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5권, 영조 41년 1765년 윤2월

싸라리리 2025. 10. 1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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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2월 1일 병오

생원·진사의 복시(覆試)를 출방(出榜)079)  하였다. 임금이 시관(試官)에게 명하여 참방 시권(參榜試券)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봉함을〉 뜯어보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2월 2일 정미

청연 군주(淸衍郡主)를 김두성(金斗性)과 정혼(定婚)시키고 광은 부위(光恩副尉)로 호(號)하였는데, 김두성은 곧 참의(參議) 김상익(金相翊)의 아들이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생원·진사의 입격인(入格人)을 소견하였다. 당시 정후겸(鄭厚謙)은 1소(一所)에 응시하여 양장(兩場)080)  을 모두 합격하였는데, 정후겸은 곧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양자(養子)이었다.

 

이복원(李福源)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교재(金敎材)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윤2월 3일 무신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헌부 【장령 남운로(南雲老)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괴원(槐院)081)  과 국자(國子)082)   참하 문신(參下文臣)이 10년 동안 적체(積滯)되어 있으나 일명(一命)083)  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능의 별검(別檢) 10과(窠)084)  를 더 만들어서 소통(疏通)시키는 자리가 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 일은 관제(官制)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대신(臺臣)이 청할 만한 바가 아니라고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이지승(李祉承)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들은즉, 하늘은 사사로이 덮어 주지 않고 땅은 사사로이 실려 주지 않으며 일월(日月)은 사사로이 비추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왕자(王者)는 공(公)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다만 생각하면 사람의 한 마음은 지극히 위태롭고 은미하여, 잠시만 치우치게 되면 곧 사사로운 데로 흐르고 조금만 만족하게 되면 문득 교만하여집니다. 하물며 인주(人主)는 지존(至尊)의 위치에 있고 편안한 지경에 있어서 생각이 방자하기 쉬우니, 백공(百工)085)  이 높이어받들게 되면 넘치는 것에 대한 경계를 염려하여야 하고 겸허한 덕을 마땅히 숭상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사의(私意)를 이겨 버리고 천리(天理)가 유행(流行)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정사에서 나온 것은 넓고 커서 두루 펴지고, 말로써 나타난 것은 온화하고 겸손하여져서 친소 원근(親疎遠近)이 모두 박애(博愛)의 테두리 안에 감싸지고, 충직한 말이나 망령된 말이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포용이 될 것입니다. 그런즉 거조(擧措)가 인심을 크게 복종시키고 고택(膏澤)086)  이 생민(生民)에게 골고루 미칠 것이니, 원컨대 성상(聖上)께서는 유의(留意)하시어 편견(偏見)을 주장하지 마시고 스스로 만족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시며, 지극히 겸손한 덕을 밝히시어 자손에게 끼치는 교훈이 되도록 하소서."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윤2월 4일 기유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전 교리(校理) 이명환(李明煥)과 전 정언 윤시동(尹蓍東)에게 직첩(職牒)을 주라고 명하였다. 이명환과 윤 시동은 모두 언사(言事)로 죄를 입었는데, 이명환은 이미 죽은 지가 수년(數年)이 되었고, 윤시동은 조용(調用)하지 않은 지가 거의 10년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모두 거두어 서용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 감사 심이지(沈履之)가 임피현(臨陂縣)의 전정(田政)이 문란한 것으로 장계(狀啓)를 올려서 개량(改量)087)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윤2월 5일 경술

임금이 주강을 행하여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2월 6일 신해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반유(泮儒)의 원점 전강(圓點殿講)을 친히 시험보여 수석을 차지한 조몽렴(趙夢濂)에게는 직부 전시(直赴殿試)088)  하게 하였으며, 나머지 사람에게는 모두 급분(給分)089)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2월 8일 계축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생원·진사의 창방(唱榜)을 친림(親臨)하여 보았다.

 

윤2월 9일 갑인

친히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이어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남교(南郊)에 동가(動駕)할 것을 명하여 춘경(春耕)을 살피고, 기백(畿伯)으로 하여금 농민에게 종량(種糧)을 백급(白給)하도록 하였다. 입직 옥당관(入直玉堂官) 구상(具庠)과 김재순(金載順)을 동교(東郊)와 서교(西郊)에 나누어 보내어 경작과 파종(播種)의 상황을 살피게 하고 저녁에 환궁하였다.

 

윤2월 11일 병진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2월 12일 정사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또 원점 유생(圓點儒生)에게 먼저 강(講)하고 뒤에 제술(製述)하는 시험을 친히 보여 수석을 차지한 권평(權坪)에게는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반유(泮儒) 이규응(李奎應)은 참방(參榜)을 하였는데 당시의 나이 70세이므로, 전부(銓部)에 명하여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건명문(建明門)에 친림(親臨)하여 입직(入直)한 무신들의 활쏘는 것을 보았다.

