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6권, 영조 41년 1765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1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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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갑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7월 1일 갑술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일 을해

임금이 약원(藥院)225)  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였다. 통례원 가인의(假引儀) 12과(窠) 가운데 중서(中庶)를 분배(分排)하되 절반을 참여시켜 고르게 차임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게 하고, 어기는 자는 그 전관(銓官)에게 탈고신(奪告身)의 율을 적용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홍로(鴻臚)226)  는 창기(唱技)로써 취재(取才)하지만,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여 문득 세가(勢家)에게 탈취당하는 바 되니, 중인(中人)으로서 그 직(職)에 거하는 자는 겨우 1인인지라, 임금이 훌륭한 인재를 잃을 탄식이 있을까 염려하여 이 명(命)이 있은 것이다.

 

진주(晉州) 영장(營將) 홍우보(洪雨輔)가 곤장을 지나치게 쳐서 사람을 죽인 것으로써 그 땅에 유배시키라고 명하였으니, 도신(道臣)의 장론(狀論)에 인한 것이었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문·음·무(文蔭武)의 마땅히 증시(贈諡)할 자는 아윤(亞尹)이나 참판을 거치지 않으면 법으로는 마땅히 논할 수 없으나, 완춘군(完春君) 이수량(李遂良)은 무신년227)  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훈신이니, 마땅히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김치인(金致仁)을 우의정에 제배(除拜)하였다. 이때에 의정이 비어서 임금이 복상(卜相)228)  을 명하였는데, 대신이 김치인·서지수(徐志修)를 천거해 들이니, 이에 김치인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김치인과 서지수는 곧 내외종(內外從) 형제인데, 김치인은 3세에 다섯 재상이 나왔고, 서지수도 이어서 정승에 임명되어 역시 3세가 태부(台府)에 올랐으니, 우리 나라에서 드물게 있는 일이다.

 

전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이 10년을 문형(文衡)에 있었고, 전 참의 이최중(李最中)은 낮은 벼슬에 떨어져 있음으로써 홍봉한이 이를 아뢰니, 남유용은 지중추로, 이최중은 동의금으로 탁용하라고 명하였다.

 

7월 3일 병자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근사록》 서명장(西銘章)을 강하다가 ‘백성은 나의 동포이니 그 무리들과 나는 함께 한다[民吾同胞物吾與]’라 한 데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뭇 신하들에 대해서도 구별하여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나,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자는 더욱 불쌍하니,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종가(鐘街)에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는 무리들을 가서 살피고 그 거주지(居住地)를 물어서 그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자는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양식을 주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4일 정축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몸소 원점 유생(圓點儒生)229)  의 전강(殿講)230)  을 시험보이고, 또 제술(製述)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진사 이동욱(李東郁)은 곧바로 전시(殿試)에 나아가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급분(給分)231)  하며, 영남의 유생 구성옥(具性玉)은 상당한 직(職)에 조용(調用)하라고 하였다. 구성옥은 일찍이 임금의 행차가 성균관에 임했을 때에 재생(齋生)으로서 주대(奏對)한 말이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고 대제학 오원(吳瑗)·이광덕(李匡德)의 사람됨을 추념하여 증직(贈職)하고 시호를 의정(議定)하라 명하였는데, 대개 일찍이 문형을 지내면 비록 정경(正卿)이 아니더라도 시호를 내림이 고례(古例)였다.

 

김응순(金應淳)을 승지로 삼았다.

 

7월 7일 경진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몸소 한림 추소시(翰林追召試)를 행하여, 이겸빈(李謙彬)·홍언철(洪彦喆) 2인을 뽑았다.

 

이조 판서 황인검(黃仁儉)이 대정(大政)232)  을 치르고 나서 힘써 사직하며 응하지 않으니, 임금이 그 직을 파하고 서지수로 하여금 대신케 하였다. 홍상한(洪象漢)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7월 8일 신사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태묘에 추전알(秋展謁)을 행하였으며, 또 선원전(璿源殿)에 들러 배알하고, 저녁에 환궁하였다.

 

7월 9일 임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전 판서 이창수(李昌壽)를 발탁하여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7월 10일 계미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명식(李命植)을 승지로 삼았다.

 

7월 11일 갑신

임금이 대신과 예조 당상에게 문의하여 특별히 영빈(暎嬪) 이씨에게 의열(義烈)이라 증시(贈諡)하고 교서와 제문을 몸소 지어서 본궁에 거둥하여 시호를 내리는 예(禮)를 행하니, 혜빈궁(惠嬪宮)과 왕세손도 또한 따라서 나아갔다. 저녁에 환궁하였다.

 

병조 판서 심수(沈鏽)를 병으로 면직하고 구윤명(具允明)으로 대신케 하였다.

 

7월 12일 을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삼간택을 몸소 행하여, 화길 옹주(和吉翁主)의 혼례를 호군 구현겸(具顯謙)의 아들 구민화(具敏和)에게 정하고, 위호(尉號)를 능성(綾城)이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성천주(成天柱)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13일 병술

이익원(李翼元)을 승지로 삼았다.

