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3권, 영조 40년 1764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1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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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신사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이날 새벽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태묘에서 친히 비를 빌었다. 관헌(祼獻)을 의식대로 행하고 예가 끝나자 환궁하였다.

 

6월 2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시사(試士)에 친림하여 이명빈(李命彬) 등 5인을 뽑고 이 명빈에게는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라고 명하였으며, 나머지에게는 모두 급분(給分)하였다. 이때에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종향(從享)을 예성(禮成)하였는데 참제(參祭)한 선비가 자그마치 수천 인에 달하였는데, 임금이 그 거안(擧案)161)  을 가져오게 하고 아울러 시사(試士)에 친림하였으며, 반유(泮儒)의 죄적자(罪謫者)를 방면하고 아울러 그 과거(科擧)를 정지시킨 것을 해제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명산 대천(名山大川)에 비를 빌게 하였다.

 

6월 3일 계미

이담(李潭)을 승지로 삼았다.

 

6월 4일 갑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친히 운한편(雲漢篇)을 지어 팔도(八道)와 양도(兩都)162)  에 반포하였으니, 대체로 가뭄을 걱정하고 백성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이때에 성수(聖壽)가 이미 칠질(七窒)이 지났는데도 성궁(聖躬)의 노고를 꺼리지 않고 친히 묘사(廟社)에 비를 빌었으나 비를 얻지 못하자, 또 친히 운한편을 지었는데 그 지성으로 가뭄을 걱정하는 마음이 사륜(絲綸)163)  사이에 애연(藹然)히 나타나 있으니, 옛날에 견준다면 바로 주시(周詩)의 운한편(雲漢篇)164)  이라 하겠다. 참으로 방백(方伯)과 수재(守宰)가 된 자들로 하여금 조금만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일념으로 보효(報效)하게만 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백성을 위한 정사에 크게 보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장마와 가뭄 등 재이(災異)의 보고에까지 거의 사실대로 계문(啓聞)하지 않고 오로지 가리우기만 일삼고 고식(姑息)에만 힘써 드디어 재이를 숨기는 풍조만 갈수록 더 심하게 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걱정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6월 5일 을유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서(湖西)의 도류 죄인(徒流罪人)을 임의로 방면하였다고 하여 전 도신(道臣)을 파직시키고 이조 판서 김상철(金尙喆)을 그 후임에 유보하였다가 5일이 지난 후에 다시 잉임(仍任)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대사간 구윤옥(具允鈺)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진달하기를,
"남형(濫刑)은 재앙을 부르는 한 가지 원인이 되니, 청컨대 경외(京外)의 관원에게 신칙하여 형장(刑杖)을 한결같이 규정된 척도(尺度)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헌묵(李憲默)을 집의로, 이수훈(李壽勳)을 장령으로, 박사해(朴師海)·서명선(徐命善)을 지평으로, 이명식(李命植)을 교리로, 김노진(金魯鎭)·이재간(李在簡)을 수찬으로, 이익정(李益炡)을 공조 판서로, 이익보(李益輔)를 우참찬으로, 정실(鄭實)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6월 7일 정해

또 중신(重臣)을 보내서 용산강(龍山江)의 저자도(楮子島)에서 비를 빌었다.

 

6월 8일 무자

새벽에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참포(黲袍)·오서대(烏犀帶)를 갖추고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갔으니, 숙종 대왕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다. 저녁에 환궁하였는데, 역로(歷路)에 육상궁(毓祥宮)에 들러 배알(拜謁)하였다.

 

6월 9일 기축

임금이 농단(農壇)의 기우제(祈雨祭)에 쓸 향(香)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이어 선농단(先農壇)으로 나아가는데, 좌포도청(左捕盜廳)에 들러 여러 죄수를 풀어 주었다. 대장 김성우(金聖遇)를 파직하였으니, 사소한 일로 사람을 가두었기 때문이었다. 회가(回駕)할 때에 단소(壇所)에서 흥인문(興仁門)까지 원통함이 있는 사람은 모두 어가 앞에서 호소하도록 허락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는 도리를 다하였다.

