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3권, 영조 40년 1764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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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갑신

밤에 어떤 별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사복시(司僕寺)에 나아가 이훈(李壎)의 아들 이윤석(李胤錫)·이주석(李胄錫)·이사석(李師錫)과 이여대(李汝大)·월중매(月中梅) 등을 친히 국문하여 조영득(趙榮得) 등이 나라를 원망한 정상을 핵실하였는데, 이여대가 이윤석을 무인(誣引)하였다고 자복하자, 이윤석 등을 모두 전처럼 연좌(緣坐)의 죄목으로 도로 정배하고 그 아비 이훈(李壎)의 시신을 귀장(歸葬)하도록 명하매, 여러 신하들이 법외(法外)라고 하여 간쟁(諫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왕(文王)의 정사도 역시 백골을 묻어주는 일이었다. 부자의 정리를 어떻게 막겠느냐?"
하고, 이여대는 사람을 악역(惡逆)에 무인하였으니 법대로 결안(結案)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3일 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충량과를 실시하는 당일에 기구(耆舊)의 대사례(大射禮)029)  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사간 황간(黃榦)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성인(聖人)의 일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성인의 효도는 계지(繼志)·술사(述事)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명나라에 대한 은의가 부자와 같은데, 더구나 지금은 갑신년이 다시 돌아오고 잠월(蠶月)030)  이 곧 닥칩니다. 청컨대 성조(聖祖)께서 반드시 설원(雪冤)하려 했던 뜻을 추앙하고 선조(先朝) 때에 숭보(崇報)한 전례(典禮)를 계승하여 더욱 존양(尊攘)031)  의 의리를 돈독히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효자 오태붕(吳泰鵬)의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오태붕은 해서(海西) 사람인데 그의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으매, 오태붕이 곧 최복(衰服)을 입지 않고 호랑이를 쫓아 깊은 산중에 들어가 호랑이와 싸워서 마침내 호랑이를 죽이고 그 살을 잘라다가 아버지에게 제를 올린 뒤에 출상하였다. 수신(帥臣)이 그 사실을 장문(狀聞)하니, 임금이 크게 가상히 여기고 작설(綽楔)032)  의 포전(褒典)을 베풀라고 명하고 또 복호(復戶)하도록 하였다.

 

2월 4일 병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사복시에 나아가 강익주(姜翊周)를 국문하였다. 강익주도 역시 제주(濟州) 사람으로 조영득(趙榮得)의 첩 월중매(月中梅)의 아비이다. 조영득과 결탁하여 소를 잡아 회음(會飮)한 자로 이여대(李汝大)의 원인(援引)한 바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잡아다 국문하게 되자 강익주가 완강하게 참고 불복하다가 드디어 장폐(杖斃)되었다.

 

2월 5일 정해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신이 대사례 뒤에 구례대로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을 크게 벌리는 것은 내가 경계하는 바이다. 다만 의금부와 형조로 하여금 모든 옥수(獄囚)를 소결(疏決)하게 하여 국은(國恩)을 다함께 입도록 하라."
하였다.

 

판윤 윤급(尹汲)이 그 정세(情勢)를 들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전에 전조(銓曹)에 있을 때에 시골 사람을 초사(初仕)에 의망(擬望)한 일로써 성토가 대단하였습니다. 거부(巨富)란 말은 오로지 모욕하기를 일삼은 것으로, 경연에서 헐뜯고 시(詩)로써 비방함이 좌우에서 번갈아 몰려들으니, 자신을 어루만지며 슬퍼하고 한탄하여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자 합니다."
하였다. 거부라고 한 것은 곧 해서(海西)의 이덕령(李德齡)이고, 경연에서 헐뜯었다고 한 것은 바로 김상복(金相福)을 지칭한 말이며, 시로써 비방하였다고 한 것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조롱하는 뜻으로 부질없이 시귀(詩句)를 읊조린 것인데, 임금이 장황하다고 물리쳐 버렸다.

 

2월 6일 무자

임금이 흥태문(興泰門)에 나아가 태풍을 만나 중국까지 표류하였다가 돌아온 영광(靈光)의 조졸(漕卒)을 소견(召見)하고, 저고리와 돌아갈 식량을 주어서 보냈다.

 

충량과(忠良科)의 홍패(紅牌)에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말고 다만 아무 해 아무 달이라고만 쓰라고 명하였다.

 

밤에 유성이 헌원성(軒轅星)의 아래에서 나왔다.

 

2월 7일 기축

왕세손이 창덕궁(昌德宮)에서 경희궁(慶熙宮)으로 나아갔다.

