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임자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였다. 《맹자》를 강하다가 웅어장(熊魚章)에 이르러 시독관 박성원(朴盛源)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이 나뉘어지는 길입니다. 의리를 위주로 하면 올바른 천리를 얻을 수 있고 이익을 위주로 하면 결국 인욕에 빠지고 마는데, 세상으로 하여금 이익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도록 하는 것은 오직 인군(人君)이 이끄는 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고, 검토관 김노진(金魯鎭)이 말하기를,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 이 한 편(篇)의 큰 뜻입니다. 무릇 사람이 인욕을 따르는 것이 또한 반드시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그의 마음에 어찌 전혀 의리를 취할 마음이 없겠습니까? 오직 죽음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점차로 이욕에 빠져 들어가 심지어는 안일(安逸)을 즐기는 해독과 처첩(妻妾)들이 잘 받들어 주는 것에 빠져도 끝내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위와 아래가 다같이 깊이 살펴야 할 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매우 절실하다. 이는 임금이 공사(公私)를 옳게 구분하여 성찰하는 바 뿐만 아니라, 신하가 임금을 섬길 적에도 이 웅어장의 의리처럼 한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신(儒臣)이 나에게 권면하는 것처럼 여러 신하들에게 경계해야 하겠다. 비록 방백(方伯)이나 수령이라 하더라도 집이나 재물의 사이에 빠지고 또 처첩에게 미혹된다면 정사를 잘 하고 싶더라도 그 해가 결국에는 우리 백성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하고, 이어서 대정(大政)178) 에서 임명한 여러 수령들을 소견(召見)하여 면칙(面飭)시켜 보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이득종(李得宗)을 도승지로 삼았다.
다시 이익보(李益輔)를 우참찬에 제수하였다가 이윽고 또 병조 판서를 제수하였으니, 이는 좌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상소를 올려 구원했기 때문이었다.
7월 3일 계축
임금이 기우제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이때 한번 비가 오고 나서 곧바로 가물었기 때문에 또 기우제를 지내라고 명한 것이다. 이어서 월대(月臺)에 나아가 주강과 석강을 행한 다음 한데 앉아서 향을 피우면서 향관(享官)이 복명(復命)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돌아오자〉 비로소 내전(內殿)으로 돌아왔다.
권도(權噵)를 이조 참의로, 채제공(蔡濟恭)을 개성 유수로, 정실(鄭宲)을 사은 겸 동지 부사로, 안표(安杓)를 장령으로, 송재경(宋載經)·윤사국(尹師國)을 정언으로 삼았다.
전 판윤 어유룡(魚有龍)이 졸하였다. 어유룡이 대각에 있으면서 애초에 적신(賊臣) 조태구(趙泰耉)를 논핵하였으므로 기풍이 있다고 일컬었다. 그가 늙어서는 기사(耆社)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7월 4일 갑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헌납 남운로(南雲老)가 이동려(李東呂)·이지순(李址淳)에 대한 전계를 정지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악역(惡逆)에 관계되는 일이 아닐 경우에는 양사가 다같이 쟁론하는 것은 옛날의 규례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누차 양사에게 유시하여 정지하도록 하였다. 남운로가 이미 계사를 정지하고 나서 곧바로 또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그의 직을 체차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전 정언 정반(鄭槃)을 다시 대각에 의망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익보가 정반을 대각에 의망하였는데, 임금이 그 의망 단자를 물리치며 말하기를,
"정반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전형(銓衡)을 맡은 신하가 대답하기를,
"고 응교 정식(鄭栻)의 증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차자에 연명하였던 사람의 손자란 말인가?"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말하기를,
"정식이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179) 로 유봉휘(柳鳳輝)와 더불어 차자에 연명을 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하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잘못한 일을 가지고 손자에게 연루시킨다는 것은 왕도의 정사가 아니니, 전에 내린 전교를 취소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윽고 또 정반을 특별히 정언에 임명하였다.
7월 5일 을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중호(李重祜)를 승지로 삼았다.