 

6월 10일 경인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친제(親祭)를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옥당관(玉堂官) 이명식(李命植)과 김노진(金魯鎭)을 불러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가뭄을 걱정하여 비를 빌면서 소요연(逍遙輦)을 물리친 고사(故事)에 대하여 묻고 제향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부복하여 묵도하였으며, 이어 감선(減膳)과 정악(停樂)을 명하였다. 아침에 환궁하여 권서경(權敍經)·유래(柳徠)·박지문(朴趾文)을 신원(伸冤)하도록 명하고 유래의 관작을 회복하여 주었다. 세 사람은 무신년165)  과 경술년166)  에 적(賊)에게 원인(援引)한 바 되어 이름이 단서(丹書)167)  에 올라 있었는데, 그 아들과 손자가 어가 앞에서 소원(訴冤)하여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어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경현당(景賢堂)에 돌아와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고 좌의정 이집(李㙫)에게 사제(賜祭)하라고 명하였으니, 연(輦)을 타고 그 집 문앞을 지나다가 임금의 마음에 추념(追念)이 있었던 것이다.

 

6월 11일 신묘

임금이 대신과 추조(秋曹) 당상을 불러 문안(文案)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고 대소결(大疏決)을 행하였는데, 대저 용서를 받아 감사(減死)된 자가 거의 수십 인에 달하였다. 이어 이제부터는 경외(京外)에서 용형(用刑)할 때에 모두 가쇄(枷鎖)을 풀고 형을 받도록 법령(法令)을 삼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범양인(犯釀人)을 친문(親問)할 때에 죄인이 가쇄를 벗지 않고 형을 받는 것을 보고는 마음에 가엾어 ‘어떻게 저 괴로움을 견디겠는가?’ 하였다. 대체로 형이란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 아닌 바에야 가쇄를 풀고 형을 가한들 무엇이 안된단 말이냐?"
하니,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이는 천지(天地)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이십니다."
하였었다. 이날 큰 비가 내려 3일이 지나서야 그치니, 임금이 친히 희우기(喜雨記)를 지었다. 이 해의 가뭄은 4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6월까지 이르도록 3삭(朔)을 크게 가물어 들판이 타는 듯하였다. 임금이 근시(近侍)와 중신을 보내어 여러 차례 비를 빌었으나 끝내 감응이 없자, 친도(親禱)가 네 차례요. 소결(疏決)이 두 차례나 되었으며, 마침내 감선(減膳)과 피전(避殿)까지 하여 소재(消災)로 책궁(責躬)의 도리를 다한 뒤에야 하늘이 비를 내렸으니, 하늘과 사람이 감응하는 이치가 어찌 헛되다 하겠는가?
임금이, 사간 정항령(鄭恒齡)이 파리하게 병색이 있음을 민망히 여겨 그의 관직을 체개하였다. 또 해서(該署)에 명하여 약물을 주게 하고 전조(銓曹)에 명하여 가까운 고을 수령에 제수하게 하였다. 정항령은 젊어서부터 문재(文才)가 있어 과장(科場)에서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고 중신(重臣) 이덕수(李德壽)의 천발(薦拔)한 바 되었었다. 임금이 일찍이 그 이름은 들었어도 그 용모가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였는데 재주를 아끼는 뜻에서 그를 살리도록 하여 보려고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니, 이것은 특이(特異)한 은전(恩典)이라 하겠다.

