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갑술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뭇 신하의 하례를 받고, 글을 지어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에게 유시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아! 나를 낳고 기르셨으나 봉양할 수 없음을 한탄한 〈《시경(詩經)》의〉 육아편(蓼莪篇)이 있으니, 차마 하례를 받을 수 없는 마음 사기(四紀)가 하루 같았는데, 항차 금년은 역시 〈내가 태어난〉 갑술년249) 과 같도다. 정성이 얕아 미쁘지 않는데도 이에 이러한 행사가 있으니, 어찌 이를 막겠는가? 내 마음에 헤아려지는 바가 있으니, 인군에겐 그 마음을 능히 지키고 신하에게는 정례(情禮)를 거의 펴게 되었다. 아! 오늘은 곧 갑진년 즉위한 이튿날이라. 아! 나의 덕없음과 무능함으로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곧 열조(列祖)께서 돌봐 주신 바요, 황천(皇天)이 내려 주신 바이다. 곧 이날에 반교(頒敎)하고 절을 받아 우러러 돌봐주심에 답하고 아래로는 많은 이의 마음을 좇으려 한다. 아! 41년 후에 이날을 다시 만났으니, 이는 실로 천만 뜻밖의 일이고 곧 나의 망팔(望八)의 첫 정사(政事)이다. 저번에 내 뜻을 이미 보였는데, 이 예(禮)는 또한 나의 고심이 된다. 입시한 재신(宰臣)이 아뢴 바를 내가 가상히 여긴다. 내 비록 정성이 얕으나, 어찌 차마 일세(一世)를 의심스러운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겠는가? 하교한 바는 오직 옛 마음을 씻어내지 못한 자에게 해당하니, 협찬(協贊)한 사람들이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늙고 쇠잔한 나이에 밝게 유시(諭示)한다. 늙은 나이가 되어 이 하례를 받으니, 아! 대소 신하들은 찌꺼기를 씻어내고 함께 힘을 합하여 나의 40년간의 고심한 바를 이룩하고, 우리 3백 년 종국(宗國)을 보필하라."
하였다.
9월 2일 을해
동틀 무렵에 서리가 내렸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月臺)에 나아가 훈련 도감 군병(軍兵)의 중순(中旬)250) 을 임하여 보고 상(賞)을 내렸다.
9월 3일 병자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당상관·당하관으로서 나이 60, 70세인 사람에게 전강(殿講)을 친히 시험보이고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임금이 석강을 행하였다. 몸소 죄인을 관대하게 처결하여, 전후로 죄를 지어 유배되거나 금고된 자는 모두 용서하여 석방하였다.
9월 4일 정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조재민(趙載敏)을 거두어 서용토록 청하니, 임금이 윤광찬(尹光纘)과 아울러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홍봉한이 또 윤숙(尹塾)을 서용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또한 허락하였다. 전후로 법을 어기고 술을 빚어 유배된 자는 또한 추조(秋曹)251) 에서 결정하여 석방하도록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5일 무인
임금이 흥정당에 나아가 주강을 행하였다. 시독관 이진규(李晉圭) 등이 조재민을 서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모두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흥태문에 나아가 제주(濟州)의 표류한 백성들을 불러들여 위로하고, 양식을 주어 보냈다.
9월 6일 기묘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구일제(九日製)의 유생들의 제술에 친림하여 김한기(金漢耆)·김상묵(金尙默) 등을 뽑고 모두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라고 명하였다.
9월 7일 경진
이해중(李海重)을 대사간으로, 이상지(李商芝)를 집의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으로, 이규위(李奎緯)를 정언으로, 박사해(朴師海)를 교리로 삼았다.
정언 이영중(李永中)이 상소하여 조재민 등에게 직첩을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9월 8일 신사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동몽(童蒙)을 소견하고서 단풍·국화를 제목으로 삼아 각기 시를 짓도록 하고, 종이와 붓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하교하기를,
"40년간의 고심이 쇠하지 않았으니, 인군(人君)이 조화의 권세를 쥐어, 비록 부자가 가난한 자와 혼인케 하고 귀한 자가 천한 자와 혼인케 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여러 세대(世代)에 걸쳐 높은 지위에 있은 집안으로서 함께 나의 신하가 된 자이겠는가? 여러 해 동안 신칙하였으나, 아직도 그 효과가 없으니, 이것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랴? 며느리를 맞고 사위를 택함에 있어 오히려 구습을 지키니, 이 어찌 그 인군을 본받고 네 조상을 생각하는 뜻이겠는가? 이 또한 당(黨)을 짓는 것이니, 내 비록 권하지 않지만, 또한 무슨 낯으로 그 선조(先祖)를 뵙겠는가?"
