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임자
임금이 황단(皇壇)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 대보단에 나아가 봉실(奉室)과 단유(壇壝)를 봉심하였다. 대개 이 해 이 달은 숭정 황제(崇禎皇帝)가 순사(殉社)한 주갑(周甲)이기 때문에 임금이 비감이 들어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또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지배(祗拜)하고 환궁하는데, 연이 흥화문(興化門)에 이르러 3도(道)의 유생들이 소장을 가지고 복궐(伏闕)한 자를 보고는 물으니, 고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문묘(門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한 사연이었다. 소두(疏頭)를 소견하여 읽어 아뢰라 하고, 이어 비답을 내리기를,
"선정신의 시종(始終)은 이미 익히 알고 있으나 종향은 사체가 중한 것이다. 전에 이미 면유(面諭)하였거니와 경망하게 서두르지 말라."
하였다. 뒤에 특지로써 종향하게 하였다.
검열 이규위(李奎緯)에게 탈고신(奪告身)의 율을 시행하였다. 이규위는 성질이 불손하여 사소한 일로 원리(院吏)를 매로 다스리려고 하니, 승지가 고례(古例)를 들어 힐난하였으나 이규위는 더욱 노하여 끝내 억지로 다스렸다. 임금이 듣고 이는 체통을 무너뜨렸고 구규(舊規)를 깬 것이니, 신진(新進)들의 버릇은 키울 수 없다 하고 처음에는 문비(問備)를 명하였다가 마침내 그 관직을 삭탈한 것이었다.
3월 2일 계축
임금이 시사(試射)한 군병들에게 반상(頒賞)하고 하교하기를,
"마첩(馬帖)으로 주는 상은 유명 무실하니 지금부터는 포목으로 대신하도록 조례(條例)를 정하라."
하였다.
3월 3일 갑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제주 어사(濟州御史) 이수봉(李壽鳳)이 본도(本島)의 인재로서 침울된 폐단을 힘써 하였습니다. 청컨대 명월진(明月鎭)의 조방장(助防將) 한 자리를 본주의 자벽(自辟)061) 에 맡기어 임기가 만료하면 승천(陞遷)하기로 조례를 정하여 한 진보(鎭堡)로 한 섬의 소망을 위로하도록 허락하심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수령의 거하자(居下者)062) 는 2주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서용하고 2품으로 추은(推恩)할 사람은 3대를 한하여 옥서(玉署)를 거쳐야만 비로소 이조(吏曹)의 증직을 허락하는 것을 드러나게 정식(定式)하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 홍봉한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함경도의 감시 어사(監市御史) 홍낙인(洪樂仁)이 복명하였다. 임금이 별단(別單)에 민폐를 아뢴 것을 보고 비국(備局)에 품처를 명하고, 하교하기를,
"남북의 병사(兵使)에게 각각 무사 한 사람씩을 천거하게 한다면 북방 장정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고 상신(相臣)이 청한 바가 있기에 즉시 허락하였다. 총을 금함에 있어서도 변금(邊禁)을 엄히 하는 일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총을 금한 것도 부족하여 어망(魚網)까지 금했다고 하는데, 아! 북쪽 백성들은 산에서 사냥도 못하고 물에서 고기도 잡지 못하게 하니 사냥도 못하고 고기도 잡지 못하게 한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더구나 총을 집에다 갈무리하여 두고 북방의 장정들로 하여금 무예를 익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역시 올바른 계책이 아니니, 금령을 풀어 주게 하라. 토산(土産)의 말[馬]을 몰래 빼내오는 것이나 방군포(防軍布)를 사사로이 바꾸어 이용하는 것을 엄중히 신칙하라. 삼수(三水)·갑산(甲山)의 환자곡이 넉넉치 못한 것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더 획급(劃給)하게 하여 먹여주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을 위안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3월 4일 을묘
임금이 각전(各殿)과 각릉(各陵)의 한식제(寒食祭)에 쓸 향과 축문을 지영(祗迎)하고 이어 숭현문(崇賢門)으로 돌아왔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옥당의 여러 신하들이 전일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찬(饌)을 내리고 어필(御筆)을 내린 데 대하여 사례하는 전문(箋文)을 올렸으니, 부제학 이최중(李最中) 이하 재직자 11인이었는데, 임금이 친히 받고 하교하기를,
"작금(昨今)의 거조는 관첨(觀瞻)하려는 것이 아니며, 세손과 함께 한 것은 의의가 깊은 것이다. 관중(管仲)의 ‘거(莒)에 있었을 때의 경계063) ’로써 오늘을 잊지 않음이 좋을 것이다."
하니, 이최중 등이 머리를 조아리고 일어나서 사례하였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전 지평 정방(鄭枋)을 단천(端川)으로 귀양보냈으니, 향관(享官)으로서 외방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방(尹坊)·홍지해(洪趾海)를 승지로, 홍낙성(洪樂性)을 대사헌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대사간으로, 이석재(李碩載)를 집의로, 최태형(崔台衡)을 사간으로, 이택진(李宅鎭)을 헌납으로, 윤사국(尹師國)을 정언으로, 이계(李溎)를 지평으로 삼았다.
