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무인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알례(展謁禮)를 행하였다. 이어서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친제(親祭)를 행하였다.
3월 4일 기묘
새벽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황단제(皇壇祭)를 행하고 왕세손이 아헌(亞獻)을 하였다.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지나는 길에 효장묘(孝章廟)에 들렸다.
3월 5일 경진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을유년104) 에 설과(設科)한 뒤로 합하여 7식년(式年)이 되는데, 내가 을유년을 두 번 보았으니 역시 이상한 일이다."
하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아조가 향국(享國)한 지 3백 70여 년이 되고, 선조(先朝)105) 에서 당저(當宁)106) 까지 보위(寶位)를 누리신 해를 합하면 92년이 되는데, 이는 삼대(三代)107) 이후에 일찍이 없던 바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특진관(特進官) 정찬술(鄭纘述)에게 천안(天顔)108) 을 우러러 보라고 명하였다. 정찬술이 말하기를,
"천안이 옛날보다 낫습니다."
하니, 임금이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부액(扶掖)하여 나가도록 명하였다. 정찬술은 숙장(宿將)109) 으로서 병들어 들어앉은 지 거의 10년이 되었는데, 당시에 나이 또한 8질(八耋)110) 이었다.
전라도 진도군(珍島郡)에 송전(松田)이 있는데, 거민(居民)이 잘못 방화(放火)하여 태웠다고 수사(水使) 이홍(李泓)이 치계(馳啓)하여 아뢰었다. 임금이 수범(首犯) 오광일(吳匡一) 등 3인을 본도(本道)로 하여금 효시(梟示)하여 백성에게 경각심을 주도록 하라고 명하니, 교리 이성원(李性源)이 말하기를,
"사람의 목숨은 지중한 것인데, 수신(帥臣)111) 으로 하여금 결안(結案)하게 한다면, 후폐(後弊)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도신(道臣)112) 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법을 적용하게 하는 것이 신중하게 처리하는 도리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대개 송전은 불에 탄 일이 없는데 해당 수사가 잘못 듣고 취계(驟啓)한 것으로서, 자칫하면 인명(人命)을 억울하게 죽일 뻔하였다는 것이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형조 판서 황인검(黃仁儉)이 아뢰기를,
"운봉수(雲峰守) 이심(李杺)이 추노(推奴)113) 때문에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아 양녀(良女) 2인에게 사형(私刑)을 가하여 목숨을 빼앗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니, 임금이 왕부(王府)114) 에 명하여 조사하게 하고, 사실을 확인한 뒤에 홍원(洪原)으로 유배시켰다.
3월 6일 신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서 문무 전시(文武殿試)에 친림(親臨)하였다. 문과(文科)에서 서호수(徐浩修) 등 53인을 뽑고, 무과(武科)에서 김홍일(金弘逸) 등 2백 28인을 뽑았다. 제주(濟州)에서 직부(直赴)한 72세의 김형중(金衡重)에게는 단부(單付)115) 로 전적(典籍)에 임명하도록 명하고, 나이 50세가 된 자에게는 승륙(陞六)시키도록 하였다. 이어서 운각(芸閣)116) 에 명하여 방목(榜目)을 간진(刊進)하라 하였는데, 대개 지난 을유년117) 을 추모(追慕)하는 성의(聖意)에서였다.
이헌경(李獻慶)을 사간(司諫)으로, 김재록(金載祿)을 지평(持平)으로, 유의양(柳義養)을 정언(正言)으로, 윤급(尹汲)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3월 7일 임오
헌부 【장령 주형질(朱炯質)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천 찰방(魚川察訪) 진한보(陳漢輔)는 운각(芸閣)으로부터 함부로 부임하였으며, 덕원 부사(德源府使) 이상직(李尙直)은 외람되게 곽세(藿稅)118) 를 받았고, 정사에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많았으니, 청컨대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병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이 병으로써 면직되니, 특지로써 남태제(南泰齊)를 대신시켰다.
3월 8일 계미
임금이 소녕원(昭寧園)119) 의 기신(忌辰)에 쓸 향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친히 전하였다.
3월 9일 갑신
병조 판서 남태제(南泰齊)가 소명을 어기고 응하지 않으니, 임금이 그를 파직시키고 심수(沈鏽)로 대신하게 하였다.
민백흥(閔百興)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비로소 기사(耆社) 수직관(守直官)을 괴원(槐院)과 국자(國子) 참하(參下)에서 각각 1인씩을 뽑아 날마다 돌아가면서 직숙(直宿)하게 하고 사일(仕日)120) 을 계산하여 옮겨 주라고 명하였는데, 영수각(靈壽閣)에 어첩(御帖)을 봉안함으로써 사체(事體)가 존중(尊重)하기 때문이었다.