하였는데, 그 엄히 신칙한 성의(聖意)는 대개 그 표방(標榜)을 떨어 없애고 그 혼취(婚娶)를 같이하게 하여 당파(黨派)가 없도록 하고자 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9월 9일 임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몸소 임하여 무신들의 활쏘기를 시험하였다.
헌부 【지평 임희증(任希曾)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조재민(趙載敏)과 윤광찬(尹光纘)을 서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또 정원(政院)에서 복역(覆逆)252) 하지 않는 것은 출납을 맡은 뜻이 아니라 하여 여러 승지를 파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원 【정언 이영중(李永中)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조재민과 윤광찬을 서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홍인한(洪麟漢)을 도승지로 삼았다.
9월 10일 계미
임금이 행차하여 모화관에 거둥하여 삼청(三廳) 권무 군관(勸武軍官)의 활쏘기를 친히 시험하였는데, 왕세손이 배종(陪從)하였다. 임금이 몸소 황은(皇恩)에 감사한다는 사언시(四言詩) 사구(四句)를 지었으니, 이르기를,
"관(館)의 이름은 모화(慕華)요, 문(門)의 이름은 영은(迎恩)이다. 작은 나라에 오늘이 있음은 진실로 황제의 은혜이라, 하해(河海) 같은 은혜를 어떻게 갚을손가? 오직 성은(盛恩)만 욀 뿐이다. 아! 충자(沖子)는 깊은 은혜를 마음속에 간직하도록 하라."
하니, 왕세손과 여러 신하가 모두 화답해 올렸다.
9월 12일 을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가 다음날 탄신일 등연(登筵)하여 임금을 우러러 바라보기를 청하니, 임금이 조강을 먼저 행한 다음 여러 신하를 보고서 늙은 나이에 자강(自强)한 뜻을 보이겠다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듣건대 탄신일 전후 1일에는 휴강(休講)한다고 하지만, 잘못이다. 아! 늙은 나이에 자강코자 하여 예에 구애하지 않고 그날도 강(講)을 열텐데, 하물며 전후일에 있어서랴! 이후로는 전후일에도 예에 따라 거행할 것을 각사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3일 병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조강을 행하였다. 이어 대신, 2품 이상, 종신(宗臣)·승지·옥당 등을 인견하였는데, 모두 진연(進宴)할 것을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4일 정해
임금이 태묘의 망제에 쓸 향을 숭정전 월대에서 공경히 맞이하고, 향군(鄕軍)에게 농사의 형편을 물었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밤에 옥당과 춘방의 관원을 불러 입시케 하고 음식을 내리면서 하교하기를,
"이는 곧 세손이 올린 음식이다."
하였다. 또 잠저(潛邸) 부근의 고로(故老) 가운데 1백 세 노인을 불러 음식을 주어 보내고, 특별히 그 품계를 올려 주게 하였다.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 등이 또 상소하여 진연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6일 기축
임금이 회경문(會慶門)에 나아가 조참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대각(臺閣)이 편할 대로 하는 것은 자제(子弟)가 그 팔다리를 게을리 하는 것과 같다. 옛 계사(啓辭)를 베껴 전하는 것 외에 백관이 서로 규제함이 없으니, 오늘 입시한 여러 대신(臺臣)은 모두 파직하며, 입시한 옥당도 또한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예조(禮曹) 낭관(郞官)을 보내어 고려 왕의 여러 능을 살피고 그 사초(莎草)를 보수(補修)하며, 그 근처에 암장(暗葬)한 묘를 발굴하여 버리라고 명하였다.
