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무인
임금이 3강(三講)043) 을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검험(檢驗)044) 이 비록 부실(不實)하더라도 사증(詞證)이 구비되어 있으면 추검(追檢)할 필요는 없다. 또한 매장하고서 곧장 고발하지 않은 것은 사화(私和)045) 한 것이다. 매양 검험한 상황을 들으면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더구나 이미 매장한 것을 다시 검험하는 것이겠는가? 옛날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오히려 마른 뼈도 묻어 주었는데 지금은 심지어 백골까지 검험을 하게 되니, 나는 생각하기를 그것을 당하는 자는 두 번 피살(被殺)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니, 매우 잔인한 일이라고 여긴다. 이 뒤로는 살인을 하여 몰래 매장한 자는 비록 검험을 하더라도 관(官)에서 매장하여 주고, 이미 매장된 자는 검험을 하지 말라. 사화를 한 자는 죄가 인륜[倫彛]에 관계된 것이니 중률(重律)로써 다스리되, 수교(受敎)에 실어, 현저한 법령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당하관(堂下官) 무신(武臣)들의 활쏘기를 친히 시험 보이고, 오위 장(五衛將) 김성기(金聖器)를 수령으로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김성기는 곧 관서의 곽산(郭山) 사람인데, 그 할아버지 김영준(金英俊)은 4세(四世)를 한집에 살아서 수의(繡衣)의 포문(褒聞)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불러 보고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시건(李蓍建)을 집의(執義)로, 이숭호(李崇祜)·송재경(宋載經)을 정언(正言)으로, 이재간(李在簡)을 부교리(副校理)로, 남유용(南有容)을 우빈객(右賓客)으로 삼았다.
2월 4일 경진
이헌경(李獻慶)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집의 이헌경(李獻慶)이 《시경(詩經)》의 인재를 육성하는 즐거움[菁莪樂育]의 뜻을 인용하여, 오래 살고 인재를 양성하는 방법을 힘쓰도록 청한 뒤에 이어서 말하기를,
"태학의 장의(掌議)를 4조(四祖)046) 에 현관(顯官)이 없는 자로서 차출(差出)하는 것은 선비들의 추앙을 받는 사람을 골라 인재를 양성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앞서 내리신 명령을 거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상(商)나라 이윤(伊尹)과 주(周)나라 여망(呂望) 역시 어찌 〈4조에〉 현관이 있었던가? 옛날의 현량(賢良)들은 암혈(巖穴)에서부터 발신(發身)하였는데, 오늘날 사람을 쓰는 것은 다만 도성[輦轂]에만 있으니, 어찌 그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전랑(銓郞)이 한림(翰林)을 선발하는 데에서 경알(傾軋)047) 이 일어나고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을 뽑는데도 역시 비봉(秘封)을 엿본다. 내 비록 부덕(否德)하지마는, 어찌 잘못된 습관을 따르겠는가? 4조에 아무리 현관이 없더라도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역시 명신(名臣)이고 철보(哲輔)였다. 서울의 사자(士子)들은 입으로 독서(讀書)를 하지 않는데 시골의 청금(靑衿)048) 들은 다만 그 재주만 품고 〈펴지 못하니,〉 이는 바로 옛사람이 옥토(沃土)와 척토(瘠土)에 비유한 것이다. 삼대(三代)049) 의 손익(損益)도 역시 그 형세를 따른 것인데, 이미 그 폐단을 알았으면 어찌 고치지 않겠느냐? 헌신(憲臣)의 이 청(請)이 있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인가, 경화(京華)의 사자(士子)를 위한 것인가?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전랑(銓郞)이 한림을 천거하는 것도 장차 옛날대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하고, 계속 엄한 교지를 내려 꾸짖으니, 이헌경이 황공하여 인피(引避)하자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평안도 개천군(价川郡)의 여인(女人)이 한꺼번에 아들 세 쌍둥이를 낳았다.