 

윤2월 13일 무오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이어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왕세손(王世孫)이 시좌(侍坐)하였다. ‘미자지명(微子之命)’을 강하게 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조손(祖孫)이 《서경(書經)》을 같이 강하는 것도 역시 드문 일이다."
하고, 이어서 문의(文義)를 하문(下問)하기를,
"‘번왕실(蕃王室)’의 ‘번(蕃)’ 자는 무슨 뜻이냐?"
하니, 세손이 말하기를,
"사람 사는 집에 울타리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네가 이미 울창주(鬱鬯酒)를 주관하게 되었으니, 무엇으로 조선(朝鮮)을 번병(蕃屛)하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덕(德)을 숭상하고 어진 이를 법 받으면 거의 우리 나라를 번병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 사람이 덕을 누리면 자손들도 역시 대대로 그 덕을 누리지 않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자손이 능히 잘 이어받지 못하면, 어찌 그 덕을 누리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잘하였다고 칭찬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여오(旅獒)090)  는 하나의 미물(微物)인데도 소공(召公)091)  이 경계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대순(大舜) 역시 대성(大聖)인데도 우(禹)가 단주(丹朱)092)  와 같이 〈오만하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니, 신하된 도리는 어찌 임금이 성인이라고 하여 더욱 힘쓰도록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문의(文義)는 이미 세손과 함께 서로 어려운 점을 물어 보았으니, 강관(講官)은 다시 진달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남태저(南泰著)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최태형(崔台衡)을 사간(司諫)으로, 박지원(朴志源)을 장령(掌令)으로, 안겸제(安兼濟)를 지평(持平)으로, 이재간(李在簡)을 헌납(獻納)으로, 김노순(金魯淳)·김상집(金尙集)을 정언(正言)으로, 정실(鄭實)을 부제학(副提學)으로, 황인검(黃仁儉)을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삼았다.

 

윤2월 14일 기미

이담(李潭)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윤시동(尹蓍東)을 부교리(副校理)로, 심관(沈鑧)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윤2월 15일 경신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서 전알례(展謁禮)를 행하였는데, 몸소 제사지내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이날은 곧 한식(寒食)이었으니, 왕세손도 역시 따라갔다. 임금이 재실(齋室)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태묘(太廟)의 재실은 능화(綾花)로 바르는 것이 아닌데 지금 실벽(室壁)에 바른 것은 바로 백릉화(白綾花)이니, 어찌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궁실(宮室)을 낮게 하는 뜻이겠느냐? 지금으로부터는 초주지(草注紙)093)  로 대신하게 하라. 또한 능향(陵享)에 고기를 쓰지 않고 소찬(素饌)을 쓰는 것은 국초(國初)에 고(故) 상신(相臣) 황희(黃喜)가 만세(萬世)를 염려한 것이다. 전궁(殿宮)이 제궁(諸宮)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휘령전(徽寧殿)의 중삭제(仲朔祭) 및 5향(五享) 외의 명절(名節) 삭망(朔望)에는 비록 친히 제사지내더라도 육찬(肉饌)을 쓰지 말도록 하라."
하고, 태상시(太常寺)094)  에 명하여 법식을 삼게 하였다.

 

윤2월 16일 신유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으로부터 환궁(還宮)하였는데, 지나는 길에 저경궁(儲慶宮)을 배알하였다.

 

당시에 8도의 도신(道臣)과 수령들은 민은시(民隱詩)095)  를 지어 바치니, 임금이 장황(粧潢)096)  하여 올리라 명하고, 친히 소서(小序)를 지어 첩(帖)의 첫머리에 실었는데, 곧 가색(稼穡)을 중히 여기고 영명(永命)을 기원하는 뜻이었다.

 

윤2월 17일 임술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당상 무신(堂上武臣)의 활 쏘는 것을 보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서 문신(文臣)의 한학 전강(漢學殿講)을 친림(親臨)하여 시험보이고, 이어서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원경렴(元景濂)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비로소 호조 판서에게 장생전(長生殿)097)   제조(提調)를 겸임하게 하였다. 장생전은 전례에는 영의정이 도제조가 되고 공조 판서와 예조 참판이 제조가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동원(東園)의 사체(事體)가 존중(尊重)한데, 아당(亞堂)098)  을 제조로 삼는 것은 불가하니 예조 판서와 호조 판서가 함께 구관(句管)하게 하고, 호조 낭관(戶曹郞官)도 역시 윤직(輪直)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윤2월 20일 을축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으며, 또 강경(講經)의 입격인(入格人)을 소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2월 21일 병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과 석강을 행하고, 이어서 당하 무신강(堂下武臣講)을 친림하여 시험보였다.

 

이성규(李聖圭)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윤2월 22일 정묘

임금이 건명문에 나아가서 권무인(勸武人)과 서북 부료 군관(西北付料軍官)의 활쏘기를 시험보이고, 또 문신(文臣)에게 제술(製述)을 시험보였다.

