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5권, 영조 41년 1765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1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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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정미

정조(正朝)의 하례를 정지시켰다.

 

임금이 태묘(太廟)에서 세초(歲初)의 전알(展謁)을 행하고, 선원전(璿源殿)과 육상궁(毓祥宮)을 두루 배알하였는데, 왕세손도 역시 따라갔다. 저녁에 환궁하여서는 떠돌이 거지들을 불러들여 양식을 주어 보내고 그들의 거주(居住)를 물으라고 명하였다. 또 제도(諸道)의 수령(守令)들 중에 유민(流民)들을 능히 안집(安集)시키지 못한 자는 결장(決杖)하는 형벌을 시행하고 도신(道臣)은 함사 문비(緘辭問備)001)  하라고 명하였다.

 

1월 2일 무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여 《시전(詩傳)》을 강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태조조(太祖朝)에서 이미 시행하였던 예(禮)를 끌어대어 잔치를 베풀어 헌수(獻壽)하도록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불효하고 어두워서 황형(皇兄)의 큰 은혜도 갚지 못하였고, 자성(慈聖)에 대한 효양(孝養)도 이루지 못하였다. 선왕(先王)께서 돌아가신 지가 이미 오래 됨을 슬퍼하고, 육아(蓼莪)002)  의 시(詩)를 읊었다. 이러한 오늘날 어찌 차마 홀로 〈헌수를〉 받겠는가? 하물며 4기(四紀)003)  를 임어(臨御)하는 동안 한 가지의 혜정(惠政)도 없어 백성들은 그 사경에서 헤메거늘, 그 임금은 향연(饗宴)을 받는 것이 옳겠는가? 아! 할아비는 손자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를 의지하고 있구나. 돌아보건대 지금 조정에는 인협(寅協)하는 공효(功效)가 없고, 나라 형편은 철류(綴旒)004)  처럼 위태롭다. 비록 풍년이 들었더라도 오히려 불가한 것이거늘, 하물며 흉년이겠는가? 일을 크게 벌이는 것으로써 세손(世孫)에게 보여 줄 수는 없다."
하고, 사교(辭敎)가 상세하여 천백(千百) 마디 뿐만이 아니었다. 대신(大臣)들이 힘써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개정(開政)005)  을 명하여 시종신(侍從臣)의 아버지에게 추은(推恩)006)  하게 하고, 경재(卿宰)의 부인으로서 나이 80, 90세가 된 자에게 음식물을 보내도록 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홍낙순(洪樂純)을 체직시켰는데, 어버이가 늙었기 때문이었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남태회(南泰會)를 대사헌(大司憲)으로, 현광우(玄光宇)를 집의(執義)로, 윤석렬(尹錫烈)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1월 4일 경술

