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신미
농사를 권장하는 전교를 내려서 제도(諸道)와 양도(兩都)에 신칙하였다.
1월 2일 임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간(大司諫) 김치양(金致讓), 집의(執義) 임성(任珹)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단지 조재민(趙載敏)·윤광찬(尹光纘)의 일만 아뢴 대로 하였다.
1월 3일 계유
서명응(徐命膺)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해진(李海鎭)을 장령(掌令)으로, 김이희(金履禧)를 정언(正言)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동돈녕(同敦寧)으로, 정실(鄭實)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삼았다. 종신(宗臣)의 나이가 70세이고, 시종신(侍從臣)과 곤수(閫帥)001) 의 아버지의 나이가 70세인 사람에게는 가자(加資)하기를 명하였다.
1월 4일 갑술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제조(都提調)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지금은 세손(世孫)이 차복(差復)002) 하였으니, 가끔 궁관(宮官)을 불러 보는 것이 무방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비록 누워서 접견할지라도, 만약 세손으로 하여금 누워서 궁관을 접견하게 한다면 아마도 어떨까 싶다."
하였다. 기신(耆臣)003) 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여 지사(知事) 박치화(朴致和),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태화(李泰和)가 앞으로 나오매, 삼경(三經)을 각각 한 대문(大文)씩 외라고 명하였으니, 박치화와 이태화는 모두 명경과(明經科) 출신이었다. 또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에게 입시하기를 명하여 어필(御筆)로 써서 내리기를, ‘갑오년004) 에 등과(登科)하고 옛 해에 사관(史官)에 있었다. 동조(東朝)005) 께서 찬품을 하사한 것이 마치 오늘과 같은데, 아! 한 합(閤)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노쇠하였다. 특명으로 불러 보니 뜻이 어찌 우연하겠는가?’ 하였다.
도하(都下)006) 의 거지[乞丐]에게는 양식을 주고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1월 5일 을해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월 6일 병자
충청 감사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나이가 백 살이나 백 살이 지난 사람에게 음식물과 옷감을 주라고 명하였다.
1월 7일 정축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이철보(李喆輔)에게 입시하라고 명하고 《소학편제(小學篇題)》를 읽기를 명하면서 이르기를,
"예전의 음성(音聲)을 듣고자 한다."
하였다. 두어 줄을 읽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 음성이 아직 그대로 있다."
하였다. 물러나오자,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궁전(宮殿) 계단에 오르내리는 것을 가서 보게 하였다.
1월 8일 무인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담후(痰候)가 있기 때문에 제조(提調) 한 사람을 직숙(直宿)하라고 명하였다.
대사성(大司成)에게 명하여 집강(執綱)과 유생(儒生)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쌀과 고기를 내려 주어 세초(歲初)에 선비에게 줄 수요(需要)를 돕게 하였다.
1월 9일 기묘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제조(都提調) 홍봉한(洪鳳漢)이, 제조(提調)는 도총부(都摠府)에 입직(入直)하고 도승지(都承旨)는 본원(本院)007) 에 입직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권도(權噵)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안표(安杓)를 집의(執義)로, 임희효(任希孝)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관동(關東)의 1백 5세, 1백 1세, 1백 세가 된 3인에게 옷감과 음식물을 주라고 명하였다.
1월 10일 경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제도(諸道)에 명하여 작년에 이미 습조(習操)를 행한 곳은 모두 습조를 정지하라고 하였는데, 대신의 아뢴 바로 인한 것이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역서(曆書) 재자관(齎咨官)이 돌아올 적에 받아 온 것이 일곱 자문인데, 세 도(度)는 청력(淸曆)을 반드시 10월 초1일에 반포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청력을 매양 10월 초3, 4일에 비로소 우리 나라에 반포해 주었는데, 이 뒤로는 반드시 초1일에 일체로 반포해 준다고 합니다. 저들이 이미 ‘우리가 공경하고 삼간다.’고 하여 이렇게 날짜를 앞당겼으니, 사례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방물(方物)이 없이 사표(謝表)하는 뜻으로써 회자(回咨)하여 월식 회자(月食回咨) 편에 부쳐 보내게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대사간(大司諫) 김치양(金致讓)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에게 어제(御製) 《소학지남(小學指南)》을 읽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인하여 여러 신하에게 반사(頒賜)하고 남한 산성(南漢山城)과 북한 산성(北漢山城)에 나누어 보내어 간인(刊印)하라고 명하였다.
1월 12일 임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임준(任㻐)에게 어제 《소학지남》 소지(小識)를 쓰라고 명하였다. 인하여 《훈의소학(訓義小學)》을 가지고 들어오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훈의소학》을 지은 것이 어느 해인가?"
하니, 임준이 말하기를,
"갑자년008) 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쉰 한 살 때이다."
하였다.
1월 14일 갑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김상익(金尙翼), 대사간(大司諫) 김치양(金致讓)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김화(金化)·흡곡(歙谷) 등 20여 호(戶)의 화재를 입은 백성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1월 15일 을유
탐라(耽羅)009) 의 과일을 바친 사람 19명에게 해청(該廳)과 지나가는 각 고을에서 각각 양식을 주고 본주(本州)에 돌아간 뒤에는 본주 목사(牧使)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1월 16일 병술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고 월식하였다.
