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계유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근사록(近思錄)》을 강하다가 하교하기를,
"이 책의 구두점은 바로 선정(先正) 송시열이 정한 것이라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동경연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이세택(李世澤)의 말을 듣건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정한 것이라 하는데, 지금까지 전래(傳來)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동지사(冬至使)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烜)과 김선행(金善行)·홍억(洪檍) 등이 하직 인사를 하니, 임금이 소견하여 어찬(御饌)을 내리고 사언시(四言詩) 각 2구(句)를 몸소 써서 하사하여 그 사행을 영예롭게 하였다. 우리 나라의 당금(唐琴)·생황(笙簧)이 소리를 잘 이루지 못한다 하여 악공(樂工)으로서 연행(燕行)에 수행하는 자에게 그 음(音)을 배워 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동지(冬至)의 진하(陳賀)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경연관 등이 《오례의(五禮儀)》는 마땅히 행해야 할 예(禮)로서 가히 폐할 수 없다 하여 앙청(仰請)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동지일(冬至日)에 하례를 받지 않는 것은 4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지난달에 잔을 받은 뒤에 내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짐작하는 뜻을 미루어, 여러 신하로서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에게 술잔을 베풀어 그 어버이의 장수를 빌도록 명하고, 경재(卿宰)로부터 시종(侍從)에 이르기까지 나이 70살이 된 자에게 관(官)에서 쌀과 고기를 지급하여 그 비용을 보조하게 했다. 이때 좌의정 김상복(金相福)의 아비 김원택(金元澤)이 나이 80을 넘었는데, 임금이 그 잔치 베풂을 듣고 사언(四言) 2구(句)를 손수 써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전하게 하니, 김상복이 전문(箋文)을 올려 진사(陳謝)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의 집에서 날을 나누어 잔치를 베풀고, 비록 나이가 70에 미치지 않은 자들도 또한 소문(所聞)을 전해 듣고 행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여항간의 백성들도 또한 모두 이를 본따서 관현(管絃)의 소리가 곳곳마다 연이어 들리니, 이때에 일컫기를 태평 성사(太平盛事)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이 적으나, 살갗은 심하게 줄어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나의 덕을 힘입어 국인(國人)이 장수를 누리는 자가 많다고 하는데, 이 말은 진실로 우습다."
하니, 원인손(元仁孫)이 말하기를,
"옛날에 태평 성세[春臺壽域]라 일컬었으니, 이치가 진실로 그러합니다."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듣건대, 승보시(陞補試)276) 는 이미 끝났습니다만, 근래에 과장(科場)이 엄하지 못하여, 답안을 제출함이 너무 늦어서 어떤 때에는 밤을 새워 새벽이 되는 일도 있다 합니다. 전일(前日)의 상제(庠製)도 또한 그러하였으므로 신이 이미 아뢰어 그 상관(庠官)을 파직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대사성 이담(李潭)도 또한 마땅히 파직시켜 후일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이어서 근래의 상방(庠榜)에 초록(抄錄)된 사람을 모두 물시(勿施)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담이 과시(課試)를 공정치 못하게 하였다 하여 사론(士論)이 자못 소란스러웠는데, 홍봉한이 작은 죄로 가벼이 처리할 것을 청하여 물의(物議)를 진정시켰으니, 곧 이담의 처지를 위해서였다.
임금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고(故) 상신(相臣) 황희·맹사성의 자손을 수소문하여 그 봉사손(奉祀孫)은 곧바로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11월 3일 갑술
임금이 제문(祭文)을 몸소 지어 장차 초6일에 효장 세자(孝章世子)·의소 세손(懿昭世孫)의 사당에 친림하여 전작(奠酌)하려고 하였으니, 대개 연례(宴禮)가 가까스로 행해지매 감회가 슬펐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봉조하 유척기(兪拓基)는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었으며 김상로(金尙魯)는 대관(大官)임으로 해서 잔치에 쓰이는 비용을 하사하도록 명하는데, 김상로는 이때 나이가 70이 못되었다.