3월 10일 을유
임금이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어가(御駕)로 임하여 문무(文武) 방방(放榜)121) 을 행하고 방목(榜目)을 나누어 주었다. 또 태복(太僕)122) 에 명하여 신은(新恩)에게 말을 주어 동서로 나누어 수가(隨駕)하게 하고, 저녁에 환궁하였다. 고사(故事)에 즉일 창방(卽日唱榜)이 아니면 말을 주는 예가 없었는데, 지금의 일은 곧 특은(特恩)이었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서 친히 문무과(文武科)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비로소 전라도 청암역(靑巖驛)과 충청도 연원역(連原驛)의 두 찰방(察訪)을 6품(六品)의 자리로 승격시키어 문신 참상(文臣參上)을 소체(疏滯)하도록 하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홍봉한이 또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최흥원(崔興源)은 목릉(穆陵)123) 의 제우(際遇)를 받아 공로가 두드러지고, 청백리(淸白吏)로 피선(被選)되어, 고 상신 이준경(李浚慶)과 더불어 나란히 일컬었으니, 그의 청렴과 지조를 알 만합니다. 같은 시대의 명인(名人)·석사(碩士)들이 홀로 표방(標榜)에서 뛰어났다고 허여(許與)하였으니, 그가 조정에 선 본말(本末)이 또 그 공평한 점을 알 만합니다. 그런데 자손이 영체(零替)하여 지금에 와서 비로소 청시(請諡)를 하고자 하니, 마땅히 홍문관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는데, 뒤에 충정(忠貞)으로 사시(賜諡)하였다.
김선행(金善行)을 도승지(都承旨)로, 조엄(趙曮)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숙(趙)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육(李堉)을 사간(司諫)으로, 이성수(李性遂)를 장령(掌令)으로, 이창임(李昌任)·임일원(任一源)을 지평(持平)으로, 이성원(李性源)을 헌납으로, 이치중(李致中)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3월 13일 무자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김화진(金華鎭)을 대사간으로, 이진형(李鎭衡)을 장령(掌令)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3월 14일 기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근래에 신은(新恩)에게 주는 어사화(御賜花)가 전보다 좀 길어졌으니, 이도 역시 사치하는 풍조의 일단이다. 지금부터는 지난 을유년124) 에 내려 주던 어사화의 몸체와 양식을 따르도록 하여, 사치스러운 풍습을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기(京畿) 안성군(安城郡)에서 실화(失火)하여 민가(民家) 2백 60 호(戶)가 연소(延燒)되었으므로,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3월 15일 경인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3월 18일 계사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여 〈《서경(書經)》의〉 낙고(洛誥)를 강하였는데, 특진관(特進官)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낙고는 바로 무왕(武王)을 계술(繼述)한 글입니다, 금년은 곧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한양(漢陽)으로 환도(還都)한 해입니다. 임신년125) 에 비로소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기묘년126) 에 다시 송경(松京)으로 환도하였다가 을유년127) 에 또 한양으로 환도하였으니, 진실로 무왕이 낙읍(洛邑)을 다스리려 한 일과 앞뒤가 동일한 법도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이 해에 다시 이 도읍지로 옮겨 온 뜻을 따르시어 ‘무강유휼(無彊惟恤)’ 네 글자를 가지고 후손들에게 계술하는 계획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기이한 일이다. 승지로 하여금 을유년의 환도(還都)한 월일(月日)을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9일 갑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황조(皇朝)에 대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는데, 의종 황제(毅宗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3월 20일 을미
이득배(李得培)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서호수(徐浩修)를 정언(正言)으로, 이형규(李亨逵)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서명응(徐命膺)을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1일 병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역과(譯科)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을 불러들여서 그가 강(講)하였던 바를 외게 하고 번갈아 서로 맞대어 문답할 것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저들이 비록 역서(譯胥)이지마는, 뒷날 국가(國家)가 힘을 얻는 것은 반드시 이 무리들에게 있지 않다고 못할 것이다."
하였다.
3월 22일 정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무일편(無逸篇)을 강하였는데, 강관(講官) 서명선(徐命善)이 아뢰기를,
"한 편의 대의(大義)는 곧 무일(無逸)128) 인데, 무일은 수고(壽考)의 근본이고 수고는 무일의 효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경》의 무일편과 《시경》의 빈풍 7월장(豳風七月章)과는 서로 안팎이 된다. 그러나 나에게는 무일의 공적도 없으면서 수고(壽考)의 칭송을 받게 되니, 부끄럽다."
