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경진
주강을 행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직언을 구한다는〉 비지(批旨)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대개 여섯 가지의 일이었다. 첫째는 간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 둘째는 관작을 아낄 것, 셋째는 형벌과 상을 신중히 쓸 것, 넷째는 명절(名節)을 권장할 것, 다섯째는 재물을 아껴 쓸 것, 여섯째는 인재를 널리 구하는 것이었다. 또 백성을 돌보고 풍속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을 아래에 붙이고 나서 후손에게 좋은 계책을 남겨주라는 말로 끝을 맺었는데, 총 만여 자(字)가 되었다. 말이 자못 간곡하였고 또한 당시의 병폐에 들어맞은 것도 많았다.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국가가 흥하고 쇠하는 것은 전적으로 언로가 열렸는지 막혔는지에 달려 있는데, 아랫사람이 바른말을 하는 것은 윗사람이 좋아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며, 아랫사람이 묵묵히 침묵만 지키는 것도 윗사람이 싫어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게 어찌 사람의 천성이 때로는 곧다가 때로는 아첨을 잘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오직 위에 있는 사람이 인도하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에게는 순임금과 우임금이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던 것과 같은 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로의 막힘이 도리어 당송(唐宋)의 중간쯤 가는 군주보다도 더 심합니다. 이는 대개로 위에 계신 성명께서 슬기가 매우 뛰어나시어 조정에 가득 찬 뭇 신하들이 정말로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자신들의 허물을 보완하기에도 힘겨운데 오히려 어느 겨를에 임금을 바로 보필하고 좋은 의견을 건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하의 일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 듣고 보는 것이 미치지 못한 곳이 있으므로, ‘다스리는 것을 걱정하고 밝게 알기를 원한다.[憂治願明]’고 옛사람이 말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뒤로 물러서며 비겁함을 보이는 것은 물론 신하들의 죄입니다만, 성상께서 말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도 역시 미진한 바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임어하신 이래로 일을 말한 신하들 중에 권장을 받은 자가 몇 명이며 죄를 얻은 자가 몇 명입니까? 좋은 말씀과 화평한 얼굴로 봐주실 때는 매우 적었고 위엄과 노여움으로 기를 꺾으실 때가 많았습니다.
전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것은 당습(黨習)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습에 대처하시는 것이 비록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는 뜻에서 나왔습니다만, 더러는 잘못을 바로잡으려다가 너무나 지나치기 때문에 쓸 만한지 쓸 수 없는지를 구별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잡됨이 없는 순수한 말이라 하더라도 배척하는 가운데 싸잡아 들어가 적게는 견책을 받아 파직되고 크게는 귀양을 가기도 하였습니다. 이 어찌 전하께서 즐겨 하고 싶은 것이겠습니까? 실로 세도를 진정해 보려는 고심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의 위엄은 날로 높아지고 언로는 날로 가볍게 되어 가고 있으니, 이미 성세(聖世)의 기상이 아닙니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기를 꺼려 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버렸는데, 이러한 길로 마지않고 따라 간다면 아첨하는 말이 날마다 이르러 국사가 탈가(稅駕)205) 할 곳이 없을 것이니 이게 어찌 작은 걱정거리이겠습니까? 오직 원하건대 전하께서 더욱 실질적으로 간언을 구하는 데에 힘쓰시고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도 또한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부지런히 지적해 주는 말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을 하는 자로 하여금 믿는 바가 있어 두려워하지 않도록 한다면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고, 관작을 아끼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관직을 주거나 삭탈하는 것이 어찌 인군(人君)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노고가 있어야 서용하고 오래 되어야 승천(陞遷)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얻은 자는 점차로 승진되는 것으로 인하여 만족과 승복의 마음을 갖고, 얻지 못한 자는 자신의 분수를 지키어 감히 넘보지 못하는 법이므로, 이는 열성조(列聖朝)에서 사람을 쓰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관작의 승진(陞進)이 순서가 없으니, 인재들이 조정에 많이 있어서 경상(卿相)의 반열에 있는 자들이 백여 명이나 되고, 시종(侍從)으로 있는 자들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국가에서 힘입은 것은 도리어 그전보다 못하니,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사심을 품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습관이 이룩되어 벼슬길을 막거나 트이게 하는 권한이 아랫사람에게 있고, 천지처럼 모두 포용하는 성상의 덕으로 널리 찾고 아울러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발탁한 자와 아래에서 끌어올린 자들을 모두 계산해 보면 그 숫자가 저절로 많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가운데 뛰어오를 수 있는 첩경(捷徑)이 많고 속히 변화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서 한번 과거에 합격하면 낭료에서 대부와, 대부에서 경재(卿宰)의 사이를 마치 반 걸음 정도로 보아 조석간에 다다를 수 있을 것으로 바라고 있으므로 몇 해를 지나도 자급이 올라가지 않으면 건체(蹇滯)206)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조경(躁競)의 풍조는 날로 커지고 조용히 기다리는 마음은 날로 투박해져서 재간이 있는 자는 앞에 서고 졸렬한 자는 한쪽으로 쳐지므로 전형을 맡은 신하가 조금 공평한 길을 넓히려고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세도(世道)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폐단의 원인을 깊이 진념하시고 힘써 신중을 기하여 기록할 만한 조그마한 공로가 있는 사람은 비록 전례가 있더라도 상만 주고 관직은 주지 말며, 경력이 아직 얕은 사람은 점진적으로 끌어올리고 갑자기 발탁하지 말되, 그 반자(班資)를 확인하고 선발을 엄히 하소서. 그러면 어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각기 권장되고 등급이 문란해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 병에 대한 좋은 약제인 것입니다."