임금이 탐라의 공과(貢果)가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음으로써 풍랑을 걱정하여 여러 도(道)에 탐문토록 명하였고, 또한 여러 도의 농사 형편이 구메농사[穴農]가 되었음으로써 흉년의 조세 감면과 적곡(糴穀)을 받아들임이 혹 고르지 않을까 걱정하여 비국으로 하여금 여러 도에 신칙케 하였다.
11월 5일 병자
번개가 번쩍이고 또 큰 바람이 일었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중삭제(仲朔祭)를 몸소 행하였다. 이때에 날이 차가웠으나 난모(煖帽)를 쓰지 않았고, 수행하는 군사들이 밤새워 수고함을 생각하여 죽(粥)을 쑤어 먹이고 위문하였다. 재실(齋室)에 들어와 하교하기를,
"인자(人子)는 어버이의 마음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삼는다. 금년에 여기에 온 것도 또한 생각 밖의 일이다. 세간에서 어버이를 모신 자를 보면 마음에 항상 감탄하여 부러워하였다. 자식된 마음은 한가지이니, 어찌 어버이의 나이가 많고 적음에 있겠는가? 내가 능히 하지 못한 바로써 신하에게 베풀고자 하니, 오늘 아침 신문(神門)에 들어온 여러 집사(執事)·승지·한림·주서(注書)·도위(都尉) 이하 어버이를 모시는 자는 그 나이를 논하지 말고 모두 쌀과 고기를 하사하여 그 어버이에게 장수를 빌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여러 신하로서 쌀과 고기를 받은 자는 다만 늙은 아비가 있는 자였고, 편모(偏母)만 있는 자는 참여하지 않았으니, 대개 은전(恩典)이 두루 미치지 못한 때문이었는데, 이에 이르러 특별히 이 명(命)을 내린 것이다. 또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집과 동돈녕(同敦寧) 윤면교(尹勉敎)의 집에 쌀과 고기를 하사하였으니, 윤면교의 처는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아우이고, 김한구는 국구(國舅)로서 여러 신하와는 구별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 경은 부원군 김주신(慶恩府院君金柱臣) 집과 증(贈) 영상(領相) 집에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는데, 경은 부원군 김주신은 곧 인원 왕후의 아버지이고, 증 영상은 바로 화경 숙빈(和敬淑嬪)의 아버지인 때문이었다. 창의궁(彰義宮)에 역림(歷臨)하여 연추문(延秋門) 부근의 부로(父老)를 소견하였으니,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풍패(豊沛)의 고사(故事)를 본뜬 것이었다. 몸소 대풍가(大風歌) 2장(章)을 지었는데, 그 1장(章)에 이르기를,
"옛 잠저에 오니, 황홀함이 전날과 같구나. 부족한 덕으로 〈왕위를〉 이어받으니, 조심스런 마음뿐이다. 한결같은 마음은 백성에게 있으니, 풍년이 들기만 바라노라."
하였고, 2장에 이르기를,
"망팔(望八)의 나이가 되매 옛날을 돌이켜본다. 특별히 뭇 노인들을 불러 모두들 앞에 모였는데, 음식을 내리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하였다. 일한재(一閑齋)에서 대신과 여러 신하를 소견하였는데, 재(齋)는 옛 잠저이며, 상석(床席)·궤장(几杖)은 모두가 옛날 은사(恩賜)하신 것이었다. 임금이 정축년277) 에 그린 어용 장자(御容障子)를 내어 보이고 여러 신하에게 우러러보도록 명하니, 여러 신하가 말하기를,
"빈발(鬢髮)이 검고 흰 것의 차이는 있으나, 천안(天顔)은 옛날과 같아 조금의 감축(減縮)도 없으십니다."
하였다. 임금이 음식을 내렸는데 몇 그릇에 그치도록 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군신(君臣)이 옛 잠저에서 함께 즐기매, 오늘의 음식은 저번에 받은 술잔보다 낫다."
하였다. 극진히 즐겨하다가 자리를 파하니, 밤이 깊어 비로소 환궁하였다.
11월 7일 무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제주(濟州)의 공감(貢柑)을 가져온 사람을 소견하고 식량을 주어 보냈다.
