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무신
물에 빠져 죽은 강원도 사람 여섯 명에게 휼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일 기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이어 동지사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 등 세 신하를 소견하고 사언(四言) 한 구절을 친히 써서 하사한 다음 위로해 보냈다.
석강을 행하였다.
11월 3일 경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정언 김보순(金普淳)이, 염치의 풍속을 장려하고 조경(躁競)을 억제할 것에 대해 소회를 아뢰었는데,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주부로 승진시켜 6품이 전출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도록 명하였는데, 홍봉한의 청을 따른 것이다. 권도(權噵)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1월 5일 임자
밤에 어떤 별이 허성(虛星)의 밑에서 나와 남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육상궁의 중삭제(仲朔祭)에 쓸 향을 인화문에서 지영하였다. 이어서 육상궁에 나아가 친히 동향제(冬享祭)를 거행하고 효장묘(孝章廟)를 둘러본 다음 저녁에 궁으로 돌아왔다. 어가가 종로를 지날 때에 연로한 시민을 불러 난전(亂廛)을 금하는 것이 편리한가의 여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시골 장사꾼들은 비록 실질적인 혜택을 입고 있으나 난전을 하는 사람은 이익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다 같은 나의 백성이니, 비하자면 음식을 먹을 때 똑같이 배가 불러야 좋은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종이 하나에다 친히 글을 써서 예조 판서 남태제(南泰齊)로 하여금 해조에 간직해 두라고 명하였다. 이는 대체로 정빈묘(靖嬪墓)와 의열궁(義烈宮)을 후일에 차례차례 봉원(封園)한다는 성의(聖意)였다.
11월 7일 갑인
임금이 조강을 행하여 《시전(詩傳)》 형문장(衡門章)을 강하였다. 하교하기를,
"필수(泌水) 샘물만 있는 굶주림 속에서도 즐겁게 살았으니, 이는 자기 분수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세속은 자기 분수를 지키며 굶주림 속에서도 즐겁게 사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세도가 부끄럽다."
하니,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굶주림 속에서 즐겁게 살게 하는 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염치와 기절을 권장하면 어진 사람이 스스로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황해도 평산부에서 불에 타 죽은 자가 52호였는데, 휼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간원 【대사간 홍명한(洪名漢)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각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은 본디 사체가 자별합니다. 그런데 집의 유수(柳脩)는 부례(府隷)의 요포 후박(厚薄)을 가지고 번거롭게 청하였고, 정언 김보순(金普淳)은 명관(名官)이 권력 있는 사람을 찾아가 조경(躁競)하는 폐단을 억제해야 한다고 끌어 넣고는 어떤 사람이 그러한 일을 했는지 뚜렷이 지적하지 못한 채 애매하게 어물어물 넘겨버렸으니, 임금에게 사실대로 고해야 하는 도리가 전혀 아닙니다. 그들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엄(趙曮)을 특별히 형조 참판으로 제수하고 홍인한(洪麟漢)을 한성 우윤으로 삼았는데, 이는 추조(秋曹)와 한성부에 폐단을 이정(釐正)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홍봉한이 돈삼계(獤蔘契)의 폐단에 대해 아뢴 다음 지부(地部)307) 에 있는 것으로 각 궁(宮)에다 분배하고, 대전과 중궁전에만 공물로 진상하여 공인(貢人)들의 폐단을 덜어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1월 8일 을묘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군기시(軍器寺)의 갑주미(甲胄米)를 오부(五部)의 가격으로 한정하여 한성부와 추조에 떼어주어 이례(吏隷)들의 월급의 자본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장령 강시현(姜始顯)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각 궁방(宮房)의 차인(差人)들이 면세(免稅)를 받는다는 이유로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고례(古例)에 따라 본읍에서 호조로 보내면 호조에서 이를 각 궁방에 나누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대신에게 물어본 다음 앞으로 차인들이 절목을 어기고 폐단을 끼칠 경우에는 도신으로 하여금 엄히 다스린 다음 아뢰라고 명하였다. 또 법사(法司)에 이서(吏胥)들이 너무나 많아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아뢰자, 임금이 《경국대전》에 정해진 수에 따라 두되, 정원(定員) 이외에 급료가 없는 자는 모두 없애라고 명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11월 9일 병진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제주에 연이어 흉년이 들음으로써 삼명일(三名日)308) 에 진상하는 물품을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장령 강시현(姜始顯)이 용안 현감이 인원을 너무나 많이 거느리고 있다는 이유로 파직할 것을 청하였는데, 처음에 이름을 지적하지 않은데다가 또 계사의 규례로 아뢰지 않고 소회를 아뢰면서 말하였다. 