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갑진
임금이 명릉(明陵)을 지알(祗謁)하였는데, 왕세손이 수행하였다. 임금이 융복(戎服)을 갖추어 말을 타고 재실(齋室)로 나아가 참포(黲袍)로 고쳐 입고서, 능을 살핀 다음 의식대로 제례를 행하고 저녁에 환궁하였다.
선전관(宣傳官) 임후(任逅)의 말이 놀라 행차의 앞을 막으며 지나갔다고 하여, 그 직을 파하고 북청(北靑)에 유배하였다. 이윤성(李潤成)을 금위 대장으로 삼았다.
임금이 세손이 행차에 수행한 것은 국조 4백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하면서 심히 기뻐하였다. 4구(句)를 손수 지었으니, 이르기를,
"조손(祖孫)이 함께 배알함을 어찌 과거의 사첩(史牒)에서 들어보았는가? 일에 따라 억압하지 않았으니 그 회포 더욱 절실하도다."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和答)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8월 2일 을사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기백(畿伯)과 각무(各務) 차원(差員)을 소견(召見)하고, 고을의 폐단과 백성의 어려움을 물어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게 하였다.
전 판서 김상석(金相奭)이 졸하였다. 김상석은 평소에 조용하고 간소(簡素)함으로써 일컬음을 받았다. 벼슬이 높은 반열에 오르고 기사(耆社)에 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임금이 정축년239) 에 인원 왕후(仁元王后)가 병으로 아플 때 김상석이 부제조로 약원(藥院)에서 약을 맡아 본 공로가 있었으므로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고, 해당 조(曹)에 명하여 예(例)와 같이 부의(賻儀)를 베풀게 하였다.
8월 4일 정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8월 5일 무신
이최중(李最中)을 대사헌으로, 원인손(元仁孫)을 대사간으로, 이석재(李碩載)를 집의로, 이적보(李迪輔)를 장령으로, 임희증(任希曾)을 지평으로, 홍낙인(洪樂仁)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석강을 행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탄신에 진하(陳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배천 군수(白川郡守) 홍익필(洪益弼)을 배천에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응교 이재협(李在協)·교리 김귀주(金龜柱) 등이, 홍익필이 일개 미물로 인하여 옥당을 여지없이 헐뜯어 배척하였다는 것으로써 경연에서 아뢰매,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에 앞서 영관(瀛館)240) 에서 학을 기르는데 매양 그것을 해서(海西)의 고을에 구하자, 옥당이 또 공문(公文)을 보내어 그것을 구하니, 홍익필이 패지(牌旨)를 저인(邸人)에게 던지며 말하기를, ‘옥당은 일찍이 충성된 말을 아뢰는 계책은 세우지 않고, 도리어 한갓 날짐승 같은 노리개 때문에 외읍(外邑)에 폐단을 끼친다.’고 하였는데, 홍익필이 경연관을 기롱하고 배척함은 진실로 외읍으로서의 체통을 잃었지마는 곧 조참의 대조회 때에 다른 아룀은 없고 단지 이로써 한을 푸는 자리로 삼았으니, 논사(論思)의 책임을 크게 훼손하였다. 지평 유항주(兪恒柱)가 소를 올려 홍익필을 구제하기를,
"수령의 승진과 좌천은 마땅히 치적을 보아야 하며, 언어가 경박하고 지나치다 하여 문득 그를 죄줄 수는 없습니다. 유신(儒臣)들의 죄를 청함이 본래 일개 미금(微禽)에서 나왔는데, 이것으로 유배시킴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중도를 지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홍익필을 두둔한다고 하면서 노하여 물리쳤다.
형조 판서 황인검(黃仁儉)이 진사 이진(李璡)이란 자가 재신(宰臣) 유최기(兪最基)를 헐뜯어 욕보였다 하여 추문(推問)하여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비록 〈그가〉 서류(庶類)이기는 하나 이미 사마(司馬)에 올랐으니, 선비는 죽일 수는 있으나 욕보일 수는 없으므로 굳이 형장을 써서 신문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삼수(三水)에 유배토록 명하고, 이제로부터 진사에 오른 자는 비록 유배할지라도 형신(刑訊)을 하지 말 것을 수교(受敎)에 재록(載錄)하도록 하였다.