2월 5일 신사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윤득양(尹得養)을 수안 군수(遂安郡守)로, 대사간 이인배(李仁培)를 흡곡 현령(歙谷縣令)으로 특별히 외방에 보임(補任)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위패(違牌)하고 빈대(賓對)050) 에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설서(說書)에 통청(通淸)한 사람은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3차(次)만 겪으면 승륙(陞六)051) 시켜 막힌 것을 소통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이 길을 한번 열어 놓으면 권세를 가진 자는 반드시 설서로써 표준을 삼으려고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설서가 승륙되는 것은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제 장수(長壽)의 경지를 당하여 널리 은전(恩典)을 베풀어 간혹 수직(壽職)052) 으로서 계급을 뛰어넘어서 보국(輔國)053) 에 이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국은 높은 품계이니, 구차히 주어서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일정한 경력도 없이 함부로 여기까지 올라간다면 명기(名器)054) 를 가벼이 취급하는 실수가 역시 큽니다. 의관(醫官)과 역관(譯官)은 진실로 논할 것도 없고, 비록 종1품(從一品)이 자궁(資窮)055) 이 되어 보국이 되는 자도 한계가 있어야 하고 함부로 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로써 수직(壽職)의 품계를 막는 것은 늙은 사람을 대접하는 뜻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일찍이 정경(正卿)을 거치지 않은 자는 보국(輔國)을 허락하지 말도록 영원히 법식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문신(文臣)의 이문 제술(吏文製述)에 친림(親臨)하여 수석을 차지한 전 좌랑(佐郞) 목만중(睦萬中)에게 말을 하사하는 은전을 시행하였다.
조영진(趙榮進)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명식(李命植)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노진(金魯鎭)을 집의(執義)로, 홍윤(洪錀)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2월 7일 계미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2월 8일 갑신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9일 을유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2월 10일 병술
임금이 석강을 행하였는데, 이날 《시전(詩傳)》의 강독을 끝마쳤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남해 안핵 어사(南海按覈御史) 이휘중(李徽中)의 별단(別單)을 가지고 복주(覆奏)하기를,
"어사가 청한 바는 3조목인데, ‘첫째는 남해(南海)는 지역(地域)이 멀고 고을이 잔폐(殘弊)하여 사람들이 부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부임한 사람도 대부분 병에 잘 걸립니다. 문·음·무(文蔭武)를 막론하고 잘 선택하여 보내게 하소서. 둘째는 진주 목관(晉州牧官)은 해마다 배를 만드는데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다른 곳의 조운선(漕運船)과 같이 연한(年限)을 정하게 하소서. 셋째는 미조항(彌助項)·평산포(平山浦)·사량진(蛇梁鎭)의 방군포(防軍布)056) 는 각각 편리하고 가까운 데를 취하여 본읍군(本邑軍)과 바꾸어 정하게 하는 일입니다.’ 하였는데, 첫째와 둘째 조목은 청한 바가 매우 좋으니, 청한 대로 시행하시고, 셋째 조목은 한 도(道)의 방안(防案)이 어린(魚鱗)을 편성(偏成)하고 있으니, 쉽게 고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고유(高裕)가 고향에서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성상께서는 제요(帝堯)와 같은 권근(倦勤)057) 의 나이로서도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준〉 무일(無逸)의 교훈처럼 군공(群工)들을 독려 신칙하고 사무에 게으른 것을 깊이 경계하여 무릇 근심 걱정으로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는데도 권강(權綱)을 총람(總攬)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제왕(帝王)의 성절(盛節)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성인(聖人)의 지기(志氣)는 혹시라도 쇠약하여질 때가 없지마는, 혈기(血氣)에 이르러서는 중년(中年)과 만년(晩年)에 따라 쇠약하고 왕성함이 진실로 서로 같지 않습니다. 