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1763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9.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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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갑신

전 지평 조문우(趙文宇)를 귀양에서 석방시켰다. 조문우는 대신(臺臣)으로서 미세한 일에 좌죄(坐罪)되어 멀리 귀양가 있었는데, 연신(筵臣)이 그의 어미가 늙었다는 것으로 아뢰었기 때문에 임금이 특별히 사유(赦宥)한 것이다.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좌의정 홍계희(洪啓禧)를 소견하고 북도(北道)의 구관사(句管事)에 대해 하순(下詢)하니, 홍계희가 대답하기를,
"포(布)를 바치는 명색(名色)이 매우 많은데 값에 대한 정수(定數)가 없어서 민폐(民弊)를 야기시키고 있으니, 참작하여 결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속포(續布)는 필(疋)당 5전(錢)으로 하고 사승포(四升布)는 필당 1냥(兩)으로 하고 오승포(五升布)는 필당 2냥으로 하고 육승포(六升布)·칠승포(七升布) 이상은 차례로 더 참작 결정하여 반포한 다음 만일 이 법식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청컨대 상납(上納)하는 포목(布木)에 간사한 방법을 쓴 형률에 의거하여 다스리도록 기록하여 정식(定式)으로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제주(濟州)의 삼명일(三名日) 진상(進上)은 내년 가을까지 봉진(封進)을 정지시켜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고 내년의 공마(貢馬)도 일체 봉진을 정지시키라고 명하였다. 본도(本島)에 흉년이 들어서 목사(牧使)가 장청(狀請)한 때문이었다.

 

호남(湖南)에 우역(牛疫)이 발생하여 죽은 소가 1만 마리나 되었다. 제도(諸道)에 명하여 소잡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12월 3일 을유

구윤명(具允明)을 호조 판서로, 이익보(李益輔)를 예조 판서로, 유언국(兪彦國)을 대사간으로, 신응현(申應顯)을 장령으로 삼았다.

 

특별히 이지억(李之億)을 한성 판윤에, 심이지(沈履之)를 전라 감사에 임명하였다. 전 감사(監司) 박상덕(朴相德)이 상소하여 본도(本道)의 흉년든 정상을 진달하고 이어서 재결(災結)을 더 획급(劃給)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세말(歲末)에 더해줄 것을 청하는 것은 위법(違法)이라는 것으로 좌죄(坐罪)되어 파직당하였다.

 

12월 5일 정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패초(牌招)를 어겼다는 것으로 모두 파직시켰다. 조명정(趙明鼎)을 대사성으로, 서명응(徐命應)을 승지로 삼았다.

 

전 대사간 홍중일(洪重一)을 귀양에서 석방하였다.

 

12월 8일 경인

함경도의 상정제(詳定制)를 개정(改正)하게 하였다. 이 제도는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도(道)를 안무(按撫)하고 있을 적에 처음 이루어진 것으로 참작하여 재결(裁決)한 것이 사의에 맞아서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없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때에 이르러 홍계희(洪啓禧)·이익보(李益輔)에게 이정(釐正)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바치는 방물(方物)을 견면(蠲免)하기도 하고 감(減)하기도 하고 공납(公納)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임금이 삭저(朔猪)와 납저(臘猪)가 북도(北道)의 폐단이 되고 있다는 것으로 하교하기를,
"본도(本道)는 곧 풍패(豊沛)237)  의 고장인데 네 개의 준령(峻嶺)을 넘어서 운송 해야 하니,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납저는 이것이 곧 정공(正供)이지만 삭저는 이와 다르니, 특별히 제감(除減)하라."
하였다.

 

12월 9일 신묘

탐라(耽羅)에서 귤을 진공(進貢)하였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귤을 천신(薦新)하였다. 육상궁(毓祥宮)에 들러 배알하였고 저녁에 환궁(還宮)하였다.

 

12월 10일 임진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귤을 반사(頒賜)하고 나서 시사(試士)하였다. 으뜸은 진사(進士) 권엄(權)이었는데,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이날 밤 시관(試官)들을 불러서 찬선(饌膳)을 베풀고 나서 이어서 하교하기를,
"옛날 송나라 태조(太祖)는 설야(雪夜)의 고사(故事)238)  가 있었는데, 이제 군신(君臣)이 한 전당(殿堂)에서 같이 음식을 먹는 것이 옛날과 지금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오늘 함께 음식을 먹는 지극한 뜻을 잊지 말라."
하였다.