이최중을 도승지로 삼았다.
평안도 의주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는 말[斗]만 하였다.
8월 6일 기유
임금이 추모동(追慕洞)에 거둥하여 비각(碑閣)을 살피고 여경방(餘慶坊)의 사제(私第)를 두루 들렀다. 동(洞)은 곧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탄강(誕降)한 옛터이고, 방(坊)은 곧 숙빈(淑嬪) 최씨가 강생(降生)한 옛집이었다. 민홍렬(閔弘烈)과 조영진(趙榮進) 등을 소견하였는데, 조영진은 곧 고 판서 민진후의 외손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先正) 송준길(宋浚吉)은 곧 성후(聖后)의 외조이고 송명흠(宋明欽)은 또한 선정의 손자인데, 바야흐로 죄로써 유배되었으니, 마땅히 용서해야 할 것이다."
하고, 처음에는 죄명을 씻어주도록 명하였다가 바로 곧 그만두게 하였다. 임금이 조영진에게 묻기를,
"예전에 내사(內賜)241) 한 옥비녀가 있는데, 민홍렬의 집에 소재해 있는 것을 경은 알고 있는가?"
하니, 조영진이 말하기를,
"과연 있습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성모(聖母)께서 쓰시던 방을 또한 아는가?"
하니, 조 영진이 말하기를,
"신의 늙은 누이에게 들었습니다."
하매, 임금이 비록 끄덕였으나, 많은 사람들은 조영진이 억측(臆測)으로 대답하여 은총을 바란다고 비웃었다.
이길보(李吉輔)를 대사헌으로, 이지억(李之億)을 판윤으로, 신위(申暐)를 예조 참판으로 삼고, 서지수(徐志修)를 특별히 발탁하여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평안도 의주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리고 돌이 날렸다.
임금이 서학(西學)의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을 소견하여, 《주역》을 외도록 명하고,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임금이 백행원(百行源)을 몸소 지어 간행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대개 사람의 자식으로서 힘을 다해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갖추어 말한 것으로, 무릇 수천 자(字)가 되는데, 성심(聖心)이 추모하여 지은 것이었다.
8월 7일 경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노진(金魯鎭)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8월 8일 신해
당시 궁인으로서 조급하고 사나운 자가 하나 있었는데, 우물에 몸을 던져 죽으니, 임금이 그를 심히 측은히 여겨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고, 드디어 궁녀 30인을 풀어 주고 하교하기를,
"당 태종은 궁녀를 풀어준 것이 3천 명인데, 나는 30명이 된다. 지난 해에 자수궁(慈壽宮)을 헐고 그 재목으로 비천당(丕闡堂)을 세웠으니, 열조(列朝)의 성덕(盛德)을 본받을 만하다."
하고, 이어 궁녀로서 그 친족들을 데리고 궁중에 유양(留養)하는 자는 모두 적발하여 쫓아내어 금중(禁中)을 깨끗이 하도록 명하였다.
8월 10일 계축
이성수(李性遂)를 집의로, 조준(趙㻐)을 지평으로, 이재간(李在簡)을 헌납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비국반(備局班)과 경연반(經筵班)이, 혹 외임(外任)이 함께 들어가는 때를 만나면 그 품수(品數) 때문에 매양 좌차(座次)가 서열을 잃어버리는 폐단이 많이 있습니다. 이후로는 내외의 구별을 나누고 계급의 서열을 엄히 하여 서로 뒤섞이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1일 갑인
주강을 행하였다.
