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갑인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입직 군사에게 떡과 고기를 내렸으니, 세수(歲首)에 호궤(犒饋)001) 하는 것은 상례이다.
삭직 당한 여러 신하를 서용하였다. 전에 대신(臺臣)으로 패초(牌招)를 어겨 큰 처분(處分)을 내렸던 중에 든 자들인데, 이때에 이르러 해가 바뀌어 비로소 서용한 것으로 모두 1백 20여 인이었다.
1월 3일 을묘
임금이 면류관과 법복(法服)을 갖추고 태묘(太廟)에 전알하였으며, 곤룡포(袞龍袍)로 바꾸어 입고 선원전(璿源殿)에 배알하고 탐라(耽羅)에서 올라온 공과(貢果)를 바쳤다.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옛 잠저(潛邸) 때의 부로(父老)로 나이 7, 80세가 된 사람들을 소견하여 품계를 올려 주고 차등 있게 쌀과 비단을 내렸는데, 밤이 되어서야 환궁하였다.
1월 4일 병진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고 글을 지어 조정에 있는 신료들에게 하유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 같은 부덕(否德)으로 큰 기업을 이은 지 만 40년이 되었고 나이 또한 망팔(望八)이 되었다. 오늘의 조참이 어찌 관첨(觀瞻)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아! 나의 대소 신료들아, 세상에 드물게 있는 일을 만났다고 여기지 말고 40년간의 고심이 해와 더불어 함께 새로워지는 나의 마음을 깊이 본받아 정밀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나의 만년(晩年)의 정사를 돕도록 하라. 이 하유를 본받지 않는 자는 한갓 그 임금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또 무슨 낯으로 그 할아비와 그 아비를 대하겠는가? 모름지기 모두 나의 뜻을 본받아 실추함이 없도록 하라."
하고, 또 제도(諸道)에 하유하여 농상(農桑)을 장려하고 진휼에 힘써 궁핍한 백성들이 봄과 함께 소생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어 대신 이하 기로소(耆老所)와 문무 여러 신하들에게 입시하여 천안(天顔)을 우러러보도록 허락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송축(頌祝)의 뜻으로 사언잠(四言箴) 6편을 지어 올리고, 응교 홍낙명(洪樂命)도 역시 일신(日新)의 뜻으로 면계(勉戒)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대사헌 김선행(金善行)과 대사간 안집(安𠍱)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안집이 조섭하는 도리로 계속하여 소회(所懷)를 아뢰니,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여 《맹자(孟子)》를 강하였다.
선조(先祖) 갑오년002) 에 섬겼던 사람과 명(明)나라 사람의 자손으로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은 각각 한 자급(資級)을 가하라고 명하였다. 기로신(耆老臣) 박치화(朴致和)가 전에 직언한 바가 있었기 때문인데 추장(追奬)하고, 그 아들을 견발(甄拔)하여 녹용하였다.
유수(柳脩)를 집의로, 박기채(朴起采)를 사간으로, 남운로(南雲老)를 헌납으로, 김상철(金尙喆)을 형조 판서로, 윤급(尹汲)을 판윤으로 삼았다. 특별히 이재협(李在協)에게 부교리, 이명환(李明煥)에게 부수찬을 제수하고, 참의 이사관(李思觀)을 발탁하여 부총관으로 삼았다.
임금이 태묘의 춘향(春享)에 쓸 향(香)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또 청천강(淸川江)을 준설(浚渫)하는 일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전단(田單)003) 은 〈함락되지 않은〉 거(莒) 땅과 즉묵(卽墨) 두 성(城)으로 〈연(燕)나라에 빼앗겼던〉 70여 성(城)을 도로 회복하였으니, 나는 성패가 사람에게 있지 성지(城池)에 있지 않다고 여긴다. 수신(帥臣)에 적임자를 얻으면 비록 성지가 없어도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몇 만 호(戶)와 1백 천참(天塹)004) 이 있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하였다. 홍봉한은 강 줄기를 파내는 것으로써 관방(關防)의 대계(大計)로 삼아 전후로 누차 아뢰었는데, 마침내 백성만 수고롭게 하고 재력만 소비하였지 실효가 없었다. 임금께서 통촉하시기를 만리(萬里)를 내다보듯 하였으니, 위대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시여!
특지로 대사간 안집(安𠍱)을 내쳐 흥덕 현감(興德縣監)을 삼고, 지평 김재천(金載天)을 경양 찰방(景陽察訪)으로 삼았으니, 소명을 어기고 빈청의 차대(次對)에 불참하였기 때문이다.