 

7월 14일 정해

임금이 태묘의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왜역(倭譯)이 일을 다 마친 후에 돌아가지 않고 머물러 있는 습속을 금하도록 청하였고, 호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은 향청(餉廳) 세곡(稅穀)의 기한을 어기고 바치지 않는 폐단을 막도록 청하니, 임금이 모두 엄히 신칙하라 명하였다.

 

충청도 도신(道臣) 구윤옥(具允鈺)이 본영(本營)의 빚 폐단을 상문(上聞)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서쪽 변방에 풍환(馮驩)의 고사(故事)233)  를 본받았고, 통영(統營)에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어찌 호서(湖西)라 하여 똑같이 사랑하는 정사를 행하지 않겠는가? 1만 5천 냥의 전화(錢貨)를 모두 감해 주어 뭇 백성들의 원한을 끼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지평 유항주(兪恒柱)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김문탁(金文鐸)을 삭직(削職)하도록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김문탁은 곧 호남인(湖南人)인데, 선임자로서 신진(新進) 관원의 회자(回刺)234)  를 받을 때 처음에는 지조를 지키다가 후에 그 하인으로 하여금 뇌물을 받게 하고서야 그를 허락하기 때문에 이 청(請)이 있은 것이다.

 

윤동승(尹東昇)을 승지로 삼았다.

 

7월 15일 무자

밤에 월식(月蝕)하였다. 어떤 별이 위성(胃星)의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7월 17일 경인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삼관(三館)의 문신에게 제술을 몸소 시험보이고, 수석을 차지한 이극생(李克生)·이사조(李思祚) 등에게 말을 하사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승문원(承文院) 관원 김동직(金東稷)을 교서관(校書館)으로 옮기고 전 영광 군수(靈光郡守) 윤일복(尹一復)의 직(職)을 삭탈하도록 명하였다. 김동직의 시강(試講) 때 임금이 그 사조(四祖)에 현관(顯官)이 있는지 여부를 묻자, 김동직이 그 6대조(六代祖)가 임진 왜란 때 절개를 지켰기 때문에 주쉬(主倅)235)  이던 윤일복이 신 가문의 《수성록(守城錄)》을 간행하였다고 대답하였는데, 임금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이는 훗날 서원(書院)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윤일복은 반드시 그 아비 윤지술(尹志述)을 사현사(四賢祠)236)  에 배향하고자 함이 아닌가? 이런 일들을 만약 엄히 처리하지 않으면, 이는 선조의 영혼을 저버린 것이다."
하고, 이어서 외방에서 문집이 아니면서 사사로이 간행하는 것은 엄금하고, 또한 도신(道臣)에게 《수성록》의 판본을 삭제하도록 하였으며, 분관(分館)237)  할 때에 권점(圈點)찍는 일에 참가했던 승문원 박사(博士) 조무범(趙武範)도 또한 그 직(職)을 삭탈하라 명하였다.

 

장령(掌令) 서병덕(徐秉德)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칠정(七情) 가운데 오직 노(怒)가 가장 심하여 옛날의 군자가 이로써 경계를 삼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하물며 인군(人君)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무릇 사무를 접응(接應)하는 즈음에 간간이 목소리와 표정이 지나칠 때가 있으며 정령(政令)을 베풀어 행하는 동안에 혹 화평(和平)한 기상(氣像)이 모자랄 때가 있으니, 비단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된 성덕(聖德)에 방해가 될 뿐만이 아닙니다. 위세와 분노함이 너무 급하고 윤음(綸音)이 화평함을 잃으면 비록 〈신하의 말을〉 즐겨 듣는 정성이 있다 하더라도 임금에게 곧게 직언하는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응대하는 말을 간략하게 하고, 중화(中和)를 이룩하여 큰 목소리와 노여운 안색(顔色)으로써 남을 대하지 않는 뜻을 깊이 본받아, 재주를 헤아려 오래 맡기어 조종(祖宗)의 아름다운 제도를 본받으시며 군병(軍兵)을 다스려 주왕(周王)의 원대한 계책을 따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일흔 두 살의 늙바탕에 뜻밖에 다시 정사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내가 교만하여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음으로 인해 곧은 말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아! 옛 풍습이 고쳐지지 아니하여 양사(兩司)에서 날마다 비록 대각에 나아오지만 옛 계사(啓辭)를 베껴 전하여 날짜만 보내는 데 불과하고 대장(臺章)이 공거(公車)에 몰려오나 말미를 청하여 승강이하는 데 불과하며, 심지어는 머뭇거리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모면함을 고상한 운치(韻致)로 생각하여, 어제 제수하는 명을 내렸다가 오늘 다시 체직시키고 어제 대각(臺閣)에 나아갔는데 오늘은 위패(違牌)하여, 이로써 날을 보내고 있다. 이는 여러 신하들의 허물이 아니라 실로 나의 허물이니, 마음에 늘 부끄러이 여겼다. 지금 너의 글에 조목조목 말한 것을 보니, 나에게 유익한 약석(藥石)이다. 어찌 한갓 쇠 가운데 쟁쟁할 뿐이겠는가? 그 가운데에는 비록 내 마음에 이해(理解)하지 못할 것이 있으나, 바야흐로 절실히 힘쓰고 있으니, 내가 마땅히 마음에 맹렬히 성찰할 것이다. 큰 목소리와 노여운 안색으로써 남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과 ‘중화를 이룩한다[致中和]’는 글자에 이르러서는 절반도 읽기 전에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이는 성인의 지극한 공부이니, 내 비록 덕이 모자라나, 스스로 기약함이 어찌 얕으랴마는, 10차례 《중용(中庸)》을 강(講)하면서도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 각각이어서 실천하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한갓 마음을 속인 것뿐이겠는가? 또한 진실로 부끄럽다. 인용한 바 본조(本朝)의 고사에 대하여 더욱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워진다. 이제 날마다 하루가 다급한 마음으로써 기운이 더욱 피곤하니, 가히 삼가며 스스로 깨닫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용한 바 정사를 세운다는 말이 절실하니, 비록 기근이 연달은 뒤라 하더라도 정지하기를 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뜻이 대개 이러한데 이 또한 형식(形式)에 응한 것이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청한 대로 정확함을 강구(講究)함이 마땅하다. 너는 사양치 말고 직무(職務)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치인이 세 번 상소하여 힘써 사직하매, 임금이 손수 써서 비답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어 돈독하게 부르니, 김치인이 비로소 명(命)을 받들었다.