11월 9일 경진
임금이 저경궁(儲慶宮)의 중삭제(仲朔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경외(京外)를 막론하고 조관(朝官)·사서(士庶)에게 한결같이 세찬(歲饌)의 예(例)에 의거하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도록 명하고, 항간(巷間)에서 어버이를 위해 잔치하면서 음악을 베푸는 자는 법사(法司)에서 금하지 말도록 하였으며, 도신(道臣)과 수령으로서 어버이를 모시는 자도 또한 헌수(獻壽)하게 하였다.
11월 10일 신사
중궁전(中宮殿)의 탄신(誕辰)이므로, 왕세손이 몸소 하례를 행하고, 조정 2품 이상이 문안하였다.
11월 11일 임오
눈이 내렸는데, 이날은 동지(冬至)의 다음날이었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하교하기를,
"이는 양(陽)이 회복된 후의 첫 강(講)이다. 지일(至日)에 폐관(閉關)하는 것은 음(陰)을 누르고 양(陽)을 북돋우는 선왕(先王)의 뜻을 볼 수 있음이다."
하고, 이어서 지일(至日)의 윤음(綸音)을 내리니, 대개 백성을 구휼하는 선왕의 성유(聖諭)를 본받은 것이었다.
영의정 홍봉한이 그 어미를 위해 헌수하였는데, 임금이 어제(御製)를 써서 내리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가서 선유하고 풍악을 쓰는지의 여부를 묻도록 하였다. 홍봉한이 명(命)을 듣고 비로소 음악을 베풀었다.
임금이 여경방(餘慶坊)의 부로(父老)를 소견하고, 나이가 가장 많은 자에게 그 자급(資級)을 더하고 음식을 하사하여 보냈다. 또 하교하기를,
"《주례(周禮)》에 왕에게 백성의 호구(戶口)를 조사하여 아뢰게 하고 이를 절하여 받게 한 것은 곧 호구를 소중히 여긴 뜻이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호적법이 해이해져서 누락되는 자가 많고, 또 혹은 부자(父子)가 따로 사는 자도 있으니, 지금 식년(式年)을 당하여 경조(京兆)로 하여금 엄중히 신칙토록 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경기 도신(京畿道臣)이 노인으로서 식물(食物)을 하사받을 자를 정리하여 아뢰었는데, 나이 1백 8세된 자가 1인이요, 1백 4세된 자가 1인이며, 1백 2세된 자가 1인이요, 1백 1세된 자가 6인이요, 1백 세된 자가 2인이었다. 임금이 모두 자급(資級)을 더하도록 하고, 예(例)에 따라 동중추(同中樞)에 부치도록 명하였다. 그 중에는 비록 나이를 속인 자도 없지 않겠으나, 기전(畿甸)이 이와 같으면 다른 도(道)는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니, 비록 태평 성세라 하여도 가하겠다.
이기경(李基敬)을 대사간으로, 강윤(姜潤)을 집의로, 이홍직(李弘稷)을 사간으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으로, 강지환(姜趾煥)을 지평으로, 임성(任珹)을 헌납으로, 최민(崔)을 정언으로, 원인손(元仁孫)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11월 12일 계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바야흐로 《시전(詩傳)》을 강하였는데, 임금이 《시전》의 죽간(竹竿) 4장(章)을 외게 하고 문의(文義)를 매우 자세히 물으니, 세손이 메아리치듯 응대하였다. 임금이 다시 묻기를,
"공자(孔子)는 사물(四勿)278) 로써 훈계를 드리웠는데, 정(鄭)나라와 위(衛)나라의 음풍(淫風)을 어찌하여 《시경》에 엮어 넣었는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그로 하여금 징계(懲戒)코자 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풍(正風)이 점차 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은택이 쇠잔한 까닭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능히 문왕과 무왕의 덕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세상의 도(道)가 오르내림이 있으니,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은 비록 배워서 능히 할 수 있지만, 어찌 감히 문왕과 무왕으로써 스스로 기약하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겸양하는 마음도 또한 퇴탁(退托)하는 것이니, 반드시 순(舜)이나 나나 같을 수 있다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는 것이 좋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네가 독서하는 때를 당하여 엄인(閹人)들이 너에게 책읽기를 멈추도록 권한다면, 이는 군자의 할 짓인가 소인이 할 짓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소인에 가깝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 나이 한 달만 지나면 지학(志學)279) 의 나이가 되니, 가히 힘쓰지 않겠는가? 오늘 주연(胄筵)280) 의 신하는 이로써 경계를 삼고, 너도 또한 지켜서 잃지 않는다면 이는 종사(宗社)의 복(福)인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의 복주(覆奏)로 인하여, 교동(喬桐) 수영(水營)에 5천 곡(斛)을 획급하여 군수(軍需) 비용에 보태도록 하고, 경상도 김해(金海) 산산창(蒜山倉)이 본부(本府)에 속해 있어 소금을 무역하여 폐단을 끼치는 것을 감영(監營)에 이속시켜 주관(主管)하게 하였다.
