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6권, 영조 41년 1765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1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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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임인

약원에서 세손에게 곽령산(藿苓散)을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은 나의 병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또한 나를 닮았다. 나는 반총산(蟠蔥散)으로 주인(主人)을 삼았는데, 세손은 곽령산을 복용하니, 증세가 이미 같고 약도 또한 같다. 나는 평상시에 내 몸 기르기를 심히 박약하게 하기 때문에 저 창호(窓戶)에 틈을 바르지 않은 것도 또한 그대로 둔 채 참고 지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이는 성덕(聖德)의 일입니다."
하였다.

 

12월 2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어떤 별이 천원성(天苑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심감(心鑑)》을 읽게 했는데, 《심감》은 임금이 몸소 지은 것이다. 세손이 거처하는 곳을 가리개 하나를 격하게 하여, 임금이 세손으로 하여금 책 읽는 소리를 듣게 하여 소견(消遣)의 자리를 만들고자 하였으니, 또한 사물과 접하여 깨우치도록 함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12세 때에는 읽은 것이 없는데, 세손은 나와 비교하면 읽은 것이 심히 많다. 고례(古例)에는 휴일에 소대(召對)하지만, 나는 을유년의 고사로써 서연일(書筵日)에 소대를 겸행(兼行)하도록 명하였다."
하였다.

 

이은(李溵)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영의정 홍봉한이 전정(田政) 누결(漏結)의 폐단으로써 앙주(仰奏)하기를,
"연전(年前)에 삼남(三南)에서 진전(陳田)으로 조사된 것이 수만 결인데, 도로 기경(起耕)하여 세금을 거두는 부류는 실제로써 보고하지 않으면 이익이 관(官)에 돌아가고 폐해가 백성에게 미칩니다. 각별히 핵실(覈實)하고 장률(贓律)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엄히 신칙토록 명하였다.

 

전라 감사 원인손(元仁孫)이 사폐(辭陛)하였다. 임금이 원인손 부자(父子)가 전후하여 이 도(道)를 안렴(按廉)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여 면칙(面飭)하여 보내고, 그 노모(老母)에게 식물(食物)을 하사토록 명하니, 원인손은 원경하(元景夏)의 아들이고 원경하는 은우(恩遇)를 가장 많이 입었기 때문이었다.

 

12월 3일 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미(李瀰)를 승지로, 이창수(李昌壽)를 형조 판서로, 김응순(金應淳)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김 응순은 특별히 선발한 것이다.

 

전 판서 황인검(黃仁儉)이 졸하였다. 황인검은 성품이 염약(廉約)하여 여러 차례 웅번(雄藩)을 맡으면서 가난한 선비처럼 스스로를 지켰다. 졸하매 임금이 심히 애석하게 여기고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致祭)하였으며 조부(弔賻)를 후히 하도록 명하였다.

 