대신이 이를 그르게 여기자 강시현이 인피(引避)하니, 수찬 이휘중(李徽中)이 그를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유신과 대각은 모두 일을 말하는 직책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크게 경고할 일이 아닐 경우에는 대각의 사체가 중하므로 비록 대신이라 하더라도 경솔히 파직하자고 못하는데 더구나 유신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그릇된 규례이니, 대신(臺臣)을 파직하자고 하였던 유신에게 그 벌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홍봉한이 또 아뢰기를,
"구 장릉(長陵)은 장산(長山)의 산줄기와 연해 있는데, 그곳 토지가 기름지고 폭이 매우 넓습니다. 지금 방어하는 영(營)을 파주로 옮겨 설치해야 할 것이니, 그때에 화소(火巢)309) 의 범위를 줄여 주어 개간하도록 허락하소서. 그러면 곡식을 생산하고 백성을 모여 살게 하는 방안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예조의 당상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한 다음에 그의 청을 허락하였다.
임금이 《시경》 빈풍(豳風)의 칠월장(七月章)을 강하다가 여러 도로 하여금 그곳 백성의 풍속을 채집하고 백성의 고통을 살펴보게 한 다음 모시(毛詩)의 예를 모방하여 시를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11월 10일 정사
우박이 내리고 천둥하였다. 밤에는 어떤 별이 북두성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붉은 색이었다.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상소하여, 《시경》의 억계(抑戒) 등 여러 장을 대략 인용하여 임금의 덕에 힘쓸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그의 의도가 금주령을 늦추고 산림의 선비를 초빙하라는 데에 있었으나 그에 대한 말을 모호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비답을 내려 책망하였다.
11월 11일 무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한성 판윤 홍계희(洪啓禧)가 태묘에 예주(醴酒)310) 를 쓰는 것은 미안(未安)하다고 아뢰었다. 또 말하기를,
"법령은 자주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벼슬을 구하려고 쫓아다니지 않고 시종 한결같이 한다면 비록 법을 범한 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이처럼 많은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영의정 홍봉한이 천둥의 변고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면직을 바라고, 정원과 옥당도 차자를 올려 경계의 말씀을 드리니, 임금이 우악하게 답하였다.
이규채(李奎采)를 대사헌으로, 정운유(鄭運維)를 대사간으로, 홍낙성(洪樂性)을 대사성으로, 원인손(元仁孫)을 부제학으로, 이보관(李普觀)을 집의로, 이기덕(李基德)을 사간으로, 심욱지(沈勗之)를 헌납으로, 이만육(李萬育)을 장령으로, 곽진순(郭鎭純)을 정언으로, 김노진(金魯鎭)·홍술해(洪述海)를 교리로, 이재협(李在協)을 수찬으로 삼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11월 12일 기미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초복(初覆)311) 을 거행하였다. 여러 승지들을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대체로 승정원의 계사 가운데 ‘법령을 만들 때에는 처음부터 살펴서 하는 데에 달려 있다.’는 한 구절이 있었는데, 그 뜻이 술을 금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대사헌 이규채(李奎采)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대사간 정운유(鄭運維)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운규(趙雲逵)를 도승지로, 이중호(李重祜)·이창유(李昌儒)·김면행(金勉行)·이의로(李宜老)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장령 황최언(黃最彦)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서 소매 속에서 체천 육잠(體天六箴)을 꺼내 올린 다음 읽어 아뢰었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규계의 글을 지어 올리는 규례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물러가 상소로 대체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자 황최언이 물러가 상소로 올렸는데, 유중(留中)하라고 명하였다.
대사성 홍낙성이, 과거의 규식에 어두워 고비(皋比)312) 를 무릎쓰고 차지할 수 없다며 상소를 올려 사양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에게 사실대로 말한 것이다."
하고, 그 즉시 체차한 다음 이담(李潭)으로 하였다.
11월 14일 신유
밤에 어떤 별이 누성(婁星)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들어갔는데, 길이가 3, 4척쯤 되었다.