헌부 【장령 안겸제(安兼濟)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소회(所懷)를 아뢰기를,
"근년 이래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신하로 먼 곳에 유배되어 부첨(付籤)된 자가 혹 있는데, 지금 비록 차례로 풀려나고 있지만, 황최언(黃最彦)에 이르러서는 지난번 한 장의 상소가 소원(疏遠)한 발자취로써 바로잡아 구원하는 정성을 바쳤으니, 그 말이 비록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마음은 우국 애민(憂國愛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가 어찌 재야(在野)의 사람과 사사로이 좋아하는 바가 있어서 그리하였겠습니까? 황최언은 족히 아깝지 않으나, 그 관직은 간쟁으로써 명색을 삼았으며, 그 유배는 말로써 죄를 얻었으니, 지금 양(陽)이 회복되는 날을 당하여 더욱 건(乾)을 본받고 영(令)을 행하여 용서해 석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최언은 무슨 일로써 죄를 입었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산림(山林)의 일에 관련된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서호수(徐浩修)와 마찬가지이다."
하고, 신경(申暻)을 처분할 때의 일기(日記)를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신경의 상소 가운데 ‘비렴(蜚廉)·악래(惡來)’281) 라는 구절에 이르러, 이를 멈추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는 꿈 속에서도 오히려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다."
하고, 엄교(嚴敎)를 많이 내렸는데, 안겸제(安兼濟)가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비로소 체차하라고 명하였다가 후에 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율을 시행하였다.
정언 심중규(沈重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구윤명(具允明)의 부자(父子)·형제(兄弟)는 그 일생의 한 일을 상고하건대 하나도 가히 취할 것이 없으면서도 성상의 불세(不世)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어 병조(兵曹)의 큰 직책과 호서(湖西)의 중대한 책임을 맡았으니, 그 베푸신 은총이 어떠하겠습니까마는, 터럭만한 보답이나 조금의 공적이 있음을 듣지 못했으니, 온 세상 사람들이 개탄한 지 실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홍문관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문벌과 명망이 자별(自別)해야 하는데, 한 해에 차례로 특제(特除)하여 어리석고 염치없는 무리들로 하여금 경연과 논사(論思)하는 반열에 외람되이 참여하는 데 이르렀으니, 인기(人器)가 걸맞지 못하고 물정(物情)이 부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 교리 구상(具庠)과 전 수찬 구익(具㢞)에게 빨리 삭직(削職)을 명하는 것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전 대사성 이담(李潭)은 유생(儒生)의 신분(身分)으로 있을 때부터 평소에 비방을 듣는 일이 많더니, 환로(宦路)에 나옴에 미쳐서는 조금도 삼가고 경계함이 없었습니다. 마침 국자(國子)의 과시(課試)에 당하여서는, 고권(考券) 전에 물색(物色)을 먼저 정하고 등제(等第)할 때에 친소(親疎)를 견주어 논하니, 이 소문을 듣고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심지어 통독(通讀)으로써 말한다면, 스스로 살펴 관장하지 않고 하리(下吏)에게 오로지 맡기어, 마음대로 오르내리게 하는 등 전하는 얘기들이 파다하여, 경서에 통달한 먼 곳의 선비들이 모두 원한을 품은 채 돌아갔으니, 이미 파직의 경벌(輕罰)을 겪었다 하여 내버려두고 논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역시 견삭(譴削)토록 명하심이 옳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매, 임금이 심히 노하여 말하기를,
"한 붓대로써 남의 네 부자(父子)를 논하는 것이 가(可)한가? 이 또한 당심(黨心)이며, 마음씨 또한 아름답지 못하다."