8월 13일 병진
임금이 정릉(貞陵)의 기신제에 쓸 향과 축문을 숭현문(崇賢門)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8월 14일 정사
임금이 명릉(明陵)의 기신제에 쓸 향과 축문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8월 15일 무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배알하고, 이어 태묘에 나아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전알례(展謁禮)를 행하였다. 세손빈(世孫嬪)이 처음으로 묘현례(廟見禮)를 행하였다. 빈궁이 수식(首飾)을 더하고 예복을 갖추고서 연(輦)을 타고 나와 묘(廟) 동문 밖에 이르렀다. 수칙(守則)이 무릎을 꿇고 ‘강여(降輿)’라고 외쳐 청하매, 빈궁이 가마에서 내리니, 수규(守閨)가 앞에서 인도하여 동협문(東夾門)으로 들어가서 절하는 자리[拜位]에 나아가 북향하여 섰고, 상궁이 전하를 인도하여 서는 자리[立位]에 나아가 서향하여 섰다. 전찬(典贊)이 ‘국궁(鞠躬)·사배(四拜)·홍(興)·평신(平身)’을 외치매, 빈궁이 몸을 굽혀 네 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바로 하기를 마치자, 상궁이 전하를 인도하여 소차(小次)로 돌아오고, 수규는 빈궁을 인도하여 동문 밖으로 도로 나오자, 수칙이 무릎을 꿇고 ‘승여(乘輿)’라고 외쳐 청하니, 빈궁은 가마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영녕전(永寧殿)에 들러 또한 그와 같이 하고, 이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예(禮)는 곧 신축년242) 에 고(故) 좌상 이건명(李健命)이 정한 바로서, 정성 왕후(貞聖王后)에서부터 비로소 행하였다."
하였다.
8월 16일 기미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직(司直) 심수(沈鏽)가 아뢰기를,
"하천을 준설한 후에 나무로써 엮어서 얽어매는 것은 쌓자마자 허물어져서 끝내 돌로 쌓아 견고하게 됨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용이 많이 들어 어렵다고 했으나, 후에 드디어 돌로 쌓는 역사(役事)가 있었다.
임금이 전 참판 한덕필(韓德弼)이 한(漢)나라 양리(良吏)의 풍모가 있다고 여겨 그 침체함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전조(銓曹)에 명하여 조용(調用)토록 하였다.
8월 17일 경신
임금이 현종 대왕의 기신제에 쓸 향과 축문을 숭정전 뜰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금군(禁軍)을 불러들여 하교하기를,
"7백 금려(禁旅)243) 의 설치는 선조(先朝)의 일모 도원(日暮途遠)한 성대한 뜻을 우러른 것인데, 중도에 돌아가시니, 실로 지사(志士)의 한탄할 일이다. 금려의 절목은 고(故) 중신 박문수가 지은 바로서 나라를 위해 베푼 것이니, 그 근실(勤實)함을 가히 볼 수 있다."
하고, 이어 해당 조(曹)에 신칙하여 이를 준수하고 버리지 말도록 하였다.
왕세손에게 시좌(侍坐)하라 명하여 《서경(書經)》의 문의(文義)를 묻고, 이어서 《시전(詩傳)》을 강(講)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세손은 나이 아직 약관이 못되었으나 이미 사서 이경(四書二經)을 통달하였으니 또한 가상하지 않는가?"
하였다.
8월 18일 신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응교 이재협(李在協)을 특별히 탁용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승지 홍낙순(洪樂純)에게 명하여 신축년의 일기를 읽게 하였는데, 역신 유봉휘(柳鳳輝) 등의 흉소(凶疏)244) 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오로지 당파에 치우친 마음에서 나와 마침내는 난역(亂逆)에 이르렀는데, 오늘날 신자(臣子)들이 나의 40년간의 고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또 하나의 유봉휘라 할 것이다."
하였다.
이후 행차 때에는 상서원의 보단자(寶單子) 중에 소신보(昭信寶)245) 를 이덕보(以德寶)라고 고쳐 부르도록 명하였다.
8월 19일 임술
임금이 을유년246) 은 효묘(孝廟)께서 왕세자로 책봉된 해가 거듭 돌아왔음으로써 경외의 선비들을 숭정전 뜰에서 친시(親試)하였는데, 정알과(庭謁科)의 예(例)에 의거하여 강(講)을 면제하도록 명하였다. 이현영(李顯永)·김치구(金致九) 등을 뽑고 모두 급제(及第)를 내렸다.
조영진을 도승지로 삼았다.
8월 21일 갑자
수령으로서 차원(差員)이 되어 온 자를 소견하여 농사 형편을 묻고, 직접 신칙하여 보냈다.