 

2월 8일 경인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충량과에 친림(親臨)하고 이어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웅후(熊帿)033)  를 설치하매 임금이 내려와서 사위(射位)로 나가니, 기신(耆臣)과 문·무관이 동서로 나누어 서로 바라보고 섰다. 상호군 어영 대장 김한구(金漢耉)가 결습(決拾)034)  를 올리고, 훈련 대장 구선행(具善行)이 활을 바쳤으며, 금위 대장 이장오(李章吾)가 화살을 바치자, 악관이 풍악을 울리고 이수(貍首)를 노래하였다. 병조 판서 이창수(李昌壽)가 고전(告箭)하니, 임금이 승시(乘矢)035)  를 쏘아 2시는 날리고 2시로 과녁의 복판과 과녁의 변죽을 연중(連中)하자 여러 신하들이 둘러서서 구경하는 것이 담을 둘러친 것 같았다. 대신이 헌하(獻賀)하기를,
"실로 만세에 무강하신 복입니다."
하였다. 웅후를 거두어 육일각(六一閣)에 보관하라고 명하고, 쏘았던 활과 화살을 기신(耆臣) 판부사 유척기(兪拓基)에게 주어 돌아가서 영수각(靈壽閣)에 보관하라고 하였다. 다시 미후(麋帿)를 설치하고 기신에게 쏘라고 명하여 맞힌 사람은 활 하나를 상으로 주고 맞히지 못한 사람은 벌로 풍치(豊鱓)036)  를 들게 하였으며 음례(飮禮)를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효종조 팔장사(八壯士)037)  의 자손을 불러 하유하기를,
"장사의 자손이 맞히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내일 다시 시험을 보이겠다."
하고, 친히 ‘망팔에 갑신년(甲申年)을 거듭 만나서, 단지 열천(冽泉)038)  만 외우노라[望八重逢只誦冽泉].’의 사언(四言) 한 귀를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어 충량과의 과차(科次)를 매겨 김노순(金魯淳)·김장행(金章行)·김이소(金履素) 등 3인을 뽑았는데, 무과에 입격한 자도 14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원(仙源)039)  ·청음(淸陰)040)  의 후예는 모두 참방(參榜)하였는데, 유독 삼학사(三學士)의 후예가 없는 것이 한스럽다."
하고, 이어 신은(新恩)041)  을 거느리고 풍악을 울리며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정창성(鄭昌聖)을 헌납으로, 이택진(李宅鎭)을 부교리로, 이최중(李最中)을 부제학으로, 서지수(徐志修)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2월 9일 신묘

임금이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선원전(璿源殿)에 지알(祉謁)하고, 바로 동단(東壇)042)                  에 나아가 면복(冕服)으로 바꾸어 입고 친경례(親耕禮)를 행하였다. 몸소 대거(黛耟)를 잡고 다섯 번 밀었다가 그쳤는데, 사복 정(司僕正)        박성원(朴盛源)이 소를 끌었고 백관과 늙은 백성들은 반열을 나누어 마주보고 섰었다. 임금이 관경대(觀耕臺)로 돌아와 서민에게 위로하는 술을 내리고 또 여러 종경관(從耕官)에게는 찬(饌)을 내렸다. 또 하교하기를,
"어제는 대사례를 행하고 오늘은 친경례를 행하였으니 태고적 의례를 다시 보는 듯하나, 진하(陳賀)를 명하지 않은 것은 일을 크게 벌리기 싫어서이다.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나이 90세인데도 잠경(箴警)하였던 뜻043)                  을 본받아 내일은 시종신(侍從臣)으로 하여금 잠(箴)을 지어 올리게 하고, 길가에서 지영(祗迎)한 유생들에게도 또한 삼일제(三日製)로 시험을 보여 뽑겠다."
하였다. 이어 훈련원에 들러 팔장사의 자손으로서 화살을 쏘아 맞힌 자는 차등 있게 상을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날 먼저 친경할 각종 곡식의 씨와 경근거(耕根車)를 가져와 왕세손에게 보였는데, 대개 먼저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2월 10일 임진

임금이 숭현문에서 유생들에게 친히 삼일제(三日製)의 시험을 보이고 과차(科次)를 매겨 홍빈(洪彬)과 강인(姜儐)을 뽑아 홍빈에게는 급제(及第)를 내렸다. 이때에 면시(面試)하는 법은 혹 행하기도 하고 혹 행하지 않기도 하였으나 강(講)만은 폐하지 않았는데, 홍빈은 강을 잘하여 급제를 내린 것이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장령 한필수(韓必壽)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수령의 천망(薦望)이 격례(格例)에 위반됨이 있으니, 청컨대 5읍의 수령을 파직하소서."
하고, 또 사헌부에서 출금(出禁)할 때에는 인신(印信)을 써서 간위(奸僞)를 방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아울러 윤허하였다.

 

2월 11일 계사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 대신과 금부·형조의 당상을 소견하고 중외(中外)의 여러 죄수를 결방(決放)하도록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충청도 암행 어사 이득배(李得培)가 복명하였다. 임금이 서계(書啓)를 가져다보고 잘 다스린 사람 하나를 포상하고 파연(罷軟)044)  하여 직무를 감당하지 못한 세 사람을 파직하였으며, 흉년으로 인하여 부여읍(扶餘邑)의 결전(結錢)을 견감해주었다. 이어 서울의 구사(丘史)를 정송(定送)하는 폐단을 없애라고 명하면서 말하기를,
"구사의 폐단은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더구나 여색(女色)을 남에게 주는 것이 옳겠느냐?"
하였다. 또 강도(江都)의 향곡(餉穀)을 환송하는 것을 연기하라고 명하자, 대신이 매우 난처해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허락하였으니, 백성들에게 실신(失信)함은 마땅치 않다."
하였다.