하였으며, 형벌과 상을 신중히 쓰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형벌과 상은 주상의 큰 권한인데, 상은 반드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하며 형벌은 반드시 죄를 진 사람을 징계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충성을 권하고 간특한 것을 단속할 수 없습니다. 지금 크게 폐단이 되는 것은, 형벌에 있어서 더러 사면을 지나치게 하는 것과 상에 있어서 더러 너무 지나치게 주는 것입니다. 아!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은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는 도리입니다. 그러나 상을 알맞게 주지 못할 경우에는 상을 받은 사람이 반드시 감격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이는 큰 더위에 초구(貂裘)를 주는 것이 겨울에 두꺼운 명주 솜옷을 주느니만 못하고 이미 배가 부른 사람에게 팔진미를 주는 것이 끼니를 자주 걸를 때에 죽을 주느니만 못한 것과 같습니다. 지금 무사한 평상시에 조그만 수고를 보고 후하게 상을 주거나 조그만 능력이 있는데 과하게 보수를 줄 경우에는 쌀과 베로 주다가 부족하면 품계를 올려주고 품계를 올려주다가 부족하면 관작을 주는 데 이를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약 참으로 남다른 특별한 공로를 쌓을 경우에는 또 무엇으로 상을 더하여야 합니까?
전하께서 빈소(嚬笑)를 아끼는 것207) 을 소홀히 하지 않지만 자비심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에는 특별히 주었던 은전이 마침내 널리 베푸는 예가 되고 말았으니 은전을 소홀히 하고 나라의 체모를 손상하는 데에는 어찌하겠습니까? 형벌에 있어서 사면은 마치 하늘에 봄기운이 있는 것과 같지만, 그렇다고 절도가 없이 자주 사면할 경우에는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요행히 죄를 면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한(吳漢)208) 이 사면을 하지 말기를 원하였으며, 제갈양이 종신토록 사면을 시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해마다 거르지 않고 사면을 시행하여 대사명이 내려지면 어떤 죄도 관대하게 용서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뉴(枷杻)209) 쓴 자도 벗어 나오고, 귀양을 갔던 자들도 방면되어 돌아오는가 하면 심지어는 의당 일률(一律)210) 을 받아야 할 자도 감등이 되곤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범법자들이 죄에 걸려들 적에 이미 서로들 망령되이 어느 때쯤이면 풀려날 것으로 예상하는데, 백성들이 어찌 법을 경솔히 범하지 않겠으며 법이 어찌 점점 해이해지지 않겠습니까? 아! 사람의 선행에 대하여 상을 주면서 은혜가 고갈되는 폐단이 있으며, 사람의 죄를 사면해 주면서 법이 흔들리는 근심이 있으니, 이는 형벌과 상이 중도를 잃은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은혜로 권장하고 위엄으로 징계하시되 반드시 신중히 하셔서 일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권장할 줄을 알고 두려워 할 줄을 알게 하소서."
하였고, 명절(名節)을 권장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고, 사람이 사람의 구실을 하는 것은 명절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명절이 있는 선비는 독실히 믿고 스스로를 지켜 구차하게 타협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국사를 담당하게 하면 사리에 어둡고 막히어 쓸모가 없고, 세상의 일을 맡기면 서로 어긋나서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인군(人君)들이 세상의 교화를 붙들어 세우고 사기(士氣)를 진작시키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명절이 있는 선비를 구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들의 뜻과 행동 그리고 언론이 넉넉하게 세속을 격려하고 진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 삼대(三代)211) 이하부터는 선비들이 오직 이름을 좋아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는데 이름이 있으면 뜻 역시 스스로 가다듬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태평의 시대에는 임금의 면전에서 극력 간쟁하고 어지러울 때에는 몸을 잊고 순절합니다. 비록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 이러한 사람들에게 힘을 얻은 일들을 역력히 셀 수가 있습니다. 대체로 높히 권장하면 하찮은 사람도 스스로 분발될 수 있고 쓸 데가 없다고 여기면 끝에는 곧은 선비도 스스로 실망하고 마는 것이므로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급선무입니다. 지금 세상에 진짜 명절이 있는 선비를 비록 쉽게 얻을 수는 없으나, 조금 이름을 좋아하여 불의(不義)한 일은 결코 하지 않은 자가 초야에 없으리라고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아첨하는 것은 부족하나 소박함은 넉넉하고, 행동은 더러 거칠지만 언론은 구차하게 타협함이 적으니, 이로써 구한다면 그러한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나라의 형세가 매우 외롭고 세상의 변고를 누차 겪어오다 보니, 큰 덕망과 재주를 두루 겸비한 사람은 오히려 보기 힘들지마는, 맑은 명예와 곧은 지조를 지닌 선비마저도 있다는 말을 들어볼 수 없습니다. 후일에 국가가 혹시라도 우환을 당하게 될 경우 누구를 믿을 것이며 누구와 같이 구제한단 말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하였으며, 재물을 절약해서 쓰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지금 나라의 계책이 정말 애통스럽습니다. 안으로는 토목 건축의 비용이 없고 밖으로는 곡식을 변방으로 실어나르는 노고가 없으며 더군다나 전하께서는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도 한몸에 절약하시어 궁중의 일용을 늘 검소한 쪽으로 따라 여러 도에서 바치는 공물을 많이 정지하거나 감하는 등 재물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재물의 근원이 해마다 줄어들고 달마다 소모되어 탁지(度支)212) 와 선혜청이 한꺼번에 텅 비어버린 바람에 군인에게 주는 월급은 늘 잇대기 어려움을 걱정하고, 공인(貢人)에게 주는 대가(代價)도 문득 감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동쪽에서 내어 내여 서쪽에 보충하고 저쪽의 것을 옮겨다 이쪽에 나누어 주는 등 거의 가난한 집의 생활이나 다름이 없으니, 이렇게 하고도 나라 구실을 하였다는 것은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나라에 1년을 쓸 수 있는 재물도 비축되어 있지 않은데 누차 큰 흉년을 겪고 있으니, 혹시 변방에 급한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비록 유안(劉晏)213) 으로 재정을 관리하게 하고 경수창(耿壽昌)214) 으로 하여금 직무를 맡아보게 하더라도 망연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입니다.