하고,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율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연석(筵席)에서 구윤명 등을 구원하여 말하기를,
"대신(臺臣)의 상소가 전혀 파착(把捉)함이 없고, 단지 ‘그 일생에 한 일을 상고하건대 하나도 가히 취할 것이 없다.’고 하여 한 붓대로써 단정해 버렸으니, 이렇게 남을 논한다면 누구인들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담의 사람됨은 또한 가히 쓸만한 자이니 기력(氣力)이 있어 국사(國事)를 담당하고자 하는 자인데, 시험을 관장함에 있어 약간 남의 말은 들은 일이 있으나 이것은 사소한 일이니 어찌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탄핵받은 자에게 문득 그 물러남을 허락한다면 말을 낸 자의 뜻에 딱 들어맞게 될 것이니, 병조 판서와 호서백(湖西伯)에게 반드시 그 물러남을 허락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그렇게 여기지 않고 말하기를,
"인군(人君)은 예(禮)로써 신하를 부리는 것이니, 어찌 그 지키는 바 염우(廉隅)를 펴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당시 구윤명은 병조 판서이고, 구윤옥(具允鈺)은 호서백이었기 때문이다.
경상 감사가 도내(道內)에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이 있어서 가히 정포(旌褒)할 만한 자를 뽑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교(風敎)를 세우고 절개를 장려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선무(先務)인데, 근래에 〈서진(西晋) 사람〉 왕상(王祥)이 한겨울에 얼음을 녹여 잉어를 얻은 일과 〈오(吳)나라 사람〉 맹종(孟宗)이 눈 속에서 죽순(竹筍)을 구한 일이 사람마다 모두 있으니, 그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신(道臣)이 이미 ‘정밀히 뽑았다.’ 하였으나, 예조(禮曹)로 하여금 복계(覆啓)하여 풍교(風敎)를 세우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서명응(徐命膺)이 근교에 있으면서 명(命)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체직(遞職)시켰다.
11월 13일 갑신
임금이 옥당관(玉堂官)을 불러 《고려사(高麗史)》 의주(儀註)를 읽어 아뢰도록 하였다. 약방 도제조 홍봉한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중엽(中葉) 이후로 아문을 임시로 설치한 것이 많으니, 선혜청·비변사, 여러 군문(軍門)과 같은 것이 모두 임시로 둔 것인데, 선혜청은 군민(軍民)이 의뢰하는 바이고, 비변사는 체통이 있는 바이지만, 그것이 임시로 설치된 때문에 일마다 구애되고 어려운 것이 많으므로, 고(故)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이 제도를 정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매양 진달(陳達)코자 하였으나, 관제(官制)의 변통을 경솔히 할 수 없었는데, 이제 비로소 전조(前朝)의 관제를 인하여 앙달(仰達)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구제(舊制)를 꼭 고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전 신창 현감(新昌縣監) 이관휘(李觀徽)가 재임시에 창고의 포흠(逋欠)이 심히 많았는데, 일이 발각되자 나처(拿處)토록 명하여 5, 6개월을 갇혀 있었지만, 아직도 조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 임금이 수찬 이재간(李在簡)에게 가서 핵실(覈實)토록 명하였는데, 이재간이 돌아와서 아전이 축낸 실수(實數)를 아뢰매, 임금이 많이 견감(蠲減)해 주고, 이관휘에게는 본율(本律)을 시행하였다.