3월 5일 병진
임금이 조강을 행하고 이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이택진(李宅鎭)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오늘의 상참은 곧 소조회(小朝會)로써 사체가 자별한데 대신(臺臣)으로서 패초를 어긴 이가 많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홍양한(洪良漢)을 승지로 삼았다.
백성 하나가 정릉(貞陵)의 금표(禁標) 안에 암장(暗葬)한 자가 있어 헌신(憲臣) 한필수(韓必壽)가 말을 하니, 임금이 한성부의 낭관(郞官)에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한 바 과연 사실이므로 파내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겹겹이 매장한 것은 금령(禁令)을 내리기 전이었으니,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백골을 묻어 준 정사를 본받아 모두 불문에 부치고 앞으로는 더욱 금제(禁制)를 엄히 신칙하게 하였다.
춘방관(春坊官)을 불러 주연(胄筵)에서 질문한 글의 뜻을 물으매, 상세하게 대답을 못하자, 즉시 물러가라고 명하였으니, 춘방관은 바로 이성규(李聖圭)·이진복(李鎭復)이었다.
3월 6일 정사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장령 한필수(韓必壽)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조 참판 서명신(徐命臣)이 동가(動駕)가 하루 밖에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시골로 내려간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청컨대 추고하소서."
하니, 임금이 서명신을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참판으로, 이기경(李基敬)을 대사간으로, 홍술해(洪述海)를 교리로, 이명환(李明煥)를 부교리로, 김익(金熤)을 수찬으로, 한익모(韓翼謨)를 판돈녕으로, 남태저(南泰著)를 호조 참판으로, 노성중(盧聖中)을 장령으로, 이항조(李恒祚)를 지평으로, 심수(沈鏽)·송영중(宋瑩中)·정운유(鄭運維)·조영순(趙榮順)을 승지로 삼았다.
3도(道) 유생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종향(從享)하자는 청을 다시 아뢰어 소가 정원에 도착하였는데도, 전에 이미 비지(批旨)를 받들었다고 하여 승지의 척퇴(斥退)한 바가 되었는데, 임금이 듣고 하교하기를,
"명색이 장보(章甫)064) 라면 비록 하루에 열 번의 상소를 올리더라도 저지하는 것은 출납(出納)을 성실하게 하는 도리에 어긋난다."
하고, 받지 않은 승지를 책망하여 파직시켰다.
3월 7일 무오
간원 【사간 최태형(崔台衡)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지평 이계(李溎)가 먼 능침의 제관으로 차출되어 갔는데, 정원에서 혼동하고 명소패(命召牌)를 내려 막중한 명패를 온종일 빈 집에서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해당 승지를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기장(機張)의 전 현감 하명상(河命祥)이 관곡(官穀)을 환롱(幻弄)하였기 때문에 5년 금고(禁錮)의 율을 시행하였다. 하명상은 영남 사람인데, 거부(巨富)로 이름이 나서 몇 만의 재산을 쌓고 있었다. 임오년065) 에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이 많자 하명상이 1천 포(包)의 곡식을 내어 사사로 진휼하여 상을 요망하였는데, 도신(道臣)의 계문으로 인하여 그에게 자급(資級)을 더하고 또 이 직을 제수하였었다. 고을에 도착하자 관곡을 환롱하다가 일이 발각되었으니, 법으로는 의당 원배(遠配)하여야 하나 임금이 전의 일을 생각하고 율을 감하여 단지 금고의 율을 시행하라고만 명한 것이다.
3월 8일 기미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의 친제(親祭)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하였다. 이어 익선관(翼善冠)과 흑단원포(黑團圓袍) 차림으로 육상궁에 나아가 경신일(庚申日)에 친제를 지냈으니, 기신(忌辰)인 때문이었다. 저녁에야 환궁하였다.
3월 9일 경신
조덕성(趙德成)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0일 신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여 《맹자(孟子)》를 강하였다. 등문공장구(滕文公章句)의 연우반명장(然友反命章)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갑신년을 당하여 황단(皇壇)에 배제(陪祭)한 지가 어제 일 같은데, 이제 또 이 해를 만났다. 3년의 복(服)은 비록 입지 못했더라도 이달을 한정하여 연거(燕居)에도 길복(吉服)을 입지 않으련다. 〈인현왕후가 승하한 지 주갑(周甲)이 되는〉 신사년066) 에는 풍악을 아예 갈무리하여 두고 한 해를 보냈는데, 금년에는 풍악을 거두어 매단 지 한 달이 되었으니 내가 뜻이 있음을 참작하여 헤아리도록 하라. 또 건원릉(建元陵)의 정자각(丁字閣)은 명나라의 영락(永樂)067) 무자년068) 에 세워 선묘(宣廟)병술년069) 에 중수하였고 또 금년에 개수하였는데 해는 비록 다르지만 월일(月日)은 서로 부합하니,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고, 능역 도감(陵役都監)에서 노고하였다 하여 여러 당상에게 상을 내리고 도청(都廳) 이수봉(李壽鳳)에게는 가자하였으며, 《보략(譜略)》을 수정한 노고로써 종부시 정(宗簿寺正) 이득배(李得培)에게 가자하고 승지로 삼았다.