이에 대한 까닭은 하나뿐만이 아닙니다. 공물로 말한다면 애당초 당시 소용되는 것에 따라 정한 것인데, 쓰고 안 쓰고에 따라 더하거나 감하는 것이 공물을 제정하는 본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쓰지 않는 물건이 많더라도 감하지 않고 새로 증가된 것이 많더라도 반드시 더 증가시키고 있는가 하면 전에는 수시로 저자에서 무역하는 것도 지금 도리어 차례로 공물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한정이 있는 재력으로 한정이 없는 공물의 값을 내야 하니, 이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결코 지탱해 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군인에게 주는 월급도 처음에는 5, 6, 7, 8두 되던 것이 지금은 9두나 됩니다. 중일(中日)215) 과 중순(中旬)216) 을 치르면 문득 겸사복(兼司僕)으로 승진되는 바람에 만 명에 가까운 군인 중에 한량(閑良)으로 있는 자가 전혀 없는데 군율이 해이해지고 곡물과 베가 미려(尾閭)의 누설217) 이 되는 것은 대부분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을 똑같이 보고 대소의 용도를 참작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시되, 일체 절약하여 전례에 이끌리거나 작은 은혜에 구애되지 말고 절약해서 쓰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였고, 인재를 수용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하늘이 일세의 인재를 탄생시켜 일세의 일을 마무리짓게 하였는데, 이 세상이 있을 때부터 이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중세 이래로 붕당(朋黨)이 생겨나 사람을 쓰는 것도 한쪽으로 치우쳐 한쪽 사람이 진출하면 한쪽 사람은 물러나곤 하였으니, 이는 전체에서 반쪽의 인재만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건극(建極)의 교화를 크게 천명하여 골고루 수용하고 피차를 가리지 않으셨으니, 어진 사람이 줄줄이 나오는 성대함이 그전보다 배나 될 만도 한데 도리어 그전보다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혁혁한 가문에는 고관이 배출되고 미천한 겨레붙이에게는 발탁이 되지 않는데, 어찌 하늘이 인재를 그렇게 탄생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인품이 아름답게 생기고 말을 잘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진출하고 인품이 어수룩하며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는 대부분 침체되어 있는데, 이게 어찌 하늘이 그렇게 부여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어진 사람을 여러모로 채용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사로운 뜻을 버리고 널리 출중한 인재를 초빙하여 초야에 버려진 어진 사람이 없도록 하소서.
돌아보건대 지금 여섯 조목 이외에도 백성의 고통을 돌보고 풍속을 바로잡는 것이 왕도 정치 중에서 가장 큰 것입니다. 생민은 나라의 근본인데 극도로 시달리고 있으며 풍속은 나라의 원기인데 매우 투박해졌습니다.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넘어져 지탱하기 어렵고 풍속을 바로잡지 않으면 시들어져 진작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이것을 별도로 조목조목 나열하지 않는 것은, 대체로 간쟁의 말이 실행되면 방백과 수령들이 두려워서 감히 수탈하지 못하고, 관작을 신중히 하면 고관이나 뭇 신료들이 각자의 직책에 힘써 교화를 선포하려고 하며, 형벌과 상을 신중히 쓰면 백성들이 저절로 어질게 되고, 명절을 권장하면 풍속이 반드시 선(善)한 곳으로 옮겨가며, 재물을 절약해서 쓰고 인재를 찾아서 등용하면 재물이 넉넉해지고 사양하는 예절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아! 보통 사람의 집에도 가정을 세우는 규모가 있는 법인데 더구나 당당한 천승의 존귀함으로서 열조(列朝)의 어렵고 큰 유업을 받아서 나이 어린 저군(儲君)에게 부탁할 것인데, 밖으로 시행하는 일과 안으로 행동할 적에 몸으로 가르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밤낮으로 크게 바라는 바는 ‘성상의 몸을 보호한다.[保護聖躬]’라는 네 글자에 있습니다. 성상의 나이가 8순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는 즉 삼대에도 드물게 있는 경사입니다. 그러나 뭇 정사가 날마다 번잡한데 삼강(三講)218) 을 그치지 않고 열고 있으니, 몸이 훼손되지 않더라도 고되지 않겠습니까? 지기(志氣)는 비록 쇠하지 않을런지 몰라도 보양하는 것이 바로 시급한 일입니다. 오직 성상께서는 마음을 맑게 하여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손수 써서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보고 그대의 충성심에 감탄하였다. 끝에 붙여 말한 두 가지 건은 실로 지금의 병폐에 꼭 맞는 약제이다. 끝에 가서 정신과 몸을 보존하고 아끼라고 결론을 맺었는데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더욱 볼 수 있으니, 스스로 반성하여 더욱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본의 상소는 사관으로 하여금 책(策)에다 써서 안에 두고 좌우의 금감(金鑑)으로 삼겠다. 아! 늘그막에 다시 정사를 맡아 보면서 백성과 나라에 마음을 허여하였다. 마음이 비록 날로 소모되고 기운이 비록 날로 쇠해지고 있으나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어린아이이고 기대하는 것은 보필의 신하들이다. 위아래가 서로 힘쓰는 것을 어찌 소홀히 해서야 되겠는가? 내일 차대(次對)를 할 것이니, 경은 모름지기 입참(入參)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일 신사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지평 임일원(任一源)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전일 빈대(賓對)했을 때와 경연에서 말하지 않은 대신(臺臣)에 대해 직책을 삭제할 것을 청하고, 또 외방에서 올라오지 않은 대신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조 판서 김양택(金陽澤)이 병조 판서 이익보(李益輔)와 사돈의 사이이므로 사적인 의리로 보아 동서(東西)의 전형 자리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체차하도록 허락하고 특별히 수어사(守禦使)를 제수하였다. 그리고 황해 감사 신회(申晦)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전 판서 김성응(金聖應)이 졸(卒)하였다. 김 성응은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증손자이다. 별천(別薦)으로 진출하여 무과에 급제하였고 얼마 안되어 훈련 대장으로 뛰어올라 거의 20년 동안이나 군(軍)을 맡고 있었다. 비록 재능은 없었으나 성품이 본디 너그러웠으므로 군졸들이 편하게 여기었다. 그가 졸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그는 너그럽고 공평하며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 궂은 일을 같이 한 신하였는데, 매우 슬프도다. 관(棺)에 쓰일 재목을 가려서 지급하고 그의 노모에게 약물을 하사하여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승지 김응순(金應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월대(月臺)의 강하는 자리에 참여하여 직접 도움되는 말을 구하는 하교를 받들었는데, 정녕 말씀이 간곡하여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격동되어 감히 우(虞)나라와 하(夏)나라의 뭇 신하들이 서로 권면하는 말로 전하께 한번 외어 드렸습니다. 