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임자
임금이 각릉(各陵)에 쓸 향(香)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이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상참(常參)과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내년(來年)의 식량을 염려하여 진휼청(賑恤廳)에서 삼남의 보리를 사오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남언욱(南彦彧)이 대선(臺選)에 합당치 못하다 하여 그를 주의(注擬)한 전관(銓官)을 체개(遞改)하고, 원인손(元仁孫)을 이조 참판으로, 정상순(鄭尙淳)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5월 2일 계축
임금이 영릉(寧陵)116) 의 기신(忌辰)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이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조영진(趙榮進)을 대사헌으로, 최태형(崔台衡)을 집의로, 신응현(申應顯)을 장령으로, 이택진(李宅鎭)을 지평으로, 윤홍렬(尹弘烈)·이득복(李得福)을 정언으로, 채제공(蔡濟恭)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윤동도(尹東度)를 다시 제배(除拜)하여 좌의정으로 삼았다. 윤동도는 병으로 정고(呈告)하여 상직(相職)을 사면하기에 이르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추(西樞)117) 를 배명(拜命)하였다가 임금이 소견(召見)하고,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총융사(摠戎使) 구선복(具善復)이 장단(長湍)의 임진강 상류에 적벽(赤壁)이 깎아지른 듯한 형세를 이용하여 그 위에 성을 쌓고 서쪽에서 오는 적을 막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헌부 【장령 정술조(鄭述祚)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범양(犯釀)한 사인(士人) 권교(權喬)와 조윤재(曹允載)를 종신토록 원배(遠配)하고 사령(赦令)이 내리기 전의 죄라도 용서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명색이 사부(士夫)로서 저의 사당에도 쓰지 못하는 술을 마신 자는 죽이는 한이 있어도 용서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임금이 혹 관용하는 일이 있어도 아래에서 가율(加律)을 청한 사람이 없음에 몹시 노하여 대성(臺省)의 관원을 연달아 죄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술조도 단지 종신토록 용서하지 말자고만 하였으므로 감률(勘律)에 그쳤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5월 3일 갑인
임금이 각 능침(陵寢)의 단오제(端午祭)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하였다. 좌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사은 숙배하니, 임금이 친히 받았다.
이때에 금양(禁釀)은 날로 엄하였으나 범하는 자는 그래도 그치지 않았다. 과천(果川)에 술이 있다 하여 그 지방관과 도신(道臣)을 정배하였고, 또 심부(沁府)118) 의 선상(船商) 중에 범한 자가 있으므로 강화 유수(江華留守) 정실(鄭實)을 파직하였으며, 지방관인 양천 현감(陽川縣監) 박명양(朴鳴陽)을 귀양보내고, 수납(搜納)한 선전관 이보한(李普漢)에게 한 자급을 더하여 오위 장(五衛將)을 삼았다가 다시 양천 현감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또 영광(靈光)의 뱃사람이 경강(京江)에서 술을 마셨다 하여 영광 군수 윤면동(尹冕東)을 남쪽 연변(沿邊)에 귀양보냈다.
5월 4일 을묘
임금이 각전(各殿)·각릉(各陵)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윤학동(尹學東)·조숙(趙)·이의로(李宜老)를 승지로, 김상익(金尙翼)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황해 감사 신회(申晦)가 본영(本營)에 전래(傳來)해 오는 백성의 채무(債務)가 5만여 냥인데 모두 귀부(鬼符)가 되어 받을 곳이 없으니 이를 모두 탕감하고 진휼미(賑恤米) 2만 석(石)을 빌려 그 빚을 충당하기를 청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그 말에 따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재신(宰臣) 이일제(李日躋)의 말로 인하여 관서(關西)에 탕감해 준 전례(前例)가 있는데, 양서(兩西)에 어찌 달리 하겠는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영채(營債)의 폐단은 어찌 해서 뿐이겠는가? 가볍게 베풀고 과중하게 거두어서 사복(私腹)을 채우는 것이 해마다 증가하다가 사람과 재물이 다하면 번번이 탕감해주는 정치로써 은혜를 바라는 자료로 삼으며, 또 은공은 자신에게 돌리고 영채는 관곡(官穀)으로 갚는데, 마치 제 살[肉]을 베어서 제 배를 채우는 격이어서 결국은 공재(公財)만 탕진하여 남음이 없으니, 통탄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70책 10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66면
【분류】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영채(營債)의 폐단은 어찌 해서 뿐이겠는가? 가볍게 베풀고 과중하게 거두어서 사복(私腹)을 채우는 것이 해마다 증가하다가 사람과 재물이 다하면 번번이 탕감해주는 정치로써 은혜를 바라는 자료로 삼으며, 또 은공은 자신에게 돌리고 영채는 관곡(官穀)으로 갚는데, 마치 제 살[肉]을 베어서 제 배를 채우는 격이어서 결국은 공재(公財)만 탕진하여 남음이 없으니, 통탄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5일 병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친히 조훈(祖訓)과 오권(五勸)·오계(五戒)의 글을 지어 왕세손에게 훈계하였다.
조영순(趙榮順)을 승지로 삼았다.
5월 6일 정사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장릉(長陵)119) 의 기신(忌辰)에 쓸 향과 축문을 지영하고 이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였다.
김광국(金光國)을 승지로 삼았다.
5월 7일 무오
주강을 행하였다.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의 여인(女人)이 한 태(胎)에 아들 셋을 낳았다.
5월 8일 기미
이최중(李最中)·이득배(李得培)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오랜 가뭄으로 몸소 서교(西郊)에 나아가 농사를 살피고 경기(京畿)의 백성을 불러 질고(疾苦)를 물었다. 돌아와서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라 명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었다.
5월 9일 경신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헌릉(獻陵)120) 의 기신에 쓸 향게 축문을 지영하였다. 가뭄으로 애를 태울 때에 양사(兩司)에서 머뭇거리고 응명(膺命)하지 않는다고 하여 대사간 정만순(鄭晩淳)을 파출(罷黜)하여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삼고 헌납 정창성(鄭昌聖)을 영암 군수(靈巖郡守)로 삼아 재촉하여 부임하라고 하였다.
