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3권, 영조 40년 1764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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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임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친림(親臨)하여 종통(宗統)을 정한 경과(慶科)를 설행하였다. 이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근정전으로 돌아와 민홍렬(閔弘烈) 등 5인을 뽑아 즉일로 방방(放榜)하였다. 임금이 5인은 모두 경화(京華)의 자제(子弟)로서 시골 선비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중외(中外)와 경사(慶事)를 함께 하는 뜻이 아니라 하여 이튿날 시골 선비들만 후정시(後庭試)에 나오게 하라고 다시 명하여 조명업(趙命業) 등 3인을 뽑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4월 2일 계미

대사헌 서명응(徐命膺)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은 성상께서 광복(光復)092)  하신 후로 모든 정사가 새로워져 혁혁하고 과감(果敢)하여 거의 빠짐이 없었습니다마는 유독 풍헌(風憲)의 옛 전장(典章)만은 아직껏 닦아지지 않았으니, 어찌된 일이옵니까? 풍헌이란 기강의 근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정(時政)을 바루려고 한다면 차자(箚子)로 일을 아뢰는 법을 신장(伸長)하여야 하고, 게으름을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적간(摘奸)하여 계파(啓罷)하는 법을 엄히 하여야 하며, 탐욕을 징계시키려고 한다면 칠문(漆門)093)  을 하거나 간발(簡拔)에서 누락시키는 법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법을 잘 제정(制定)하고 또 적임자(適任者)를 얻어 충후하고 안쓰러워하는 심정이 법을 행사하는 사이에 넘치게 한다면 본말(本末)이 다 잘 이루어지고 기강도 떨쳐질 것이며, 백관을 바루고 만민을 바룸도 모두 여기에서 미루어 확충(擴充)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은 적임자가 못되면서 감히 들은 바를 되풀이하는 바이오니, 신을 대신하는 사람으로 기초를 세우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장 중에 아뢴 바는 모두 옳다. 경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잘 추진함이 마땅하니, 어찌 전교를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간원 【정언 이계(李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당후(堂后)094)  는 실직이고 청선(淸選)이 되는데, 이종영(李宗榮)은 사람과 문벌이 미천하며, 김필원(金必源)은 어리석고 무식하니, 청컨대 두 사람을 개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필원은 어떠한지를 내가 모르나 이종영은 정승의 후예인데, 지나치지 않은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계가 인피(引避)하니, 그 직을 체차하였다.

 

4월 3일 갑신

임금이 태묘(太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의 서계(誓戒)에 친림하였다.

 

전 정언 이계(李溎)가 집사(執事)의 반열에 있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그를 빼고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라고 명하고는 하교하기를,
"이계가 논한 바 이종영(李宗榮)은 바로 고 상신(相臣) 이양원(李陽元)의 6대손이다. 이 계는 선파(璿派)로 〈선조께서〉 용만(龍灣)095)  에서의 ‘차마 다시 동인(東人)·서인(西人)으로 나뉘겠느냐?[忍復各西東]’라고 하신 어시(御詩)도 생각지 않고 사감을 품고서 논계하였으니, 그가 무슨 낯으로 묘정(廟庭)에 들어선단 말이냐? 내가 수레를 멈추고 하교한 것은 조정에 있는 신하들로 하여금 나의 40년 고심(苦心)을 다 알게 하려함이다."
하였다.

 

4월 4일 을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간원 【사간 최태형(崔台衡)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계한 이종영(李宗榮) 등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이휘중(李徽中)을 헌납으로, 민홍렬(閔弘烈)을 정언으로, 이수훈(李壽勳)을 장령으로 삼았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4월 5일 병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월과 문신 제술(月課文臣製述)을 친히 시험보였다. 월과는 3삭(朔)을 한정하고 지어 올리면 문형(文衡)096)  이 그 고하(高下)를 평가하여 문신을 권장하려는 것인데, 짓지 않은 이가 1백여 인이나 되자, 임금이 그 게으르고 교만함에 노하여 모두 대령하라고 명하여 드디어 친히 시험보인 것이다. 3삭을 한정하고 지어 올리는 것이므로 달을 날로 바꾸어 연 3일 시험보였다.

