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병자
구선복(具善復)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았다. 구선복은 구선행(具善行)의 종제(從弟)인데 교대로 병권(兵權)을 장악(掌握)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홍인한(洪麟漢)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정술조(鄭述祚)를 사간(司諫)으로, 임해(任瑎)·최익남(崔益男)을 지평(持平)으로, 권영(權穎)을 헌납으로, 정상인(鄭象仁)·송제로(宋濟魯)를 정언으로, 김치양(金致讓)을 부응교로, 서명선(徐命善)을 부교리로, 남현로(南玄老)를 수찬(修撰)으로, 조엄(趙曮)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삼았다.
임금이 단오(端午)에 각릉(各陵)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친히 전하였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서 주강(晝講)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신(臺臣)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써 사간 정술조(鄭述祚)와 정언 정상인(鄭象仁)을 영남의 연해(沿海)에 귀양보내고 그 나머지 대각(臺閣)에 나오지 않은 대신(臺臣)들은 서용하지 못하게 하는 율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전 성주 목사(星州牧使) 한덕일(韓德一)이 대론(臺論) 때문에 잡혀 왔는데, 이에 이르러 임금이 원사(爰辭)175) 를 보고 하교하기를,
"아병(牙兵)이 초관(哨官)에게 칼을 빼든 것은 군율(軍律)에 있어서 비록 곤장에 해당되지마는, 감영에 보고하지 않고 바로 원월(元月)176) 초3일에 형벌을 실시하여 죽게까지 하였다. 3일은 곧 원조(元朝)이니, 의당 죄가 있는 것이다."
하고, 위제 사율(違制私律)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비국 낭청(備局郞廳) 이숭호(李崇祜)가 영남(嶺南) 창고의 곡식을 적간(摘奸)하고 돌아와서 흠축(欠縮)된 정상을 아뢰니, 함양(咸陽)·단성(丹城)·곤양(昆陽)의 해당 수령에게 모두 찬배(竄配)의 율을 시행하였다.
5월 3일 정축
임금이 단오(端午)에 쓸 향을 숭정전 월대(月臺)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정여직(鄭汝稷)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윤음(綸音)을 내려 백공(百工)177) 을 신칙하였는데, 대개 이목(耳目)의 관원이 벙어리처럼 말하지 않고, 백관(百官)이 태만하며, 기강이 무너지고 시체(時體)가 그릇된 것으로써 성심(聖心)에 개탄스러움이 있어 윤음(綸音)이 거의 백여 언(百餘言)이나 되었다. 이어서 남의 자제(子弟)가 되어 그의 부형(父兄)이 폄고(貶考)된 것을 혐의하는 자에게는 금고(禁錮)의 율을 적용하라고 신칙하고, 전최(殿最)178) 의 법을 엄하게 하라고 하였다.
5월 4일 무인
임금이 영릉(寧陵)의 기신(忌辰)에 쓸 향을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친히 전하였다. 그때에 마침 큰비가 종일토록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 비는 매우 근심스럽다. 농부 중에 쌓아놓은 곡식이 있는 자는 근심하지 않겠지마는, 나로서는 비가 오든지 해가 나든지 근심스럽지 않는 것이 없다. 심하기도 하구나, 임금 노릇하기 어려움이여!"
하고, 이어서 사신(史臣)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네가 올해는 ‘큰 풍년이 든 해[大有年]’라고 쓰기를 바란다."
하였다.
5월 5일 기묘
황인검(黃仁儉)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현조(李顯祚)를 사간(司諫)으로, 이치중(李致中)·임희효(任希孝)를 정언(正言)으로, 김치인(金致仁)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구윤옥(具允鈺)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삼았다.