5월 10일 신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황조 망배례(皇朝望拜禮)를 행하였으니, 고황제(高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오랜 가뭄으로 급하지 않은 모든 영선(營繕)을 파(罷)하고 제도(諸道)로 하여금 죄수를 소결(疏決)하게 하였다.
이날 약간의 비가 내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척강(陟降)121) 이 주신 것이다."
하였다. 매년 이날이면 문득 비가 내리니, 사람들이 ‘태종우(太宗雨)’라고 불렀기 때문에 임금이 언급한 것이다.
5월 11일 임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5월 12일 계해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대사헌 조영진(趙榮進)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동가(動駕)하셨을 때에 거리가 정숙하지 못하여 한 신부(新婦)의 신행길이 사이를 뚫고 지나갔습니다. 청컨대 해당 군문(軍門)의 대장 이장오(李章吾)를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응순(金應淳)을 승지로 삼았다.
5월 13일 갑자
임금이 조강을 행하였다. 대사헌 조영진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잡기관(雜歧官)으로 이문 학관(吏文學官)과 같은 등속(等屬)은 연한(年限)을 정하여 의차(擬差)하고 가함(假銜)을 쓰지 못하게 하여 사로(仕路)를 맑게 하기를 계청(啓請)하였고, 또 참의(參議)와 판결사(判決事)를 지내지 않은 사람은 동돈녕(同敦寧)에 차제(差除)되지 못하도록 길이 정식(定式)으로 삼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아울러 윤허하였다.
박취원(朴取源)·이동현(李東顯)을 지평으로, 유언호(兪彦鎬)·정경인(鄭景仁)을 정언으로, 서명응(徐命膺)을 형조 참판으로, 윤급(尹汲)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이담(李潭)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때에 임금이 대신(臺臣)의 성상소(城上所)의 옛 제도를 복구하라고 명하고 때때로 승지를 보내서 살피게 하여 나가지 않은 사람은 문득 죄를 주니, 대사간 남태저(南泰著)가 상소하기를,
"성상소를 복구하라는 명은 조종조(祖宗朝)의 훌륭한 제도를 다시 본 듯하기는 하오나 구궐(舊闕)122) 이 시어소(時御所)가 되었을 적에는 육조(六曹)가 앞에 나열해 있고 또 의정부에서 서사(署事)하는 법이 있었으므로 성상소는 바로 관사(官邪)를 규찰(糾察)하고 일마다 적발할 수 있었으니, 그 처치한 바가 참으로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구궐이 단지 터만 남았고 양사(兩司)는 본사(本司)를 처소로 하고 있으며 간원에 이르러서는 더욱 궁벽한 곳에 있어 모든 사위(事爲)를 제때에 듣지 못하여 명색이 대관(臺官)으로 종일을 조바심 속에 지내어 명목만 있고 실상은 없으니, 절대 옛 제도를 복구한 의의가 아닙니다. 신의 생각은 전과 같이 직방(直房)에 있으면서 묘시(卯時)에 들어와서 신시(申時)에 나가는 것이 좋겠고 재일(齋日)을 당하면 나오지 않는 것도 좋다고 여깁니다. 모든 일이 평이(平易)하고 간편(簡便)해야만 비로소 지속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계청한 바가 옳다고 여겨 마침내 윤허하였다.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재차 기우제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5월 14일 을축
임금이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에 국용(國用)은 더욱 고갈하였는데 쓸데없는 비용은 다단(多端)하여 효장궁(孝章宮)과 효순궁(孝純宮) 및 선의 왕비전(宣懿王妃殿)123) 의 궁인으로 아지(阿只)라는 명칭을 가진 자가 명칭은 있어도 실지는 없는데 공상(供上)은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으니, 임금이 모두 제감(除減)하라고 명하고, 또 선혜청(宣惠廳)에서 올리는 생물(生物)의 공상도 쓸모가 없거나 명목이 바르지 못한 것은 제감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절생(節省)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흠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절생하시려는 뜻은 계시나 경비는 뒷구멍으로 소모되는 것이 많으니, 이 점은 절실히 반성해야 할 일이며, 이번의 제감은 실로 성덕(盛德)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였다. 홍봉한이 또 총융사(摠戎使) 구선복(具善復)의 논계대로 장산(長山)의 8돈(墩) 이외에 한두 돈대(墩臺)를 더 설치해서 새로 이속(移屬)된 파주(坡州)의 1개 면(面)의 민호(民戶)를 군오(軍伍)로 환정(換定)하여 궐액(闕額)에 보충하고 또 장산과 임진(臨津)의 두 진영으로 기각(掎角)124) 의 형세를 이루어 완급(緩急)이 있을 때에 방어하는 계책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소대를 행하고 《송감(宋鑑)》125) 을 강하였는데, 천석(天錫) 두 글자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일전에 유신(儒臣)이 두 글자를 휘(諱)하고 읽지 않았는데,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분명하게 말을 못하겠는데 여러 신하들은 혹 알고 있는가?"
하니, 연신(筵臣)이 혹은 듣지 못하였다 하고, 혹은 듣기는 들었으나 자세히 모르겠다고 하매, 임금이 겸사(兼史)로 하여금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하였는데, 유 척기도 자세히 모르겠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휘하지 않아야 하는데 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지금부터는 휘하지 말라."
하였다. 대체로 천석(天錫) 두 글자는 열성조(列聖朝)의 소자(小字)126) 라고 하나 보첩에도 실리지 않았는데, 어디에서 듣고 휘하였단 말인가? 더구나 유명은 구태여 휘할 필요가 없는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5월 15일 병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대신과 예조 판서를 함께 들라고 하여 하교하기를,
"어제의 소대(召對)에서 《송사(宋史)》를 강하였는데, 이종(理宗)이 유현(儒賢)을 존모(尊慕)한 일에 이르러 어렴풋이 깨달은 바가 있다.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중하여 4백 년 이래로 종향(從享)된 사람은 8현(賢)뿐이다. 양송(兩宋)127) 선정(先正)의 도덕은 상하가 다 아는 바여서 공의(公議)를 막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미 제배(躋配)를 명하였고, 홍범(洪範)의 요체(要諦)를 얻어 황극(皇極)의 의리로 힘쓰는 데에 있어서는 내가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에게 세상에 드문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문순(文純)이 나라를 위해 고심(苦心)한 것은 이 문성(李文成)128) 과 전후로 같다 하겠다. 아! 망팔(望八)의 고심은 오직 처음을 계승하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다. 비록 많은 선비들의 청이 없었다 하더라도 연전에 두 선정을 종향할 때 특별히 문순에게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미 미리 나의 뜻을 보인 것이다. 더구나 두 선정과 문순은 나서 한 세대를 함께 하였으니, 비록 약간의 선후는 있었으나 송(宋)나라 때의 양정(兩程)129) 이 장자(張子)130) 에게서의 경우와 다름이 없다 하겠다. 오늘날 문순이 함께 배향된다면 어찌 송제(宋帝)로 하여금 오로지 옛날에만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 예조로 하여금 택일하게 하여 문순공을 문묘에 종향하는 전례(典禮)를 특별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기사년131) ·갑술년132) 이후로는 선정이 아니었다면 세도(世道)가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고 상신(相臣) 신완(申玩)과 고 찬선(贊善) 김간(金榦)은 모두 문순의 제자입니다."
