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계묘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왕세손이 또 상소하기를,
"신이 엊그저께 외람되이 작은 정성을 아뢰어 굽어살피심을 얻으려 기대하였으나, 정성과 효성이 천박하여 윤가(允可)하심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한결같이 굳게 거절함이 실로 추모하고 경계하시는 성의(聖意)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신의 지극히 간절한 마음은 비록 날마다 헌수(獻壽)하고 다달이 경축하더라도 오히려 변변치 못한 작은 정성을 다할 수 없으니, 이는 실로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정리로서 그만둘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런데 작은 정성이 미치지 못하여 유음(兪音)을 아직도 아끼시니, 신은 밤을 지새우며 억울하고 가슴이 막혀 번민과 답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천만번 생각다 못하여 이에 감히 우러러 청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긍휼히 살펴 주시고, 청한 바를 쾌히 윤허하시어 지극한 정리를 펴게 하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손수 써서 비답하기를,
"네가 다시 올린 글을 살피고 너의 정리가 간절함을 알았다. 아! 너는 오늘날 네 할아비의 마음이 어떠하다고 생각하며 너는 오늘날 네 할아비의 회포가 어떠하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비록 천만번 생각했다고 한다지만, 나는 무엇 때문에 천만번 생각할 것이 있겠는가? 네 할아비는 백 번 생각해도 이 마음은 더욱 굳다. 아! 종국(宗國)을 위해 너를 주창(主鬯)으로 정하였다. 네 할아비가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너는 스스로 숙성하였으니, 이번의 청은 양지(良知)에서 말미암은 것이요, 이번의 글은 양능(良能)에서 비롯된 것이라, 처음 너의 글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러한 마음으로 너의 청을 거절하였으니, 이 어찌 즐거워서 하는 일이며, 또한 어찌 형식적인 것이겠는가? 너는 어찌하여 이해하지 못하는가? 너는 어찌하여 이해하지 못하는가? 인하여 이 일로써 겨우 미봉하고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였다. 그런데 근래에 고증해 온 실록을 알고 장차 마음에 움트고자 하였는데, 너의 글 중의 ‘요요(寥寥)’하다는 두 글자로 인하여 이와 같은 여러 신하의 거조(擧措)가 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효성이라 하겠는가? 너의 글 중에 ‘날마다 헌수하고 다달이 경축한다.’는 등의 구절이 있었는데, 네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이에 네 할아비는 참으로 침묵할 수 없으니, 어찌된 일이겠는가? 아! 네 할아비가 덕이 부족하고 무능(無能)한 몸으로서 천만 꿈 밖에 이제 망팔(望八)을 맞이했으니, 너와 여러 신하의 마음이 실로 늙어감을 안타까워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뜻에서 비롯되어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는가? 그러나 너의 자손되는 자가 너를 본받아 이렇게 하여 40이 되어도 그러하고, 50이 되어도 그러하며, 60이 되어도 그러하여, 해마다 칭상(稱觴)하고 달마다 헌수(獻壽)하면, 이는 어버이를 위하는 일이 아니며, 어버이에게 즐거움에 빠지는 허물을 안겨 주게 되는 것이다. 지금 너의 이 말은 가히 나라를 흥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비록 여러 신하가 말을 한다 해도 이로써 인군을 이끌려는 것은 불가하다. 하물며 중대한 부탁을 담당하고 주창(主鬯)을 맡은 자는 이에 삼감이 마땅하므로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고 거듭 유시하니, 충자(沖子)는 깊이 명심하라. 아! 인내로 어제를 보내고 이 일에 수응하니, 네 할아비가 효성이 있다 하겠는가?
어저께 지은 1백 10구절에 걸친 회포의 글을 보라. 나는 글자마다 오열하며 구절마다 울음소리를 삼키니, 이같은 마음으로는 비록 하루에 백 번을 청하더라도 어찌 차마 마음을 돌릴 수 있겠는가? 또 이보다도 더한 것은 지금 모두 말하기를, ‘국초의 성사를 어찌 민몰(泯沒)하게 하겠습니까? 하물며 올해 성상의 마음 또한 어찌 그러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지만, 이는 한갓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무릇 제왕가(帝王家)의 창업(創業)할 때는 수성(守成)할 때와 다르고 또한 서인(庶人)의 경우와도 다른 것이다. 아! 네 할아비의 불초함으로도 오히려 자전(慈殿)의 마음을 따르는 것으로써 중히 여기어, 정묘년263) ·무진년264) 에 모두 감히 청하지 못하고 지체하여 다음해까지 기다렸으니, 아! 이 마음은 자성(慈聖)이 강녕하시어 장차 만수 무강을 기원하는 까닭이다. 아! 정축년265) 에 영모당(永慕堂)에서 승하하신 후에는 비록 청을 펴고자 하였으나 어찌 가히 할 수 있었겠는가? 글을 써서 이에 이르니 마음이 무너지려 하여, 글자를 써도 능히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구나.