8월 22일 을축
임금이 전 교리 홍억(洪檍)으로 병조 번고 어사(反庫御史)를 삼고, 창고에 있는 썩고 상한 무명을 가려서 훈국(訓局)247) 에 내주어 중순(中旬) 상격(賞格)의 밑천에 보태도록 명하였다.
8월 23일 병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은(李溵)을 이조 참판으로, 권도(權噵)를 이조 참의로, 유한소(兪漢蕭)를 대사간으로, 이헌묵(李憲默)을 사간으로, 홍수보(洪秀輔)를 헌납으로, 임성(任珹)을 장령으로, 윤사국(尹師國)을 지평으로, 이계(李溎)를 정언으로, 이상지(李商芝)를 응교로, 홍억(洪檍)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옥당의 김귀주와 구상(具庠) 등에게 명하여 《문묘향사록(文廟享祀錄)》을 짓도록 하고, 몸소 서문을 지어 책머리에 싣도록 하였으며, 숭절사(崇節祠) 사현(四賢)을 권말(卷末)에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8월 24일 정묘
임금이 의릉(懿陵) 기신제에 쓸 향과 축문을 숭현문(崇賢門)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8월 25일 무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군문(軍門)에 빚진 사람들을 충군(充軍)시켜 봉납(捧納)을 독촉하는 폐단을 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빚을 감하여 그 폐단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8월 26일 기사
임금이 당심(黨心)을 떨어 없애고 들뜨고 소란함을 씻어 없애는 것으로 글을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諭示)하였다.
8월 27일 경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8일 신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또한 수행하였다. 세손이 먼저 장수를 축하하는 술잔을 드리고, 여러 기신(耆臣)들에게 차례로 술잔을 드리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술잔을 잡고 장수를 기원하며 말하기를,
"덕(德)은 선성(先聖)에 짝하시고 공(功)은 열조(烈祖)에 빛나십니다. 소신(小臣)이 술잔을 드리오니, 남산(南山)과 같이 장수(長壽)를 누리소서."
하였다. 여러 종신(宗臣)들도 또한 차례로 술잔을 드렸다. 임금이 봉조하 유척기(兪拓基)·전 판서 이태화(李泰和)·지사(知事) 박치화(朴致和)가 모두 숙묘(肅廟)를 생전에 섬겼다고 하여,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육상궁에 들러 배알하고, 저녁에 환궁하였다. 사서(士庶)의 90, 80세된 자에게 비단과 고기를, 입직한 향군(鄕軍)에게 유의(襦衣)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8월 29일 임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흥태문(興泰門)에 나아가 늙은 백성들을 초견하고 쌀을 주어 보냈다. 임금이 또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하의(賀儀)를 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종신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 등이 여러 종실들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진연(進宴)할 것을 한사코 청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30일 계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숭정전 뜰에서 공경히 맞이하고, 이어 주강을 행하였다.
영의정 홍봉한 등이 2품의 여러 재신들을 이끌고 빈청(賓廳)에 나아가 탄신 하례(誕辰賀禮)를 행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입시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탄신은 무슨 마음으로 축하하는가? 결코 받을 수가 없다. 갑진년248) 이달 30일은 곧 내가 등극(登極)한 날이니, 해는 비록 같지 않으나, 날은 서로 일치하니, 이날로써 축하하면 또한 경들의 정례(情禮)를 족히 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하였다. 임금이 초하룻날 축하를 베풀고, 외방 물선(物饍)을 폐지하며 단지 봉전(封箋)만 하도록 하고, 도·류(徒流)의 형을 받은 자는 모두 사면하도록 하며, 고묘(告廟)·반교(頒敎)는 예에 따라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전 좌랑 심익운(沈翼雲)을 특별히 제배하여 지평으로 삼았다. 심익운은 흠이 있었는데, 여러 번 조용(調用)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전조(銓曹)에서 감히 언뜻 의망(擬望)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특별히 벼슬을 제수하니, 식자(識者)들이 우려하고 탄식하였다.
전라도 암행 어사 김재순(金載順)이 복명하였다. 임금이 전라 우수사 이홍(李泓)이 우후(虞候)를 포상토록 계(啓)를 올린 것이 사(私)를 따른 불공(不公)의 죄가 있다 하여 나처(拿處)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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