 

6월 13일 계사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의릉(懿陵)의 기신일(忌辰日)에 친히 향을 전하겠다는 하교를 쓰라고 명하고 이어 서글픈 얼굴로 말하기를,
"오늘은 아우 연령(延齡)의 회갑(回甲)이 되는 날이다. 옛날 함께 용루(龍樓)168)  를 모시던 생각을 하니 지금 어떻게 나의 마음을 억제하겠느냐? 해조(該曹)에 명하여 그 집에 음식물을 실어 보내게 하고 예조에 명하여 왕손(王孫)으로 그 뒤를 이어 그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조덕성(趙德成)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4일 갑오

임금이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많은 대신(臺臣)이 들어오지 않음으로써 양사(兩司)의 여러 관원을 파직하고, 한광조(韓光肇)를 대사헌으로, 이중호(李重祜)를 대사간으로, 정술조(鄭述祚)를 사간으로, 이휘중(李徽中)·변득양(邊得讓)을 장령으로, 심욱지(沈勗之)를 지평으로, 김상집(金尙集)·이득일(李得一)을 정언으로, 이명식(李命植)을 응교로, 이명환(李明煥)·박사해(朴師海)를 부교리로, 조숙(趙)을 승지로 삼았다.

 

고려 시중(高麗侍中) 윤관(尹瓘)과 고 상신(相臣) 심지원(沈之源)의 묘에 사제(賜祭)를 명하였다. 당초에 윤관·심지원의 묘가 파주(坡州)에 있었는데, 윤씨가 먼저 입장(入葬)하였으나 해가 오래되어 실전(失傳)하니 심씨가 그 외손으로서 그 산을 점령하고 묘를 썼었다. 이때에 이르러 윤씨 집 자손들이 산 아래에서 비석 조각을 습득하여 심씨 집 자손과 쟁송(爭訟)하여 끝이 나지 않자, 임금이 양쪽을 모두 만유(挽留)하여 다툼을 금하게 하고 각기 그 묘를 수호하여 서로 침범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윤관은 전조(前朝)의 명상(名相)이고 심지원은 아조(我朝)의 명상이라 하여 똑같이 치제(致祭)한 것이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 등의 작호(爵號)를 정하라고 명하고 나이가 이미 성년(成年)이 된 사람은 종친부(宗親府)로 하여금 부직(付職)하게 하라고 하였다.

 

6월 15일 을미

밤에 어떤 별이 엷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권도(權噵)와 조영순(趙榮順)을 승지로 삼았다.

 

전 지사 한사득(韓師得)이 상소하여 쇠병(衰病)으로 벼슬길에 있기가 어렵다고 아뢰고 치사(致仕)하기를 굳이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한사득은 이때 나이 76세였다.

 

6월 16일 병신

임금이 유생(儒生)의 전강(殿講)에 친림하여 수석을 차지한 김약귀(金若龜)에게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라고 명하였다.

 

결성 안핵 어사(結城按覈御史) 박사해(朴師海)가 돌아와 홍양해(洪量海)의 산송(山訟) 일을 아뢰니, 임금이 홍양해를 형배(刑配)하고 즉시 묘를 파내게 하라고 명하였으며, 또 전 도신(道臣) 조돈(趙暾)을 파직하였다. 이조 판서 김상철(金尙喆)도 좌체(坐遞)되어 이익보(李益輔)로 대신하였다.

 

6월 17일 정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겸 한학 교수(兼漢學敎授) 홍술해(洪述海)를 불러들여 《노걸대(老乞大)》169)  를 강하게 하였으나 잘 알지 못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사역원(司譯院)에서 교수를 차출(差出)할 때에 번번이 한어(漢語)를 안다고 하여 차출하였으나 명실이 서로 부합하지 않았다. 고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는 화어(華語)를 잘 알아 화인(華人)들의 칭찬한 바 되었고 이희(李憙)도 화어를 잘하여 훙문록(弘文錄)에 들지 않았으나 교수를 제수하였다. 이제부터는 연소한 명관(名官)들에게 한어(漢語)를 익혀 실효가 있게 하라."
하였다.