 

김상철(金相喆)을 대사헌으로, 홍중효(洪重孝)를 대사간으로, 안복준(安復駿)을 집의로, 김익(金熤)·홍검(洪檢)을 지평으로, 이성원(李性源)을 사서로, 원경순(元京淳)을 우참찬으로, 조명채(曹命采)를 좌윤으로, 홍낙성(洪樂性)을 동경연으로, 윤급(尹汲)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이날 임금이 여러 유생(儒生)들에게 하유하기를,
"강(講)과 면시(面試)를 앞으로는 행하기도 하고 행하지 않기도 할 것이니, 청금(靑衿)239)  이 된 사람들은 마음을 해이하게 지니지 말라."
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대사성 조명정(趙明鼎)의 말을 따라서 과강법(科講法)을 창설하였는데, 제술(製述)로 등과(登科)한 사람이라도 또한 반드시 경서(經書) 하나를 배송(背誦)하도록 한 뒤에야 사제(賜第)하였다. 이로부터 노사 숙유(老師宿儒) 가운데도 기송(記誦)에 능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부거(赴擧)하지 않았다. 연소(年少)하고 기억력(記憶力)이 있는 사람은 능히 강(講)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구독(口讀)일 뿐이므로 전혀 실효(實效)가 없었다. 이런 때문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혹 ‘강을 하는 것보다는 면시(面試)하는 것이 낫다.’고 하는 이가 있었으므로 드디어 금년 증광(增廣)의 과시(科試)부터 비로소 면시를 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면시를 행하고서도 강(講)을 또한 폐지하지 않았다.

 

임금이 일찍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기를,
"강(講)과 면시(面試)를 아울러 행할 수는 없으니, 그 가운데 불편한 것을 폐지시켜야 한다."
하니, 지경연 윤급(尹汲)이 면시가 불편하다고 극언(極言)하자 임금이 그렇게 여기고 장차 폐지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불가하다고 하니, 임금이 드디어 둘 다 그냥 두었다. 이 때 법령을 경장(更張)하는 것이 많았는데 과제(科制)와 금주(禁酒)를 더욱 엄밀히 하였다.

 

12월 11일 계사

임금이 유신(儒臣) 이상지(李商芝)를 보내어 양천(陽川)을 염찰(廉察)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명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사민(四民)240)  을 돌보아 구휼하는 것은 왕정(王政)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이다. 임문(臨門)하여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제도(諸道)에 하교하였는데, 유독 양천만이 사민(四民)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어사(御史)를 보내어 염문(廉問)했는데, 과연 사민이 있었다고 하였다. 해당 수령(守令)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조운규(趙雲逵)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승지 서명응(徐命膺)을 특별히 발탁하여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서명응이 통신 상사(通信上使)가 되고 엄인(嚴璘)이 부사(副使)가 되었는데, 떠나려다가 체차되어 다른 사람으로 대체시켰다. 조금 있다가 서명응과 엄인은 모두 중비(中批)에 의거하여 자급(資級)이 승진되었다. 임금이 연신(筵臣)들에게 이르기를,
"통신사(通信使)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우선 두 사람의 자급을 함께 승진시켰다."
하였다. 대개 통신사에게는 으레 한 자급을 올려주게 되어 있는데 이는 항해(航海)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서명응과 엄인은 아무런 공로가 없는데도 임금이 장차 올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잘못 생각하여 드디어 중비에 의한 발탁이 있게 된 것이며, 공로가 없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외람된 상(賞)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함창(咸昌)의 유생(儒生) 채명오(蔡命五) 등이 상소하여 본현(本縣)의 성묘(聖廟)가 있는 주산(主山)은 채은(採銀)해서는 안된다는 정상에 대해 논하고 또 현묘조(顯廟朝)에서도 엄금시킨 하교를 인용하여 전처럼 금단시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채은한 사람은 형배(刑配)하라고 명하였다.