호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이 전에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으로 재임할 때 운산 군수(雲山郡守) 이은정(李殷鼎)의 남살(濫殺)을 살피지 못한 일을 가지고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정언 이일증(李一曾)이 상소하여 정홍순을 배척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은정의 소행은 실로 이미 대단히 망측스러운 일로서, 영문(營門)에 거짓 보고함으로써 꾸미고 덮어버리는 계책을 삼은 데 이르러서는 마음씀이 지극히 무상(無狀)합니다. 도신(道臣)된 자는 비록 자질구레한 일이라도 결코 거짓 보고를 곧이듣고 밝게 살피는 일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하물며 사람의 목숨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이겠습니까? 저 거짓 보고한 이 은정은 이미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유독 거짓을 당한 감사(監司)만이 과연 살피지 못한 잘못이 없겠습니까? 정홍순이 스스로 진장(陳章)하여 논열(論列)하는 것도 또한 늦었습니다. 그 소(疏)에 대한 비답에 용서하는 것도 가하고 위로하여 유시하는 것도 가한 일이겠습니다만, 도신(道臣)의 체통을 얻었다는 것으로 비답을 내리신 것은 가상히 여겨 장려하는 것 같은 점이 있으니 아마도 번신(藩臣)을 칙려(飭勵)하는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청컨대 비지(批旨)를 도로 거두시고 견파(譴罷)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였다. 대개 이은정의 일은 정홍순이 도(道)를 안렴할 때의 일로서, 장폐(杖斃)된 자의 친척들이 시체와 돈을 싣고 영문(營門)에 가서 원굴함을 신설(伸雪)해 달라고 청촉을 도모하려 하였는데, 이은정이 또 말을 꾸며 영문에 거짓 보고한 때문에 정홍순이 시친(屍親)에게 곤장을 안긴 일이 있었다. 이때에 정홍순이 호조 판서가 되어 스스로 논열(論列)하여 진소(陳疏)하였는데, 이일증의 논척(論斥)함은 배척하여 체차하려는 뜻에서 말미암지 않는다고 기필할 수는 없었다. 비답하기를,
"요사이 대각(臺閣)은 옛 종이를 베껴 전하여, 다투는 일이 아니면 적막하여 말이 없는 때에 능히 이 글을 지은 것이 마음은 비록 가상하나, 그 사건을 궁구하고 그 소장(疏章)을 보니, 어찌 그다지도 여러 말을 늘어놓았는가? 자산(子産)287)  도 오히려 교인(校人)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본사(本事)를 깨닫지 못하였는데 날조하여 보고하였으니, 그 속임을 당한 바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체통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본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대등(成大等)의 소행은 일찍이 듣지 못했으니, 어찌 엄히 다스리지 않겠는가? 이은정으로 말하자면, 그 소행을 해패(駭悖)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하지만, ‘망측하다’ 하고 게다가 ‘대단히’라고까지 하였으니, 아! 과연 네 말과 같다면 무신(武臣)에 대하여는 한 가지 해패(駭悖)한 거조가 있어도 모두 ‘망측스럽다’고 말하겠는가? 그 또한 스스로 생각지 않음이 심하구나."
하였으니, 이일증의 아재비 이경춘(李景春)은 곧 무신이고, 이은정도 또한 무인(武人)인 까닭에 임금의 하교가 이에 미친 것이다. 정홍순이 뒤에 또한 사체(辭遞)하였는데, 그 이튿날에 대신(臺臣)으로서 비지(批旨)를 거두어 들일 것을 직청(直請)하였으니, 대간(臺諫)의 체통을 잃은 것이다. 마침내 이일증을 체직(遞職)시켰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5일 병오

태백성이 또 나타났다.

 

임금이 선정신(先正臣) 성혼(成渾)의 봉사손(奉祀孫)과 고(故) 충신 윤집(尹集)의 후손 윤욱(尹煜)과,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의 봉사손 이진익(李鎭翼)을 녹용토록 명하였다.

 

12월 7일 무신

임금이 충자(沖子)에게 보이는 글을 몸소 지어 썼는데, 대개 식색(食色)을 경계하고 한서(寒暑)에 삼가는 뜻을 말한 것이었다.

 

12월 8일 기유

예조 판서 심수(沈鏽)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묘(三聖廟)의 위판(位版)의 흙으로 만든 것이 많이 훼손되었으니, 마땅히 개조(改造)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을 불러 삼성(三聖)의 고적(故蹟)을 물으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삼성은 곧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이며, 역사에서 말하는 바 아사달산(阿斯達山)은 곧 지금의 구월산입니다."
하고, 그 고사(故事)를 심히 상세하게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환웅은 곧 단군의 아버지이고, 환인은 곧 단군의 할아버지이다."
하였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이 개국한 것이 을유년이었고, 지금 또 삼성묘의 일이 있으니, 마땅히 치제(致祭)하는 거조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올해를 넘길 수는 없다."
하였다. 이어서 동명왕묘(東明王廟)의 제문(祭文)을 몸소 짓고, 향축(香祝)을 보내며, 삼성묘의 토판(土版)을 나무 독(櫝)으로 만들어 덮으라 하고는 독제(櫝制)를 몸소 그려서 예조 참의 홍낙인(洪樂仁)을 특별히 보내어 덮도록 하였다.

 

홍문관에 여지도(輿地圖)를 인간하여 올리라 명하고, 각도(各道)의 읍지(邑誌)가 있는 것을 모두 모아서 올리라고 명하였다.

