제를 쓰게 하였었는데, 족두라는 것은 곧 괵(幗)219)  이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임금도 또 족두는 궁양(宮樣)220)  과 구별이 없고 주패(珠貝)로 꾸밀 경우에는 그 비용이 체계와 같다는 것으로 다시 체계의 제도를 행하되 단지 가체(加髢)하는 것만을 금하게 하였다. 이때 임금이 마음을 다져 먹고 사치를 제거하기 위하여 연경(燕京)에서 무늬 놓은 비단을 사오는 것을 금지시키고나서는 또 왜인(倭人)에게서 주기(珠璣)를 사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당하관(堂下官)의 천홍포(茜紅袍)도 또한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으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속습(俗習)이 이미 고질이 되어서 한가지도 실효가 없었음은 물론 법령만 부질없이 어지러이 고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또 삼가(蔘價)가 근래 매우 높이 뛰고 있다는 것으로 유사(有司)의 신하에게 삼가를 참작하여 정하게 하여 오르내리는 일이 없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삼가는 더욱 뛰어올랐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내년의 원조(元朝)에는 하례(賀禮)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내년은 〈명나라가 망한 지 두 주갑(周甲)이 되는〉 갑신년이라는 것으로 황조(皇朝)를 생각하는 슬픈 마음에서 차마 하례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 내년 2월 11일은 곧 성상(聖上)께서 길례(吉禮)를 치른 주갑(周甲)이기 때문이었다. 휘령전(徽寧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0일 계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경연관(經筵官)과 여러 신하들에게 찬물(饌物)을 선사(宣賜)하였다. 노친(老親)이 있는 사람은 그 찬물을 소매에 넣어가지고 가서 드리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이지억(李之億)을 파직시켰다. 대사간 김응순(金應淳), 집의 유사흠(柳思欽) 등이 연장(聯章)을 올려 탄핵했기 때문이었다. 이지억이 서운관 제거(書雲觀提擧)로서 의당 잡과(雜科)의 시험을 주관해야 하는데도 아무 까닭 없이 대관(臺管)이 모두 모인 뒤에 곧바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이창수(李昌壽)를 대신시켰다.

 

11월 11일 갑자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제도(諸道) 가운데 재해(災害)를 입은 고을의 구포(舊浦)의 봉납(捧納)을 정지시켰다.

 

날씨가 춥다는 것으로 죄가 가벼운 죄수는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다.

 

조명채(曺命采)를 대사헌으로, 조경(趙擎)을 사간으로, 이석재(李碩載)를 문학으로, 홍낙성(洪樂性)을 호조 참판으로, 변치명(邊致明)을 우윤으로 삼았다.

 

11월 12일 을축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했다.

 

11월 13일 병인

황해도 유생(儒生) 박인(朴藺)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소현 서원(紹賢書院)에 추배(追配)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그 소장을 되돌려 주었다.

 

군자감 정(軍資監正) 이정중(李廷重)의 아들 이의한(李宜漢)에게 곤장(棍杖)을 치라고 명하였다. 이정중이 대신(臺臣)에게 탄핵을 받자 박규수(朴奎壽)가 그의 아들을 시켜 격쟁(擊錚)하여 송원(訟冤)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의 논평(論評)을 당한 사람이 아들을 시켜 격쟁하여 송원하게 하였으니, 그 폐단이 크게 우려된다."
하고, 드디어 곤장을 치게 하였다.

 

평안도에 과권(科券)을 환봉(換封)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되었다. 임금이 형률(刑律)을 감하여 종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11월 14일 정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17일 경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각 능전(陵殿)의 동지제(冬至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향관(享官)이 향(香)을 받을 적마다 임금이 전정(殿廷)에서 친수(親授)하기도 하고 길가에서 지숙(祗肅)하기도 했는데, 친수할 경우에는 친전향(親傳香)이라고 하고 지숙할 경우에는 향지영(香祗迎)이라고 하는 것을 통상의 법식(法式)으로 삼았었다. 그리하여 항상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이는 내가 추모(追慕)하는 뜻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하면서 대질(大耋)221)  의 나이에도 이를 그만두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5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註 221] 대질(大耋) : 70세.
사신(史臣)은 말한다. "향관(享官)이 향(香)을 받을 적마다 임금이 전정(殿廷)에서 친수(親授)하기도 하고 길가에서 지숙(祗肅)하기도 했는데, 친수할 경우에는 친전향(親傳香)이라고 하고 지숙할 경우에는 향지영(香祗迎)이라고 하는 것을 통상의 법식(法式)으로 삼았었다. 그리하여 항상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이는 내가 추모(追慕)하는 뜻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하면서 대질(大耋)221)  의 나이에도 이를 그만두지 않았다."