 

송형중(宋瑩中)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8일 무술

임금이 조강을 행하였다. 정언 이득일(李得一)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먼저 옹주(翁主)의 가례(嘉禮)부터 비롯하여 절약에 힘써 사방에서 사치(奢侈)를 본받는 폐단을 제거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문단(紋緞)을 금한 뒤에도 장복(章服)에 쓰는 문단만은 허락하였기 때문에 곤의(袞衣)와 조신(朝臣)의 장복은 모두 이전과 다름없다 하겠으나, 명부복(命婦服)이라 칭하고 아직도 문단이 있기 때문에 기괴한 문수(紋繡)가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지금부터는 위로 적의(翟衣)170)  에서부터 아래로 명부복에 이르기까지 국중의 문단은 모두 금하라."
하였다. 이득일이, 또 봉조하(奉朝賀) 한사득(韓師得)의 치사(致仕)를 윤허하셨는데, 인신(人臣)이 치사하는 것은 염치와도 관계된 일이고 또 성조(聖朝)에서 우로(優老)하는 은전(恩典)이라 할 수 있는데도 전조(銓曹)에서 바로 중추부(中樞府)에 부직(付職)하지 않은 것은 격례(格例)를 위배함이 크다고 아뢰고, 전관의 파직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6월 19일 기해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종정(金鍾正)을 승지로 삼았다.

 

6월 20일 경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평안도의 차령(車嶺)에서 민가 32채가 불에 탔는데, 임금이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6월 21일 신축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윤방(尹坊)·조덕성(趙德成)을 승지로, 정실(鄭實)을 대사헌으로, 윤승렬(尹承烈)을 지평으로, 김상철(金尙喆)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6월 22일 임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모든 동몽을 거느리고 함께 들어와 《소학(小學)》을 서로 강송(講誦)하게 하고, 상으로 종이와 붓을 차등 있게 내렸다.

 

석강을 행하였다.

 

6월 23일 계묘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근독합(謹獨閤)과 숭문당(崇文堂)을 수리하여 왕세손(王世孫)이 시어(時御)하면서 회강(會講)하는 처소로 삼으라고 명하였으니, 왕세손이 경희궁(慶熙宮)에서 이어(移御)하였기 때문이었다.

 

헌납 남운로(南雲老)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가에서 문무과(文武科)를 설치한 것은 대체로 인재를 발굴하여 빠짐없이 다 등용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급제한 지 20년에 미관 말직(微官末職)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홍패(紅牌)만 안은 채 초야(草野)에서 늙어가는 자가 허다합니다. 그 재학(才學)과 기예(技藝)가 어찌 모두 남만 같지 못하여 그러하겠습니까? 만일 양전(兩銓)으로 하여금 등과한 연조(年條)가 가장 오래된 사람부터 가려 순차로 천거하기를 반드시 공정하게 한다면 실효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6월 25일 을사

임금이 조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고 충신 윤집(尹集)의 봉사손(奉祀孫) 윤욱(尹煜)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윤욱이 새로 탈상(脫喪)하자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영사(領事) 윤동도(尹東度)가 전 북도 감시 어사(北道監市御史) 홍낙인(洪樂仁)의 별단(別單)에 대해서 복주(覆奏)하였으니, 그가 논한 여러 조목에 첫째는 친기위(親騎衛)의 시사(試射)에서 우등한 자를 변장(邊將)에 제수하자는 일이고, 둘째는 무사가 가지고 오는 호마(胡馬)를 연도(沿道)에서 금하지 말 것이며, 셋째는 단천(端川) 이북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부령(富寧) 이북에 남쪽 장사꾼이 들어가는 것을 특별히 금지하는 것이요, 넷째는 시노비(寺奴婢)의 신공(身貢) 포흠(逋欠)을 감하되 기사년171)  부터 임오년172)  까지는 특별히 탕감해 주자는 것이었는데, 임금이 모두 그 소청대로 따르라고 명하였다.
간원 【사간 정술조(鄭述祚)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자근만(者斤萬)의 일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무고를 입은 줄 알면서도 줄곧 신문하는 것은 왕정(王政)이 아니니, 빨리 정지하라."
하였다. 또 양리(良吏)를 가려 오래도록 맡겨 성과를 올리게 하기를 청하니, 전조(銓曹)에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이득종(李得宗)을 도승지로 삼았다.