하매, 임금이 묻기를,
"선정 송시열(宋時烈)이 도통(道統)을 문순에게 부탁하였는가?"
하니, 예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세도(世道)를 부탁하였습니다. 문순이 아니었으면 세도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에 하지 않으면 곧 또 한 당(黨)이 생길 것이다. 내가 비록 결단하여 행하였지마는 문묘는 사체가 중하니만큼 이 뒤에 다시 종향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정원(政院)에서는 글을 받지 말라. 나도 엄히 처분하겠다."
하였다. 당초에 제도(諸道) 유생(儒生)으로 문순의 종향을 청하는 자가 글을 서너 차례 올렸으나 임금이 그 일을 중히 여겨 허락하지 않고, 관학(館學)에서 일제히 청하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청하는 자는 없었으며, 간혹 통문(通文)을 돌려 비방하고 욕을 하니, 임금이 사론(士論)도 서로 당색(黨色)을 가진 것으로 의심하고 특지(特旨)로 갑자기 종향을 명하자, 연신(筵臣)들은 이의(異議)가 없었는데, 유독 집필(執筆) 승지 이득배(李得培)가 감히 분명하게 말은 못하고 단지 조금만 관학 유생의 글을 기다릴 것을 청하며 미미하게 그 단서를 발설하니, 임금이 노하여 파직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화진(金華鎭)을 승지로 삼았다.
5월 16일 정묘
주강을 행하였다.
도승지 심수(沈鏽)와 교리 이상지(李商芝) 등이 여러 동료(同僚)와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으며, 대사헌 조영진(趙榮進)과 헌납 이석재(李碩載)도 혹은 상소로 혹은 차자를 올려 박문순(朴文純)을 종향(從享)하라는 명이 너무 급작스러웠음과 이득배(李得培)를 견파(譴罷)한 벌을 정침하여 마땅하다고 논하였는데, 옥당(玉堂)의 차자 중에는 ‘관학의 소도 나오지 아니하고 진신(搢紳)의 논의도 일치하지 않았다.’는 귀절이 있자, 임금이 진신 중에도 또 당이 있는 줄로 의심하고 몹시 노하여 글을 올린 여러 신하들을 파직하였다. 또 박지원(朴志源)은 그 조부와 동문(同門)이니 윤리에 관계된다 하고, 이진규(李晉圭)는 용만(龍灣)의 어시(御詩)도 생각하지 않으니 신자(臣子)의 분의(分義)가 아니라 하며, 윤면헌(尹勉憲)은 그 조부가 당색(黨色)을 없애려고 고심(苦心)한 바를 본받지 않으니 사람의 마음이 없는 것이라 하여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였다. 또 김귀주(金龜柱)는 척신(戚臣)이니 당론(黨論)에 간여하지 않아야 하는 데 동참하였다 하여 그 관직을 파하고,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 하여 그의 아버지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도 파직하였으며, 김재순(金載順)은 강연(講筵)에서 초기를 독주(讀奏)하는 것을 흘겨보았다 하여 역시 사판(仕版)에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선조(先朝)께서 정유년133) 부터 환후(患候)가 10년이나 침고(沈痼)하신 것은 오로지 사문(斯文)의 싸움에 연유하여 공거(公車)134) 의 소장(疏章)에 수응(酬應)하시느라고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만일 그러한 사태가 다시 일어난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돌아가 뵙는단 말이냐? 무릇 지금 북면(北面)하고 나를 섬기는 자가 이 말을 듣고도 다시 당(黨)을 한다면 이는 난신(亂臣)이다."
하고, 종향(從享)의 초기(草記)를 지체하였다고 하여 예조 판서 홍계희(洪啓禧)를 파직하고, 한익모(韓翼謨)로 대신하였다.
의주(義州)에서 북경(北京)으로 들어가는 잠상(潛商)을 핵실하여 한홍철(韓弘喆)이란 자를 잡아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감사(減死)하여 육진(六鎭)에 귀양보내고 여타 간범(干犯)들은 해도(海島)에 분산 정배하라 명하였다. 잠상은 으레 일률(一律)을 적용(適用)하였으나 물주(物主)와 수종(隨從)으로 경중을 분별하여 감죄(勘罪)한 것이다.
석강을 행하였다. 박사해(朴師海)를 특제하여 교리로 삼고, 원인손(元仁孫)을 수찬으로, 이언형(李彦衡)·조덕성(趙德成)·홍지해(洪趾海)를 승지로 삼았다.
5월 17일 무진
임금이 보여(步輿)를 타고 산개(繖盖)를 물리쳐 버렸으며 친히 남단(南壇)에서 비를 빌고 이튿날 환궁하였는데, 이어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들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권도(權噵)를 승지로 삼았다.