술잔을 드린 후에 하사받은 여러 신하가 선조(先朝)의 추은(推恩) 때에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 등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한 예(例)에 의거하여, 이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을 대표로 하여 봉전(封箋)하여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몸소 이를 받고 하교하기를,
"선조의 고사(故事)를 본받고, 여러 신하가 전문(箋文) 올리는 것을 보니, 또 한 성사(盛事)이다."
하고, 술잔 받을 때의 빈계(賓啓)와 왕세손의 상소와 갱운시(賡韻詩)를 엮어서 1책(冊)으로 하도록 명하고, 홍계희(洪啓禧)에게 그 일을 맡아 진행토록 명하였으니, 이름을 《광효록(廣孝錄)》이라 하였다.
11월 14일 을유
임금이 태묘의 망제에 쓸 향(香)을 숭현문(崇賢門)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증(贈) 참의 최후(崔垕)에게 특별히 2품직을 증직하라고 명하였으니, 최후는 화경 숙빈(和敬淑嬪)의 동기간이었다. 나라의 법전이 아닌데도 더 증직하는 명이 있는 것은 특별한 은전이다. 선혜청 당상 이익보(李益輔)가 말하기를,
"영남의 밀양·창녕·영산(靈山)·현풍 등 네 고을은 대동(大同)을 쌀로 상납하였다가 이미 조창(漕倉)을 설치한 후에는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음으로 하여 무명으로 바꾸어 바치도록 허락하였는데, 지금은 백성들이 또 쌀로 바치기를 원한다 합니다."
하매, 임금이 조엄(趙曮)이 새로 영백(嶺伯)282) 을 지낸 것으로 인하여 그 편부(便否)를 물으니, 조엄이 밀양 삼랑창(三浪倉)을 후조창(後漕倉)으로 삼고 좌우(左右) 조창의 예에 의거하여 가까운 곳의 변장(邊將)을 차원(差員)으로 삼아 배를 이끌고 수납(輸納)케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1월 15일 병술
하교하기를,
"종통(宗統)을 정한 후 그 체통이 중하기 때문에 효장묘(孝章廟)의 관천(灌薦)하는 예(禮)를 또한 이미 복구하였으니, 차후로는 사시(四時)의 중삭제(仲朔祭)에 삼헌(三獻)을 갖추고, 헌관(獻官)은 당상 3품으로 차정하며, 아헌관(亞獻官)과 종헌관(終獻官)은 당하 정3품·종3품으로 차정함을 정식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11월 16일 정해
임금이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를 소견하였다. 내년의 중시(重試) 대거(對擧)는 정시(庭試)로써 거행토록 명하였다. 도제조 홍봉한이 말하기를,
"조경(躁競)의 풍습은 오로지 과목(科目)의 너무 많음에서 말미암았습니다. 선조(先朝)에서는 인일(人日)·칠석제(七夕製)에도 또한 혹 사제(賜第)하지 않는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과액(科額)283) 이 점차 많아져서 패(牌)를 지닌 채로 헛되이 늙어가도 변통할 방도가 없으니, 마땅히 바로잡아 구제할 계책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후로는 과거에서 취하는 인원이 3인을 넘지 않도록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임금이 승지 엄인(嚴璘)과 옥당 홍술해(洪述海)에게 묻기를,
"승지·유신(儒臣)은 모두 감시 어사(監市御史)를 지냈는데, 저들이 모두 약속을 지키던가?"
하니, 엄인 등이 말하기를,
"다른 폐해는 별로 없지만, 어사를 위한 공궤(供饋)가 북로(北路)에서 가장 큰 폐해입니다. 평사(評事)는 북곤(北閫)의 막관(幕官)이라, 병사(兵使)가 비록 불법한 일이 있더라도 단속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사를 보낸 것이니, 체통을 존엄하게 하려는 소치이지만, 평사로서도 충분합니다. 어사를 보내는 것은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도 또한 그렇게 여겼다. 후에 평사로써 어사를 겸하였다.
지평 강지환(姜趾煥)이 상소하여 안겸제(安兼濟)와 심중규(沈重奎)의 피죄(被罪)를 구원하였으나, 임금이 인사(人事)를 닦는 것이라 하여 문책하고 체직시켰다.
