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경술
임금이 선정전에 나아가 상참과 주강을 행하였다. 서명선(徐命善)을 북도 감시 어사(監市御史)로 차출하여 보냈다.
영의정 홍봉한이 한성부로 하여금 길가 민가 이외의 집들을 철거하게 하여 전에 금지하였던 것을 거듭 신칙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호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이 장흥고에서 소정의 이외에 공석(空石)을 무역하는 폐단을 금하고 남은 것으로 부족한 데에 보태 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 역시 허락하였다. 대체로 상참은 작은 조회(朝會)이다. 그런데 물러간 자가 많고 전(殿)에 올라간 자는 적었으며, 아뢴 것들도 부서 기회(簿書期會)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서명응(徐命膺)을 대사헌으로, 민홍렬(閔弘烈)을 지평으로, 이재간(李在簡)을 헌납으로, 박상로(朴相老)를 정언으로, 이재협(李在協)을 부수찬으로, 조엄(趙曮)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형조 판서 조운규(趙雲逵)를 명하여 호서 옥안(湖西獄案)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검시(檢屍)를 법대로 하지 않은 자는 파직하고 실정이 용서해 줄 만한 자는 사형을 면해 주었는데, 처결된 죄수는 6명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때에 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은 필시 하루가 1년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였다.
왜인의 배가 표류하다가 동래에 도착하였는데, 동래 부사가 장문(狀聞)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표류하여 왜국에 도착하면 왜인들도 잘 대우해 주었다. 더구나 통신사가 이제 막 돌아와서 이웃 나라와 관계를 맺은 도리가 있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들에게 돌아갈 때 먹을 양식을 주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상언(上言)한 방민(坊民) 가운데 일영방(日影坊)에 거주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승지 이명식(李命植)에게 묻기를,
"방 이름이 일영인데 일영에 대한 고사를 알고 있는가?"
하니,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사관(史官)에게도 물어보았으나, 역시 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미행하다가 일영대(日影臺)의 버드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는데, 어떤 노인이 밤에 천문을 보다가 괴이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자미성(紫微星)이 유성(柳星) 밑에 숨어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고 하였다. 그 대(臺)가 옛 대궐의 밖에 있었는데, 방의 이름도 이 때문에 그렇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하였다.
9월 3일 임자
임금이 친히 《표의록(表義錄)》을 지었는데, 영빈(暎嬪)의 일을 서술한 것이었다. 《표의록》이 완성되자 영의정 홍봉한을 불러 그로 하여금 보게 하고 말하기를,
"이 글이 도움이 없지는 않겠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의리가 뚜렷이 드러나 한결같이 공평한 천리(天理)에서 나왔으므로 그 도움이 크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신하들이 이 의리를 모르고 이 마음을 모르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부득이 이 글을 지어 만세에 보이려고 한 것인데, 참으로 털끝만큼이라도 틀릴 경우 의리가 어둡고 막힐 것이다."
하고, 이어서 간행하여 사고(史庫)에 보관하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수은(垂恩) 두 글자는 나에게는 깊은 뜻이 있다. 후일 아첨하는 신하가 다른 호(號)로 고치려고 한다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겠는가? 그런 자는 해동(海東)의 신하가 아니다."
하였다. 영빈의 묘소를 서교(西郊)의 연희궁(延禧宮)으로 정하라고 명한 다음 하교 하기를,
"땅은 양주 땅이지마는 도성과의 거리가 아주 가까우니, 모든 물건의 제공을 경기 고을에 부담시키지 말고 임신년234) 의 관례에 따라 경사(京司)에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4일 계축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신 이하가 또 탄신에 하례드릴 것을 매우 간곡히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자, 그날 한번 성상을 뵙기를 청하니, 임금이 소견을 허락하였다.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이 여러 종신들과 같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탄신에 경하를 드리겠다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 허락하지 않았다.
9월 5일 갑인
주강을 행하였다.