옥당(玉堂)의 차자 중에 ‘진신(搢紳)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았다.’는 귀절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마음이 크게 격뇌(激惱)하여 수가(隨駕)한 문관을 물러가라고 명하고 조정의 문안에도 답을 내리지 않았다. 경연관(經筵官)의 녹패(錄牌)를 버리라고 명하였고,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릴 때에 맨 먼저 발의(發議)한 관원을 옥당의 아전들이 사고(査告)하지 않았다 하여 모두 호남(湖南)의 연변(沿邊)에 분산 정배하였으며, 태학(太學)의 재유(齋儒)가 지영(祗迎)을 행하지 않았다 하여 대사성 이담(李潭)을 파직하고 서명신(徐命臣)으로 대신하였으며, 장의(掌議)와 재임(齋任)은 나이 30세 미만자는 의차(擬差)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남태저(南泰著)가 청대하여 말을 겨우 꺼내려 하자, 임금이 노하여 그를 삭직하고 하교하기를,
"옛날에 이르기를, 상홍양(桑弘羊)을 삶아 버려야만 하늘에서 비가 내릴 것이다.135) ’라고 하였는데, 이제는 한 당인(黨人)을 삶아 버려야만 비가 올 것이다."
하고, 그대로 탕제(湯劑)를 들지 않으니,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이 굳이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경현당(景賢堂)으로 돌아와서 대신 이하 여러 백관을 모두 궐정(闕庭)에 모이게 하여 임금이 하유(下諭)하였으나 차마 듣지 못할 말이 많았는데, 바로 성궁(聖躬)을 자폄(自貶)하여 건극(建極)의 존호를 받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대신 이하가 눈물을 흘리며 도로 정침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엄한 하교만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관(冠)을 벗고 궐정에 부복하니, 임금이 궐정에 든 사람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전 영부사(領府事) 신만(申晩)·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전 좌의정 윤동도(尹東度)·전 우의정 김상복(金相福) 등이 상소에 사죄신(死罪臣)이라고 칭하고 중신(重臣)으로부터 아래로 시종(侍從)·한림(翰林)·주서(注書)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명하여 진소(陳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일의 일을 어찌 말로써 다할 수 있으며 신 등의 죄를 어찌 주살(誅殺)로써 다할 수 있겠습니까? 아! 신 등은 돼지와 물고기처럼 완우(頑愚)하오나 전하께서는 항상 신의로 감격시키는 덕화를 밀어 주셨고 신 등은 미열(迷劣)하기가 어린애 같았건만 천지가 부육(覆育)하는 인애(仁愛)를 더하셨습니다. 40년 동안 길러주시고 인도(引導)해주신 지극한 은택은 신등의 부조(父祖)로부터 신등에게까지 이어져 원혐(怨嫌)은 담소(談笑)로 바뀌었고 산함(酸醎)은 화충(和衷)으로 변하여 신 등의 터럭 하나 머리카락 하나에 이르도록 무엇 하나 우리 전하의 조화(造化)에서 주어진 것 아님이 있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하기를 찌꺼기는 깨끗이 씻겼고 저와 나를 다 잊었다고 여겼건만 전부터 내려온 표적(標的)이 아직까지도 헛되이 인습되어 전후로 신충(宸衷)에 격뇌를 끼쳐드려 지엄하신 하교가 계시게 하심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그 연유를 생각해 보면 어느 하나 신 등의 죄가 아님이 없습니다. 신 등이 혹은 대관(大官)에 참여되고 혹은 경재(卿宰)에 채워지며 혹은 시종(侍從) 백집사(百執事)에 끼어 있으면서 이렇듯 대동(大同)으로 모두를 포용하는 때를 당하여 갑자기 몸둘 바가 없는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 노여워하신 하교가 비록 한두 사람에게 국한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날 차마 들을 수 없고 받들 수 없는 말씀을 받들고 보니, 뜰에 가득한 모든 신료(臣僚)로서 그 누구가 머리를 맞대고 허둥지둥하며 바로 죽어 아무 것도 모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지척(咫尺)의 문폐(文陛)에서 관을 벗고 이마를 조아리매 단지 충정(衷情)의 안타까움만 더하여 오직 형벌이 빨리 가해지기만을 기다려질 뿐이오니, 견파(譴罷)나 박벌(薄罰)로는 그 만에 하나도 족히 속죄가 되지 않습니다.
아! 신 등이 전하를 보필하는 바는 곧 건극(建極)이고 전하께서 선정(先正)에게 광감(曠感)을 가지신 것도 역시 건극이옵니다. 만일 신 등이 전하의 조정에 서서 감히 동덕(同德)의 선정(先正)을 종향(從享)하는 일에 이의(異議)를 가진다면 신 등이 종전에 성공(聖功)을 기리고 신화(神化)를 찬양한 일들이 비단 허위와 불성실의 죄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 임금을 저버리고 내 자신의 마음을 저버림이 극에 달할 것인데, 어떻게 스스로 세상에 섰다고 하겠습니까? 신 등이 비록 어리석고 지각은 없으나 결코 이런 짓은 감히 못하옵니다. 결코 이런 짓은 감히 못하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신 등에게 해와 달이시고 신 등에게 부모이시니, 신 등의 구구(區區)한 본말(本末)을 거의 통촉하고 계실 것이옵니다. 지나간 구투(舊套)를 이제는 이미 잊었으니 앞으로의 새로운 염려를 어찌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 등 대소 관이 서로 면려하며 분의(分義)를 다하고자 한 바는 오직 다 함께 협동하여 황극(皇極)이 있게 함에 귀일(歸一)하여 위로 성명께서 생성(生成)하신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 세도(世道)가 화평해진 복을 이루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아! 인신(人臣)이 되어 군부(君父)에게 이렇듯 질언(質言)하였다가 혹시 일호(一毫)라도 자신(自新)하라는 명하(命下)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이 어찌 조금이라도 인리(人理)와 일분의 신도(臣道)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이렇듯 소리를 합하여 애절하게 호소하는 것은 비록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오히려 자기 변명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신 등이 이렇게 눈물로 기원함에 있어서는 조금 전의 하교를 빨리 거두시어 신등으로 하여금 천지(天地) 사이에 설 수 있게 하시는 것이 더없이 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상의 지극하신 자애와 인덕으로 어떻게 차마 신등을 거절하시기를 일조에 이토록 하실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참으로 사죄(死罪)가 있어 바야흐로 사죄를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사오나 한편으론 천지의 대도(大度)에 바람이 없을 수도 없습니다. 간절히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애처롭게 여겨 조금만이라도 굽어 살피시고 또한 유사(攸司)로 하여금 신 등의 죄를 무겁게 감단(勘斷)하여 나라의 체통을 높히고 신하의 분의(分義)를 권형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의 소장(疏章)은 그 과연 한결같이 마음을 고쳤기에 그러한 것인가? 나는 본 것이 많은데 나는 믿지 못하겠다. 지금의 일은 그 과연 모두가 마음을 씻었기에 그러한 것인가? 나는 익히 보아왔는데, 나는 믿지 못하겠다. 지난번 수라를 물리치고 합문을 닫았을 때에 어찌 다시 당(黨)이 있었겠는가마는 오히려 전일과 같았다. 아! 을해년136) 에 존호를 받은 뒤에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오늘날 신자(臣子)가 아비를 섬기는 도리로 임금을 섬긴다면 비록 뱃속에 당심(黨心)의 잔재(殘滓)가 가득하더라도 어떻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였는데, 그 후에 보니 한쪽은 오직 하나의 ‘노(老)137) ’자를 지키고 있으면서 자의로 협잡하고 있으며, 한쪽은 겉으로는 당이 없는 것 같으나 오직 하나의 '소(少)자'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으며, 한쪽은 둘 사이에 붙어서 욕됨만을 면하려 하였고, 한 쪽은 창을 들고 공만 세우려 하여 그 버릇이 좋지 않았다. 이로 보면 그 임금이 과연 건극(建極)의 성공(聖功)이 있다고 하겠느냐? 그 장주(章奏)에서 체전건극 성공 신화(體天建極聖功神化) 여덟 글자의 존호(尊號)만 보면 마음이 먼저 부끄러웠었다. 내가 건극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 건극을 하신 것이다. 세도(世道)가 이러하여 억지로 날을 보내다가 모년(暮年)에 복정(復政)한 것은 마음이 오로지 백성과 나라에 있었기에 그러한 것이다.
