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5권, 영조 41년 1765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1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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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병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경연 홍계희(洪啓禧)가 다시 물러가겠다는 청을 거듭하면서 연석(筵席)에서 매우 간곡하게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동승(尹東昇)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장령 이만회(李萬恢)가 상소하여 백성의 고통을 대략 진달하고, 또한 전정(田政)에 있어서 답험(踏驗)213)  하는 데 잘 살필 일과, 재탈(災頉)에 대하여 사실대로 따를 일과, 포흠을 〈인족(隣族)에게〉 징수하는 피해와, 대봉(代捧)하는 폐단들을 진달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엄하게 신칙하게 하였다.

 

6월 3일 정미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어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인조(仁祖) 때의 《계해일기(癸亥日記)》를 가져다 보고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과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화진(金華鎭)을 승지(承旨)로, 채위하(蔡緯夏)를 장령(掌令)으로, 서호수(徐浩修)를 지평(持平)으로, 이은(李溵)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삼았다.

 

함경도(咸鏡道)의 안변(安邊)·함흥(咸興)에 황충(蝗蟲)의 피해가 있었는데, 포제(酺祭)를 설행하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옛날 당나라 태종은 황충을 삼킨 일이 있는데214)  , 이는 비록 어질고 의로움을 가차(假借)한 것이지마는, 그의 마음에 정성이 깃들지 않았다면 그 황충을 비록 삼키더라도 어찌 목구멍에 넘어갔겠는가? 그 마음이 바로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었다."
하였다.

 

6월 4일 무신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윤동도(尹東度)를 면직시켰다. 윤동도는 최익남(崔益男)의 소척(疏斥)으로 교외(郊外)에 물러가 사직하였는데, 상소가 무릇 여섯 차례나 올라가서야 비로소 면직이 허락되고 서추(西樞)215)  에 부직시켰다.

 

6월 5일 기유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서 조강을 행하였다. 한성 판윤(漢城判尹) 박상덕(朴相德)의 아룀에 따라, 구궐(舊闕)에서 나무를 도벌(盜伐)하지 못하게 하는 금령(禁令)을 거듭 밝히고, 또 후원(後苑)에서 흙을 파가는 폐단도 금하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6일 경술

임금이 어가(御駕)를 타고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서 선원전(璿源殿)에 배알하였는데,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기신(忌辰)이 8일(임자)이기 때문이었다.

 

6월 7일 신해

임금이 진전(眞殿)216)  의 재실(齋室)에서 재거(齋居)하였다. 몸소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서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대축(大祝) 윤승렬(尹承烈)이 공복(公服)을 벗고 전사청(典祀廳)에서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하여 윤승렬을 김포군(金浦郡)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원의손(元義孫)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6월 8일 임자

환궁하였는데, 지나는 길에 육상궁(毓祥宮)에 배알하였다.

 

현광우(玄光宇)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6월 9일 계축

유언국(兪彦國)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6월 10일 갑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이어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1일 을묘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지평 서호수(徐浩修)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각(臺閣)을 너그러이 용납하고 곧고 충성스러운 말[讜直]을 힘써 권장하는 것은 곧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리하여 전후(前後)로 말한 것 때문에 죄를 입은 자는 거의 모두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황최언(黃最彦)만은 백수(白首) 노경(老境)에 거친 변방에서 아직까지 석방되어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대성인(大聖人)께서 덕성을 함양하고 도의를 부식(扶植)하는 뜻이겠습니까? 청컨대 황최언을 면직시켜 서인(庶人)으로 만들라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임금이 그 임금의 고심(苦心)은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그 할아버지와 아비의 자식으로서 이렇게 나라를 저버리는 거조를 하느냐고 성내어 질책하고 그를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엄인(嚴璘)과 옥당 박사해(朴師海)·남현로(南玄老) 등이 또 거듭 서호수를 구제하려고 하니, 임금이 더욱 격노하여 비로소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고 명하고, 또 서호수는 해남(海南)으로, 남현로는 안성(安城)으로 귀양보내고, 엄인과 박사해는 탈고신 3등(奪告身三等)의 율(律)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서호수가 죄를 졌을 때에 박사해가 먼저 구하려고 하였는데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남현로가 또 앞장서 나와서 말하였으니, 임금은 그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영호(營護)하려는 정상을 살피고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당시에 임금이 바야흐로 대각(臺閣)의 우유 부단(優柔不斷)함을 근심하여 신하들을 독려하고 신칙하였지마는, 간관(諫官)이 일을 말함에 있어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엄교(嚴敎)를 거듭 내리어 귀양보내거나 내쫓는 일을 잇달아 하였다. 또 자식을 잘 가르치지 못하였다고 하여 서호수의 아버지 서명응(徐命膺)과 남현로의 아버지 남태제(南泰齊)를 파직시켜 처분(處分)이 갈수록 지나치니, 조야(朝野)가 근심하고 한탄하였다. 또 대각(臺閣)에 명하여 곧 황최언(黃最彦)에게 내린 벌을 거두라고 한 계(啓)를 정지시키라고 하니, 집의(執義) 박지원(朴志源)이 나와서 정계(停啓)하였다.