그러고 물러나 신료들을 따라가 정원의 의계(議啓)에 참여하였습니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제수(祭需)를 줄여 정한 것은 옛날의 관례가 아니라고 여겨 예를 인용하여 말씀드리려고 한 자가 있었으나, 그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그 논의가 정지되고 말았는데, 신의 미혹(迷惑)한 견해에 크게 잘못되었다는 점을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우연히 고 참판 신(臣) 한성우(韓聖佑)의 묘도 문자(墓道文字)219) 를 보았는데, 선왕조에서 제수를 줄여 정하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한성우가 의논을 드리면서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지금 큰 계획을 세우지 못해 위아래에 쓸데없이 드는 경비를 모두 감하거나 혁파함에 있어 먼저 제수를 감한다는 것은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반도 채 살피지 못하고 무연(憮然)히 두렵고 황연(怳然)히 깨달아 자기 스스로 속으로 말하기를, ‘고인이 임금을 섬길 때에 일마다 주자의 글을 인용하여 예를 잃지 않기를 기필하였다. 그런데 신과 같은 불초한 자는 견식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여 그 말할 기회를 잃었으니, 만약 오늘날 이것을 보지 못하였다면 정론(定論)을 뒤흔드는 사람이 될 뻔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신의 마음을 저버린 것이니, 어찌 묵묵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 국가를 부유하게 하는 길은 절약해서 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데, 감해야 할 것을 감하지 않는다든지 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감하는 것은 모두가 절약하는 요령이 아닌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감해야 될 위아래의 쓸데없는 경비를 어찌 태상시에서 감하는 데에 그치고 말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 정한 제수는 매우 적당하게 정해졌으므로 다시 논의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대체로 일국의 부유함으로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려고 한다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그 당시 여러 신하들이 예전(禮典)을 참고하여 정식(定式)으로 만든 것입니다. 지금 절약한다는 뜻에서 갑자기 다식(茶食)과 다과(茶果)의 수량을 줄이고 또 진말(眞末)220) 을 몇 말 줄이고 유청(油淸)을 몇 되 줄인다 하더라도, 줄이는 양은 몇 말 몇 되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1년의 공가(貢價)로 계산해 보더라도 2천 석에 불과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당한 천승의 나라로서 어찌 2천 석을 줄이기 위해 대뜸 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각 관아에서 드는 쓸데없는 경비로 말하더라도, 기성(騎省)221) 위소(衛所)의 군가(軍價)가 얼마나 되는지 살피지 못했고, 군문(軍門)의 군색(軍色)을 대여해 준 것을 금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탁지의 잡물색(雜物色)과 선혜청의 원잉미(原剩米)들이 모두 남용되고 있으며, 이외에도 미려(尾閭)의 누설이 되는 것들이 몇 천만이 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로 미루어 계산하여 궁중과 부중에서 꼭 써야 될 것들만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모조리 감하거나 혁파하여야 됩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오히려 여전히 지탱해 나가지 못할 경우에는 백관의 녹봉을 감해도 되며 지방 관원의 녹봉을 감해도 됩니다. 이렇게 하고도 또 유지해 나갈 수 없을 경우에는 이모저모로 깊이 생각해 보면 별도의 방도가 없지 않을 것인데 이렇게 매우 구차스러운 일을 한단 말입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고전(故典)대로 회복하게 하소서."
하였다. 한성 좌윤 조엄(趙曮)이 또 상소하여 이 문제에 대해 잇따라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제수를 고쳐 바로잡는 것은 진실로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애당초 위아래의 의논이 비록 고르지 않은 것을 고르게 하고 규정 외의 낭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나왔으나, 필경에 고쳐 바로잡는 것이 감하기만 하였지 더해진 것은 없고 풍성하게 하려 했으나 풍성해진 점을 볼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이정(雅正)할 즈음에 털끝만큼이라도 구례에 위배된다면 사전(祀典)을 중히 하는 도리에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제수 가운데 척기(尺器)가 같지 않다는 이유로 감하고 변두(籩豆)가 남는다는 이유로 감했다고 하는데, 이는 정말 미안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능침(陵寢)의 기신제(忌辰祭) 때에 다식(茶食) 다섯 그릇을 전부 감하였으니, 오례(五禮)의 도식(圖式)으로 볼 때에 어찌 크게 위배되지 않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국가의 경비를 곳에 따라 삭감할 수 있다 하더라도 미려(尾閭)의 누설과 남상(濫觴)222) 의 폐단을 일일이 다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왕 다 막을 수 없다면 이는 주자가 ‘먼저 제수를 감함은 미안하다.’고 말한 것이며, 《예기(禮記)》에 ‘제사의 비용은 1년의 경비 중 10분의 1을 쓴다.’고 한 것이고 또 ‘제사는 풍년이라고 하여 사치하게 지내지 않으며 흉년이라고 하여 검소하게 지내지 않는다.’고 한 것인데, 옛날 성왕(聖王)의 사전(祀典)은 대체로 후한 쪽을 따랐으며 바꿀 수 없는 규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성에서 우러난 전하의 큰 효성과 신명을 감동케 할 수 있는 지성으로 어찌 사전이나 의절에 혹시라도 위배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전례를 널리 상고하여 지당(至當)한 데 돌아가도록 힘쓰게 하소서."
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이 또 차자를 올려 변론하였다. 임금이 김응순의 상소한 의논이 공물인(貢物人) 무리들이 근거없는 말을 하게 동요시켰다는 이유로 그의 직책을 체차하고, 아울러 태상시 및 전생서 공물인들을 먼 곳에 귀양보냈다. 얼마 안되어 이들을 방면하고 이어서 태상시의 제수와 다식 다과를 옛날과 같이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아! 근본에 보답하고 선조를 추모하는 성상의 정성에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 제수를 줄이는 것을 임금의 과실로 삼을 수 없다. 그런데 일을 맡은 신하들이 절약하는데 급급하여 경중을 참작하지 않은 채 갑자기 제수를 줄이는 것을 의논하였으니, 어찌 김응순·조엄과 같은 사람의 말이 없겠는가? 그리하여 심지어는 죄없는 공물인으로 하여금 귀양가는 형률을 받게 함으로써 결국 지나치게 처분을 내리게끔 하였다. 그러나 필경에 제수를 옛날처럼 회복한 것은 그들의 말로 말미암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8월 5일 갑신
임금이 육상궁에 나아갔다가 저녁에 궁으로 돌아왔다.