임금이 기곡제(祈穀祭)007)  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왕세손도 따라오라고 명하였는데, 농사를 소중히 여긴 때문이었다. 시골 백성들을 부르라 명하고 농사의 풍흉(豊凶)과 진정(賑政)의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물었다. 굶주린 백성을 곧바로 초록(抄錄)하지 않은 것으로써 안성 군수(安城郡守) 김두추(金斗秋)를 파면시키고 그 대임자를 가려 보내었다. 밤에 자극문(紫極門)에 나아가 사직단(社稷壇)에 망제(望祭)하였다. 예가 끝난 뒤에 비로소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민백흥(閔百興)·김화진(金華鎭)·장지풍(張志豊)·심관(沈鑧)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헌납 황최언(黃最彦)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은 듣건대 절개와 의리를 위하여 죽는 선비는 마땅히 임금의 안색을 무릅쓰고 간쟁(諫爭)하는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아조(我朝)가 입국(立國)한 이래로 오로지 절의(節義)만을 숭상하여 4백 년 동안 부식(扶植)·배양(培養)한 것이 천고(千古)에 두드러졌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 때문인지 수십 년 오는 동안 기절(氣節)이 사라지고 없어져서 점차로 위축되어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지경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시험삼아 가까운 일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번에 신경(申璟)의 소(疏)는 진실로 망령되기는 하였으나 누(累)가 네 사람에게까지 뻗치고, 벌(罰)이 여러 선비에게 미쳤으며, 성상의 의노(疑怒)는 점점 거세어지고 처분은 적당함을 지나쳐 스스로 폄손(貶損)함을 보이고, 위중(威重)을 거꾸러지게 하는 데 이르렀으니, 더욱이 물건을 받아들이는 데 순응(順應)하고 소리와 안색을 두드러지게 하지 않는 도리가 아닙니다. 조정(朝廷)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전에 없던 지나친 행동이라고 누구인들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차라리 집안에 들어앉아 사담(私談)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광구(匡救)008)  하는 말 한마디는 즐겨 꺼내지 않습니다. 이는 어찌하여 조종조(祖宗朝)의 몇백 년 배양(培養)한 공이 하루아침에 쓸어져 없어지기를 이와 같이 극단에 달하였습니까? 신이 죄를 입은 여러 신하들과는 서로 영향(影響)이 미칠 수도 없습니다만, 신은 그 사람들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 초선(抄選)009)  이란 이름을 아끼는 것입니다. 초선(抄選)된 사람은 열조(列朝)에서 예우(禮遇)하는 바이고, 사림(士林)들이 가장 우러러보는 바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 한마디의 망발(妄發)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과 아울러 견벌(譴罰)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책(史冊)에 쓰기를 전하(殿下)께서 경술지사(經術之士)를 천박(淺薄)하게 여겼다고 한다면 성덕(聖德)에 누(累)됨이 어떠하겠습니까? 시험삼아 한가로운 여가에 평탄한 마음으로 기운을 펴시고 번연히 깨우치시어, 모두에게 광탕(曠蕩)의 은전을 베푸신다면, 어찌 일월(日月)이 다시 빛나는 것과 같이 더욱 빛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매,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그 소장을 먼저 한림(翰林)과 주서(注書)에게 물으니, 주서 김재인(金載人)과 한림 이형원(李亨元)이 모두 황최언을 매우 그르다고 하였다. 임금이 곧 대답하지 않은 것은 머뭇거리는 의도가 있다고 하여 김재인을 종성(鍾城)으로, 이형원을 대정(大靜)으로, 황최언을 삼수(三水)로 귀양 보내었다. 여러 번 엄교를 내리었는데, ‘황최언은 산림(山林)의 여의(餘意)를 주워 모아 얼굴을 바꾸고 붙따랐으니, 참으로 난신(亂臣)이다. 마땅히 엄문(嚴問)해야 하나 그 관명(官名)을 아껴 우선 놓아준다.’ 하고는 황최언의 이름을 진신소록(搢紳疏錄)에서 지워버리고, 그 소장을 받아들인 승지(承旨)도 파직시켰으며, 수수 방관(袖手傍觀)한 것은 간악한 자를 쫓아내는 의리가 아니라고 하여 행공(行公)하는 여러 대직(臺職)들도 파직시켰다. 한림 이동우(李東遇)가 이형원과 함께 죄벌을 받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이미 무상(無狀)하다고 하여 놓고, 끝에 가서는 또 동죄(同罪)를 청하니, 꼭 그 당여(黨與)에 들어 가고 싶은가?"
하고, 이동우를 철원(鐵原)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으며, 이어서 그를 검의(檢擬)한 전관(銓官) 신회(申晦)를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참판 박상덕(朴相德)을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참의 권도(權噵)를 평해 군수(平海郡守)로 특별히 보임(補任)하였다. 특지(特旨)를 내려 심수(沈鏽)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서명응(徐命膺)과 홍낙명(洪樂命)을 참판(參判)과 참의(參議)로 삼았다. 다시 좌우상(左右相)을 편전(便殿)으로 불러 엄교(嚴敎)를 여러 번 내렸는데, 대개 송명흠(宋明欽)의 일 때문이었다.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산야(山野)에 있는 사람이 본래 조정(朝政)을 간섭하려고 하지는 않지마는, 전하께서 불러 우대(優待)하시면, 송명흠이라고 해서 어찌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시인(詩人)의 적불(赤芾)010)  의 기롱이라 한 것이 역시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의 상소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남구만도 역시 독서(讀書)를 한 사람인데, 어찌 써서는 안되는 문자(文字)를 가지고 임금에게 고하였겠습니까? 신(臣)이 연석(筵席)에서 문득 정령(政令)을 베푸는 데 있어서 걸핏하면 후세(後世)에 법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우러러 권면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말 달려 사냥하는 과실도 없고 왕위에 오르신 지 40여 년 동안 겪으신 일이 이미 많았습니다. 조제(調劑)하는 데 있어서 고심한 나머지 간혹 과격한 데에 이르렀으므로, 신과 같이 대관(大官)에 몸담고 있는 사람도 감히 말 한마디 못하였거늘 하물며 소관(小官)들이겠습니까? 요즈음에 와서 언제 일찍이 어느 한 사람도 전하의 뜻을 거스른 이가 있으며, 또한 전하께서도 또 언제 신하의 한마디 말로 번연히 깨달아 고친 일이 있었습니까? 신들이 모두 아첨만 일삼아 임금의 뜻만 순종하는 소인(小人)이 된다면, 성상(聖上)께서 어찌 홀로 성주(聖主)가 되겠습니까? 이런 방도를 가지고 세손(世孫)에게 끼치어 준다면, 세손도 반드시 남의 신하된 자는 진실로 이와 같이 하여야 마땅하다고 장차 생각할 것이니, 국가에 일이 있으면 누가 즐겨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보답하겠습니까?"
하고, 말을 하는 데 있어서 반복하여 간절하게 하니, 임금이 매우 옳게 생각하여 노여움이 비로소 조금 풀렸다.