지평 최익남(崔益男)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상신(相臣)의 자리가 어떤 직임인데, 오늘날 의정부는 이에 얽매여 반식(伴食)179) 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나오고 들어가면서 양병(養病)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망팔(望八)의 춘추인 우리 임금께서 원교(遠郊)에 동가(動駕)하는 데 있어서도 병이 나아 행공(行公)한 뒤에도 끝내 배종(陪從)하지 않았습니다. 대각(臺閣)에서 묘당(廟堂)을 배척함에 있어서도 누가 감히 어찌 하겠느냐고 여기면서 여러 신하가 차자로써 인혐하였을 때에도 홀로 안연(晏然)히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보전(保全)만을 생각하고 자리에 연연하면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집에 누워서 도(道)를 논하는 일입니까? 분의와 염치에 있어서 아마도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일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성명(聖明)께서 그 사람에게 무엇을 취할 것이 있기에 이와 같이 너그러이 용납하십니까? 지난번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은 진실로 단단한 혈성(血誠)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성상께서도 역시 밝게 굽어살핀 바인데, 한마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갑자기 허부(許副)180) 하시니, 신의 어리석고 죽을 죄를 진 자로서 그윽이 생각건대 이는 평일에 공충(公忠)을 의지하시던 성의(聖意)에 이미 너무나 격차(隔差)가 있지 않겠습니까? 신은 양상(兩相)에 대하여 실로 치우침은 없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관계되는 일이니, 신이 어찌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대개 반식한다는 지적은 좌의정 윤동도(尹東度)를 가리킨 것이고, 공충(公忠)으로 추켜 준 것은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을 가리킨 것이었다. 또 말하기를,
"전 판서(判書) 한익모(韓益謨)의 아우 한경모(韓敬謨)는 아들이 없이 일찍 죽고, 한 달 전에 그의 처(妻)가 또 작고(作故)하였습니다. 그런데 한익모는 아들이 3인이나 있는데도 입후(入後)181) 를 허락하여 주지 않았으니, 자모(慈母)의 유탁(遺托)도 저버렸고, 죽은 아우의 절사(絶嗣)도 돌아보지 않으니, 진실로 팔좌(八座)182) 와 경월(卿月)183) 의 반열(班列)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와 같이 박절한 행동과 무식한 일이 있을 줄이야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견삭(譴削)의 율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요즈음 전법(銓法)184) 이 엄격하지 못하고 사사로운 뜻이 함부로 유행하여 하찮은 미관 말직을 통적(通籍)하는데도 또한 남잡(濫雜)한 폐단이 많으며, 심지어는 강상(江上) 마졸(馬卒)의 자식으로서도 바로 전옥(典獄)의 초사(初仕)에 뒤섞여 참여하게 되니, 관방(官方)이 문란하고 물정이 해괴하게 여깁니다. 마땅히 그 관직을 태거(汰去)하고, 해당 전장(銓長)185) 김치인(金致仁)도 역시 견벌(譴罰)을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신이 지난 4월 초6일에 호서(湖西)의 공주(公州)를 지나갔는데, 그날은 바로 태릉(泰陵)186) 기신(忌辰)의 재일(齋日)이었습니다. 그런데 피리와 노랫소리가 요란하고 기생들의 춤이 낭자하였으니, 분의(分義)를 헤아려 보건대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이미 목격하였으니, 감히 엄폐할 수가 없습니다. 해당 도신(道臣) 윤동승(尹東昇)과 판관(判官) 조재리(趙載履)를 견삭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한림 한영(韓栐)의 비천하여 직위에 걸맞지 않는 상황을 논박하고 벼슬을 삭제하도록 하라고 청하였다. 소(疏)가 들어가자, 임금이 비답하기를,
"말은 서로 규간(規諫)하려는 데서 나왔으며 의도는 숨기지 않으려는 데 있으니, 비록 지나치기는 하지마는 매우 가상하다. 아! 저 좌상(左相)은 곧 누구의 아들인가? 부자(父子)가 지우(知遇)187) 를 받아 정성스럽게 나를 섬겼는데, 어찌 차마 스스로 자신을 돌보기 위하여 그 임금을 본받지 않겠는가? 지금 그를 배척하는 것은 실로 뜻밖이다. 전 우상(右相)을 며칠 전에 면부(免副)한 것은 비록 군신(君臣)의 체통에 말미암은 것이었으나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데는 흠(欠)이 있으니, 바야흐로 간절하게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한익모는 본사(本事)를 모르겠으나 중신(重臣)이 된 도리에 그는 마땅히 법에 의하여 죄를 받아야 하니, 그를 파직하라. 전조(銓曹)의 일은 비록 그 사람의 마음은 아니겠지마는 마땅히 깨우치도록 신칙하여야 하니, 특별히 그 직을 체차(遞差)하고, 참봉(參奉)도 역시 벼슬에서 태거(汰去)하는 율을 시행하라. 호서의 일은 이미 풍문(風聞)이 아니니, 아울러 견삭하라. 한영은 문벌이 비록 한미하나 재주가 과연 훌륭하니, 그 근본을 어찌 따지겠는가? 그렇지마는 그 소관(小官)을 가지고 서로 버틸 필요가 없다. 역시 상소대로 시행하여, 더욱 공심(公心)을 가지고 일마다 서로 규간하게 하여 내 늙은 나이의 간곡한 칙명(飭命)을 본받도록 하라."