이명식(李命植)을 승지로 삼았다.
8월 6일 을유
임금이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8월 7일 병술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여러 도에서 살옥(殺獄)의 계문(啓聞)을 읽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살옥의 중점은 오직 시신을 검사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첫 번째 검사 때에는 구타를 당했다고 해 놓고 두 번째 검사 때에는 목이 부러졌다고 하였다. 죽은 원인을 기록함이 이처럼 서로 틀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시 시신을 검사해 보지 않은 채 그대로 문안을 작성하였으니, 어찌 이러한 옥사의 체통이 있단 말인가? 해서(海西)의 전 도신(道臣)을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명하기를,
"영빈(暎嬪)의 장례를 치를 때에 경기의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도록 하되, 모두 군(軍)을 고용하여 농사에 방해가 없게 하라."
하였다.
윤득양(尹得養)을 대사헌으로, 이복원(李福源)을 대사간으로, 유수(柳脩)를 집의로, 최태형(崔台衡)을 사간으로, 이심해(李心海)를 장령으로, 박취원(朴取源)을 지평으로, 이수일(李秀逸)을 헌납으로, 이창임(李昌任)·이득복(李得福)을 정언으로, 이재간(李在簡)을 교리로, 박성원(朴盛源)·윤면헌(尹勉憲)을 수찬으로, 이택진(李宅鎭)을 부수찬으로, 조영순(趙榮順)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8월 8일 정해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친히 영빈의 제문을 지었는데, ‘발인할 때에 친히 나가 보겠다.’는 구절이 있었다. 승지 이인배(李仁培)가 아뢰기를,
"우리 조정의 가법은 매우 엄중하여 후궁의 상에 임금이 직접 임하였던 일은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고치라고 명하였다.
8월 9일 무자
임금이 선정전에 나아가 상참과 조강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패초(牌招)를 어긴 여러 대신(臺臣)들을 파직시키고 인인배(李仁培)를 특별히 대사간으로 제수하였다. 이인배가 언로를 열어야 한다고 우러러 아뢰고 나서 또 죄를 입은 신하 서형수(徐逈修)·윤시동(尹蓍東)·유당(柳戇) 등을 발탁해 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노하여 관을 체차시켰다.
이익원(李翼元)·장지풍(張志豊)·이담(李潭)을 승지로 삼았다.
8월 10일 기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지돈녕 서지수(徐志修)가 서울의 각사(各司)에서 돈과 곡물로 요리(料理)하는 습관과 군문(軍門)에서 공물을 미리 사는 폐단을 금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금하라고 명하였다. 서지수가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도움되는 말을 구한다는 이름만 있지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실상이 없습니다. 김용(金容)의 상소 내용은 관료들이 서로 규계(規戒)하는 것에 불과한데 그의 말이 대신을 핍박하였다고 하여 애초의 뜻에 위배된다고 즉시 파직하셨으니, 이는 아마도 대각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김응순에 있어서는, 그의 말이 비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뜻은 역시 일을 말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응순 때문에 공물인에게 죄를 주셨으니, 이는 말을 한 자가 받은 수치가 도리어 죄를 받은 공물인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전 한림 윤숙(尹塾), 전 지평 이재현(李載顯)을 서용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재현만 서용하라고 허락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1일 경인
비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고 내리자, 사대문에 영제(禜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는데, 3일 만에 비가 그쳤다.
8월 12일 신묘
임금이 정릉 기신에 쓸 향을 인정전의 뜰에서 지영하고 이어서 휘령전(徽寧殿)을 두루 둘러보았다.
8월 13일 임진
임금이 명릉(明陵)의 기신에 쓸 향을 인정전 월대에서 지영하였다. 봉상시 도제조 홍봉한과 제조 구윤명(具允明)을 소대하고 하교하기를,
"자나깨나 줄곧 사전(祀典)에 대해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들쭉날쭉하여 일정하지 않으면 불경한 것이고, 많이 준비하기만 하고 정갈하게 하지 않는 것도 불경이라고 본다. 선조(先朝) 신미년223) 에 공가(貢價)가 7천 석에 불과하였는데, 지금은 1만 3천여 곡(斛)이나 되니 늘어나기만 하고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제수를 감한다는 말을 듣고 나니 지금까지 두렵기만 하다."
하였다, 구윤명이 소매 속에서 능전(陵殿)과 원묘(園墓)에 제물을 차리는 도식을 꺼내 올리니, 임금이 가져다 보고 한참 있다가 이를 일정한 규식으로 삼을 것을 명한 다음 태상시로 하여금 전교를 정례(定例)의 머리글에다 써서 후손에게 보이라고 하였다.
외방에 있는 옥당 관원들을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고, 이명환(李明煥)·김귀주(金龜柱)·서명선(徐命善)·이재간(李在簡)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근래에 들어 관원의 임명을 대부분 중비(中批)로 하였는데, 은대(銀臺)224) 의 관원도 의망(擬望)하여 낙점을 받은 자가 아주 적었다.
8월 14일 계사
임금이 추석에 각 능에 쓸 향을 인정전 뜰에서 지영하였다.
8월 15일 갑오
임금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가교(駕轎)를 타고 명릉(明陵)으로 나아가다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말로 갈아탔다. 해가 막 떠오르자 재실로 나아가 참포(黲袍)로 갈아입고 예식대로 제사를 지냈다. 익릉(翼陵)과 경릉(敬陵)으로 가 전배하고 홍릉(弘陵)에 들렀다가 저녁 무렵에 어가를 돌려 밤에 모화현(慕華峴)을 넘었다. 임금이 궁궐에서 나올 때에 왕세손이 교외로 나가 지영하겠다고 간청하자, 임금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세손의 지영 막차(祗迎幕次)에 들어가 세손의 손을 붙잡고 얼굴에 기쁜 빛이 감돌았다. 친히 사언(四言) 네 구절을 쓰고 나서 즉석에서 갱진(賡進)하라고 명하고 또 어가를 수행한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대개 기쁨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다. 임금이 다시 말에 올라 궁으로 돌아오면서 세손에게 말을 타고 수행하라고 명하였다.