예조 참판 서명응(徐命膺)이 또한 전주(全州)에서 이날 복명하였는데, 영정(影幀)의 가배(加褙)를 감독한 노고로써 말[馬]을 내리는 상전(賞典)이 있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홍낙성(洪樂性)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춘방관 이휘중(李徽中)이 생기(省記)070) 가 이미 들어갔다는 핑계로 문안관(問安官)의 소임을 면하려고 다른 동료에게 넘겼으니 형적(形跡)이 기탄없는 데 관계됩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금년 이달에 황단(皇壇)에 친제하는 것은 의종 황제(毅宗皇帝)가 순사(殉社)한 날이기 때문이다. 《춘추(春秋)》에는 대부(大夫)를 위해서도 오히려 만무(萬舞)071) 에서 약(籥)을 제거하였는데, 하물며 명나라의 일에 있어서이겠는가? 등가(登哥)072) 나 헌가(軒架)073) 는 모두 진열만 하고 풍악은 울리지 못하게 하며, 음복(飮福)도 길례(吉禮)이니 없애도록 하라. 예관을 보내어 선무사(宣武祠)074) 에 치제(致祭)하고, 정동 관군사(征東官軍祠)075) 에도 똑같이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3도 유생 조규운(趙奎運) 등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문묘 종향의 청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1일 임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밤에 임금이 숭정전(崇政展)에 임하여 친히 서계(誓戒)076) 를 살폈으니, 장차 황단의 대제(大祭)를 행하기 때문이었다. 여러 제관들에게 아주 깨끗이 치재(致齋)하라고 면칙하였다.
임금이 괴원(槐院)077) 의 궐직(闕直) 때문에 여러 관원의 시골에 있으면서 녹(祿)만 받고 있는 자를 잡아들이라고 하였는데, 그 수효가 매우 많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문·무과에 권지(權知)라는 명칭을 둔 것은 비록 미관(微官)이더라도 녹을 없게 하지 못하도록 함에 뜻이 있는 것인데, 이 일로 인하여 문무관으로서 홍패(紅牌)을 안고 시골에서 늙는 자가 몇이나 되는지 모르며, 아울러 그 사람이 살아있는지 조차도 듣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니, 이 어찌 《추서(鄒書)》078) 의 ‘〈사단(四端)이 있는 자를〉 크게 넓혀 충만시킬 줄 알아야 된다.’는 뜻을 강(講)하였다고 하겠는가? 전조(銓曹)로 하여금 문·무관으로 나이가 가장 많으면서 관직이 없는 사람부터 먼저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고, 이어 그 이름을 써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성의(聖意)가 엄체(淹滯)를 불식(拂拭)하는 정사에 개연(慨然)한 뜻을 두어 비록 이러한 명이 있었으나 전신(銓臣)이 된 자가 이를 받들지 못하여 마침내 실효가 없었으니, 듣는 사람들이 한탄하였다.
3월 12일 계해
해남 어사(海南御史) 이명환(李明換)이 돌아와서 현감 구세온(具世溫)이 관곡(官穀)은 소두(小斗)로 주고 대두(大斗)로 받으며, 진곡(賑穀)은 백성에게 주지 않고 사복(私腹)을 채우는 등 탐욕스럽고 불법만 저지른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의금부에 명하여 핵실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헌납 김회원(金會元)은 호남의 시골에 있을 때에는 위세만 부리기로 일을 삼다가 소명(召命)을 받들게 되어서 돈을 빌리지 않은 부민(富民)에게 사감(私憾)으로 형을 가하였습니다. 엄히 징계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김회원을 종성부(鍾城府)에 귀양보내라고 명하고, 그때의 도신(道臣)으로서 장문(將聞)하지 않은 자도 파직하라고 하였다.
3월 13일 갑자
임금이 조강을 행하여 《맹자(孟子)》를 강하였다. 왕세손에게 시좌(侍坐)하라고 명하고, 묻기를,
"등문공(滕文公)은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자의 모범이 될 수 있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너는 소국(小國)을 다스리는 임금의 모범이 되고 싶으냐, 천하를 다스리는 자의 모범이 되고 싶으냐?"