하였으니, 대개 우악(優渥)한 비답이었다. 최익남은 사람됨이 표독스럽고 경박하였는데 젊을 때부터 창기(娼妓) 집에 드나들며 장쾌(駔儈)188) 들과 사귀어 사부(士夫)들의 버림받는 바 되었으며, 함부로 산지(山地)를 가지고 송사하다가 지주(地主) 원경순(元景淳)의 곤장을 맞은 바 되었고, 외람되이 계방(桂坊)189) 에 뒤섞여 참여해서는 대관(臺官) 채위하(蔡緯夏)의 논박을 받았다. 앞뒤의 저지른 일로 보아 스스로 세상에 용납받지 못할 것을 알고 정우량(鄭羽良)과 홍봉한(洪鳳漢)의 집에 빌붙어, 은밀한 연줄을 인연(夤緣)해 절과(竊科)하여 급제(及第)를 하는 데 이르렀고, 청환(淸宦)에 오름에 미쳐서는 더욱 함부로 날뛰었으니, 식자(識者)들이 근심하였다. 그의 상소 중에 논한 바 한익모의 일은 한익모가 그 아들을 망제(亡弟)의 입후(立後)로 허락한 것이 제문(祭文)과 지문(誌文)에 근거할 만한 것이 있고, 호서의 일은 스스로 목격하였다고 하나 그날은 곧 판관 조재리의 친기(親忌)이었으니, 풍악을 울린 것은 그때가 아니었다. 영의정 홍봉한이 그러한 상황을 아뢰었으니, 그의 상소는 저절로 사실과 어긋나는 데로 돌아갔다. 그러니 이 몇 가지 일만 가지고도 그 나머지는 가히 미루어서 짐작할 만하다. 그 뒤 경인년190) 에 또 상소하여 망언(妄言)을 하다가 마침내 곤장을 맞아 죽게 되었다.
5월 6일 경진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쓸 향(香)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유언술(兪彦述)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5월 7일 신사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8일 임오
이익원(李翼元)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5월 9일 계미
임금이 헌릉(獻陵)191) 의 기신(忌辰)에 쓸 향을 숭현문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김상복(金相福)을 다시 우의정(右議政)에 제수(除授)하였다. 김상복은 파관(罷官)당한 지 열흘이 안되어 다시 복상(卜相)이 되었는데, 겨우 하루를 지나서 곧 나와 사은(謝恩)하였다. 대신의 진퇴는 스스로 예절이 있는 것인데, 근래 임금의 하교가 엄하고 급하여 배척당해 물러나고 위협당해 나오게 되는 경우가 잠깐 사이에 이루어져서 몰아쳐 부리기를 마치 소관(小官)을 다루듯이 하였다. 대신이 된 자도 역시 자중(自重)할 겨를이 없어 국체(國體)와 사의(私義)를 다시 돌보지 않았으니, 이러고서 어떻게 군심(君心)을 바로잡고 백료(百僚)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겠는가?
홍인한(洪麟漢)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중호(李重祜)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좌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연거푸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윤동승(尹東昇)의 계론(啓論)에 충주(忠州)의 창곡(倉穀)을 아전들이 포흠(逋欠)낸 것이 자그마치 4천 석(石)이나 된다고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들에게 순문(詢問)하고 교리 이성원(李性源)을 안핵 어사(按覈御史)로 삼아 가서 조사하게 하였다.
5월 10일 갑신
임금이 황단(皇壇)에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니, 명(明)나라 태조 황제(太祖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예(禮)가 끝난 뒤에 경기 감사 이경호(李景祜)를 소견하고 농형(農形)을 물어보았다. 균역청(均役廳)에서 돈[錢] 8천 민(緡)을 빌려다가 각역(各驛)의 빚[債]에 보충하게 하였다.
5월 11일 을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 【지평 임해(任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한권(翰圈)192) 에 빠진 인재가 많아서 취사(取捨)가 공평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회권(會圈)한 여러 신하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여러 한림(翰林)을 나문(拿問)하라 명하고, 이어서 도당(都堂)193) 에 다시 권점하라 명하였으며, 임해도 역시 협잡(挾雜)한 것으로 그 직을 파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연원 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은 훈로(勳勞)가 있었고, 고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는 문장(文章)과 재상으로서의 업적이 있었다 하여 그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왕손(王孫)의 관례 의절(冠禮儀節)을 왕자(王子)보다 한 등 감하게 하여, 빈(賓)은 정3품으로, 찬(贊)은 당하(堂下) 정3품으로 하게 하였으며, 장복(章服)은 유사(有司)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서명신(徐命臣)을 승지(承旨)로, 이창의(李昌誼)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정실(鄭實)을 대제학(大提學)으로 삼았다.