 

이영중(李永中)을 정언으로, 조덕성(趙德成)을 승지로 삼았다.

 

2월 12일 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조운규(趙雲逵)가 아뢰기를,
"건원릉(建元陵)의 정자각(丁字閣)에 틈이 생겼으니 마땅히 개수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정자각은 국초에 세웠으니, 지금 이미 4백 년이 되었다. 국초에 지은 것이라고 하여 앉아서 무너지기를 기다린다면 이 어찌 위선(爲先)하는 도리라 하겠는가? 정자각의 중수에는 비록 도감을 설치한 일이 없었으나 이 능소에 어찌 감히 순례대로만 하겠는가? 명칭을 ‘중수청(重修廳)’이라 하고 공조·호조·예조 3조의 수당(首堂)이 동역(董役)하되 영상이 나아가 통솔하고 간검(看檢)하라. 시역일(始役日)에는 직접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봉심(奉審)하겠다. 이 능역(陵役)에는 비록 나더러 흙을 지라 해도 또한 감히 사양하지 않겠다."
하였다.

 

해주(海州)의 토지 소송인 원성팔(元聖八)을 형배(刑配)하였다. 원성팔은 궁방(宮房)을 빙자하고 백성의 토지를 강점하니, 도신(道臣)이 상문(上聞)하여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윤동섬(尹東暹)을 도승지로 삼았다.

 

2월 13일 을미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집의 임희교(任希敎)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지평 채위하(蔡緯夏)는 시골에 있으면서 비루(鄙陋)한 일이 많았고, 지응룡(池應龍)은 사람과 지벌이 매우 한미하여 대선(臺選)에는 합당하지 않으니, 청컨대 개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땔감을 채취하던 아이 하나가 옛날의 금배(金杯) 한 쌍과 동사자(銅獅子) 하나를 경복궁의 옛터 석혈(石穴) 속에서 얻어 바치니, 임금이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에게 상을 내렸다.

 

임금이 국조(國朝)의 공신 후예로서 충의위(忠義衛)045)  가 된 사람들을 불러 그 조선(祖先)의 유상(遺像)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여 하교하기를,
"금년은 태조께서 기로사(耆老社)에 드신 해이고, 이 전(殿)은 중흥(中興)의 옛터이므로 너희들을 부른 것이다."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이유수(李惟秀)·정광한(鄭光漢)을 승지로 삼았다.

 

2월 14일 병신

임금이 태묘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숭정문(崇政門)에서 친히 전하였다.

 

전라도 어사 홍술해(洪述海)가 복명하였다. 전 동복 현감(同福縣監) 임희교(任希敎)가 시종(侍從)의 반열에서 나갔는데, 탐욕과 불법을 많이 저질렀다 하여 임금이 잡아들여 핵실하라고 명하니, 임희교가 승복하매, 해도(海島)로 귀양보냈다. 전주 판관(全州判官) 김상묵(金尙默)과 장성 부사(長城府使) 정경순(鄭景淳)은 승서(陞敍)하였으니, 그 치적이 으뜸인 때문이었다.

 

2월 16일 무술

월식(月蝕)이 있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합문(閤門)의 조현(朝見) 의식(儀式)이 정돈되지 못하였다 하여 비국 당상 이익보(李益輔)·원경순(元景淳) 두 사람을 파직하였다. 예조 참판        서명응(徐命膺)을 전주(全州)로 보내어 태조 대왕의 영정(影幀)을 배접(褙接)하게 하였다. 태조 대왕 영정을 경기전(慶基殿)046)                  에 봉안하였는데 해가 오래 된 탓으로 초본(綃本)의 후면에 군데군데 떨어져 뜬 곳이 있어, 도신(道臣)이 계문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한성부에 명하여 구슬·패류(貝類) 등 패물을 고가(高價)로 사들이는 것을 금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궁혼(宮婚)으로 인하여 패물 값이 뛰어오르므로 임금이 마침내 금하게 된 것이다. 또 하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외읍(外邑)에서는 사람의 젖으로 인주(印朱)를 만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는 어떻게 먹이겠느냐? 모두 금지하라."
하였다. 임금이 빨지도 않은 옷을 입고 몹시 낡은 가죽 신을 신었으므로, 군신들로 보는 이는 모두 임금의 검덕(儉德)을 우러렀다. 장령        심각(沈殼)이 이로 인하여 민간에서 혼수를 다투어 사치스럽게 하려는 폐습도 특별히 금하도록 주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경외(京外)의 백성이 옮겨 가고 옮겨 오는 데에 공문을 받도록 하는 법을 신칙하여 감히 그 행지(行止)를 함부로 못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2월 17일 기해

평안도 어사 정창성(鄭昌聖)이 복명하여 서도(西道)의 잉여곡(剩餘穀)이 수령의 사복(私腹)으로 돌아가고 거사대(去思臺)·마애비(磨崖碑)가 소민에게 폐해만 끼치는 것임을 아뢰니, 임금이 통렬히 금할 것을 명하고, 위반한 자는 중벌로 다스리도록 하였으며 다른 도에도 똑같이 시행하라고 하였다.