장령 정문주(鄭文柱)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하의 만사는 공사(公私)와 의리(義理)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세도가 날로 떨어져 공과 의를 따르는 사람은 다시금 볼 수 없고, 아는 것은 오직 사(私)이고 좋아하는 것은 오직 이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사유(四維)235) 가 펴지지 못하고 온갖 법도가 점차로 해이해져서 금령이 이행되지 않아 편호(編戶)들이 근심하여 소요가 일어나며 충직한 말은 드리지 않고 아첨하는 습관이 조성되었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어진 사람을 쓰고 사특한 사람을 버리시되, 소원하고 친한 것을 보아 쓰거나 버리지 말며, 말을 들으실 때에는 먼저 시비를 살피시고 어진 이를 예우하실 때는 반드시 처음과 같이 하며, 일을 하실 때마다 반드시 천리에 따라 하셔서 이(利)와 사(私)가 얽히게 하지 마소서. 그러면 온갖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며, 모든 공적이 빛날 것입니다."
하고, 또 호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에 대해 논하기를,
"그가 성상께 얼마나 큰 지우(知遇)를 받았습니까? 그런데도 보답할 것은 생각지 않고 여러 해 동안 탁지(度支)236) 에 있으면서 방자한 뜻과 교활한 수단으로 경비에 쓸 중대한 재화를 끌어다 남용하고 흑각(黑角)과 지목(紙木)을 마음대로 발매하여 불분명하게 처리하였으므로 하리들이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기고 있으니, 의당 견책하고 파직하는 율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고, 또 전 대신(臺臣) 임희교(任希敎)에 대해 논하기를,
"그가 일찍이 채위하(蔡緯夏)는 집안에 누가 있고 행실이 어긋났다는 이유로 대각의 선발에 뽑힌 것을 개정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숙부가 벼슬이 아장(亞長)에 이르렀지만 하자가 있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고 그의 사람됨이 본디 단정하고 자상하여 행실이 어긋난 점을 보지 못하였으니, 채위하가 대각에 선발된 것을 개정하라는 명을 취소해야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맨 먼저 말한 것은 내 비록 가상히 여긴다마는, 중신(重臣)을 논하는 것은 관료들이 서로 규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비록 들뜬 비방에 동요되었지마는, 나는 호조 판서를 소중히 여긴다. 상자를 열어 비방한 글들을 보여준 일이 어찌 위(魏)나라 문후237) 에게만 있었겠는가? 그리고 채위하의 일에 있어서는 한편으로는 부추켜 세우고 한편으로는 억제하였으니, 그 또한 사사로움이지 공평한 것이 아니다."
하자, 정문주가 인피하였는데, 임금이 곧바로 체차하였다. 이때 임금이 바야흐로 재이를 만나 직언을 구하였기 때문에 비록 정문주에게 죄를 주지는 않았으나, 자못 그가 부추켜 세우고 억제하는가 의심을 지녀 경연에서 엄한 하교를 누차 내렸다. 이로부터 관료들끼리의 규계가 귀하고 높은 신하에게는 미치지 않고 지적의 대상이 하찮은 음관(蔭官)이나 무관뿐이었다.
석강을 행하였다.
9월 6일 을묘
임금이 광릉(光陵)의 기신에 쓸 향을 인정전에서 지영하였다.