5월 12일 병술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박창윤(朴昌潤)·이성규(李聖圭)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지평 최익남(崔益男)이 상소하여 전 이판(吏判) 김치인(金致仁)을 논박하기를,
"전하께서 김치인을 사랑하여 돌보시는 것이 어찌 〈김치인이〉 고 상신(相臣) 〈김재로(金在魯)의〉 아들이기 때문에 가정의 학문을 잘 이어받아서 혹시라도 그 반분(半分)의 효과를 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김치인은 밖으로 보면 마치 가업(家業)을 이어받은 것 같으나 마음 속은 전혀 배치(背馳)되었으니, 비록 전하의 일월(日月) 같은 밝으심으로도 그의 정상(情狀)을 다 밝혀 보시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 이은(李溵)의 상소는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비록 혹 그 소솔(疎率)함을 탓할 수 있겠으나, 김치인에 있어서는 배격하는 것이 부당한데 장서(長書)로써 고절(告絶)하였고, 여러 달 동안을 정망(停望)194) 하였으니 이것은 또 무슨 마음입니까? 조명정(趙明鼎)은 문학(文學)에 특별히 뛰어나서 청환 화직(淸宦華職)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다만 집안의 구혐(舊嫌)을 가지고 마땅히 통망(通望)하여야 할 선임(選任)을 막겠다고 드러내어 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번 전병(銓柄)을 잡은 뒤로 취사(取捨)를 마음대로 하게 되자, 도리어 전적으로 협찬하고 조제(調劑)하는 가계(家計)를 숨기고 은연중에 언의(言議)가 준극(峻極)한 특별한 처지(處地)를 스스로 차지하려고 하였으니, 공도(公道)를 넓히고 법을 지키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들뜨고 경박한 데에 기인한 것이라고 비답하고, 근면(勤勉)하라고 나무랐다. 영경연(領經筵)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신(臣)의 마음은 곧 김치인의 마음이고 김치인의 마음이 바로 신의 마음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군부(君父)를 속이겠습니까? 김치인에게는 실로 이러한 마음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러하다. 최익남을 처음에는 그의 숨김없는 마음을 가상히 여겼더니 종내에는 들뜨고 경박한 데로 흘러서 사서(私書)를 가지고 장주(章奏)에 베껴 올렸으니, 가히 죄줄 만하다."
하고, 드디어 그를 체직(遞職)시켰다.
5월 13일 정해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한권(韓圈)에 들은 사람을 친히 시험보여 홍빈(洪彬) 등 5인을 뽑았다. 간원 【 헌납 권영(權穎)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포교(捕校)가 반촌(泮村)에서 도둑을 잡았는데, 성묘(聖廟)가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시끄럽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포장(捕將)을 파직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경복궁(景福宮)의 위장(衛將)이 구궐(舊闕)의 곁에서 석함(石函) 하나를 얻어서 바쳤다. 임금이 가져오게 하여 보니, 곧 석함에 봉태(封胎)한 것이었는데, 석면(石面)에 새겨지기를 ‘왕자(王子)로 을사년 5월 일, 인시(寅時)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었다. 임금이 옥당(玉堂)에 명하여 보략(譜略)을 상고하여 찾아 아뢰라고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국초(國初)의 헌릉(獻陵) 능 위에 있는 4방석(四方石)이 민폐(民弊)가 크다고 하여 성조(聖祖)께서 친히 능소(陵所)에 나아가시어 양편석(兩片石)으로 고치게 하셨다. 《국조능지(國朝陵誌)》에 옛날에는 돌로써 하라고 되어 있는데, 나는 정축년195) 이후에 열조(列朝)의 검소한 덕(德)을 우러러 본받아 도자기[磁]로 대신하게 하였다. 막중한 곳인 능(陵)도 오히려 그러하였거든, 하물며 그 다음 가는 것이겠는가? 장태(藏胎)하는 폐단은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다. 고례(古例)를 고치기 어려우나, 지금 구궐(舊闕)에서 장태(藏胎)한 석함(石函)을 얻었는데, 이는 중엽(中葉) 이후의 일이다. 이전에 이미 봉태(封胎)한 것은 지금에 와서 논할 것이 없고, 지금부터는 장태를 할 때는 반드시 어원(御苑)의 정결(淨潔)한 곳에 도자기 항아리에 담아 묻게 하고 이로써 의조(儀曹)에 싣게 하라."