 

1월 5일 신해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나오지 않은 대관(臺官)인 대사헌 황경원(黃景源)과 사간 이육(李堉) 등을 파직시키고, 지평 정창순(鄭昌順)을 김천 찰방(金泉察訪)으로, 변득양(邊得讓)을 삼례 찰방(參禮察訪)으로 좌천시켰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과 종신(宗臣)인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 등이 국조(國朝)의 전례(典禮)를 끌어대며 잔치를 베풀어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안윤행(安允行)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박성원(朴盛源)을 사간(司諫)으로, 김치양(金致讓)을 정언(正言)으로, 박사눌(朴師訥)을 승지(承旨)로, 김종정(金鍾正)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사복(嗣服)011)  한 뒤에 작고한 대신(大臣)이나 중신(重臣) 중에 절혜(節惠)012)  의 은전(恩典)을 미처 받지 못한 이를 의논하여 구신(舊臣)을 추념(追念)하는 뜻을 보이게 하였다.

 

전 판서(判書) 원경순(元景淳)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친히 글을 지어 제(祭)를 지내게 하고, 호남(湖南)에 진정(賑政)을 한 수고로써 포유(褒諭)하였다. 원경순은 남다른 능력은 없었으나, 자못 확실(確實)한 것으로써 임금의 알아주는 바가 되었고, 또한 오흥 부부인(鰲興府夫人)013)  과는 동모 형제(同母兄弟)가 되는 까닭이었다.

 

1월 6일 임자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여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우무정장(雨無正章)을 강하였는데, ‘모든 군자들이여! 각기 너희 몸을 조심할지어다.[凡百君子 各敬爾身]’라고 한 글을 가지고 여러 신하들에게 경계하였다. 대신(大臣)과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또 연하(宴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흉년이 들면 풍악도 거행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여러 도(道)에 설진(說賑)한 곳이 있을 때이겠는가?"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1월 7일 계축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이 또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거느리고 설연 진하(設宴陳賀)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지경연사(知經筵事) 김양택(金陽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경의 아버지는 병술년014)   진연(進宴)을 청하였을 때에 이론(異論)을 내세웠는데 경은 매우 힘써서 청하니, 어찌 고집(固執)이 경의 아버지와 같지 않아 그런가?"
하니, 김양택이 말하기를,
"경사에는 전후의 구별이 없지마는, 때는 고금(古今)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빙그레 웃었다. 대개 고(故) 중신(重臣) 김진규(金鎭圭)는 바로 김양택의 아버지로서, 숙종(肅宗) 병술년 여러 신하들이 진연을 청하였을 때에 김진규가 홀로 항소(抗疏)하여 그 풍예(豊豫)015)  함을 진달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하교가 이에 미쳤다.