아! 접때 종통(宗統)을 바룬 것도 내가 서둘러서 한 것이니, 이는 참으로 종국(宗國)을 위하고 세신(世臣)을 보호하려는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은 종향(從享)을 결정하였는데, 이 역시 충자(沖子)를 위하고 정신(廷臣)을 보호하려는 고심에서 나온 것이다. 아! 지난 날을 생각하여 감회가 일고 평일에 간직했던 바를 이루려고 이에 특명을 내린 것이다.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지고 처분이 이미 내렸는데도 혹시 갑론 을박(甲論乙駁)이 있다면 이는 이미 신하로서의 분의(分義)가 없는 것이다. 건극은 나에게 과중한 말이겠으나 만일 40년 동안의 주인을 묻는다면 그래도 내가 임금이 아니었는가? 접때 사제(賜祭)한 것은 세상에서 드문 감회가 일어서이고, 지금 종향(從享)을 명한 것은 뜻이 단합(團合)에 있었던 것인데, 해괴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정(先正)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건극을 배척한 것이다. 그 뜻이 실로 크게 불경(不敬)하여 임금은 버리고 당에만 추종(趨從)한 것이니, 아! 오늘의 조선(朝鮮)에 임금이 있는 것이냐, 신하가 있는 것이냐? 오늘 특별히 대신 이하를 편전(便殿)의 뜰에 불러 놓고 40년 동안 속에서 뻗쳐오른 회포를 통유(洞諭) 하기를 어찌 그만둘 수가 있었겠는가?"
하고, 이어 대신 이하를 전임(前任)에 다시 제배하라고 명하고 진신(搢紳)의 연명소(聯名疏)와 비답을 사각(史閣)에 갈무리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오늘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의 소장을 아뢰고 마땅히 충자와 함께 여러 신하들을 만나보겠다."
하였다. 궁을 나설 때에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대신 및 2품 이상과 유신(儒臣)을 부르라고 명하여 하유하기를,
"이 뒤에 다시 당론(黨論)을 일삼는 자는 난신 적자(亂臣賊子)이다. 경 등이 만일 당심(黨心)이 없다면 일어섬이 옳다."
하니, 대신 이하가 모두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감히 명하신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으로 나아가니, 이때에 밤은 이미 2경(更)이었다. 진전(眞殿) 문 밖에서 아뢰고, 이어 여러 신하들을 뜰로 불러 진신소(搢紳疏)의 비답을 들려주고 또 당론의 폐단에 대하여 하유하기를,
"소론(少論)은 그 이름에 겁을 먹고 소북(小北)은 쓸리듯이 노론(老論)에 따랐으며 남인(南人)은 그 표방(標榜)을 벗어나려 했다. 대체로 동서(東西)의 당은 전랑(銓郞)의 통망(通望)에서 연유하였고, 노소론(老少論)은 회니(懷尼)의 싸움138) 에서 연유하였으나 그래도 서로 혼인(婚姻)은 터서 정의만은 통하고 지내더니 《가례원류(家禮源流)》가 한번 나오면서부터는 마침내 다시 막혀139) 신축년140) ·임인년141) 에 이르러 그 극도에 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문순(文純)142) 의 종향(從享)에 불만을 가진 것도 조헌(趙憲)과 김집(金集)을 위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권상하(權尙夏)의 종향을 청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누구를 속이겠느냐? 문순의 외손 신경(申暻)이 문순의 치제(致祭)에 진사(陳謝)하매, 유당(柳戇)이 논박하였는데, 이것은 신경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선정(先正)을 배척한 것이니, 이는 당론이 또 나뉘어지는 원인도 되었다. 송명흠(宋明欽)의 적불(赤芾)143) 이란 말도 역시 산야(山野)의 당론인 것이다. 그 말이 옳다고 여기는 자가 있으면 물러가는 것이 좋을 것이고 만일 당습(黨習)을 하려는 자가 있으면 비록 혼자라도 안률(按律)을 하는 것이 역시 좋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다 일어나서 말하기를,
"감히 하교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음관(蔭官) 유득양(柳得養)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이 하교를 받고도 당심이 다시 싹튼다면, 이는 참으로 난적(亂賊)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유당의 일은 어떠하냐?"
하니, 대답하기를,
"잘못입니다."
하매, 임금이 그의 대답을 옳게 여겨 승서(陞敍)를 명하였다. 유득양은 유당의 재종질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웃는 자가 많았다. 임금이 홍봉한(洪鳳漢) 등을 삼공(三公)에 다시 제배(除拜)하고 이어 환궁하였다.
