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경자
왕세손(王世孫)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였다. 그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여러 달 몸이 불편하여 바야흐로 무망(无妄)046) 의 근심이 간절하더니, 다행히 하늘에서 은총(恩寵)을 내려서 몸이 곧 회복되는 경사를 맞이하였다. 이에 큰 이름[號]을 드날려서, 여러 지방에 널리 고한다.
생각하건대 내가 40년을 왕위에 임하여, 3백 년 종통(宗統)을 이었다. 한마음을 이미 나라에 바쳤으니 매양 근심하고 부지런하는 방법을 생각하였고, 높은 나이가 비록 〈80세를 바라보는〉 이기(頤期)에 올랐으나 섭양(攝養)하는 방법에 겨를하지 못하였다.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의탁하는 바인데, 어찌 몸을 가볍게 가지려 하겠는가? 밤낮으로 근심하여 금의(錦衣)·옥식(玉食)도 편안하지 아니하니, 감히 태만할 수 없다. 이제 만기(萬機)로 수고로운 즈음에 세손(世孫)의 신병(身病)으로 근심이 겹쳤으니, 초조한 생각에 애타는 마음은 자신의 괴로움에 비할 뿐만이 아니다. 기거(起居)에 피곤함을 보였으니 점점 영위(榮衛)가 순조롭지 못하여 행보하는 데 어려움이 많음을 깨닫겠다. 대개 담후(痰候)의 막힘을 인연하여, 왕래하는 기운이 병이 되었으니, 정력(精力)이 스스로 피로함을 몇 번이나 탄식하였다. 드디어 내의원(內醫院)의 직숙(直宿)을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 다시 정후(庭候)를 연달아 설행하였다. 나이가 칠십이 넘어서 병이 머문 지 이미 오래니 누가 근심하지 아니하겠으며, 석달이 차도록 건강을 회복함이 아직 더디니 나도 스스로 괴로워하였다. 바야흐로 많은 약제(藥劑)를 여러 번 시험하여, 신령한 탕액(湯液)의 공효(功效)를 기대하였는데, 전날 밤에 병이 더함에 이르자 뭇사람의 심려가 더욱 간절하였다. 그나마 다행히 선왕(先王)의 영(靈)이 묵묵히 도우사, 앓던 증세가 쾌히 나음을 얻었다. 신기(神氣)가 완전히 소생하였으니 통리(通利)한 데에서 기이한 효력을 얻었고, 원기(元氣)가 점차 왕성하였으니 강녕(康寧)한 데에서 새로운 복을 맞이하였다. 전번에 세손(世孫)의 근심이 다행히 없어졌으니 늘그막에 사랑하는 마음을 이미 위로하였는데, 이제 나의 병이 곧 나았으니 또한 어린 세손이 약을 맛보는 정성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는 진실로 종사(宗社)의 무강(無彊)한 복이며, 모든 신민(臣民)이 경사로움을 같이하는 기쁨이 간절하다. 한번 병이 들었다가 달이 지나서 쾌히 회복하였으니, 어찌 인력(人力)으로 이를 이루었겠는가?
두 번 하례(賀禮)를 열흘을 격하여 거듭 행하였으니, 진실로 역사에 드물게 있는 일이다. 바야흐로 백관은 기뻐하여 서로 고하나, 나 한 사람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생각함이 있다. 백성의 일을 병중에도 잊지 못하니 선조(先朝)의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신 뜻을 체득하였고, 화창한 봄 볕이 이미 역내(域內)에 비추었으니 오늘날에 긍휼(矜恤)할 방도를 생각하였다. 자리가 겨우 편안하나 가난한 띳집의 고생을 어찌 잊을 것인가? 수라를 이미 회복하였으니 모름지기 백성을 구호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종묘(宗廟)에 나아가서 삼가 고유하고, 너희 무리를 오게 하여 유시(諭示)를 선포한다. 허물을 씻고 죄를 용서함은 옛 떳떳한 법이 있으니, 덕을 펴고 인(仁)을 행하여 더불어 고쳐서 새롭게 한다. 아! 병은 항상 조금 나은 데에 경계할 것이니 정신을 화평하게 하고 성품을 기르는 법에 소홀하지 말 것이며, 정치는 반드시 널리 베푸는 것이 귀하니 마땅히 은혜를 베풀고 민중을 보호하는 계책을 강구할 것이다. 짐짓 이에 교시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지어다."