 

1월 8일 갑인

왕세손이 친히 상소문(上疏文)을 지어 손수 써서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삼가 성상(聖上)께서는 춘추가 망팔(望八)016)  로서 고첩(古牒)에도 드문 일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조신(朝臣)이나 만민(萬民)이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민(臣民)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소신(小臣)이겠습니까? 신의 나이 비록 어리나 역시 앎이 있습니다. 성상께서 만일 조신들의 청을 윤허하여 주신다면, 신이 먼저 잔을 잡고 애일(愛日)017)  의 정성을 펴겠습니다. 바라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소신의 정을 조금이라도 살펴 주소서. 소신의 마음이 이러하고 내외(內外) 대소 신민(大小臣民)의 마음도 모두 이러하니, 성상께서 어찌 차마 따르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굽어살피시어 특별히 소청(所請)을 윤허하여 주시면, 종사(宗社)에 매우 다행하고 신민에 매우 다행한 일로서 신은 더할 수 없이 기쁜 마음으로 크게 바라 마지 않습니다. 삼가 절하고 소(疏)를 올려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손수 글을 써서 비답하기를,
"너의 간곡한 글을 보고 너의 진달한 심정을 알았다. 아! 망팔(望八)의 늙은 나이에 네가 쓴 글을 볼 줄이야. 아! 네가 이제 숙성(夙成)하여 이러한 거조(擧措)를 하게 되고, 문리(文理)도 능히 이루었으니, 해동(海東)이 거의 잘 되겠구나. 해동이 거의 잘 되게 되면 내가 근심할 것이 없다. 아! 한쪽 모퉁이에 있는 나라 청구(靑丘)에서 할아비는 손자에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에게 의지하여 있는데, 지금 너의 글을 보니 어찌 차마 매정스럽게 하겠느냐? 지금 나의 마음이 한편으로는 선조의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또 한편으로는 충자(冲子)를 위하는 마음이 깊다. 지금 이 글은 가히 두어 잔의 헌수(獻壽)를 대신할 만하다. 네가 이미 글을 손수 썼고 나 역시 손수 써서 답하였으니, 비록 천년 백년을 내려간들 그저 예(例)에 따라 술잔이나 올리는 것보다 어찌 낫지 않겠느냐? 오늘 대소의 신하들은 이 답(答)을 보고 가히 나의 굳은 마음을 알 것이다. 아! 4백 년 종국(宗國)이 오직 너에게 달렸으니, 부지런히 배우고 덕을 닦아 선열(先烈)의 공적을 떨어뜨리지 말 것이며, 나라를 반석처럼 공고히 하여 너의 할아비 마음으로 하여금 후세에 전하여 줄 말이 있게 하여라. 그 효도의 큼이여,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마땅히 이 뜻을 체득하여라."
하고, 이어서 도승지로 하여금 가서 하유(下諭)하게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등이 빈청(賓廳)에서 2품(二品)의 여러 재신(宰臣)을 거느리고 나와 계진(啓陳)하기를,
"성상께서는 임어(臨御)하시어 4기(四紀)에 빛나셨고, 보령(寶齡)도 8질(八耋)이 넘으시었으니, 성대한 공렬은 대덕(大德)을 가진 이는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경사에 부합됩니다. 기쁨을 표현하기 위한 연헌(燕獻)의 예(禮)는 방전(邦典)에 이미 시행한 바이고 여정(輿情)도 막기 어려운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며칠 전 연중(筵中)에서 한 10조(條)로써 하교하고 부연(敷衍)하여 거듭 하유하였으며, 또한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하거늘 무슨 마음으로 연락(燕樂)을 하겠느냐는 뜻으로 하교하였다. 추모(追慕)하는 성효(聖孝)와 겸손한 성의(聖意)가 말한 요지 가운데 스며 있어서 두 번까지 호소하였으나,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 등과 종신(宗臣) 등이 각각 차자(箚子)와 소(疏)로써 진달하여 청하였으나, 역시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태묘(太廟)의 춘향 대제(春享大祭)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1월 9일 을묘

빈청(賓廳)에서 또다시 아뢰면서 진청(陳請)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왕세손이 진소(陳疏)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매, 성례(誠禮)를 펼 수가 없었으므로 마음이 민울(憫菀)하여 식음을 전폐한 지 네 때가 되었다. 여러 신하들이 듣고 모두 감읍(感泣)하였으며, 임금도 역시 근심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아 억지로 여러 사람들의 뜻에 따랐다. 15일에 하례(賀禮)를 행하라 명하고 의식대로 포고(布告)하게 하였으며, 제도(諸道)의 방물(方物)을 정지하고 봉전(封箋)만은 허락하게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세손의 성효(誠孝)가 이와 같으니, 종국(宗國)의 경사이다. 나는 근심할 것이 없다."
하였다.