5월 19일 경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이복원(李福源)을 승지로, 채제공(蔡濟恭)을 대사헌으로, 구윤옥(具允鈺)을 대사간으로, 유선양(柳善養)을 집의로, 정항령(鄭恒齡)을 사간으로, 이동태(李東泰)·황최언(黃最彦)을 장령으로, 김보순(金普淳)·정환유(鄭煥猷)를 지평으로, 신응현(申應顯)을 헌납으로, 이창임(李昌任)·임희효(任希孝)를 정언으로, 홍술해(洪述海)를 부응교로, 이헌묵(李憲默)·박성원(朴盛源)을 교리로, 윤득맹(尹得孟)·김익(金熤)을 수찬으로, 심성진(沈星鎭)을 공조 판서로, 조돈(趙暾)을 예조 참판으로, 이은(李溵)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재기(再朞)가 이미 끝났으므로, 홍화문(弘化門) 동쪽에 묘우(廟宇)를 세우라고 명하고, 묘호(廟號)를 수은(垂恩)이라고 내렸으며 수위관(守衛官) 2인을 두어 다른 궁원(宮園)의 예와 같이 하였다.
임금이 대사성에게 명하여 반유(泮儒)를 인솔하고 들어오도록 하였는데, 반유들이 다 머뭇거리며 들어오지 아니하고 유독 장의(掌議) 윤면승(尹勉升) 한 사람과 더불어 들어오니, 임금이 몹시 노하여 대사성 서명신(徐命臣)을 호남 연변(沿邊)에 귀양보내고 조명정(趙明鼎)으로 대신하였으며, 향유(鄕儒)로 반궁(泮宮)에 있는 자는 육진(六鎭)에 나누어 정배하고 유적(儒籍)에서 이름을 삭제하였다. 조명정이 장의와 색장(色掌)을 데리고 들어가니, 임금이 소견(召見)하고 당습(黨習)을 일삼지 말라고 면칙(面飭)하였으며, 재임(齋任)을 자발적으로 삭직하는 폐단을 영구히 금지하라고 하였다.
5월 20일 신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보여(步輿)로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또 친히 비를 빌었다. 금초(禁草)가 엄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해서(該署)의 제조(提調)를 파직하고, 감찰(監察) 송가상(宋可相)을 정의(旌義)로 귀양보냈다. 임금이 탕제(湯劑)를 물리치고 들지 않았으며,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가 구대(求對)하였으나,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1일 임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밤에 제(祭)를 지냈는데 미처 관천(祼薦)도 하기 전에 예의사(禮儀使)가 곤하게 졸았다고 하여 예조 판서 이익보(李益輔)를 파직하고 이지억(李之億)으로 대신하였다. 육상궁(毓祥宮)에 들렸다가 이어 환궁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5월 22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이번에 죄로 삭직당한 사람은 이미 관직이 없어졌으니 그 직함으로 그 선대(先代)에 추은(推恩)할 수 없다고 하여 모두 추삭(追削)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자식의 죄로 인하여 벌이 그 아비에게 미치게 하는 것은 왕정(王政)이 아닙니다. 더구나 죽은 사람에게 준 것은 산 사람에게 준 것과는 다르니, 의당 측연하게 여기시고 도로 거두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생각은 징계를 하려 했던 것인데, 자식의 죄가 그 아비에게 미치고 또 추삭까지 하는 것은 후세에 물려줄 법이 못되고 또 효도의 이치로 다스리는 것도 아니니, 특별히 정침(停寢)하라."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5월 23일 갑술
임금이 북교(北郊)에서 또 친히 비를 빌고, 을해일(乙亥日)에는 밤에 의식대로 제를 지냈다. 새벽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바로 그쳤다. 효장묘(孝章廟)에 들렀다가 건명문(建明門)에 돌아와 의금부와 형조의 경죄수(輕罪囚)를 소방(疏放)하고, 비가 내리기 전에는 찬수(饌需)를 줄이라고 명하였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5월 25일 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다시 윤동도(尹東度)를 좌의정에 제배하였다. 윤동도는 전번에 사직서(社稷署) 제조(提調)로서 죄로 인하여 파직되었었다.
임금이 친히 죄수의 소결(疏決)을 행하고 찬적자(竄謫者)를 사면(赦免)하였으며, 파삭인(罷削人)을 서용(敍用)하였으니, 세 차례의 친도(親禱)에도 비가 올 기미는 더욱 막연하였기 때문이었다.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소결한 거조는 유울(幽鬱)을 펴게 하려 하심이나 을해년144) 에 역적 김정관(金正觀)이 네 사람을 무인(誣引)하였는데, 살아 있는 두 사람은 이미 그 원왕(冤枉)이 벗겨졌으나 죽은 두 사람은 신원(伸冤)할 길이 없으니, 몹시 가긍합니다."
하니, 임금이 누구냐고 물었다. 김상복이 말하기를,
"윤상임(尹尙任)과 신치근(申致謹)입니다."
하였고, 홍봉한(洪鳳漢)도 그 원통한 정상을 말하니, 임금이 그 직첩을 내주라고 명하셨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치중(李致中)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26일 정축
임금이 우제단(雩祭壇)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친히 글을 지어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중외의 장보(章甫)에게 하유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아! 무편 무당(無偏無黨)은 홍범 구주(洪範九疇)145) 에서 서술한 바이며, ‘두루 널리 미치고 한 당(黨)에 치우치지 않는다.[周而不比]’는 말은 《논어(論語)》의 수훈(垂訓)이다. 아! 40년 임어(臨御)하는 동안에 나이 또한 망팔(望捌)이 되었으니, 낮이나 밤이나 이 한 마음은 오직 당을 없애는 데에 있었다. 아! 저 당이란 명목(名目)은 어느 시대부터 생겼더냐? 상고(上古)에도 없었고 삼대(三代)146) 에도 어디 있었더냐? 한(漢)나라에 남북부(南北部)147) 가 있었고 당(唐)나라에는 우(牛)·이(李)148) 가 있었으며, 송(宋)나라에는 낙(洛)·촉(蜀)149) 이 있었고 명(明)나라에는 동절(東浙)의 당이 있었으나 우리 동방(東邦)에 있어서는 단군(檀君)으로부터 전조(前朝)150) 에 이르기까지 들어보지도 못하였다. 아조(我朝) 중엽 이후 사소한 일에서 일어나서 점차 커졌는데, 한·당·송·명에 비하여 그 이름이 너무나도 많다.