9월 7일 병진
예조 판서 이지억(李之億)을 파직하고 남태제(南泰齊)를 대신하였다. 임금이 영빈(暎嬪)의 상(喪)에 혜빈과 세손이 마땅히 한번 가야 한다고 여겼는데, 해조에서 계품하지 않았다고 하여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예조에서 비로소 발인하는 날 나아가 곡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옥당의 관원을 불러 《경세문답(警世問答)》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9월 8일 정사
밤에 어떤 별이 하늘 가운데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예조에 명하여 고 판부사 김우항(金宇杭)에게 봉사손(奉祀孫)이 있는지의 여부를 물어보고 후사를 세우라고 하였다. 김우항은 숙종조 때의 대신이었다. 임금이 그를 생각하여 하교하기를,
"김우항은 충후(忠厚)하고 순근(純謹)하여 신축년238) ·임인년239) 무렵에 끝까지 지조를 지켰으니, 복이 있는 정승이라고 하겠다.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건대, 어찌 그리도 후손이 미약하단 말인가? 일찍이 후사를 세워주라고 명하였었는데 지금 듣기에 그의 후사가 또 작고(作故)하였다 하니, 그에게 아들이 있는지의 여부를 물어서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관서(關西)의 무과 방목을 열람하고 난 뒤에 하교하기를,
"옛날에 동소남(董召南)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물에 가서 고기를 잡아 어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드렸고, 당(唐)나라 진씨(陳氏)는 10대를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 이는 비록 드물게 있는 일이지마는 아비와 자식이 호적을 나누어 거주하였으니, 이는 풍속과 교화(敎化)에 관련이 된다. 참으로 형세상 호적을 나누지 않을 수 없는 자가 아닐 경우에는 여러 도로 하여금 금지하도록 하여 풍교(風敎)를 수립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9일 무오
밤에 어떤 별이 하늘 가운데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 유생들에게 구일제(九日製)를 시험보여 윤양후(尹養厚) 등을 뽑아 강을 시험보인 다음에 윤양후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라고 명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각각 급분(給分)240) 하였다.
9월 10일 기미
임금이 조강을 행하였다. 《맹자》의 강을 끝내고 나서 비로소 《시전》을 강하였다. 또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여러 도의 허물어진 제방들을 수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민백흥(閔百興)을 이조 참의로, 이현조(李顯祚)를 집의로, 최태형(崔台衡)을 사간으로, 이재협(李在協)을 교리로, 김상철(金尙喆)을 형조 판서로, 한익모(韓翼謨)를 판윤으로 삼았다.
호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이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스스로 정문주(鄭文住)가 호조의 재물을 끌어다가 사사로이 사용했다는 지적에 대해 변명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지금 경의 상소를 보니, 사실이 명백하다. 경이 이러한 말을 초래한 것은 경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대를 믿고 위임했기 때문이다. 아! 무함하는 말이 경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대사헌 서명응(徐命膺)이 차자를 올려 기영편(祈永篇)을 드렸는데 9개 조목으로 된 것이었다. 장구령(張九齡)의 금감록(金鑑錄)을 모방하여 지었는데 천추절에 바치려고 한 것이었다. 빈대(賓對)를 인하여 패(牌)241) 를 따라 올렸다. 그 명목은 동정(動靜)·대공(大公)·도법(道法)·근약(謹約)·현능(賢能)·명실(名實)·유일(遺逸)·상벌(賞罰)·조령(條令)이었다. 이에 대해 비답하기를,
"당나라 현종(玄宗)의 천추절에 대해 내 일찍이 웃었는데, 탄일이 가까이 다가오니 추모의 마음을 억제하기 어렵다. 경의 차자에 기영(祈永)으로 이름을 붙였으니 마음에 가상히 여긴다. 그러나 기운은 쇠한데다 도는 멀기만 하니, 어떻게 효과가 있기를 바라겠는가? 원차(原箚)는 유중(留中)하고 본편(本篇)은 홍문관으로 하여금 책자를 만들어 올리게 한 다음 좌우명으로 삼겠다."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9월 11일 경신
정언 박상로(朴相老)가 상소하여 술의 금주령에 대한 폐단을 극구 논하고 10개 조항의 문답을 만들어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종묘와 사직에 술을 쓰지 않아 예절에 위배되는 것이 첫째요, 빈객과 의약에 술을 쓰지 않아 인정에 위배되는 것이 둘째이며, 이웃에게 연좌법을 적용하는 것이 셋째요, 포도청이 금지하는 것을 맡는 것이 넷째이며, 차출한 관원이 소란을 피우는 것이 다섯째요, 수령들이 이로 인해 자주 바뀌는 것이 여섯째이며, 법제가 이로 인해 자주 변경되는 것이 일곱째요, 형벌과 옥사가 이로 인해 많이 남용되는 것이 여덟째이며, 언로가 이로 인해 막히는 것이 아홉째요, 민심이 이로 인해 흩어지려고 하는 것이 열째입니다."