아! 비록 그러하지만 자전(慈殿)의 마음을 승순하여, 오히려 회포를 억눌렀는데, 오늘 이 거조를 보건대 이 마음 더욱 참기 어려우니, 너는 마땅히 네 할아비가 자전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본받도록 하라. 너는 《소학(小學)》을 읽었으니 맹자(孟子)의 말에 ‘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증자(曾子)같이 함이 가하다.’고 이르지 않았는가? 이런 때문에 밤낮으로 마음을 써서 잠을 자도 편치 않고 음식을 먹어도 달갑지 않다. 네 직분은 나의 잠자리에 문안하고 음식을 보살피는 것이거늘, 한결같이 잔치를 풍성(豊盛)하게 하고자 하여 할아비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할아비가 지키는 것을 본받지 않으니, 장차 효도를 한다고 하겠는가? 2품 이상을 한 자리에 불러들여 손수 써서 비답하니, 마땅히 이를 본받고 또 본받아 나의 마음을 편안히 하고 나의 마음을 편안히 하면 내가 장차 편안히 잠자고 달갑게 먹을 것이다. 아! 선조의 영혼께서 굽어살필 것이니, 다시는 많이 유시하지 않겠다."
하고, 지신(知申)266) 에게 가서 선유하라고 명하였다.
빈청에서 또 진연(進宴)을 청하기를 하루에 두 번 아뢰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종신이 또 입시하여 진청하였으나, 임금이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고 상신(相臣) 황희(黃喜)의 봉사손(奉祀孫)이 있는지 없는지를 찾아 묻도록 하고, 전조(銓曹)로 하여금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일 갑진
주강을 행하였다.
빈청에서 〈진연(進宴)할 것을〉 또 하루에 두 번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왕세손이 또 상소하기를,
"신이 다시 충정을 아뢰었으나 천청(天聽)은 더욱 아득합니다. 비답하신 말씀에 깨우치시는 바는 글자마다 지성스럽고 간절하시니, 신이 두렵고 답답하여 곧이어 감읍하였습니다. 사람의 자식은 그 어버이의 마음으로써 자기 마음을 삼는 것이니, 전하의 추모하시는 성심(聖心)을 신이 어찌 감동하여 우러러 본받지 않으며, 또한 어찌 감히 여러 차례 번거롭게 하여 성상의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진실로 우리 성상의 보령이 망팔(望八)인 것은 천고의 역사에 드물게 있는 바인즉, 소손(小孫)의 정리에 있어서 앞에 올린 글 가운데 날마다 헌수(獻壽)하고 다달이 경축한다는 말은 실로 떳떳한 천리(天理)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물며 이번 이 거조는 실로 잔치를 풍성(豊盛)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 성상의 자애로운 마음으로써 어찌 차마 힘써 따르지 않겠습니까? 신이 비록 정성과 효성이 미미하고 박약하여 능히 성실하게 미치지 못하였지만, 가는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정성은 끝내 스스로 말 수가 없으니, 청함을 얻지 못하면 감히 그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의 자애로우심으로 소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시어 특별히 유음(兪音)을 내리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손수 써서 비답하기를,
"너의 세 번째 글을 살펴보고 비록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겼지만, 지난번에 이미 모두 유시하였다. 네 할아비는 단지 굳은 마음을 마땅히 지키려 하는데, 어찌하여 사흘 동안이나 이렇게 하는가? 비록 날마다 세 번씩 하여도 한갓 네 할아비에게 수고만 끼칠 뿐이다. 네 할아비로 하여금 편히 먹고 편히 잠자게 하는 것이 곧 너의 효도이니, 청함을 멈추어라. 청함을 멈추어라."
하고, 지신사에게 가서 선유하라고 명하였다.
이홍직(李弘稷)을 장령으로 삼았다.
10월 3일 을사
빈청에서 또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왕세손이 또 상소하기를,
"신이 전후에 올린 세 번의 글은 작은 정성을 누누이 아뢰었으나, 유음을 받들지 못하여 신의 마음이 애타고 답답하여 능히 자정(自定)할 수 없습니다. 방금 빈청의 아룀에 대한 비답을 엎드려 본즉, 누누(縷縷)한 사교(辭敎)가 오로지 추모하시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신이 두렵고 감동하여 눈물이 저절로 흐릅니다.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번거로움을 일삼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실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결코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신으로 하여금 그만두라고 하시지만, 청함을 얻기 전에는 신이 어찌 차마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신이 비록 어리지만 또한 떳떳한 도리를 지니고 있으니, 위로 망팔(望八)의 군친(君親)을 받들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을 펼 수 없다면 그 불효함이 큽니다. 전하께서 어찌 차마 소손으로 하여금 이렇게 되도록 하십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의 자애로움으로써 조금이나마 긍휼함을 드리우셔서 쾌히 따르시도록 하소서. 신은 천만 간곡(懇曲)하게 축원(祝願)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손수 써서 비답하기를,
"너의 글을 살피고 너의 마음을 민망히 여긴다. 네 할아비의 마음은 하루가 지나면 더욱 굳어지고 이틀이 지나면 더욱 굳어진다. 하루를 청하기를 쉬면 네 할아비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요, 이틀을 청하기를 쉬면 네 할아비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니, 네 할아비의 뜻을 헤아려 쾌히 청하기를 쉬면, 네 할아비의 마음도 또한 쾌활해질 것이니, 어찌 가히 한때의 이같은 예(禮)에 비하겠는가? 네 할아비의 마음을 이해(理解)하라. 네 할아비의 마음을 이해하라."