 

이날 이조 참의 심이지(沈履之)를 파직시켰다. 향관(享官)을 무신(武臣)으로 많이 차임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갔다. 강을 끝마치고 나서 제도(諸道)의 수령들 가운데 차원(差員)으로 올라온 사람들을 소견하고, 민막(民瘼)을 하순(下詢)하였다.

 

밤에 입직(入直)한 유신(儒臣)을 불러들여 《주역(周易)》의 복괘(復卦)를 강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남지(南至)222)  가 내일이기 때문이었다.

 

11월 18일 신미

전 판서 서명빈(徐命彬)이 졸(卒)하였다. 서명빈은 곧 고(故) 상신(相臣) 서명균(徐命均)의 아우이다. 부음(訃音)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염담(恬淡)하고 개결(介潔)한 것을 단지 이 사람에게서만 볼 수가 있었다. 지난번 포덕후(褒德侯)라고 명제(命題)한 것은 조경(躁競)223)  하는 세도(世道)를 위한 것이었다. 숭장하여 세도를 면려시키려면 이 사람을 버리고 누구를 취하겠는가? 절혜(節惠)224)  의 정사를 3개월 안에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19일 임신

송문재(宋文載)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11월 20일 계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지평 이형준(李亨俊)이 대신(臺臣)으로서 시골에 있으면서 규피(規避)하고 있는 자들을 감단하여 처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단하여 처리하는 율(律)이 있는가?"
하였다. 교리 서명선(徐命善)이 이미 계체(啓體)를 어겼는데다가 청한 율(律)이 더욱 대체(臺體)에 어긋났다고 아뢰어 파직시켰다.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죄인 조영집(趙榮集)·조영철(趙榮喆)·심양복(沈陽復)과 제주(濟州) 사람 강익주(姜翊周)·월중매(月中梅)를 친국(親鞫)하였다. 조영집·조영철은 조태구(趙泰耉)의 손자이다. 이보다 앞서 조영득(趙榮得)이 이미 역적 모의를 했다는 것으로 복주(伏誅)되었는데, 그의 공사(供辭)에 이 죄수들이 간련된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잡아왔는데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국문하게 된 것이다. 국문을 마치고 나서 조영철·조영집은 왕부(王府)에 가두게 하고, 심양복은 3차의 엄중한 형신을 가한 다음 흑산도(黑山島)에 보내어 종으로 삼게 하고, 월중매는 흑산도에 보내어 계집종으로 삼게 하고, 강익주는 2차의 엄중한 형신을 가한 다음 종성부(鍾城府)에다 기한을 정하지 말고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간원          【사간            박성원(朴盛源)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심양복(沈陽復)은 이미 심정연(沈鼎衍)의 조카이고 심내복(沈來復)의 아우이니, 심내복의 음흉한 정절(情節)을 반드시 모를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장전(帳殿)에서 엄중히 신문하였는데도 직고(直告)하지 않았으니, 매우 요악(妖惡)스럽습니다. 청컨대 심양복을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환수하시고, 다시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엄중히 신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죄인 월중매(月中梅)는 이미 조영득(趙榮得)의 첩(妾)이 되었으니 조영득의 정절(情節)에 대해 반드시 모를 리가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다시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한 형신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죄인 강익주(姜翊周)는 그의 공초(供招) 중에 ‘월중매와 조영득이 간통(奸通)한 뒤에 관(官)에 고발하여 벌을 시행하게 했다.’고 했는데, 여기에 숨긴 정상이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강익주를 철저히 신문하여 실정을 알아냄으로써 왕법(王法)을 바루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영득이 월중매를 첩으로 만든 뒤에 강익주가 관에 고발하였는데 대정 현감(大靜縣監)        유일장(柳一章)은 ‘관노(官奴)와 관비(官婢)들이 서로 간통하는 것은 본디 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단지 초달형(楚撻刑)만 시행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을 심상(尋常)하게 보아 넘기고 즉시 엄중히 다스리지 않았음은 물론, 그도 또한 조영득 첩의 사촌(四寸)과 몰래 간통했으니, 특별히 숨긴 정상이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전 대정 현감        유일장을 잡아다 국문하여 엄중히 신문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그뒤 조영집·조영철·심양복은 모두 형신을 받다가 죽었고, 강익주와 월중매는 처음의 전교(傳敎)대로 발배(發配)하였으며, 유일장은 파직시키고나서 풀어 주었다.