하였다. 이를 반복해서 조목조목 말하였는데, 거의 천여 자(字)가 되었다. 끝에 가서 말하기를,
"이미 옛날의 제도를 회복한 뒤에 또한 차근차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민곤(李敏坤)이 일이 있기 전에 간하였던 것을 포상해야 하고, 권극(權極)이 망언(妄言)을 한 것에 대해 형률을 시행해야 하며, 윤구연(尹九淵)이 사령(赦令)을 반포하기 전에 한 일을 용서해 주어야 하고, 서유원(徐有元)의 과감히 말하는 기풍을 권장해야 하며, 남태회(南泰會)에게 공도 없이 준 자급을 회수해야 하고, 간범(干犯)되어 귀양간 무리들을 일체로 방면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말하기를,
"박상로가 연소한 대각의 신하로서 바깥 고을에서 들어오자마자 백성을 위해 소를 올렸으니 가상하기는 하나, 오로지 술을 금지한 폐단을 논하며 장황하게 문답을 늘어놓아 나의 금령을 어지럽혔다. 또 수령을 자주 체차하는 것을 지금의 폐단이라고 하였는데, 자주 체차하는 폐단이 술을 금지하는 폐단과 경중(輕重)을 비교해 볼 때 어느 것이 더 중한가? 더구나 효시하였던 윤구연을 북수(北帥)라고 칭하였으니, 왜 이다지도 방자하단 말인가? 그에게 사적에서 삭제하는 형률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소는 채용되지 않았으나,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간 최태형(崔台衡)을 파직하였다. 대각의 신하가 날마다 성상소(城上所)242) 에 나가는 것은 경복궁의 옛날 제도였고, 창덕궁은 성상소가 없기 때문에 매양 숙직하는 방에 나갔다가 해가 저물면 물러가는데 이는 근래의 예였다. 그런데 최태형이 일찍이 대각에 있으면서 성상소에 나가지 않았다 하여 파직을 당하였는데, 지금 또 그가 숙직하는 방에 나가는 규식을 없애자고 청하자, 임금이 노하여 책망하고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9월 12일 신유
호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이 면직되고, 김상철(金尙喆)을 대신하였다.
9월 13일 임술
이날은 곧 임금의 탄신일이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2품 이상 관원과 삼사의 여러 신하들을 보경당(寶慶堂)에서 소견하였는데, 이 곳은 임금이 탄생한 집이었다. 유신에게 육아시(蓼莪詩)243) 를 읽도록 명하고 추모의 감회를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대신 이하가 축수하는 말씀을 드렸다.
9월 14일 계해
임금이 태묘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인정전 뜰에서 친히 전하였다. 조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김응순(金應淳)·민백흥(閔百興)을 승지로 삼았다.