 

이인배(李仁培)를 승지(承旨)로 특별히 제수하고, 한광회(韓光會)를 대사헌(大司憲)으로, 박지원(朴志源)을 집의(執義)로, 서병덕(徐秉德)을 장령(掌令)으로, 권이강(權以綱)을 지평(持平)으로, 홍윤(洪錀)·이익선(李益烍)을 정언(正言)으로, 민백흥(閔百興)을 강원도 관찰사로, 정상순(鄭尙淳)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응교(應敎) 김치양(金致讓)을 특별히 발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고, 원인손(元仁孫)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임금이 조정에 등분(等分)이 분명하지 않고 공회(公會) 때의 차례가 혼잡함을 근심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면칙(勉飭)하고 시체(時體)를 버리도록 힘쓰게 하였으며, 경재(卿宰)가 대료(大僚)217)  를 보면 예수(禮數)를 엄히 하여 옛날의 규례를 회복하게 하였으니, 대개 대신(大臣)이 마침 어떤 일을 인연하여 진백(陳白)하였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또 연체(筵體)가 엄하지 않아 여러 신하들의 출입에 전혀 경근(敬謹)함이 모자란다 하여 신칙하기를 청하였다.

 

정상순(鄭尙淳)을 승지(承旨)로, 홍낙명(洪樂命)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영희전(永禧殿)의 전정(殿庭)에 있는 회목(檜木)이 벼락맞아 상처가 났으므로, 위안제(慰安祭)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6월 12일 병진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치양(金致讓)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3일 정사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삭시사(朔試射)에 현탈(懸頉)218)  한 것으로써 문신(文臣) 중에 실직(實職)이 있는 자 14인을 파직시켰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서 연령군(延齡君)에게 치제(致祭)하였다.

 

6월 14일 무오

임금이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이어서 예문관(藝文館)에 나아가서 전교하기를,
"여기는 경자년219)  에 거려(居廬)220)  하던 곳이다. 망팔(望八)의 나이에 왕위에 앉아 있으니, 나의 감회가 배(倍)는 된다."
하고, 이어서 입시한 겸사(兼史)를 승서(陞敍)하게 하고, 이례(吏隸)들에게는 미포(米布)를 상주었다.

 

6월 15일 기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원에서 억지로 이끌려 피혐(避嫌)한 대신(臺臣)의 계달을 봉입(捧入)한 것으로써 정원에 있던 승지들을 모두 체직시켰다. 윤득양(尹得養)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익원(李翼元)·홍준해(洪準海)·홍낙순(洪樂純)을 승지(承旨)로 삼고, 전 응교(應敎) 박성원(朴盛源)을 발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6월 16일 경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유생의 전강(殿講)을 친히 시험보이고,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이민좌(李敏佐)를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급분(給分)하라고 명하였다. 또 이문 제술(吏文製述)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전 주부(主簿) 남옥(南玉)이 문재(文才)가 있다고 하여 특별히 우직(右職)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6월 17일 신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성천주(成天柱)가 도내(道內)의 수령(守令) 중에서 이식(利息)을 늘려 민역(民役)을 면제시킨 자를 포상하여 주도록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양리(良吏)를 포상하는 것은 도신의 책임이다. 이식을 늘려 민역을 면제시키는 것은 흉년에도 오히려 구차스러운 것인데, 하물며 보통인 해이겠는가? 이는 바로 취렴(聚斂)하는 신하이니, 포문(褒聞)할 자가 아니다."
하고, 해당 도신을 문비(問備)하였다.

 

특지(特旨)를 내려 민홍렬(閔弘烈)·이성수(李性遂)를 교리(校理)로 삼았으니, 민홍렬은 민백상(閔百祥)의 아들이고, 이성수는 종신(宗臣)의 먼 후예(後裔)이었다.