하고, 지신사에게 가서 선유하라 명하였다.
남태제(南泰齊)를 대사헌으로, 안표(安杓)를 집의로, 송덕중(宋德中)을 사간으로, 송영(宋鍈)·정환유(鄭煥猷)를 장령으로, 김재천(金載天)·이창임(李昌任)을 정언으로, 홍윤(洪錀)·이명훈(李命勳)을 지평으로, 이행원(李行源)을 헌납으로, 이성수(李性遂)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구익(具㢞)을 특별히 제수하여 홍문관 수찬으로 삼았다.
종신 안천군(安川君) 이계(李烓) 등이 상소하여 진연(進宴)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4일 병오
빈청에서 또 아뢰어 진연을 청하였다. 왕세손이 또 상소하기를,
"신이 연달아 글을 올려 누누이 간청하여 천청(天聽)을 돌이키시기를 바랐으나, 비답을 받음에 이르러 윤허를 내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빈청에서 아뢴 데 대한 비답을 엎드려 보건대 사연(辭緣)이 지성스럽고 간절하시니, 신은 진실로 당황스럽고 두려워 애가 탔으며, 곧이어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 성상의 추모하는 효사(孝思)를 신이 어찌 우러러 본받지 않겠습니까마는, 그윽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계해년267) 에도 또한 이 예를 행하였는데, 그때에 전하의 굳은 마음으로서 뭇 신하의 청을 애써 따르신 것은 곧 옛날의 뜻을 이어받으신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지금에는 성상의 춘추가 이미 높으시어 이 예를 응당 행하는 것은 더욱이 그때에 비할 바가 아니니, 그러한즉 전하께서 소손의 간절함을 힘써 좇으심이 또한 옛날의 뜻을 우러러 본받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추모함을 가지고 하교하시지만, 신은 생각건대 추모의 도리는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절박한 정리에 견디지 못하여 감히 다시금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정리를 어여삐 여기시고 신의 청을 허락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손수 써서 비답하기를,
"네 할아비의 마음은 오늘 한 갑절 더하다. 마땅히 시좌(侍坐)할 때에 유시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시좌토록 하고, 빈청 2품 이상을 모두 경현당에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세손이 여러 날 음식을 폐하고 있음을 근심하여 비로소 술잔 받기를 허락하고, 11일에 경현당에서 진연(進宴)을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무릇 모든 의식과 절차는 검소하고 절약하는 데 힘쓰도록 하였다. 대개 경현당은 곧 기해년268) 에 잔치를 내린 구당(舊堂)이었다. 임금이 태강(太康)269) 을 경계하는 악장(樂章) 4구(句)를 지어 악공에게 익히도록 명하였다. 유밀과와 단술[醴酒]을 베풀지 말고 꿀물로 대신하며, 어찬(御饌)은 열 그릇을 넘지 않게 하고, 여러 신하의 경우는 다섯 그릇을 넘지 않게 하며, 구작(九爵)의 예는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세손·대신·국구·의빈, 종친부·충훈부의 유사 당상, 9경(卿)이 각기 일작(一爵)씩 올리고, 참석한 여러 신하에게는 각기 일배(一盃)씩 내리되, 입참(入參)할 사람은 대신·국구·의빈, 기로사의 여러 신하, 종신(宗臣) 문무 1품 이상, 육조·경조의 장관, 비변사 당상, 충훈부 유사 당상, 여섯 승지, 여러 한림, 시임 옥당, 양사와 시위, 세손 배위관·계방 관원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논하지 말게 하였으며, 시위는 운보검(雲寶劍)에 도총부(都摠府)와 병조(兵曹)의 당상 낭청 각 2원(員)씩 하도록 하였다. 진작(進爵)은 은잔(銀盞)을 쓰고 사배(賜盃)는 사잔(砂盞)을 쓰되 주원(廚院)270) 에서 취하여 쓰며, 선전관(宣傳官)과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 각 5인을 입참케 하니, 무릇 잔치에 참여한 자가 1백 19인이고, 어제와 어필을 받은 자가 67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잔치가 아니니, 내외연(內外宴)의 명칭을 가히 논할 바가 아니며, 또한 구작의 예도 없거늘, 지난번 기묘년271) 효소전(孝昭殿)에 아뢰어 가례(嘉禮)를 행할 때에 어찌 오늘이 있을 줄 알았겠는가? 하물며 가례의 해를 헤아리니 곧 7년째이고, 나 또한 7순인데, 세손의 정리로써 어찌 단지 나에게만 술잔을 올리겠는가? 반드시 궐내에서 찬구(饌具)를 간략하게 베풀어야 한다. 만약 내외연을 행하면 마땅히 양일(兩日)을 분배해야 하는데, 이는 하루 안에 겸행하면 형식(形式)은 줄이고 예(禮)는 갖춰지게 되니,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것은 마땅히 궐내에서 할 일인데,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억울하게 여기는 자가 있을 것이므로 이같이 하교하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처음에 잠화(簪花)를 제거하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에게 하교하기를,
"네 할아비는 잠화를 꽂지 않았는데 너만 유독 잠화를 꽂았으니, 네 마음에 편안한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소손을 위하여 성상께서도 잠화를 꽂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잠화를 꽂고 싶어서 도리어 할아비에게 잠화를 꽂도록 청하니, 이는 곧 옛날 노래자(老萊子)가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뜻272) 이라, 정성과 효성이 이와 같으니, 내가 마땅히 힘써 허락하겠다."