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한익모(韓翼謨)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망팔(望八)의 연세에도 근로(勤勞)하시어 마치 중종(中宗)129) 의 엄공 인외(嚴恭寅畏)한 것과 문왕(文王)의 휘유 의공(徽柔懿恭)한 것과 같이 하면서도 그 근본은 하나의 ‘경(敬)’ 자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더욱 힘쓰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 내가 거처하던 소와(小窩)에 ‘정일 집중(精一執中)’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걸었었는데, 이 역시 전수(傳授)의 심법(心法)이었다. 요순(堯舜)을 본받으려고 하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 지난 번에 보문각(寶文閣)에서 《서전(書傳)》의 하경(下經)으로 옛날 진강(進講)하던 것을 얻었는데, 추모(追慕)하는 마음이 매우 절실하였다. 지금 이 책으로 진강하게 되니, 이로 인하여 목판(木版)이 사치스럽지 않음과 지품(紙品)에 경비(經費)를 아낀 것을 볼 수 있으니, 이는 고금(古今)에 따라 사치함과 검소함이 같지 않은 바이다. 지금부터 진강하는 책자를 일체 이전의 양식(樣式)대로 하고 사치와 과대함을 일삼지 말게 하라."
하였다.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이장오(李章吾)가 상소(上疏)하여 무과(武科)의 폐단을 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식년(式年)은 곧 대비과(大比科)130) 인데, 급제자를 뽑는 것은 28인에 불과한 것은 정밀하게 선발하겠다는 법의(法意)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과(他科)에 있어서는 단기(單技)나 혹 양기(兩技)에 불과하고 규모도 지극히 허술하여 입격(入格)한 자가 너무 많으니, 과방(科榜)의 용잡(冗雜)함과 양정(良丁)의 감축(減縮)에 있어서 이미 그 폐단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출신(出身)131) 의 수는 점점 한정이 없는데 초사(初仕)한 자가 들어갈 자리는 한정이 있어서 골고루 거용할 수가 없으니, 답답해 하고 원통해 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한 형세입니다. 신(臣)은 인재를 널리 뽑음으로 인하여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이에 인재를 적체(積滯)시키어 도리어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면치 못하니, 차라리 과액(科額)의 수를 줄이기보다는 허다한 고폐(痼弊)를 없애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구제(舊制)를 변경시키기 어렵다고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에 이르러 문·무과(文武科)의 〈급제자의 수가〉 옛날보다 몇 갑절이나 되는데, 무과에 이르러서는 급제를 내려 주는 것이 너무 잦아서 거의 그냥 넘기는 해가 없으며, 창방(唱榜)이 지난 뒤에 어사화(御賜花)를 머리에 꽂고 홍패(紅牌)를 안은 채 가로(街路)를 도보로 걸어 다니는 자가 왕왕 있으니, 한갓 천은(天恩)을 설만(褻慢)하게 하고 앉아서 군액(軍額)만을 잃게 되었다. 그러니 이장오의 상소가 의견(意見)이 없다고 이르는 것은 불가하다."
【태백산사고본】 71책 105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9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역사-사학(史學)
[註 130] 대비과(大比科) : 선조(宣祖) 이후 3년에 한 번씩 실시된 과거. 선조 36년(1603) 대비과를 설행하여 이언영(李彦英) 등 33인을 뽑은 것이 시초였는데, 일종의 식년시(式年試)로 전시(殿試)와 같은 것이었음.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3년에 한 번씩 시험을 보이고 이를 대비지과(大比之科)라 하였는데, 지금은 자(子)·오(午)·묘(卯)·유(酉)가 드는 해에 설행하고 식년(式年)이라 이름하였다." 하였음.[註 131] 출신(出身) : 문·무과나 잡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출사하지 못한 사람.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래에 이르러 문·무과(文武科)의 〈급제자의 수가〉 옛날보다 몇 갑절이나 되는데, 무과에 이르러서는 급제를 내려 주는 것이 너무 잦아서 거의 그냥 넘기는 해가 없으며, 창방(唱榜)이 지난 뒤에 어사화(御賜花)를 머리에 꽂고 홍패(紅牌)를 안은 채 가로(街路)를 도보로 걸어 다니는 자가 왕왕 있으니, 한갓 천은(天恩)을 설만(褻慢)하게 하고 앉아서 군액(軍額)만을 잃게 되었다. 그러니 이장오의 상소가 의견(意見)이 없다고 이르는 것은 불가하다."