박기채(朴起采)를 집의로, 이세연(李世演)을 지평으로, 송지연(宋志淵)·박사륜(朴師崙)을 정언으로, 김귀주(金龜柱)를 부응교로, 김재순을 교리로, 이형규(李亨逵)를 수찬으로, 정창성(鄭昌聖)을 부수찬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춘추관 당상(堂上)과 낭관(郞官)에게 강화의 사각(史閣)에 가서 태종 대왕이 을유년253) 〈개경(開京)에서 한양(漢陽)으로〉 환도한 월일(月日)을 상고해 내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9월 18일 신묘
임금이 건명문에 나아가 당상 무신의 삭시사(朔試射)를 친히 시험하였다. 고려 왕릉을 봉심(捧審)한 예조 낭관을 불러들여 하교하기를,
"오늘날 신료들의 시조는 또한 전조(前朝)의 옛 신하들인데, 전조 왕릉의 금표(禁標) 내에 경계를 매장하거나 범하여 경작(耕作)하는 것은 어찌 사람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후로 범하는 자는 도형과 유배에 처하고 신칙하지 않는 능관도 또한 변방에 유배시킬 것을 수교(受敎)에 실어 이를 일러 ‘전조제릉금표수교(前朝諸陵禁標受敎)’라 하고, 곧 여러 능이 있는 지방관(地方官)에게 보내어 준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9일 임진
임금이 신축년254) 의 상궁 김씨의 충성을 추념하여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라고 명하고, 또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주(周)나라태백(泰伯)의 덕255) 을 지녔음을 추사(追思)하여 근신을 보내어 지덕사(至德祠)에 제사지내게 하고, 봉사손(奉祀孫) 역시 녹용토록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흉년이 들었음으로써 여러 도(道)의 포흠(逋欠)을 감해 주라 명하였고, 또 도망간 노비를 찾아내고 빚을 징수하는 금령(禁令)을 신칙하였다.
9월 20일 계사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주강·석강을 행하였다.
경상 병사 이일제(李逸濟)가 병으로 순찰을 출발하지 못하여 사행(師行)의 시기를 퇴정(退定)하였다고 치계(馳啓)하여 아뢰니, 임금이 무신으로서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분의가 아니라 하여 거창부(居昌府)에 충군토록 명하였다.
홍술해(洪述海)를 집의로, 이심해(李心海)를 장령으로, 이혜조(李惠祚)를 지평으로, 이재간(李在簡)을 교리로, 이택진(李宅鎭)을 부교리로, 홍수보(洪秀輔)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9월 21일 갑오
천둥의 이변(異變)으로써 찬품을 닷새 동안 줄이도록 명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전교(傳敎)를 내렸다.
승정원에서 천둥의 이변으로써 진계(陳戒)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의 일을 가지고 말해보자면, 기강이 떨어지는데도 언제나 죄파(罪罷)하지 않아서 쇄신해야 할 바가 있으며, 재용(財用)이 줄어드는 데도 아주 적은 것이라 하여 절약하지 않아서 저축해야 할 바가 있습니다. 사람을 그 그릇에 따라 부린다는 것은 공자(孔子)가 가르친 바인데, 전하께서 뭇 관리들을 등용함은 혹 여망을 어기는 일이 있으며, 선비를 시험보이는 것은 적당한 때에 한다는 것이 나라의 법에 있는 바인데, 전하께서 유생을 취함은 혹 정해진 제도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십니다. 대각(臺閣)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이목이니 말하고 침묵하는 사이에 스스로 공의(公議)가 있는 것인데, 피혐(避嫌)의 절차에 대하여 혹은 엄하게 하교하시어 이를 끄집어 드러나게 하시고, 논하여 아뢰는 즈음에 혹은 지시를 내려 정계(停啓)하거나 연계(連啓)하게 하십니다. 태학은 곧 국가의 원기(元氣)인데 집강(執綱)의 임무를 때때로 불협(不協)한 자에게 맡기고, 수령은 생민의 휴척이 달려 있는데 목민(牧民)의 직책을 용렬한 인재에게 맡기는 일이 많습니다. 관작은 공물(公物)이어서 공이 있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내리는 것은 가하거니와, 능력을 갖추었는지 여부를 따지지 않으니, 한갓 재주없는 자가 범람하게 관직에 오르는 탄식을 자아내게 되었고, 전배(前排)는 군용(軍容)을 갖추는 것이어서 교외에 거둥할 때에는 괜찮지만, 크고 작은 전좌(殿座)를 막론하고 그때마다 대령하는 거조가 있습니다. 말하고 논의하는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말하지 않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으니, 인군의 계책을 보필하기는 기대하기 어렵고 백관이 서로 규제하는 일은 적막하여 들을 수가 없습니다. 