또 중신(重臣)을 명하여 용산(龍山) 저도(楮島)에서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때에 연이어 빈대(賓對)를 행하였는데, 부서 기회(簿書期會)180) 가 아니면 대신이 건의한 경우가 없었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은 통영(統營)이 피폐해지고 있다는 이유로 세수(歲首)에 궤유(饋遺)를 금지할 것을 청하고,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은 독서당(讀書堂)이 기울어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수리하기를 청하였다. 대체로 영곤(營閫)181) 이 용도를 절약하는 방법이 어찌 세수 궤유의 유무(有無)에 달려 있겠으며, 성조(聖朝)에서 문학을 숭상하는 정치가 독서당의 수리 여부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근본을 버리고 말단에서만 구제하려고 한단 말인가? 묘당의 모유(謀猷)가 이처럼 잗달았다.
7월 6일 병진
임금이 기우제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하고, 이어 예문관(藝文館)에서 거재(居齋)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관(館)은 경자년182) 에 거상(居喪)하던 곳이다. 지금 45년이 된 뒤에 다시 이 관에 유숙하게 되니, 나의 마음이 서글프기만 하다."
하고, 친히 한원문답(翰苑問答)을 지었다.
조엄(趙曮)을 대사간으로, 이인배(李仁培)를 헌납으로, 김상익(金相翊)을 지평으로, 원인손(元仁孫)을 부제학으로, 신응현(申應顯)·김시구(金蓍耉)를 장령으로, 윤홍렬(尹弘烈)을 정언으로, 남태제(南泰齊)를 판윤으로 삼았다.
대사헌 정실(鄭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해에 외람되이 경연의 직함을 띠고 누차 출입하면서 시종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경연에서 매양 ‘잘못에 대해 듣기를 좋아한다.[喜聞過]’는 3글자의 하교를 연중에서 하셨는데, 이는 진실로 ‘한마디 말이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183) 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처럼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위와 아래가 이야기를 나눌 즈음에 비록 더러 성상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 있더라도 성명(聖明)의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시어 차분히 말씀하셨으므로, 신이 이루 흠앙(欽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얼마 전에 성상의 마음이 격노하시어 엄한 분부를 거듭 내리셨는데 이 어찌 신이 평소에 전하께 바랐던 바이겠습니까? 아랫사람이 하는 말이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목소리와 기색을 돋구지 말고 부드럽게 처리하셔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이로 인해 갑자기 크게 노하시어 말씀을 예사롭지 않게 하신단 말입니까? 대소 신료들이 두려워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으니, 실로 위대한 성인의 화평한 기상에 흠이 되었습니다. 옛날 주자(朱子)가 상람사(上藍寺)에 있으면서 조서 가운데에 신료들을 꾸짖는 말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한밤중에 일어나 촛불을 켜놓고 상소를 지어 임금의 마음이 열리기를 바랐었는데, 그 내용이 지성스럽고 간곡하여 천고(千古) 단의(丹扆)184) 의 잠언(箴言)이 될 만하였습니다. 또 신이 구구하게 걱정하고 애석해 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여염의 필부를 예로 들어 말하더라도 일로 인해 격노하여 심기를 너무 부린다면 결국 섭양(攝養)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전하께서는 보령이 8순을 바라다 보는 때를 당하였으므로 서둘러 심신을 보양하고 정력을 아끼셔야 하는데 갑자기 일시의 번뇌로 인하여 지나치게 언성과 기색을 돋우시니, 그윽이 몸을 보존하고 정력을 아끼는 방법에 해가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이 때문에 신이 애를 태우며 딱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롭게 하는 공부를 더 하여 극기하는 방도에 유의하고 함양하는 도리에 유념하소서. 그러면 심기가 화평해져서 사물이 다가왔을 때에 순조롭게 대응하여 저절로 중화(中和)의 지경에 이를 것이니, 이는 정말 국가의 끝없는 경사입니다.