 

태학 유생(太學儒生) 김화(金俰) 등이 또 상소하여 칭경(稱慶)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1월 10일 병진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서경(書經)》의 무성편(武成篇)을 강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어떻게 하면 요순(堯舜)처럼 팔짱을 끼고 앉아서도 다스릴 수가 있을까?"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하여야 한다고 할 수가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요순의 도(道)는 효제(孝悌)를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착하다고 칭찬하였다.

 

심익성(沈益聖)을 집의(執義)로, 정환유(鄭煥猷)를 지평(持平)으로, 이수훈(李壽勳)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경기 감사가 각 고을의 굶주린 자들을 뽑아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광주부(廣州府)에 굶주린 백성이 가장 많다 하여 특별히 안집 어사(安集御史) 이택진(李宅鎭)을 파견하여 덕의(德意)를 선유(宣諭)하게 하고, 이어서 유민(流民)들을 안집시키게 하였다.

 

1월 11일 정사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여 《시경》 〈소아(小雅) 중에〉 초자(楚茨)와 신남산(信南山) 장(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 시(詩)는 향례(享禮)에 성의를 다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그러나 돌아 보건대 지금 천승(千乘)의 나라에서 제례(祭禮)를 의식과 같이 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내 마음이 부끄럽다. 이 장(章)에서 이른바 ‘효손(孝孫)에게 경사가 있고, 큰 복으로써 키운다.[孝孫有慶 介以景福]’라고 한 것은 나의 감당할 바가 아니고 세손을 위하여 세수(歲首)의 축하로 쓸 수가 있겠다."
하고, 옥당관(玉堂官)에게 명하여 이 양장(兩章)을 편액(扁額)에 써서 태묘의 재실(齋室)과 사단(社壇)에 걸게 하여 의식대로 제향을 드리지 않는 자를 경계하게 하였다. 또 초하(初夏)에 태묘에서 친히 약제(禴祭)를 지내겠다고 명하였다.

 

이날 또 건명문(建明門)에 친림(親臨)하여 궐내(闕內)에 입직(入直)하는 군병(軍兵)들에게 호궤(犒饋)018)  하고, 하교하기를,
"이 사람들은 석년(昔年)에 애휼(愛恤)하던 백성들이다."
하고, 그들에게 공궤(供饋)한 국을 가져오라 명하여 친히 맛보았는데, 대개 그들과 달고 쓴 것을 함께 하겠다는 성의(聖意)였다. 승지(承旨) 장지항(張志恒)을 발탁하여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리고 부총관(副摠管)으로 특별 제수하였는데, 그 할아비 장붕익(張鵬翼)을 추념(追念)하여서였다. 또 전 병사(兵使) 이방좌(李邦佐)를 서용(敍用)하라 명하였다. 이방좌는 청렴 결백한 것으로 일컬어졌는데, 강계 부사(江界府使)가 된 지 수년(數年)에 뇌물 꾸러미[苞苴]를 권문 세가(權門勢家)에 바치지 않으니, 이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받았으며, 북곤(北閫)019)  에 있을 때에 홍술해(洪述海)의 탄핵한 바 되어 금고율(禁錮律)까지 입게 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비로소 서용되었으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청으로 인한 것이었다.

 