 

안집(安𠍱)을 대사간으로, 신응현(申應顯)·이명준(李命俊)을 장령으로, 임희효(任希孝)를 지평으로, 홍인한(洪麟漢)을 예조 참판으로, 조경(趙擎)을 집의로 삼았다.

 

11월 21일 갑술

한림 추소시(翰林追召試)를 행하여 송지연(宋志淵) 등 2인을 뽑았다. 송지연은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춘(同春)  【송준길의 호이다.】 의 후손이 우뚝하게 한시(翰試)에 참여되었으니, 기이하구나."
하였다.

 

11월 22일 을해

우레와 번개가 크게 쳤다.

 

이날 계복(啓覆)225)  을 행하였다. 대벽(大辟)226)  에 해당되는 사람은 3인뿐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죄를 범한 사람이 적은 것은 술을 금한 효과인가?"
하니, 좌우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엄중한 법으로 술을 금하였으므로 금주령을 범한 사람이 이따금 주사(誅死) 되었다. 또 인오(隣伍)를 서로 연좌시키게 하는 법을 만들어 한 집에서 금주령을 범하면 세 집이 같이 죄를 받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두려워 했는데도 뭇 신하들도 감히 간하는 사람이 없었다.

 

제도(諸道)에 칙유(飭諭)를 내리기를,
"계복(啓覆)에서 상명(償命)227)  할 사람이 2인에 불과하였다. 옛날 주처(周處)228)  는 하나의 용력(勇力)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그래도 한 마을을 위해서 두 가지 해를 제거하였었다. 아! 탐관 오리들과 간사한 향임(鄕任), 사나운 토호(土豪)들이 백성들의 해가 되고 있는 것이 산속의 호랑이나 물속의 교룡(蛟龍)과 다를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적곡(糴穀)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야흐로 한창인데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받아먹고 나서 잔약한 고할 데 없는 백성에게 옮겨서 징수하는 것도 또한 백성의 피땀을 착취하는 일단(一端)인 것이다. 내가 수의(繡衣)229)  를 보내어 스스로 염찰(廉察)할 것이니, 엄중히 계칙시켜 내가 임전(臨殿)하여 내린 유시(諭示)를 어기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재순(金載順)을 헌납으로 삼았다.

 

11월 23일 병자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갔다. 자신을 책망하는 하교를 내리고 3일 동안 감선(減膳)하였는데, 우레의 재이(災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승지와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동지(冬至)가 이미 지났으니 우레하는 것은 재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계(陳戒)하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였는데, 지경연 윤급(尹汲)만은 유독 아뢰기를,
"일양(一陽)이 생기기는 하였습니다만, 지금은 추위가 한창일 때인데 우레의 재변이 이와 같으니, 경척(警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1월 24일 정축

삼복(三覆)을 행하였는데, 대벽(大辟)230)  에 해당되는 죄수는 모두 3인뿐이었다. 임금이 그 가운데 두 사람은 사면시켰다.