하고, 드디어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5월 14일 무자
임금이 태묘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금상문(金商門)으로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정홍순(鄭弘淳)·박상덕(朴相德)을 발탁하여 자헌(資憲)의 품계로 올리었다. 조정에 사람이 모자라기 때문에 영의정 홍봉한이 등용(登用)할 만하다고 아뢴 때문이었다.
이중호(李重祜)·이담(李潭)을 승지(承旨)로, 이숭호(李崇祜)·김용(金容)을 지평(指平)으로, 황경원(黃景源)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지경연(知經筵)으로 삼았다.
5월 15일 기축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시신(侍臣)에게 묻기를,
"요즈음 연로(年老)한 자로 〈벼슬길에〉 침체(沈滯)된 자가 있는가?"
하니, 승지 이담이 말하기를,
"현광우(玄光宇)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현광우를 특별히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발탁하였는데, 이담이 말하기를,
"이는 천지에 사(私)가 없는 덕입니다."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6일 경인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서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덕해(李德海)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이석재(李碩載)를 호서 암행 어사(湖西暗行御史)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최익남(崔益男)이 비국 낭청(備局郞廳)으로서 호남에 저치미(儲置米)를 조사하러 갔었는데, 호서를 지나가는 동안 역마(驛馬)를 함부로 타고 또 곤장(棍杖)을 함부로 써서 위법(違法)한 일이 많았다. 성환 찰방(成歡察訪) 이익보(李益普)가 그것을 위에 장문(狀聞)하니, 임금이 혹시라도 사실과 틀릴까 염려하여 어사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이석재가 돌아와서 그가 역마를 함부로 탄 정상을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최익남이 소년 문관(文官)으로서 예기(銳氣)가 많아 역졸(驛卒)을 곤장으로 다스려 위엄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졸들이 역마를 함부로 탔다고 무고(誣告)하여 유감을 풀려고 한 계획이니, 죄줄 것은 없다."
하고, 다만 최익남을 파직시켰다. 최익남은 신진(新進)으로서 바야흐로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남기(濫騎)의 법은 드디어 점점 해이해졌다.
5월 17일 신묘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이어서 남교(南郊)에 동가(動駕)를 명하여 몸소 전야(田野)를 살펴보았다. 이때 큰비가 종일토록 내려 기백(畿伯)이 우택(雨澤)을 아뢰고, 심지어 비가 동이로 퍼붓듯이 왔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조금만 가물면 곡식이 말라 죽는다고 하고 조금만 비가 오면 동이로 퍼붓듯이 내린다고 하여 가을이 온 뒤에 재결(災結)을 범람(汎濫)하게 보고하려는 계책을 삼으니, 그 정상이 밉다."
하고, 드디어 여러 도(道)에 신칙하니, 이로부터 재앙을 알리기를 꺼리는 풍습이 더욱 성하여 수재(水災)나 한재(旱災)의 보고가 점점 드물게 되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8일 임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가 올 때나 해가 날 때나 늘 재앙이 올까 염려하여 마음 속에 한결같이 근심이 된다. 그런데 지난번 기백(畿伯)의 우택(雨澤)에 대한 아룀을 인하여 몸소 전야를 살펴보기까지 하였다. 옛사람들은 수재나 한재에 대한 아룀도 역시 정성스러웠다. 정성이 없으면 어떻게 하늘을 감동시키겠는가? 기내(畿內)의 36고을이 모두 동이로 퍼붓듯이 내렸다고 혼칭(混稱)하고, 인천(仁川) 한 고을은 천병 만마(千兵萬馬)가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것 같아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는 꺾이지 않는 물건이 없다고 하였으니,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소홀히 한 것이 크다. 해당 부사(府使) 최경흥(崔景興)을 파직하게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儒生)들이 포교(捕校)가 반궁(泮宮)에 들어온 것을 가지고 권당(捲堂)196) 하기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여러 유생을 소견하고 면유(面諭)하니, 여러 유생들이 그날로 도로 들어갔다.