부사과 신일청(申一淸)이 상소하여 인조 대왕에게 휘호를 추상할 것을 청하고, 또 공자(孔子) 위호(位號)를 한결같이 명(明)나라 가정(嘉靖)005) 때 ‘지성 선사(至聖先師)’라고 한 칭호대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본따서 이정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그 일을 중하게 여겨 윤허하지 않았다. 그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옛날 우리 인조께서는 비록 성을 포위당한 속에서도 절일(節日)을 당하면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셨고, 돌아옴에 미쳐서는 일찍이 《시경(詩經)》 소아(小雅) 채숙장(采菽章)의 ‘기쁘도다! 군자는 천자의 나라를 안정시켰구려[樂只君子殿天子之邦]’라는 구절을 강하면서 문득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또 갑신년006) 이후로는 매양 성절(聖節)을 당하면 금원(禁苑)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만세를 불렀으니, 그 만절 필동(萬折必東)007) 의 뜻은 천양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홍계희(洪啓禧)를 면직시키고 김상철(金尙喆)로 대신하였다. 특별히 권도(權噵)에게 대사간을, 박규수(朴奎壽)에게 정언을, 엄인(嚴璘)에게 승지를 제수하였다.
1월 7일 기미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를 설행하였다. 친히 여러 유생들에게 책문(策問)하여 홍용한(洪龍漢)·백사은(白師殷) 등 2인을 뽑았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민백흥(閔百興)·김종정(金鍾正)을 승지로 삼았다.
1월 8일 경신
임금이 기곡제(祈穀祭)에 쓸 향(香)을 숭현문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홍용한과 백사은을 면시(面試)하였으니, 홍용한은 영의정 홍봉한의 아우이다. 시험이 끝나자, 또 재시(再試)를 명하여 아울러 급제(及第)를 내렸으니, 면시에서 재시하는 것은 홍용한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고(故) 현감 이현필(李顯弼)의 직첩을 돌려주었다. 이현필이 일찍이 대책문(對策文)에서 임금의 과실을 들추니 임금이 그의 과방(科榜)을 삭제하고 죄를 주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응시한 선비가 임금의 궐실(闕失)에 대하여 감히 말하지 못한 지가 거의 30년이 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임금이 홍용한 등에게 친히 책문하여 모두 세 번의 시험을 보였으나 한마디도 임금의 덕(德)에 대하여는 언급함이 없자, 임금이 탄식하기를,
"내가 늙었구나! 충직한 말을 듣고자 해도 들을 수가 없도다. 옛날 우(禹)가 그의 임금[舜]에게 진계함에도 오히려 ‘단주(丹朱)008) 처럼 오만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임금이 된 자는 다만 신하의 말을 용납해 주는 것뿐이다. 지금 책문에서 직언이 없었던 것은 이현필이 죄를 얻음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직첩을 내주도록 명한 것이다. 임금의 성스럽고 총명함이 이와 같았으나 말한 자가 왕왕 죄에 빠짐이 많아 조야(朝野)에서는 한창 말을 꺼리는 참이라 다시는 진언하는 자가 없었다.
1월 9일 신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경옥(李敬玉)을 의주 안핵 어사(義州按覈御史)로 삼았다. 이때에 의주 백성이 잠상(潛商)을 하다가 청나라 사람을 죽인 자가 있었는데, 일이 발각되자 임금이 이경옥을 보내서 안핵하여 다스리게 한 것이다. 전 감사 정홍순(鄭弘淳), 전 의주 부윤 원경렴(元景濂) 및 병사 김성우(金聖遇)가 모두 면직되었는데, 변금(邊禁)을 엄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릉군(安陵君) 이계(李烓)가 상소하여 칭경(稱慶)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운유(鄭運維)를 승지로 삼았다.
장령 이현옥(李鉉玉)이 상소하여 부유한 상인의 무곡(貿穀)하는 행위를 금하라고 청하였는데, 이때에 언로가 막혀 대각(臺閣)의 말이 좀스럽기가 대개 이와 같았다.
1월 10일 임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성 조명정(趙明鼎)에게 명하여 재임(齋任)과 강생(講生)을 인솔하고 돌아와 각기 《주역(周易)》의 괘(卦) 하나씩을 강(講)하게 한 다음 서로 문난(問難)하게 하고는 종이와 붓을 내려 주었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월 11일 계해
7도(道)에 어사를 나누어 보냈는데, 함경도만은 감시 어사(監市御史)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보내지 않았다.