 

2월 18일 경자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외방에서 생사당(生祠堂)의 폐단을 금하기를 마애비처럼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장령 한필수(韓必壽)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판결사 민수집(閔洙集)은 이미 연로(年老)하여 그 관직을 체차하였고 호조 참의 이종령(李宗齡)도 늙어서 소임을 감당하지 못하니, 청컨대 체개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판의금 한익모(韓翼謨)를 파직시켰다. 한익모가 임희교(任希敎)의 장률(贓律)을 논함에 있어서 자못 평서(平恕)의 논의를 주장하니, 임금이 그의 완형(緩刑)에 노하여 결국 파직시킨 것이다.

 

2월 19일 신축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종신(宗臣)의 활 쏘는 것을 관망하였다. 종친이 영락(零落)하고 침체하다 하여 하청군(河淸君) 이호(李壕)와 운남수(雲南守) 이진(李榗)에게 가자하고, 예조에 명하여 유학(幼學) 이명로(李命魯)를 입후(立後)시켜 그의 조부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영은 여러 차례 상사(上使)로서 북경에 들어갔었고 청근(淸謹)으로 일컬어져 작고할 때에는 염습(斂襲)할 옷가지도 없었는데, 임금이 그의 무후(無後)함을 가엾게 여겨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정운유(鄭運維)를 승지로 삼았다.

 

제주(濟州)의 과시(科試)한 시권(試券)을 상고하여 김필형(金必衡) 등 3인을 취하여 모두 급제(及第)를 내렸다.

 