 

헌부 【집의 조경(趙擎)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인신(印信)을 위조한 죄인 홍득원(洪得源), 아내를 죽인 죄인 이수득산(李數得山)을 참작하여 처리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고 형률(刑律)에 의거하여 처단(處斷)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발계(發啓)한 두 사람은 곧 임금이 사면시킨 사람이다. 간원 【 헌납 김재순(金載順)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경연 조운규(趙雲逵)는 병들었다고 핑계하고 강연(講筵)에 들어오지 않다가 이제 곧이어 입궐(入闕)하였으니, 의당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김재순이 또 아뢰기를,
"형조 판서 남태제(南泰齊)는 죄수의 형률을 의논할 때를 당하여 성상에게 가볍게 해주기를 청하였으니, 법관의 체통을 크게 잃었습니다. 의당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김재순이 조운규를 탄핵하고 나서 또 남태제를 논박하였다는 것으로 당심(黨心)이 있는가 의심하여 그의 치우친 마음을 책망하고 면관(免官)시켰다. 유신(儒臣) 이성원(李性源)과 윤승렬(尹承烈)이 나아가 말하기를,
"김재순의 말은 곧 관사(官師)가 서로 규계(規戒)하는 뜻에서 한 말이니, 죄주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윤승렬·이성원을 파직시켰다. 두 사람이 물러가고 나서도 임금이 윤승렬에 대한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윤승렬을 감옥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이 구해(救解)하니 임금의 마음이 조금 풀려서 드디어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그러나 김재순에게는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못하게 하는 형률을 가하였다.

 

경상 감사 김상철(金尙喆)을 발탁하여 한성 판윤으로 삼았다. 김 상철이 임오년231)  의 대대적인 진구(賑救)를 겪었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그의 공로를 아뢰면서 발탁하여 기용할 만하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상지(李商芝)·김노진(金魯鎭)을 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삼복(三覆)의 사수(死囚)가 단지 3인뿐인 것은 곧 사복(嗣服)한 뒤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으로 형조에 명하여 중외(中外)의 죄수들 가운데 의심스러워 결단하지 못한 채 오래도록 체옥(滯獄)된 자들은 모두 문안(文案)을 가지고 와서 아뢰어 결단하게 함으로써 영어(囹圄)가 텅 비게 하였다.

 

삼충사(三忠祠)에 치제(致祭)한 승지 정상순(鄭尙淳)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불러서 하문하였다. 하교하기를,
"제문(祭文)에 건륭(乾隆)의 연호(年號)를 쓰는 것은 매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이제부터는 유한(有漢)이나 유송(有宋)이라고 쓰고 단지 모월(某月) 간지(干支)만 쓰는 것을 법식(法式)으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5일 무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조 참의 정존겸(鄭存謙)을 경상 감사로, 안윤복(安允福)을 충청 병사로, 김회원(金會元)을 헌납으로, 신오청(申五淸)을 장령으로, 이석재(李碩載)를 수찬으로, 이익선(李益烍)을 설서로, 박성원(朴盛源)을 필선으로, 심이지(沈履之)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궁노(宮奴) 허신(許信)에게 형장(刑狀)을 가하였다. 허신은 곧 왕손(王孫)의 종인데, 일찍이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추조(秋曹)232)  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수안(囚案)을 임열(臨閱)하겠다고 명하였는데, 이를 보고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궁노(宮奴)가 이렇게 방자하게 날뛰니 국가에 법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군주가 되어 한(漢)나라 때의 일개 동선(董宣)233)  만도 못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엄중한 형신을 가하여 승복을 받아내도록 명하였다. 또 그가 궁(宮)을 지키는 중관(中官)이라는 것으로 역(驛)에다 편배(編配)시켰다. 이어서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을 불러서 하유하기를,
"가노(家奴)가 사람을 죽였는데도 내가 듣지를 못하였으니, 내가 매우 우려하고 있다."
하면서, 한참을 개탄하였다.

 

임인년234)  의 옥사(獄事)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숭조(李崇祖)의 아들 이인석(李麟錫)을 기록하여 변장(邊將)에 조용(調用)하고, 김수천(金壽千)과 궁녀(宮女) 묵세(墨世) 등의 가노(家孥)를 돌보아 구휼하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집의 조경(趙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충청 병사 이방엽(李邦曄)의 비장(裨將)이 화양 서원(華陽書院)에 들어가서 견여(肩輿)를 내라고 독책하자 원유(院儒)가 그런 전례가 없다고 하니, 노여움을 못이겨 돌입하여 상투를 틀어쥐고 끌고 다니면서 구타하였습니다. 이방엽은 주장(主將)이면서도 이를 징치(懲治)하지 않았으므로 사림(士林)이 매우 분개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의당 사판(仕版)에서 삭제시켜야 합니다. 진해 현감(鎭海縣監) 성야(成野)는 오로지 탐욕만 일삼기 때문에 아전들이 횡포를 부려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으니, 의당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수신(帥臣)에 대한 일은 파직시키고 성야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1월 26일 기묘

임금의 체후(體候)가 미령하였으므로, 약원(藥院)에서 이직(移直)하였다.