장령 임의중(任毅中)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강 연안의 파수(把守)가 엄하지 못하여 몰래 국경을 넘어가서 살인하는 변이 있게 된 것이므로, 지금부터는 사찰(査察)의 법을 거듭 엄중히 하고 파수하는 군졸을 점검하여 감히 잠시도 제 위치를 떠나지 말고 요로(要路)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매양 당시(唐詩)의 ‘성 위엔 바람의 위세가 차가운데, 강 가운데엔 물 기운이 써늘하다.[城上風威冷江中水氣寒]’라는 글귀를 외면서 군졸을 생각하면 추위가 내몸에 있는 듯하였다. 앞의 것은 비록 감해주기 어렵다 하더라도 뒤 폐단을 어떻게 차마 열겠는가? 또 변금(邊禁)의 엄함은 군졸의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12일 갑자
조강(朝講)을 행하고 이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추후로 옥당(玉堂)의 차자에 비답을 내렸다. 전년에 옥당에서 하찮은 일로 차자를 올린 일이 있었는데, 그 말이 임금의 뜻에 차지 않은 바가 있어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물리쳐 버렸었다. 이때에 이르러 유신(儒臣) 이명환(李明煥)이 이 일을 언급하고 이어 사직하니, 임금이 비로소 뉘우쳐 말하기를,
"옥당의 차자에 비답이 없었던 것은 3백 년 동안에 있지 않았던 바이니, 어린 세손에게 너그러움을 전하는 일이 못된다."
하고, 드디어 추후의 비답을 내린 것이다.
처음으로 전 찬선 송명흠(宋明欽)을 찬선에 다시 제배하였다. 송명흠이 진소(陳疏)하여 임금의 뜻을 거스르고부터 전조(銓曹)에서 감히 송명흠을 관직에 의망(擬望)하지 못하였는데, 서지수(徐志修)가 전관(銓官)으로 있을 때에 일찍이 임금에게 아뢰어 송명흠을 찬선에 다시 제배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더욱 노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 중에 말하는 사람이 있자, 임금의 마음이 다소 풀려 그를 다시 제배하도록 허락하였다. 이날 임금이 개연(慨然)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에게 말하기를,
"명나라에서는 언관(言官)에게 궁정(宮庭)에서 형장(刑杖)을 가했는데도 말하는 자가 그치지 않았다. 나는 일찍이 궁정에서 형장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조정에서 말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나에게 이이(訑訑)009) 한 낯빛이 있어 궁정에서 형장을 가하는 것보다 심했단 말인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정령(政令)을 밝게 익히시어 군신들이 받들기에 겨를이 없는데, 비록 진언하고자 하여도 사실 말씀 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은 말하기를,
"말로서 죄를 얻은 사람이 많으니, 전하께서 참으로 그 죄를 용서하고 쓰신다면 말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을 않고 며칠을 지내다가 김시찬(金時粲)을 방석(放釋)하라는 명이 있었다.
제주 어사(濟州御史) 이수봉(李壽鳳)에게 별유(別諭)를 내렸다. 이에 앞서 조영득(趙榮得)·허동혼(許東渾) 등이 이미 역모(逆謀)로 죽임을 당하였어도 여러 역적의 처자들이 섬중에 귀양가 있는 자가 아직 많았는데, 임금이 그들이 선동하여 난을 일으킬까 의심해 매우 걱정하여 장차 어사를 보내서 정찰하려고 하자, 영의정 홍봉한이 이수봉을 추천하니, 임금이 마침내 그를 보냈다. 이수봉이 섬에 이르러 곧바로 수십 인을 죽이고 계문하니, 임금이 측은히 여겨 말하기를,
"너무 한 것이 아니냐? 반경(盤庚)010) 은 ‘전멸하여 씨를 남기지 말라.’ 하였으나, 어찌 성탕(成湯)이 삼면(三面)의 그물을 해제하는 것011) 만 하겠느냐?"
하고, 이어 이수봉에게 별유를 내려 함부로 살육함을 경계하였는데, 별유가 내려가자마자 이수봉은 이미 돌아와서 승지로 탁용되고 곧바로 강계 부사(江界府使)에 제배되었다.