아! 저 동서(東西)의 당(黨)은 낭관(郞官)의 통망(通望)에서 생겼고, 저 대북(大北)·소북(小北)은 의리(義理)에서 나뉘어졌으며, 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은 예설(禮說)에서 격돌하였고, 저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은 사문(斯文)에서 고질화되어 일전(一轉)하면 재전(再轉)하고 삼전(三轉)하면 사전(四轉)하였는데, 처음에는 서로 현사(賢邪)로 배척하더니, 끝에는 서로 충신이라는둥 역적이라는둥의 공격을 가하여 천고에 없는 무신년151) 의 역란(逆亂)을 빚어냈다. 아! 조태구(趙泰耉)가 조태구가 된 것은 저 선정(先正)을 옹호하려고 한 것이니 이는 선정이 소론의 영수(領袖)되기를 달갑게 여긴 때문이고, 이진유(李眞儒)가 이진유가 된 것은 앞장서서 한번 대적(對敵)하다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한 떼거리로 돌아간 것이다. 무신년의 《감란록(勘亂錄)》 뒤에 만약 징즙(懲戢)이 되었다고 한다면 어찌 또 을해년152) 의 《천의소감(闡義昭鑑)》이 있겠는가? 아! 합문을 닫아걸고 수라를 물리친 일이 옛날에는 어디 있기나 했더냐?
아! 나의 마음은 척강(陟降)하신 선령(先靈)들이 굽어보실 것이다. 만사가 극단에 달하면 뒤집히는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을해년 뒤로 겉보기에는 비록 협동하는 것 같았어도 속으로는 아직도 각기 다르니, 매양 〈체천 건극 성공 신화(體天建極聖功神化)〉 여덟 글자의 존호(尊號)를 생각하면 마음이 항상 부끄러워진다. 천도(天道)는 순환(循環)하는 것이니 회복되지 않을 때는 없는 것이다. 아! 만일 문순(文純)을 종향(從享)하는 거조가 없었더라면 어찌 18일의 일이 있었겠느냐? 이로 보면 아! 선정은 가위 나에게 공을 세웠다고 하겠다. 아! 이제는 노론과 소론·남인과 북인이 모두 연장(聯章)을 올려 다 ‘구습(舊習)을 씻었다.’고 말하였으니, 때는 넘겨서 안되고 기회를 그르쳐서는 안되겠기에 즉일로 몸소 진전(眞殿)에 나아가 그 일을 아뢰었고 진전에 아뢴 말과 여러 신하들의 소장을 사각(史閣)에 간직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인하여 창덕궁(昌德宮)의 편전(便殿)에 앉아 충자(沖子)의 손을 이끌고 대소 신료를 불러 자상하게 다시 신칙하였으며, 이어서 하유(下諭)하기를, ‘아! 우리 나라에서 할아비는 손자에게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에게 의지하였다. 오늘의 대소 신료들은 바로 교목 세신(喬木世臣)이니 오늘 이 광경을 보고 이 하교를 듣고도 구습을 뉘우치지 못한다면 이는 공성(孔聖)이 이른바 「하지 못할 짓이 없는[無所不至]」 자이니, 바로 난신 적자(亂臣賊子)인 것이다. 내가 비록 죽이지 않아도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인데 여러 신하들은 알고 있느냐?’ 하였더니, 모두가 소리 높여 ‘예’ 하고 대답하였다. 아! 지금 내가 선정을 존모하여 특별히 종향(從享)을 명한 것은 바로 건극(建極) 두 글자 때문이다. 처음에는 서로 어긋나서 합치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정도(正道)로 돌아왔으니, 백수 모년(白首暮年)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을 어찌 뜻했겠는가? 아! 처음에 내가 벌떡 일어나 대신과 예관(禮官)을 불러 하교한 것은 뜻이 깊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거조(擧措)로 보건대, 만일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즉위한 후에 조정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던 사문(斯文)의 일이 반드시 다시 일어나 옛날의 4당(黨)이 다시 5당이 되겠기 때문이었다.
아! 광세(曠世)의 흥감(興感)이 종향으로 인하여 일이 타첩(妥帖)이 되었다. 아! 오늘날에 위로는 그 임금으로 하여금 황극(皇極)을 세우는 뜻을 끝마치게 하였고 아래로는 세신(世臣)으로 하여금 신화(神化)를 찬조하는 공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 어찌 내가 한 것이겠는가? 이 어찌 내가 한 것이겠는가? 황천(皇天)이 우리 동방(東方)을 돌보신 소치요 척강(陟降)이 세신(世臣)을 은밀히 도우셨기 때문이다. 어찌 비덕(否德)이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비록 그러나 나는 많은 것을 보았고 또 익히 알고 있다. 성탕(成湯)과 문왕(文王)같은 성왕(聖王)으로서도 날로 새롭고 또 새롭게 하였으며 도(道)가 있는 어진이를 갈망(渴望)하여 보지 못한 것처럼[望道未見] 하였으니, 이는 두 성군이 겸손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성스러워도 성군으로 자처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대성(大聖)도 오히려 그랬거늘 하물며 나같은 양덕(凉德)에 있어서랴? 또 해동(海東) 사람들은 명목(名目)을 내세움으로써 고상(高尙)한 운치(韻致)로 삼고 있으니, 지금은 비록 4당이 없다 하더라도 또 한 당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랴? 또 들뜨고 법석을 떠는 습성과 조급하고 시샘하는 풍조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위로 진신(搢紳)에서부터 아래로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옛 창[戈]은 비록 거두었다 하더라도 새로운 칼날이 두려울 만하니, 여러 신하들은 비록 당이 없다 해도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더구나 어두운 곳에서 꾸물거리는 무리와 먼 외방의 괴귀(怪鬼) 같은 무리가 만일 혹 날뛰더라도 능히 억제하지 못한다면 졸졸 흐르는 물줄기가 마침내는 강하(江河)를 이루게 될 터이니 두렵지 않겠느냐?