김상익(金相翊)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월 13일 기미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 공부 문백(公父文伯)020)  의 어머니는 계강자(季康子)021)  의 숙모(叔母)이었다. 계강자가 가서 보았는데 문을 반쯤 열고 서로 이야기하였으며 모두 그 문지방을 넘지 않았으므로, 공자[夫子]께서 칭찬하셨으니, 이는 남녀의 분별을 엄격히 한 때문이었다. 지금 옹주(翁主)와 군주(郡主)가 길례(吉禮)와 근구례(覲舅禮)022)  를 행할 때에 다만 시댁[舅家]의 3, 4촌만 입견(入見)하도록 하여, 왕가의 딸이 내외(內外)의 구별을 엄숙히 함을 보여라."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태연(尹泰淵)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1월 15일 신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왕세손과 뭇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동인 협공(同寅協恭)023)   뜻으로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에게 계칙(戒飭)하고 회보(懷保)024)  의 계책을 강구하라는 뜻으로 8도(八道)와 양도(兩都)에 계칙하였다. 이어서 중외(中外)에 반교(頒敎)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8천 년이 한 봄이 되고 한 가을이 된다는 〈춘(椿)나무처럼 오래 살도록 하라는〉 군정(群情)의 바람이 비록 간절하나,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구오복(九五福)에 강(康)이라든가 수(壽)라든가 하는 말이 있어서 욕의(縟儀)025)  에 억지로 부응하는 것이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오로지 왕세손의 깊은 정성에 말미암았는데, 어찌 팔방(八方)에 널리 알리지 않겠는가? 길이 생각건대 과덕(寡德)한 내가 외람되게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았도다. 깊은 못에 임하고 얇은 얼음을 밟듯 하는 마음으로 4기(四紀)를 하루 같이 지냈고, 조종(祖宗)의 영혼이 도운 바 되어 칠순에서도 두 해를 더하였다. 영수각(靈壽閣)에서 상치(尙齒)026)  의 의식을 거행하였으나, 감히 양성(兩聖)027)  에 추배(追配)한다고 이르겠는가? 공자(孔子)의 ‘마음에 내키는 대로 좇는다.[從心所欲]’라고 한 70살을 넘겼는데도, 아직까지 일치(一治)도 이루지 못함이 부끄러웠노라. 대저 어찌하여 빈계(賓啓)의 합사(合辭)로 연례(燕禮)를 청하게 되었는가? 단단하고 순일(純一)한 정성인데 어찌 ‘너의 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겠는가? 내 생각을 곰곰이 따져보니, 진실로 또한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다. 장락(長樂)028)  의 옛 궁전이 쓸쓸하여 술잔을 들고 종천지한(終天之恨)을 머금었는데, 서쪽 들판에 저문 구름이 아득하니, 어디에서 종고(鍾鼓)의 즐거움을 연주할까? 더구나 노야(魯野)에서는 흉년이 들었음을 고하는데 어느 겨를에 복[嘏]을 주시(周詩)에서 빌겠는가? 내 한마음의 고집된 겸양을 생각한다면 비록 백 통의 글을 올리더라도 윤허하기 어려우나, 저 군공(群公)들의 피곤함을 없애기를 바라서 10조(條)로써 내 뜻을 폈노라.
아! 우리 나이 어린 문손(文孫)029)  이 애일(愛日)의 순효(純孝)를 다하였다. 편지[琅函]에 깊은 마음 속의 간곡함을 썼으니 병이(秉彛)030)  의 양심이 애연(藹然)하였고, 먹을 것에는 네 철마다 진공(進供)하는 것을 올리지 않도록 하였으니, 진실로 쌓은 성의가 돈독하다. 할아비는 손자에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에게 의지하였으니 손상됨이 없었고, 정(情)은 바로 예(禮)이며 예는 바로 정인데 어찌 차마 그 성의를 끝내 거절하겠는가? 이에 억지로 따르기에 힘써 드디어 여러모로 생각했노라. 나의 즐거워하는 바가 아닌데 진작(進爵)은 무엇에 쓰겠는가? 돌아보건대 지성(至誠)을 막을 수 없어서 억지로 호숭(呼嵩)031)  을 허락하였다. 자손에게 좋은 계책[燕謨]을 끼치고자 하여 경비의 쓰임을 염려했으니, 어찌 잔치를 성대하게 거행하겠는가? 전문(箋文)을 올려 축하함은 허락하지만 방물(方物)을 드리는 것은 물리쳐서 겸손한 마음을 보이려 한다. 청묘(淸廟)032)  에 고하여 울창주(鬱鬯酒)를 천신(薦新)하였고, 대정(大庭)에 임하여 진신(縉紳)들을 모았노라. 가득히 이루어진 것을 어루만지면서 기천 영명(祈天永命)의 계획을 삼았고, 자효(慈孝)를 함께 펴서 온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을 돋구려 한다. 옛 전당(殿堂)에서 오늘날 훌륭한 의식을 거행하여 감회를 일으켰고, 명년(明年)은 어느 해인가? 지난 일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하려 한다. 아! 삼양(三陽)이 문득 이르러 천지(天地)가 교태(交泰)하는 기회를 당하였고, 순수한 덕의(德意)를 밝혔으니 정히 군신(君臣)이 서로 권면(勸勉)하는 기회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교시(敎示)하니, 생각건대 마땅히 모두 알도록 하라."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채제공(蔡濟恭)이 지어 올렸다.】  이어서 선조(先朝) 때부터 섬겨 내려온 자들을 추은(推恩)하여 문·음·무(文蔭武)를 막론하고 모두 그 자급(資級)을 올리라 명하고, 나이가 가장 많은 자는 음식물을 차등을 두어 내리게 하였다.