11월 18일 기축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을 면직시키고 김상철(金尙喆)을 대신케 하였다. 정실(鄭實)을 대사헌으로, 서병덕(徐秉德)을 장령으로, 이항조(李恒祚)·이장로(李長老)를 지평으로, 이진항(李鎭恒)을 헌납으로, 이치중(李致中)을 정언으로, 이형규(李亨逵)를 교리로, 이진규(李晉圭)를 부교리로, 이성원(李性源)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어필(御筆)로 ‘장보각(藏寶閣)’ 석 자(字)를 써서 효장묘(孝章廟) 동쪽 행랑에 걸도록 명하였으니, 바로 연보(年譜) 판본(板本)을 갈무리해 두는 누각이다.
영의정 홍봉한이 전조(銓曹)의 추증(追贈)하는 법식이 과한 것이 많다 하여 삼대(三代)를 이조(吏曹)를 지낸 연후에 한하여 비로소 이조를 허락하는 것으로써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법은 단지 조신(朝臣)·사부(士夫)에게만 행해지고, 중인과 서얼 그리고 지방의 내력이 없는 자에 이르러서는 세계(世系)가 어떠함을 물론(勿論)하고 문득 아경(亞卿)으로써 증직(贈職)하여, 관방(官方)이 문란해지고, 한갓 전관(銓官)이 사사로움을 따르는 자료가 되었으니,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1월 21일 임진
박필규(朴弼逵)를 사간으로, 채위하(蔡緯夏)를 헌납으로, 박사륜(朴師崙)·임해(任瑎)를 정언으로, 윤득맹(尹得孟)을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초복(初覆)284) 을 행하였는데, 이 해에 사형수가 단지 4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술을 금지한 효과이다."
하였다. 임금이 형옥(刑獄)을 결단할 때마다 반드시 신중히 살피고, 비록 법에 있어 마땅히 사죄(死罪)라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반복 사핵(査覈)하여 생의(生議)에 부쳤으므로, 4인 가운데 또한 사죄에서 감형된 자가 있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상익(金尙翼)이 공도회(公都會)의 참고관(參考官) 정기환(鄭基煥)이 과장(科場)에서 사사로움을 따른 자표(字標)가 드러난 것으로써 장계하여 아뢰니, 정기환을 나처토록 명하였다. 정기환의 공초(供招)에 김상익을 여지없이 능멸하니, 남간(南間)에 가두도록 명하고, 다시 자백을 받아 아뢰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정기환이 감정을 품고 마음대로 상관을 능멸했다 하여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향리(鄕里)로 쫓아내도록 명하였는데, 김상익도 후에 또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남간은 곧 사형수가 갇혀 있는 곳이다.
11월 23일 갑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서 삼복(三覆)을 행하고, 수찬 이성원(李性源)을 양근군(楊根郡)에 보내어 살옥 죄인 하필웅(河必雄)의 옥사(獄事)를 조사하게 하였다. 하필웅은 사람을 발로 차서 죽게 하여 이미 자백한 자인데, 임금이 오히려 흠휼(欽恤)하는 뜻으로 혹 숨겨진 사정이 있는지 염려하여 마침내 어사(御史)를 보낸 것이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음에 항상 잔인하게 여기는 것은 경외(京外)의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이다. 고(故) 장신(將臣) 이완(李浣)의 말을 일찍이 들으니, 도둑을 다스리는 형장(刑杖)이 형신(刑訊)보다 참혹하다고 하였다. 고인(古人)의 말에, ‘항양(桁楊)을 가하면 무엇을 구하여 얻지 못하겠는가?’ 하였는데, 하물며 이 형벌이겠는가? 이는 하나같이 시원스럽게 한다는 것의 폐단이다. 본래의 사건은 닭이나 개, 세간살이 등에 불과한 것인데도 반드시 시원스레 듣고자 하여 먼저 이 형벌을 시행하니, 이것이 어찌 ‘형벌받는 자는 〈지체를〉 다시 붙일 수 없다.’는 뜻285) 이겠는가?"