 

평안 감사 정홍순(鄭弘淳)을 혁직(革職)시키고 의주 부윤(義州府尹) 원경렴(元景濂)을 먼 곳으로 유배(流配)시키고 삼사신(三使臣)에게는 먼저 삭직(朔職)시키는 형벌(刑罰)을 시행하였다. 처음 청(淸)나라 사자(使者)가 황제의 지시에 의거하여 우리 나라 국경에 들어와서 교자(轎子)를 타지 않고 모두 역말[驛馬]을 탔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사신(使臣)이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도 임금이 교자를 타지 말라고 명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사신들이 좌거(坐車)를 탔다는 말을 듣고서 하교하기를,
"이는 바퀴가 있는 교자(轎子)이다. 수레 이름을 핑계하여 방자하게 타고 갔으니, 봉성(鳳城)의 장수와 심양(瀋陽)의 장수가 어찌 놀라지 않았겠는가? 국가에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이어서 자문(咨文)을 짓고 재자관(齎咨官)을 차정하여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서 연경에 도착하여 타고간 수레를 남관(南館)에서 불태우게 하였다. 곧 이어 또 하교하기를,
"삼사신(三使臣)이 압록강을 건넌 뒤에는 즉시 그곳의 부(府)에 정배(定配)시키라."
하였는데, 임금이 곧이어 청나라 황제가 타라고 허락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명을 정지시켰다.

 

특별히 이조 판서 황인검(黃仁儉)을 평안 감사에 임명하였다. 정홍순(鄭弘淳)을 파직시키고 나서 임금이 황인검을 대신시키려 하니, 대신(大臣)이 말하기를,
"황인검은 지금 전조(銓曹)의 중임을 맡고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국가의 서문(西門)을 지키는 것은 유독 중임이 아닌가?"
하고, 드디어 평안 감사로 임명하였다. 황인검은 부마(駙馬) 황인점(黃仁點)의 형이다.

 

응교 홍낙순(洪樂純)을 발탁하여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12월 12일 갑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사직(社稷)·태묘(太廟)의 납향 대제(臘享大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윤급(尹汲)을 이조 판서로, 홍상한(洪象漢)을 공조 판서로, 김광위(金光緯)를 지평으로, 홍낙명(洪樂命)을 부교리로, 이석재(李碩載)를 필선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동경연으로, 이일제(李逸濟)를 경상우도 병사로 삼았다.

 

전 병조 판서 이지억(李之億)을 파직시켰다. 처음 이지억이 병판이 되었을 적에 심야(沈埜)·권사언(權師彦)을 끌어들여 낭관(郞官)으로 만들었는데, 심야 등이 면포(綿布)를 바꿔치기하여 훔쳤으므로 비방하는 말이 떠들썩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이런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고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지억은 파직시키고 심야와 권사언은 모두 형리(刑吏)에게 내려 다스리게 하였다. 이어서 구임 낭청(久任郞廳)241)  을 가려서 차임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4일 병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 【장령 신오청(申五淸)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상 좌수사 심인희(沈仁希)는 급대(給代)하는 베[布]를 거친 베로 환색(換色)하여 오로지 탐학만을 일삼기 때문에 군민(軍民)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잡아다 신문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이때 언로(言路)가 막혀 대간의 논평(論評)이 혹 경재(卿宰)에게 언급되면 임금이 번번이 경알(傾軋)하는 것인가 의심하였다. 이 때문에 진언(進言)하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하는 데에서 그친 것이다.

 