임금이 태묘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인정문에서 맞이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이규채(李奎采)가 소회를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재이를 만나 임금에게 말씀드린 경계의 말이 비록 평범한 말이나 쓸모없는 법 같으나, 한없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황천(皇天)의 상제(上帝)가 위에서 임하시고 종사의 신령이 곁에 계신다.’는 16자의 말은 더욱 더 절실하고 지극한 말이니, 닦고 살피어 재이를 없애는 도리가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모르게 몸이 번쩍 솟구치는 듯하다. 경이 주자의 말을 외우니, 내가 마치 주자의 말을 듣는 것 같다."
하였다. 대사간 정운유(鄭運維)도 민생을 구제하여 하늘에 실지로 응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소회를 말씀드렸는데, 임금이 가상히 여겨 녹피(鹿皮)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흉년이 들었다 하여 여러 도에 받지 못한 구포(舊逋)의 징수를 중지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정언 곽진순(郭鎭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홍범(洪範)의 건극(建極)은 편당(偏黨)이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편(偏)은 바르지 못한 것이고 당(黨)은 공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한가하게 계실 때에 스스로 성찰해 보시되, 반드시 중도를 잃은 희로(喜怒)와 사리에 지나친 상벌(賞罰)이 어느 일은 사적인 데에서 나왔으며 어느 행동은 사사로운 데에서 싹텄는지 살피어 용단을 내리기를 마치 칼로 물건을 자르듯이 하소서. 그러면 바람이 불 때에 풀이 쓰러지듯이 교화가 펴질 것입니다. 그 누가 감히 정결한 마음으로 성상의 뜻을 대양(對揚)하여 표준으로 모이고 표준으로 돌아가는 치화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다만 근래에 상소나 경연에서 아뢴 말 가운데 찬양하는 말이 매우 번잡하고 화려한데 이를 점차 서로서로 본받아 이미 풍속이 되어버렸습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고하기를 진실로 이와같이 해서는 안되는데 더구나 대각의 신하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정말 경직(硬直)한 말을 듣기 좋아하고 실없이 화려한 말을 듣기 싫어하신다면 이 역시 실지에 힘쓰는 도리이고 이전(二典)313) 과 삼모(三謨)314) 에 전혀 찬양하는 것이 없는 의의에 맞을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동지의 하례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6일 계해
장령 이만육(李萬育) 역시 천둥의 변고로 인해 상소를 올렸다. 임금의 덕에 대해 논하기를,
"성상의 총명은 어느 곳이나 통촉하시지만 말씀이 너무나 번다하므로 겉치레는 많고 실질적인 것은 적으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보고 들으시지만 덕행을 한결같이 고수하지 못하시므로 늘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 끝에 가서는 게을러지고 맙니다. 그리고 사치를 비록 엄하게 금했다고는 하나 재물을 아껴 쓰지 않으면 결국에는 부진한 데로 똑같이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절실하다고 하여 비답을 내려 가상히 여겼다.
임금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갔는데, 양사가 입시하였다. 장령 황최언(黃最彦)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승정원의 여러 승지에게 벌로 체차한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언 곽진순(郭鎭純)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집의 이헌묵(李憲默)은 빼어난 현인(賢人)의 후손으로 삼사(三司)를 출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살면서 몸가짐을 잘못하여 이속(吏屬)들에게 매를 때리며, 향임(鄕任)들을 내치기도 하고 끌어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청컨대 삼사의 의망을 개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이헌묵만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신(臺臣)은 비록 소문을 듣고 아뢰도록 허용하고 있으나 먼 외방의 일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니, 곽진순이 대답하기를,
"경주 수령에게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토의 백성에게 죄가 있다면, 큰 일이면 감영에 보고하고 작은 일이면 스스로 다스릴 것이지 이웃에 사는 대신에게 촉탁을 하여 이러한 놀라운 일을 하였구나. 부윤 이해중(李海重)을 파직하고 곽진순의 직책도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7일 갑자
임금이 희정당에서 친히 재복(再覆)을 행하였다. 재복은 관례로는 의정부(議政府)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임금이 여러 당상이 자세히 살피지 않을까 염려하여 친히 행한 것이었다.