하였다. 【예문 제학(藝文提學) 정실(鄭實)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72책 107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218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046] 무망(无妄) : 뜻밖의 재앙.
임금이 먼저 왕세손에게 명하여 춘방관(春坊官)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왕세손이 몸소 하례하는 글을 지어서 올렸으니, 이르기를,
"성후(聖候)가 건강을 회복하시니, 경사로움이 지난 역사에 드뭅니다. 소신(小臣)이 기뻐서 뛰니, 작은 정성이 더욱 간절합니다. 대궐 뜰에서 하례를 올리니 첫 여름 첫 길일(吉日)이요, 온 나라의 백성들이 춤추며 기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답사(答詞)를 친히 지어서 세손으로 하여금 쓰게 하여 주었는데 이르기를,
"작년 겨울에 몇 달 동안 마음을 태웠는데, 네 병이 쾌히 나았으니, 내가 어찌 잠잠(涔涔)047) 하겠는가? 만약 옥성(玉成)048) 함이 아니면 어찌 이에 이르겠는가? 오늘날 이 예식은 내 마음이 갑절 더하다. 더욱 나라 일에 힘쓸 것을 이로써 경계한다."
하고, 사첩(史牒)에 부치라고 명하였다.
윤승렬(尹承烈)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이명훈(李命勳)·정창순(鄭昌順)의 죄를 용서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월 2일 신축
서명선(徐命善)을 석방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법으로 정한 도(徒) 3년은 모두 스스로 거행할 수 있는데, 아! 이 사전(赦典)은 어찌 나의 헤아린 바이겠는가? 의금부와 형조로 하여금 서울에서 도류안(徒流案)을 가져다 상고하여 당일 안으로 분부하도록 하라. 봄 경작이 바야흐로 바쁜데, 농사를 권장하는 정사가 과연 착실한가 아니한가? 제도(諸道)로 하여금 각별 신칙(申飭)을 가하게 하라."
하였다.
내국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호서(湖西)의 군작미(軍作米)로서 창고에 유치된 것 가운데 3분의 1과 군향미(軍餉米) 4분의 1을 가분(加分)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4월 3일 임인
김종정(金鍾正)을 석방하였다.
4월 5일 갑진
이시건(李蓍建)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4월 6일 을사
이날부터 내국에서 날마다 두 번 진찰하였다.
4월 7일 병오
초파일에는 전례(前例)에 의하여 관등(觀燈)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원직(院直)049) 을 폐하지 않아 등(燈)을 달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우리 백성이 몇 달 동안 마음을 써서 이제 이미 병이 나아가니, 등석(燈夕)050) 의 관등(觀燈)은 전례에 따라 거행하라."
하고, 각사(各司)에 명하여 전례에 의하여 개좌(開坐)하게 하였다.
윤득양(尹得養)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4월 11일 경술
정시(庭試)를 설행하여 홍찬해(洪纘海) 등 10인을 뽑았다.