쇠약하여지는 시기를 당하여서는 조양(調養)의 방법을 다하여 타고난 기질의 후한 것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이것이 바로 천지(天地)의 무강(無彊)함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지금 성상의 수(壽)는 이미 높았고, 천안(天顔)도 옛날과 다릅니다. 이는 바로 구중 궁궐에 단정히 팔짱을 끼고 앉아서 타고난 한 기운을 아끼어 자신의 밝고 넓은 본원(本原)으로 하여금 심수(深邃)한 가운데에서 활기차게 움직일 수가 있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더욱 분발(奮發)하기를 생각하고 마음을 갑절이나 수고롭게 하여, 다만 쇠약하여지지 않는 것이 늘 존재한다고 믿으며 혹시라도 쇠약하여져서 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둥을 자주 하여 더러는 추위와 더위도 피하지 않으며, 서무(庶務)를 몸소 살피어 거의 아침저녁에도 겨를이 없습니다. 하찮은 일로서 백집사(百執事)에게 맡겨도 될 만한 것까지도 또한 대부분 성상의 생각 속에 간직하여 충화 정밀(冲和靜密)한 기상을 손상하고 있습니다. 성상께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즐겁고 피로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진실로 알기는 하지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찌 허물 될 염려가 없지 않겠습니까? 무릇 천하의 일은 지나치게 되면 중도를 잃게 되고 중도를 잃으면 화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건곤(乾坤)의 간이(簡易)한 일을 체득하시고 목청(穆淸)의 평화스럽고 안정된 효험을 거두시어 신민(臣民)의 소망을 위로하여야 합니다.
간관(諫官)은 임금이 귀와 눈을 맡긴 자입니다. 임금은 반드시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고 장려하고 권하여서 차라리 그들의 말이 혹 과격할지언정 구차히 뜻에 맞게 하는 사람은 취하지 말 것이며, 그 사실이 혹 어긋날 수 있을지언정 그 엄호(掩護)하는 것을 허락지 말아야 합니다. 혹 미치고 망령되어서 말을 가려하지 못하는 자가 있더라도 또한 반드시 관대히 용서하여 주어서 이 직책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임금이 좋아하는 바가 진언(盡言)하는 데 있고 진언하지 못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린 연후에라야, 곧고 바른 말을 하는 기풍을 볼 수 있고 어물거리는 풍습이 사라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직 우리 성상께서는 총명과 예지가 백왕(百王)보다 훨씬 뛰어나서, 계획을 세우고 버림에 있어서 걸핏하면 전성(前聖)들을 끌어대어 오히려 사방을 살피는 총명이 혹시라도 두루 미치지 못하고 한가지의 조그마한 일도 혹시라도 막혀 가려질까 두려워하여, 때때로 구언(求言)하는 하교(下敎)를 내려 일찍이 싫어하는 얼굴빛으로 거절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신하들은 각기 진발(振發)하기를 생각하고 다투어 풍절(風節)을 유지하여, 곧고 바른 의논이 날마다 임금[黈纊]의 앞에 개진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삼가 보건대 근자에는 언로(言路)가 통하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나날이 심하여지고 있습니다. 규피(規避)하려는 단서로 기이한 기회를 삼고, 여러 사람과 같이 떼 지어 나가려는 계획을 결국 양책(良策)으로 삼습니다. 전례에 따라 부름에 응하나 다만 도로에서 호창(呼唱)을 행하고, 수행(隨行)하여 등연(登筵)하여서는 고지(古紙)만을 전하고 물러 나오는 데 불과합니다. 임금[乘輿]에 대한 말은 이미 가망이 없고 한 명관(名官)의 논핵이나 한 수령(守令)의 논박도 또한 전연 들을 수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말할 만한 것이 없어 그렇겠습니까? 아니면 할 말이 있어도 우선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겠습니까? 