경주 부윤 홍자(洪梓)를 소견하고 신라의 옛 능 중에 무너진 것들을 가서 보수하라고 유시하였다.
임금이 전 참판 조명채(曹命采)가 졸(卒)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그가 사신으로 오고간 바다를 건너던 노고를 생각하여 측은히 여겨, 그의 아들이 상복을 벗을 때를 기다려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8일 을축
밤에 크게 천둥하고 번개하였다.
정원에서 고사를 들어 경계의 말씀을 드리고 옥당과 대간은 경연에 나아가 힘쓰기를 말씀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인에게 잘못이 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도 진심으로 나를 도와야 할 것이다."
하였다.
11월 19일 병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이기덕(李基德)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하늘을 공경하고 민사를 부지런히 보는 것으로 재이를 없애는 도리로 삼으라면서 소회를 말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장령 이만육(李萬育)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0일 정묘
대사헌 이규채, 대사간 정운유가 재이를 만나 경계에 힘써야 된다는 내용으로 상소하였는데, 그 말이 늙은 유생들의 평범한 말과 같았으나 임금이 우악하게 답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해서의 곡식 5백 곡(斛)을 옮겨다가 교동(喬桐)의 백성들을 구제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수사 이윤성(李潤成)의 청을 따른 것이다. 또 교리 이석재(李碩載)를 보내어 본도(本島)의 농사가 어떠한지 살펴보고 이어 떠돌아다니는 백성을 안정시켜 모여 살게 하라고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 참판 이이장(李彛章)이 졸(卒)하였다. 이이장은 성품이 강직하고 과감하며 재주가 있었다. 동래 부사로 있을 적에는 왜인들이 두려워하였고 북방에 있을 때에는 청나라와의 무역 시장 조약을 엄히 지켰는데,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힘입은 바가 많았다. 임오년315) 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모두 말하자, 비로소 빨리 나라의 법을 바루라고 명하였는데, 임금의 어질고 명철에 힙입어 끝까지 보존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가 졸하자, 임금이 매우 애석히 여기고 관례에 따라 장례를 갖추어 치르도록 명하였다.
11월 21일 무진
밤에 또 천둥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11월 22일 기사
밤에 또 천둥하고 번개하였다.
영의정 홍봉한 등이 차자를 올려 옛날에 재이가 있으면 정승을 면직시켰던 일을 말하고, 정원과 옥당에서도 경계의 말씀을 드리는 차자와 계사를 올렸는데, 임금이 모두 우악하게 답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동지가 다음날이라 하여, 이조와 병조에서 세초(歲抄)316) 를 가지고 오게 한 다음 광탕(曠蕩)의 은전을 베풀었다.
11월 23일 경오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친히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대사헌 이규채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살옥 죄인(殺獄罪人) 석태(石泰)를 참작해 처리하라고 한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석태란 자는 무산(茂山)의 백성이었다. 그의 일가 만정(萬丁)과 개 기름을 놓고 다투다가 도끼 날로 쳤는데 죽고 말았다. 임금이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니, 정상이 용서할 만하다는 이유로 참작하여 처리하라고 명한 것이다. 이날 단지 한 명만 사형수로 결정되었다. 또 이명록(李命祿) 형제를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이명록은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후손이다. 전에 죄를 지어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의 할아비의 공을 생각하여 특별히 용서해 준 것이었다. 또 고 정승 최명길(崔鳴吉)의 후손 최홍보(崔弘輔)를 녹용하여 그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11월 24일 신미
새벽에 조금 천둥하였는데, 운대(雲臺)317) 의 신하가 천둥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고 아뢰자, 임금이 그 관원을 불러 면전에서 책망하기를,
"천둥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고 말하였는데, 이게 어찌 정성껏 측후(測候)한 도리인가? 경중 천심(輕重淺深)의 분간을 살피지 못했으니, 이는 하늘을 소홀히 여긴 것이다. 반드시 신중히 살펴서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를 다 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전 용안 현감(龍安縣監) 이정(李瀞)이 대궐 밑에서 자경(自剄)한 일을 생각하여 하교하기를,
"옛날에는 합관요(盖寬饒)318) 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이정이 있구나! 그가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몇 대 손인가 물어보도록 하라."