하고, 이어서 잠화 꽂기를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구상(具庠)을 북도(北道) 감시 어사(監市御史)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5일 정미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흥정당(興政堂)에서 겨울을 지냈는데, 마루는 비록 광활하였지만 가리개[障子]를 쓰지 않고 염석(簾席)을 드리워 가렸으며, 집경당(集慶堂)에서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이는 선왕의 검소한 덕이다. 지금 들은즉 연례(宴禮)할 때에 보계(補階)하는 폐단이 우심하다고 하는데, 이 또한 재용(財用)이 점점 줄어들게 하는 일단(一端)이니, 호조로 하여금 절약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6일 무신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서 동향 대제(冬享大祭)에 쓸 향을 공경히 맞이하였다. 하교하기를,
"충자(沖子)의 지성이 비록 금석 같다고 하나, 이 마음은 한편으로는 추모하며 한편으로는 스스로 부끄러움이 힘써 여러 마음을 따른 후에 마음에 한 갑절 더해진다. 어젯밤 꿈에 자성(慈聖)을 뵈오니, 옛날처럼 아득하다. 아! 하늘에 계신 영혼이 즐거움을 알아서 그러한 것인가? 아! 계해년은 곧 병술년273) 의 고사(故事)를 추술(追述)하고, 갑자년에는 영수각(靈壽閣)에서 궤장을 받았으니, 곧 기사(耆社)에 들어가는 고사를 추술한 것이다. 모레는 곧 지난 을유년 송도(松都)에서 행차가 출발한 날이고, 11일은 곧 한양에 다시 들어온 날이니, 정일(正日)의 의식을 미리 익히고 두 날의 고사를 추술하며 꿈에 자성(慈聖)을 뵈어 또한 두 해의 임시(臨視)한 일과 부합하였으니, 그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하물며 옛날 언교(諺敎)를 받자와 잔치를 받음에 있어서랴? 이번에 잔치를 받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성의 인자(仁慈)하신 덕을 드러내며 한편으로는 아래로 세손의 지극한 효성의 마음을 좇은 것이니, 청사(靑史)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7일 기유
남태회(南泰會)를 대사헌으로, 이재협(李在協)을 대사간으로, 안겸제(安兼濟)를 장령으로, 정반(鄭槃)을 지평으로, 이숭호(李崇祜)를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8일 경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9일 신해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0일 임자
임금이 흥정당에 나아가 주강·석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몸소 ‘임연 이빙(臨淵履氷)’ 넉 자(字)를 써서 벽 위에 붙였다. 또 몸소 효억편(效抑篇)을 지어 등가악장(登歌樂章)에 대신하였으며, 술잔을 받을 때에 생강차로 술을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힘써 여러 사람을 따라서 차로써 술에 대신케 하였지만, 제도(諸道)의 농사일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중외에 의지할 곳 없는 백성이 더욱 가긍하다. 옛날 병술년에 잔치를 드릴 때, 고(故) 상신(相臣) 김우항(金宇杭)이 백성을 구휼할 것을 청하여, 선혜청으로 하여금 종가(鍾街)에서 구걸하는 자를 찾아가 묻고 죽을 먹이게 하였었는데, 대동미를 줄여서 백성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것을 비국이 강구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1일 계축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몸소 술잔을 받았다. 이날 임금은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자리에 올랐으며, 승지·사관(史官)이 시위(侍衛)하여 좌우로 나뉘어 앞으로 나아오고, 악사는 존호를 창(唱)하였다. 악장이 끝나자 상례(相禮)가 왕세손을 인도하매, 익선관과 현곤포(玄袞袍)를 갖추고 들어와 절하는 자리에 나아왔다. 치사례(致詞禮)를 행하고 사배(四拜)를 올리매, 악이 연주되고 곧 그쳤다. 인의(引儀)가 동반과 서반을 나누어 인도하매, 들어와 절하는 자리에 나아와서 먼저 치사(致詞)를 하였는데, 치사에 이르기를,
"세손 신(臣) 이산(李祘)은 이에 수성(壽星)이 동쪽에 비추임을 만났으니 성상의 연세가 높으시고, 종국(宗國)에 경사가 넘치니 팔방(八方)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지행 순덕 영모 의열 장의 홍륜 광인 돈희 체천 건극 성공 신화 주상 전하께서 다스리신 지 사기(四紀)에 교화가 나라에 퍼졌습니다. 지극히 효성스럽고 어지시며, 거룩하고 밝으십니다. 한결같은 생각이 공경하고 삼가며 매양 겸손하고 억제하는 마음을 간직하셨으므로, 황천(皇天)이 덕 있는 자를 도와 주어 높으신 연세 8순에 이르러서, 언덕과 같고 구릉과 같으시며 소나무와 같고 잣나무와 같으신데, 다행히 경사스런 모임을 당하매 오래 모시고 싶은 마음이 더욱 절실합니다. 보잘것없는 간절한 마음을 힘써 좇으시어, 정성과 예(禮)가 모두 화합하게 되었는데, 이날 잔을 받들어 선열을 더욱 빛내니, 신은 경사롭고 기쁜 정성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천천세(千千歲) 장수하실 것을 축원합니다."