또한 진면(陳勉)하는 글과 논사(論事)하는 말이 조금이라도 성심(聖心)에 들지 않는다거나 그 가운데 혹시라도 약간이나마 분명하고 솔직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협잡(挾雜)하는 죄를 입을까 두려워하고, 듣고 본 것에 빙거(憑據)하려고 하면 남의 사주(使嗾)를 받은 혐의를 입을까 염려되어, 기개가 높은 자는 이것 때문에 기가 꺾이고 의지가 약한 자는 이로 말미암아 겁을 내니, 대각(臺閣)의 체통이 중(重)하여지지 못하고 대각의 자리에서 말하는 이가 없으면, 누가 능히 임금의 실수를 보충하여 주고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켜 주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길을 열어 주기에 힘쓰시어 진언(盡言)하는 기풍을 이루어야 합니다. 태학(太學)은 수선 지지(首善之地)로서 우문(右文)의 정치를 하는 데에 바탕이 되는 곳입니다. 옛날의 규례는 점점 무너지고 선비들의 추세는 더욱 낮아져서 삼선(三善)058) 을 보고 느껴야 할 자리가 문득 경알(傾軋)하는 장소가 되었고, 육예(六藝)059) 를 익혀야 할 곳에서 그것을 함양(涵養)하는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유식자(有識者)의 한탄이 절실하기는 하지마는, 조정(朝廷)에서 이를 북돋우는 도리에 있어서는 널리 용서함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도로의 떠도는 이야기를 들으니, 지난해에 유생(儒生)들이 부예(府隷)로부터 끌려 나가기까지 하였고, 지난 겨울에는 많은 선비들이 또 모야(暮夜)에 분주히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유생(儒生)에게 진실로 죄줄 만한 단서가 있다면 응당 시행하여야 될 벌칙이 있을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사기(士氣)를 애양(愛養)하는 성덕으로써 바로 이와 같은 지나친 거조를 하셨으니, 가령 유생들이야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태학의 중요성에 대하여서는 어찌 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나라를 편안하게 할 미덕을 생각하시어 더욱 배양(培養)하는 교화를 힘쓰소서."
하니, 임금이 가져다가 보고 전교하기를,
"이는 근래 소장(疏章) 중에 가장 눈여겨보게끔 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상하다고 포장(褒奬)하였다. 고유는 영남 사람인데, 19세에 반제(泮製)060) 에 장원을 하여 문장으로 이름난 자이다.
정언 홍윤(洪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기읍(畿邑)의 조곡(糶穀)061) 에 있어서 많은 곳의 것을 덜어다가 적은 곳으로 옮기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는 성상(聖上)께서 은혜를 균등하게 베푸시려는 의도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기읍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타도(他道)일지라도 곡식이 적으면 종자와 양식을 골고루 펴 줄 수가 없고 곡식이 없으면 이어 대줄 방법이 없습니다. 남는 것이나 부족한 것이 모두 민해(民害)가 되기 때문에 부자(夫子)께서 이른바 고르지 못한 것을 근심한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신(臣)은 생각건대 삼남(三南)도 아울러 백성과 호수(戶數)를 헤아려 조적(糶糴)을 균평하게 하고, 원회곡(元會穀)062) 의 정봉(停捧)을 엄금하며, 산군(山郡)의 저적(儲積)을 허락지 말아서 손익(損益)을 균평하게 하는 정치를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국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석강(夕講)에서 《시전(詩傳)》을 필강(畢講)한 뒤의 소서(小序)를 쓰게 하고, 임어(臨御)한 뒤에 돌려가며 진강(進講)한 책명(冊名)과 연조(年條)를 순서대로 쓰라고 명하였는데, 또한 장차 《서경》을 계강(繼講)하려는 뜻에서였다. 대개 내년 3월은 곧 성상께서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배운 지 주갑(周甲)이 되어, 성심(聖心)에 감흥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2월 12일 무자
임금이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를 소견(召見)하였다. 도제조 홍봉한(洪鳳漢)이 선묘조(宣廟朝)의 상신(相臣) 이양원(李陽元)의 증시(贈諡)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이어서 시호를 내리는 날에 사제(賜祭)하라고 명하였다. 또 야사(野史)에 기록한 바 구종직(丘從直)의 일을 추념(追念)하여 그 자손이 살고 있는지의 여부(與否)를 물어 소문을 듣는 대로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2월 13일 기축
유신을 불러 《심감(心鑑)》을 강하였다.