2월 20일 임인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지알(祗謁)하였는데, 왕세손이 그대로 따랐다. 행례를 마치고 재전(齋殿)에 돌아와 시임·원임 대신과 2품 이상, 삼사(三司) 관원을 불러 모두 전정(殿庭)에 모이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종국(宗國)을 위하여 처분할 일이 있어 이미 진전(眞殿)에 아뢰었다."
하고, 이어 아뢴 글을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다. 거기에 이르기를,
"소신(小臣)이 주야로 품고 있는 자그마한 정성은 바로 추모하는 마음입니다. 근래에는 더욱 간절하던 차 천만 뜻밖에 또 금년을 맞게 되니, 멀리 서쪽 구름을 바라보고 단지 용어(龍馭)047)  를 따르고 싶은 생각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신색(神色)과 용모가 그래도 이만한 것은 재작년 중하(仲夏) 이후로 종국을 위하여 심중에 죄이던 것이 조금은 풀렸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 속에 울결(鬱結)한 바가 있는 것은, 세상 일은 헤아리기 어렵고 관계된 바도 지극히 중한데 이렇게 어물어물하고 세월만 보내다가는 뒤늦게 후회한들 어떻게 미치겠습니까? 또 꿈속에서 받자온 하교를 회상하고 종국의 중함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수레를 재촉하여 이곳에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신은 감히 하나하나 조진(條陳)하겠습니다.
아! 내일은 바로 소신이 정성 왕후(貞聖王后)를 친영(親迎)한 날입니다. 승환(承歡)하던 때의 일을 추억하며 당초에는 먼저 휘령전(徽寧殿)을 전알(展謁)하고 전작(奠酌)하려 하였으나 뜻밖에 건원릉(健元陵)에 일이 있어 삼군(三軍)을 생각하고 특별히 중지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아뢰려고 한 것은 중대한 바가 있으니만큼 어떻게 삼군을 고념(顧念)하겠습니까? 문밖에 와서야 감히 아뢸 바를 기록하였습니다. 동궁(東宮)을 데리고 찾아뵙는 것은 충자(沖子)048)  가 삼년상(三年喪) 이내이기 때문에 평일에는 결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이름을 바루고 주창(主鬯)049)  이 소중하니, 어떻게 데리고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은 재작년에 동궁으로 하여금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뒤를 삼으려고 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청컨대 아뢰겠습니다.
지금 동궁의 명칭은 바로 명나라의 건문(建文)의 고사(故事)050)  를 따른 것이었으나, 그 후에 생각하니 성조 문황제(成祖文皇帝)가 승통(承統)한 뒤로는 소목(昭穆)이 정정(正正)하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이후로 대대로 서로 승계하였습니다. 신은 지금 두 세자를 두었는데 효장이 아무리 형이라 하더라도 사도(思悼)가 무고하였더라면 효장은 순회 세자(順懷世子)051)  와 소현 세자(昭顯世子)052)  가 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세가 이러하니 충자(沖子)로 하여금 효장을 이어 장통(長統)을 순승(順承)하게 하는 것이 의리에 당연합니다. 사도는 위호(位號)를 회복하고 묘우(廟宇)를 설치한다면 가위 곡진(曲盡)하다 할 것이니, 그 어찌 감히 딴 의논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무슨 난편할 사단이 있겠습니까? 또 이 일은 지금 근본을 바루지 않았다가 이 뒤에 다시 사사(邪辭)·괴설(怪說)로 우리 방국(邦國)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을 때에는 세신(世臣)이 된 도리에선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일은 비록 송(宋)나라 범진(范鎭)의 충성053)  으로도 말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아! 신축년054)  의 건저(建儲)와 대리(代理)는 이미 국조(國朝)의 고사가 있었는데도 신절(臣節)이 없는 죄과로 몰았는데, 더구나 이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으로 사도의 장일(葬日)에 신이 특별히 몸소 그 신주(神主)를 써서 뒤에 오는 신하들로 하여금 감히 용의(容議)치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역시 세상 일을 알기가 어려워 그러한 것이오나 이러한 몇 가지 일은 역시 절목상(節目上)의 일에 불과합니다. 신이 재작년 이후 주야로 마음속에 뻗치는 것이 있어 오늘날 벌떡 일어나서 이곳에 와 전알하게 된 것입니다. 대소 신민들은 반드시 이르기를, ‘이는 정성 왕후가 생각나서 온 것이라’고 할 터인데, 신이 비록 불효 불충하오나 어떻게 정성 왕후를 앞에 하고 종국을 뒤로 하겠습니까? 마음속에 뻗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후일에 제 11실(室)의 위패(位牌)에는 손(孫)이라 일컬을 자가 없을 것이고, 소자에게는 자(子)라고 칭하는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 3백 년 종국이 신의 몸에 이르러 그 계통을 중절(中絶)하게 된단 말입니까? 신이 지금 하지 않는다면 후일에는 더욱 말할 나위가 없고 장래에 필시 해괴한 일이 있을 터이니, 그렇게 된다면 열성(列聖)의 마음에는 어떠하겠으며, 소자 또한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 뵙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매 신은 먼저 죽고 싶을 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막중한 태실(太室)이 소자에 이르러 중절하게 되었습니다.
아! 척강(陟降)하시는 영령께서 그 후곤(後昆)이 있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더구나 보략(譜略)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기왕 있는 바에야 세계(世系)의 한 줄[行]이 지금 비어 있는데도 그것을 바루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웃 나라에서 듣도록 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그 근본이 바르지 못하면 일마다 구애(拘碍)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후일에 묻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두 세자가 있었는데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에 맏이를 따라 계승하였다고 한다면 내세울 만한 말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 일을 하지 않았다가 만일 생각지 못한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종국에는 어떠하며 소자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아! 소신의 심기(心氣)로 지금에 아뢰지 않는다면 나라 일이 어찌 되겠습니까? 또 꿈속에서 받자온 하교를 또 앞으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불효인 것이니, 이에 소자가 벌떡 일어나 달려와서 아뢴 것입니다. 이는 신하에게 순문(詢問)할 것도 아니고 고례(古例)를 널리 상고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동궁과 함께 행례하고 특별히 대신과 2품 이상과 삼사를 진전(眞殿)의 문 밖에 불러 이 뜻을 선유하고 충자 산(祘)으로서 효장의 뒤를 삼은 것입니다. 먼저 보략에다가 효장과 충자에게 연달아 ‘사(嗣)’자를 쓰면 이 뒤로는 아마 중절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지금 동궁을 데리고 휘령전(徽寧殿)에 가서 이 뜻을 알리고 또 함께 육상궁(毓祥宮)에 가서 행례하며 다음에는 효장궁에 가서 충자로 하여금 그 묘우에 절하게 하고 자식의 도리를 닦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신이 친히 글을 지어 대신을 보내서 종묘와 사직에 고유(告由)하겠습니다. 이 이후로는 종통(宗統)이 중절하는 한탄이 없을 것이고, 해동(海東)에는 반석과 같은 튼튼함이 있을 것입니다. 또 충자로 하여금 사도의 묘우에 소생(所生)의 도리를 다하게 한다면 충자에게도 아마 유감이 없을 것이며, 후폐를 막고 세신(世臣)을 안보하는 데에도 양득(兩得)이 될 것입니다. 주사(奏辭)가 여기에 미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보기를 마치자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와 영부사(領府事) 신만(申晩) 등이 일제히 아뢰기를,
"이는 나라의 중대한 일인데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셨으니, 아래에 있는 자가 어찌 감히 용의(容議)할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어 세손에게 이르기를,
"일후에 여러 신하들이 혹 이 일로 말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그른 일이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군자이냐, 소인이냐?"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소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상세히 기록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우사 충자의 오늘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종사의 복이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신간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소중한데 오늘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선정(先正)의 정론이 있는데, ‘조손간에 곧바로 계통하여도 예의(禮意)에 가합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도 본래 선정의 의논을 주장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의 의논은 나도 알고 있으나 국가의 일이란 반드시 이처럼 원만하고 온전하여야만 광명 정대하여 후폐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이 늘 전일의 일에 대하여 어찌 비통한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일후에 혹 신 등에게 지적하여 물으신다면 신 등이 장차 어떻게 대답하면 되겠습니까? 주상께서 한번 명백하게 하교하신 연후에라야 할 말이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이 이미 알고 있거늘, 어찌 다시 말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동궁께서 일후에 혹시 물으신다면 전하께서 하교하시지 않으신 일을 신 등이 어찌 감히 말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의 조모와 저의 어미가 있는데 어찌 모를 것인가?"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의 이 말은 일신의 화복을 위함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평일에 영상에게 서운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오늘의 말은 가히 참다운 충신의 말이라 하겠다."
하고, 이어 고유하였던 어제문(御製文)을 사각(史閣)에 보관하라고 명한 다음 반교(頒敎)를 사신(詞臣)에게 명하지 않고 어제문으로 중외에 반시(頒示)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 조운규(趙雲逵)를 불러 하유하기를,
"세손은 남의 뒤를 이은 예(禮)로써 이제는 의당 심제(心制)055)  를 하여야 하니, 주연(胄筵)에서는 오모(烏帽)와 백포(白袍)로 하고, 연거(燕居)056)  에는 흑립(黑笠)과 백포로 하며, 진현(進見)할 때에는 곤포(袞袍)로 하고, 소속 중관(中官)과 나인(內人)도 모두 한결같이 그 복을 따르게 하라."
하였다.