 

7월 20일 계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치인이 첫 경연에 입대(入對)하여 성궁(聖躬)을 아끼고 보전하며, 힘써 겸덕(謙德)을 다하고, 곧은 말을 받아들이고, 유술(儒術)을 숭상·장려하며, 재용(財用)을 절제하는 도리를 아뢰니, 임금이 모두 우납(優納)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세상에 독서하는 선비는 어찌하여 옛날 조식(曹植)과 같은 자를 얻을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사람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호서(湖西) 감영(監營)에서 빚을 감면한 이후에 감영의 모양이 잔박(殘薄)해졌다고 하여, 도신(道臣)이 곡물(穀物)을 구획해 줄 것을 장청(狀請)하니, 임금이 비국 당상에게 자문하여 2만 곡(斛)을 획급하고 취모(取耗)238)  하여 지용(支用)토록 하였으며, 또 호남의 곡물 2천 곡을 탐라(眈羅)로 운반하여 기민(饑民)을 진휼하도록 명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1일 갑오

임금이 숭정전 뜰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는데,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일(忌日)이기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서지수(徐志修)를 병으로 면직하고, 박상덕(朴相德)으로 대신하였다. 심수(沈鏽)를 대사헌으로, 이육(李堉)을 사간으로, 홍응보(洪應輔)를 장령으로, 이명훈(李命勳)·이영중(李永中)을 정언으로, 이최중(李最中)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가을비가 곡식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영제(禜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전 교리 윤시동(尹蓍東)을 특별히 발탁하여 제주 목사를 삼고 면칙(面飭)하여 보내었는데, 탐라의 보리농사가 흉작이어서 도민(島民)이 굶주림을 호소하는데도 당시 목사이던 유진하(柳鎭夏)가 어리석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몸소 도민에게 효유하는 글을 지어 신임 목사로 하여금 선유(宣諭)케 하였으니, 대개 열조(列朝)의 성덕(盛德)을 본받아 일도(一島)의 굶주림을 불쌍히 여기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서 따르도록 하는 성의(聖意)를 얻게 한 것이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月臺)에서 영제에 쓸 향을 친히 전하고, 장맛비가 재앙이 된다 하여 사흘 동안 감선을 감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3일 병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4일 정유

한성 판윤 심성진(沈星鎭)이 늙고 병듦으로써 면직되고, 이창수(李昌壽)로 대신하였다.

 

임금이 《송사(宋史)》를 보다가 경연의 신하들에게 하교하기를,
"옛날 송(宋)나라 영종(英宗)이 잠저(潛邸)로부터 들어와 〈천자의 자리를〉 계승할 때에 그 행장[行李]이 쓸쓸하여 오직 서책 두어 상자뿐이었는데, 삼가 내 집을 지키겠다는 말은 그 또한 현명하였으니, 여기에 내가 세상에 드문 느낌을 갖는 바이다."
하였다.

 

임금이 세손과 더불어 장차 알릉(謁陵)의 예를 행하려 할 새 기군(旗軍)의 세마(洗馬)가 이미 행해짐으로써 태복시(太僕寺)의 당상관과 낭관을 불러들여 음식을 내렸으며, 이어 몸소 ‘지희(志喜)’ 두 글자를 써서 소지(小識)와 아울러 새겨 태복시에 걸게 하였다.

 

정환유(鄭煥猷)를 장령으로, 이치중(李致中)을 지평으로 삼았다.

 

7월 26일 기해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9일 임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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