그리고 태학은 선(善)의 우두머리인 곳인데, 열성조에서 배양해 온 지 오래 되었으며 우리 성상께서 교육한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태학 유생들이 귀양갈 때 법사(法司)의 조례(皂隷)들이 곧장 재사(齋舍)로 들어가 유생들을 몰아내면서 고함을 지르고 윽박지르는 등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이 태학 유생들은 청금록(靑衿錄)185) 에 이름이 쓰여 있고 현관(賢關)186) 에서 거처하고 있으니, 《예기(禮記)》에 이른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되게 할 수 없다.’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상께서 그 날에 내린 처분은 역시 정거(停擧)하거나 귀양을 보내는 데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리고 태학은 성묘(聖廟)를 받드는 곳으로서 금리(禁吏)나 나졸도 감히 임의로 출입할 수 없는데, 해조(該曹)의 조례(皂隷)들이 어떻게 감히 마음대로 성묘의 곁을 거침없이 칩입할 수 있단 말입니까? 듣고 놀랄 만한 일이 이보다 더 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만, 전하께서 어떻게 이런 말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는 이미 여염에 사는 미천한 자들을 포졸을 보내 붙잡는 일과는 다른데도 불구하고 해조의 관원이 신칙(申飭)하지 못하여 이처럼 전에 없던 놀라운 일이 발생하게 하였으니, 현관을 중히 여기는 도리에 있어서 그냥 놔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그때 입직하였던 관원을 적발하여 견책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두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내 비록 부덕하지마는 뜻이 기(氣)를 거느려야 하는 의의를 조금은 알고 있다. 상소 가운데 경계하라고 권면한 것은 임금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 깊이 성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조의 조례(皂隷)들이 한 일은 듣기에 매우 놀랍다. 그날 낭관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겠다. 경이 심도(沁都)187) 에서 돌아온 즉시 향리로 갔으므로 내 그대의 수고를 생각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즉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입직하는 향군(鄕軍)을 불러 내린 비의 혜택과 농사의 작황을 물어보았다.
7월 7일 정사
한광회(韓光會)를 도승지로, 이익원(李翼元)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면복을 갖추어 입고 태묘(太廟)에 가을의 전알(展謁)을 행하고, 이어서 선원전(璿源殿) 황단(皇壇)에 나아가 전배(展拜)와 봉심(奉審)을 예식(禮式)대로 하고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두루 전배하였다.
7월 8일 무오
크고 작은 공적인 일로서 비의 혜택에 관한 보고가 아닐 경우에는 모두 승정원에 유치해 두어 임금으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비를 바랄 수 있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돌아온 세 통신사인 정사 조엄(趙曮), 부사 이인배(李仁培), 종사관 김상익(金相翊)을 소견하고 왜국(倭國)의 풍속과 인물에 대해 물어보고 아울러 그들의 자급을 올려주었으며 역관들에게도 관례대로 상을 주었다.
7월 9일 기미
밤에 어떤 별이 옅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면복을 갖추어 입고 남단(南壇)으로 나아갔는데, 또 기우제를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약방 제조 이지억(李之億)을 파직하였다. 이지억이 가문을 딱하게 여기는 글을 올리면서 서풍(西風)이 매우 사납게 분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이는 하늘을 업신여긴 것이다.’ 하고 마침내 파직시킨 것이다.
7월 10일 경신
임금이 면복을 갖추어 입고 친히 폐백(幣帛)을 올린 다음 엎드려 한참 동안을 묵묵히 기도하였다. 아침에 궁으로 돌아오면서 선무사(宣武祠)188) 를 두루 둘러보고 또 감선(減膳)하고 풍악을 철거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다음날 과연 비가 내렸다.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7월 11일 신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이인배(李仁培)를 승지로 삼았다.
7월 12일 임술
임금이 창덕궁으로 거둥하여 선원전에 참배하였다. 이어서 사도 세자의 묘(廟)에 두루 들러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는데, 묘(廟)에 들어갈 때 대축(大祝) 이명식(李命植)의 자급을 올려 주었다. 임금이 묘가 매우 비좁은 것을 보고 하교하기를,
"내가 세심궁(洗心宮)에서 묘를 너무나 사치스럽게 짓는 것을 보고 사치를 미워하여 고치라고 명하였었다. 그러나 이처럼 너무나 비좁게 짓고 싶지는 않았다."
하니,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사치스럽게 짓고 싶지 않다는 뜻에 대하여 대신은 실로 흠앙(欽仰)하였습니다."