황해도 유생(儒生) 박필시(朴弼時) 등이 상소하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무고(誣告)에 대해 변해(辨解)하니, 임금이 태학 장의(太學掌議) 정일환(鄭日煥)과 사학 장의(四學掌議) 정복환(鄭復煥)·한정모(韓鼎謨)를 유적(儒籍)에서 삭제시켜 영원히 서인(庶人)으로 만들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노론(老論)·소론(少論)이 서로 당파로 나뉘어 있을 적에 문순공(文純公)이 그 사이를 왕래하면서 장차 조제(調劑)하려 한다고 하다가 이어 중립(中立)의 노선을 취하였다. 임금이 이미 붕당(朋黨)을 매우 증오하였는데, 또 무신년242)  의 변란을 겪었으므로 불안스럽게 여기는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편안하게 하기 위해 드디어 탕평(蕩平)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고 따라서 문순(文純)이 일찍이 조제론(調劑論)을 주장한 데 대해 큰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임금이 ‘하늘의 뜻을 본받아 근본을 세운다.[體天建極]’는 존호(尊號)를 받기에 이르러 뭇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박문순(朴文純)의 공이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조금 있다가 문순(文純)의 문도(門徒)들이 상소하여 문순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시킬 것을 청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관학(館學)243)  의 장의(掌議)인 정일환(鄭日煥) 등이 중외(中外)에 통문(通文)을 돌려 문순의 심술(心術) 가운데 있었던 하자를 모두 주워 모아서 종향(從享)시키기를 청하는 자들을 공척(攻斥)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박필시 등이 문순을 위하여 송원(訟冤)하니,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말하기를,
"문순을 공척하는 것은 곧 나를 공척하는 것이다."
하고, 그 통문을 불사르고 정일환 등을 죄주었으며, 또 박필시가 상소하여 송원한 것은 또한 그것이 각승(角勝)이라는 것으로 10년 동안 정거(停擧)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정원에 하유하기를,
"문순공의 일 때문에 다시 소장을 올려 진달하는 것은 일체 금하라."
하고, 또 태학에 하유하기를,
"지금부터 통문을 돌리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서인(庶人)을 만드는 율(律)을 적용하여 다스리리라."
하였다. 정 일환 등이 죄를 얻고 나서 태학의 의논이 드디어 수그러졌다. 그뒤 문순은 마침내 특지(特旨)에 의거하여 종향되었다.

 

사간 남학종(南鶴宗)이 상소하여 서산 군수(瑞山郡守) 민성수(閔聖洙)가 구환곡(舊還穀)을 독징(督徵)하여 가난한 백성이 스스로 목매어 죽는 일이 있게 하였으니, 의당 구포(舊逋)의 독징은 정지시키고 민성수는 파직시켜야 한다고 논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어서 제도(諸道)의 구포(舊逋)를 모두 감면시켰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 동몽 교관(童蒙敎官)을 소견하였다. 그리고 그의 학도(學徒)들 가운데 강(講)에 응하여 잘한 사람에게는 지필(紙筆)을 차등 있게 상으로 주었다.

 

12월 17일 기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여러 선정(先正)들의 자손은 관면(冠冕)이 잇따라 있는데 유독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후손들만이 가장 영락(零落)되어 있습니다. 문정·문순의 자손들 가운데 수용(收用)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청컨대 이번 도정(都政)에서 모두 관직을 제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저자거리에서 추위에 떨면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죽을 먹이고 옷을 하사하여 보냈다.

 

추조(秋曹)244)  에 명하여 홍낙교(洪樂敎)가 격쟁(擊錚)245)  하여 소원(訴冤)한 내용을 살펴보게 하였다. 홍낙교는 곧 홍양한(洪亮漢)의 아들이다. 홍 양한이 호남 어사(湖南御史)로서 여점(旅店)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가 죽을 적에 겸인(傔人) 김석준(金碩俊)이 혼자서 곁에 있었으므로 홍낙교가 김석준이 자기 아버지를 죽였는가 의심하여 법사(法司)에 호소하여 구핵(究覈)하였으나 끝내 그 죄를 밝힐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 격쟁하여 아뢰니, 임금이 엄중히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조사하고 나서도 아무런 혐의가 없자 임금이, 김석준이 홍양한의 죽음을 보고도 버리고 먼저 돌아온 것은 죄를 줄만한 것이 된다는 것으로 먼 곳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홍상한(洪象漢)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12월 18일 경자