1월 14일 병인
임금이 전강(殿講)을 친히 행하여 전백령(全栢齡)·이우규(李羽逵) 두 사람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강도(江都)에서 과거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명나라가 망한 해인〉 갑신년(甲申年)이 다시 돌아옴에 감회를 느껴 수토(守土)의 신(臣)에게 명하여 《충렬록(忠烈錄)》을 등사하게 올리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유수 정실(鄭實)이 상소와 함께 올리고 이어 강도의 충렬사(忠烈祠)012) 에 제사를 내리도록 청하였으며, 또 고(故) 부윤 황일호(黃一皓)의 자손을 수용할 것과 충현공(忠顯公) 이돈오(李惇五)의 형제를 똑같이 향사(享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향사는 사체가 중하다고 허락하지 않고, 단지 제사만 내리도록 하였으며, 이어 강도에서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를 뽑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정광한(鄭光漢)·홍지해(洪趾海)를 승지로, 임희교(任希敎)를 집의로, 이덕해(李德海)를 사간으로, 심각(沈殼)을 장령으로, 최익남(崔益男)·이숭호(李崇祜)를 정언으로, 홍술해(洪述海)를 응교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학(四學)의 재임(齋任)들을 소견(召見)하고 칙유하였다.
1월 15일 정묘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간추려서 대각(臺閣)의 신료에게 보이라고 명하였으니, 지평 홍응보(洪應輔)의 청에 따른 것이다. 홍응보가 ‘대신(臺臣)이 아무리 진언(進言)하려 해도 조정의 정령(政令)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하여 송(宋)나라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정령을 간추려서 대각에 보이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간추려서 보이라는 명은 정지되어 행해지지 않았고 대각에서도 그 후로는 또한 진언한 자가 없었다.
1월 16일 무진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김선행(金善行)과 대사간 권도(權噵)를 파직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조참을 행하였는데, 김선행과 권도가 아뢰는 일이 없자, 임금이 말하지 않음을 책하니, 김선행이 물러나와 상소하여 ‘옛날 성왕(聖王)이 간언(諫言)을 오게끔 한 도리는 언관(言官)을 독책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임금이 대신(臺臣)에게 죄를 주지 말 것을 청하였고, 권도 역시 상소하여 구양수(歐陽脩)013) 의 말을 인용하기를,
"임금이 항상 말하기 어려운 말을 듣고 싶어 한 연후에 아래에서 숨기려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고, 또 태묘의 축책(祝冊)에 청국의 연호를 쓰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두 사람을 모두 파직하였다.
예조 참판 서명응(徐命膺)이 친경의변(親耕儀辨)을 올렸다. 임금이 앞으로 중춘(仲春)이면 적전(籍田)에서 친경을 하게 되는데, 서명응이 《오례의(五禮儀)》의 친경의절(親耕儀節)은 고례(古禮)와 맞지 않은 대목이 많다고 하여 마침내 변(辨)을 지어 그림까지 갖추어서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방례(邦禮)를 고칠 수는 없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속대주첩(續代柱帖)을 만들었다. 임금이 수재(守宰) 중에서 십고 십상(十考十上)014) 한 사람을 가려 첩지에 이름을 기록하고 명칭을 붙이기를 속대주첩이라고 하였는데, 대개 선조에 대주첩(代柱帖)015) 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17일 기사
임금이 주강을 행하여 《맹자(孟子)》를 강하고 왕세손에게 시강(侍講)을 명하여 《중용(中庸)》의 제15장(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형제·처자가 혹 화목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짓으로 그렇게 되느냐? 우홍(牛弘)016) 의 아내가 우홍의 아우 잘못을 그의 형에게 말하였으니, 형제간은 아내가 혹 이간시킨다지만 부부간을 이간시키는 자가 누구인가?"
하매, 세손이 대답하기를,
"첩잉(妾媵) 등속입니다. 그러나 첩잉으로 해서 제 아내와 틈이 생긴다면 이 역시 어찌 그 지아비의 잘못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잘했다고 칭찬하였다. 이어 또 묻기를,
"《소학(小學)》에 일컫기를, ‘남자로 심주(心柱)가 굳센 자 몇 사람이나 능히 부인의 말에 현혹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너도 능히 심주를 굳세게 하여 현혹되지 않겠느냐?"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태왕(太王)017) 도 호색(好色)하였다.’고 하였으나 그래도 호색하지 않은 것만은 못합니다."
하자, 임금이 사관(史官)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네가 후일에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저 사관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하였다.