3월 23일 무술
구윤옥(具允鈺)을 도승지(都承旨)로, 박사눌(朴師訥)·이미(李瀰)·홍낙인(洪樂仁)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고양(高陽)의 압도(鴨島)는 바로 초완(草薍)132) 을 바치던 곳인데, 근래에 조수(潮水)의 침식을 입어 초완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리하여 3백 곡(斛)의 소미(小米)133) 로 특별히 해서(海西)에서 사들이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어이없는 일입니다. 지금 만일 양향(粮餉) 둔전(屯田)을 서로 바꾸어서 그들로 하여금 초완을 점차 기르게 한다면, 따로 사들이는 폐단을 가히 없앨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섭이중(聶夷中)134) 의 시(詩)에 이른바 ‘낟알 하나하나가 모두 신고(辛苦)한 쌀[粒粒皆辛苦之米]’이라 하였으니, 어찌 일시적으로 잠시 써야 할 초완과 바꿀 수가 있겠느냐? 압도를 복구(復舊)하기 전에 먼저 긴요하지 않은 소용을 줄이게 하고, 청한 바는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허락하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 【사간 이육(李堉)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헌납 이성원(李性源)은 억지로 친혐(親嫌)을 끌어대어 무시(武試)에 나아가지 않아 감찰하는 대관(臺官)이 구비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를 파직시킴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정원의 계사(啓辭) 중에 분부하여 진거(進去)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체통을 잃은 것이니, 그 승선(承宣)도 역시 문비(問備)하여 깨우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부(憲府) 【장령 주형질(朱炯質)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방법은 곡식을 생산하는 데 있고, 곡식을 생산하는 방도는 땅을 개간(開墾)하는 데 있으니, 청컨대 곡식을 심지 않은 공한지(空閑地)에 세금을 감하여 주도록 허락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경파(耕播)하게 할 것이며, 연해(沿海)의 통(筒)을 쌓는 곳에 이르러서는 제언(堤堰)의 부역과 똑같이 하여 곡식에 물을 대어 그 열매를 먹게 한다면, 유비 무환(有備無患)이 될 터이니, 역시 아울러 신칙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3월 25일 경자
임금이 인원 왕후(仁元王后) 기신(忌辰)에 쓸 향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친히 전하였다. 시골에서 입경(入京)한 농민들을 불러 모아서 경파(耕播)의 조만(早晩)을 하순(下詢)하여 권농(勸農)하는 뜻으로 여러 도(道)에 칙유(飭諭)하였다. 또 수령(守令)으로서 차원(差員)이 되어 온 자를 소견(召見)하여 권농(勸農)의 근만(勤慢)을 물었는데, 영덕 현령(盈德縣令) 이명오(李明吾)가 몸소 도롱이를 입고 자신이 전준(田畯)135) 이 되어 자못 실효(實效)가 있었다고 앙대(仰對)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성의가 가상(可尙)하다."
하고, 전조(銓曹)에 명하여 우직(右職)136) 으로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이명오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여 포상까지 받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3월 27일 임인
임금이 장차 태학(太學)에 나아가 알성례(謁聖禮)를 행하려고 할 때 먼저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갔다가 지나는 길에 어의궁(於義宮)에 들렸는데, 왕세손도 역시 따라갔다. 임금은 을유년137) 이 효묘(孝廟)가 세자위를 계승하던 해이기 때문에 효묘가 태어난 구궁(舊宮)에 임하여 옛날을 생각하며 감동이 일어났다. 본동(本洞)의 무사들을 모으라 명하고 훈련원(訓鍊院)에서 시사(試射)하는 데 친림(親臨)하였다. 초시(初試)에 친림하는 것은 기왕의 고례(古例)에 없던 일이며, 또한 명령이 갑작스러운 데서 나왔기 때문에 유사(有司)가 길을 깨끗이 치우지도 못하였고 반의(班儀)도 전도(顚倒)됨을 면치 못하였다. 응교 김노진(金魯鎭)이 제료(諸僚)를 거느리고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훈련원의 시사(試射)에 친림하겠다는 명령은 비록 우리 성상께서 감흥이 일어나고 백성을 위로하여 즐겁게 하려는 성의(盛意)에서 나왔으나, 다만 생각하건대 문묘(文廟)에 작헌(酌獻)하는 것은 예모(禮貌)가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법가(法駕)가 이미 떠날 차비(差備)를 갖추었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재계(齋戒)하여 바야흐로 경근히 하여야 하는 때를 당하여 무사(武事)에 먼저 미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바라건대 유사에게 붙이어 전례대로 시취(試取)하게 하는 것도 역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내리신 명령을 빨리 거두어 주소서."