하였다. 아룀을 마치자 앞의 의식과 같이 사배를 행하였다. 왕세손이 뭇 신하를 이끌어 세 번 고두(叩頭)하고 산호(山呼)하였으며, 예를 마치자 각기 자리로 나아갔다. 사옹원 제조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이 어좌(御座) 앞에 나아가 휘건(揮巾)을 받들어 어선(御膳)을 드리고, 내시가 화반(花盤)을 드렸으며, 사옹원 제조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이 왕세손의 휘건과 공선(供膳)을 드렸다. 집사가 여러 신하에게 하사한 음식을 나누어 주고 꽃을 흩뜨리니, 여러 신하가 모두 자리를 떠나 무릎꿇고 받음을 마치자, 왕세손이 어탑(御榻) 앞에 나아가매, 등가악이 연주되고 문무무(文武舞)가 함께 나아갔다. 이병(李棅)이 초미(初味)를 드리고, 이연(李槤)이 왕세손의 미수(味數)를 드렸으며, 집사가 여러 신하에게 미수를 나누어 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큰 덕이 장수할 수 있다고 하나, 나는 실로 부끄럽다. 계해년 자교(慈敎)를 추억하자니,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다. 오늘의 일은 충자(沖子)가 경(卿)들과 더불어 권하여 이룬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성조(聖祖)의 을유년 고사(故事)에 대하여 의정부의 가요(歌謠)가 있으므로, 신(臣)들이 7장(章)으로써 옛것을 본떠 드렸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것을 읽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그 노래에 이르기를,
"우리 왕께서 잔을 받으시니, 상제(上帝)가 녹(祿)을 내리셨도다. 빛나게 살펴 밝고 밝으시며, 품으신 마음 공손하고 삼가셨네. 해가 솟고 달이 비치는 것은 큰 덕이 얻으신 바이니, 북두(北斗)로 잔질하면 천이 되고 억이 된다. 우리 왕께서 잔을 받으시니, 조종(祖宗)이 음덕(蔭德)을 드리웠도다. 정성은 신명(神明)께 믿음을 받았고 도(道)는 정일(精一)하게 드러났다. 앞에는 빛이 있어 그 계책이 아름다웠고, 장수(長壽)함이 마땅하니 오직 효성이 달하였다. 우리 왕께서 잔을 받으시니, 아름다운 손자가 축하를 올렸도다. 자애로써 어루만지시고 올바름으로써 깨우치시며, 양능(良能)을 가상히 여기시고 한사코 청하는 바를 힘써 좇으시니, 만년을 모실 수 있도록 축성(祝聖)한다. 우리 왕께서 잔을 받으시니, 신하들이 기쁘고 즐겁다. 구주(九疇)가 극치(極致)를 이루었고, 만휘(萬彙)가 크게 변화하였다. 도주(陶鑄)가 생성(生成)되어 공적(功績)이 널리 퍼지고 교화가 두루 미친다. 남산(南山)처럼 이지러지지 않고 오래 사시어서, 길이 이런 잔치를 모시리로다. 우리 왕께서 잔을 받으시니, 백성들이 북을 치고 춤을 춘다. 은혜와 덕택이 스며 나오매 내가 먹고 자란다. 태화(太和)의 동산에서 거닐어 그 베풀어짐이 이처럼 넓었으니, 화봉(華封)의 송축(頌祝)이 동토(東土)에 가득했노라. 우리 왕께서 잔을 받으시니, 오직 옛날 을유의 해로다. 새 도읍이 정해진 지 갑자(甲子)가 여섯 번 돌아왔다. 이달 이날에 성사(盛事)가 다시 이어지고, 만수(萬壽)를 비는 헌수(獻壽)에 한수(漢水)가 아득히 흘러간다. 우리 왕께서 잔을 받으시니 큰 복록이 양양(洋洋)하다. 왕께서는 즐거움이 너무 심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계하셨다. 성인(聖人)으로 자처(自處)하지 않으니, 겸양하여 더욱 빛이 나신다. 날마다 힘써 쉬지 않았으니, 천지가 무궁(無窮)토록 장수하리이다."
하였다. 왕이 몸소 사언 일구(四言一句)를 지어 이르기를,
"큰 업적을 이어받아 깊은 연못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경계했노라."
