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계유
중시(重試)를 설행하여 이성원(李性源) 등 여덟 사람을 뽑았다. 이때 일곱 사람은 자궁(資窮)037) 으로서 가자(加資)하였으니, 전에 없던 바이다. 과차(科次)한 자를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일전에 《맹자(孟子)》 대문(大文)을 친히 외우시는 것을 삼가 들은즉, 옥음(玉音)이 유창하셨으니, 성후(聖候)가 날마다 좋아지심을 족히 알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世孫)이 나왔는데, 내가 마땅히 《맹자》를 다시 외우고 또한 세손으로 하여금 외우게 할 것이니 경 등은 시험하여 들으라."
하였다. 임금이 《맹자》 홍안장(鴻雁章)을 친히 외고, 왕세손도 홍안장을 외었다.
3월 6일 을해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누런 머리에 아이의 이빨[黃髮兒齒]’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검은 머리가 다시 나서 이제 두어 치[寸] 가량이 되었다."
하니,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외간(外間)의 독로인(篤老人)이 간혹 머리털이 나는 자가 있는데, 모발이 부드럽고 짧아서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3월 10일 기묘
달이 목성(木星)을 범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문과(文科)·무과(武科)의 방목(榜目)을 발표하였다.
3월 11일 경진
홍낙성(洪樂性)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미(李瀰)를 대사성(大司成)으로, 강윤(姜潤)을 사간(司諫)으로, 임일원(任一源)을 장령(掌令)으로, 유항주(兪恒柱)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3월 13일 임오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저번에 이미 약간의 뜻을 보였는데 아! 많은 선비를 어찌 돌아보지 않을까마는, 나의 기운으로는 어느 날 평상을 회복할지를 알지 못하겠다. 아! 전번의 나라의 경사를 어찌 석 달을 넘길 수 있겠는가? 허다한 무사(武士)도 어찌 오래 엄체(淹滯)할 수 있겠는가? 지금 팔도(八道)의 유생과 무사가 모두 모인 지 여러 달이 되었으니, 경과(慶科) 정시(庭試)를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신 등의 뜻은 주원(廚院)의 직숙(直宿)을 걷은 뒤에 경사를 합하여 설행하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합하여 설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먼저 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왕세손의 환후(患候)가 평복한 뒤에 경사를 치루어 과거를 설행하는 것이 마땅하나 상후(上候)가 연달아 정섭(靜攝)하는 중에 있기 때문에 즉시 거행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15일에 진하(陳賀)하고 28일에 정시(庭試)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에게 《경세문답(警世問答)》을 가지고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3월 14일 계미
이성원(李性源)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3월 15일 갑신
승지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이 칭경(稱慶)이 내 뜻은 유생(儒生)을 위한 것인데,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평복(平復)되기를 조금 더 기다리자고 청하지 않으니, 참으로 개연(慨然)하다. 내가 아까 동궁(東宮)에게 묻기를, ‘먼저 칭경을 행하는 것이 네 뜻에 어떠하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마음에 불안합니다. 청컨대 평복되시기를 조금 더 기다리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참으로 내 손자이다.’라고 하였는데, 애석하다! 여러 신하들이여."
하였다. 인하여 반사(頒赦)를 그만두라고 명하고 단지 진하 반교(陳賀頒敎)만 하도록 하였다. 또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는데, 앞에 나아가 부복(俯伏)을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명의(名義)를 바로잡아야 하겠다. 하교한 뒤에 대관(大官)이 된 자가 어찌 감히 전례에 따라 입시하겠는가? 비록 고요히 조섭(調攝)하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신하의 본분을 스스로 보존해야 함을 타이르지 아니할 수 없다."
하매, 이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좌의정 김상복(金相福), 우의정 김치인(金致仁), 영부사(領府事) 윤동도(尹東度)가 물러가서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명(待命)하니,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하였다. 그 반교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동궁(東宮)이 깊은 병에 걸리자 뜻밖이라서 근심이 바야흐로 간절하였는데, 하늘이 보살펴서 나을 것이라고 기쁨이 먼저 점쳤었다. 이에 과궁(寡躬)이 조섭(調攝)하는 때를 당하여, 먼저 여러 지방에 널리 고하는 법을 거행한다. 생각하건대 내가 흰 머리 늙은 나이에 오직 작고 어린 세손(世孫)만 의지하였다. 지난 가을에 선릉(先陵)에 수행하여 참배하였으니 선왕(先王)의 영혼(靈魂)이 기뻐하실 것이라 우러러 생각하였고, 전일에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기를 간청하였으니 효성이 순수하고 깊음을 볼 수 있다. 