하니, 대답하기를,
"원컨대 천하를 다스리는 자의 모범이 되고 싶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뜻만은 크다. 사신(史臣)은 기록해 두어라. 만일 천하를 다스리는 자의 모범이 못되고 또 소국을 다스리는 임금의 모범도 못된다면 유독 저 사신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중국의 문물(文物)을 고증할 곳이 없으나 유독 우리 나라에만 기(杞)·송(宋)을 고증할 수가 있어079) 한 조각 건정지(乾淨地)가 오직 황단(皇壇)에 있다. 황하(黃河)가 맑아지는 시기는 점칠 수 없으나, 우리 나라의 삼단(三壇)080) 은 만세(萬世)를 지나도록 길이 남을 것이니, 너도 의당 이러한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헌가(軒架)를 매달고도 풍악을 울리지 않은 것은 또한 명나라를 추모하는 뜻이다. 세손으로 하여금 나를 따라 행례하게 하라."
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성 원인손(元仁孫)에게 명하여 여러 유생(儒生) 중에서 강(講)에 능한 자를 인솔하게 하고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는 동몽을 배우고 있는 자를 인솔하게 하여, 여러 유생은 《주역(周易)》의 괘(卦) 하나를 강한 다음 서로 문난(問難)하게 하고, 동몽은 각각 읽은 바를 강하게 하고는 세손에게 명하여 글의 뜻을 질문하게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옛날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대부(大夫)나 사(士) 중에서 준수한 사람을 청컨대 태자(太子)와 함께 놀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는 지금 세상에서는 행할 수 없는 일이나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바로 세자를 위해서이다."
하고, 이어 찬(饌)을 내리고 지필묵(紙畢墨)을 차등 있게 상사(賞賜)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능역(陵役)을 감독한 공로로 지방관인 양주 목사(楊州牧使) 김상중(金尙重)에게 한 자급을 더하고 불러서 민폐의 유무(有無)를 물었다. 또 해미 현감(海美縣監) 황섬(黃暹)을 불러 ‘전감(前鑑)081) 이 멀지 않다.’는 뜻으로 면유하여 보냈다.
3월 14일 을축
이진규(李晉圭)를 헌납으로 삼았다.
3월 15일 병인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임하여 황단(皇壇)의 습의(習儀)를 보았다. 여러 대신과 제관(祭官)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하교하기를,
"당초에는 의종 황제(毅宗皇帝)가 순사(殉社)한 19일에 지내려고 철악(撤樂)을 명하였으나 옛날에는 대부(大夫)도 그 사당에 제사를 올릴 때에는 역시 풍악을 썼는데, 더구나 천자에게 제를 올림에 있어서랴? 의절(儀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비단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는 탄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의종 황제의 하늘에 계신 영령도 필시 ‘나 때문에 두 황제의 풍악까지 거두게 되었다.’ 한다면 신명(神明)의 도리에서도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나는 그 다음 날로 물려서 행하려고 하는데, 여러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여러 신하들은 이의가 없었으나 유독 부제학 이최중(李最中)과 검열 조준(趙㻐)만이 아뢰기를,
"날을 이미 가렸으니, 하늘에 계신 영령도 반드시 강감(降監)할 것입니다. 이날 풍악을 쓰지 않고 세 황제를 합향(合享)한다 해도 무엇이 안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중의(衆議)를 따라 20일로 물려 정하고 세손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명나라의 은혜 아닌 것이 없다. 너를 불러와서 보게 한 것도 존주(尊周)의 뜻을 알게 하려 함이다."
하고, 다시 풍악을 울리며, 습의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3월 16일 정묘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약원(藥院)의 신료(臣僚)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대사(大事)는 제사에 있다. 우리 황제가 순사(殉死)한 것은 실로 만고에 없었던 일이고 망팔(望八)의 나이에 친향(親享)한 것도 만고에 없었던 바이다. 충과 효는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아닌 것이니 내가 3일간 소식(素食)을 행하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지금의 이 하교는 후일의 충신 의사를 권면할 만하오나 황은에 보답하는 길이 어찌 다만 소사(疏食)의 말절(末節)에만 있다 하겠습니까? 원하건대 힘을 헤아려서 행하소서."
하였다.