무릇 이 몇 가지는 어느 하나 재앙을 부르는 단서가 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를 없애는 계책을 궁구해 보면 진실로 구구한 지엽(枝葉)의 말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인(古人)은 만화(萬化)의 근본이 인주(人主)의 일심(一心)에 귀결된다 하였으니, 오늘날 바꿔 옮겨가는 계기도 역시 어찌 이에서 벗어나 다른 데에서 구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계하고 두려워함이 바야흐로 절실하여 이미 스스로 신칙하는 하교를 내렸는데, 그 힘써 아뢰는 바가 모두 심히 절실하니, 가히 맹렬히 반성치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가운데 집강이 불협한다는 얘기는 실로 인군으로 하여금 도를 행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못된다. 아! 비와 이슬의 은택은 이미 가리지 않고 내리는데, 왕자(王者)가 삼무사(三無私)256) 의 도리를 받들면서 어찌 가히 한쪽에 치우칠 수 있겠는가? 서울의 자제로서 집강을 삼는 것이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가 수교(受敎)에 있는가? 비록 먼 외방의 한미한 자라 할지라도 그 조상을 물으면 누구인가? 이 때문에 여기에 협잡을 한다. 아! 한림 권점(翰林圈點)과 이조 낭관(吏曹郞官)의 제수 문제로써 서울 자제들이 울분하게 여긴 지 이미 오래이나, 그 시행함이 이미 오래 되었고 나의 뜻이 이미 굳은 때문에 감히 꾀를 부리지 못하고 단지 여기에 거론하는 것이다. 아! 흰머리 늙은 나이에 경화 거족(京華巨族)에게 흔들리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인군이 되겠는가? 아! 이들의 마음이 울분하게 여기고 있으니, 또한 어찌 의혹을 초래하지 않겠는가? 이것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몇 년 동안 울분한 마음이야 더욱 어떠하겠는가? 이번에 하교한 가운데 어떤 빌미가 어느 곳엔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 것이다. 아! 경들은 세세한 일에 이처럼 하지 말라. 큰 일에 대하여 어찌 걱정할 것이 없겠는가? 모름지기 각기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 등이 차자를 올려 면직되기를 바라니, 임금이 우답(優答)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우답(優答)하였다.
9월 22일 을미
강화도에 가서 실록을 고증하고 돌아온 한림(翰林)이 복명하였다. 임금이 별단(別單)을 보고 하교하기를,
"성조(聖祖)께서 한양에 도읍을 도로 옮긴 후로 성적(盛蹟)이 지금과 부합된 것이 많으니, 참으로 기이하다."
하였다. 읽다가 ‘우리 집안이 어찌 나라를 얻으려는 마음이 있었겠는가?’라는 데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크도다. 성인(聖人)의 말씀이여."
하였으며, 읽다가 9월 13일자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기이하다."
하였고, 읽다가 10월 11일자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환도한 날이다."
하였다. 읽다가 의정부에서 헌수(獻壽)한 데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태평 세계로다."
하였고, 읽다가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이 헌수한 데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종신(宗臣)이 이를 들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다."
하였으며, 읽다가 술을 하사한 데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90노인에게 음식을 내린 일과 서로 부합한다."
하였고, 읽다가 금주령(禁酒令)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 또한 부합한다."
하였다. 읽다가 대상전(大上殿)에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함이 컸다는 데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좋도다. 좋도다."
하였고, 읽다가 뭇 신하와 종신과 더불어 잔치를 베풀었다는 데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옛 녹명(鹿鳴)257) 시(詩)의 뜻이다."
하였으며, 읽다가 제주민을 진휼했다는 데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어쩌면 상부(相符)함이 이처럼 많은가?"
하고, 이어 사각(史閣)에 간직하도록 명하였다.