9월 15일 갑자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강원도에서 백성의 구휼을 다 마쳤다고 계문(啓聞)하였는데, 구휼을 잘한 수령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장령 이지회(李之晦)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엊그제 간하는 신하의 말이 우직하여 더러 한두 가지 일을 망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과감히 말하는 기풍이 가상히 여길 만하였고 또한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죄를 주어 간하는 길을 막는단 말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지금 우려스러운 것이 염치가 전부 상실된 것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 염치가 상실됨으로써 조경(躁競)하는 습관이 날로 심해져서 명관(名官)의 신분으로 전형을 맡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애걸을 하고 있으며, 염치가 상실됨으로써 재물를 탐하는 풍조가 날로 퍼져서 장관(長官)의 신분으로 이익을 보고 불법(不法)의 구덩이로 스스로 빠져들고 있는데, 죽을 죄를 진 어리석은 신은 또한 전하께서 인도하는 방법이 미진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경상(卿相)의 직책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체차하는 것이나 그대로 위임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엄한 분부를 계속 내려 너무나 심하게 독촉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견뎌내기 어려운 사정인데도 감히 시애(撕捱)244) 하지 못하기도 하고, 실정을 다 말하지 못한 채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기도 하니, 염치가 점점 무너진 것이 여기에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벼슬을 탐하여 구차하게 진출하려는 무리를 반드시 배척하여 멀리하고, 근신하고 청렴(淸廉)한 선비들을 반드시 발탁하여 쓰소서. 그러면 마치 바람이 지나갈 때 풀이 쓰러지는 것처럼 사양하는 풍속이 조성되어 조경하는 습관이 저절로 움츠러들 것이고 재물을 탐하는 풍조가 저절로 개혁될 것입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수원에 어떤 과부가 집안 아저씨와 화목하지 못하다가 그 아저씨의 노복의 아내에게 성을 내어 손으로 때려 죽이고는 그 흔적을 감추었는데,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명확히 조사하여 옥안(獄案)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직하게 함으로써 그의 살피지 못한 잘못을 신칙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직언을 구하는 하교에 응하여 올린 상소에 진달한 3개 조항은 오늘날 병폐에 대한 좋은 약제이다. 감히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엊그제 간하는 신하가 문답식으로 말을 하여 나의 금주령을 어지럽혔으니, 그를 어리석다고 한다면 가하지마는 곧다고 일컫는다면 지나친 것이다. 상소 끝에 덧붙여 진술한 것은 풍화(風化)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조치를 내리겠다."
하고, 이어서 수찬 이석재(李碩載)에게 사실을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9월 16일 을축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친히 《시경》 서문을 지어 책 첫머리에 붙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중용》 서문을 지었고 또 친히 《시경》 서문을 지었으니, 이는 대체로 갑인년245) 에 《시전》을 강하고, 지금 또 《시전》을 강하게 되었으므로 이들 해가 모두 갑년(甲年)이어서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김광국(金光國)·홍지해(洪趾海)를 승지로 삼았다.
9월 17일 병인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이날 조강을 하려고 하였는데 대각의 인원 수가 갖추어지지 않아 주강을 하라고 다시 명하고, 나오지 않은 대신(臺臣) 서명응(徐命膺)과 이지회(李之晦)를 파직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신(臺臣)이 전계(前啓)를 베껴 전하는 것을 혐의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새로 올린 계사에도 그전 일이 끼이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오직 패(牌)를 받치는 것을 고상한 풍치로 여기고 있으니 국가에서 대각을 두어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 이어서 모두 파직시켰다.