8월 16일 을미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기백(畿伯)과 차사원(差使員)을 불러 농사의 상황을 물어보니, 모두 말하기를,
"농사가 고르게 되지는 않았으나 큰 흉년은 들지 않았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금년 초에는 비나 햇빛이 상당히 알맞았는데 4개월을 가물고 나니 생각했던 바와 크게 어긋났다. 재해의 조사를 정밀하게 하지 않을 경우 백성들이 받는 폐단이 클 것이니, 근실히 조사하지 않는 자는 고율(錮律)을 시행한다고 엄중히 신칙시키도록 하라. 막 능에 전알(展謁)하는 예를 거행하고 나서 경기 백성들에게 거듭 노고를 끼쳤다. 양주(楊州)·고양(高陽) 두 고을은 금년에 낼 결전(結錢)을 줄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함은군(咸恩君) 이삼(李森)의 아들 이명일(李命逸)과 충원군(忠原君) 박동형(朴東亨)의 아들은 이름을 물어 등용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무신년225) 의 대려(帶礪)226) 의 공로를 생각해서였다.
동래 부사 송문재(宋文載), 접위관 윤홍열(尹弘烈)을 먼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왜인의 차관(差官) 평번상(平蕃常)이 일찍이 동래로 나와 ‘관백이 아들을 나았으므로 경사를 알리러 왔는데 이는 지지난 임오년227)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라고 하자, 우리 나라가 임오년의 관례에 따라 회답을 보내자고 하였다. 임오년 회답에 ‘한 명의 사신을 보내 하례를 드려 친목을 닦는 의리를 돈독히 하겠다.’ 하고 그 이듬해 계미년에 뱃길로 사신을 보냈다. 지금은 임오년의 일과 크게 다른데도 불구하고 변방의 신하가 극력 다루지 못한 채 관례에 따라 보고하였다. 임금이 이웃 나라와의 우호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사체가 막중하다고 하여,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다.
장령 이택징(李澤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신은 치도(治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것인데 등대하였을 때 자잘한 일만 말하고, 간관은 임금을 도리로 인도하는 것인데 대각에 나아가 앞서의 종이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위에는 임금께서 잘못이 있으나 감히 바로잡지 못하고 아래에는 묘당이 과실이 있어도 감히 말 한 마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는 친구간에 서로 권면해도 갑자기 성을 내며 관료들끼리 서로 규계해도 칼을 만지작거리며 노려보고 있으니, 온 세상이 점차로 부드러운 납처럼 무기력해지고 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대신을 융성하게 대우하여 그의 말을 채용하고 간관을 권장하여 그들이 죄다 말을 할 수 있도록 하신다면 전환할 수 있는 기회와 수성(修省)의 방법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가납하였다.
여러 도에서 치계(馳啓)하였는데, 모두 7월 28, 9일에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서 제방이 무너지고 씻겨 내려가 백곡이 부러지고 쓰러졌다고 말하였다.
8월 17일 병신
임금이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기신에 쓸 향을 인정전 뜰에서 지영하였다. 특별히 입직 총관(入直摠管) 경흥군(慶興君) 이전(李栴)을 명하여 숭릉 헌관으로 차출하였으니 이는 처음에 3품으로 채워 차출하였기 때문이다.
홍산(鴻山) 유학(幼學) 조의진(趙毅鎭)이 상언(上言)에 가탁하여 7개 조항의 폐막에 대해 진술하였는데 거칠고 잡된 말이 많았으나, 임금이 그를 불러 물어보았다. 이는 대개 요행을 바라는 무리로서 모두 폐단만 말하고 폐단을 구제하는 대책이 없었으므로 체용할 수 없었다. 임금이 ‘순실한 사람이 아니다.’ 하고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농민을 불러 농사의 형편을 물어 보았는데, 그들의 대답이 수령들이 말한 것과 같았다. 근년 이래로 수재와 한재가 자주 들어 민생이 시달려 왔다. 그러나 일을 맡은 신하들이 구제하는 대책과 유민들을 위한 계책을 건의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백성들도 감히 사실대로 대답하지 못하여 위아래가 서로 기만하고 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8월 18일 정유
영의정 홍봉한·우의정 김상복이 이택징의 상소에 대신을 논핵하였다는 이유로 모두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전라도 여러 고을에 수재가 가장 심하여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2백여 명이었고, 떠내려 갔거나 침몰된 가옥도 1천여 호나 되니,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부수찬 서명선(徐命善)이 직언을 구하는 하교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도움을 구하신 이후로 성의가 넘쳐흘렀습니다. 그리하여 대궐로 모여드는 자들의 한 말이 모두 창언(昌言)이었고 소매속에서 나온 공거(公車)228) 는 모두 당금(當今)에 대한 계책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정말로 기쁜 마음으로 생각해 보고 채용하여 시행하신다면, 바로잡아 구제하고 진작시켜 쇄신하는 정사와 언로를 널리 여는 요점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날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았으나 끝내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일을 채용하였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으니, 이번에 직언을 구한 것이 어찌 형식적인 겉치레로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송나라 주자가 당시에 ‘도움되는 말을 구하고 이에 응하여 건의한 것들이 모두 형식적인 겉치레가 되고 만다.’는 이유로 후성(後省)229) 으로 하여금 상소를 자세히 검토하여 일일이 시행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성인께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이처럼 실질적으로 하고 형식적인 것은 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점은 먼 후세에서도 본받을 만합니다.
신은 생각건대 근일 직언을 구한 이후로 올린 소와 경연에서 아뢴 것들을 유별로 나누고 조목별로 취하여 책상에다 놔두고 크고 어려운 일부터 먼저 채용하여 시행하시되, 오늘 하나의 일을 시행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시행하여 다시 시행할 만한 일이 없게 된 다음에 다시 진언을 구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하면 천장각(天章閣)230) 에서 종이를 내려준 고사만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실지의 마음으로 실질적인 정사를 행하는 도리를 거의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개진한 바가 비록 옳으나 도움을 구한 지 며칠이 되었는데, 이에 응하여 소를 올린 자가 몇 명이 되는가? 고요하여 날만 보내고 있으니 정원에서 비록 뽑아 아뢰고 싶더라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평시서 제조 홍인한(洪麟漢)을 불러 시민들의 폐막에 대해 묻고 나서 사소한 물건을 파는 난전(亂廛)231) 의 주인을 구류해 놓고 속전을 징수하는 폐단을 금지하라고 한성부에 명하였다.