 

부제학 서명응이 말하기를,
"태묘(太廟)의 악장(樂章) 가운데 현미(顯美)·정명(貞明) 두 장(章)을 일찍이 합쳐 한 장을 삼아 구성(九成)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실지는 예전대로 십성(十成)이 되었으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전악(典樂)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구성(九成)입니다."
하였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무릇 음악은 황종(黃鍾)에서 시작하여 황종에서 그쳐 일성(一成)이 되는데, 지금 이 두 장(章)은 각기 황종으로써 시종(始終)을 삼은즉 옛 그대로 십성(十成)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넉 자(字)가 한 박(拍)이 되고, 여섯 박(拍)이 일성(一成)이 되는가?"
하매, 전악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두 장은 만약 여덟 자(字) 한 박(拍)으로 하면 가히 구성(九成)이 된다."
하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매, 이제부터 여덟 자 한 박으로 만들어 구성을 삼으라고 명하였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무법(舞法)은 반드시 사방(四方)으로 선회하는데, 정현(鄭玄)은 남표(南表)로부터 제2표(表)에 이르는 것으로 일성(一成)을 삼았고, 제2표로부터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무(舞)는 단지 선 곳[立處]에서 우러러보고 굽어보며 구부렸다 폈다 할 따름이니, 이는 끝내 일성(一成)에 불과합니다. 어찌 악(樂)이 구성(九成)인데 무(舞)는 일성인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바로잡도록 명하심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서명응이 또 말하기를,
"신이 잠시 전에 악장(樂章)의 일을 전악(典樂)에게 물으니, 전악은 말하기를, ‘가(歌)도 또한 구성(九成)이고, 악(樂)도 또한 구성(九成)이라’ 하였는데, 이는 그 본말(本末)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대저 국초에 악(樂)을 제정할 때 악은 구성을 본뜨고, 가(歌)는 구장(九章)을 만들었는데, 병자년288)  에 환도(還都)한 후에 구악(舊樂)이 흩어지고 없어져 고거(考據)할 곳이 없으므로 강도(江都)의 실록(實錄)을 열람해 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명신(名臣)과 석보(碩輔)들이 비록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구성(九成)의 뜻을 알지 못하여 드디어 그것이 축실 악장(逐室樂章)이 됨을 의심하고, 선묘조(宣廟朝)의 흥복(興復)한 공렬(功烈)과 같은 조종(祖宗)의 공덕(功德)은 드러내어 선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어 이에 중광장(重光章)을 따로 지어 첨입(添入)하였는데, 가(歌)가 이미 십장(十章)이니 악(樂)도 또한 십성(十成)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선조(先朝)의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이 이를 깨달아 크게 의심하고 곧바로 진장(陳章)하여 널리 물어 바로잡기를 청하였으나, 그때에 뭇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서 그전대로 두고 고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성상의 계해년289)  에 이르러 성명의 마음에서 단정(斷定)하시어 중광(重光)·정명(貞明)을 합하여 한 장(章)으로 만들어 구성(九成)의 수(數)를 갖추니, 이에서야 악·가(樂歌)가 그 처음대로 회복되었습니다. 다만 가(歌)는 비록 바로잡았으나 악(樂)은 아직 옛것을 따랐기 때문에, 두 장(章)을 합하여 한 장으로 하는 성의(盛意)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얕은 생각으로는 무릇 악(樂)이란 스스로 수미(首尾)가 있으니, 만약 황종이 궁(宮)이 되면 수(首) 황종, 미(尾) 황종으로서 바야흐로 한 가락이 되니, 대려(大呂) 이하도 모두 그러합니다. 지금 용광장(龍光章) 끝부분과 정명장(貞明章) 앞부분에 황종 한 소리[一聲]를 없애고 다른 소리로써 대신하여 그 연합하는 사이에 미봉한 흔적을 볼 수 없게 한다면, 거의 그 마땅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중광(重光) 한 장(章)을 빼내어 버린다면 대체로 무사하다 할 것이지만, 지금은 구차함을 면할 수 없다."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진실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이 한 장(章)을 뺀다면 일은 모두 순편(順便)하지만, 단지 사체(事體)가 중대함으로써 중간에 보태어 넣은 것을 빼내지 다시 국초의 정제(定制)를 회복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악(樂)은 넉 자가 한 박이고, 여섯 박이 일성(一成)인데, 용광장과 정명장은 넉 자가 한 박인가 여덟 자가 한 박인가? 경(卿)은 이것을 다시 전악(典樂)에게 묻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서명응이 돌아와 아뢰기를,
"용광장과 정명장은 넉 자가 한 박이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과연 십성이고 구성이 아니다. 전악으로 하여금 차후에는 용광장과 정명장은 여덟 자를 한 박으로 하고 여섯 박을 일성으로 하게 함이 좋겠다."
하였다.

