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신축
해 위에 관(冠)이 있었다.
왕세손(王世孫)이 진현(進見)하였다. 임금이 내국(內局) 여러 신하에게 상(賞)을 내리고, 고묘(告廟)와 반사(頒赦)는 하교(下敎)를 기다려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예후(睿候)가 비로소 평복(平復)하니, 임금이 몹시 기뻐하여 먼저 상전(賞典)을 내리고 성후(聖候)가 바야흐로 조섭(調攝)하는 중에 있기 때문에 하교를 기다리라는 명령이 있었다.
2월 3일 계묘
약원(藥院)에 명하여 윤직(輪直)하게 하였다.
예비 한림(預備翰林) 강이복(姜彛福)이, 한림(翰林) 안성빈(安聖彬)을 6품에 올린 것으로써 진장(陳章)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청규(廳規)가 아무리 중할지라도 임금의 명령을 어찌 감히 가볍게 여기겠는가?"
하고, 금추(禁推)하기를 명하였다.
정존겸(鄭存謙)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2월 4일 갑진
평안도[關西] 노인을 초계(抄啓)한 3천 2백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90세가 된 자가 없음으로써 만약 빠진 자가 있으면 추후(追後)에 계문(啓聞)할 일을 승정원에서 유시(諭示)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명하여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책봉(冊封)한 때의 세 사신(使臣)을 알아서 들이게 하니, 정사(正使)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 부사(副使) 권업(權𢢜), 서장관(書狀官) 조현명(趙顯命)으로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권도(權噵)도 기묘년016) 책봉 때에 서장관이 되었으니 심히 귀한 일이며, 내가 매양 권업을 생각한다. 내가 두 장자(長者)017) 를 보았는데, 권업과 이정신(李正臣)이다."
하였다.
2월 5일 을사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승지 정존겸(鄭存謙)이 말하기를,
"새로 제수된 승지(承旨) 김종정(金鍾正)은 이미 지신(知申)018) 을 지냈으니, 좌차(座次)에 구애되어 패(牌)를 내지 못합니다."
하니,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비록 당상관이라 하더라도 이미 지신(知申)을 지냈으면 원래 자리를 낮추는 예(例)가 없는데, 김종정이 지신이 되면 지금 도승지는 도로 좌승지(左承旨)가 되니, 피차에 구차(苟且)합니다."
하자, 김종정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2월 6일 병오
조명정(趙明鼎)을 부제학(副提學)으로, 구상(具庠)을 장령(掌令)으로 삼고, 특별히 이해중(李海重)을 대사성(大司成)에 이담(李潭)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제수하였다.
2월 8일 무신
장령(掌令) 이해진(李海鎭)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관(天官)019) 의 좌이(佐貳)020) 가 가장 청선(淸選)이 되는데, 이번 전조(銓曹)의 통망(通望)은 지극히 효잡(淆雜)합니다. 하자(瑕疵)가 있는 유언민(兪彦民)과 지망(地望)이 없는 윤동승(尹東昇)을 구차스럽게 채워서 의주(擬注)하니 물정(物情)에 맞지 아니하여 공의(公議)가 더욱 억울(抑鬱)하게 여깁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유언민과 윤동승을 전조(銓曹) 천망(薦望)에서 삭제해 버리고 해당 전관(銓官)도 견책(譴責)의 율을 베풀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엄한 하교를 내려 벼슬을 갈고 서인(庶人)을 만들어서 대정현(大靜縣)에 방축(放逐)하라고 명하였다가 이어 호적을 상고하라고 명하여 그 아버지의 나이가 망칠(望七)021) 임으로써 대정현에 방축하는 하교는 도로 정지하였다. 이해진(李海鎭)을 통청(通淸)한 전관(銓官)을 알아서 들이라 명하였는데, 판서(判書) 김양택(金陽澤), 참판(參判) 박상덕(朴相德), 참의(參議) 서명응(徐命膺)으로써 아뢰니, 아울러 현임(見任)을 해직(解職)시키라 명하고 승정원으로 하여금 함문(緘問)하여 아뢰게 하였다.
2월 9일 기유
이해진(李海鎭)을 관안(官案)에서 이름을 지워버리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같은 일은 모두 향유(鄕儒)의 공동(恐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경유(京儒) 외에, 과거 시험에 나온 향유는 모두 오늘 안으로 강을 건너 돌려보내라."
하였다.
약원(藥院)의 계사(啓辭)에 대하여 ‘수응(酬應)이 구차하다.’고 비답(批答)하고 직숙(直宿)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개정(開政)을 명하였는데, 이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이 이해진(李海鎭)의 소척(疏斥)으로 인하여 진소(陳疏)하고 패초(牌招)를 어기니, 신칙(申飭)하지 못한 여러 승지(承旨)를 아울러 추고(推考)하라 명하고, ‘이조 판서가 들어온 뒤에 내국(內局)에서 불러 보겠다.’고 하교하였는데, 정홍순이 명령에 응하지 아니함으로써 공주목(公州牧)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과 승정원에서 구대(求對)하지 아니한 것과, 차대(次對)에 와서 기다리는 대신(大臣)과 여러 재상들이 이와 같이 범범(泛泛)함으로써 승지(承旨)를 해임하고 대신과 여러 재상들을 파직하게 하였다.