5월 19일 계사
오랜 비로 영제(禜祭)197) 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5월 19일 계사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김용(金容)이 상소하여 그의 아버지가 매우 늙은 정상을 진달하고 귀양(歸養)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5월 20일 갑오
임금은 이정(李瀞)이 북관(北關)에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하려 한 일을 추억하여 하교하기를,
"이정은 바로 옛날의 합관요(蓋寬饒)198) 이다. 사람들이 모두 이정과 같은 마음을 가졌다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하고, 그가 살았는가 죽었는가를 물으면서 특별히 오위 장(五衛將)을 제수하게 하였다. 이어서 친히 윤음(綸音)을 지어서 들뜨고 경박한 것을 경계하고, 성급히 출세하려는 것을 신칙하였으며, 동인 협공(同寅協恭)하는 일로써 군공(群工)을 신칙하였다.
이조 참판 홍인한(洪麟漢)이 그의 형 홍봉한이 바야흐로 수상(首相)으로 있어서 형제(兄弟)끼리 서로 낭묘(廊廟)199) 와 전지(銓地)200) 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편안치 않다고 하여 고사(固辭)하고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이, 고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는 수상이었으나 그 아우 정치화(鄭致和)는 이판(吏判)이었으며, 이건명(李健命)은 대신(大臣)이었으나 그의 형 이관명(李觀命)은 이판이었던 고례(古例)를 인용하고, 또한 홍인한이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정사(政事)하는데 재목이 굽은 데로 따르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진달하여 힘써 나오게 하도록 하라고 청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매, 홍인한이 곧 출사(出仕)하였다.
5월 21일 을미
원경렴(元景濂)을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켜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가 곧 교동 수사(喬桐水使)로 옮겼으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원경렴은 군(郡)을 다스리는 데 성적(聲績)이 있었고, 또 문무(文武)에 재능이 있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홍봉한이 또 이사관(李思觀)이 장재(將才)가 있다고 하여 의망하여 추천하였다.
임금이 친히 수은묘(垂恩廟)의 제문(祭文)을 지어 승지 홍낙인(洪樂仁)에게 명하여 가서 제사지내게 하였으니, 이날이 바로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김상익(金相翊)·홍낙순(洪樂純)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5월 22일 병신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3일 정유
임금이 건원릉(健元陵) 기신(忌辰)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5월 24일 무술
임금이 영제(禜祭)에 쓸 향을 숭현문에서 지영하고, 왕세손(王世孫)도 함께 지영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어원(御苑)에서 곡식을 베는 것을 보고 물건에서 얻어진 가르침이 있었고, 주공(周公)은 〈《시경(詩經)》〉 빈풍 칠월편(豳風七月篇)에서 역시 성왕(成王)으로 하여금 농사의 어려움을 알리려고 하였다. 지금 내가 세손에게 〈지영을〉 행하라고 명하는 것은 역시 백성과 농사를 중히 여기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경현당(景賢堂)에서 인견하였다. 충주 어사(忠州御史) 이성원(李性源)이 이포(吏逋)를 조사하고 돌아와 아뢰었는데, 그 범한 자가 11인이었고, 축낸 곡식이 자그마치 수천 곡(斛)이나 되었다. 임금이 모두 사형(死刑)을 면하여 영남의 연변(沿邊)에 나누어 정배(定配)하라고 명하고, 그들이 포흠(逋欠)한 곡식을 그들의 친족에게 물리게 하는 고통을 생각하여 견감(蠲減)하여 주는 은전을 아울러 시행하게 하였다. 대신(臺臣)들은 국법으로 용서해 줄 수 없다고 계론(啓論)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5일 기해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고 왕세손에게 시좌(侍坐)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금년은 을유년201) 으로서 곧 우리 성조(聖祖)202) 께서 한양(漢陽)으로 복도(復都)하신 해이다. 어제 충주의 아전들을 처분한 것도 역시 헌릉(獻陵)203) 의 유지(遺志)를 우러러 본받은 것이다. 충주의 간리(奸吏)가 나라의 곡식을 도둑질하여 먹었으니, 마땅히 일률(一律)204) 로써 시행하여야 하겠지마는, 나는 생각하기를, 이들 역시 조종(祖宗)께서 끼쳐 주신 백성이라 마음 속으로 매우 안타까이 생각되어 특별히 죽음만은 면하게 하였으며, 6천 곡(斛)의 축낸 곡식도 역시 견감시킨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말하기를, ‘왕법(王法)은 굽혀서는 안 되고, 국가에 저축한 곡식도 줄여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너의 뜻은 어떠하냐?"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십수(十數) 명의 아전들을 살려 주는 것은 진실로 호생(好生)의 덕(德)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구포(舊逋)를 받아내기 위하여서는 그 해가 인족(隣族)에게 미쳐야 하니 신(臣)은 견감시킨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노(魯)나라의 임금이 부세(賦稅)를 더 거두려고 하니, 공자[孔門]의 제자들이 ‘백성이 풍족하게 되면 임금된 이가 어찌 풍족하지 않으리요?’ 하고 도리어 세금을 적게 거두려고 하였는데, 그 생각이 어떠한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너의 할아비는 비록 나날이 주는 데 겨를이 없게 하더라도 민생(民生)은 오히려 곤궁하니, 어떻게 하면 백성을 부유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게 되면, 백성을 부유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는 어찌하면 옳으냐?"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응당 하여야 할 부역 외에 무익(無益)한 일을 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백성을 때에 알맞게 부리는 뜻이 됩니다."