 

12월 10일 신해

이행원(李行源)을 헌납으로, 임관주(任觀周)를 정언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1일 임자

임금이 방목(榜目)을 열람하였다. 고(故) 중신(重臣) 김동필(金東弼)이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앞장서 배척하여 그 충성됨이 가상함을 추념하고, 몸소 글을 지어 치제(致祭)하였다.

 

12월 12일 계축

서명응을 도승지로 삼았다.

 

탐라에서 공과(貢果)가 올라왔으므로 명일 진전(眞殿)에 몸소 올릴 것을 명하였다.

 

12월 13일 갑인

임금이 어가로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귤을 올리고, 이어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였다가 저녁에 환궁하였다.

 

12월 14일 을묘

윤동승(尹東昇)을 승지로, 이응협(李應協)을 대사헌으로, 이형원(李亨元)을 헌납으로, 임관주(任觀周)를 정언으로, 심수(沈鏽)를 호조 판서로, 정홍순(鄭弘淳)을 형조 판서로, 남태제(南泰齊)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대사헌 정실(鄭實)이 시골에서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비답하기를,
"풍헌(風憲)의 직책은 비록 억지로 맡기기는 어려우나 춘방(春坊)에서 보필하고 인도하는 일에 대하여는 어찌 차마 경(卿)을 버리겠는가? 빈객(賓客) 자리가 지금 마침 비어 있기 때문에 특별히 도헌(都憲)290)  의 직(職)을 체차하도록 허락하고 경(卿)이 나아올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아! 망팔(望八)의 인군(人君)이 근래에 마음씀으로 인해 더욱 쇠약하여 피로한 가운데에서 그 생각함이 이와 같고, 또 조섭(調攝) 중에 있는 충자(沖子)를 늙바탕에 경(卿)에게 맡기노니, 경은 어찌 차마 다시 사양하겠는가? 마땅히 곧바로 길에 올라 이 뜻을 어기지 말라."
하였다. 정실은 본래 산림(山林)의 양덕(養德)하는 선비가 아닌데, 성상의 비답이 이와 같이 융숭하였으니, 윤음(綸音)의 글이 간엄(簡嚴)함을 잃은 듯하다.

 

영의정 홍봉한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손의 병환이 이미 회복되었으니, 마땅히 하례(賀禮)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마땅히 행해야 할 예(禮)라 하더라도 장대(張大)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임금이 진연(診筵)에서 홍봉한과 더불어 일을 맡긴 여러 신하들을 조용히 논하였는데, 고(故) 판서 박문수(朴文秀)에 이르러 홍봉한이 그의 기국(器局)을 대단히 칭찬하였고 또 그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음을 말하였으며, 정여직(鄭汝稷)과 구선행(具善行) 같은 자의 경우에는 반드시 태평 시대에 장임(將任)이라 하였고, 박찬신(朴纘新)과 조동정(趙東鼎)은 가까이 해서는 안됨을 말하였으며, 이철보(李喆輔)는 머리가 희어 반드시 치사(致仕)해야 함과 장태소(張泰紹)는 장임을 맡길 수 없음을 말하였는데, 모두 기이하게 들어맞췄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얘기가 나랏일에 미치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겉으로 꾸며서 그렇게 되겠는가?"
하였다.

 

12월 15일 병진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친림(親臨)하여 감제(柑製)를 설행하여 선비들을 시험하고, 진사(進士) 오준근(吳濬根)을 취하여 전시(殿試)에 곧바로 나아가게 하였다. 귤을 나눠 줄 때에 유생들이 귤을 움켜 쥐려고 분주(奔走)하는 자가 많았다. 이산(尼山)의 한 유생은 또 땅에 엎드려 그 고을에 궐리(闕里)의 이름이 있다 하면서 진장(陳章)하여 부자묘(夫子廟)를 세울 것을 청하고자 하니, 임금이 선비의 습속이 심히 놀랍다 하여 이름을 물어 정거(停擧)시키고 사유(師儒)의 장(長)을 문비(問備)하였다.