정언 이우철(李宇喆)을 파직시켰다. 이우철이 상소하여 군덕(君德)과 시정(時政)에 대해 논하였는데, 군덕을 논하기를,
"신이 그윽이 전하의 동정 운위(動靜云爲)와 정령(政令)의 시조(施措)를 살피건대 급박한 것은 많고 너그러운 것은 적으니, 이것이 어찌 마음에서 발생하여 정사를 해칠 뿐이기만 하겠습니까? 또한 장차 절선(節宣)246)  의 방도에도 방해가 있게 될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찌 너그럽게 하고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적이 있는가?’ 하였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너그럽게 하기를 힘쓰소서."
하였고, 시정에 대해 논하기를,
"한권(翰圈)의 소시법(召試法)이 2차의 시험과 3차의 시험이 있기에 이른 것은 실로 그 선발을 중히 여기는 의의가 아닌 것입니다. 가령 그 사람에게 재능이 없다면 한 번만 시험하면 되는 것입니다. 재능이 있는데도 고의로 염피(厭避)한다면 이는 그 마음이 정직하지 않은 것이니, 이런 사람을 뽑아서 잠필(簪筆)247)  의 반열에 둘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신은 2차 시험을 보이는 법을 폐지시켜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분관법(分館法)248)  이 근래 더욱 엄격해지지 않고 있어 박도인(朴道仁)·심혁(沈)·윤양승(尹陽昇)이 모두 외람되이 괴원(槐院)249)  에 선발되었습니다. 신은 이번 겨울의 분관은 다시 권점(圈點)을 치도록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만녕전(萬寧殿) 별검(別檢) 양주익(梁周翊)은 문지(門地)가 한미하고 충원 현감(忠原縣監) 홍헌보(洪獻輔)는 정치가 전도되었으니, 청컨대 모두 파개(罷改)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삭직(削職)시켰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0일 임인

화성(火星)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친히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성원(李性源)을 수찬으로, 구선행(具善行)을 판윤으로, 이성수(李性遂)를 사서로, 조돈(趙暾)을 대사헌으로, 원의손(元義孫)을 집의로, 유사흠(柳思欽)을 사간으로, 이현옥(李鉉玉)을 장령으로, 이해진(李海鎭)을 지평으로, 이득복(李得福)·김재천(金載天)을 정언으로, 홍낙명(洪樂命)·서명선(徐命善)을 교리로, 이성원(李性源)·김귀주(金龜柱)를 부교리로, 김익(金熤)을 부수찬으로, 황채(黃寀)를 경상 좌수사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윤급(尹汲), 병조 판서 이창수(李昌壽)의 정사(政事)250)  였다.

 

윤동승(尹東昇)을 충청 감사로, 전 감사 이사관(李思觀)은 미처 복명(復命)하기도 전에 중비(中批)로 특별히 발탁하여 병조 판서로 삼았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천거이다.

 

봉교(奉敎) 이숭호(李崇祜)를 경양 찰방(景陽察訪)으로, 대교(待敎) 김서구(金叙九)를 건원 권관(乾原權管)으로 출보(黜補)시켰는데, 조금 있다가 그 명을 정지시켰다. 이숭호·김서구는 모두 2차의 시험과 3차의 시험을 거쳐 선발된 사람들이다. 이우철(李宇喆)이 2차의 시험을 폐지시킬 것을 청하게 되자 두 사람이 모두 인피(引避)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노하여 출보시키려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제 두 사람을 출보시키신다면 이뒤로 2차의 시험을 거쳐 선발된 사람은 반드시 계속해서 그 잘못을 본받게 될 것이므로 더욱 대언(臺言)대로 적중시키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드디어 그 명을 정지시킨 것이다. 두 사람은 곧이어 공직(供職)하였다.

 

12월 21일 계묘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처음 한권(翰圈)의 면시(面試)를 시행하였다. 이우철(李宇喆)의 상소가 올라오고 나서는 임금이 한권(翰圈)에 든 사람들이 2차 시험과 3차 시험에 응시하려고 하지 않아서 은밀히 이우철에게 촉탁하여 소장을 올려 진달하게 함으로써 성법(成法)을 무너뜨리게 하려는 것인가 의심하여 이에 한권에 든 여러 사람들을 불러 면시(面試)를 행하였는데, 이는 억제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어서 이를 법제로 정할 것을 명하고 이로부터 한권에 든 사람에게는 번번이 면시를 행하게 하였다. 이 때 임금이 이우철에 대해 격노(激怒)하여 법제로 정하도록 명하였으나 그뒤로 한권을 행할 적에 면시를 시행한 적은 없었다. 이는 대개 조가(朝家)에서 이미 그 정해진 법제를 잊었기 때문이었다.