9월 23일 병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재이(災異)로써 놀라고 두려워하여 하교하기를,
"저번에 실록의 어제(御製) 가운데에 ‘깊은 연못에 임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듯 경계한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보았다. 오늘날 대소 신료들은 전날 찬품(饌品)을 줄인 때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가 거의 다스려질 것이니, 마땅히 을유년의 고사를 준수해야 할 것이다. 무릇 중외의 효자·절부를 찾아내어 보살펴 구휼하고, 혼인하지 못한 남녀에게 혼수를 도와주며, 가난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자에게도 또한 보살펴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어 국초(國初)의 성덕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4일 정유
임금이 주강·석강을 행하였다. 이 때에 액례(掖隷)258) 가 향인(鄕人)과 더불어 서로 싸우니, 하교하기를,
"도성의 지척에서 이 해괴한 일이 있으니, 이 역시 재이를 부르는 단서인데, 이를 다스리지 않으면 궁부 일체(宮府一體)의 뜻이 아니다."
하고, 형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다스리라고 명하였다.
이현조(李顯祚)를 집의로, 김노진(金魯鎭)을 응교로, 이성원(李性源)을 부교리로 삼았다.
9월 26일 기해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왕세손에게 수은묘(垂恩廟)에 가서 배알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국초의 실록을 보니, 사민(四民)259) 을 구휼하는 성거(盛擧)가 있었고, 효묘(孝廟)께서 세자됨이 또한 을유년에 있었으니, 어찌 감히 우러러 성덕을 본받지 않겠는가? 내일은 마땅히 어의동(於義洞)의 옛 궁에 나아가 8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쌀·비단을 하사할 것이니, 경조(京兆)260) 로 하여금 모아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9월 27일 경자
임금이 창덕궁에 행차하고, 이어 어의궁에 나아가 사민(四民) 등에게 쌀을 하사하고 ‘다시 을유년을 당해 추모하여 와서 첨앙한다.[再逢乙酉追慕來瞻]’는 여덟 자를 손수 써서 〈효모께서〉 용흥(龍興)한 옛 궁 어의궁에 새겨 걸게 하였다. 연화방(蓮花坊)의 민인(民人) 등에게 모두 1년간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으며,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의 집에 치제(致祭)하고, 저녁에 환궁하였다.
9월 28일 신축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국조의 고사에 따라 진연례(進宴禮)를 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왕세손이 상소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보령이 망팔(望八)이시고, 덕은 요순에 부합되니, 선열께 빛이 되십니다. 신민(臣民)들이 지금 태평 성대(泰平聖代)를 당하여 그 누가 경하하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신으로서 기쁘고 즐거워 뛰고 춤추는 정성이 또 어떠하겠습니까? 이른봄에 진장(陳章)하였으나 작은 정성이 미치지 못하여 단지 하의(賀儀)만 거행했을 뿐이고 잔치를 베풀자는 청은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심히 억울하였으나 감히 번거로이 되풀이할 수 없어서 지금에 이르렀거니와, 오래 사시기를 바라는 어린 손자의 마음은 실로 감히 내년까지 지체하며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조정 신료의 청함이 지금에는 적막하니, 신이 어찌 번거롭게 해드릴 것을 한갓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침묵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다시금 전번의 청원(請願)을 거듭 아뢰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잔치를 드리려는 청을 특별히 허락하셔서 구구한 정성을 펴게 하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큰 바람과 간절한 기원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몸소 써서 비답하기를,
"너의 글을 보고 너의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 이 일 외에 내가 나라를 위해 마음에 기뻐하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하나는 너의 한결같은 충성이요, 하나는 문리(文理)가 숙성한 것이요, 하나는 주창(主鬯)을 맡길 바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명하여 읽게 하니,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아! 너의 할아비는 본래 성격이 세속의 투식(套式)을 따르지 않는데, 대신과 예관(禮官)이 지금 입시했으니, 어찌 다시 청을 기다리겠는가? 마땅히 바로 허락할 일이지만, 아! 내가 어떤 사람인가? 국초를 추모하면 심회를 억누르기 어렵고, 겨우 바라보면서 깊이 사모하면 오장(五臟)이 무너지는 듯하다. 아! 옛날에는 받들어 기뻐했지만, 이제는 만 가지 생각이 모두 식었다. 지금의 나라 형편을 돌아보면 밤낮으로 마음을 써도 백성들은 날로 곤궁해지고 있으니 진수 성찬도 달갑지 않고, 더욱이 늙은 나이에 복정(復政)하니 감히 스스로 안일할 수가 없다. 하물며 인애(仁愛)하신 하늘의 경계함이 이즈음에 있으니 삼가고 두려워함이 절실한데, 어찌 감히 복선(復膳)했다고 하여 조금이나마 마음이 느슨해지겠는가? 이것이 곧 내가 고심하는 것이다. 또한 너에게 쏠리는 마음이 있으니 무엇인가 하면, 만약 네가 훌륭한 기품으로서 비록 이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이러한 풍예(豊豫)로운 일을 너로 하여금 참여하여 듣고 참여하여 말을 하도록 하고 싶지 않다. 정(情)을 억제하고 청하기를 정지하여 72세의 너의 할아비로 하여금 마음놓고 편히 먹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의 세손은 바로 옛날의 헌릉(獻陵)의 고사와 같다."