어제 옛 증세가 다시 발작하여 누워서 수응(酬應)하던 중에 종향(從享)의 교서를 보고 마음에 황홀하여 혼자 이르기를, ‘이것은 오히려 예사로운 글이다. 이번에 4당을 조정(調停)한 뒤에 만일 편전에서 칙유(飭諭)한 것을 가지고 마무리가 되었다고 여긴다면 이는 사체(事體)가 너무 가볍고 또 이러한 큰 처분을 어떻게 중외에서 다 알도록 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였는데, 생각이 이에 미치자 고달픈 중에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아 특별히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문에 나아가 백료(百僚)와 유생(儒生)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 뜻을 포고하겠다고 명하였다. 아! 백년의 당습이 반야(半夜)에 모두 사라지고 4기(紀)153) 의 고심이 아마도 천추에 전해지려나보다! 모름지기 각자 면려하여 천극(天殛)을 범하지 말라. 그래서 이에 교시하노니, 모두 상세히 알 줄 믿는다."
하였다. 또 친히 글을 지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에게 제를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아! 경(卿)은 반남(潘南)의 거족(巨族)이었도다. 탁연(卓然)한 자품(資稟)에 공정(工程)도 독실하였노라. 산림(山林)에서 덕을 길러 금옥 같은 바탕이었네. 전조(銓曹)에 탁승(擢陞)하여 금구(金甌)154) 로 매복(枚卜)되었도다. 당의 폐해를 깊이 알고서 힘써 황극(皇極)을 주장(主張)하였노라. 산함(酸醎)을 잘 조제하여 의(義)를 지킴이 대단히 간절하였도다. 아! 소자(小子)는 4기(紀)를 재위(在位)하면서 밤낮으로 한 마음은 세신(世臣)을 보합(保合)함이었도다. 그러나 다스림이 뜻을 따르지 못하여 어려움이 눈앞에 넘쳤노라. 여덟 글자에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마음은 항상 두려움 뿐이었다. 경의 의지(意志)를 익히 들었으니 세상에 드물게 덕을 사모했노라. 양현(兩賢)도 성무(聖廡)에 배향(配享)했으니, 동시에 헌작(獻酌)하게 되었도다.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나의 뜻이 부쳐진 바이로다. 빨리 사전(祀典)을 명하여 천억년에 전하리로다. 생각건대 경의 뜻은 세웠어도 구원(九原)에서 다시 일으키지는 못하리로다. 종향(從享)의 예를 마치니 금신(衿紳)들의 이목(耳目)이 용동(聳動)했노라. 지신(知申)155) 을 시켜 치제하노니, 그 글은 친히 엮었노라. 영령이 알고 있거든 흠향(歆饗)하기를 바라오."
하였는데, 백관과 유생이 의식대로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병조 참판 이은(李溵)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말하기를,
"경의 조부156) 와 아버지157) 도 황극을 협찬하였는데, 오늘날 조정(朝廷)의 기상이 화평함을 보지 못하는구나.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이 ‘봉덕이(封德彛)158) 로 하여금 보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더니, 지금 나도 그 생각과 같다."
하고, 또 승지 김화진(金華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경의 아버지159) 도 나의 건극(建極)을 협찬한 신하이다."
하니, 이은 등이 머리를 조아리며 칭사(稱謝)하였다.
5월 27일 무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전에 북도(北道)에서 바치던 대구어(大口魚)를 민폐가 된다고 하여 경공(京貢)으로 만들었는데, 당년조(當年條)의 연조(年條)를 앞당겨서 미리 값을 지급하는 것이 이미 그릇된 규례(規例)가 되었습니다. 본도(本道)의 어떤 명목의 곡물이든지 덜어내서 백성들에게 거듭 징수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약간의 포(布)만 당연히 내야 하는 북도 백성에게서 거두어 당해 공물(貢物)의 부족액만 보충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소치(小齒)가 빠졌었는데 다시 나고, 머리가 이미 희었었는데 다시 검어지니 이상한 일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이는 희귀한 일이니 실로 종사(宗社)의 무강(無彊)한 복이옵니다."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5월 28일 기묘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였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친림하여 중외에 반교(頒敎)하고 반교에 입참(入參)하지 않은 신하들을 파직하였는데, 외방에 있거나 막 초선(抄選)된 사람은 불문에 부치라고 명하였다. 지평 김보순(金普淳)을 정의현(旌義縣)에 귀양보냈다. 김보순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40년간 고심하신 바가 당(黨)을 없애는 데에 있었는데, 궐정에 들어온 신하로 누가 감히 다시 당심(黨心)을 품겠습니까? 상하가 화합하는 데에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니 성상께서 다시는 신하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지 않으심이 소망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의심하고 멀리하는 것이 임금에게 있느냐, 신하에게 있느냐? 당습(黨習)이 잇달아 이루어진 것은 하나의 ‘의(疑)’ 자가 근본이 되는 것이다. 어찌 감히 방자하게 반교하는 날에 아뢰느냐?"
하고, 드디어 귀양보낸 것이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오랜 가뭄으로 임금이 혹 삼강(三江)160) 에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나 있지 않을까 염려하여 어사(御史) 홍술해(洪述海)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인찬기(印燦起)란 자가 있어 그의 사위와 다투었는데, 사위가 노하여 제 아내를 내쫓으매 그 아내가 아비에게 돌아가자 아비가 거절하니 갈 곳이 없어 결국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고, 또 김가(金哥) 성을 가진 한 상한(常漢)이 사소한 일로 그 아내를 내쫓은 일이 있으므로 세 사람의 죄를 핵실하여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 딸을 핍박하여 죽게 하고 제 아내를 때려서 내쫓은 것은 모두 윤리(倫理)가 없는 짓이다."
하고, 해조(該曹)에 감률(勘律)을 명하였다.
5월 29일 경진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갔다. 이때에 비를 여섯 차례나 빌고 친도(親禱)가 세 차례나 되었으나, 끝내 비를 얻지 못하자 또 장차 비를 빌려는 것이었다. 산개(傘盖)를 치우고 보여(步輿)에 오르니, 백관이 모두 보종(步從)하였다. 먼저 선원전(璿源殿)에 배알하고 이어 태묘의 재실(齋室)로 나아갔다.
김시묵(金時默)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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