여러 옥당(玉堂)022) 이 구대(求對)하여 직숙(直宿)을 못하게 한 것과, 시골 유생을 쫓아낸 것과, 대신·여러 재상들을 특별히 파면한 일로써 같은 소리로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도로 거두라고 명하고, 인하여 차대(次對)를 행하였으며 사대문(四大門)에 알려서 한 사람도 듣지 못하여 시골에 내려가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정실(鄭實)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심이지(沈履之)를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제수하였다.
서지수(徐志修)를 이조 판서로, 조영진(趙榮進)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서명선(徐命善)을 사간(司諫)으로, 홍응보(洪應輔)를 장령(掌令)으로, 김노순(金魯淳)을 지평(持平)으로, 이득일(李得一)을 정언(正言)으로, 김귀주(金龜柱)를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2월 10일 경술
사간(司諫) 서명선(徐命善)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차대(次對)의 반열을 일시에 견책(譴責)하여 파면하니 온 조정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시골 유생을 당일 강을 건너가게 하므로 도로(道路)를 가득히 메워서, 경색(景色)이 비참하며, 듣는 자들이 근심하고 탄식합니다. 전하의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신데 이같은 일이 있을 것을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곧 유신(儒臣)의 구대(求對)로 인해 바로 마음을 바꿔 돌리시는 큰 도량(度量)을 보이시어 전후의 사륜(絲綸)을 차례로 도로 정지하셨습니다. 다만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의 한 마디 말씀과 한 가지 행동은 오직 팔방(八方)023) 에서 우러러보는 것뿐이 아니고, 사책(史冊)에 쓴다던가 공정한 법도에 드리우게 되어 장차 백왕(百王)이 법으로 여기고 거울삼는 바가 될 것입니다. 성조(聖朝)로부터 보면 인색하지 아니하신 성덕(盛德)은 비록 이로 말미암아 더욱 빛날 것이나, 거두어 돌이키는 도량(度量)은 보고서 본받기가 어렵고, 이미 내린 명령은 법을 취하기가 쉽습니다. 또 어찌 애초에 이 일이 없이 순선(純善)·순미(純美)한 것과 같겠습니까? 또 전하의 어저께 하교는 칙려(飭勵)하는 뜻으로서 약간의 징계를 보이는 데 불과할 뿐이니, 유사(有司)가 받들어 행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급하고 빠르게 하지 않고, 자세하고 곡진하게 두루 살펴서 혹은 대하여 아뢰고 혹은 상소하여 반한(反汗)024) 하기를 바라는 것이 진실로 집예(執藝)025) 의 책임이 되는 것인데, 조금도 때를 머물지 아니하면서 오히려 뒤질 것을 두려워하여 홍문관 하례(下隷)가 반촌(泮村)026) 을 수색(搜索)하고 감결(甘結)027) 을 오부(五部)에 두루 행하여 재촉해 보내기를 구박(驅迫)함과 다름이 없어서, 몇 천 명 많은 선비가 물결처럼 달리며 창황하여 숨을 헐떡이면서 의탁할 바가 없게 하였으니, 사유(師儒)028) 를 맡은 자에게 어찌 경고함이 없어서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은 대사성 권도(權噵)에게 빨리 견책하여 파면하는 법을 시행하여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엄지(嚴旨)를 내려 먼저 그 벼슬을 체차하고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지워 향리(鄕里)로 방축(放逐)하게 하였다가 뒤에 다시 대정현(大靜縣)에 귀양보내어 그날 밤에 한강을 건너라고 명하였다. 또 서명응(徐命膺)을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지워버리라고 명하였으니, 서명응은 서명선(徐命善)의 형이었다.
유학(幼學) 정인환(鄭麟煥)의 아들 정재화(鄭在和)가 청선 군주(淸璿郡主)에게 장가듦으로써 흥은(興恩)라는 칭호를 내렸다.
2월 11일 신해
이응협(李應協)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진형(李鎭衡)을 정언(正言)으로, 민홍렬(閔弘烈)을 교리(校理)로, 이진규(李晉圭)를 부수찬(副修撰)으로, 김상익(金尙翼)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제도(諸道)에 분부하여 은결(隱結)을 엄히 조사하도록 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대사헌 조영진(趙榮進)을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리라고 명하였으니, 말하지 아니한 때문이었다.
2월 12일 임자
헌부 【장령(掌令) 조태명(趙台命)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해진(李海鎭)이 사사로운 뜻을 끼고서 고요히 조섭(調攝)하심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청컨대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계달(啓達)을 빠뜨림으로써 정언(正言) 정창순(鄭昌順)·이명훈(李命勳)을 아울러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긴급(緊急)하지 아니한 공사(公事)는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라고 명하였다.