2월 14일 경인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안평 대군(安平大君)을 복작(復爵)시킨 것은 옛날을 우러러 몸받은 것이다. 복작을 한 뒤에는 바로 부조위(不祧位)063) 가 되는 것이니, 어찌 궐사(闕祀)를 할 수가 있겠는가? 아! 안평 대군과 금성 대군(錦城大君)은 바로 동기(同氣)인데, 지금 금성 대군에게는 혈손(血孫)으로서 봉사(奉祀)하는 자가 있으니, 안평 대군과 함께 제사지내도록 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이담(李潭)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경상도 대구부(大丘府)의 여인이 한꺼번에 아들 세 쌍둥이를 낳았다.
2월 18일 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경기 감영(京畿監營)에는 수하(手下)의 친병(親兵)이 없는데다가 또한 전배(前排)가 없어서 위급한 지경을 당하여도 믿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감사 이경호(李景祜)의 연청(筵請)으로 인하여 각읍(各邑)에 산재(散在)한 기수보(旗手保)를 순아병(巡牙兵) 5초(哨)와 바꾸어 단속하여 대열(隊列)을 편성시켰다가 무사(無事)할 때에는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고 유사시(有事時)에는 그들의 힘을 빌리게 하였다. 임금이 입시(入侍)한 여러 비국 당상에게 물었는데, 모두 이론(異論)이 없으므로 드디어 윤허하였다.
헌부 【대사헌 조영진(趙榮進)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수문장(守門將)이 말사(末仕)를 도모(圖謀)하여 다투니, 입직(入直)한 혼졸(閽卒)이 위력(威力)에 눌려 금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그 수문장을 조사하여 도태(淘汰)시키고, 그날 신칙시키지 못한 기조(騎曹)064) 의 입직 당랑(入直堂郞)도 파직하며, 종신(宗臣) 중에 현방(懸房)065) 터를 강제로 사서, 텃세[垈稅]를 남봉(濫捧)한 자도 조사해 내서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홍낙순(洪樂純)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2월 19일 을미
임금이 광주 부윤(廣州府尹) 윤득우(尹得雨)에게 명하여 옛날 유민도(流民圖)를 모방하여 본부(本府)의 진민(賑民)하는 그림을 그려 올리고, 아울러 서장대(西將臺)의 지형을 그려 올리게 하였다.
2월 20일 병신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당하 문신(堂下文臣)과 당상 무신(堂上武臣)의 활쏘기를 시험하고 차등을 두어 상을 나누어 주었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아뢴 바로 인하여 영흥 부사(永興府使) 박상덕(朴相德)을 왕래하면서 〈어버이를〉 성근(省覲)하도록 특별히 윤허하였다. 박상덕에게는 노모(老母)가 있었는데, 전에 전당(銓堂)으로 있다가 출보(黜補)되었었다. 출보한 자에게는 법에 감히 말미를 받아 성근할 수가 없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윤허하고, 이어서 지금부터는 비록 출보한 자라도 정리(情理)가 절급(切急)할 것 같으면 와서 뵙도록 하여 효도로써 다스리는 정치를 돈독히 하는 것을 길이 법식을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2월 21일 정유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서 주강과 석강을 행하고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친히 융무당 감구 소지(隆武堂感舊小識)를 짓고 《홍무정운(洪武正韻)》을 가지고 써서 올리게 하여, 융무당에 새겨 걸라고 명하였다. 효묘조(孝廟朝)께서 일찍이 이 당에 임어(臨御)하여 안으로 정사를 닦고 밖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는 계책을 강론하였기 때문에 성심(聖心)에 감동이 일어났는데, 대개 이는 풍천(風泉)066) 을 생각하는 마음에서였다.