부교리 이명환(李明煥)이 상소하기를,
"올해 갑신년(甲申年) 3월 19일에 우리 조선에서 황단에 제사를 올림은 천하의 대례(大禮)인 것입니다. 지금 주상 전하께서 천하의 대의(大義)로써 천하의 대례를 행하시니, 앞으로 천하에 내세울 말이 있게 됨은 명백한 일입니다. 삼가 어제의 전교를 보니 20일에 행례한다 하였고, 이어 위에서는 슬픔에 잠기고 아래에서는 펼 수 없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신은 꿇어앉아 재삼 읽으면서 눈물이 쏟아짐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기왕에 소회가 있고 또 직책이 있는데 그대로 숨기고 있는 것은 죄가 되므로, 신이 감히 고하여 성상께서 재택(裁擇)하시는 데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이번에 향사를 지냄에 있어서 비록 전기(前期)해서 날짜를 고하는 의식은 없었으나 서계(誓戒)도 이미 받았고 의식도 익혔으니, 이제 와서 물려서 행하려는 것은 혹 갑작스러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성상의 비통한 정성으로 목연(穆然)히 심수(深邃)한 금중(禁中)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에 잠기시어 연초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마치 하루와 같이 하셨은즉 그것만 해도 벌써 천지를 감동시키고 세 황제를 맞아들이기에 족할 것이니, 하늘에 계신 세 황제의 영령도 필시 우리 조선으로 환히 돌아와 단유(壇壝) 위에 강감(降監)하실 것입니다. 또 먼저 정하였던 말을 생각하면 이날이 어떠한 날입니까? 천지에 성진(腥塵)이 가득하여 제향을 지낸 만한 곳이 없으니 이날에 이 행례가 없다면 세 황제의 궐향(闕享)하는 슬픔도 행례 중의 서운함과 비교하여 어떻다 하겠습니까? 더구나 이 예(禮)는 창시(創始)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풍악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은 이날만은 차마 풍악을 울릴 수 없다 하여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려서 다른 날로 정한다면 풍악은 비록 갖추어지겠지만 이날을 다시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날을 기왕 못 얻는다면 당초에 창시하신 성왕의 본의와는 벌써 다른 것이니, 이 예는 참으로 명분을 붙이기가 어렵겠습니다. 예에 명분을 붙이기 어렵고 풍악을 갖추는 것보다는 차라리 풍악은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예에 명분이 있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에도 옥백(玉帛)과 종고(鍾鼓)를 말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먼젓번 갑신년082) 에 이미 행했던 예가 있습니다. 지금 처음에 정했던 날짜에 풍악을 걷우고 예를 행한다면 비록 구성(九成)083) 의 절차에는 감쇄(減殺)가 있다 하겠으나 땅을 쓸고 제사지내는 뜻에는 어긋남이 없을 것이므로 이날 이 예를 행함은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이명환을 불러 여러 신하들과 서로 문난(問難)하게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상순(上旬)에 제사를 지냈으므로 풍악이 없어서는 안되었으나, 금년에는 갑신년의 주갑(周甲)이기 때문에 물려서 행한 것이니, 비록 땅을 쓸고 제사지내며 풍악이 없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상복(金相福)은 말하기를,
"지금은 황단(皇壇)에 합향(合享)하는 것이 태실(太室)과 같으므로 압존(壓尊)하는 혐의로움은 없으니, 순사(殉社)한 날이라고 하여 풍악을 쓰지 않을 까닭은 없겠습니다."
하였으며, 봉조하 유척기(兪拓基)는 말하기를,
"풍악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날을 물리는 것은 자못 날을 잡은 본의가 아닙니다. 풍악이란 신명(神明)과 서로 사귀게 되는 것이므로 폐할 수 없으니, 처음 정한 날에 풍악을 써도 의리에 거스르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고, 예조 참판 서명응(徐命膺)은 말하기를,
"옛날에는 신일(辛日)에 제천(祭天)하였는데 황단의 제향도 또한 제천하는 것입니다. 이달 20일은 신일인데 신일을 얻기는 어렵고 풍악을 쓰는 것도 폐할 수 없으니 물려서 행한다는 것도 근거없는 바는 아닙니다."
하였으며, 공조 판서 홍계희(洪啓禧)의 말도 서명응과 같았다. 임금이 이명환에게 비답을 내리기를,
"숨김이 없음을 가상히 여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 비록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으로써 위축되지 말고 소회가 있으면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강원도 암행 어사 김상집(金尙集)이 복명하였다. 임금이 서계(書啓)를 보고서 횡성 현감(橫城縣監) 윤면구(尹勉矩)에게 상을 내리고 원주 판관(原州判官) 이명즙(李命楫)을 파직하였다. 또 영남·호서의 쌀과 벼 2천 석을 설진(設賑)한 6읍에 운송하여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라고 하였다.
3월 17일 무진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서 황단(皇壇)에 쓸 향을 지영하였다. 이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배알하고 황단의 재실에서 재숙(齋宿)하면서 2일간을 머물렀다. 정원에 명하여 혹 피국(彼國)의 자문(咨文)이 나왔다 하더라도 대향(大享) 전에는 아뢰지 말라 하였다.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이 황단의 향을 침향(沈香)을 쓰지 않고 자단(紫檀)을 쓰는 것이 미안한 일이라고 아뢰니, 임금이 이 뒤로는 비록 섭행(攝行)한다 하더라도 모두 침향을 쓰도록 하였다.
충량과(忠良科)의 문·무인으로 충신의 자손된 자와 명나라 사람의 자손된 자는 모조리 군직(軍職)을 맡겨 참제(參祭)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3월 19일 경오
임금이 황단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이어 단소(壇所)에 나아가 신탑(神榻)에 봉안(奉安)한 친제(親製) 열천지(冽泉志)를 몸소 살피고 오시(午時)가 되어 상선(常膳)을 들지 않으니, 약원의 여러 신하들이 굳이 들기를 청하자, 임금이 오열(嗚咽)하며 말하기를,
"옛날 만세산(萬歲山)084) 의 일을 생각하면 음식이 어떻게 넘어가겠느냐?"