 

12월 16일 정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산의 지명(地名)이 궐리가 되었음은 공성(孔聖)을 위함이 아닌데, 이로 인해 선비가 투신(投身)할 생각을 하는 것은 선성(先聖)을 높이고 나라의 체통을 엄히 하는 소이가 아니라 하여, 해당 도신(道臣) 및 지방관의 직을 파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중호(李重祜)를 충청도 관찰사로, 홍인한(洪麟漢)을 경기 관찰사로, 윤득양(尹得養)을 형조 참판으로, 정환유(鄭煥猷)를 헌납으로, 유의양(柳義養)을 정언으로 삼았다.

 

장령 서병덕(徐秉德)이 상소하여 민폐를 논하면서, 비록 조금 풍년이라 해도 구포(舊逋)를 모두 징수하기 때문에 실제로 백성이 풍년을 원치 않는 탄식이 있으니, 마땅히 견휼(蠲恤)해야 한다고 하매, 임금이 여러 도에 우심한 고을의 구포(舊逋)를 거두는 것을 모두 정지시키라고 명하였다.

 

제주 목사 윤시동(尹蓍東)이 장계하여 육지의 관곡(官穀) 6천 석(石)을 얻어 굶주린 백성을 살리도록 청하고, 또 말하기를,
"전 목사(牧使) 이명운(李明運)이 명색은 비록 기민(飢民)을 진휼했다고 하나, 굶주려 죽은 백성이 6천여명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대신들에게 물었는데, 홍봉한이 호남의 곡식 5천 곡(斛)을 먼저 보내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그 청한 바를 모두 허락하고, 이명운을 종성부(鍾城府)에 충군(充軍)시키며, 향축(香祝)을 보내어 탐라의 굶어 죽은 백성들을 제사지내도록 명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상익(金尙翼)이 진소(陳疏)하여 물러나기를 청하니, 체직을 허락하고 이은(李溵)으로 대신케 하였다.

 

12월 17일 무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관학 유생(館學儒生)을 불러 강(講)을 시험하고, 으뜸을 차지한 백봉주(白鳳周)에게 전시(殿試)에 곧바로 나아가도록 명하였다.

 

12월 18일 기미

임금이 진연(診筵)에서 제조 구윤명(具允明)에게 묻기를,
"인묘(仁廟)의 잠룡지(潛龍池)가 경(卿)의 집에 있다고 하는데,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구윤명이 말하기를,
"신의 종가(宗家)에 있는데, 인묘(仁廟)께서 어렸을 적에 장난치다가 늘 못 속에 빠졌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은 훈척(勳戚)의 집안인데, 부자 형제가 또 남의 비평을 들었으니, 이는 내가 임용한 소치이다."
하였는데, 당시 구윤명이 심중규(沈重奎)의 논척(論斥)을 새로 당하고 있었다.

 

12월 19일 경신

남유용(南有容)을 형조 판서로, 정홍순(鄭弘淳)을 동지성균관사로 삼았다.

 

임금이 밤에 유신(儒臣)을 불러 《당감(唐鑑)》을 강(講)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봉선(封禪)291)  은 무슨 뜻인가?"
하니, 도승지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옛날에 방악(方岳)을 순행(巡行)하였는데, 회남자(淮南子)의 무리들은 부회(傅會)하여 공덕(功德)을 표(表)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禪)’ 자(字)는 무슨 뜻인가?"
하니, 옥당 박사해(朴師海)가 말하기를,
"제사의 이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공덕이 있다면 스스로 마땅히 죽백(竹帛)에 기록되어 전할 것인데, 태산(泰山)에 간직하여 무엇 하겠는가? 하늘이 돌보심이 있다면 제왕(帝王)은 마땅히 인군(人君)되는 도리를 다하여 하늘의 돌보심에 보답함이 옳지, 스스로 공덕을 써서 돌 속에 간직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당나라 태종의 사람됨을 논하기를,
"이미 위징(魏徵)의 어짊을 알고 처음엔 황금(黃金)을 하사했다가 끝내는 또 이 시골 늙은이를 죽이겠다는 말이 있었으니, 어찌 두 갈래의 판이(判異)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고(故) 영상(領相) 이종성(李宗城)은 내가 일찍이 위징이라고 허여하였지만, 또한 끝내 너무 과격한 데가 있었다. 당 태종은 위징을 면전(面前)에서 능히 효유(曉諭)하지 못했으나, 나는 이종성에게 효유하였으니, 나를 가히 당나라 태종보다 어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였다.