연로(輦路)에서 기찰(譏察)하는 규례를 파하였다. 을해년018) 이후로 임금이 거둥할 때마다 길 근처에서 감시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여 왔는데, 이때에 이르러 파하게 한 것이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지평 이해진(李海鎭)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강규(講規)를 파하고 면시(面試)만 두어 과거의 폐단을 바루기를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바로 그 관직을 체차하였다.
김종정(金鍾正)을 봉황성 참핵사(鳳凰城參瑔使)로 삼았으니, 의주(義州) 백성이 전에 몰래 월경(越境)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해도 봉산 어사(鳳山御史) 이숭호(李崇祜)가 복명하니, 해당 군수 박재수(朴載洙)를 곧바로 그 지방에 도배(徒配)시키라고 명하였다. 대개 그 고을에 살옥(殺獄)이 있었는데, 검험(檢驗)을 사실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뒤에 대신(臺臣) 황간(黃榦)의 계사로 인하여 원지(遠地)에 정배하였다.
1월 18일 경오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0일 임신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영희전(永禧殿)에 전알(展謁)한 다음 저경궁(儲慶宮)을 거쳐 영수각(靈壽閣)에 나갔다가 저녁에야 환궁하였다.
충량과(忠良科)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갑신년이 다시 돌아왔으므로, 정축년019) 에 여러 신하들이 충절을 다하였음에 감격하고 그 후예들을 생각하여 장차 과거를 설행해 그들을 뽑으려고 조신(朝臣)에게 하문하자, 의논하는 자들이 혹 말하기를, ‘그것은 격식에 없는 일이니 불가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 나이 이미 망팔(望八)이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황하수(黃河水)는 맑아지지 않으니 그 장차 초목과 함께 시들게 되었다. 지금 이 과거를 설행하려 한 것은 충신과 의사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한 것이니, 어떻게 가하고 불가함을 논할 수 있겠는가? 충신이 비록 많기는 하나 삼학사(三學士)020) 와 김문충(金文忠)021) 이 더욱 열렬(烈烈)하였다."
하고, 바로 중춘(仲春)에 과거를 설행하되 오직 현절사(顯節祠)022) 와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된 사람의 후손과 명(明)나라 사람의 후예만 과거에 응시하도록 명하고, 그 과거의 명칭을 충량과(忠良科)라 하였다.
1월 21일 계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문신의 제술(製述)을 시험하고 무신의 시사(試射)를 관람(觀覽)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규채(李奎采)를 대사헌으로, 홍양한(洪良漢)을 대사간으로, 황간(黃榦)을 사간으로, 한필수(韓必壽)를 장령으로, 이창임(李昌任)을 지평으로, 이수훈(李壽勳)을 헌납으로, 임희효(任希孝)·이동현(李東顯)을 정언으로 삼고, 사간 이덕해(李德海)를 승품하여 이산 부사(理山府使)로 삼았다.
전 부제학 김시찬(金時粲)을 적소(謫所)에서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김시찬은 곧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후손인데, 일찍이 차자를 올려 임금의 덕을 논하다가 뜻을 거슬러 적소에 있은 지 여러 해 만에 이제야 비로소 풀려난 것이다. 전 참판 황경원(黃景源)도 일찍이 어떤 일로 죄를 얻어 풍천 부사(豊川府使)에 출보(黜補)되었는데, 전조(銓曹)에 명하여 탁용하도록 하였다. 이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나와서 말하기를,
"윤광소(尹光紹)의 재주는 버릴 수 없으니, 청컨대 먼저 외읍(外邑)을 시험하여 보소서."
하니, 임금이 역시 허락하였다.
1월 22일 갑술
주강을 행하였다.
대사간 홍양한(洪良漢)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소회를 아뢰면서 《시경(詩經)》의 ‘주(周)나라는 비록 오래 된 나라이나 그 운명은 더욱 새롭다.[周雖舊邦其命維新]’의 뜻을 인용하여 선왕의 전장(典章)을 따라 연초의 새 정사에 분발하시고 온갖 법도를 새롭게 하여 하늘의 영명(永命)을 기원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헌부에선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릉 참봉(寧陵參奉) 송환오(宋煥五)가 효종조 때 대내(大內)에서 내린 초구(貂裘)를 바쳤다. 효종 대왕이 일찍이 초구 한 벌을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에게 내리면서 말하기를, ‘청컨대 선생과 함께 계문(薊門)023) 의 서리를 밟고 싶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이 말을 하자, 임금이 듣고 구하니, 문정공의 5세손 송환오가 가지고 와서 바친 것이다. 임금이 용상에서 내려와 보고 감탄하기를 마지않다가 도로 송환오에게 주며 돌아가 집에 보관하여 가보(家寶)로 삼으라고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갑신년이 다시 돌아오자 개연(愾然)히 비풍(匪風)·하천(下泉)024) 의 생각이 들어 친히 《충량록(忠良錄)》을 짓고 또 제문을 지어 충렬(忠烈)·현절(顯節) 두 사당에 제사를 올리니, 풍성(風聲)이 미치는 바에 인심이 자못 감격해 하였다.