하였고, 사간 이육(李堉) 등도 역시 차자를 올려 간쟁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남돈 유무(南頓遺武)를 어찌 시관(試官)에게 붙이겠는가? 지금 이 명령은 바로 추모(追慕)하는 데서 나온 것인데, 진차(陳箚)한 것은 이미 뜻밖이다. ‘무사를 먼저 하였다[先武]’는 두 글자를 어찌 감히 진술하였는가? 진실로 괴이한 일이다."
하고, 이어서 삼사(三司)의 여러 관원을 모두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3월 28일 계묘
임금이 문묘(文廟)에 나아가서 새벽에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이어서 망료례(望燎禮)를 대성전(大成殿) 동쪽 뜰에서 친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예는 폐지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내가 세손을 데리고 와서 짐짓 거행한 것은 세손으로 하여금 성묘(聖廟)의 소중한 뜻을 알게 하려고 한 것이다."
하고, 예가 끝난 뒤에 하련대(下輦臺)에 돌아와서 여러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 강이정(姜彛正) 등 5인을 뽑았고 무과(武科)에는 이시우(李時祐) 등 23인을 뽑았다. 친림(親臨)하여 방방(放榜)하고 저녁에 환궁하였다.
이수훈(李壽勛)을 사간(司諫)으로, 임성(任珹)을 장령(掌令)으로, 한후락(韓後樂)·최민(崔)을 지평(持平)으로, 권영(權穎)을 헌납(獻納)으로, 윤양후(尹養厚)를 정언(正言)으로, 홍술해(洪述海)를 교리(校理)로, 이성원(李性源)·김재순(金載順)을 부교리(副校理)로, 정창성(鄭昌聖)을 수찬(修撰)으로, 이재간(李在簡)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3월 29일 갑진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문·무과(文武科) 사은(謝恩)을 친히 받았다. 제주(濟州) 직부인(直赴人)에게는 회량(回粮)을 주라고 명하였다. 또 문묘에 작헌례(酌獻禮)를 할 때에 집사(執事)를 한 여러 유생들을 불러서 책문(策問)138) 을 친히 시험보이고 수석을 차지한 생원(生員) 우정규(禹禎圭)를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3월 30일 을사
임금이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친히 전하였다. 또 대신과 비국 당상을 자정전(資政殿)에서 인견하였다. 금년이 한양(漢陽)에 복도(復都)한 해이고 지난 을유년139) 의 구갑(舊甲)이므로, 참방(參榜)한 무사(武士)는 모두 부방(赴防)하는 일을 면제하게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호남(湖南)의 세선(稅船)은 취재(臭載)한 것이 많은데 공진(貢津)의 조선(漕船)은 일제히 와서 정박하였으니, 해당 현감 박사석(朴師錫)의 위험한 바다를 건너 봉공(奉公)한 것이 상줄 만하다고 하매, 임금이 우직(右職)에 조용하라고 명하였다. 홍봉한이 또 대양(大洋)의 기선(騎船)을 과만(瓜滿)140) 으로 한정한다면 합하여 6차(次)가 되는데, 이는 아랫사람들을 체휼(體恤)하는 정사가 아니니, 3년으로 한정을 하여 성적을 고과하여 승진(陞進)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매, 임금이 윤허하였다.
간원 【집의 이기덕(李基德)이다.】 에서 소회(所懷)를 진달하기를,
"일전에 시사(試射)하는 데 친림하셨을 때에 옥서(玉署)141) 와 양사(兩司)에서 차자를 올려 쟁론(爭論)한 것은 생각한 바를 숨김없이 진달하겠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체직시켜 동시에 물러가게 하는 것은 널리 포용하는 도량에 흠이 됩니다. 그 명령을 도로 거두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부사(領府事) 신만(申晩)이 졸(卒)하였다. 신만의 사람됨은 자상하고 모난 데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수상(首相)이 된 지 해가 넘도록 건백(建白)한 바가 없었고, 다만 유신(儒臣) 송명흠(宋明欽)을 예로써 불러들이기를 청하였는데, 송명흠이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리는 데 이르러서는 신만도 역시 저어(齟齬)하여 스스로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그가 졸하자 임금이 정간(精簡)한 인물로 포장하고, 장사를 치르는 데 있어서 전례와 같이 하라고 명하였다. 신만은 곧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의 아버지이다.
종신(宗臣)인 무춘군(茂春君)이라는 자가 있어 일로 인하여 흥양(興陽) 땅에 갔다가 그만 죽으니, 임금이 담군(擔軍)을 지급(支給)하고 그의 노모(老母)를 고휼(顧恤)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2품 종신(宗臣)으로 말미를 받지 않은 자는 마음대로 하향(下鄕)하지 못하도록 종친부(宗親府)에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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