동돈녕(同敦寧) 김종정(金鍾正)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재작년에 받은 은자(恩資)029) 는 황송하고 부끄럽습니다. 아! 예사 친구의 사이라도 오히려 저편의 죄를 인하여 자기의 영달을 도모할 수 없는데, 신은 구생(舅甥)030) 사이에 그 견책을 입은 날을 당하여 도리어 승급(陞級)의 은혜를 입었으니 신의 마음에 부끄러워서 스스로 해명할 수 없습니다. 중간에 변방 고을에 제수(除授)되었을 때는 가서 역사(役事)하는 것과 의리가 같아서였고, 일전에 명령에 응하였음은 또한 문안(問安)을 드렸던 것이지 감히 관직에 있으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혹시 굽어 내리시는 어여삐 보살피심을 입어서 전의 명령을 빨리 거두신다면, 신의 몸에 다행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만물을 성취하는 성덕(聖德)에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엄지(嚴旨)를 내려 ‘일찍이 이미 공무를 행하였다가 이제 갑자기 이와 같이함이니 처의(處義)에 있어 곧 당연한 짓인가’하여 홍원현(洪原縣)에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으며, 전례(前例)에 따라 상소를 받아들인 까닭으로써 승정원에 있는 승지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김종정은 신경(申暻)의 사위이다.
2월 16일 병진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강계부(江界府) 노동(蘆洞)의 전민(田民)을 아울러 위원군(渭原郡)에 붙이고 오로량(吾老梁)의 원전(元田)과 가경전(加耕田)을 강계부에 현탈(懸頉)031) 하여 위원군에 이록(移錄)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오로량(吾老梁)은 어느 때에 만호(萬戶)로 올렸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 김석주(金錫胄)가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연중(筵中)에서 아뢰어 정탈(定奪)하였습니다."
하였다.
2월 18일 무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온성부(穩城府)에서 차사원(差使員)에게 지공(支供)할 때에 포진(鋪陳)과 부정(釜鼎)은 차수고(差需庫)에서 준비(準備)하고 훼손됨에 따라 보충해 쓰는데, 차사원이 경유(經由)하는 다른 고을도 일체로 거행하게 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대사헌 이응협(李膺協)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2월 20일 경신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전 이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에게 내린 처분(處分)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2월 22일 임술
이천 부사(伊川府使) 조돈(趙暾)을 내직(內職)에 의망(擬望)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옛 해에 경과 정시(慶科庭試)를 그해 가을에 행하라고 명하였는데, 그때의 하교를 내가 이미 외어서 전하였으니, 이는 어버이를 받드는 자가 어버이를 위하는 거룩한 뜻을 위한 것이며 지금 내가 반드시 금년 봄에 시행하게 하는 것도 또한 어버이를 받드는 자의 뜻을 위한 것이다. 허다한 먼 지방의 이미 모인 유생(儒生)을 어찌 명지(名紙)032) 를 가지고 왔다가 명지를 가지고 가게 할 수 있겠는가? 전번의 거조(擧措)는 비록 세도(世道)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뉘우치는데, 하물며 두 번이겠는가? 마땅히 행할 정시(庭試)를 나의 까닭으로써 이와같이 지연시킨다면, 어찌 권우(眷遇)에 보답하는 뜻이겠는가? 아! 내 뜻이 만약 정성스러우면 어찌 감응(感應)하는 이치가 없겠는가? 허다한 경외(京外) 유생으로 하여금 비록 이때에라도 청금(靑衿)033) 을 항상 생각하며 잊지 않고 있는 뜻을 모두 알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4일 갑자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새로 정한 과거 규정을 읽으라 명하고, 교서관(校書館)으로 하여금 세초(洗草)034) 하고 일체 임진년035) 이전의 구례(舊例)에 따라 거행하게 하였으니, 새로 정한 과거 규정이 너무 간략한 때문이었다.
2월 25일 을축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박사눌(朴師訥)과 집의(執義) 변득양(邊得讓)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정신이 혼모하다는 하교가 있었으며, 약방 세 제조(提調)에게 다시 직숙(直宿)하라고 명하였다.
2월 26일 병인
약원(藥院)에 명하여 주원(廚院)036) 에 직숙(直宿)을 옮겨서 국구(國舅)·도위(都尉)를 일체로 직숙하게 하였다.
2월 29일 기사
중시(重試) 대거(對擧)의 정시(庭試)를 설행하여 이한경(李漢慶) 등 세 사람을 뽑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107권, 영조 42년 1766년 4월 (0) | 2025.10.11 |
|---|---|
| 영조실록107권, 영조 42년 1766년 3월 (0) | 2025.10.11 |
| 영조실록107권, 영조 42년 1766년 1월 (1) | 2025.10.11 |
| 영조실록106권, 영조 41년 1765년 12월 (1) | 2025.10.10 |
| 영조실록106권, 영조 41년 1765년 11월 (1) | 2025.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