 

2월 21일 계묘

임금이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서 친히 향을 전하였다. 이어 육상궁(毓祥宮)에 배알하고 창의궁(彰義宮)에 들렀는데, 왕세손이 수행하여 행례하였다. 보첩(譜牒)에 ‘모년 모월 일(某年某月日)에 특명으로 왕세손으로서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잇게 하였다.’라고 쓰기를 명하여 종부시에 써서 내려 이로써 보첩에 수록하게 하였다. 저녁이 되어서야 환궁하였다.

 

경상도 암행 어사 윤사국(尹師國)이 복명하였다. 양산 군수(梁山郡守) 한광협(韓光協)을 하옥하였는데, 다스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2월 22일 갑진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친림하여 반교(頒敎)하였다. 교문은 전에 친히 지은 고유문을 두사(頭辭)만 고쳐서 반유(頒諭)하였다. 읽는 소리가 낮고 가늘다 하여 선교관(宣敎官) 이명식(李命植)을 물리치고, 승지 정광한(鄭光漢)으로 바꾸어 명하였는데 수고하였다고 하여 그에게 가자(加資)하였으며, 즉시 대령하지 않았다고 하여 전교관(展敎官)인 전적(典籍) 김약하(金躍河)를 해남(海南)으로 귀양보냈다가 바로 풀어 주었다. 국가에 큰 경사가 있는데도 예조에서 진하(陳賀)를 청하지 않았다고 하여 판서 조운규(趙雲逵)를 파직하고 이익보(李益輔)로 대신하였다. 대신 등이 진하를 청하지 않은 죄는 예관(禮官)과 같다고 하여 물러나와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불러들여 돈유하였다. 진하를 받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를 삼사(三司)에게 물으니, 모두 진하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특별히 장령 심각(沈殼)에게 승지를 제수하였으니, 심각은 장령으로 마침 입시하였다가 ‘종통(宗統)이 이미 바루어졌다.’고 하문할 때에 앙대(仰對)하였었다. 임금이 남들은 모두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심각이 혼자 나서서 대답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특별히 탁용한 것이다. 이에 친히 뭇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팔도에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지금부터는 동궁을 세손궁(世孫宮)으로 부르도록 명하였다.

 

엄린(嚴璘)을 승지로, 박필규(朴弼逵)를 집의로, 신응현(申應顯)을 장령으로, 정환유(鄭煥猷)를 지평으로, 김재록(金載菉)·정경인(鄭景仁)을 정언으로, 박사해(朴師海)를 부수찬으로, 원경순(元景淳)을 지경연으로, 서지수(徐志修)를 좌빈객으로 삼았다.

 

