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무인
임금이 연일 탕제(湯劑)를 들지 않자 약원의 여러 신하들이 입진(入診)을 극력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일 기묘
어떤 별이 오거성(五車星) 밑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관학(館學)의 생도들만 일제히 모여 스스로의 인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매우 노하여 관학의 장의(掌議)와 색장(色掌) 및 도성 안팎에 진사 가운데 사조(四朝)로 현관(顯官)이 있는 자들은 모두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호서의 유생들도 일체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고 전후로 원점(圓點)을 맞은 자도 원점을 삭제하라고 명하니, 이때 반상(泮庠)326) 이 비어버렸다. 임금이 밤에 태학으로 나아가 비로소 향유(鄕儒)를 명하여 장의로 삼고 유생들을 거느리고 성묘에 참배하였다. 친히 ‘사현사(四賢祠)’ 3자를 써서 주고 이를 새겨 그 사당에 걸라고 명한 다음 궁으로 돌아왔다.
특별히 전 교리 이성규(李聖圭), 헌납 한필수(韓必壽)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이성규는 선원파(璿源派)였는데 그가 파당을 짓지 않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고, 한필수는 휘호를 지운 것을 취소하기를 청하여 그가 체통을 얻은 것을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었다.
예조 판서 남태제(南泰齊)를 파직하고 신만(申晩)으로 대신하였다.
경상도 대구 유생 구성옥(具性玉)이 임금이 하문할 때에 ‘신경(申暻)이 성상의 40년 고심을 어겼으니, 이는 난신(亂臣)이다.’라고 대답하자, 임금이 가상히 여겨 예빈시 참봉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관학 유생 김화(金俰) 등이 마음을 고쳐 먹고 조심하며 당습(黨習)을 일삼지 않겠다는 뜻으로 여러 유생들과 연명하여 상소하니, 임금이 소견하고 칭찬하며 유시하였다. 그리고 비로소 휘호를 지운 명을 취소하였다.
12월 3일 경진
어떤 별이 정성(井星)의 밑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현광우(玄光宇)를 사간으로, 신경준(申景濬)을 장령으로, 홍상한(洪象漢)을 판윤으로, 이수훈(李壽勛)을 헌납으로, 원의손(元義孫)·이휘중(李徽中)을 교리로, 박성원(朴盛源)을 수찬으로 삼았다.
도승지 김종정(金鍾正)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의리에 잘못 처했다는 것을 자책(自責)하였으며, 이어서 잘못 내려진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대신 이하가 전에 내렸던 명을 반한(反汗)327) 하였다는 사유로 종묘에 고하고 반사(頒赦)를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비로소 유생들에게 과거를 못 보게 한 명을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12월 4일 신사
어떤 별이 천원성(天苑星) 밑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명성 왕후(明聖王后) 기신에 쓸 향을 인정문에서 지영하였다.
특별히 명을 내려 김기대(金器大)를 개성 유수로 삼았으니 김기대는 인원 왕후의 친정 조카였다.
12월 5일 임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12월 7일 갑신
임금이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기신에 쓸 향을 인정문에서 지영하였다.
대사간 조덕성(趙德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경(申暻)에 관한 일은 성상께서 엄히 처분을 내리시고 진신(搢紳)들도 연명하여 상소를 올렸으니, 이는 건극(建極)의 공화(功化)가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나 뭇 신하에게 죄가 있을 경우 그 죄에 합당한 죄명으로 벌을 주고 일이 지나간 뒤에는 옛날처럼 평온한 데로 돌아가는 것은 사물이 오면 순응하는 큰 성인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늘 여러 신하들이 잘 받들지 못한 바람에 성상께서 자신을 지나치게 탓하고 계시는데 이게 어찌 《중용(中庸)》에 이른바, ‘독공(篤恭)하면 천하가 다스려진다.’는 의의이겠으며 또한 《시경(詩經)》에 이른바 ‘목소리와 기색을 돋구지 않고도 경계된다.’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감히 삼익(三益)에 대한 글 열두 자로 드리겠는데, 이는 성상의 뜻을 더욱 굳게 가지실 것[聖志益固], 성상의 마음을 더욱 화평하게 가지실 것[聖心益和], 성상의 몸을 더욱 건강하게 할 것[聖體益康] 뿐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을 내렸다가 곧바로 또 그를 파직하였다.