하고는,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끝까지 캐묻지 않고 먼저 이 형벌을 시행하는 자를 경외(京外)에 각별히 신칙하게 하고 뒤이어서 난장(亂杖)의 법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임준(任㻐)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24일 을미
어떤 별이 하늘 한가운데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석강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내년 3월 13일은 바로 내가 입학(入學)한 날이다. 소학 동자(小學童子)라고 저번에 이미 일컬었으니, 장차 《소학》으로써 강(講)을 시작하고자 한다."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비국 낭청을 발견(發遣)하여 관서(關西)의 칙수고(勅需庫)의 허실(虛實)과 산성(山城) 군량의 유무(有無)를 살펴 조사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1월 26일 정유
태백성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11월 27일 무술
임금이 담(痰)으로 당기는 증세가 있어 행보(行步)하기가 자못 전과 같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지팡이를 붙들고 다니기를 청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어렵게 여기다가 후에 내국(內局)에 지팡이를 구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약원 제조(藥院提調) 심수(沈鏽)가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의 집에서 등나무 지팡이 하나를 얻어서 바치며 아뢰기를,
"이 등나무는 이름하여 만년등(萬年籐)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전에 운산 군수(雲山郡守) 이은정(李殷鼎)의 일로 인하여 어사 박사해(朴師海)를 보내어 살펴 조사하게 하였다. 박사해가 돌아와 아뢰기를, ‘이은정의 아객(衙客)이 관비(官婢)와 사사로이 간통하였는데, 비(婢)의 지아비가 비의 집에 왕래하자 이은정이 마침내 그를 곤장쳐서 죽게 하였고, 다른 정사(政事)도 또한 광패(狂悖)한 것이 많다’고 하였다. 임금의 뜻은 본래 깊이 죄주고자 하지 않았고 영의정 홍봉한도 또한 그를 힘써 두둔하여 벌이 단지 파직에 그쳤다. 이로부터 탐학한 관리는 꺼리는 바가 없고, 어사의 권한은 더욱 가벼워졌다.
11월 28일 기해
홍경안(洪景顔)과 이일증(李一曾)을 정언으로, 남현로(南玄老)를 헌납으로, 서명응(徐命膺)을 부제학으로, 박사해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고(故) 상신(相臣) 이덕형(李德馨)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토록 명하였다. 우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당(唐)나라 헌종(憲宗)이 위징(魏徵)의 옛집을 속환(贖還)해 준 고사에 의거하여 단종조(端宗朝)의 충신 김종서(金宗瑞)의 옛집을 속환하여 그 자손에게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고 무신년286) 의 충신 이봉상(李鳳祥)의 집에 식물(食物)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세초(歲抄)를 들이라 명하고, 윤봉구(尹鳳九)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산림(山林)의 표본인데, 죄를 주면 지나치다."
하고, 마침내 서용하였다.
한성부에서 경중(京中)의 노인으로서 쌀과 고기를 하사받은 자를 뽑아 아뢰니, 그 수가 무릇 1천 7백여 인이 되었다.
11월 29일 경자
태백성이 나타났다.
임금이 감기가 들어 다소 편치 않았고 세손이 또한 병환이 있어 약원(藥院)에서 연이어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세손의 거처가 멀어서 가 보기가 힘들다 하여 사현합(思賢閤)의 동실(東室) 서합(西閤)으로 이거(移居)토록 명하였으니, 곧 임금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매일 밤에 잠들지 못하고 열 번이나 일어나 임하여 보았으며, 변뇨(便尿) 등속에도 또한 반드시 가서 보고 말하기를,
"지금 나라의 형세를 돌아보건대 단지 망팔(望八)의 노쇠한 인군(人君)과 충자(沖子)뿐이다."
하였다. 자애로운 하교가 심지어 안색(顔色)과 말에 나타났으니, 연신(筵臣)으로서 이를 들은 자가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1월 30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 【지평 이장로(李長老)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보색(保嗇)의 방책에 유의하여 절섭(節攝)의 도리를 다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나의 건공(建功)에 해당한다."
하였다. 또 대소 과장(大小科場)에서의 조경(躁競)하는 습속을 금하기를 청하니, 신칙토록 명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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