하고, 고 정승 이여(李畬)의 손자 이침(李沈)을 발탁해 쓰라고 명하였으니, 이침 역시 이식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11월 26일 계유
임금이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이조 판서 한익모(韓翼謨)를 파직하였는데, 한익모가 일곱 번이나 전임(銓任)에 제수되었으나, 인의(引義)하여 명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 이익보(李益輔)로 대신하고 특별히 구윤명(具允明)을 병조 판서로 제수하였다. 추조(秋曹)와 한성부의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방면하고 각사(名司)에서 사람을 곧바로 가두는 폐단을 금지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7일 갑술
밤에 어떤 별이 옥정성(玉井星) 밑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사간 이기덕(李基德)이 소를 올려, 양(陽)이 회복되는 의의를 인용하여 음(陰)을 억제하고 양을 붇돋우는 도리와 하늘을 몸받아 백성을 돌보는 방안에 대해 말하고, 또 경기 고을에 진전(陳田)이 많으니 다시 측량하여 세금을 고르게 해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가상히 여기고 유시하기를,
"측량을 다시 하는 일은 적임자를 얻지 못할 경우에는 세금을 더 받으려고 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니, 상확(商確)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전 현감 신경(申暻)이 상소하여 재신 이은(李溵)의 상소에 대하여 변론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이은의 상소를 보니, ‘신이 앞서 올린 상소에 그의 조부 고 정승 이집(李㙫)에게 저촉되는 말을 하였다.’고 하면서 많은 말을 해가며 비난하고 배척하였는데, 신은 놀라움과 의혹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원소(原疏)에 한 말은, 대체로 선정(先正)의 도가 세상에 밝혀지지 않아 일종의 가모(假冒)의 무리가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일을 하는 등 이름은 같으면서 실상은 달라 선정에게 누를 끼치기 때문에 부득불 선정에 대한 본말을 밝혀 그 당시 재신의 그릇된 점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빙자하고 주장하였다는 이름이 따로 있고 보면 고 정승 같은 분을 처음에 어찌 뜻을 두어 논급하였겠습니까? 선정이 평일에 붕당(朋黨)의 화를 딱하게 여긴 나머지 황극(皇極)의 도를 주장하여 충신과 역적의 분간을 엄히 하고 어진 사람과 사특한 사람을 구별하였습니다. 갑술년319) 에 다시 조정으로 들어올 적에 상소나 경연에서 간곡히 말한 것들이 모두 징계와 토벌을 엄히 하고 명분과 의리를 격려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두서너 재신들이 신축년320) ·임인년321) 의 변을 목격하고 무신년322) 의 화를 몸소 겪은 나머지 징계와 토벌의 의리에는 어두워지고 자기 집안의 사사로움에는 밝아 앞에서 이끌리고 뒤에서 구애되어 옛것을 잊지 못하고 동쪽으로 재보고 서쪽으로 기웃거리면서 오직 이익만을 노렸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죄지은 사람을 조금 가볍게 소통해 주어야 한다고 하다가 뒤이어 흉측한 잔류들까지 마구 용서해 주어 독초와 향풀, 얼음과 숫불처럼 성질이 다른 것들을 합하여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은 지역에다 싸잡아 넣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공론의 의리로 배척할까 염려되자, 망령되이 경전의 훈계를 인용하고 선정으로 곡진히 증거를 대었습니다. 정말로 기자(箕子)의 뜻이 이러하였다면 홍범(洪範) 1편에서 왜 무왕(武王)에게 염(廉)·래(來)323) 의 당(黨)을 아울러 쓰라고 권하지 않았으며, 선정의 뜻이 이러하였다면 갑술년에 올린 여러 상소에 왜 선왕에게 민희(閔熙)와 민암(閔黯)의 무리를 모두 수용하라고 권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였는데, 이를 읽도록 명하였고 염·래의 글 귀절에 이르자 임금이 크게 노하여 그 상소를 가져다 친히 불사르고 비답을 내려 준절히 책망하였다.
임금이 날씨가 춥자 변방 고을 봉돈(烽墩)에서 파수보는 수졸(戍卒)들이 생각나서 각각 그 고을에 명하여 지의(紙衣)를 지급해 넉넉하게 돌보라고 명하였다.