12월 8일 을유
밤에 어떤 별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정성 왕후(貞聖王后)와 가례(嘉禮)를 치르고 나서 주갑(周甲)이 되는 해라 하여 휘령전에 친히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거행하였다.
이조 판서 이익보(李益輔)가 병으로 면직되고 신회(申晦)로 대신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을 대사간으로, 박기채(朴起采)를 사간으로, 이치중(李致中)·김용(金容)을 정언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9일 병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수참선(水站船)은 영남 호서의 고개 밑 14개 고을 전세(田稅)의 곡물을 수송하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남의 곡물을 돈으로 바꾼 뒤로는 감해진 곡물의 수량이 매우 많은데 배의 수는 그대로 있어 수리하느라 백성에게 폐단만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의 숫자를 줄여서 대동미를 운반하는 곳에 첨가시키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2월 10일 정해
밤에 어떤 별이 북극성 밑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몸소 한림 소시(翰林召試)328) 에 친림(親臨)하였는데, 뜰에 들어온 자는 단지 세 사람 뿐이었다. 그중에서 한영(韓栐)이 뽑혔으니, 한영은 경기 고을의 사람이었는데 문벌이 매우 한미한 자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돈(趙暾)을 내쫓아 이천 부사로 삼았는데, 비국 당상에 제수한 명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2월 11일 무자
주강을 행하였다.
화길 옹주(和吉翁主)를 구민화(具敏和)와 정혼하고 위호(尉號)를 능성위(綾城尉)라고 하였다. 구민화는 곧 대장 구선행(具善行)의 손자였다.
12월 13일 경인
주강을 행하였다.
장령 윤붕거(尹鵬擧)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남해 현감 정택수(鄭宅洙)가 환곡(還穀)의 징수를 독촉하느라 납부를 거부한 어떤 선비를 잡아왔는데, 그 고을 포교가 구타하여 죽였습니다. 그러자 물에다 시체를 던져 자취를 없앴다 하니, 조사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 매우 놀라고 측은히 여겨 교리 이휘중(李徽中)을 어사로 삼아 가서 조사하도록 하였다."
영암 군수 정창성(鄭昌聖)이 상소하여, 본읍의 저치미(儲置米)를 헛되이 머물러 두는 폐단에 대해 말하니, 임금이 묘당에 명하여 이를 심사해 아뢰라고 하였다.
12월 14일 신묘
임금이 태묘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인정문에서 지영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이 예를 거행하는 것은 세손으로 하여금 사전(祀典)이 중하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다시 양심합(養心閤)으로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날씨가 춥다고 하여 특별히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방면하게 하고 세말(歲末)에 여러 도에 하유하여 백성의 궁핍함을 보살피게 하라고 하였다.
12월 16일 계사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을 불러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와 그들이 배운 글을 외워 보게 한 다음 종이와 붓을 주어 보냈다.
이진항(李鎭恒)을 집의로, 이육(李堉)을 사간으로, 이성수(李性遂)를 지평으로, 송재경(宋載經)을 정언으로, 이성원(李性源)을 부교리로, 이택진(李宅鎭)을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12월에 공물로 바치는 산토끼의 수량을 감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옛날에 월령(月令)329) 으로 인습해 오던 머리가 푸른 오리의 진상을 그만두라고 분부하신 것을 내가 이미 보았는데, 비록 미물이지만 차마 많이 죽이지 못하겠다.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개미를 피해 걸어간 인자함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12월 18일 을미
이날 밤에 이극문(貳極門)과 저승전(儲承殿)에 불이 났다. 대신과 호조 판서가 다시 수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복궁에 화재가 났을 때에도 감히 중건을 못하였는데 비록 이 전(殿)이 없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조종의 검소하신 덕을 본받아야 한다."