 

윤득우(尹得雨)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윤득우는 일찍이 신치운(申致雲)에게 수학(受學)하였다는 것으로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사람인데, 임금이 불식(拂拭)시키고 기용한 것이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 헌납 김회원(金會元)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면천 군수(沔川郡守) 김이복(金履復)은 오로지 불법스러운 짓만 일삼고 있는데 그 가운데 크게 윤상(倫常)에 관계되고 가장 탐오 각박한 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본 고을의 신남이(申男伊)가 아비를 때려 머리가 깨졌으므로 그 아비가 관(官)에 고발하였으나 한 대의 곤장(棍杖)도 치지 않고 또한 감영(監營)에 보고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 마침내는 도주(逃走)시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흉황(凶荒)을 핑계하여 강제로 부민(富民)들의 곡식을 징수하는 등 침탈이 낭자하였으며, 금년 봄의 환곡(還穀)은 후한 값으로 작전(作錢)하였고 허다하게 축이 난 말수[斗數]를 일일이 백성에게서 징수하였습니다. 전세(田稅)를 장재(裝載)하여 운송한 뒤 경사(京司)에서 점퇴(點退)하였다고 핑계대고 강(江)가에서 작전(作錢)하면서 매 석(石)당 7, 8관(貫)으로 발매(發賣)하고서는 이에 매 석당의 값을 3관전(貫錢)으로 민간(民間)에게 나누어 준 다음 가을에 비납(備納)하게 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불법을 저지른 것이 이러한데 어떻게 자목(字牧)251)  의 직임에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 도신(道臣) 이사관(李思觀)은 이에 도리어 포계(褒啓)하여 상을 받게 했으니, 청컨대 김이복은 사판(仕版)에서 삭제시켜 영원히 금고(禁錮)시키고 포계한 도신은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이복과 도신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신남이는 도신으로 하여금 기포(譏捕)하여 공초(供招)를 받아 결안(結案)한 다음 속히 해당 형률을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뒤에 조사하여 보니 일이 모두 무실(無實)한 것이었다. 임금이 김원회(金元會)가 호서(湖西) 사람이라는 것으로 사감(私憾)이 있는 것인가 의심하여 삭직시켰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내년에 〈명나라가 망한 지 후 주갑(周甲)이 되는〉 갑신년(甲申年)을 거듭 만나게 되었다는 것으로 황조(皇朝)에 대한 슬퍼하는 마음에서 3월에는 모든 행행(行幸)과 정하(庭賀)에 있어 모두 고취(鼓吹)를 정지하고 헌현(軒縣)을 철거하게 하였다.

 

12월 22일 갑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자성록(自醒錄)》을 지어 내리고 하교하기를,
"아! 세모(歲暮)에 《자성록》을 저술한 것은 스스로 각성(覺醒)하기 위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바라는 것은 뭇 신하들이 나를 각성시켜 주는 그것이다."
하고, 운각(芸閣)252)  들에게 반사하게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귀주(金龜柱)를 교리로, 이성원(李性源)을 부교리로, 윤면헌(尹勉憲)을 수찬으로, 이상지(李商芝)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12월 23일 을사

임금이 유신(儒臣) 홍낙명(洪樂命)·이석재(李碩載) 등에게 명하여 《사기(史記)》의 무제 본기(武帝本紀)를 읽게 하였다. 임금이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일편(一篇)에 단지 봉선(封禪)에 대한 일만 기록하였구나."
하니, 이석재는 인품이 좀 오활한 편이고 또 무제기(武帝紀)를 저소손(褚少孫)이 보찬(補撰)했다는 것을 모르고서 경솔하게 대답하기를,
"이는 사마 천(史馬遷)이 사감(私憾)을 품고 무제를 비난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그런가?"
하니, 홍낙명이 말하기를,
"옛 사람도 또한 사기(史記)를 비방한 역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승지 김화진(金華鎭)이 말하기를,
"인신(人臣)으로서 군주에게 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이렇게 비방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무제는 선정(善政)을 많이 베풀었다. 윤대(輪對)의 조서(詔書)253)  와 현량과(賢良科)에 관한 것은 모두 빼고 기재하지 않았으니, 인신으로서 감히 이렇게 할 수가 있는가? 옛날의 역사도 오히려 이러한데 더구나 지금의 역사는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하고, 한원(翰苑)을 칙유(飭諭)하는 글을 지어서 내리고 이를 사관(史館)에다 걸어두게 하였다.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사신(史臣)이 비록 사의(私意)를 품고 사서(史書)를 짓더라도 백세(百世)의 공안(公眼)은 조마경(照魔鏡)과 같은 것이니 어떻게 도피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한림 조준(趙㻐)이 나아가 말하기를,
"왕(王)의 말씀은 박절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조마(照魔)라는 두 글자를 인유(引喩)한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고 또 사신(史臣)을 대우하는 도리도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말하기를,
"한림이 말한 적은 직분에 의거하여 아뢴다는 의의인 것이니, 내가 그대를 위하여 고치겠다."
하고, 이어서 조마(照魔)라는 한 구어(句語)를 깎아 없애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반고(班固)가 찬술한 무제기(武帝紀)를 가져다 읽으라고 명하고 나서 사신(史臣)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사마천(司馬遷)과는 같지 않구나. 사마천이 기록한 것은 하나의 광패(狂悖)스런 전기(傳記)이다. 그대는 사필(史筆)을 잡고 있으니, 사관이 된 사람은 의당 이와 같이 해야 한다."
하였다.