하고, 왕세손 이하에게 화답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또 옛 신하를 추념하는 뜻으로 몸소 사언(四言) 여덟 글자를 써서 입시한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주며 말하기를,
"나의 잊지 못하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하였다. 차례로 술잔을 드리고 나자, 음악이 그치고 문무무가 물러났으며, 처용무(處容舞)가 나아가니, 음악이 연주되었다. 잠시 후 무(舞)가 물러나고 음악이 그치매 사옹원 제조가 어찬을 거둬가고, 악사(樂師)가 어제(御製) 태강장(太康章)을 창하기를 마치자, 영의정 홍봉한이 나아와 말하기를,
"신 등은 이미 취하고 배가 부르니, 백성에게 은혜로운 정사를 또한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의 마음을 억지로 누른 채 지금 찻잔을 받았다. 아! 한편으로는 을유년의 성사(盛事)를 추술(追述)하고, 한편으로는 계해년의 자음(慈音)을 추모한 것이니, 스스로 당초의 마음을 돌이켜 보건대 황송하고 부끄러움을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오랜 옛날 병술년에 잔치에서 모시고 우러러보았는데, 지금 나의 뜻은 이 차(茶)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기를 원한다. 뜻이 이미 이와 같으니, 어찌 차마 달을 넘기겠는가? 팔도(八道)의 옛 포흠(逋欠) 가운데 가장 오랜 2년 조(條)를 특별히 감해 주고, 공인(貢人)의 오랜 유재(遺在)는 기묘년 액수에 의거하여 감해 주며, 시민(市民)이 두 달간 바쳐야 할 것과 현방(懸房)의 속전(贖錢)을 일체 감해 주어, 내가 지난날의 고휼(顧恤)을 본받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지중추부사 서지수(徐志修)가 나아와 말하기를,
"오늘날 태평 성사(太平盛事)에 대한 즐겁고 기쁜 정성은 대소 신료가 같은 마음이니, 은혜를 팔방(八方)에 미루어 시행함이 더욱 급선무입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삼남(三南)의 재결(災結)을 나누어 준 것이 매우 적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나의 뜻과 같으니, 내일 대신과 비국 당상이 정확한 계획을 강구하여 아뢰라."
하였다. 서지수가 또 말하기를,
"악(樂)의 도(道)는 정사(政事)와 통하니, 관련됨이 진실로 중(重)한데, 삼대(三代) 이후로 예(禮)가 무너지고 악(樂)이 폐하여져 진실로 만회할 희망이 없습니다. 단지 근세 민간의 속악은 모두 음(音)이 번쇄하고 절조(節調)가 급하여 감히 볼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번에 악(樂)을 연주할 때의 속악도 또한 음이 번쇄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여민락(與民樂)은 실로 화평한 음(音)이니, 지금 속악의 절주(節奏)도 모두 여민락을 따라 화평한 음이 되게 하고, 그 번쇄한 음을 일체 금하면, 정교(政敎)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또 신이 성천(成川)에서 대죄(待罪)할 때에 보니, 그 악이 또한 번쇄하였는데, 한 곡(曲)이 장차 끝나려 하매 반드시 완성(緩聲)으로써 수습하였으니, 이는 필시 옛날의 유법(遺法)에 가까운 것입니다. 만약에 이 뜻을 본받아 경사(京師)에서 행하고 팔방에 널리 퍼뜨리어 모두 화평한 지경에 돌아가 번쇄하고 조급한 걱정이 없게 되면 진실로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장악원(掌樂院)에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예(禮)를 마치자, 인의(引儀)가 동반과 서반을 인도하여 자리에 나아가게 하고, 상례(相禮)가 왕세손을 인도하여 자리에 나아가게 하였다. 음악이 연주되고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예를 마치자 상례가 왕세손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임금은 대궐 안으로 돌아와 사옹원 제조와 여러 신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수작갱운록(受爵賡韻錄)》을 간행하여 올리고 여러 신하에게 반사(頒賜)하도록 명하였다.