하였다. 봉조하 이철보(李喆輔)가 길 왼편에 엎드려 임금을 지영(祗迎)하였는데, 임금이 그의 노쇠함을 민망하게 여겨 보약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어의궁(於義宮)을 두루 들렀는데, 이 궁은 효묘(孝廟)가 즉위하기 전에 거처하였던 집이었다. 임금이 서글픈 감회가 일어나 명나라 사람의 자손들을 소견하고 쌀을 주어 보냈다.
7월 13일 계해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원점(圓點)을 받은 유생들에게 강을 시험보이고 어가를 따라온 무사들의 활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겸필선 정이환(鄭履煥)이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연전에 역마(驛馬)를 함부로 타서 법을 범한 잘못을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말을 많이 늘어놓았으며, 또 상소 끝에 너무나 크게 서명(署名)하였다. 임금이 상소를 보고 하교하기를,
"서명은 경근(敬謹)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 장전(帳殿)에서 죄수의 공초처럼 크게 하였으니 매우 무엄하다."
하고, 마침내 영덕(盈德)으로 귀양보냈다.
7월 14일 갑자
임금이 태묘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숭현문에서 지영하였다. 이어서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원점(圓點)을 받은 유생들에게 과거를 보여 5명을 뽑은 다음 모두 불러들여 강을 시험하였는데 제술 시험에 장원한 서호수(徐浩修)에게는 급제를 하사하고, 강에 통(通)189) 을 맞은 이극생(李克生)에게는 전시에 나가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절제(節製)에서 뽑힌 자가 비록 몇 명이 되었으나, 강을 잘하면 급제를 하사하고 강을 잘 하지 못하면 급제를 하사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미 규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제술과 강을 둘로 나누어 으뜸되는 두 사람에게 급제를 하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반제(泮製)190) 는 먼저 경을 강한 뒤에 제술을 할 경우 강이 초시가 되고 제술이 복시가 되지만, 만약 제술을 먼저 하고 강을 뒤에 할 경우에는 제술이 초시가 되고 강이 복시가 됩니다. 이렇게 수시로 바뀌어 일정한 규정이 없으니, 과거가 결국 엄중한 체통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여러 대신들에게 물어보니, 또한 그러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이제부터 원점을 받은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일 때에는 반드시 강을 먼저 하고 제술을 뒤에 하도록 하되,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7월 15일 을축
임금이 상참(常參)과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영사 홍봉한이 조재민(趙載敏)을 서용하여 외직에 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호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이 경비가 넉넉하지 못하다고 하여 강화에 비축해 둔 포목(布木)을 가져다 쓰자고 청하니, 임금이 급할 때에 쓰려는 것이라는 이유로 어렵게 여겼다. 그러자 대신이 묵은 포목을 쓰고 새 포목으로 저축(儲蓄)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6일 병인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교리 이 명환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제술과 강의 규식을 새로 정한 뒤로 과거의 규식이 일정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먼저 강을 하고 뒤에 제술을 하라고 명할 경우 강이 초시(初試)가 되고 제술이 회시(會試)가 되며, 먼저 제술을 하고 뒤에 강을 할 경우 제술이 초시가 되고 강이 회시가 됩니다. 그런데 어제 칠석제(七夕製)에 합격한 유생들의 시험은 제술과 강의 점수를 합해 계산하라고 명하셨으므로 신은 그윽이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비록 과거를 시행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점수를 계산하라고 명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정해진 규식에 벗어난 것인데, 더구나 이 영(令)을 먼저 내리지 않았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애당초 영(令)을 반포할 적에 먼저 제술을 하고 뒤에 강을 하라 해 놓고 뒤이어 제술과 강의 점수를 합해 계산하라고 명하셨으니, 이는 이미 내리신 명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법을 크게 어지럽히는 것이므로 신은 그윽이 민망스럽게 여깁니다. 종전의 절일제(節日製)는 더러 두 사람이 직부(直赴)하는 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과거를 시행하기 전에 명하기도 하고 탁명(坼名)191) 할 즈음에 명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 과거 때처럼 그 사람을 앞에 두고 명을 내려 마치 특별히 관직을 임명하는 것과 같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관직을 특별히 임명하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 일인데 더구나 중한 과거 시험이겠습니까? 어제의 하교는 결국 과거를 엄명하게 하는 데에 흠이 되었으니, 그 명을 도로 거두시라고 결단코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서호수(徐浩修)에게 직부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그리고 조재민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므로 완전히 용서해 주는 것은 이미 지나쳤는데, 어찌 또 전혀 구애됨이 없이 서용한단 말입니까? 청컨대 조재민에게 직첩(職牒)을 주라고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상소를 보고 좋아하지 않았으나, 벌은 주지 않았다. 상소가 들어가자 승지들이 인의(引義)하여 모두 물러갔는데, 임금이 모두 체차하였다. 홍자(洪梓)를 대사간으로, 김영섭(金永燮)·홍응보(洪應輔)를 장령으로, 박취원(朴取源)을 헌납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김상철(金相喆)이 인병(引病)하여 면직되고 이창수(李昌壽)로 대신하였다. 조엄(趙曮)을 도승지로, 김응순(金應淳)·김화진(金華鎭)·조덕성(趙德成)·홍지해(洪趾海)·김상익(金相翊)을 승지로 삼았다.