1월 17일 정해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제조(都提調) 홍봉한(洪鳳漢)의 사면을 허락하고 김상복(金相福)으로 이에 대신하기를 명하였다. 김상복이 입시하니, 하교하기를,
"전번에 어버이의 나이가 70세, 60세가 된 사람은 제조(提調)·부제조를 특별 교시로 바꾸기를 허락하였는데, 하물며 어버이 나이가 80세이겠는가? 좌의정이 비록 감히 청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금의 직숙(直宿)을 어느 날 거두게 될지 알지 못하는데 궁문(宮門) 자물쇠를 한 번 내리면 아들된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좌의정의 내국 도제거(內局都提擧)는 특별히 해임을 허락하고 김치인(金致仁)을 이에 대신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모든 일이 오래되면 해이해진다. 지금 어사(御史)의 장문(狀聞)을 보건대 두류(逗遛)하는 뜻이 없지 아니하다. 아! 종전에 개시(開市)의 폐단은 대국 사람이 트집을 잡은 것이 아니라, 통관(通官)·통사(通事)의 무리가 조종한 것이다. 만약 엄중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이 무리가 잘못을 지음이 반드시 전과 같을 듯하니, 이번에 본부(本府)의 역학(譯學)·통사(通事)의 무리를 어사(御史)로 하여금 중하게 결곤(決棍)하게 하며, 만약 서울에서 내려간 역관(譯官)이 있거든 역시 결곤할 일을 일체로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1월 20일 경인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탕제(湯劑)는 술로 씻고 볶는 재료가 많은데 금령(禁令)에 얽매여서 예주(醴酒)010) 로 볶고 씻으니, 약효가 미치지 못합니다. 청컨대 내국에서 술 두어 되[升]를 빚어서 씻고 볶는 자료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태묘(太廟)에도 〈술을〉 쓰지 아니하는데, 비록 약을 초세(炒洗)하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어찌 쓸 수 있겠는가? 내가 이것에는 굳게 지키겠다."
하고, 사관(史官)에게 이를 쓰라고 명하였다. 부제조(副提調) 이경호(李景祜)에게 춘방(春坊)의 진달한 말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춘방은 누구인가?"
하니, 이경호가 대답하기를,
"송지연(宋志淵)·홍구서(洪九瑞)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지연은 누구인가?"
하니, 이경호가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의 손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린 손자가 병이 나아가니, 글에 힘쓰기를 권하는 것이 바로 이때이다. 이제 춘방(春坊)이 어린 손자에게 써서 들인 것을 보니, 말이 매우 절실(切實)하다. 오늘 입직(入直)한 춘방에게 특별히 활[弦弓]을 내려 주어서 내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1월 22일 임진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우승지 이담(李潭)에게 《수우각기(受佑閣記)》를 쓰라고 명하였다.
1월 23일 계사
양사(兩司)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4일 갑오
정존겸(鄭存謙)을 부제학으로, 박사눌(朴師訥)을 대사간으로, 변득양(邊得讓)을 집의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고(故) 충신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의 친진(親盡)하여 조천(祧遷)을 당하였음으로써 고(故) 상신 이정귀(李廷龜)의 예(例)에 의하여 공신(功臣)으로 대우하고 부조전(不祧典)011) 을 허락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윤동도(尹東度)가, 훈국(訓局)의 수용(需用)이 몹시 곤란함으로써 영남(嶺南)에서 관할하는 남창(南倉)의 무명 1백 동(同)을 한정하여 빌려 주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윤동도는 이때 훈국 도제거(訓局都提擧)를 맡았었다. 집의(執義) 안표(安杓)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월 26일 병신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이 ‘통순산(通順散)은 바로 술과 물을 반(半)씩 쓰는 약제(藥劑)인데 단술로 대용한 까닭으로써 그 효력이 신기하지 못하다.’고 하여,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좌의정 김상복(金相福), 영부사(領府事) 윤동도(尹東度)와 더불어 같은 소리로 술로 조제(調製)할 것을 힘써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인하여 내국(內局)에 명하여 병자년012) 이후 임오년013) 이전의 정한 법에 의하여 거행하되, 청대죽(靑大竹)의 예(例)로써 사서(士庶)를 물론하고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술로써 조제(調製)해 가기를 허락하였다.
1월 28일 무술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강원 감사 민백흥(閔百興)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중군(中軍) 이하 장교(將校)·원역(員役) 등의 요포(料布)를 도내(道內) 각읍(各邑)에 있는 상평청(常平廳)과 진휼청의 환곡(還穀) 가운데 피곡(皮穀) 5천 석을 획급(劃給)하여 보충해 쓰도록 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남태제(南泰齊)가 말하기를,
"이번 정시(庭試)는 별시(別試)에 진시(陳試)014) 한 자와 정시(庭試)에 진시한 자가 부시(赴試)를 원하는데, 일이 과제(科製)에 매었으니,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별시와 정시는 강규(講規)가 같지 아니하기 때문에 진시는 으레 호부(互赴)015) 하지 못하나, 이번 별시에 이르러서는 곧 초시(初試)가 있는 정시(庭試)가 되며, 강(講)도 같은 전경(專經)이니, 통동(通同)하여 합해서 응시하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일체로 부시(赴試)하기를 허락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大司諫) 박사눌(朴師訥)과 장령(掌令) 홍성(洪晟)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지평(持平) 김성행(金省行)에게 당상(堂上) 정3품의 관함(官銜)을 증직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기를 명하였으니, 김성행은 김제겸(金濟謙)의 아들이다.
1월 30일 경자
남유용(南有容)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신상권(申尙權)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정존겸(鄭存謙)을 동의금(同義禁)에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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