 

4월 6일 정해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하향(夏享)의 습의(習儀)를 친히 살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서명응(徐命膺)이 세 가지 일로써 소회를 아뢰었는데, 첫째는 언로(言路)를 터놓는 것으로, 혹 협잡(挾雜)하였는지 의심하지 말고 간신(諫臣)으로 하여금 한 말을 다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궁료(宮僚)를 선택하는 것으로, 반드시 숙덕(宿德)을 초치하여 보도(輔導)하는 이로 하여금 그 방법을 다하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인재를 구하는 것으로, 반드시 염정(恬靜)을 장려하고 부조(浮躁)를 억제하여 인재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할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임금이 서명응은 도헌(都憲)의 직책으로 처음 등연(登筵)하여 관원의 부정을 규탄하는 일도 없이 옛 글만 외어 큰소리치니 그것은 바로 고담(古談)이라 하고, 드디어 체직하였다. 대사간 홍지해(洪趾海)가, 정언 김상집(金尙集)이 인혐(引嫌)하지 않을 일을 억지로 끌어다가 인혐하여 상소를 올려 체직(遞職)을 청하기에 이르러 형적(形跡)이 마치 교묘하게 사면(辭免)하려는 것 같아 후폐와도 관계가 있다 하고 파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조덕성(趙德成)을 승지로 삼았다.

 

4월 7일 무자

갑산(甲山)에 귀양간 여덟 유신(儒臣)과 시패(試牌)097)  를 어긴 도배인(徒配人) 윤급(尹汲)과 조돈(趙暾) 등을 방면하라고 명하고 드디어 금오랑(金吾郞)098)  의 삼배도(三倍道)099)  의 영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죄수를 잡아 올 때에는 으레 배도(倍道)였으나 간혹 삼배도의 영을 내린 일이 있었는데, 길은 한정이 있고 날짜는 매우 급박하여 가끔 중죄에 빠진 일이 있으니, 임금이 이 법은 후세에 전할 것이 못된다고 여겨 없애라고 명한 것이다.

 

평안도 은산현(殷山縣)에 무서리[微霜]가 내렸다.

 

4월 8일 기축

호서(湖西)의 곡물 4천 석을 옮겨 경기의 종곡(種穀) 부족에 보충해 주라고 명하였다.

 

4월 9일 경인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태묘(太廟)에 나아가 면복(冕服)으로 갈아 입고 친히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피는 등 예대로 봉심(奉審)하였다.

 

4월 10일 신묘

하향 대제를 친히 거행하고 일성위(日城尉)100)  의 주제(主第)에 들렀다. 이어 환궁하여 선원전(璿源殿)에 지배(祗拜)하였다.

 

김화진(金華鎭)을 승지로 삼았다.

 

4월 11일 임진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수가(隨駕)한 시위 장사(侍衛將士)의 활쏘기를 친히 시험보이고, 차등 있게 반상(頒賞)하였다.

 

홍지해(洪趾海)를 승지로 삼았다.

 

4월 12일 계사

임금이 사복시(司僕寺)에 나아가 죄인 홍득여(洪得輿)와 송동려(宋東呂)·이지순(李址淳) 등을 3일간 친국하였다. 홍득여는 장폐(杖斃)하고 송동려와 이지순은 연좌(緣坐)되었기 때문에 모두 도로 배소(配所)에 보내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홍득여가 죄를 지어 갑산(甲山)에 정배되었는데, 이지순과 송동려가 이하징(李夏徵)과 송해(宋楷)의 조카로서 삼수(三水)에 정배되어 서로 왕래하며 교결(交結)하기를 마치 탐라(耽羅)의 조영득(趙榮得)과 허동혼(許東渾)의 하는 것과 같았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잡아다 국문하게 된 것이다. 홍득여는 사감을 품고 사람을 무함하여 여러 차례 형을 당하다가 마침내 장폐(杖斃)에 이르렀고, 이지순과 송동려는 마침내 죄에서 벗어났으므로 임금이 도로 배소에 보내라고 명한 것이다. 제도(諸道)에 정배된 자들은 각기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큰 죄에 빠지지 말도록 포유(布諭)하라고 명하였다. 전후의 삼수·갑산 두 수령을 파직하였으니, 뭇 죄인들을 단속하지 않아 마음대로 왕래하게 한 때문이었다.