 

12월 25일 정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윤급(尹汲)을 파직시켰다. 윤급이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정사(政事)254)  를 행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을 탕평책에 의한 정사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임금 앞에서 상당히 비난하였다.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잇달아 나아가 말하기를,
"이덕령(李德齡)은 본디 해서(海西)의 거부(巨富)로 이름이 났는데, 윤급이 이덕령을 침랑(寢郞)에 의망(擬望)한 것은 신중히 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대각(臺閣)에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윤급은 파직시켜야 하고 행공(行公)한 대신(臺臣)도 또한 죄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그의 아룀을 옳게 여겼다. 이리하여 참판 이은(李溵), 참의 이최중(李最中)도 또한 동참했다는 것으로 좌죄되어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이덕령은 곧 영부사 신만(申晩)이 윤급에게 말하였던 것인데도 윤급은 실로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홍계희(洪啓禧)를 이조 판서로, 서명신(徐命臣)을 참판으로, 정상순(鄭尙淳)을 참의로 삼았다.

 

이날 김상복(金相福)이 또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 병조 판서 이지억(李之億)은 전하의 망극한 은덕을 받아 하자를 씻어주고 발탁하여 지위(地位)가 숭현직(崇顯職)에 올랐는데도 공효를 세워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이에 시정(市井)의 부상(富商)을 위장(衛將)에 제배(除拜)하였으니, 이는 실로 조정의 수치입니다."
하니, 임금이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지억은 일찍이 죄수로 국옥(鞫獄)에 들어갔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사면(赦免)시켰다. 그러고 나서 이지억이 반시(泮試)255)  에 참여되었는데, 이 경우 으레 초시(初試)를 내려야 하지만 임금이 이지억에게 특별히 사제(賜第)하였다. 그리하여 가주서(假注書)에서 장령(掌令)으로 뛰어 올렸고 승지(承旨)로 발탁하여 총우(寵遇)가 날로 융숭하였는데 마침내는 서전(西銓)256)  을 제배(除拜)하기에 이르렀다. 김상복이 이른바 하자를 씻어주고 발탁하였다는 것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9책 102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5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註 255] 반시(泮試) : 성균관 시.[註 256] 서전(西銓) : 병조 판서.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지억은 일찍이 죄수로 국옥(鞫獄)에 들어갔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사면(赦免)시켰다. 그러고 나서 이지억이 반시(泮試)255)  에 참여되었는데, 이 경우 으레 초시(初試)를 내려야 하지만 임금이 이지억에게 특별히 사제(賜第)하였다. 그리하여 가주서(假注書)에서 장령(掌令)으로 뛰어 올렸고 승지(承旨)로 발탁하여 총우(寵遇)가 날로 융숭하였는데 마침내는 서전(西銓)256)  을 제배(除拜)하기에 이르렀다. 김상복이 이른바 하자를 씻어주고 발탁하였다는 것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12월 26일 무신

영부사 신만(申晩)이 차자(箚子)를 올려 인혐(引嫌)하니, 우의정 김상복(金相福)도 또한 차자를 올렸는데, 모두 이덕령(李德齡)의 일 때문이었다.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둘을 화해시켰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예조 판서 조운규(趙雲逵)가 내년 원조(元朝)의 하례(賀禮)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날 임금이 오른팔을 걷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경 등은 와서 보라."
하니, 홍봉한 등이 나아가서 살펴보았다. 팔에 아롱아롱한 둥근 무늬가 있었는데 마치 비단의 무늬와 같았다. 어떤 이는 이를 용문(龍文)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그대로 기록하여 두라. 무늬의 수효가 아홉 개이다."
하였다.