 

6월 26일 병오

임금이 의인 왕후(懿仁王后)173)  의 기신(忌辰)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하였다.

 

연안 부사(延安府使) 민백순(閔百順)이 도신(道臣)과 혐원(嫌怨)이 있다 하고 의리를 들어 부임하지 않으니, 임금이 옛날 감녕(甘寧)과 능통(凌統)의 일174)  을 인용하여 하유하고 그 땅으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또 통신사(通信使)를 수행한 훈도(訓導)가 사소한 일로 왜인과 다투다가 피살된 일로 인하여 3사신의 관직을 모두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6월 27일 정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평시서(平市署) 제조(提調)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일찍이 대신의 주달(奏達)로 인하여 군문(軍門)에서는 시인(市人)을 포박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접때 난전(亂廛)의 일로써 한성부와 서로 다투다가 훈국(訓局)에서 시인 한 사람을 묶어 갔습니다. 이와 같이 정식(定式)을 어긴 데에는 죄를 주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훈련 대장 구선행(具善行)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가 조금 후에 다시 제수하였다.

 

간원 【사간 정술조(鄭述祚)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수령(守令)이 하직한 뒤에도 오래 머무는 폐단을 금하라고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6월 28일 무신

임금이 선의 왕후(宣懿王后)175)  의 기신(忌辰)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이어 전설사(典設司)에서 재숙(齋宿)하면서 향관(享官)의 복명을 기다렸다.

 

6월 29일 기유

심양 안핵사(瀋陽按覈使) 김종정(金鍾正)이 복명하니, 임금이 소견하였다. 안핵할 때에 심양장(瀋陽將)이 우리를 속여 말도 통하지 못하게 하고 한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한 채 독자적으로 안사(按査)하였는데, 김종정이 비록 정문(呈文)하여 쟁집(爭執)하였으나, 결국 그의 조종(操縱)한 바가 되어 국체(國體)를 손상시키고 전대(專對)의 책무를 잘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를 삭출(削黜)하고 수역(首譯) 이정희(李廷熺) 등을 귀양보냈다.

 

6월 30일 경술

임금이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친히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여 채제공(蔡濟恭)을 공조 참판으로,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과 김기대(金器大)·안표(安杓)를 사은 삼사신(謝恩三使臣)으로 삼았다. 임금이 침체(沈滯)된 사람을 소통시키고 수령을 가려서 차출하라고 여러 차례 신칙하는 하교를 내렸는데, 도목정이 끝나기 전에 하교하기를,
"총재(冢宰)176)  는 책임이 무거운 자리이다. 내가 고 상신(相臣) 이천보(李天輔) 이후로는 믿는 것이 오직 경뿐이었는데, 경이 협사(挾私)할 줄이야 어떻게 생각하기나 했겠느냐?"
하고, 처음에는 이조 판서 이익보(李益輔)의 월봉(越俸)을 명하였다가 곧바로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출보(黜補)를 명하였고, 또 정사(政事)에 참여한 두 전관(銓官)을 모두 체개하라고 명하였으며, 김상철(金尙喆)을 다시 이조 판서로, 이은(李溵)과 이최중(李最中)을 참판과 참의로 삼았다.
이익보는 성질이 교항(驕亢)하여 임금의 비위를 거슬러 전후로 죄파(罪罷)된 적이 잦았으나 정작 대정(大政)177)  에 임하여서는 격례(格例)를 따른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요, 별로 현저한 실책이 없었는데도 갑자기 엄지(嚴旨)를 내려 경색(景色)이 창황하였으니, 비록 경연(經筵)에 나왔던 신하들까지도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설사 이익보가 참으로 주의(注擬)하는 사이에 사의(私意)가 있었다면 명백하게 그 죄를 말하고 귀양을 보내거나 출보를 했어야 하는데, 엄지가 불의(不意)에 나왔으니, 이로 말미암아 총재의 자리가 더욱 가볍게 되어 식자(識者)들이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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