 

4월 13일 갑오

홍명한(洪名漢)을 대사헌으로, 유언술(兪彦述)을 대사간으로, 김노순(金魯淳)·정창순(鄭昌順)을 정언으로, 이의로(李宜老)를 승지로 삼았다.

 

황해도 은율(殷栗)과 강원도 영월(寧越)·평창(平昌) 등지에 우박이 내렸다.

 

내시(內侍) 빈대관(賓大寬)의 아들에게 임덕훈(林德勳)이란 자가 있어 구혼(求婚)하였으므로 과천 어사(果川御史) 이경옥(李敬玉)이 핵실하여 아뢰니, 임금이 그의 이름을 내시부(內侍府)에서 삭제하고 사족이 되어 내시와 친밀하게 지내는 자를 형벌하여 근습(近習)을 엄히 단속하고 후폐를 근절(根絶)시키는 뜻을 보였다.

 

4월 14일 을미

임금이 태묘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의 아들 정후겸(鄭厚謙)에게 《대전(大典)》에 의하여 품계에 따라 부직(付職)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정후겸의 아비 정석달(鄭錫達)은 인천(仁川)에 살면서 생선 장수로 업을 삼고 있어 집안이 몹시 한미하였는데, 그 아들 정후겸으로 정치달의 뒤를 잇게 하였으니, 그때 나이 겨우 16세였다. 전조(銓曹)에서는 그 말에 따라 정후겸에게 장원서 봉사(掌苑署奉事)를 제수하였다.

 

4월 16일 정유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대사간 유언술(兪彦述)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위노(威怒)하실 즈음 먼저 스스로 심량(審量)하여 처음부터 고쳐야 할 것이 있는 허물에는 이르지 마옵소서."
하니, 임금이 전번에 귀양간 유신(儒臣)과 시관을 비호한다고 여기어 노하여 파직하였다가 곧바로 그 명을 거두었다.

 

김응순(金應淳)·민백흥(閔百興)을 승지로 삼았다.

 

경외(京外)의 유생 윤장렬(尹長烈) 등이 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묘정(廟庭)에 종향(從享)할 것을 거듭 청하였으나, 소가 금령(禁令) 때문에 상달되지 않아 승지가 연석에서 아뢰니, 임금이 소를 올린 유생들을 불러 면책(面責)하고 아울러 10년을 한정하여 과거(科擧)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전라도 장구동(張九同)의 처 김조이(金召史)에게 복호(復戶)를 주고 이어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도신(道臣)이 김씨가 그 지아비를 위한 정성이 양향(楊香)의 고사101)                  와 같다고 아뢰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4월 17일 무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땅을 맡기고 공물을 받는다[任土作貢]는 것은 우공(禹貢)102)  에 실려 있는 바이지만 물건에는 귀천의 분별이 있고 때는 고금의 다름이 있는 것이니, 모리(牟利)하여 방납(防納)하는 무리들이 정액 외에 더 받는 폐단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열 여덟 마리 짐승은 그대로 두고 감하지 않았으니, 개미도 밟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영영 없애고 그 값을 균역청(均役廳)에 회록(會錄)하여 민역(民役)에 보태게 하라."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거재(居齋)하는 관학 유생(館學儒生)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비록 임금으로서의 덕은 없다마는 너희들은 마땅히 열성조에서 선비를 배양한 은덕을 생각하고, 또 오늘 고기[肉]를 내린 뜻을 깊이 유념하여 소회가 있으면 글을 올려 나를 면계하고 경망한 자들을 따라 이번에 소를 올린 유생들과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하니, 여러 유생들이 배복(拜伏)하여 진사(陳謝)하였다.