 

김선행(金善行)을 대사헌으로, 안집(安𠍱)을 대사간으로, 홍낙인(洪樂仁)을 집의로, 이상지(李商芝)를 사간으로, 임의중(任毅中)을 장령으로, 이재협(李在恊)을 헌납으로, 홍응보(洪應輔)를 지평으로, 유언호(兪彦鎬)를 정언으로, 윤승렬(尹承烈)을 부수찬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좌참찬으로, 박상덕(朴相德)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왕부(王府)에 명하여 이춘형(李春馨)의 죄를 감단(勘斷)하게 하였다. 이춘형은 무인(武人)으로 죄를 얻어 이성(利城)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귀양갈 즈음에 장차 사령(赦令)이 있게 될 것이라 여겨 드디어 관리(官吏)에게 뇌물을 주고 귀양지로 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과연 사면령이 내렸다. 뒤에 그 일이 발각이 나자 임금이 해부(該府)에 명하여 엄중히 다스리게 하였다. 이때 임금이 바야흐로 기강을 진작 면려시키고 있었는데도 기강이 더욱 해이하여졌고 정법(政法)을 엄중히 밝혔는데도 정법이 더욱 괴려(乖戾)되었으므로 말단의 도필리(刀筆吏)도 또한 꺼림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

 

12월 28일 경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춘첩자(春帖子)를 지어 올릴 원수(員數)를 뽑아서 8원(員)으로 정하였다. 임금이 1년에 세 번 첩자(帖子)를 지어 올리게 하고 있으니 의당 간략하게 할 것이요 많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음은 물론, 기묘년257)   이후로 대전(大殿)의 첩자는 단지 유람(留覽)하는 데 대비하였을 뿐 붙이지는 않았다는 것으로 수효를 한정하여 초계(抄啓)하게 하고 이를 정식(定式)으로 시행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특지(特旨)로 대교(待敎) 김서구(金敍九), 검열 조준(趙㻐)을 기역(畿驛)에 정배(定配)시켰다. 이때 도승지 홍인한(洪麟漢)이 권세를 믿고 조신(朝紳)들을 능락(凌轢)하는 일이 많았는데, 조준이 신진(新進)으로서 뻣뻣하게 항거하면서 공손하지 않자 홍인한이 청례(廳禮)를 핑계하여 곤억(困抑)하려 하였으나 조준이 따르지 않았다. 홍인한이 노하여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니, 조준이 드디어 상소하여 진달하고 곧바로 나갔는데, 그 내용이 홍인한을 침척(侵斥)하는 것이었다. 김서구도 또한 관규(館規)라는 것으로 굽히지 않고 버텼다. 임금이 모두 도배(徒配)시키라고 명하였는데, 곧이어 풀어주었다.

 

12월 29일 신해

세수(歲首)의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쓰게 하여 팔도(八道)와 양도(兩道)에 하유하게 하였다.

 

심도(沁都) 사람 이흥복(李興復)·한조이(韓召史)에게 급복(給復)하라고 명하였다. 유수(留守)        정실(鄭實)이 장계(狀啓)를 올려 효열(孝烈)을 포장(褒奬)할 것을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12월 30일 임자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와 각 능전(陵殿)의 정조제(正朝祭)에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오늘이 제석(除夕)이라는 것으로 법사(法司)에 구류되어 있는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고 또 사대부(士大夫) 가운데 나이 70세가 된 사람과 서민(庶民) 가운데 나이 80세가 된 사람들에게 쌀과 비단을 하사하게 하였으며, 여러 가지 영선(營繕)에서 역사(役事)하는 백성들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임금이 내년이 〈명나라가 망한 지 두 주갑(周甲)이 되는〉 갑신년(甲申年)이라는 것으로 충렬사(忠烈祠)·현절사(顯節祠) 양사(兩祠)의 자손들 가운데 관직이 있지 않은 자는 전조(銓曹)에서 들리는 대로 녹용(錄用)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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