8월 19일 무술
밤에 어떤 별이 하고성(河鼓星)의 밑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붉은 색이었다.
사간 현광우(玄光宇)가 상소하여, 성상의 몸을 보존하여 아끼고 구전(舊典)을 닦아 밝히며 관직을 오래 맡겨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헌부 【장령 이택징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재민(趙載敏)을 서용한 뒤에 유신(儒臣)이 상소하여 그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에 대한 비답을 받기도 전에 갑자기 군직(軍職)을 맡겼으므로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해당 당상을 파직하소서. 제천 현감 정광주(鄭光周)는 누차 군현(郡縣)을 거쳤으나 그때마다 치적이 제일 낮았는데, 얼마 안되어 또 본현에 제수되었습니다. 그를 체차하고 전조의 당상을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수인(李洙麟)이라는 자는 본디 사족(士族)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이 죽은 뒤로 이수인이 재산을 빼앗으려고 그의 조카를 외딴 방에다 가둔 다음 돌로 때리고 쇠붙이로 찔러 상처가 수없이 많이 났는데, 나를 살려 달라는 고함소리가 문 밖으로 자주 흘러나왔습니다. 한량(閑良) 심기현(沈耆賢)이 그때 마침 그의 집 앞을 지나가다가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 구출해냈습니다. 형조에서 이수인을 형신하였으나 아직도 승복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실로 세도의 변고입니다. 청컨대 그를 엄하게 형문하여 자복을 받아낸 다음 국법으로 다스려 풍속을 통쾌하게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엄히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이수인이 자복하자, 임금이 여러 비국 당상들에게 적용할 형률에 대해 물으니,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유독 조엄(趙曮)이 말하기를,
"법이란 것은 천하 사람에게 다 공평한 것입니다. 그의 조카가 만약 살지 못할 경우에는 또 무슨 법으로 벌을 주려 합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어 그 형장을 가하여 종신(終身)토록 흑산도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광춘군(光春君) 이권(李棬)을 호남(湖南)의 연해(沿海)에 귀양보냈다. 광춘군 이권은 먼 종친이었다.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고 살인의 옥사에 간여하였으므로, 임금이 준절히 꾸짖고 이러한 명을 내렸다.
8월 20일 기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호서와 경기의 도신(道臣)이 청한 대로 진휼청의 돈 1만 냥을 떼어 보내 편의에 따라 곡식을 사들여 진휼의 밑천을 요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또 의영고(義盈庫)의 관원들이 공인(貢人)들에게 사적으로 돈을 거두어 공청을 지었는데, 이는 비록 사적인 일을 한 것과는 차이가 있으나 죄가 있다고 말하니, 임금이 곧바로 보고하지 않은 공시(貢市) 당상을 파직하고, 그 직장(直長) 조정악(趙廷諤)을 귀양보냈다.
대사헌 안윤행(安允行)이 상소하여 ‘도량을 원대히 하라.[遠大寬弘]’는 네 글자로 임금의 덕에 힘쓸 것을 청하고, 끝에 가서 말하기를,
"지존께서는 혼자 위에서 수고하다가 보양하는 데에 어긋나고 신하들은 집에서 가만히 탄식하고 있으므로 태평의 분위기가 아닙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헌부(憲府)의 늙은 신하가 경계의 말을 한 것이 옳다고 여기어 가납한다고 비답하였다.
정실(鄭宲)을 도승지로 삼았다.
8월 21일 경자
어떤 별이 하늘 가운데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황해 감사 조영순(趙榮順)이 사조(辭朝)하자, 임금이 소견하고 선온(宣醞)하며 말하기를,
"경을 늦게야 알았다. 후일 경이 생각나면 부르겠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영순이 상소 한 장으로 인해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혔으므로 사람들이 자못 애석하게 여겼는데, 승정원으로 들어가서 하는 일이 임금의 뜻에 많이 들자 은총이 자못 새로웠다.
영의정 홍봉한이 또 윤시동(尹蓍東)은 어느 곳에 써도 불가한 점이 없으니, 다시 불러 쓰자고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마음이 비록 공평하나, 내 뜻한 바가 있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피인(彼人)에 대하여 참으로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원한을 품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같은 조정 안에서 수원(讎怨)에는 깊고 얕음이 있으며 피혐(避嫌)에도 한도와 절도가 있는 것인데, 피인은 접대할 때에 하나같은 방법으로 인의(引義)하여 거의 원근의 구별이 없으니, 참으로 정리가 원통하여 대대로 원수로 여길 정도가 아닌 자일 경우에는 일이 구애가 많고 또한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이 이러한 의리에 엄격하여 주자가 말한 오세(五世)의 설을 인용하여 증거를 대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오세까지는 반드시 원수를 갚는다는 의리에 말미암은 것이니, 의당 정해진 한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대로 한정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좌승지 장지풍(張志豊)이 도승지 정실(鄭宲)과 오래 된 원수의 혐의가 있었는데, 모두 인의(引義)하여 나가자, 임금이 장지풍을 파직하였다. 홍봉한이 말이 난 김에 이를 언급한 것이었다.
윤동섬(尹東暹)을 도승지로, 김상익(金相翊)을 승지로 삼았다.
8월 22일 신축
임금이 정현 왕후(貞顯王后)의 기신에 쓸 향을 인정전 뜰에서 지영하였다. 향관(享官)을 가려 뽑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조 참의 권도(權噵)를 파직한 다음 옥리(獄吏)에 내려보냈다. 옥당 이석재(李碩載)·김귀주(金龜柱) 등을 과천·양천에 나누어 보내 환곡(還穀)을 살펴보게 하였다.