 

임금이 사복시에 나아가 영남 죄인 자근만(者斤萬)·홍유(洪洧)·이상묵(李尙默)·이달손(李達孫)·강취성(姜就成)과 승도(僧徒)인 도행(道行)·문담(文淡) 및 달문(達文) 등을 친국하였다. 이달손은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승복하매, 숭례문(崇禮門)에 친림하여 주살(誅殺)하고 수노 적산(收孥籍産)을 법대로 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참작 처리하여 원배(遠配)시키라고 명하였다. 자근만이란 자는 영남의 비천한 자로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법을 좋아하여 비류(匪類)와 결탁하였으며, 이달손은 본명이 태정(太丁)인데 무신년103)  의 역종(逆種)으로서 영남에 망명하여 나라를 원망하는 망측스러운 말을 지어내고 또 음흉하고 참혹한 시(詩)를 지으니, 그의 도당인 자근만이 이상묵에게 전하고 이상묵이 홍유에게 전하매, 홍유가 관에 발고하였으므로 일이 발로되어 마침내 체포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국문하게 된 것이다. 이달손은 주살하고 홍유와 관련된 여러 죄수는 방면하였으며, 자근만은 진도(珍島)로, 이상묵은 장기(長鬐)로, 달문은 경성(鏡城)으로 귀양보냈다. 달문이란 자는 무뢰한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머리가 반백인데도 총각의 모습을 꾸며 인심을 현혹시키고 풍속을 괴란하니, 임금이 공자(孔子)가 협곡(夾谷)에서 필부(匹夫)로 임금을 현혹한 자를 주살한 뜻104)  을 따라 처음에는 죽이려 하였으나 옥사에는 간여한 바가 없다고 여겨 마침내 원방에 귀양보낸 것이다. 이어 경외(京外)에 신칙하여 나이가 많은데도 머리를 땋아 내린 자는 적발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라고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이태정(李台鼎)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송동려(宋東呂)·이지순(李址淳)은 갑자기 참작하여 처리함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평양 서윤(平壤庶尹) 김이원(金履遠)은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방을 많이 들으며, 사나운 노복이 정사에 간여하고 영비(營婢)가 기악(妓樂)에 말썽을 부리니, 그를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수찬 이택진(李宅鎭)은 납언(納言)한 때에 사정을 진달하여 성균관(成均館)의 직책을 제수한 후에 응명(應命)하였으니, 그를 견파(譴罷)하여 대각(臺閣)을 교묘히 회피하는 버릇을 신칙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송동려(宋東呂)와 이지순(李址淳)을 참작하여 처리한 뒤에 양사(兩司)에서 의당 쟁집(爭執)하였어야 하는데도 여러 날 동안 논계가 없었다 하여 양사에서 행공(行公)한 사람들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4월 18일 기해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고 이어 무신의 전경강(專經講)을 친히 시험보였다.

 

평안도 용천(龍川) 땅에 우박이 내렸다.

 

4월 19일 경자

석강을 행하였다.

 

송형중(宋瑩中)을 승지로 삼았다.

 

4월 20일 신축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정언 구상(具庠)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잠상(潛商)은 저절로 해당된 죄율(罪律)이 있기 마련인데, 상사(上使)의 막비(幕裨)가 몰래 북경에서 물건을 사들이는 것부터가 중죄를 범한 것이어늘, 상사가 된 사람이 잘 검속하지도 못하고 되려 추한 비방이 많았으니, 청컨대 동지사(冬至使) 순제군(順齊君) 이달(李炟)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4월 21일 임인

임금이 조강을 행하였다. 헌부 【집의 박재원(朴載源)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책문(柵門)에서의 수색을 세밀하게 잘하였다면 어떻게 몰래 사들인 물건이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서장관 이헌묵(李憲默)을 파직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2일 계묘

당초에 대신(臺臣) 이계(李溎)의 논계로 인하여 교하(交河)의 성우흠(成禹欽)을 기포(譏捕)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제야 잡혔으므로, 안핵 어사(按覈御史) 이휘중(李徽中)을 보내어 안핵하여 보니, 과연 사실이었다. 임금이 지친(至親)의 처지에서 이렇듯 망측한 일을 꾸몄고 그의 글은 더욱 흉측·교휼하여 차마 볼 수 없으니, 이런 자를 죽이지 아니하면 풍교(風敎)를 바룰 수 없다 하고 관문 밖에 백성을 많이 모이라고 명하여 마침내 주살하였다.