 

집의 심익성(沈益聖)을 파직시켰다. 심익성이 희로(喜怒)를 절제하고 절기에 따라 조섭할 것으로 소회(所懷)를 진달하였었는데, 말이 매우 모호하니, 임금이 명백하고 솔직하지 못한 것에 노여워하였던 것이다.

 

윤동섬(尹東暹)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송형중(宋瑩中)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흥종(李興宗)을 사간(司諫)으로, 안택인(安宅仁)·이형준(李亨俊)을 장령(掌令)으로, 고유(高裕)를 지평(持平)으로, 신사운(申思運)을 헌납(獻納)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정언(正言)으로, 구상(具庠)을 교리(校理)로, 김재순(金載順)을 수찬(修撰)으로, 이재협(李在協)·홍억(洪檍)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월 16일 임술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선혜 당상(宣惠堂上)에게 명하여 잠저(潛邸) 근방의 백성과 경중(京中)의 떠돌이 거지들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차등에 따라 죽을 먹이고 쌀을 주게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빈한한 자에게는 유의(襦衣)033)  를 주게 하였다. 경현당(景賢堂)에 돌아와서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함경도 북청부(北靑府) 여인이 한꺼번에 딸 세 쌍둥이를 낳았다.

 

1월 18일 갑자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이어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고경 차왜(告慶差倭)의 귀순(歸順)으로 인하여 동래(東萊)의 전 부사 송문재(宋文載)와 접위관(接慰官) 윤홍렬(尹弘烈)의 귀양을 풀어 주라고 명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말을 따른 것이다. 김화진(金華鎭)과 정상순(鄭尙淳)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월 19일 을축

달이 태미원(太微垣) 안으로 들어갔다.

 

1월 20일 병인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상도 암행 어사 이휘중(李徽中)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애초에 이휘중이 의옥(疑獄)을 안핵(按覈)하기 위하여 남해(南海)로 갔었는데, 전라도 구례현(求禮縣)을 지나다가 고을을 다스리지 못한 것으로 해당 현감 지도함(池道涵)을 봉고 파직(封庫罷職)하였다. 그런데 지도함은 곧 운관(雲觀)034)  에 있던 미천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장죄(贓罪)를 범한 것도 명백하지 않았다. 또 전라 좌수사 김광백(金光白)과 남해 현감(南海縣監) 정택수(鄭宅洙) 등의 죄를 논계(論啓)하여 중형으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어사는 복명 서계(復命書啓)하는 것이 예(例)인데 복명도 하지 않아서 먼저 수령의 죄를 논핵하였으니, 이미 봉고(封庫)할 죄가 아니라면 후폐(後弊)와 관계가 있습니다. 또한 김 광백은 이미 병곤(兵閫)으로 있으면서 해마다 조정의 권귀(權貴)에 궤유(饋遺)한 것은 깊이 책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구나 장물(贓物)도 많지 않은데 앞질러 논계(論啓)하였으니, 견책하여 처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아룀을 옳게 여겨 그를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곧 이어 함부로 법을 무시하고 가마를 탔다고 하여 다시 북새(北塞)로 귀양보냈다.

 

종신(宗臣) 안천군(安川君) 이계(李烓)가 진연(進宴)하기를 소청(疏請)하고, 또 대덕(大德)의 수(壽)로써 응당 행하여야 할 의식을 거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또 하교하기를,
"이는 나에게 아첨하는 것이니, 그것을 죄주지 않으면 아첨하는 말들을 그치게 할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그를 파직시켰다.

 

1월 21일 정묘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추조(秋曹)035)  에서 문안(文案)을 즉시 수정(修整)하여 대령하지 않은 때문에 전 형조 판서 심수(沈鏽)를 파직시켰는데, 심수는 이조(吏曹)로 이제 겨우 옮겨왔었다. 김치인(金致仁)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고, 남태회(南泰會)를 특별히 승진시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고, 황인검(黃仁儉)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의철(李宜哲)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석재(李碩載)를 집의(執義)로, 이동태(李東泰)를 사간(司諫)으로, 조정구(趙鼎耉)·최명옥(崔鳴玉)을 장령(掌令)으로, 박취원(朴取源)을 헌납으로, 김용(金容)을 정언으로 삼았다.