 

12월 20일 신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고 여러 도(道)의 구포(舊逋)를 정봉(停捧)하라고 명하였으니, 대개 해가 거의 저물어 가고, 또 서병덕(徐秉德)의 소청(疏請)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극진한 도리를 하지 않음이 없으나, 일을 맡은 신하들이 문득 국용(國用)이 지탱하기 어렵다 하여 매양 세말(歲末)에야 비로소 이 영(令)이 있었는데, 백성들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아전들이 인연하여 작간(作奸)하니, 진실로 가히 탄식할 일이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김종정(金鍾正)이 어미가 늙은 것으로 인하여 체직되고, 승지 김화진(金華鎭)으로 대신케 하였다. 김화진은 어버이가 늙은 것으로 인하여 걸군(乞郡)한 자인데, 묘당에서 도리어 변임(邊任)을 맡기니, 장차 늙은이를 모실 수가 없게 되었다. 임금이 효리(孝理)의 정사(政事)로써 처음에는 중난하게 여기다가 끝내 제수하니, 김화진이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경상 감사 김응순(金應淳)이 하직하니, 임금이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12월 21일 임술

임금이 꿈에 자성(慈聖)을 뵙고 깨어나 감회가 있어서 기회문(記懷文)을 몸소 지어 이를 기록하게 하였다.

 

12월 22일 계해

임금이 진연(診筵)에서 하교하기를,
"무릇 여항(閭巷)에 질병이 있는 자는 문득 무격(巫覡)을 쓰지마는 마침내 이익이 없고, 의약(醫藥)이 실로 효험이 있다."
하니, 도제조 홍봉한이 말하기를,
"여항의 부귀한 자는 매양 이런 일이 있지만, 제왕가(帝王家)에서는 더욱 경계할 일입니다. 성상께서 이 무리들을 척거(斥去)하심은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만약 세손으로 하여금 성의(聖意)를 본받고 이런 일을 경계하도록 하시면 국가의 복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내년 기곡제(祈穀祭)의 제문(祭文)을 쓰라고 명하였고, 또 정조(正朝)의 진하(陳賀)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정(大政)을 몸소 행하였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마땅히 출륙(出六)할 자는 비록 자리가 좁더라도 허사과(虛司果)에 부치지 않도록 하였다. 이해중(李海重)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때에 대사성은 이조 참의의 후보로 추천되는 계제(階梯)이기 때문에 문학(文學)의 여하를 논하지 않고 지벌(地閥)이 있으면 문득 후보로 추천하였는데, 삼대(三代) 때 교주(敎胄)의 법은 오히려 논할 것도 없고, 과시(課試)의 등제(等第)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 고하(高下)와 입락(立落)을 정함이 없으니, 어찌 사람을 위해 관직을 택한다는 책망을 면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선정(先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봉사손(奉祀孫)을 재랑(齋郞)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정사(政事)가 이미 끝나자, 임금이 두 전관(銓官)에게 음식을 내리고, 사언 일구(四言一句)를 직접 써서 각기 하사하였다. 이때에 박상덕(朴相德)이 이조 판서이고, 김상철(金尙喆)이 병조 판서이었다.

 

12월 23일 갑자

영의정 홍봉한이 무신 당상관이 적체된 것으로 인하여 서북도(西北道) 두 영(營) 및 양도(兩都)의 중군(中軍)으로써 절충(折衝)에 새로이 승자(陞資)하는 자리로 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이 대정(大政)에서 새로 제수된 수령(守令)들을 소견하고 면칙(面飭)하여 부임을 재촉하였다. 밤에 유신(儒臣)들을 소견하고 《당감(唐鑑)》을 강(講)하였는데, 당나라 현종의 존호(尊號)와 범조우(范祖禹)의 사단(史斷)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심히 절실하다. 내가 저번에 팔자(八字)를 지워버렸는데, 이를 보니 나도 모르게 낯이 붉어온다."
하였다.