하고, ‘황조 일월 아동 대명(皇朝日月我東大明)’의 여덟 자를 써 내리면서 인쇄하여 배제(陪祭)한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제물의 돼지가 살찌지 않았다고 하여 전생서 령(典牲署令)과 해서(該署)의 제거(提擧)를 파직하였다.
3월 20일 신미
임금이 친히 황단에 대향(大享)을 행하였다. 요연(燎烟)이 피어 오르기 시작하고 아악(雅樂)이 한창 울리는데,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사람을 엄습하여 숙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또 구름과도 같고 무지개와도 같은 기운이 단상의 황막(黃幕)에서 일어나 조금 후에 사라졌다. 예를 마치자 막차(幕次)로 돌아와서 무신년085) 의 훈명(勳名) 중에 있는 분무(奮武) 두 자를 양무(揚武)로 고치라고 명하였으니, 의종(毅宗)의 휘호(徽號)이기 때문이다.
임금이 선무사(宣武祠)에 거둥하여 친히 글을 지어 경리사(經理使) 양호(楊鎬)의 제를 지내고, 사현(沙峴)에 있는 경리사의 비를 운반해다가 사당 곁에 세우라고 명하였다.
3월 21일 임신
주강을 행하였다.
사학(四學)의 유생 안구(安榘)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효종 묘정(廟庭)에 추배(追配)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안구를 불러 꾸짖기를,
"제배(躋配)는 중대한 예인데 너는 겨우 어린애를 면한 놈이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냐?"
하고, 이어 비답을 내려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고 그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게 하였으며, 봉소(俸疏)한 승지 이득배(李得培)를 파직하였다.
좌빈객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여 주연(胄筵)의 밝고 넓은 학문은 간단(間斷)이 없어야 하는데, 《맹자(孟子)》와 《중용(中庸)》을 이미 강하고 도로 걷어치우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므로 하루에 두 강연을 나누어 열기를 청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경의 뜻은 비록 옳지마는 ‘탐심이 많아 얻기를 힘쓴다.[貪多務得]’는 것은 선유(先儒)들의 경계한 바가 아니었던가? 하루에 두 책은 너무나 번거로우니 조연(朝筵)에서는 《중용》을 강하고 석연(夕筵)에서는 《사략(史略)》을 강하도록 춘방(春坊)으로 하여금 알게 하라."
하였다.
정상순(鄭尙淳)·김응순(金應淳)·이수봉(李壽鳳)을 승지로, 정술조(鄭述祚)를 장령으로, 정광충(鄭光忠)을 대사간으로, 이태정(李台鼎)을 지평으로, 김노진(金魯鎭)을 헌납으로, 이계(李溎)를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사복시(司僕寺)에 나아가 죄인 강덕윤(姜德潤)을 친국(親鞫)하였다. 강덕윤은 강익주(姜翊周)의 아들이니 적당 이훈(李壎) 및 조영득(趙榮得)과 서로 친밀한 것이 이여대(李汝大)의 공초에서 나타난 자인데, 이제서야 국문하게 된 것이다. 실정을 알고도 발고하지 않은 것으로 승복하매, 마침내 정법(正法)하였다.
대사헌 홍낙성(洪樂性)이 대관(臺官)은 옥관(獄官)과 서로 가부(可否)를 평론하는데, 그의 아버지 홍상한(洪象漢)이 현재 판의금을 겸대하고 있으므로 의리상 참국(參鞫)할 수 없다고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그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정광충(鄭光忠)을 특제(特除)하여 대사헌으로 삼고, 윤방(尹坊)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22일 계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원경순(元景純)을 예조 판서로, 이익보(李益輔)를 판의금으로, 남태제(南泰齊)를 경기 감사로, 이최중(李最中)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좌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병으로 오래 인입(引入)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3월 23일 갑술
제주(濟州) 사람으로 서울에 올라온 자들을 불러들이고, 승지 이수봉(李壽鳳)에게 명하여 위유(慰諭)하게 하였다.
장연부(長淵府)를 강등(降等)하여 현감으로 삼으라고 명하고, 부사 이경춘(李景春)을 파직하였다. 홍술해(洪術海)를 보내서 안핵 어사(按覈御史)로 삼고, 선전관 전익현(田翊顯)과 함께 가서 살인에 가담한 자 8인을 참(斬)하게 하였다. 당초 장연에 어영 둔전(御營屯田)이 있어 해영(該營)에서 장교를 보내 추쇄(推刷)하게 하였는데, 장교 김상첨(金相瞻)이 백성의 전답을 강제로 빼앗자 원한이 있는 백성들이 떼를 지어 김상첨을 흙으로 쌓아 눌러 죽였다.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자, 임금이 놀라서 말하기를,
"둔전의 장교가 아무리 미천하다 하더라도 역시 공인(公人)인데, 원통함이 있으면 호소하는 것이 옳지, 어떻게 감히 떼를 지어 기탄없이 죽일 수 있단 말이냐? 이러한 백성의 습성은 키울 수 없다."