 

정운유(鄭運維)를 승지로 삼았다.

 

4월 23일 갑진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구상(具庠)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옛날 성왕(聖王)이 일찍이 술을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오나 제사에 있어서는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저 술이 생긴 이후로부터 비록 혹 백성들의 양조함을 금하기는 하였으나 신도(神道)에 향사(享祀)하는 것을 폐한 일은 없었습니다. 신은 삼대(三代)105)  에 나온 것만 보더라도 무왕(武王)의 금주령은 지극히 엄절하여 말미에 가서는 ‘내가 죽일 것이다.’라고까지 하였으나 그래도 오히려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서방(庶邦)·서사(庶士)에게 칙계(勅戒)하기를, 「제사에는 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하늘이 명을 내려 비로소 우리 백성에게 술을 만들게 한 것은 큰 제사를 위해서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문왕도 일찍이 술을 금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제사에는 술을 쓰도록 하여 심지어 하늘이 백성으로 하여금 술을 만들게 한 것은 오직 큰 제사를 위한 것뿐이라고 하였으니, 술을 금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또 제사에는 쓰지 않을 수 없음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제사의 예(禮)는 오로지 성(誠)과 경(敬)에 있고 제물에 있지 않다고 하겠으나 헌수(獻酬)하는 예와 관장(祼將)106)  하는 절차는 그 까닭이 신명과 접하고 화기를 인도하는 데에는 술을 주로 하여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상(商)·주(周)의 묘사(廟祀)의 악가(樂歌)에는 번번이 청주(淸酒)를 일컬었던 것인데 선유(先儒)가 ‘제사의 예에 관천(慣薦)이 소중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천승(千乘)의 높은 자리에서도 증삼(曾參)과 민자건(閔子騫)같은 효행을 몸소 실천하시므로 출천(出天)의 성효는 백왕(百王)에 뛰어나시어 종묘의 제사에 예(禮)와 경(敬)이 두루 지극하시고, 악무(樂舞)와 조천(俎薦)107)  을 직접 살피어 신칙하지 않음이 없으시며 의절(儀節)과 예수(禮數)를 지극히 융숭하게 하면서도 유독 고례(古禮)에서 소중히 여겼던 것을 아직까지 복구하지 않으시니, 이는 성상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셔서가 아닙니다. 대체로 감주[醴]의 유래는 오래입니다. 감주로 술을 대신하여도 진실로 신(神)을 강림(降臨)케 하는 도리에는 흠이 없겠고 또 술의 해로움은 기어코 금하지 않아서는 안되느니만치 태묘(太廟)에 쓰지 않은 다음에야 바야흐로 나라 안에 술이 없게 될 터이니 이는 실로 전하의 부득이한 고심이겠습니다만,
삼가 생각하건대 《의례(儀禮)》의 양준(兩存)108)  과 《주례(周禮)》의 오제(五齊)109)  는 모두 술과 감주를 병설하였지 감주로 술을 대신하였음은 볼 수 없습니다. 대체로 현주(玄酒)110)  나 감주를 진설했던 것은 문득 이는 보본(報本)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고, 오곡의 정(精)을 빚어 매우 향기로운 기운을 취하여 땅에 붓고 신에게 바쳐 화창한 기운이 서로 접하게 하는 데에는 술을 당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삼대(三代)의 예에서도 언제나 술로 근본을 삼았던 것입니다. 또 종묘의 예는 지극히 존귀하고 성대한 것이어서 설사 술을 써서 금령의 시행에 지장이 있다 하더라도 그 경중을 따져서 짐작하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또 왕공(王公)과 사서(士庶)의 예는 높고 낮음이 현격한 만큼 태묘에만 쓰고 사서의 제사에는 쓰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실 한스러워 할 것이 없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묘향(廟享)에서 쓰는 것은 사실 금령에 방해로울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백성들이 마시는 것은 금하고 오직 제사에서만 썼던 것이 전부터 성왕들의 일찍이 행해 온 바로써 서로 어그러짐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만일 나라 안에는 술이 있는데도 묘향에서만 궐한다고 한다면 정례(情禮)의 결함과 사체의 휴손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아! 자고로 술을 금하는 영이 전하처럼 시종 불변한 때가 있지 않았고 또 전하처럼 은위(恩威)를 병행한 예가 있지 않았습니다.
감률(減律)의 법은 참으로 영구히 폐단이 없다고 말할 만하니, 뉘라서 감격하고 추앙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감주를 쓰는 한 절차만은 아직도 흠전(欠典)이 되어서 일국의 신민들이 모두 이것 때문에 애를 태우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으로서 술과 감주의 뜻을 모르는 자라도 혹은 ‘금주령 때문에 심지어 종묘의 제향에도 쓰지 않으니 범법자는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다.’ 하였고, 또 더러는 ‘금령은 비록 늦출 수 없지만 종묘의 제향에 술을 궐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한할 것이 있으랴?’라고 말합니다. 대저 술을 쓰건 감주를 쓰건 저들에게는 하등의 이해가 없는데도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사람의 상정(常情)이기 때문이니, 단연코 술을 쓰지 않을 수 없음을 볼 수 있다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간신(諫臣)이 경의(經義)를 인용하여 한 말은 비록 옳다 하겠으나 태묘에 감주를 쓰건 현주를 쓰건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이다. 지금 태묘에는 술을 쓰면서 경대부(卿大夫)더러 쓰지 말라고 한다면 이는 혈구(絜矩)111)  의 도리가 아니다. 위와 아래에서 다 술을 쓴다면 금령이 해이(解弛)할 것이므로 이미 태묘에 교유하였는데, 어찌 번거롭게 하느냐?"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7도(道)의 유생 신유(愼攸) 등 수백 인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자는 청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소장을 올린 유생을 소견하고 비답을 내리기를,
"여러 유생들이 선정(先正)을 존모하여 이토록 소장을 올리니 그 성의는 가상하나 내가 중하게 여기는 것은 한갓 종향만이 중한 것이 아니라 기실은 선정을 위하여 그 일을 중히 여기자는 뜻이다.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4월 24일 을사