2월 22일 무술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황해 감사 조영순(趙榮順)의 장청(狀請)으로 인하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복주(覆奏)하게 하고 본도(本道)에 관향 곡모(管餉穀耗)067) 7천 곡(斛)을 획급(劃給)하도록 허락하여, 본영(本營)에서 빚을 주어 이자를 불리는 폐단을 없애게 하였으며, 관서(關西)의 좁쌀[小米] 5천 석과 무명 50동(同)을 송도(松都)에 획급하여 지칙(支勅)하는 경비에 보충하게 하였다. 당시 영번(營藩)이 잔폐(殘弊)하여 장청(狀請)하는 자가 계속되어 주는 대로 없어져서 다만 재물만 허비하게 하는 결과가 되니 식자(識者)들이 한탄하였다.
특지(特旨)를 내려 윤득양(尹得養)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이인배(李仁培)를 예조 참의(禮曺參議)로 삼았다. 이 두 사람은 전에 양사 장관(兩司長官)으로 외읍(外邑)에 보직(補職)되었었는데, 이에 이르러 모두 소환하라고 명한 것이다.
2월 24일 경자
임금이 봄비가 자주 내림으로써 〈여름의〉 한재(旱災)가 있을까 염려하여, 비국(備局)에 명하여 미리 제방(堤防)을 수리하고 물을 저장하도록 신칙하였다.
2월 25일 신축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고, 또 자정전(資政殿)에서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조참이 비록 큰 조회(朝會)이나 다만 세수(歲首)에만 행할 필요는 없다. 한 달에 세 번은 이미 정식(定式)으로 되어 있다. 내가 이미 망팔(望八)에 복정(復政)하여 스스로 근면하지 않으면 뒷날 아첨하는 신하가 반드시 날씨의 춥고 더움을 핑계로 공공연히 탈품(頉稟)068) 할 것이니, 나의 염려가 여기에 있다. 지금부터는 아무리 한겨울·한더위라도 정사를 보는 데 있어서 번품(煩稟)하지 말 것을 정원 고사(政院故事)에 실어라. 또 옛날 내가 20세 때에 시위(侍衛)로서 이 숭정문의 조참에 참여하였는데, 그때는 비록 충의위(忠義衛)라도 소회(所懷)가 있으면 문득 진달할 수가 있었다. 근래에는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있는 것이 시체(時體)가 되었으니 매우 개탄스럽다.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해읍(海邑)의 조운(漕運)하는 데 있어서의 취재(臭載)069) 의 폐단과 또 제도(諸道)의 묵밭을 경작하도록 권유하는 방도를 미리 신칙하여, 실효(實效)가 있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호조 판서 김상철(金尙喆)이 아뢴 때문이었다.