하고, 어사를 보내 주모자는 핵실하여 모두 죽이고 수종자(隨從者)는 조사해 결방(決放)하여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걸리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3월 24일 을해
옥당관 홍낙명(洪樂命)·이명식(李命植)·김익(金熤)·이재간(李在簡)·이성원(李性源)·이명환(李明煥)·서명선(徐命善)·윤승렬(尹承烈) 등 8인을 갑산부(甲山府)에 귀양보냈는데,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적소(謫所)에 달려가라고 명하고, 영부사 신만(申晩)을 파직하였으며, 승지 김응순(金應淳)을 삭직하였다. 이때에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기신(忌辰)이 내일로 다가와 임금이 재계를 하면서 추모하고 있었는데, 옥당관들이 입직을 서로 다투면서 끝내 들어오지 않아 정원에서 번거롭게 여쭙기에 이르니, 임금이 노하여 분의(分義)로 꾸짖고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어 탕제를 들지 않자, 신만이 약원의 제조로서 들기를 굳이 청하고 김응순도 말을 하니, 임금이 유신(儒臣)을 감싸주는 것으로 의심하여 아울러 죄주었으나, 뒤에 바로 서용(敍用)하였다.
좌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병으로 재차 사직소를 올렸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사(呈辭)를 올리니, 임금이 수응(酬應)하는 것도 그 때가 아니라고 하여 마침내 면직시켰다.
임금이 편차인(編次人)을 불러들이고 친히 《경민편(警民篇)》을 지었다.
3월 25일 병자
임금이 인원 왕후의 기신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하였다. 수령으로서 과거에 응시하러 온 사람을 소견(召見)하고 농사 형편을 물었다. 옥당에 명하여 당(唐)나라의 18학사(學士)가 윤번으로 입직한 전례086) 를 모방해서 직차(職次)에 따라 윤번으로 들어오고 위반함이 없게 하라 하였다. 도승지 심수(沈鏽)가 말하기를,
"윤면헌(尹勉憲)의 선조에 ‘이(理)’자로 이름한 사람이 있으니, 윤면헌의 교리(校理) 직을 체개해야 합니다."
하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철보(李喆輔)의 선조에 ‘봉조(鳳朝)’라고 이름한 사람이 있었어도 이철보는 봉조청(奉朝請)을 하였는데, 윤면헌만이 교리를 못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숙(晉肅)의 아들087) 이 진사(進士)가 되지 못하겠는가? 윤면헌을 체개하지 말라."
하였는데, 뒤에 수찬으로 바꾸었다.
장지풍(張志豊)·이담(李潭)을 승지로 삼았다.
3월 27일 무인
임금이 조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공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본인의 품계는 보국(輔國)088) 인데, 겸대하고 있는 제학(提學)과 빈객(賓客)은 직질이 종2품이니, 세 품계를 건너뛰는 직책이 되므로 그대로 겸대하기 어렵다고 하여 해직(解職)을 청하매,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 모두 체개하였는데, 비변사에서 이는 임시로 설치한 것이라고 하자, 다시 체개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윤방(尹坊)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여러 유신(儒臣)들이 직숙(直宿)을 다투는 일이 마침 성상께서 추모하시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실 때에 있었으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성낼 것은 저들에게 있는데 내가 어찌하여 간여하랴?’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지나치게 사기(辭氣)를 허비하신 것은 실로 사물(事物)에 접(接)하여 순하게 응하는 도리에 흠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하늘에 매인 것이라도 비바람과 천둥이 한번 지나가면 날씨가 청명하여 전처럼 도로 태화(太和)한 기상으로 돌아오는 것인데, 성상께서 하늘을 본받아 도를 행하시는 마음으로 어찌 여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시옵니까?"
하니, 임금이 유신을 감싸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바로 반한(反汗)을 청하여야지 말을 이리 저리 둘러대는 것은 대간의 체통이 아니라고 하여 처음에는 체차하였다가, 마침내 또 그 관직을 삭탈하였다. 대사헌 정광충(鄭光忠)이 또 상소하기를,
"우리 전하의 어버이께서 생존하실 때처럼 섬기는 정상과 천성(天性)에서 우러 난 효성은 비록 부녀자나 아이들까지라도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하물며 경악(經幄)에 출입하는 신하로서 어찌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연소한 선진(先進)들이 대체에 어두워 비록 죄를 자초한 것이라 하겠으나 결국 숙직(宿直)을 비운 일로 인하여 머나먼 변방으로 귀양보내어 행색(行色)이 창황(蒼黃)하고 청문(聽聞)이 수저(愁沮)하니, 어찌 성명께서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청컨대 그 명을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더욱 노하여 삭출(削黜)의 율을 시행하였다. 집의 이정오(李正吾)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한성부 서윤(庶尹) 이보상(李普祥)은 공해(公廨)에 입직했다 하면 번번이 바둑을 꺼냅니다. ‘긴 날을 오직 바둑 한 가지로 보낸다.[長日惟消一局碁]’고 한 것은 이원(李遠)089) 이 흥을 붙인 문장에 불과한데도, 오히려 사람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말하였으니, 하물며 사송(詞訟)을 맡은 자리이겠습니까? 청컨대 그를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병조 좌랑 이복경(李復慶)을 적소(謫所)에서 방면하였다. 임금이 여러 옥당(玉堂)을 귀양보내고 마음이 격뇌(激惱)하여 있던 참에 이복경이 병조 낭관으로 즉시 대명(待命)하지 않았다고 하여 철원(鐵原)에 정배하였다가 이윽고 급거함을 뉘우쳐 마침내 석방한 것이었다.