2월 23일 을사

정만순(鄭晩淳)을 승지로, 윤급(尹汲)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왕세손이 흑립(黑笠)과 참포(黲袍)·흑대(黑帶) 차림으로 시좌(侍坐)하였다. 임금이 효장묘(孝章廟)의 제문을 가지고 들어와서 읽어 보도록 하고 이어 세손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너의 소후(所後) 부모는 모두 효성이 있었기에 이러한 보답을 받게 된 것이다. 너에게 아비[禰]의 자리[位]가 없으면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하겠느냐? 네가 나를 섬기기는 효장이 나를 섬기듯이 하고 나라를 통어(統御)하기는 썩은 새끼로 육마(六馬)057)  를 어거하듯 하라. 제왕가(帝王家)는 범인과는 달라 한 번만 혹시 삼가지 않으면 아무리 필부(匹夫)가 되고 싶어 해도 될 수가 없다. 지금 너에게 하유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사신(史臣)은 상세히 기록하고, ‘1본(本)은 춘방(春坊)으로 하여금 써 올리게 하여 조석으로 살펴보도록 하라."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지금 나는 너를 효장(孝章)의 후사로 삼았다. 아! 몇 년이나 끊어졌던 종통(宗統)이 다시 이어졌으니, 동궁의 칭호를 전대로 쓰는 것은 마땅치 않다. 의당 근본부터 바루어야 하는 것이다. 아! 막중한 3백 년 종통에 나는 자식의 자리가 없었고 너에게는 아비의 자리가 없었으니, 이것을 중절(中絶)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번 일로서 일후에 흑 사설(邪說)이 일어난다면 이는 한갓 우리 종통을 어지럽힘이 될 뿐만 아니라, 내가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 열성조를 뵙는단 말이냐? 또 혹시 박치륭(朴致隆)같은 자가 다시 나와서 현혹한다면 비단 나에게 불충할 뿐만 아니라, 너의 아비에게도 되려 욕을 끼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매양 태갑편(太甲篇)058)  을 외우게 하였는데, 너의 아비로 하여금 전후로 기술한 글을 본받게만 할 수 있었더라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느냐? 아! 《자성편(自省編)》·《심감(心鑑)》·《훈서(訓書)》·《귀감(龜鑑)》 등의 책은 훈계가 더욱 간절하고 뜻은 더욱 깊은 것이었거만 한갓 말로만 가르친 꼴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너의 할아비가 주야로 가슴을 치며 속을 태운 연유인 것이다.
아! 위호(位號)를 회복하고 묘우(廟宇)를 세웠으니 너의 아비에게는 더없이 곡진(曲盡)하다 하겠다. 이 뒤에 만일 다시 이 일을 들추어 내는 자가 있다면 이는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역신(逆臣)인 것이며, 너도 혹 그러한 말에 동요되면 이 또한 할아비를 잊고 아비를 잊은 불효가 된다. 나의 이 뜻을 간직한다면 어찌 한갓 물리칠 뿐이겠는가? 중률(重律)로 처단해야 한다. ‘중률’ 두 글자는 너를 살육(殺戮)으로 인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예기(禮記)》에 이른바 ‘오직 인인(仁人)이라야 방축(放逐)하고 유배하여 중국(中國)에서 함께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 인륜은 지극히 중한 것이니, 비록 사서인(士庶人)이라 하더라도 한 번 후사를 정하면 뒤에 비록 아들을 둔다 해도 그는 중자(仲子)가 되는 것이니 이는 천경(天經)이요 지의(地義)인 것이다. 아! 너는 효장과 효순(孝純)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하면 종사(宗社)가 반석처럼 튼튼하고 대대로 서로 승계하여 천억 년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 3백 년 종사가 너에게서 망하게 되느니라.
사도(思悼)로 말하자면 너도 그날 너의 어미가 나에게 아뢴 말을 듣지 않았느냐?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된 것도 성상의 은총이옵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효성스러웠다. 이는 한갓 너의 어미의 마음만이 아닌 것이다. 너의 아비도 그날의 광경을 보았다면 아! 유명(幽明)이 바뀌었지만, 필시 너의 어미와 같이 나에게 고마워하였을 것이다. 아! 너의 할머니는 대의(大義)로써 능히 이를 판단하였으니, 재작년의 일은 너의 어미의 효심으로써 또한 간격(間隔)이 없었을 것이다. 아! 지금 나는 종국(宗國)을 위하여 쇠미한 가운데에서도 궐연(蹶然)히 일어나 이 일을 하였으니, 비록 팔역(八域)에 보이고 1백대에 전한다 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고 길이 내세울 말이 있을 것이다. 아! 며칠 동안 이 궐(闕) 저 궐에서 너도 너의 어미나 할머니의 기상에 조금도 원망하는 기미가 없었음을 보았을 것이다. 충자(沖子)야 너도 어찌 감히 생각지 않겠느냐? 아! 전(殿)에 아뢰는 것도 중한 일이다. 너의 도리에 있어서는 사도묘(思悼廟)에도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나의 오늘 훈계를 지켜 항상 생각을 이에 두어 종국을 실추하지 않는다면 이 묘우도 앞으로 태실(太室)을 따라 길이 전해질 것이니 그리되면 어찌 너의 효도가 아니겠느냐? 너의 효도가 아니겠느냐? 또 장일(葬日)에 친히 신주의 면(面)을 쓴 것도 너의 도리에 어찌 감히 손을 대겠으며 해동(海東)의 신자(臣子)로서 누가 감히 용의(容議)하겠느냐? 이는 너무 심한 말 같다. 지금부터는 종통이 만세토록 크게 정해졌으니 너의 소생부(所生父)의 묘우도 저절로 1백대토록 편안하게 될 것이다. 아! 무슨 일이 이보다 더 크다 할 것인가? 만일 사설(邪說)에 흔들려 한 글자라도 더 높혀서 받들면 이는 할아비를 잊은 것이고 사도(思悼)도 잊은 것이 된다. 어찌 차마 이를 하겠느냐? 어찌 차마 이를 하겠느냐? 아! 충자야 이를 명심하라. 이를 명심하라. 이렇게 하유하는 것은 다른 강연(講筵)의 말과는 사체가 크게 다르니, 사관으로 하여금 청사(靑史)에 쓰게 하고 또한 정원으로 하여금 조보(朝報)에 반포하게 하라."
하였다.