헌부 【대사헌 조영진(趙榮進)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과장(科場)에서 주시(主試)하는 사람은 반드시 문임(文任)으로서 시임(時任)과 증경자(曾經者)로 의차(擬差)하여야 하는 것은, 법의(法意)가 매우 중한데, 근래에는 혹시 문임을 쓰지 않기도 하였으니, 이는 특별히 고시(考試)를 엄히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회시(會試)가 가까이 있으니,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신칙(申飭)하여 비의(備擬)070) 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미(李瀰)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신사운(申思運)을 헌납(獻納)으로, 이성수(李性遂)를 정언(正言)으로, 김노진(金魯鎭)을 부교리(副校理)로, 윤승렬(尹承烈)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헌납 서명선(徐命善)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원(政院)에서는 대간(臺諫)이 궐계(闕啓)하였다고 하여 문득 문비(問備)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옛날의 규례가 아닙니다. 대각(臺閣)의 책무는 진실로 말을 하는 데 있지마는, 말하는 데도 역시 때가 있는 것입니다. 곧 그것을 드물게 하든지 자주 하든지 하는 기회는 오직 말하는 자에게 달렸습니다. 여러 날 동안 궐계하였다가 비로소 청패(請牌)071) 하였다고 하여 일찍이 찰추(察推)072) 한 일이 없었고, 백료(百僚)로 하여금 독려하여 대각(臺閣)의 뜻을 기다려 함께 행하여도 어긋나지 않았는데, 요즈음은 그러하지 않아서 원리(院吏)가 종일 동안 추함(推緘)을 독촉하고 늘 계품(啓稟)을 번거롭게 하게 하니, 사체(事體)가 한갓 자질구레할 뿐만이 아니라, 비록 말을 할 만한 일이 있더라도 어찌 날마다 궤짝을 채우겠습니까? 결코 이런 이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이 형식만 보충하는 데 가까우면 실효(實效)에 손해가 됩니다. 신은 생각건대 구규(舊規)를 참고하여 다시 새로운 법을 정하시고 침착하고 여유있는 뜻으로 말을 인도하는 즈음에 흘러서 행하게 한다면, 진실로 말을 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말한 것은 반드시 행할 수가 있어서 거의 성세(盛世)를 다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규면(規免)하는 데에 뜻을 두어 억지로 소회(所懷)를 끌어다가 붙인 것이라 하여 성내어 꾸짖고 드디어 그 관직을 삭탈하게 하였다.
2월 26일 임인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각사(各司)의 낭관(郞官)이 모두 그 직무의 맡고 있는 바의 일을 가지고 소회(所會)를 진달하고 물러갔다. 임금이 이르기를,
"어제의 조참에는 비록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으나, 오늘의 상참에는 아뢰는 바가 없지 않았다. 그 말들이 반드시 쓸 만한 것은 아니나, 역시 칙려(飭勵)한 효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였다.
헌부 【대사헌 조영진(趙榮進)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해영(海營)073) 의 전곡(錢穀)에 있어서 부정(不正)한 명색(名色)은 이미 바로잡았지마는, 이 뒤로 만일 다시 범한 자가 있으면 도신(道臣)이 의당 엄중히 처벌하여야 합니다. 삼남(三南)의 저치미(儲置米)는 허류(虛留)074) 한 폐단이 없지 않으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낭청(郞廳)을 보내어 적간(摘奸)하게 하고 만일 범한 자가 있으면 율(律)에 따라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대사성에게 반유(泮儒)075) 를 거느리고 들어오라고 명하여, 각각 그들이 강(講)했던 바를 강하게 하여 그 강을 잘한 자에게는 상으로 《중용(中庸)》과 《대학》을 각각 한 부(部)씩 주고 그 나머지는 지필(紙筆)을 상주었다.
2월 28일 갑진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의 춘향제(春享祭)에 쓸 향을 숭정문(崇政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조영진(趙榮進)이 소론(疏論)하기를,
"남원부(南原府)에서 지부(地府)076) 에 실려 있는 바의 화전(火田)을 전 사신(使臣)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에게 상사 전결(賞賜田結)로서 함부로 획급(劃給)하여, 세가(勢家)에서 징세(徵稅)하는 폐단을 끼치는 단서가 되었으니, 해당 부사(府使)를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당시 생원·진사의 복시(覆試)를 시행하였는데, 일소(一所)077) 의 상시관(上試官) 홍계희(洪啓禧)가 시제(試題)로 낸 것이 곧 명(明)나라가 망한 뒤의 일이었다. 승지 정운유(鄭運維)가 청인(淸人)이 휘(諱)하는 것에 해당된다고 하고 조종문(朝宗門) 명(銘)의 예에 따라 그 시초(試草)를 세초(洗草)078) 하기를 연청(筵請)하니, 임금이 비록 허락하였으나, 사론(士論)이 비웃었다.
2월 29일 을사
밤에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태묘(太廟) 삭제(朔祭)에 쓸 향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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