 

정창순(鄭昌順)을 지평(持平)으로, 변득양(邊得讓)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윤2월 23일 무진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탕서(湯誓)099)  의 ‘우리에게 농사를 버리게 한다[舍我穡事]’는 장(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정벌(征伐)을 하는 때에도 백성은 오히려 ‘우리에게 농사를 버리게 한다’는 것으로 원망을 하는데, 하물며 농시(農時)에 〈다른 일로〉 백성을 부린다면 백성을 때에 알맞게 부린다는 뜻에 어떠하겠는가? 그것을 여러 도(道)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정창순(鄭昌順)을 김천역(金泉驛)으로 귀양보내었다. 정창순은 대각(臺閣)으로서 김천(金泉)에 출보(出補)되었다가 겨우 내직으로 의망을 받았는데, 또 소명(召命)을 어기고 응하지 않았으므로,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임금이 밤에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서 전 도정(都正) 심정최(沈廷最)와 전 첨정(僉正) 윤희복(尹熙復)을 친문(親問)하였는데, 양가(兩家)의 송산(訟山) 때문이었다. 애초에 고려 시중(侍中) 윤관(尹瓘)의 묘가 파주(坡州)에 있었는데, 실전(失傳)이 되었었다. 고 상신(相臣) 심지원(沈之源)의 묘 밑에 큰 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윤관의 묘라고 유전(流傳)해 오던 것을 심씨네가 압장(壓葬)한 것이었다. 윤씨의 후손이 묘갈(墓碣) 두어 쪽을 증거로 찾아서 심씨의 무덤을 이장(移葬)하여 달라고 소청(疏請)하였는데, 심씨네는 역시 윤씨네의 외손[外裔]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은 두 집안이 각자 자기네의 무덤을 보호하고 서로 다투지 말라고 두 집안을 달래어 모두 진정시켰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윤씨의 후손이 모여서 심씨의 무덤 앞 계체(階砌)를 허물자 심씨네가 또 여러 사람을 이끌고 와서 두들겨 쫓아내었다. 이에 서로 잇따라 격고(擊鼓)하여 아뢰니, 임금이 ‘윤희복(尹熙復)·심정최(沈廷最)는 세가(世家)의 대족(大族)으로서 조정의 덕의(德意)를 몸받지 못하고 서로 다투었으며 번거롭게 잇따라 호소하였으니, 엄하게 처치하지 않으면 기강을 무너지게 하고 풍화(風化)를 위태롭게 하는 일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고 하고, 드디어 친문(親問)하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입직한 옥당관(玉堂官) 김노진(金魯鎭) 등은 일이 사송(私訟)에 관계되므로 유사(有司)에게 회부시키는 것이 마땅하고, 깊은 밤중에 임문(臨門)하여 국체(國體)를 손상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것으로 구대(求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먼저 체직시킨 뒤에 형리(刑吏)에게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밤을 새워 두 사람을 친문(親問)하여 준차(準次)의 형을 가한 뒤 멀리 귀양보내었다. 그런데 심정최와 윤희복은 나이가 각기 70여 세였으므로, 윤희복은 형을 받고 며칠이 되지 않아서 〈귀양가는〉 도중에 죽었다. 뒤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주청에 의하여 그의 직첩(職牒)을 돌려주게 하였고 옥당관을 체직하라는 명령도 거두어 들였다. 입시 대관(入侍臺官) 이보관(李普觀)과 윤승렬(尹承烈) 등의 주어(奏語)에 좌우(左右)로 두루 감싸준 의도가 있다고 하여 모두 파직시켰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가장 미워하는 것은 허풍치고 과장하는 것인데, 심정최(沈廷最)·윤희복(尹熙復)의 일은 역시 과장되어 그러한 것이다. 비록 이미 엄히 처치하였으나, 무릇 나의 신하들은 마땅히 이로써 경계하고 각각 조심할 것을 생각하라. 이는 바로 주 문공(朱文公)이 이른바 ‘이는 비록 한 가지의 일이지마는 수단(數端)을 경계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윤2월 25일 경오

서명신(徐命臣)을 대사헌(大司憲)으로, 홍낙순(洪樂純)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기덕(李基德)을 집의(執義)로, 유수(柳脩)를 사간(司諫)으로, 김교재(金敎材)를 장령(掌令)으로, 임희증(任希曾)·강지환(姜趾煥)을 지평(持平)으로, 이적보(李迪輔)를 헌납(獻納)으로, 홍경안(洪景顔)을 정언(正言)으로, 정이환(鄭履煥)을 부응교(副應敎)로, 홍수보(洪秀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홍계희(洪啓禧)를 판의금(判義禁)으로, 김노진(金魯鎭)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2월 26일 신미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외(京外)의 동당(東堂)100)   초시(初試)와 회시(會試)를 설장(設場)하는 데 있어서 날을 거르지 말고 연일(連日) 시취(試取)를 하여 응판(應辦)하는 폐단을 덜게 하라고 명하였다.

 

윤2월 27일 임신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밤에 황단(皇壇)101)   대제(大祭)에 나아가서 서계(誓戒)102)  를 받았다.

 

윤2월 28일 계유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변득양(邊得讓)을 헌납(獻納)으로, 서명선(徐命善)·이성원(李性源)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진규(李晉圭)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윤2월 29일 갑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서 유생들의 삼일제(三日製)103)  에 친림하여 서울과 시골에서 수석을 차지한 이명훈(李命勳)과 최명린(崔命麟) 두 사람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내려 주었다.

 

윤2월 30일 을해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대보단(大報壇)에 행할 의식을 익혔다.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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