하매, 임금이 옳다고 칭찬하였다. 이날 여러 도(道)의 구포(舊逋)를 모두 감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나의 노쇠한 나이에 이와같이 수응(酬應)한 것은 당나라 태종이 이른바 ‘나는 여위더라도 천하는 반드시 살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광 군수(靈光郡守) 이성억(李聖檍)과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사관(李思觀)에게 새서 표리(璽書表裏)205) 의 은전을 특사(特賜)하였으니, 도신 심이지(沈履之)가 치적이 으뜸이라 하여 포상하도록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김치양(金致讓)을 풍덕 어사(豊德御史)로 삼아서 군오(軍伍)를 사정(査整)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의정 홍봉한이 ‘풍덕(豊德) 한 부(府)가 양도(兩都)206) 사이에 끼어 있어서 군졸(軍卒) 중에 피역(避役)한 자가 양도에 투속(投屬)하여 폐단이 많은데, 김치양의 아버지 김상로(金尙魯)가 전에 수의(繡衣)207) 로서 도망친 군졸을 쇄환(刷還)하여 지금까지 그 덕이 많았은즉 다시 어사를 보냄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김치양은 곧 김상로의 아들이기 때문에 가서 쇄환하라고 명하였다.
5월 26일 경자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근래 문체(文體)가 크게 달라져 신기(新奇)한 것을 힘써서 고관(考官)의 눈에 들으려 하니, 이것은 시체(時體)이다. 지금으로부터 그것을 엄금하라."
하고, 이어서 위사(衛士)를 불러서 병서(兵書)를 강하고 진도(陣圖)를 베풀게 하여 궁시(弓矢)를 차등을 두어 내려 주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시건(李蓍建)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헌납(獻納) 권영(權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연천(漣川)·인천(仁川)의 두 수령(守令)을 특별히 파직시킬 때에 중외(中外)에 전교한 것이 자못 의아함이 있습니다. 대저 풍우(風雨)에 대한 재상(災祥)은 가까운 지척(咫尺)의 사이에도 혹 같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경성(京城)을 가지고 외방(外方)을 모두 똑같이 책하신다면, 이 뒤로 수한(水旱)에 대한 보고에 있어서 능히 사실대로 아뢰지 못할 것입니다. 밝으신 임금은 재이(災異)에 대하여서는 들으려고 하지마는 상서에 대하여서는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만일 수령이 재앙을 보고하는 데 대하여 미리 탈날 것을 아뢰려는 뜻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면, 후에 비록 대비가 없는 재앙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말을 감히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임금은 구중(九重)의 가운데 있어서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언동(言動)은 〈그 영향이〉 매우 큽니다. 지금 전하께서 두 수령을 처분하신 원인은 그들이 말한 재앙이 실상을 넘어서 정성이 모자람이 있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전교가 한번 퍼지면 신(臣)은 두렵건대 성의(聖意)를 오인(誤認)하여 논재(論災)하는 일을 혹시라도 지나칠까 염려하고 도리어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피해가 백성에게 돌아감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고 죄파(罪罷)한 두 수령을 특서(特敍)하게 하였다.