 

12월 24일 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성상의 춘추가 마침 공성(孔聖)의 ‘불유구(不踰矩)292)  ’의 해와 부합합니다. 하례(賀禮)를 정지함은 비록 겸양하는 덕에 연유하지만, 국조(國朝)의 전례(典禮)는 폐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호조 판서 심수(沈鏽)가 지금 각 창고(倉庫)의 곡물이 겨우 내년의 몇 달만 지탱할 수 있으므로 기호(畿湖)의 조운(漕運)을 불가불 얼음이 풀리게 되면 신칙하여야 되겠다고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때에 국용(國用)의 핍절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조야(朝野)가 근심하였다.

 

윤면동(尹冕東)을 집의로, 박필순(朴弼淳)을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25일 병인

영의정 홍봉한이 또 진연(診筵)에서 세수(歲首)에 진하(陳賀)할 것을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6일 정묘

세 대신 및 예조 판서 남태제(南泰齊)가 입시(入侍)하여 하례를 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세손이 회복된 경사(慶事)와 하례를 겸하여 행하도록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겸행은 어렵다고 하면서 굳이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경호(李景祜)를 도승지로 삼았다.

 

12월 27일 무진

정언 박필순(朴弼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적을 상고하여 출척(黜陟)함은 법의 뜻이 심히 중한데, 비록 이번의 전최(殿最)로 보더라도, 8도(八道) 중 하고(下考)는 극히 적으니, 이는 수령들이 모두 백성들을 잘 다스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방백(方伯)이 고자(顧藉)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후원(喉院)에서 예(例)를 좇아 청추(請推)하는 것도 떨치며 권면하는 정사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데에는 부족합니다. 신은 생각건대 한 사람도 하고(下考)를 받은 자가 없는 도(道)의 도신(道臣)은 마땅히 견책을 가함이 옳습니다. 또 수령의 잘하고 못하는 것을 안찰(按察)함은 단지 도신(道臣)에게만 한결같이 맡겨서는 안됩니다. 근래에 어사(御史)를 빈번히 보내는 것은 실로 수령이 징계를 두려워하는 방책이 됩니다. 지금 만약 삼사(三司)와 시종(侍從) 가운데 공정(公正)하고 강명(剛明)한 자를 가려 택하여 여러 도(道)에 나누어 보내고 암행(暗行)의 책임을 맡기되, 한 도(道)에 많고 적음을 계교하지 말고, 복명(復命)하는 기한의 늦고 빠름에 구애되지 말며, 오직 밝게 살피는 것으로써 일을 삼으면, 또한 생민을 불쌍히 여기고 오리(汚吏)를 징즙(懲戢)시키는 한 방도가 거의 될 것입니다. 저번에 금성(金城)의 명화적(明火賊)을 본관(本官)이 포청(捕廳)에 논보(論報)한 자는 자그마치 3, 4백 명에 이르는데, 본청(本廳)에서 겨우 5, 6명만을 붙잡아 미처 죄상을 구명하지 못한 채, 두 도적은 지레 장폐(杖斃)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놓아 보냈습니다. 3백이 무리를 이루니 그 수가 적지 않고 화적떼들은 법에서 용서하기 어려운데, 멋대로 석방함은 도적을 다스리는 방도를 전혀 잃어버린 것이니, 해당 포장(捕將)도 또한 무겁게 징계해야 합니다. 이은정(李殷鼎)이 토민(土民)에게 함부로 곤장을 쳐서 물고(物故)가 되었은즉, 마땅히 해당 법률을 적용하여야 함에도 단지 파직의 가벼운 율로써 마감을 하였으니, 장차 어떻게 억울한 백성을 위로하고 탐학한 수령을 면려하겠습니까? 마땅히 먼 곳에 유배시키는 율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단지 도신(道臣)에 대한 문비(問備)만 윤허하고, 나머지는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필순이 새로 명경과에 급제하여 갑자기 대각(臺閣)의 직(職)에 통하였음은 너무 빠른 것인데, 죄를 청한 포장(捕將)은 바야흐로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되었은즉, 반연(攀緣)을 타서 벼슬자리를 만들 뜻이 있으며, 어사(御史) 보내기를 청한 것도 또한 대신(臺臣)이 감히 말할 바가 아니라 하여, 박필순을 삭직(削職)하고, 이어 통청(通淸)한 전당(銓堂)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박필순은 이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의 족속(族屬)이니, 임금의 생각에 박상덕이 사사롭게 하지 않았을까 의심한 것이다.