11월 28일 을해
임금이 장차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려고 하니, 고(鼓)가 삼엄(三嚴)324) 을 알렸다. 먼저 선원전(璿源殿)을 참배하고 이어서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이어서 정원에 명하여 정원에 도착한 상소 3장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한 다음 어필로 휘호인 ‘체천 건극 성공 신화(體天建極聖功神化)’ 여덟 글자를 지워버렸다. 그러자 영의정 홍봉한, 승지 조영진 등이 깜짝 놀라 나아가 엎드려 울면서 취소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차마 듣지도 못할 분부를 내리면서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신경(申暻)을 초선(抄選)에서 빼고 전 찬선 송명흠(宋明欽)도 모두 빼라고 명하였다. 검의(檢擬)된 홍계능(洪啓能)과 전관(銓官) 조명정을 파직하고 정홍순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어서 또 신경을 기장(機張)으로 귀양보냈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으로 돌아와 2품 이상과 어가를 수행했던 백관들을 불러 당습(黨習)은 망국의 단서인데 그 원인은 산림의 선비에게서 말미암았다고 글을 지어 유시하였다. 홍계능과 김양행도 초선(抄選)에서 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서지수(徐志修)와 민홍열(閔弘烈)은 전에 산림의 선비를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서지수는 관직을 삭탈하고 민홍렬은 성환역(成歡驛)으로 귀양보냈다. 전후로 송명흠(宋明欽)의 죄를 토벌하지 않은 삼사(三司)의 관원을 모두 파직하고, 또 이은을 파직하였다. 이는 그의 조부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신경의 상소가 이은으로 말미암아 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전적 김익성(金益聲)이 초선에서 빼버리는 처분이 어떠하느냐는 뜻으로 아뢰자, 임금이 ‘이 역시 하나의 문명귀(文命龜)이다.’ 하고는 해도(海島)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몹시 노하여 잇따라 차마 듣지 못할 분부를 내리자, 영의정 홍봉한 등이 여러 재신들을 거느리고 일제히 같은 소리로 신경을 귀양보내자고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홍봉한 등이 이어서 친히 휘호를 지워버리라는 분부를 취소하라고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이하가 모두 관을 벗고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밤이 으슥해지자 임금이 비로소 조금 노여움이 풀렸다.
11월 29일 병자
이날은 남지(南至)325) 였다. 관문을 닫는다는 의의에 따라 상참과 경연을 정지하였다.
11월 30일 정축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인정전 월대에서 지영하였다.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다. 고금 당론(黨論)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이유에 대해 두루 서술하고 또 어진 사람과 사특한 사람이 진퇴하는 의의에 대해서 언급하였는데, 무릇 1백여 글자가 되었다. 이는 대체로 신경의 상소에 조화시켜 보려는 신하를 배척하여 산림의 선비가 또 하나의 당을 이루고 있다고 여겨 만약 근원을 통렬히 깨뜨리지 않으면 그 해가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를 책자로 만들어 《엄제방유곤록(嚴隄防裕昆錄)》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간행하여 사고에 넣어두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이익보를 입시하라고 명하여 친히 정사를 행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을 예문 제학으로, 홍명한(洪名漢)을 동경연으로 삼고, 특별히 심수(沈鏽)를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삼고, 김종정(金鍾正)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김종정은 신경의 사위였으나, 신경을 귀양보낼 때에 분의를 들어 말하지 않았고 임금의 측근에서 주선하며 잘 의리에 처했으니 옳은 사람은 쓰고 그른 사람은 버린다는 의리로 그를 특별히 발탁한 것이었다.
임금이 신경을 귀양보내고 나서도 여전히 노기가 가라앉지 않아 또 송명흠·김양행·홍계능을 서인(庶人)으로 내쳐 시골로 쫓아보내라고 명하였다. 또 전 지사 윤봉구(尹鳳九)를 사판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교동 안집 어사 이석재(李碩載)가 돌아와 보고하니, 임금이 그에게 다시 가서 진휼의 곡식을 감독해 운반하고 섬 백성들이 모두 모인 상황과 운반의 배가 모두 도착한 모양을 그려서 들이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또 여러 진신(搢紳)들과 같이 상소하여 자신을 인책(引責)하였는데, 이는 대개 당습을 애써 제거하고 엄한 분부를 거두기를 청하는 뜻에서였다. 임금이 자신들을 인책한 것을 가상히 여겨 누누이 유시하는 비답을 내리고 또한 애써 당습을 애써 신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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