장령 이택징(李澤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에서 형벌을 시행하고 법을 적용함은 스스로 전장(典章)이 있는 것입니다. 심정최(沈廷最)와 윤희복(尹熙復)이 여러 번 천청(天聽)을 간구하여 그 마음에 쾌족함을 힘쓰는 것은 비록 위선(爲先)하는 마음에서 나왔지마는, 어찌 해괴하고 망령된 죄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근본을 따져본다면 사가(私家)의 한 산송(山訟)에 불과하니, 유사(有司)에게 맡겨 주면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어찌 문(門)208) 에 나가시어 형벌로 신문하기를 마치 국수(鞫囚)를 다루듯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삼남(三南)의 저치미(儲置米)를 최초로 설시(設施)한 것은 그 법의(法意)가 매우 중하였습니다. 이미 비국 낭청(備局郞廳)을 나누어 보내어 포흠(逋欠)을 적발하였다면 그들을 징벌하는 도리에 있어서 무엇을 아까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윽이 생각건대 죄에는 경중(輕重)이 있고 정실(情實)에는 실수와 고의가 있는 것이니, 해부(該府)에 맡겨 구별하여 죄정을 의논하게 하고, 죄가 혹시라도 장죄(贓罪)를 범하였다면 비록 팽아(烹阿)의 법209) 을 시행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 하필이면 특별한 하교로써 나누어 귀양보내어 먼 변방에 물리치셨습니까? 이러한 처분은 후손들에게 내려 주는 교훈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법을 집행하고 직언(直言)을 맡은 신하가 한 사람도 쟁난(爭難)한 자가 없었으니, 신은 실로 조정을 위하여 애석히 여깁니다.
영덕 현령(盈德縣令) 이명오(李明吾)는 연석(筵席)에 입시(入侍)하여 삿갓을 쓰고 몸소 밭을 갈았다는 이야기로 스스로 자랑삼아 진달(陳達)하여 심지어 승서(陞敍)하는 은전을 입었다 하니, 비루(卑陋)합니다. 이 무슨 말입니까? 가령 이명오가 진실로 이런 일이 있어 도신(道臣)의 포장(褒奬)에 올라갔었다면, 혹 이상한 일이라고는 안할 것입니다. 그가 어찌 감히 외람되게도 지존(至尊)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한다는 말입니까? 신이 두렵게 생각하는 것은 이 다음에는 호미를 들고 밭을 매었다는 이야기가 역시 틀림없이 전석(前席)에서 계속해 나오게 될 것이니, 이 역시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여 칭찬을 받으려는 일단(一端)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이명오의 승서하라는 명령을 빨리 거두시어 그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고 두려움을 깨우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이명오의 승서하라는 명령만은 거두어 들였다.
5월 27일 신축
임금이 적전(籍田)210) 에서 베어 온 보리를 자정전(資政殿)에서 친히 받았다. 이어서 석강을 행하였다. 간원 【 헌납 권영(權穎)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사록(近思錄)》은 성인(聖人)의 전체 대용(全體大用)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강(講)하는 데 있어서 마땅히 넓고 공평하게 하여 물건에 따라 순응하는 도리를 가지고 성학(聖學)을 더욱 힘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8일 임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황해도(黃海道)에 홍수(洪水)가 져서 민호(民戶)가 표류하였다.
5월 29일 계묘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선조조(宣祖朝)와 인조조(仁祖朝)의 중신(重臣) 고 찬성(贊成) 이상의(李尙毅)와 그 아들 이지완(李志完) 및 고 참찬(參贊) 김찬(金瓚)에게 증시(贈諡)하는 은전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실(鄭實)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지응룡(池應龍)을 장령(掌令)으로, 김둔(金鈍)을 지평(持平)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삼았다.
제주(濟州)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진곡(賑穀) 3천 석(石)을 주라고 명하였으며, 탐라(眈羅) 백성으로서 장계(狀啓)를 가지고 입경(入京)한 자를 초견(招見)하고 위유(慰諭)하였다.
5월 30일 갑진
주강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성 서명응(徐命膺)이 상소하여 관학(館學)의 오랜 폐단을 말한 것이 무릇 여섯 가지 조목이었는데, 균역청(均役廳)의 돈을 빌려 양사(養士)하는 수요(需要)에 쓰게 하여 달라고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지중추(知中樞) 홍계희(洪啓禧)가 상소하여 송(宋)나라·명(明)나라 시대의 여러 신하들이 치사(致仕)211) 할 나이가 안되었는데도 치사한 예를 인용하여, 자신도 치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예문 제학(藝文提學) 황경원(黃景源)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황경원은 오랜 동안 청환(淸宦)의 길에 막혀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관함(館銜)에 의망하니 소장을 올려 예(例)에 따라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황경원은 일찍이 국자장(國子長)212) 이 되어 김양심(金養心)에게 과시(課試)가 공평치 못하다는 배척을 당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세월이 오래 된 것을 핑계로 하여 슬며시 다시 문임(文任)을 맡았으니, 시의(時議)가 기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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