사신은 말한다. "‘관원을 꼭 갖출 필요가 없이 오직 적임자를 쓴다.’고 한 것은 대체로 반드시 신중히 뽑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사관(史官)을 뽑는 전조(銓曹)의 낭관을 파직시킨 뒤로 관작이 난잡해지고 선비의 풍습이 비루해졌다. 그리하여 지위가 높은 자는 다시금 꺼려하는 것이 없고 연소한 자들은 몸을 검속한 이가 적어 기절(氣節)이 점차로 사그라져서 묵묵히 있는 것이 풍습으로 되어 버렸다. 이는 비록 대각의 잘못이기는 하나, 이렇게 된 것은 또한 이유가 있었으므로 식자들이 걱정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0책 104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79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관원을 꼭 갖출 필요가 없이 오직 적임자를 쓴다.’고 한 것은 대체로 반드시 신중히 뽑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사관(史官)을 뽑는 전조(銓曹)의 낭관을 파직시킨 뒤로 관작이 난잡해지고 선비의 풍습이 비루해졌다. 그리하여 지위가 높은 자는 다시금 꺼려하는 것이 없고 연소한 자들은 몸을 검속한 이가 적어 기절(氣節)이 점차로 사그라져서 묵묵히 있는 것이 풍습으로 되어 버렸다. 이는 비록 대각의 잘못이기는 하나, 이렇게 된 것은 또한 이유가 있었으므로 식자들이 걱정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을 이조 참의로, 서명신(徐命臣)을 대사헌으로, 이육(李堉)을 사간으로, 신경준(申景濬)·황최언(黃最彦)을 장령으로, 이득일(李得一)을 지평으로, 이치중(李致中)·김서구(金敍九)를 정언으로, 홍낙명(洪樂命)을 응교로, 이성원(李性源)·김노진(金魯鎭)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9월 19일 무진
임금이 주강을 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지부(地部)246) 의 쓸 경비가 아무 것도 없으니, 삼남(三南)의 군작미(軍作米) 1천 5백 곡(斛)을 이획(移劃)하여 경비에 보태 쓰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어원(御苑)에 나아가 벼를 베는 것을 직접 보고 선혜청으로 하여금 벼를 벤 사람들에게 식량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홍중효(洪重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너무나 급하게 정사를 잘 해보려고 하시다가 위에서 혼자만 노고하고 직언을 너무나 서둘러 구하시다가 아랫사람들에게 독책하는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보령이 이미 칠순이 넘으셨는데도 불구하고 무더위 속에 삼강(三講)247) 을 그치지 않고 하시면서 아침과 낮의 기후가 다른 것도 따지지 않고 침식(寢食)의 시간이 지난 것도 돌아보시지 않으시니, 신의 기쁨도 여기에 있는 동시에 걱정도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조섭(調攝)하는 도리에 유의하셔서 화평한 복을 누리소서. 직언을 구한 뒤로 말씀을 드린 자의 상소와 계사가 잇따라 올려지고 있으니, 참으로 그 말이 쓸 만하면 가납하셔야 하고 설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죄를 주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신하들이 숨기지 않고 좋은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마다 바른말을 하라고 책망하거나 일마다 좋은 대안을 구하려고 할 경우에는 비록 아침에 한 사람을 견책하고 저녁에 한 사람을 죄준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구하시는 것을 응할 수 없어서 한갓 좋지 않은 분위기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시어 간하는 말을 할 수 있게끔 도리를 다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진술한 바가 절실하니 실로 나의 병통에 맞는 약제이다.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정상순(鄭尙淳)을 승지로 삼았다.
9월 20일 기사
임금이 제릉(齊陵)의 기신에 쓸 향을 인정전 월대에서 지영하였다.
9월 21일 경오
주강을 하였다. 임금이 거듭 갑신년248) 을 만나자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져 중국의 옥대(玉帶)와 시험지를 가져다 보고 슬픈 감회를 가졌다. 충신의 후손 중 문음(文蔭)의 직에 있는 사람과 유생을 불러 친히 제술 시험을 보여 김노순(金魯淳) 등을 뽑아 준직(準職)249) 을 상으로 주었다. 또 고 참판 정온(鄭蘊)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수원 어사 이석재(李碩載)가 복명(復命)하자, 수원 부사 이미(李瀰)를 파직하였다. 그리고 조덕숭(趙德崇)의 처를 수원부의 옥에 가두었는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조덕숭이 죽은 뒤에 그의 처가 더욱 더 사나움을 부려 이웃과 고을에 걱정거리가 되어 왔는데 또 손으로 사람을 죽이자, 대신(臺臣) 이지회가 상소하여 논한 것이다. 그러자 임금이 어사를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는데, 그러한 사실이 밝혀지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비록 스스로 죽었더라도 검험(檢驗)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사족(士族)이기 때문이었다.
경복궁의 옛터에서 옥으로 만든 토끼와 옥으로 만든 봉(鳳)을 발견하였는데, 위장(衛將)이 정원(政院)에 바쳤다. 임금이 이를 가져다 보고, 하교하기를,
"이는 이상한 일이다."
하였다.
9월 23일 임신
임금이 진찰하는 자리에서 친히 성가학편(聖可學篇)을 지었다.
홍지해(洪趾海)를 수원 부사로 삼았다.
좌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사정을 들어 상소하면서 약원의 책임을 면하게 해 달라고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순제군(順悌君) 이달(李炟)이 소를 올려 태묘에 술을 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술도 술이다. 술을 금한 것은 나라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어찌 한두 신하가 감히 청할 일이겠는가?"