7월 17일 정묘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왕손의 관례(冠禮) 때, 전에는 2품인 사람으로 빈(賓)을 삼았으나, 이번에는 당상 3품인 사람을 빈으로 삼도록 하라. 그리고 장복(章服)과 모든 도구들은 대내에서 준비하고 번거롭게 유사에게 맡기지 말도록 하라. 왕손 가운데 뒤에 관례를 할 자가 있을 경우에는 모두 이 예에 의거하고, 왕손과 군주(郡主)·현주(縣主)에게 각기 전지 30결을 떼어주되, 이를 한도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7월 18일 무진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9일 기사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친히 기로 문신(耆老文臣)들의 제술과 무신의 활쏘기를 시험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선원전(璿源殿) 안에 긴 벌레가 나타난 이변이 있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깜짝 놀라 그 날로 동가(動駕)를 명하여 친히 가서 봉심한 다음 자리를 수개(修改)하였다. 그리고 승지 조덕성(趙德成)에게 〈《서경(書經)》의〉 고종융일장(高宗肜日章)을 읽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나라가 망하려고 할 때 반드시 재변이 있는 법인데, 나는 은(殷)나라 고종(高宗)처럼 덕을 닦은 실상이 없다."
하니, 영부사 신만(申晩) 등이 말하기를,
"이는 우연히 생긴 것이니, 성상께서 지나치게 염려하실 것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상상곡(祥桑穀)192) 과 구치(雊稚)193) 의 이변은 경계해야 한다. 무릇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나의 부족한 점을 보필하여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재실(齋室)에서 유숙하였다. 그 다음날 〈바닥에 자리를〉 수개(修改)하는 일을 끝내고 비로소 궁으로 돌아와 기로(耆老)들의 시권(試券)을 과차(科次)하였다. 제술 시험에서 으뜸을 차지한 이섭원(李燮元)에게 한 자급을 올려 가선으로 삼았는데, 이섭원은 일찍이 중시(重試)에서 장원하였던 자였다. 그 나머지 입격(入格)된 사람에게는 각각 차등 있게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7월 21일 신미
임금이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는데, 명나라 고황제(高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제갈양(諸葛亮)은 일개 촉한(蜀漢)의 정승이었으나, 사람들에게 자신의 허물을 부지런히 말해 주기를 구하였는데 더구나 인군(人君)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늘그막에 다시 정사를 맡아보면서 백성과 나라에게 몸을 바쳐 강론을 부지런히 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효과가 막연하기만 하니,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먼저 과인에게 있는 것부터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하고 이어서 세도와 민생의 폐단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옛날 산골에서 구슬을 꿰는 사람도 조정에 건의하였는데, 더구나 지금 조정의 뭇 신하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대신 이하 모두가 대답하지 못하고 단지 사양만 하면서 면직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이 금주령(禁酒令)을 완화할 것과 법제를 지킬 것과 인재를 간택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 나머지 여러 비국 당상들은 언로를 열 것을 청하기도 하고, 재물을 절약해 쓸 것을 청하기도 하며, 말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넓히고 검소를 숭상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는데, 말이 모두 진부(陳腐)하여 임금이 귀기울이게 하지는 못하였다.