 

4월 초1일 종통을 바룬 경과(慶科)를 근정전(勤政殿) 옛터에서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심각(沈殼)이 나이 칠십이 다 되었으니 밤낮으로 수고하는 직책을 맡길 수 없다 하여 호조 참의로 옮겨 제수하고, 김화진(金華鎭)을 승지로 삼았다.

 

2월 25일 정미

밤에 어떤 별이 심성(心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중수청(重修廳) 도감에서 일을 시작하겠다고 아뢰니, 임금이 융복(戎服)을 갖추고 건명문(建明門)에서 말을 타고 건원릉(健元陵)으로 나아갔다. 옥당관(玉堂官) 김귀주(金龜柱)를 보내어 역소(役所)에서 민폐를 끼치는가 염찰하라 하였으며, 이어 재실에 나아가 천담복(淺淡服)으로 갈아입고 알릉례(謁陵禮)를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예방 승지 정광한(鄭光漢)에게 특별히 가자하고, 현릉(顯陵)과 목릉(穆陵) 및 숭릉(崇陵)을 연달아 전알한 다음 건원릉의 재소(齋所)에 돌아와 유숙하였다.

 

2월 26일 무신

임금이 새벽에 건원릉에 배알하고 정자각에 가서 살펴본 뒤에 소차(小次)로 다시 돌아왔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신은 죽어 마땅한데 죽지 못하고 사첩(史牒)에 일찍이 없었던 처지를 당하여 경경(耿耿)한 일편 단심은 오직 사직을 안정시키고 의리를 밝히는 데에 있었습니다. 이는 성상의 뜻과 신의 마음이 같지 아니한 것이 아니면서 접때 재전(齋殿)에서 하교하셨을 때에 우매한 소견으로 잘못 선정(先正)의 논의로써 대답을 드렸었는데, 그 뒤에 크게 깨닫고 그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비록 선원보(璿源譜)로 말씀드리더라도 선조(先朝)께서는 손자의 자리가 있고 전하께서는 아들의 자리가 있어야만 비로소 계계 승승하는 종자(宗子)·종손(宗孫)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상의 염려하심이 그토록 심원하셨는데, 당초 소견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였음이 한스러울 뿐이니, 신이 먼저 죄를 받아야 마땅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경의 소견이 좁다고 여겼었는데, 그날 아뢴 말을 듣고 참으로 충신이라고 말하였다. 경의 고심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지금에야 비로소 석연해졌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망팔(望八)의 나이에 양일 동안 직접 나와 개수(改修)하는 역사(役事)를 몸소 살펴보았는데, 장수(匠手)와 모군(募軍)에게 어찌 위로를 베풂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모두가 척강(陟降)하시는 영령의 적자(赤子)들인데, 탁지(度支)의 무명 2동(同)과 진휼청의 쌀 20석을 특별히 도감에 내리니 무명은 공장(工匠)에게 주고 쌀은 모군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윤동섬(尹東暹)이 이조(吏曹)의 별세초(別歲抄)을 읽어서 아뢰니, 윤광찬(尹光纘)을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가 승지 이담(李潭)이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매, 임금이 허락하였다. 저녁에 환궁하였다.

 

2월 27일 기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춘방관(春坊官)을 불러 촌음(寸陰)을 아끼라는 뜻으로 하교하고, 비록 전좌(殿座)가 있더라도 강연(講筵)을 철수하지 말라고 하였다.

 

중신 김양택(金陽澤)을 보내어 강도(江都)에서 과거를 설행하여 유택하(柳宅夏) 등 4인을 뽑아 모두 급제(及第)를 내렸다.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뒤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라고 명하였으니, 그 후손 이홍수(李弘秀)의 상언(上言)에 따른 것이다.

 

2월 28일 경술

정광한(鄭光漢)을 도승지로, 권도(權噵)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수가(隨駕)하였던 군병의 활 쏘는 것을 친히 시험하였다. 이튿날도 또 이같이 하고 차등 있게 반상(頒賞)하였다.

 

대사간 홍자(洪梓)·헌납 정창성(鄭昌聖)·지평 이창임(李昌任)·교리 박필규(朴弼逵)에게 탈고신(奪告身)의 율을 시행하라고 명하였으니, 여러 차례 소명을 어기고 불응하였기 때문이었다.

 

2월 29일 신해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연(輦)을 타고 옥서(玉暑)059)  을 지나면서 교리 김귀주(金龜柱) 등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친히 어필(御筆)을 내리고 왕세손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것은 성종조의 고사(故事)이다. 한(漢)나라 환영(桓寧)은 ‘모두가 계고(稽古)의 힘060)  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너의 궁료(宮僚)들 중에도 필시 계고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너는 춘방관과 서로 글 뜻을 강론하면서 소우(少友)로 대우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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