김화진(金華鎭)을 승지로, 서명신(徐命臣)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서명신은 성균관에서 컸으나 문순공(文純公)232) 을 종향(從享)하자고 청할 때에 한 마디도 발언하지 않았고, 일의 거행이 조금 늦어졌다고 하여 거듭 엄한 하교를 받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그의 아비에게 준 고명(誥命)을 가져오라고 하여 불살라버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서용한 것이었다.
8월 23일 임인
임금이 친히 휘령전(徽寧殿)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8월 24일 계묘
임금이 경종 대왕(景宗大王)의 기신에 쓸 향을 인정전 월대에서 친히 전하였다. 유신들을 불러 《시경》의 상체편(常棣篇)을 강하였다. 다음달에 탄신의 하례를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조지서(造紙署)에 잔폐가 많으니 제거(提擧)를 하나 더 만들어 총융사로 하여금 겸하게 하되, 그 영문(營門)의 힘을 빌려 공청의 역을 돕도록 하자고 청하니, 허락하였다.
8월 25일 갑진
임금이 직접 장렬 왕후(莊烈王后)의 기신에 쓸 향을 인정문에서 친히 전하였다.
8월 26일 을사
임금이 태묘의 수리를 고유(告由)할 때 쓸 향을 인정문에서 친히 전하였다.
8월 27일 병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감시(監試)의 초시(初試) 과장(科場)이 엄하지 않아 함부로 들어온 자가 매우 많고 칼과 창으로 서로 찌른 바람에 사상자도 많습니다. 청컨대 두 곳의 금란관(禁亂官)을 잡아다 신문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집의 송덕중(宋德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년에 들어 수재와 한재가 거듭 발생한 바람에 생민들의 곤궁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는데, 금년에 든 한재는 옛날을 통틀어봐도 드문 것이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백성을 걱정하시는 정성과 도움되는 말을 구하는 하교가 금석(金石)도 꿰뚫고 돼지나 물고기도 감동시킬 정도이니, 전하의 신하로서 그 누가 애타며 감격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숨기고 미봉하는 습관은 본디 쇠퇴해가는 세상의 고질적인 폐단인데, 성명의 세대에 이러한 사태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농사 형편의 실상이 어떤지 알고 싶어하셨는데 연석(筵席)에서 아직은 그리 대단한 재앙은 아니라고 대답한 자가 있었으니, 이는 부녀자나 내시(內侍)의 충성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팔도의 날씨를 대부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모호하게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여 급박하고 민망한 뜻도 없이 한갓 목전의 일을 고식적으로 넘기어 성상을 놀라게 하였다는 비난을 면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가을에 농사가 큰 흉년으로 판단이 날 경우에는 바람에다가 죄를 돌리려고 한 것이 아닙니까? 실상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백성에게도 어떻게 말하라고 가르쳐 준 다음에 말하게 하고 있습니다. 근교에 농사 형편을 살피는 관원이 삽시간에 왕복하는데 어떻게 두루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속한 능력만 자랑하고 도랑에 물이 가득하여 제때에 이앙을 했다는 설로 꾸며 보고하고 있으니, 이러한 꼴들은 모두 망국의 조짐입니다. 전하께서 구중 궁궐에 깊숙이 계시는데 어떻게 이러한 실태를 아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과감히 말하는 그대의 뜻을 가상히 여긴다. 그러나 다만 위아래의 말이 알송달송하여 사람들을 모두 싸잡아 막고 가린다고 지적하였으니, 너무나 지나치지 않는가?"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너무나 지나치게 백성을 걱정하시기 때문에 신들이 감히 연석의 자리에서 놀라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강계 부사 이수봉(李壽鳳)이 본부의 삼(蔘) 폐단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진술한 다음 본부 은점(銀店)에서 받아들이는 세금을 호조에다 납부하지 말고 이를 강계 백성들이 삼을 무역하는 돈에다 보태 주어 민폐를 없앨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대사헌 안윤행(安允行)이 등연(登筵)하여 건의한 것도 없이 대각의 관료만 처치(處置)하고 나가자, 임금이 일찍이 직언을 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말 한마디도 없이 전계(前啓)를 종이에 베껴 써서 전달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직책을 체차하였다.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이 졸(卒)하였다. 해춘군 이영은 종신 함평군(咸平君)의 아들이다. 그의 형제 네 명이 모두 높은 품계에 있으면서 번갈아 중국의 사신을 갔었는데, 근신하다고 일컬어졌다. 그가 졸하자 임금이 장례에 소요되는 물품을 갖추어 후하게 주라고 명하였다.
8월 28일 정미
밤에 천둥하고 번개하였다.
영의정 홍봉한 등이 예관(禮官)을 거느리고 탄신일에 하례를 하지 말라는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면서 구대(求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8월 29일 무신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 등이 나아가 말하기를,
"탄신의 하례를 임시 중지하시니, 신들의 마음만 답답할 뿐만이 아닙니다. 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춤을 추는 것은 처음으로 있는 의절이니, 전하께서는 어찌 이것을 깊이 유념하시지 않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고생하셨던 부모의 은혜를 추모해 보건대, 내가 이날 어떻게 차마 하례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옛날에는 천추절(千秋節)이 없었는데 당나라 현종(玄宗) 때에 이르러 뭇 신하들이 비로소 하례를 드렸고 장구령(張九齡)만 금감록(金鑑錄)을 바쳤으니233) , 경들이 비록 하례를 하지 않으나 좋은 말로 대신해야 할 것이다."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하례를 드리는 것과 경계의 말씀을 드리는 뜻으로 하여금 병행되어 어긋나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 대소 신료들의 소망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게 내가 고심해 온 것이다. 더구나 금년이겠는가?"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8월 30일 기유
임금이 의소(懿昭)의 묘소에 거둥하였다. 어가를 돌릴 때에 갑자기 영빈방(暎嬪房)에 들르겠다고 명하였는데, 이때 영빈이 죽어 아직 장사를 치르지 않았었다. 옥당의 관원 원의손(元義孫)·서명선(徐命善) 등이 구대(求對)하여 말씀을 드리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영빈을 어찌 다른 후궁과 똑같이 볼 수 있겠는가? 차마 이러한 말을 하는 자는 나를 따라올 것이 없다."
하고, 이어서 그의 상차(喪次)에 들렀다가 밤이 되어서야 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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