4월 12일 신해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수어청 군향미(軍餉米) 3천 석을 가분(加分)하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4월 13일 임자
약방(藥房)에서 문후(問候)하니, 답하기를,
"지금은 전에 비하여 약간 나아서 거의 평일과 같다고 이를 만하기 때문에 요즘 이로써 비답(批答)하였다. 아! 종국(宗國)을 위하여 바로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발을 만지는 뜻051) [捫足之意]’이다. 밤낮으로 자리에 몸을 붙이고 있으니, 마음은 고민스럽다. 어젯밤에는 스스로 슬퍼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아! 한구석 청구(靑丘)에 옛 해의 혈맥(血脈)은 단지 내 조손(祖孫)뿐이다. 일찍이 이미 하교에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의지한다.’고 하였다. 아! 슬프다. 해동(海東)에 73세의 그 할아버지가 있고 15세의 그 손자가 있으니, 지금의 나라 형편이 무엇으로써 이에 견주겠는가? 늠연(凛然)하다고 이를 만하다. 하물며 다섯 달 동안에 경상(景像)이 어떠하였는가? 슬프다! 석 달을 종국(宗國)에 마음을 태웠으니, 비록 강철 같은 간장(肝膓)이라도 마음에 어찌 견디겠는가? 아! 작년 겨울 이후로 나의 생각에 그 애타는 마음으로써 이제까지 지탱하였으니, 그것이 또한 이상한 일이라고 하겠다. 선왕(先王)의 영(靈)이 묵묵히 도우시고 우리 세손이 덕이 있어서 처음에는 어느날에 일어날지 알지 못하였는데, 내가 누워 있은 지 며칠 후에 그가 능히 와서 보게 되었다. 아! 이는 누가 주신 것이며 이는 누가 주신 은혜인가? 특히 작년에 징계(懲戒)한 것만이 아니라, 이 같은 음권(陰眷)을 만약 보답하지 아니하면 이것도 불효(不孝)이므로, 요즘 〈세손이〉 와서 보게 된 것이다. 푸른 하늘이 밝게 임하니, 내 마음이 꿈과 같구나. 아! 이즈음에 그 할아버지는 조섭(調攝)하느라 석 달 동안 기동을 하지 못하고 자리에 붙이고 있으니, 지나간 역사에 찾아도 어찌 이런 일이 있었던가? 이런 때문에 만기(萬機)가 날로 잗달아지고 인사(人事)가 더욱 타락하였으니, 사람들은 비록 말하지 아니하더라도 나는 마음속에 스스로 부끄러웠다. 이는 세손을 특히 애호(愛護)해서 그러한 것만이 아니라, 진실로 종국(宗國)을 위하는 고심(苦心)이다. 아! 만약 작년 겨울 일을 물어본다면 어찌 오늘날이 있을 것을 알았겠는가? 매양 세손을 보면 스스로 이르기를, ‘80을 바라보는 늙은 할아버지가 어찌하여 이를 이루었는가?’ 한다. 비록 그러하나 이 까닭으로 인하여 능히 세손에게 권하지 못하고 또한 예(禮)를 펴지 못한 채 봄이 이미 지나고 여름이 장차 반(半)이 되어 인도(人道)가 모두 다하였으니, 유유(悠悠)한 푸른 하늘이 이 마음을 거의 알아줄 것이다. 옛 해에 성상(聖上)052) 의 마음이 약원(藥院)의 직숙(直宿)을 이미 아시면서 7년을 거두지 아니하였는데, 나는 세대(世代)가 예전과 달라서 나로 인하여 수고를 돌아보지 아니하려고 하지 않는다. 조금 나았는데도 다 나았다고 하고 〈직숙을〉 거두기 어려운데 거두기를 명하였으니 이로써 경선(徑先)053) 함을 스스로 깨달음이 많았다. 아! 외면은 이처럼 쾌히 나은 듯하나 만약 이면(裏面)을 말한다면 바로 한걸음도 기동(起動)하지 못하고 숟가락도 남의 손을 빌려서 먹으니, 어찌 고민스럽지 아니하겠는가? 아! 이런 때문에 백성의 일이 이와 같이 되었다. 내 마음이 이와 같으니, ‘일각(一刻)이 삼추(三秋) 같고 하루가 1년을 지내는 것과 같다.’는 것이 바로 오늘을 이르는 것이다. 이와 같으면서 보이기를 위하여 답(答)을 내리는 것은 이것도 또한 문구(文具)054) 이다. 오늘부터 일체 구례(舊例)에 따라서 비답(批答)할 것이니, 약원은 자세히 알지어다."
하였다.