달이 방성(房星)을 범하였다. 또 어떤 별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왔다.
1월 23일 을해
화성(火星)이 방성을 범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4일 병자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부마(駙馬)의 혼구(婚具)를 감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나라의 용도는 날로 소모되는데, 궁중의 혼사는 장차 거듭 겹치게 되어 임금이 지나친 사치를 없애고자 준촉(樽燭)·향화(香花)·조각·옻칠·도금(鍍金) 등의 제도를 혹은 없애고 혹은 감하였으며, 식품도 단지 다섯 그릇에만 그치게 하였다. 그러나 한 번의 혼사를 치루는 비용이 1만 냥을 넘었다 한다.
1월 25일 정축
임금이 조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홍양한(洪良漢)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병조의 차당(次堂)025) 이 수당(首堂)026) 을 거치지 않고 임의로 외읍(外邑)에 관문을 발송하여 역노(驛奴)와 양정(良丁)을 경솔히 탈(頉)을 잡았으니, 청문(聽聞)이 해괴하고 후폐에도 관련됩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고, 또 강변(江邊)의 파수를 엄중히 신칙하여 월경(越境)을 금지하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장령 심각(沈殼)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강도(江都)의 과거에 함부로 끼어드는 무리를 금할 것을 계청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1월 26일 무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무신의 강을 참관하였다.
임금이 사복시에 나아가 죄인 이여대(李汝大)를 국문하였다. 이여대는 이훈(李壎)의 문객으로 훈의 심복이 되어 오가며 정탐하였는데, 핵실하자 자복하매, 그대로 수감하고 탐라(耽羅)의 여러 죄수들이 체포되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사관(李思觀)을 도승지로 삼았다.
1월 27일 기묘
밤에 유성(流星)이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으며, 모양은 주먹과 같았다.
주강을 행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1월 28일 경진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문신의 활 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화진(金華鎭)·이담(李潭)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9일 신사
임금이 조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이여대(李汝大)의 일이 또 생기자, 역적의 처자들로 섬에 귀양가서 있는 자들에게까지 만연하여 도모하기 어렵게 될까 염려하여 대신과 금부 당상에게 하문하니, 더러는 몰살하여 씨를 남기지 말기를 청하고, 더러는 다른 섬에 분산해서 정배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하나의 ‘살(殺)’ 자를 말하지 않았다. 진실로 조정이 화합한다면 비록 이런 무리들이 천백이 있다 한들 무슨 걱정이겠느냐? 수토(守土)의 신(臣)으로 하여금 엄중히 단속하게 하라."
하였다.
준원전(濬源殿)의 개수(改修)를 명하고,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계상(李啓祥)을 파직하였다. 당초에 허준영(許俊永)이란 자가 본전의 수복(守僕)으로서 밤에 전내에 들어가 제기(祭器)를 훔쳤는데, 일이 발각되어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니, 임금이 수토(守土)의 신(臣)을 파직하고 어사 이석재(李碩載)를 보내어 허준영을 베었으며, 그의 숙부 허세찬(許世贊)도 공모하였기 때문에 형장을 가한 뒤에 외딴 섬에 정배하였다. 대사헌 이규채(李奎采)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적의 처자식들이 서로 오가며 체결(締結)하는 것을 전연 단속하지 않고 그들의 행동 거지를 임의로 하도록 맡겨 두었으니, 청컨대 제주(濟州)의 양읍 수령을 원방에 정배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대사간 홍양한(洪良漢)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무신년027) 역적 박미귀(朴美龜)의 연좌(連坐)에 해당한 죄인을 궁방(宮房)의 구사(丘史)028) 로써 관문(關文)을 발송했으니, 흐리멍덩함을 모면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판결사(判決事) 박도원(朴道源)을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1월 30일 임오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除)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친히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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