 

1월 22일 무진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만경 현령(萬頃縣令) 임제원(任濟遠)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임제원은 마침 차원(差員)으로서 상경(上京)한 것이었다. 세말(歲末)에 당하여 세금을 독촉한 것은 정봉(停捧)의 조령(朝令)을 몸 받지 않은 것이라 하여 그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1월 23일 기사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고 겸하여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대사간 이의철(李宜哲)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섭하고 학문에 힘쓰라는 요점으로써 소회를 진달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시독관(侍讀官) 구상(具庠) 등이 말하기를,
"장령 최명옥(崔鳴玉)이 전계(傳啓)하는 즈음에 대체(臺體)를 많이 손상시켰습니다.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가 곧 이어 개정(改正)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근래에 대통(臺通)036)  이 매우 남발(濫發)하여 최명옥은 비록 개정(改正)하였지마는, 한종찬(韓宗纘) 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바로 한효순(韓孝純)의 후손입니다. 다른 직위는 비록 구애될 필요가 없겠지마는 언의(言議)를 담당하는 임무에는 결코 경솔히 의논하여서는 안됩니다. 대정(大政)037)   때에 통망(通望)된 것을 보고도 그냥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통망을 주관한 전관(銓官) 서명응(徐命膺)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홍인한(洪麟漢)을 도승지(都承旨)로, 이미(李瀰)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1월 24일 경오

임금이 의소묘(懿昭墓)038)  에 동가(動駕)를 명하였는데 지나는 길에 의열묘(義烈墓)039)  에 들렸다. 저녁에 환궁하였다.

 

1월 25일 신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대사성(大司成) 김상중(金尙重)을 불러 반학(泮學)을 거느리고 들어오게 하여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들에게 강(講)을 시켜 그들이 익힌 바를 강하게 하고, 지필묵(紙筆墨)을 차등을 두어 내려 주었다.

 

충청도 단양군의 여인이 한꺼번에 2남 1녀(二男一女)의 세 쌍둥이를 낳았다.

 

1월 27일 계유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이어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각각 그 직무의 맡은 일을 물었다. 또 하교하기를,
"당(唐)나라 정관(貞觀)040)   때에는 까치가 영어(囹圄)041)  에 깃들었다고 한다. 지금 나는 늘그막 나이에 정치를 하는데 형벌을 받는 자가 감옥에 가득하니, 생각하면 측은하고 안타깝다. 봄기운이 비로소 생겨나는데 죄인들의 유울(幽鬱)함을 펴주지 못하니, 하(夏)나라의 우(禹) 같은 이로 하여금 보게 한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해서(該署)에 신칙하여 비록 형벌을 가(加)하더라도 영어를 깨끗이 쓸어서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성규(李聖圭)를 승지(承旨)로, 원인손(元仁孫)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해중(李海重)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사간(司諫)으로, 남운로(南雲老)를 장령(掌令)으로, 서명선(徐命善)을 헌납(獻納)으로, 윤사국(尹師國)·이동현(李東顯)을 정언(正言)으로, 김변광(金汴光)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삼았다. 김변광은 호서(湖西)에 살다가 일찍이 용강(龍崗)으로 부임하여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체직되어〉 돌아와서는 승자(陞資)되었는데 수년이 되도록 통정직(通政職)의 의망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조 판서 김치인(金致仁)이 비로소 의망하였으니, 임금이 김치인을 불러 하교하기를,
"근래의 정사에는 매양 서울 사람을 우선적으로 하였는데, 경은 시골에 있는 김변광 같은 자를 먼저 좌이(佐貳)042)  로 의망하였으니, 가히 그 공정한 마음을 알겠다. 이러한 마음을 이어간다면 나는 근심할 것이 없겠다."
하였다.

 

교동 독운 어사(喬桐督運御史) 이석재(李碩載)가 복명하여 통진(通津)과 김포(金浦) 양읍(兩邑)에 환곡(還穀)이 부족한 상황을 진달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구획(區劃)하여 주도록 하였다.

 

1월 30일 병자

임금이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경현당(景賢堂)에서 인견하였다. 수원(水原)의 살옥 죄인(殺獄罪人) 유덕삼(劉德三)을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의논을 따른 것이었다.

 

정운유(鄭運維)를 승지(承旨)로, 신위(申暐)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인배(李仁培)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정술조(鄭述祚)를 집의(執義)로, 이헌묵(李憲默)을 사간(司諫)으로, 임희효(任希孝)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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