이성억(李聖檍)을 사간(司諫)으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掌令)으로, 홍구서(洪九瑞)를 정언(正言)으로, 한광회(韓光會)를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창수(李昌壽)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4월 14일 계축
승지가 입시(入侍)하였다. 사신의 서계(書啓)를 읽으라 명하고, ‘건륭 황제(乾隆皇帝)가 황후(皇后)를 유수(幽囚)055) 하니, 형부 시랑(刑部侍郞) 아영아(阿永阿)가 지극히 간하였다.’는 데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그 황후를 유수한 것을 듣고는, ‘조정 신하가 만약 간하는 자가 없으면 건륭이 반드시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과연 간하는 신하가 있었다. 대저 건륭의 정령(政令)은 말할 만한 것이 없는데, 그러나 신하가 있다. 이도 또한 강희(康熙)의 배양(培養)한 남은 교화이다."
하였다.
4월 15일 갑인
교리(校理) 정이환(鄭履煥)을 대정현(大靜縣)에 귀양보내어 영구히 서인(庶人)을 만들고 승지(承旨) 이상지(李商芝)를 해남현(海南縣)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송명흠(宋明欽)·홍계능(洪啓能)·김양행(金亮行) 등이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인데 사면(赦免)을 지나도 용서를 입지 못하고, 황최언(黃最彦)은 귀양간 지 이미 기년(期年)이 되므로, 정이환이 상소하여 용서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간 지 10일에 중관(中官)이 감히 아뢰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옥당(玉堂)의 궐직(闕直)으로 인하여 임금이 비로소 알고는 그 글을 불태우라 명하고, 드디어 이 명령이 있었으니, 이상지(李商芝)는 상소를 받아들인 승지이다. 또 의금부[金吾]에서 즉시 거행하지 아니한 까닭으로써 판의금(判義禁)은 이창수(李昌壽)를 파직하였다.
좌의정 김상복(金相福), 우의정 김치인(金致仁), 영중추부사 윤동도(尹東度)를 파직하라고 명하였으니, 정시(庭試) 때에 김상복 등이 모두 패초(牌招)의 명령에 나아가지 않은 때문이었다. 임금이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에게 유시하기를,
"두 차례 경과(慶科)에 대신(大臣)이 모두 나오지 아니하니 이는 무슨 사체(事體)인가? 진실로 개연(慨然)하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정시(庭試)에 패초(牌招)를 어긴 것이 공(公)인가 사(私)인가? 이미 영의정에게 유시한 뒤에 생각하기를, 반드시 크게는 서명(胥命)056) 을 하든지, 작게는 진차(陳箚)를 하든지 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여러 날 귀를 기울여 보아도 거짓 듣지 못한 것처럼 하였으니,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한심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번 명관(命官)057) 에 패초(牌招)를 어긴 대신(大臣)을 모두 파직하여 군신의 분의를 엄하게 하라."
하였다.
4월 16일 을묘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이환(鄭履煥)에게 천극(栫棘)058)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아침 진찰 때에 홍봉한이 도제조(都提調)로서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이 이 일을 알았으면 어찌하여 나에게 일찍 알게 하지 아니하였는가?"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오래 상소를 올리지 못한 것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니지만, 이미 이해진(李海鎭)의 일을 겪었기 때문에 신 등이 또한 성후(聖候)의 손상을 더하실 것을 염려하고 단지 초민(焦悶)하고 박절함이 간절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탕제(湯劑)를 올리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이를 물리치며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대관(大官) 이하가 어찌하여 그렇게 답답한가? 국법이 어찌 홀로 대정(大靜)에만 천극(栫棘)의 법이 없는가? 백관이 합사(合辭)하기 전에는 내가 어찌 탕제(湯劑)를 들겠는가?"