 

12월 28일 기사

임금이 신년(新年)의 초두에 권농(勸農)의 윤음(綸音)을 써서 8도(八道)와 양도(兩都)에 하유(下諭)하라고 명하였다.

 

정홍순(鄭弘淳)을 이조 판서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헌으로, 김치양(金致讓)을 대사간으로, 임성(任珹)을 집의로, 이연급(李延伋)을 지평으로, 홍용한(洪龍漢)과 박상로(朴相老)를 정언으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 당상이 진하(陳賀)를 겸행(兼行)하는 것이 전례(典禮)에 없는 바라 하여, 인하여 입시(入侍)하여 굳이 청하여 마지않으니, 임금이 탕제(湯劑)를 땅에 엎어버리고 물리쳐 들지 않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황공하여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패초(牌招)를 어긴 대신(臺臣)을 모두 삭직하라 명하고, 세손 좌빈객 정실(鄭實)을 불러 앞에 나아오게 하고 직접 효유하기를,
"경(卿)을 부른 것은 주연(胄筵)을 위한 것이다. 경의 염담(恬淡)함을 취하고 경의 아량(雅亮)함을 아름답게 여기니, 힘써 충자(沖子)를 보필하라."
하였다.

 

12월 29일 경오

임금이 기후(氣候)가 미령(靡寧)하여 태묘(太廟)에 전알하는 기일을 물리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밤 기곡제(祈穀祭)를 이미 몸소 행하지 못하니 마음에 심히 꺼림칙하다. 제사를 행할 때에 또한 금원(禁苑)에서 멀리 바라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승지·사관(史官)과 더불어 함께 이 밤을 새우다가 축시(丑時)를 지나서 비로소 잠자리에 들어야 하겠다."
하고, 주시관(奏時官)에게 시각(時刻)을 들어와 고하도록 명하였다. 인시(寅時) 초(初)를 알린 연후에 임금은 비로소 승지와 사관에게 물러 나가도록 명하고, 입직 도감(入直都監)의 장관(將官) 및 내금위 장(內禁衛將) 등을 합문(閤門) 밖에 불러서 효유하기를,
"신년(新年) 초두에 마땅히 군사들에게 호궤(犒饋)를 행해야 하지만 내가 조용히 조섭(調攝)하기 때문에 하지를 못하겠으니,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여, 나의 뜻을 펴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제조(提調)에게 천안(天顔)을 우러러 보도록 명하니, 모두 말하기를,
"옥색(玉色)이 화창하시어 실로 그전보다 못하시다는 탄식이 없고, 성수(聖壽)를 또 더하셔도 수염과 머리카락이 조금도 쇠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건공(建功)의 효과(效果)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얻은 것은 인삼(人蔘)의 정기(精氣)인데, 1년간 진어(進御)한 것이 몇 근(斤) 정도인가?"
하니, 여러 의원(醫院)들이 말하기를,
"거의 20여 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가령 인삼이 선단(仙丹) 영액(靈液)이라 하더라도 이를 사책(史冊)에 써서 후세의 법으로 삼는다면, 어찌 재물을 다 허비(虛費)하여 민망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 해에 경중(京中) 5부(五部)의 원호(元戶)는 3만 9천 3백 44호이며, 【남자가 9만 1천 4백 23구(口)이고 여자가 10만 3천 2백 11구이다.】  8도(八道)의 원호는 1백 63만 5천 9백 23호이다. 【남자가 3백 34만 4천 8백 33구이고, 여자가 3백 43만 5천 1백 75구이다.】


【태백산사고본】 71책 106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214면
【분류】호구(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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