7월 22일 임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움되는 말을 구한 뒤에 대각에서 건의한 자가 없어서 이척(伊陟)194) 과 조기(祖己)195) 만 상(商)나라에서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게 하였으니, 매우 개탄할 일이다. 서울에 있는 여러 대신(臺臣)들을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통신사가 가지고 온 은자(銀子)를 바로 지부(地部)196) 에 하달하여 경비에 보태 쓰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의로(李宜老)를 대사간으로, 임해(任瑎)를 지평으로, 이수훈(李壽勛)을 헌납으로, 홍술해(洪述海)를 부응교로, 이성규(李聖圭)를 수찬으로, 이휘중(李徽中)을 부수찬으로, 조운규(趙運逵)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7월 23일 계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응교 홍술해 등이 연명하여 도움의 말을 구하는 데에 응하는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도체(道體)는 무궁한 것이고 정치의 효과는 보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안일하면 위태로워지고 스스로 잘난 체하면 황폐해지는 것이니,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고명한 것을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지 마시고 항상 재이를 만나 수성(修省)하는 것처럼 하시면 나라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뜻은 늙거나 젊거나 간에 똑같지마는 기운은 성쇠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노고와 안일을 적당히 조절하는 것은 신명(神明)을 보양하는 것이고, 성상의 몸을 아끼는 것은 사직을 중히 여기는 것이니,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동작을 신중히 하고 안일을 시기에 맞게 하시면 복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왕자는 마치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중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가려서 하지 않기도 하고 갑자기 기뻐하거나 노하시기도 합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장엄하게 말씀을 하시고 공경으로 견지하소서. 그러면 동작에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조경(躁競)197) 을 신칙(申飭)하심이 전후로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구하는 사람은 항상 얻고 구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얻지 못하며, 앞으로 나아가 아양를 부리는 자는 충신이 되고 사양하며 물러서는 자는 오만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그러한 사람은 억제하고 이러한 사람은 권장하여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를 분명히 보이소서. 그러면 풍습을 변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를 하는 데에는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후손에게 훌륭한 계책을 물려주는 것은 참으로 어진 이를 예우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전일에 말을 과격하게 한 신하들을 모두 용서하시어 성명(聖明)의 조정에 충성스러운 도움의 길을 넓게 여소서. 그러면 덕이 넓어질 것입니다.
주상의 일심(一心)은 모든 조화의 근원입니다. 진실로 천지 신명께 대하는 정성을 다하여 감응하는 이치가 드러나도록 하시면 몸이 맑고 밝으며 모든 상서가 다 이를 것입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억계(抑戒)한 마음198) 을 생각하시고 은나라 중종(中宗)·고종(高宗)이 측신(側身)하였던 행실을 본받으소서. 그러면 재앙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였다.
정언 구상(具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날 초야의 어진 이들을 초빙할 때에 그들에게 예우를 얼마나 융숭하게 하였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말 한 마디가 마음에 들지 않자 엄한 분부를 거듭 내리셨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너나할 것 없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말하기를, ‘예우해 주던 신하에게도 저렇게 하는데 더구나 우리 같은 무리들이야 어떻게 감히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이것이 말하기를 꺼려하는 하나의 단서가 충분히 되었습니다. 그리고 금주령에 있어서는, 전하께서 신(神)을 감응하게 하는 도리의 근본이 술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여전히 술을 사용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시는데 이는 금령이 해이해지기라도 할까 염려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은 술을 사용하는 것과 술을 금지하는 것은 자연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아! 금주가 민폐로 바뀐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망자가 계속 생겨나 분위기가 초조해져 도성이 술렁이고 있는데, 외방의 고을들이 더욱 심합니다. 