임금이 조강을 행하였다. 《맹자(孟子)》를 강하여 일양 일계장(日攘一鷄章)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담응증(痰凝症)이 있는데, 의원(醫員)은 고양이 가죽이 양약(良藥)이라고 말하나 내가 고양이 가죽을 쓰면 온나라가 본받아서 장차 고양이가 멸종될 것이다. 비록 음식이라 해도 또한 그러하다. 전에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도요새[桃腰鳥]를 나에게 보내 왔으나 나는 놓아보냈다. 사슴 꼬리[鹿尾]나 메추리 고기[鵠肉]도 내가 전에 즐겼던 것들이나, 올리라고 하지 않은 것도 역시 민폐를 끼칠까 두려워해서이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영남은 추로(鄒魯)112)  의 고장인데, 이번의 국옥(鞫獄)은 잡술(雜術)로 인하여 발단되었다고 하교하면서 이어 중외에 하유하기를,
"사대부가 되어서는 경망하고 분경(奔競)하며 아무 하는 일 없이 입고 먹는 것을 금하고, 서민은 무당이나 잡술로 서로 현혹함을 금하여 맹자께서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민속을 바루었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4월 25일 병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광한(鄭光漢)을 대사간으로, 이시건(李蓍建)을 집의로, 심욱지(沈勗之)를 헌납으로, 이세연(李世演)·이적보(李迪輔)를 정언으로, 원경순(元景淳)을 형조 판서로, 심상운(沈翔雲)을 사축서 별제(司畜署別提)로 삼았다. 심상운은 곧 심일진(沈一鎭)의 아들이고 심익운(沈翼雲)의 형이니, 이에 앞서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여러 차례 심상운의 형제는 하자(瑕疵)가 없으므로 가려 쓸 만하다고 청하였는데, 이번에 이조 참판 박상덕(朴相德)이 처음으로 의망하여 차제(差除)된 것이다.