 

6월 18일 임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서 한학 문신(漢學文臣)을 친히 시험 보였다. 구익(具㢞)이 잘 읽는다는 것으로 승륙(陞六)하게 하고, 지중추(知中樞) 홍계희(洪啓禧)는 한어(漢語)를 밝히 안다고 하여 사역원 제거(司譯院提擧)로 특차(特差)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추천한 것이었다. 홍봉한이 또 이봉환(李鳳煥)·남옥(南玉)·성대중(成大中)은 서류(庶流) 중에 인재(人才)라고 하여 추천하고 차례에 따라 조용(調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9일 계해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였다. 참찬관 홍준해(洪準海)가 안주 목사(安州牧使)에서 새로 해임되어 왔는데, 임금이 안주의 호구(戶口)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홍 준해가 말하기를,
"호구가 전보다 점점 적어집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근일 수령들이 함부로 호구를 늘려 잡아 공을 삼으려고 하는데, 승지는 홀로 사실대로 대답하니, 가히 그가 충실한 정사를 한 것을 미루어 알겠다."
하고, 특명으로 말을 하사하였다. 이어서 경조(京兆)에 신칙하여 다시 호구를 빠뜨리거나 함부로 증가시키는 폐단을 거듭 밝히게 하였다.

 

6월 20일 갑자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새로 임명한 옥당(玉堂) 민홍렬(閔弘烈)과 이성수(李性遂)가 명령에 응하지 않는다고 하여 강화(江華)의 제물포(濟物浦)와 덕진(德津) 양진(兩鎭)의 만호(萬戶)로 출보(黜補)시켰다. 호조 판서 김상철(金尙喆)을 병으로 면직시키고, 정홍순(鄭弘淳)으로 대신하게 하였으니, 영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정홍순은 빈틈없이 일을 처리할 재목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송형중(宋瑩中)을 승지(承旨)로, 남태회(南泰會)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기경(李基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헌묵(李憲默)을 집의(執義)로, 안표(安杓)를 사간(司諫)으로, 이행원(李行源)을 장령(掌令)으로, 송영(宋鍈)을 지평(持平)으로, 구익(具㢞)을 정언(正言)으로, 황경원(黃景源)을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김노진(金魯鎭)을 부응교(副應敎)로, 김재순(金載順)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6월 21일 을축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종신(宗臣)들을 친히 시험보여 한학(漢學)을 강(講)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왕손(王孫)이 관례(冠禮)를 행할 때에 폐백을 10필(匹)로 하던 것을 반(半)으로 감하게 하고, 여러 집사(執事)들도 역시 전에 비하여 감등(減等)하라고 명하였다.

 

6월 23일 정묘

임금이 친히 도정(都政)에 임하여 김상익(金相翊)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이방엽(李邦曄)을 북병사(北兵使)로, 이방수(李邦綏)를 남병사(南兵使)로, 서지수(徐志修)를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한익모(韓翼謨)를 판의금(判義禁)으로, 구상(具庠)을 수찬(修撰)으로,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烜)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김선행(金善行)을 부사(副使)로, 홍억(洪檍)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황인검(黃仁儉)과 병조 판서        심수(沈鏽)의 정사였다.

 

6월 24일 무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날씨가 덥다 하여 죄질이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5일 기사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과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 두 왕손의 관례(冠禮)를 행하고 다음날 아침에 사은(謝恩)을 하라고 명하였다.

 

이국현(李國賢)을 북병사(北兵使)로, 원경렴(元景濂)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6일 경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동몽(童蒙)을 거느리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왕세손을 시좌(侍坐)하게 하고 〈《서경(書經)》의〉 주관편(周官篇)을 강하라고 명하였다. 묻기를,
"‘국록은 사치한 것을 기약하지 않는다.[祿不期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이냐?"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국록을 받게 되면 사치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너는 사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감히 사치함을 경계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너는 모월 모일(某月某日)의 문답(問答)을 사책(史冊)에 써두었다가 타일(他日)에 증거가 되게 하라."
하고, 이어서 동몽(童蒙)들에게 명하여 그들이 강한 것을 강하게 한 뒤에 물러가게 하였다.

 

황해도에 황충(蝗蟲)의 피해가 있어서 포제(酺祭)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6월 27일 신미

임금이 목릉(穆陵)의 기신(忌辰)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상번 향군(上番鄕軍)을 불러들여 농사 형편을 물었다. 도정(都政)에서 〈제수된〉 여러 수령들의 사폐(辭陛)221)  하는 자들을 면칙(面飭)하여 보내었다.

 

6월 28일 임신

임금이 의릉(懿陵)222)  의 기신에 쓸 향을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지영하였다.

 

6월 29일 계유

임금이 종묘(宗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관서(關西)와 호남(湖南)에 수재(水災)가 나서 백성들이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으니,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친히 상방(尙方)223)  에 나아가 어제(御製)를 써서 원벽(院壁)에 걸게 하였다. 상방은 곧 옛날 승문원(承文院)인데 종반(宗班)의 문안청(問安廳)이 되었다. 임금이 잠저(潛邸) 때인 신묘년224)  에 처음으로 이 청(廳)에서 문안하였기 때문에 옛날에 대한 감회를 기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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