영특하고 슬기로운 자질(姿質)이 숙성(夙成)하여 다행히 나라를 부탁할 바가 있고, 돌보아서 사랑하는 마음이 항상 간절하여 오직 병이 있을 것을 근심하였었는데, 뜻밖에 동궁[甲觀]이 편치 못하여 내 잠자리에 근심을 끼쳤었다. 처음에는 한때의 예사로운 감기와 같았으니 조리[節宣]를 잘못한 데에 말미암았다. 그대로 여러 달을 병이 낫지 않고 오랫동안 약효(藥效)가 지체되었었다. 문안(問安)하는 예(禮)를 오래 폐했으니, 신음(呻吟)하는 고통을 어찌 견디겠는가? 사랑하는 정(情)이 더욱 깊어서 자나 깨나 잊기 어렵다. 다행히 열조(列祖)의 묵묵히 도움을 힘입어, 동궁의 건강이 회복됨을 얻었다. 신기(神氣)가 바야흐로 되살아나서 천화(天和)038) 가 몇 달 동안 약을 쓰는 즈음에 돌아왔고, 영위(榮衛)가 이미 건강하니 내 마음을 여러 날 병상 사이에 위로하였다. 매양 아침저녁으로 곁에 모심을 보니, 갑자기 병이 몸에 있음을 잊겠다. 후반(候班)039) 을 아직 궁중에서 걷지 아니하여, 비록 섭양(攝養)하는 때를 당하였을지라도, 이미 동궁이 상선(常膳)040) 을 회복하였으니, 어찌 기쁨을 꾸미는 도리를 늦추겠는가? 기쁜 마음이 바야흐로 간절하니 깊은 병이 일시에 없어지는 것 같았고, 경하(慶賀)하는 예(禮)를 먼저함은 떳떳한 법을 늦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돌아보건대 성대한 행사는 스스로 차례가 있으니, 오직 이 일만 또한 과장(夸張)함이 아니다. 보위(寶位)에 임한 지 42년이니 드물게 있는 경사를 얻어 보았고, 만백성의 천만세(千萬歲)를 축수함이 드높았으니 누가 기뻐하는 정성이 없겠는가? 구갑(舊甲)이 술잔을 올리는 날에 거듭 돌아오니 옛일을 읊어 감회가 일어났고, 어린 나이는 바로 15세[志學]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때에 미쳐서 공부에 착념(着念)할 것이다. 이미 종묘(宗廟)에 삼가 고유하고, 이어서 온 나라에 널리 유시(諭示)한다. 아! 착한 단서는 반드시 병이 나은 뒤에 싹트니 마땅히 확충(擴充)하는 방법을 힘쓸 것이며, 혜택을 성(城) 안에 고르게 입혔으니 다시 광탕(曠蕩)의 은전(恩典)을 베푼다.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예문 제학(藝文提學) 정실(鄭實)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72책 10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217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038] 천화(天和) : 사람의 원기(元氣).[註 039] 후반(候班) : 조현(朝見)할 때의 반열.[註 040] 상선(常膳) : 평상시 음식.
3월 16일 을유
상후(上候)가 곽란[癨氣]때문에 편찮았으므로,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고 연달아 정기산(正氣散)·소합원(蘇合元)·반총산(蟠蔥散)을 올렸다. 이날부터 조정 문안을 연달아 설행하였다.
3월 18일 정해
김노진(金魯鎭)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9일 무자
이만회(李萬恢)를 승지로 삼았다.
3월 23일 임진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늙은 백성의 무리가 대궐 밖에 모여 초조하여 황급해 한다고 한다."
하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는 떳떳한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은 말하기를,
"어제부터는 여대 하천(輿儓下賤)들이 모두 기뻐서 날뛴다고 하니, 민정(民情)을 대략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부덕(否德)으로 인하여 며칠 동안 도성 백성의 마음을 수고롭게 하였으니, 비록 하루라도 마음에는 백일과 같다. 어찌 공시인(貢市人)의 창의궁(彰義宮) 일과 다르겠는가? 그 가운데 고휼(顧恤)할 만한 자는, 해조(該曹)041) 와 해청(該廳)042) 으로 하여금 비국(備局)에 물어서 내일 안으로 단자(單子)를 써서 들이게 하며, 내일부터 현방(懸房)043) 의 속전(贖錢)을 10일 동안 특별히 면제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4일 계사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상후(上候)가 평복(平復)하셨으니, 고묘(告廟)는 오는 달 삭제(朔祭)에 겸하여 행하고 같은 날 오시(午時)에 경외(京外)에 반사(頒赦)하며, 진전(進箋)·진하(陳賀)를 하되, 중궁전(中宮殿)과 세손궁(世孫宮)에도 일체 진하(陳賀)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뜻은 비록 우러러 본받은 것이라고 하겠으나, 이를 어찌 즐겨서 하겠는가? 한 달에 두 번 진하(陳賀)하는 것도 역시 이상한 일이다. 특별히 공인(貢人)의 예전 남아 있는 쌀 2천 석의 포흠을 탕감(蕩減)하라."
하였다.
3월 27일 병신
정시(庭試)를 설행하여 조재준(趙載俊) 등 여섯 사람을 뽑았다.
3월 30일 기해
내일부터 본원(本院)044) 에서 윤직(輪直)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두 도제조(都提調)에게는 각각 안장 갖춘 말 1 필을 면급(面給)하고, 우의정의 아들·사위·동생·조카 가운데에서 〈1인에 한하여〉 벼슬을 제수하며, 제조(提調) 남태제(南泰齊)·한광회(韓光會)에게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하고, 제조·부제조가 〈직숙이〉 10일을 지난 자에게는 숙마(熟馬)045) 1필을, 10일이 차지 아니한 자에게는 아마(兒馬) 1필을 주며, 기사관(記事官) 두 사람과 주서(注書) 이진복(李鎭復)·홍구서(洪九瑞)는 모두 6품에 올리고, 의관(醫官)과 내관(內官)에게는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라."
하였다.
남현로(南玄老)를 헌납(獻納)으로, 박상로(朴相老)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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