장단지와 소금그릇까지도 남김없이 수색하고 옷상자나 곡식자루 따위가 죄다 훼손되고 있습니다. 밀은 누룩을 만드는 원료라 하여 먹지 못하게 버리도록 하고, 닭과 돼지는 그들에게 제공하느라 바닥이 나 종자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연(攀緣)을 빙자하여 슬그머니 뇌물을 받는 우환이 또 하나뿐만이 아닙니다. 관에서 나오는 차사(差使)들을 대접하고 이웃집에서 술을 담그는가 살피느라 잇따른 소요 속에 벌벌 떨면서 여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박절하게 이웃집까지 똑같은 죄를 주는 형률은 법을 신중히 하고 후세에 끼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으나, 그의 말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7월 24일 갑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시독관 홍술해가, 지방 수령들이 쇄마가(刷馬價)를 거두어 모으는 폐단을 금지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인한(洪麟漢)을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재이를 당해 놀라고 두려워하여 조참을 행할 것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계사년199) 조참 때에 성대한 의식(儀式)을 우러러보았는데, 산선(繖扇)과 충의위(忠義衛)의 무리들까지도 진언(進言)한 자가 있었다. 그들의 말이 비록 채용할 것이 없었으나, 숨김없이 다 말하는 것이 가상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묵묵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있다. 때는 비록 예와 지금이 다르지마는 사람도 예와 지금이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일은 임문(臨門)하여 직언을 구할 터이니, 우리 뭇 관료들은 모름지기 미리 강론하여 놓았다가 말을 해주어 나의 뜻을 헛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어사 정반(鄭槃)을 교동(喬桐)에 보내었다. 이는 교동 수사 조계태(趙啓泰)가 전세를 과도하게 징수하여 불법을 저지른 일이 많았기 때문에 잡아다 신문하여 죄를 정하라고 명한 것이었다.
한사직(韓師直)을 특별히 대사간으로 제수하고, 남운로(南雲老)를 헌납으로 삼았다.
7월 25일 을해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조참을 행하였다. 전정(殿庭)에 나온 신료들 중에 재이를 그치게 하는 계책에 대해 건의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오위 장(五衛將) 안광복(安光福)은 마병(馬兵)이 피폐해진 폐단에 대해 말하였고, 상례(相禮) 강시현(姜始顯)은 성상의 몸을 보존하고 아끼는 것에 대한 말을 진언하였으며, 전적 박동일(朴東一)은 언로를 여는 요점에 대해 말하였고, 사복 첨정 이민보(李敏輔)는 목장의 말을 변통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기타 음관(蔭官) 중 직무로 아뢴 것들이 모두 잗달고 번거로웠다. 정언 구상이 나아가 아뢰기를,
"법을 제정하는 도리는 반드시 신중히 하여야 하며 법을 시행하는 요점은 믿음을 보이는 것이 귀중합니다. 《대전(大典)》이나 《속전(續典)》의 법은 절목이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어 이에 의거하여 시행할 수 있습니다만, 뒤에 변경한 것도 많은데, 비록 목전에는 효과가 있을 듯하나, 반드시 끝에 가서는 폐단이 쉽게 생길 것입니다. 가령 새로 제정한 것이 옛날의 법보다 낫다고 하더라도 자주 변경하는 것은 신중히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늘 법령 중 비록 세세한 절목이라도 일체 두 법전에 따라 시행할 것이며, 옛 법전에 없어서 새로 제정한 것을 부득이 처음으로 시행할 경우에는 반드시 여러 사람에게 하문하여 의견이 모두 같은 뒤에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구상의 뜻은 대체로 금주의 법을 무상하게 자주 변경하는 점을 지적해서 말한 것이었다. 구상이 또 과거에서 강(講)을 하는 폐단에 대해 말하기를,
"옛날에 사람을 취할 때는 오로지 과거의 제도에 의지하여 대비(大比)·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 밖에 없었는데 취하는 방법은 매우 정밀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의 제도에 이르러서는 잦은 변경을 거쳐 왔습니다. 〈경서를〉 강하는 규식으로 볼 때 연소하여 강을 잘 하는 자가 꼭 문장에 능한 것이 아니며, 연로하여 문장에 능한 자도 꼭 강에 능한 것이 아니니, 실로 인재를 얻는 도리에 무익합니다. 그러므로 면시법(面試法)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성상께서 차마 박절하게 하지 못하여 겨우 한두 번 시행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시행함에 엄하게 하지 않으면 도리어 폐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뜻에는 일체 두 법전의 인재를 취하는 법에 따라서 하되, 그 제도를 엄중하게 하여 인재를 뽑는 것이 좋을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법제를 경솔하게 논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직을 체차하였다. 임금이 오위 장 신집(申鏶)이 나이든 음관(蔭官)으로서 앞서 당시 폐단에 대해 상소한 것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말을 하사하고, 조참 때에 진언한 자들의 말이 비록 사리에 맞지는 않았으나 곽외(郭隗)200) 부터 시작한다는 뜻으로 모두 우직(右職)201) 에 조용(調用)하여 직간하는 사람을 권장하도록 명하였다.