변득양(邊得讓)을 장령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예문관 제학으로, 남태제(南泰齊)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3월 28일 기묘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수령으로서 과거에 나온 자들을 소견하여 하유하기를,
"너희들은 백리(百里)090) 로써 걱정을 하고 있는데, 서울에 온 뒤에도 백성들의 기한(飢寒)을 생각하느냐? 옛날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이 아들이 없으매 고황제(高皇帝)091) 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면 반드시 왕자를 둘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 효험이 오히려 이와 같은 것인데, 더구나 수령에 있어서랴! 그렇지 못하고 백성을 잊는다면 비록 과거에 응하더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이어 면유하여 보냈다. 형조 판서 조운규(趙雲逵)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저 몰래 술을 빚은 자는 많이 빚은 것이 아니라 굶주린 백성이 다만 몇 되의 쌀을 몰래 빚어 살아가려고 한 것이니, 그 정상이 가긍하다. 오래 갇혀 있으면 또 굶주려 죽을 것이니, 즉시 방면하라."
하니, 연신(筵臣)들이 모두 임금이 측은하게 사람을 아끼는 하교에 감격하여 숙연(肅然)히 머리를 숙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언 이계(李溎)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상의원(尙衣院) 직장 홍기한(洪綺漢)은 성질이 본래 거칠고 사나우며 행실 또한 극히 패악스러워 그가 거친 여러 관사(官司)마다 모두 더러운 비방을 들었으니 의관(衣冠)의 반열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그를 태거(汰去)하소서. 교하군(交河郡)의 성우흠(成禹欽)이란 자는 사족(士族)으로 향리에서 버림을 받았는데, 갑자기 더러운 말을 지어내어 갓 시집간 종매(從妹)를 무함(誣陷)하였는 바 말이 어찌나 흉패하였던지 무함당한 종매가 식음을 전폐하고 피를 토하여 마침내 자진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원기(冤氣)는 천화(天和)를 범하고도 남음이 있건만, 성우흠에게는 정상만 겨우 추궁하고 치죄(治罪)를 엄히 하지 않아 도망가기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해당 군수 홍정유(洪鼎猷)를 파직하고 성우흠을 기포(譏捕)하여 그 죄를 바루소서."
하니, 임금이 듣고 측은히 여겨 모두 허락하고 포도청으로 하여금 정한 날짜에 체포하게 하였다.
기신(耆臣) 김상신(金相紳)이 처음으로 들어와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그가 늙었다 하여 그의 아들 주서(注書) 김용(金容)에게 명하여 부축하고 뜰에 오르게 한 다음 오래도록 위유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전 해미 현감(海美縣監) 구세온(具世溫)을 절도(絶島)에 귀양보냈다. 구세온은 무인으로 탐욕스러운 짓을 많이 하여 어사 이명환(李明煥)의 논척한 바가 되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취복(就服)하니, 열 가지 죄를 세어 귀양보냈다가 종신 금고(終身禁錮)를 명하였다.
3월 29일 경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고 찬선 박필주(朴弼周)는 예우(禮遇)를 하던 유현(儒賢)인데, 듣건대 지금 개장(改葬)을 한다.’고 하면서 본도로 하여금 돌보아 주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서명응(徐命膺)을 대사헌으로, 윤급(尹汲)을 예문관 제학으로, 홍지해(洪趾海)를 대사간으로, 유수(柳脩)를 집의로, 홍상한(洪象漢)을 공조 판서로, 이기경(李基敬)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뜸을 떴다. 의관(醫官) 김정신(金鼎新)에게 가자(加資)하였다.
3월 30일 신사
제학 윤급(尹汲)과 사직(司直) 조돈(趙暾)을 호남의 역촌(驛村)에 정배하였다. 임금이 이번 경과(慶科)는 종사(宗社)를 위해 종통(宗統)을 정한데 대한 것이므로 시관의 망(望)에 든 자 누구가 감히 불응할까마는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도배(徒配)에 처하겠다고 미리 신칙하였었는데, 이날 시관의 망에 든 사람이 모두 달려와 응명하였으나, 유독 두 사람만이 나오지 않으니, 임금이 영을 어겼다 하여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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