 

11월 27일 경진

왕세손(王世孫)이 창덕궁(昌德宮)에서 나아와 알현(謁現)하였는데, 임금의 체후가 미령하기 때문이었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이날 입진한 것이 모두 여섯 차례였다.

 

황인검(黃仁儉)을 서용하여 다시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특별히 홍낙순(洪樂純)을 사간으로, 이재협(李在協)을 헌납으로 임명하였다.

 

11월 28일 신사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강원도의 재해(災害)를 입은 고을의 적곡(糴穀)·신포(身布)·결전(結錢)을 받아들이는 것을 감하게 하였는데, 도신(道臣) 성천주(成天柱)의 청을 따른 것이다.

 

11월 29일 임오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어영 대장 김한구(金漢耉)를 소견하였다. 김한구가 강화(江華) 방수(防守)의 편의(便宜)에 대한 계책을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영종도(永宗島)는 이곳이 삼남(三南) 수도(水路)의 요충지이고 교동(喬桐)은 곧 양서(兩西)235)   수로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지금 수사(水使)가 교동에 있기 때문에 영종도에서 그 절제(節制)를 받고 있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긴급한 일이 발생했을 적에 품령(稟令)하기가 곤란합니다. 교동과 영종도를 나누어 좌·우 방어사(左右防禦使)로 삼고 진보(鎭堡) 가운데 교동에 가까운 것은 교동에 예속시키고 영종도에 가까운 것은 영종도에 예속시켜 강화를 호위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서 유수(留守)를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로 삼아 관할하게 한다면 실로 편의하겠습니다."
하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고(故)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계책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곳의 지형(地形)을 그려서 올리라고 명하였으나, 일이 결국은 정지되고 말았다.

 

청(淸)나라 사람들이 서강(西羌)236)  을 쫓아내고 땅 수천 리를 개척하였다. 이는 청나라의 달력을 가지고 온 재자관(齎咨官)이 한 말이다.

 

임금이 체후(體候)가 평복(平復)되었으므로 약원(藥院)의 직숙(直宿)을 철폐하였다. 예조(禮曹)에서 고묘(告廟)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10일 동안 직숙해야 비로소 칭경(稱慶)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일찍이 하교한 적이 있으니, 이를 고칠 수는 없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임금이 다시 말하기를,
"10일 동안 직숙하였다고 고묘(告廟)하는 것도 오히려 번독(煩瀆)스러운 것이다. 지금부터는 청(廳)을 설치하고 약(藥)을 의논한 경우가 아니면 한 달을 넘긴 뒤에야 비로소 고묘(告廟)하도록 하라."
하였다.

 

박성원(朴盛源)을 집의로, 남학종(南鶴宗)을 사간으로, 이계(李溎)를 문학으로, 서명신(徐命臣)을 공조 참판으로, 황인검(黃仁儉)·원인손(元仁孫)을 동경연으로 삼았다.

 

장령 강시현(姜始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개성 경력(開城經歷) 조태상(趙台祥)은 미세한 일 때문에 전(前) 감찰(監察)을 결박지워 곤장(棍杖)을 쳤으니, 듣기에 놀랍고 통분스럽습니다. 청컨대 삭직(削職)시키소서. 강동 현령(江東縣令) 박홍수(朴鴻壽)는 본가(本家)가 옆 고을이기 때문에 여러 족속(族屬)들이 정사에 간섭하고 있으며, 맹산 현감(孟山縣監) 정욱세(鄭勗世)는 재화(財貨)를 실어나르는 짐바리가 끊이지 않아서 길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있으니, 청컨대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태상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게 하고, 박홍수의 일은 아뢴 대로 하고, 정욱세는 잡아다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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