하고, 비답을 내려 책망하였다.
9월 24일 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백종해(白宗海)라는 자가 태묘의 입직 부장(入直部將)으로서 밤에 담을 넘어 여자와 만나다가 나졸에게 붙잡혔다. 임금이 병조에 명하여 조사하게 하였는데, 사실로 밝혀지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혜빈과 왕세손이 영빈방(暎嬪房)의 상차(喪次)에 가서 곡하고 돌아왔다.
9월 25일 갑술
이담(李潭)을 승지로 삼았다.
9월 26일 을해
사시(巳時)에 태백성이 서남쪽에 나타났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서 세 대신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아! 나날이 더욱 쇠해지고만 있는데 29일이 머지 않았으니 어떻게 차마 지나칠 수 있겠는가? 오늘 이 공묵합에 앉아 경들을 부른 것은 이날을 그냥 넘기지 않으려는 뜻이다. 임오년250) 의 대의(大義)를 만약 통쾌하게 유시하지 않았더라면 윤리가 그때부터 폐지되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만고에도 없는 지경을 당하고 그의 아버지가 만고에도 없는 의리를 행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으며, 세손 역시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는가? 아! 동방이 망하게 되었으니, 비록 은혜를 베풀고 싶더라도 누가 은혜를 베풀겠는가? 그때 존재하느냐 망하느냐가 순식간에 달려 있었다. 너의 조모가 없었더라면 어찌 오늘날이 있겠으며 너의 조부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 일을 분변해낼 수 있었겠는가? 일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너의 아비의 호(號)를 회복시켜 묘(廟)를 세워주었고 너의 어미가 혜빈이라는 호를 받은 것이다. 너의 조모가 백세에 의리를 세웠으니, 일거에 종사가 다시 존재하고 의리가 크게 밝혀졌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조선이 어떻게 조선이 되었겠는가? 아! 너의 조모가 계실 때에는 차마 말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조용히 의리에 따라 처리하였다. 내가 의열(義烈)로 표시한 것은 너의 조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종사의 대의(大義)를 위한 것이다. 오늘날 신하가 만일 이 의리를 소홀히 여긴다면 윤리가 폐지될 것이다. 어찌 너의 조모뿐이겠는가. 장차 너를 어느 곳에다 두게 되겠는가? 아! 너의 어미도 대의를 알고 있었다. 네가 너의 어미 뜻을 따른 것은 단지 대의의 당연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니, 이는 천지의 변함없는 떳떳한 법이라고 하겠다. 너의 조모는 대의로 사직을 보호하였는데, 너의 어미가 너의 조모에게 털끝만큼이라도 이의가 없었던 것은 역시 이러한 의리 때문이었다. 후일에 만일 틈을 노려 참소하는 자가 있을 경우 조부와 손자, 어미와 자식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종묘 사직은 어떻게 되겠는가? 효경(梟獍)251) 과 같은 무리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러한 무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대의를 참으로 알지 못한 자일 경우 쉽게 넘어가기 마련이니, 이게 분변하기 더욱 어려운 것이다."
하고, 세손에게 앉으라 명하고 누누이 밝게 유시하였다. 그리고 기주관(記注官)에게 명하여 일기(日記)에 기록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들이 말하기를,
"이는 바뀌지 않는 의리입니다."
하였다.