이중호(李重祜)를 승지로, 김양택(金陽澤)을 이조 판서로, 이이장(李彛章)을 대사헌으로, 정광한(鄭光漢)·조엄(趙曮)을 한성부 좌윤과 우윤으로, 심수(沈鏽)를 동경연으로, 이헌경(李獻慶)을 사간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집의로, 김익(金熤)을 부수찬으로, 원의손(元義孫)을 응교로, 이명환(李明煥)·이헌묵(李憲默)을 교리로, 이택징(李澤徵)을 장령으로, 임일원(任一源)을 지평으로, 임성(任珹)을 정언으로, 한익모(韓翼謨)를 형조 판서로, 안표(安杓)를 장령으로 삼았다.
밤에 어떤 별이 하고성(河鼓星)의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7월 26일 병자
영빈(暎嬪) 이씨(李氏)가 연서(捐逝)하였다. 임금이 임곡(臨哭)하기를 매우 슬프게 하였고, 후궁 일등의 예로 장사를 치르라고 명하였다. 혜빈궁(惠嬪宮)이 《의례(儀禮)》 경전에 ‘서자(庶子)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는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글에 의거하여 시마복을 입었다. 영빈이 사도 세자를 탄생하였는데, 후궁에 40여 년간 있으면서 근신하고 침묵을 지켜 불행한 때에 처하여 보호한 공로가 있었다.
7월 27일 정축
정언 김재천(金載天)이 상소하여 맨 먼저 언로를 여는 방도에 대해 말하고, 이어서 말로써 죄를 얻은 사람을 불러 쓸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언 김용(金容)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주상의 마음이 하나라도 한쪽에 치우치면 희로(喜怒)가 정도(正道)를 잃고 상벌이 형평을 잃는데, 모든 정사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뭇 신료들은 이로 말미암아 태만해집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정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지나치게 격노하시어 문득 견책하시므로 매양 처분이 지나치실 때마다 대소 신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죽음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요즈음 건의하도록 유도하신 뜻이 간곡하셨지만, 조정에 있는 신료들이 앞뒤로 눈치를 보고 슬슬 뒤로 물러나 입을 다문 채 다만 몇 가지 일로 진계(陳戒)하여 성상의 분부에 책임을 때우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은대(銀臺)202) ·옥서(玉署)203) 와 일개 대각(臺閣)204) 에 그칠 뿐이었으니, 한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직언(直言)을 구하고 난 다음날 대신이 올린 소에 단지 사적인 분의만 언급하였을 뿐이고, 빈대(賓對)의 명이 있었으나 아무런 사고가 없는 비국 당상들도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었습니다. 이러한데도 충성스럽고 정직한 말을 날마다 올려 성대한 정치를 도와주기 바랄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대각의 상소 가운데 대신이 사적인 분의에 대해서만 언급했다고 한 것은 좌의정 윤동도(尹東度)를 지적한 것이었다. 윤동도가 오랫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일찍이 큰 일을 건의한 적이 없었고, 재이를 당해 직언을 구하는 때에도 산송(山訟)에 관한 일을 상소에 말하였다. 이는 말해야 할 데도 아닌 때에 말하였으니, 언급되어 마땅하다.
7월 28일 무인
지평 임일원(任一源)이 상소하여 네 가지 일에 대해 말하였는데, 첫째는 중화(中和)의 공부에 힘쓸 것, 둘째는 정신과 몸을 보존하고 아끼는 방법에 노력할 것, 셋째는 간하는 말을 하도록 그 도리를 다할 것, 넷째는 재물의 용도를 절약하라는 것이었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답하였다.
7월 29일 기묘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숭현문에서 지영하였다.
이인배(李仁培)를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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