10월 12일 갑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무릇 환곡의 가분(加分)과 정봉(停捧) 및 탕감할 때에 매양 몇 분(分)의 일 몇 년 조(條)를 대수(大數)를 들어 작정하는 까닭에, 간리(奸吏)가 농간을 부릴 수 있어 소민(小民)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지 못합니다. 지금부터 연조(年條)와 분수(分數)를 헤아리지 말고 단지 수천 곡(斛), 몇 만 곡(斛)으로써 수를 정하여 거행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이어서 기전(畿甸)274) 의 옛 환곡 1만 곡(斛)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10월 14일 병진
임금이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숭현문(崇賢門)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심(苦心)을 억누르고 힘써 하례를 받았으니, 한편으로는 열조(烈祖)의 성덕(盛德)을 드러내며, 한편으로는 충자(沖子)의 지극한 정성을 힘써 좇은 것이다. 이를 미루어 넓히지 않으면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는가?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이르기를, ‘노인은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는다.’고 하였고, 자기 마음으로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도리는 《중용(中庸)》에 또한 말하였다. 조신(朝臣) 재열(宰列) 이상의 아비로서 나이 60이상인 자 및 시종(侍從) 이상의 아비로서 나이 70이상인 사람은 특별히 쌀과 고기를 하사하여 그 아들이 헌수(獻壽)하는 자료(資料)를 돕도록 하고, 사서(士庶)로서 나이 90이상인 자는 병술년의 사연(賜宴)한 고례(故例)에 의거하여 또한 쌀과 고기를 내리도록 하라. 인군(人君)이 똑같이 사랑함이 경외(京外)가 어찌 다르겠는가? 외읍(外邑)에도 또한 쌀과 고기를 지급토록 할 것이다. 문무(文武)의 홍패(紅牌)를 가진 채 나이가 70에 이른 자는 팔도와 양도(兩都)로 하여금 찾아내어 보고토록 하고, 그 자급(資級)을 더하여 노인을 대접하는 옛날의 성의(盛意)를 본받음을 보이도록 하라. 어의동(於義洞)·추모동(追慕洞)·대은암(大隱巖)·연화방(蓮花坊)·연추문(延秋門)에 거주하는 부로(父老)로서 나이 70인 자도 또한 쌀과 고기를 하사토록 하라."
하였다.
지평 정반(鄭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부터 성왕(聖王)이 태평할 때에 더욱 조심하는 경계를 더하는 것은 진실로 만족하고 한가로이 여기지 않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성(盈成)의 업(業)을 어루만지고 기영(祈永)의 근본이 되는 것은 그 요체가 절선(節宣)을 신중히 하여 수양(修養)의 방도를 다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도리를 하며, 벼슬과 상(賞)을 신중히 하여 경박한 습속을 면려하고 청납(聽納)을 넓히어 언로(言路)를 여는 데에 있습니다. 무릇 이 몇 가지는 모두 전하께서 일찍이 두려워하여 반성하고 근심하여 스스로 힘쓰시던 바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에 더욱 스스로 힘쓰시어 천명(天命)을 맞이하여 이어나가는 도리를 다하소서. 또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이 부축하여 자리에 나아갔으니 이미 조정의 체통을 잃었고, 제학 이창수(李昌壽)는 겸직(兼職)을 사례하지 않았으니 칙교(飭敎)에 어긋났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정언 안겸제(安兼濟)가 또 선조(先祖)를 본받은 뜻으로써 상소하여 진면(陳勉)하였고, 또 태인 현감(泰仁縣監) 이복영(李復永)이 부임할 때에 대각(臺閣)에 두루 하직 인사를 하지 않아 조정의 체통을 무너뜨린 것으로써 개차(改差)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
10월 16일 무오
이하술(李河述)을 사간으로, 김귀주(金龜柱)를 응교로, 한익모(韓翼謨)를 판의금으로, 서지수(徐志修)를 지경연사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중추 홍계희(洪啓禧)가 늙어 사직하기를 다시 아뢰니, 임금이 손수 써서 비답을 내려 그 청을 허락하였고, 선마(宣麻)275) 에 친림(親臨)하겠다고 명하였다.
날이 추우므로,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의 가벼운 죄수들을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10월 17일 기미
주강을 행하였다.
10월 18일 경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봉조하 홍계희(洪啓禧)에게 몸소 선마의 고명(誥命)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선마는 송(宋)나라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니,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당나라 때부터 있었는데, 옛날에는 교지(敎旨)를 내릴 때마다 선마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홍계희에게 앞으로 나아오라 명하여 창연(悵然)한 뜻으로 유시하고, ‘경의 사은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서운하다.[見卿謝恩予心悵然]’는 여덟 자(字)를 손수 써서 하사하였다.
10월 18일 경신
석강을 행하였다.
이상지(李商芝)를 부응교로, 이익보(李益輔)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훈련 대장 구선복(具善復)이 강도(江都)의 목장과 문수 산성(文殊山城)을 자세히 살피고 돌아와 아룀에 미쳐서 말이 근간(懃懇)함이 많았는데, 통진읍(通津邑)을 산성(山城)으로 옮기는 것과, 강화부(江華府)에서 수륙 대장(水陸大將)을 겸하는 것과 길상 목장(吉祥牧場)에 제언(堤堰)을 쌓아 물을 저장하는 것과, 목장 안의 호환(虎患)에 대하여 군사를 내어 사냥하는 등의 네 가지 조건을 청함에 이르러서는 모두 경장(更張)에 관계되어 가벼이 논의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목장의 호환으로 말의 종자[馬種]가 장차 없어지려 한다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니,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사냥해 잡도록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또한 우리 백성이니, 어찌 바다를 건너 사냥을 하게 하겠는가? 또한 그냥 둠이 가하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사간 이하술(李河述)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계청하기를,
"단아(端雅)하고 정직한 선비를 극진히 선택하여 동궁을 보도(輔導)하는 방책을 다하게 하고 감포(減逋)·분재(分災)한 고을을 엄중히 신칙하여 간리(奸吏)가 농간하는 습속을 방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이어 녹비(鹿皮)를 하사하였다.