지평 민홍열(閔弘烈)이 상소하여 지금의 정사 5개 조목을 논하였는데, 학문을 도타이 할 것, 간하는 말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 선비를 숭상할 것, 재물을 아껴 쓸 것, 인재를 쓸 것 등이었다. 선비를 숭상하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선비는 나라의 원기이니, 원기가 쇠약하고서 그 나라를 진작시키는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열성조에서 경학(經學)을 숭상하고 권장하여 어진 선비들을 예우하였던 것입니다. 오직 우리 전하께서 선왕의 공렬(功烈)을 이어받아 유학의 교화를 크게 천명하고자 전후로 산림(山林)의 선비를 초빙하여 정성과 예우를 간절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 한 마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예우가 갑자기 쇠해져서 근년 이래로 초빙하였다는 말을 전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선부(選部)252) 에서 관례에 따라 의망하는 것도 모두 두려운 마음을 갖고 망서리고 있으므로, ‘산림(山林)’ 두 글자가 일세의 꺼리고 싫어하는 바가 되고 말았으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신이 걱정하는 것은 별도로 있습니다. 세손의 타고난 자품이 특출하고 학문이 영달(英達)하니, 어진 사람을 친히 하고 예의로 부리는 도리에 어찌 다른 염려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건대 지금 세손이 예우가 점점 쇠해지는 것만 보고 어진 사람을 널리 초빙하는 성대한 예를 보지 못함으로써 만약 ‘산림의 선비는 정사하는 데에 관계할 것이 없다.’고 여긴다면 이게 어찌 전하께서 후손에게 좋은 교훈을 남겨주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열성조에서 선비를 숭상하였던 덕을 미루어서 오늘날 후손에게 교훈을 남길 것을 깊이 생각하신 다음 반드시 성의 있게 예우하시어 선비를 숭상하는 실상을 다 하고 전후로 산림의 선비를 의망하지 않은 전관(銓錧)에게 견책의 벌을 아울러 시행하여 성상께서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보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새로 입사(入士)한 연소자가 숨김없이 소회를 다 말한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매우 가상히 여기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듣기를 기뻐한다.[喜聞過]’는 세 글자로 만년에 들어 스스로 힘쓰고 있는데 왕성하게 성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관에게 견책의 벌을 주자고 청한 것은 비록 지나치지만 추고하라고 신칙시키겠다."
하였다.
예조 참판 김선행(金善行), 보덕 정술조(鄭述祚) 등을 파직하고, 심수(沈鏽)에게 특별히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다. 이때 영빈의 발인이 하룻밤을 앞두고 있었는데, 예부(禮部)253) 에서 망애의주(望哀儀註)를 동궁에게 품(稟)하지 않았고 춘방(春坊)254) 에서 대답한 것 역시 성상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분부가 있었다. 이날 밤에 왕세손이 궁료(宮僚)들을 거느리고 보화문(普化門) 밖에서 망애례(望哀禮)를 거행하였다. 예조에서 망곡의주(望哭儀註)를 써서 혜빈궁에 올렸다.
9월 27일 병자
임금이 육상궁에 나아갔다가 이어서 영빈의 방에 두루 들렀는데, 반우(返虞)255) 에 친히 임하기 위해서였으며, 왕세손도 어가를 수행하였다. 정원과 옥당에서 차자와 계사를 올려 열성조의 가법(家法)에 대해 말하고 즉시 어가를 돌릴 것을 청하려 하였다. 그런데 글을 작성해 놓고 미처 올리기도 전에 정원·옥당·춘방의 관원을 모두 갑자기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대체로 세손이 망배례를 거행한 뒤에 여러 신하들이 그 즉시 문안하지 않았고 궁료(宮僚)들이 곡을 도와 우는 소리 역시 미세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인륜이 끊어졌다고 책망하면서 말씀이 엄중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궁으로 돌아왔다.
이경호(李景祜)를 도승지로, 송형중(宋瑩中)·윤학동(尹學東)·이언형(李彦衡)·이창유(李昌儒)·김면행(金勉行)을 승지로 삼았다.
9월 29일 무인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인정문에서 지영하였다. 이날은 곧 인원 성모(仁元聖母)의 탄신이었으므로 탕제(湯劑)를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임금이 영세추모록(永世追慕錄)을 친히 짓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불러서 한권(翰圈)256) 을 빨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권이 완성되었는데, 한권에 들어간 자는 15명이었다. 그런데 임금이 오히려 널리 뽑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권을 주관한 사람을 모두 삭직하고 즉시 도당(都堂)에 회권(會圈)257) 하도록 명하여 27명을 뽑았다.
남태회(南泰會)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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