하였다.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사관이 실록을 고출(考出)하여 복명하는 것을 들으니, 국초 을유년 10월에 한양으로 환도하고, 20일에 우리 태조 대왕께서 조정 신료의 칭상(稱觴)하는 예(禮)를 받으셨다 합니다. 신 등이 이 보고를 듣고 머리를 모아 서로 축하하기를, ‘지금 이후로 응당 행해야 할 전례(典禮)를 가히 거행할 수 있고, 펴지 못한 소원을 거의 이룰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전하께서 다함이 없는 효성과 훌륭히 이어받은 덕으로써 무릇 여러 가지 하시는 일마다 문득 조종(祖宗)을 본받으시니, 이 세월이 서로 부합하는 것과 고금의 경사가 같음을 돌아보건대 또한 어찌 구름이 일듯이 흥감(興感)하는 것이 없겠습니까? 아! 성조(聖祖)께서 거룩하사 어려운 업적(業績)을 처음 시작하시고, 신손(神孫)이 계승하여 영성(盈成)한 기업을 보전(保全)하여 지키시니, 경사(慶事)가 거듭하고 태평 성대가 계속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성명(聖明)의 교화가 바다같이 넘쳐 천하가 편안하고, 신령한 아름다움이 더욱 커서 큰 복이 강물처럼 밀려옵니다. 72세의 성수(聖壽)가 더욱 높으시고, 환도한 해를 다시 만났으니, 이때에 그 자리에 나아가 그 예(禮)를 행하시어 국초의 성사(盛事)를 뒤쫓아 따르시고, 세상에 드문 아름다운 경사를 크게 꾸미시면, 이는 비단 신 등이 춤추고 기뻐하여 작은 정성을 조금이나마라도 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의희(依俙)하게 하늘과 땅에 오르내리시는 신령들도 또한 장차 위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의 글을 살펴보고 경들의 정성을 알았다. 앞서 비답에 이미 유시하였고 경연에서도 또한 다 말하였으니 이제 어찌 번다하게 유시하겠는가? 부덕함과 무능함으로써 열조의 크고 어려운 업적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4기(四紀)를 하루처럼 지내 왔다. 모름지기 오늘 세손의 소(疏)에 대하여 답한 것을 볼 것이다. 아! 망팔(望八)의 할아비가 나이 어린 손자의 성심으로 올린 글을 이와 같이 굳게 거절하였다. 아! 국초의 성사(盛事)를 어찌 좇아 따르고자 하지 않겠는가마는, 덕이 능히 이어받을 수 없는데도 홀로 그 예를 받는다면, 비록 굳은 마음이 없더라도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나의 뜻은 고정(固定)되었다. 나의 뜻은 고정되었다. 모름지기 이 뜻을 헤아려서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의 종신은 또한 옛날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를 본받고자 한다."
하였다.
9월 29일 임인
밤에 어떤 별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안천 부원군(安川府院君)261)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262) 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효묘(孝廟)께서 을유년에 세자에 책봉될 때의 춘방(春坊)·계방(桂坊)의 관리로서 자손이 있는 자도 또한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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