 

석강을 행하였다.

 

4월 26일 정미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서북의 별부료 무사(別付料武士)의 활쏘기를 친히 살피고 차등 있게 반상(頒賞)하였다. 이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사민(士民)을 크게 모아 놓고 포도청에 명하여 사부(士夫)로서 범양(犯釀)한 자를 잡아들이라고 하였는데, 도성안을 크게 뒤져 적발되어 체포된 자가 모두 7인이나 되었다. 임금이 모두 잡아들이라고 명하여 ‘그 할아비에게는 감주를 쓰고 그 손자는 술을 마시니 명색이 사부로서 이를 차마 한단 말이냐?’ 하며 각각 엄형을 시행하고 군중앞에서 조리돌린 다음 아울러 서민을 삼아 절도(絶島)와 육진(六鎭)에 나누어 정배하였다. 이때에 범양한 자를 일률(一律)113)  에서 제외하기는 하였다 하나 범양한 자를 잇달아 형을 가하고 정배하느라 길을 누비게 되었다. 정언 구상(具庠)이 태묘(太廟)에서 술을 쓰기를 청한 것은 뜻이 주금(酒禁)을 늦추어 보려는 데에 있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으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신(臺臣)이 태묘에서 술을 쓰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금주령은 그대로 존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중외의 백성들은 새 대간이 진언하여 금령이 쾌히 풀린 것으로 소문이 그릇 전파되어 더욱 기탄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전에 적발된 것은 병앵(缾罌) 등속이었는데 이제는 항아리에까지 이르고 거리에서 술을 버젓이 파는 자까지 생겼으니, 금령을 더욱 신칙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서 매우 놀라고 노하여 구상의 관직을 삭제하고 형조와 한성부의 행공(行公)한 당상(堂上)을 파직하였으며, 오부(五部)114)  의 관원을 도태시켜 유배하고, 전 대사헌 남태회(南泰會)에게 한 자급(資級)을 더하여 한 사람에게 상(賞)을 주어 백 사람을 용동(聳動)시켰으니, 남태회가 일찍이 윤구연(尹九淵)의 범법을 논하여 위에서 일률을 시행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양한(洪良漢)을 승지로 삼았다.

 

4월 27일 무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원점 유생(圓點儒生)115)  의 제술(製述)과 강경(講經)에 친림하여 박도상(朴道翔) 등 13인을 뽑았고, 다시 제술을 명하여 안정현(安廷玹)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정철(李廷喆)을 승지로 삼았다.

 

7도(道) 유생 안처악(安處岳) 등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종향(從享)하자는 청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8일 기유

임금이 입직한 문신의 전경강(專經講)에 임하여 살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지해(洪趾海)를 승지로 삼았다.

 

4월 29일 경술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안집(安𠍱)을 대사간으로, 원경순(元景淳)을 경기 감사로, 남운로(南雲老)·남언욱(南彦彧)을 장령으로, 이진항(李鎭恒)을 헌납으로, 이육(李堉)을 사간으로, 김재천(金載天)을 지평으로, 김상철(金尙喆)을 동성균(同成均)으로, 윤동섬(尹東暹)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집의 이시건(李蓍健)을 경성(鏡城)으로 귀양보냈으니, 범양(犯釀)한 자에게 죄의 가율(加律)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월 30일 신해

어떤 별이 엷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가 4척이나 되었다.

 

헌부          【장령            남언욱(南彦彧)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정언        권극(權極)이 범양(犯釀)한 자에게 극형을 쓰자고 청하였으면서 도리어 종제(從弟)로 하여금 범금(犯禁)하게 하였으니, 법을 엄히 하기를 아뢴 의의가 어디 있다 하겠습니까? 삭판(削版)에 그칠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그를 원찬(遠竄)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가 범양한 자를 위하여 보복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노하여 체직시켰다가 바로 또 삭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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