대사성에게 명하여 성균관 유생을 인솔하고 들어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講)하게 하고 종이와 붓을 차등 있게 상주었다.
10월 22일 갑자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지평 안겸제(安兼濟)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비국 당상이 빈대(賓對)에서 한마디 말이 없었는데, 정원에서 정고(呈告)를 대각(臺閣)에 봉납(捧納)했으니, 모두 경계함이 마땅합니다. 청컨대 비국 당상을 문비(問備)하고 승지는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윤동섬(尹東暹)을 도승지로 삼았다.
10월 23일 을축
서명응(徐命膺)을 대사헌으로, 박성원(朴盛源)을 대사간으로, 김서응(金瑞應)을 지평으로, 권영(權穎)을 헌납으로, 김이희(金履禧)·심중규(沈重奎)를 정언으로, 홍수보(洪秀輔)를 교리로, 이진규(李晉圭)를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문무과(文武科)가 침체함을 민망히 여기어 기로과(耆老科)에 합격한 자는 직명(職名)의 있고 없음을 논하지 말고 모두 가자(加資)토록 명하였으며, 외방 무과(外方武科)는 천거가 있고 없음을 논하지 말고 나이 70인 자는 훈련 참봉(訓鍊參奉)을 가설(加設)하여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3일 을축
예조 판서 심수(沈鏽)가 경기전(慶基殿)의 향(香)을 받을 때에 재랑(齋郞)이 천리를 왕래하며 폐를 끼침이 적지 않다 하여 북도(北道) 선원전(璿源殿)의 예(例)에 의거하여 충의(忠義)로써 배진(陪進)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0월 24일 병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금산(禁山)에서 소나무 기르는 법을 밝히고 해읍(海邑)에서 배 만드는 일을 빙자하는 폐단을 엄히 금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지평 김서응(金瑞應)이 상소하여 군사와 경제를 풍족하게 하는 방책을 논하면서, ‘신(信)’ 자(字) 하나로써 마무리를 지으니, 임금이 비답에 옳다고 하였다.
10월 25일 정묘
임금이 인경 왕후(仁敬王后)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서 공경히 맞이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갑오년 21세 때에 익릉(翼陵)의 헌관(獻官)에 차임되기를 구했는데, 어찌 금년에 또 향(香)을 지영(祗迎)하리라고 생각했겠는가? 마땅히 친행(親行)하듯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재숙(齋宿)하겠다. 향관(享官)과 대축(大祝)은 각별히 선택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6일 무진
임금이 진연(診筵)에서 겸춘추 김성유(金聖猷)에게 어미의 나이가 몇인지 물었는데, 김성유가 72세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관서(關西)가 비록 멀고 직명(職名)이 비록 낮지만, 인군(人君)의 시혜(施惠)가 어찌 멀고 가까움이 있겠느냐? 내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는 뜻으로써 또한 쌀과 고기를 하사하니, 즉시 내려가서 헌수(獻壽)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7일 기사
헌부 【지평 김서응(金瑞應)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훈련 대장 구선복(具善復)은 무시관(武試官)이 되어 두루 감싸 주고 사정(私情)을 쓴 죄가 있으며, 운산 군수(雲山郡守) 이은정(李殷鼎)은 향교의 여종을 억지로 빼앗아 잔학하게 남형(濫刑)한 죄가 있으니,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10월 28일 경오
어떤 별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길이가 3, 4척이었다.
임금이 순강원(順康園)의 기신 제사에 쓸 향(香)을 공경히 맞이하였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장통(掌通)이 어지럽혀지는 것을 금하여 관방(官方)을 아끼고 명기(名器)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하였다. 한림의 권점을 논핵(論劾)한 이동우(李東遇) 등을 모두 승륙(陞六)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동우 등이 최명린(崔命麟) 무리들의 남권(濫圈)을 이끌어댄 것이 거의 40인이어서 대관(臺官)의 탄핵을 당하여 오래도록 직무를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命)이 있게 된 것이다.
10월 29일 신미
민홍렬(閔弘烈)을 수찬으로, 김양택(金陽澤)을 좌빈객으로 삼았다.
10월 29일 신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장례원은 비록 이미 혁파하여 형조(刑曹)에 부쳤지만, 노비(奴婢)의 정사(政事)는 관계됨이 적지 않으니, 무릇 탈면(頉免)과 거래(去來)를 한결같이 호조(戶曹)의 예(例)에 의거하여 마땅히 수당(首堂)으로 하여금 전관(專管)케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장령 안겸제(安兼濟)가 소회(所懷)를 아뢰기를,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使行)을 엄중히 신칙하여 재물을 탐내는 습속을 끊도록 하소서."
하였고, 또 송(宋)나라의 신하 진덕수(眞德秀)의 변방 군비(軍備) 계획 8가지 방책과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10만 양병(養兵)의 주장을 인용하여 국가의 변방에 대비하고 군사를 충실히 하는 방책으로써 군비의 소홀한 폐단을 방지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서호수(徐浩修)·남현로(南玄老) 등을 부첨(付籤)하라는 명을 특별히 중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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