하였다.
12월 19일 병신
장령 권영(權潁)이 상소하여 성상의 몸을 보호하고 아끼는 도리에 대해 말하고, 또 논하기를,
"장령 윤붕거(尹鵬擧)의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워서 대각의 선발에 맞지 않으므로 일찍이 개정해야 한다는 논핵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안연히 여겨 자처(自處)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개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윤붕거는 순실한 것이 그의 장점인데, 일마다 탄핵하면 어떻게 먼 지방의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말하는 것이 지나치다."
하였다.
임금이 이미 연말이 되었는데 여러 도에서 대여해 준 곡물의 상환을 독촉하는 괴로움을 생각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라고 하였다.
12월 20일 정유
집의 이진항(李鎭恒)이 앞서의 일로 상소하여 인의(引義)로 사직하였는데, 비답을 내리지 않고 그를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특별히 지돈녕 김치인(金致仁)을 다시 비국 당상으로 차출하였는데, 김치인이 막 상복을 벗었기 때문이었다.
화령 옹주(和寧翁主)의 가례를 치렀다. 가례청(嘉禮廳)의 당상과 낭청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주고, 도청 홍낙명(洪樂命)에게는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수어사 김양택(金陽澤)이 아뢰기를,
"본청의 돈과 무명을 창고지기가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합계하면 무려 1만 6천여 냥이나 됩니다. 범법자에게 의당 일률(一律)330) 을 시행해야 하겠으니, 청컨대 그를 법조(法曹)331) 로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중한 곤장으로 치죄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4일 신축
북도의 관비(官婢) 송아(宋兒)에게 복호(復戶)332) 해 주라고 명하였다. 송아는 변방 일개 여인으로 그의 지아비가 서울에 거의 20여 년이나 있었는데도 절개를 지키고 있다가 그의 지아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살하였는데, 관찰사가 장문(狀聞)하였다.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복호해 주라 명하고 또 천역을 면해 주어 풍교를 수립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5일 임인
임금이 대정(大政)을 거행하였다. 조숙(趙)을 대사간으로, 이동태(李東泰)를 집의로, 이홍제(李弘濟)를 장령으로, 안겸제(安兼濟)를 정언으로, 이창임(李昌任)을 지평으로, 황최언(黃㝡彦)를 헌납으로, 이석재(李碩載)를 교리로, 채제공(蔡濟恭)·서명응(徐命膺)을 좌윤과 우윤으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신회(申晦)와 병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의 정품(政稟)333) 이었다.
12월 26일 계묘
임금이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겼는데, 중궁전·혜빈궁·왕세손도 같은 날 따라갔다.
12월 29일 병오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를 숭현문에서 지영하고 인하여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정월에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내리고 여러 도에 유시하라고 하였으며,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방면하라 하였고 현방(懸房)334) 의 속전(贖錢) 15일치를 감하라고 명하였다. 선전관(宣傳官)에게 명하여 거기에서 떠돌아다니는 유개(流丐)335) 들을 불러모아 선혜청으로 하여금 죽을 먹이고 양식을 주어 그들의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라고 명하였다. 경재(卿宰)와 시종(侍從)들 가운데 전후로 죄를 입어 파직된 자들을 아울러 서용하라고 하였다.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이 처음으로 대궐에 들어왔는데, 그를 호위하는 종들이 매우 떠들었으므로 전감(殿監)이 금지하였고, 그 궁감(宮監)이 또 그 상황을 아뢰니, 임금이 영의정 홍봉한에게 이르기를,
"이는 이기기를 힘쓰는 것이니, 그 습관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이는 그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아비가 잘 가르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고, 이어서 그를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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