하자, 이에 홍봉한이 물러가서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정이환(鄭履煥)의 범한 바는 어찌 만 번 통분하지 아니하며, 어찌 만 번 해괴(駭怪)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연전(年前)의 처분이 지극히 엄중하여 뜰에 가득한 여러 신하가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하였는데 정이환은 직명(職名)이 있음을 이르면서 망령되게 스스로 논열(論列)하였으며, 패택(霈澤)059) 을 만났다고 이르면서 감히 소석(疏釋)을 청하였으니, 그 꺼리는 바가 없음이 지극하며, 그 스스로 두려워하지 아니함이 심합니다. 이같은 무엄(無嚴)한 무리는 진실로 깊이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함이 마땅한데, 하물며 지금 옥후(玉候)가 아직 고요히 조섭(調攝)하시는 중에 계시니, 성상의 마음이 만약 한번 번뇌(煩惱)하시면 뭇 신하가 문득 만분 초박(焦迫)함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감히 앞장서 이를 말하여 심지어 신 등으로 하여금 허둥지둥 애를 태우며 몸둘 바가 없게 하였으니, 진실로 그 죄를 생각하면 더욱 지극히 절통(絶痛)합니다. 해도(海島)에 서민(庶民)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징계하기에 부족하니, 청컨대 빨리 천극(栫棘)을 가하여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하는 의리를 엄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전후에 당(黨)의 소인(小人)을 어찌 한정하겠는가마는 어찌 정이환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하나는 막중한 아뢴 바를 예사로 보면서 임금을 등지고 당(黨)에 사사로이 하는 것에 만족히 함이요, 하나는 80세를 바라보는 그 임금이 능히 기동(起動)하지 못하여 밤낮으로 저문 구름만 바라보고 있는 때에 이와 같이 기탄이 없는 것이며, 하나는 요즈음 조금 차도(差度)가 없지 않으니 만약 떳떳한 양심이 있는 자이면 어찌 이로 인하여 완쾌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런데 이를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앞서지도 않고 뒤서지도 아니하여 이 망측하고 근거가 없는 일을 저질렀으니, 이제부터 해동(海東)은 장차 임금이 없는 지역이 될 것이다. 이같이 윤리(倫理)가 없고 망측(罔測)한 소장(疏章)을 정원(政院)에 둔 것이 몇 날인데 이제야 이 거조가 있기를 권하는가? 이와 같으면서 무슨 얼굴로 선왕(先王)의 영(靈)을 배알하겠는가? 나는 한구석 청구(靑丘)에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이로부터 없어질 것이라고 여긴다. 청한 바는 비록 늦었을지라도 아뢴 바에 의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사례하겠다."
하였다.
전 이조 참의 심이지(沈履之)를 고성군(高城郡)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으니, 정이환(鄭履煥)을 의망(擬望)한 전관(銓官)인 때문이다.
정존겸(鄭存謙)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좌의정 김상복(金相福), 우의정 김치인(金致仁)을 파직하고 윤동도(尹東度)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삼아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를 겸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김상복·김치인은 잠시 파면하였다가 곧 그대로 잉임하였는데, 또 이런 명이 있었다.
4월 19일 무오
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전 좌의정 김상복(金相福), 영중추부사 윤동도(尹東度)를 삭직(削職)하고 다시 김치인(金致仁)을 제배(除拜)하여 우의정으로 삼았다. 정이환(鄭履煥)을 처분할 때에 임금이 말하기를,
"이때에 어찌하여 이같은 상소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듣건대 ‘그때 승선(承宣)이 받지 말라는 금령(禁令)이 없는 때문에 퇴각(退却)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르러 갑신년060) 10월 희정당(熙政堂)에 입시(入侍)한 《일기(日記)》를 가지고 들어오라 명하고 승지에게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에 유득양(柳得養)과 여러 신하의 주달한 바가 있을 듯한데 없다."
하자, 왕세손(王世孫)이 모시고 앉았다가 우러러 대답하기를,
"이는 바로 갑신년 5월 18일의 일입니다."
하였다. 이에 5월 《일기》를 가지고 들어와서 읽으라 명하였는데, ‘여러 신하가 모두 말하기를, 「어찌 감히 다시 이를 하겠습니까?」 하였다.’는 데에 이르러 동그라미[圈]를 치라고 명하였다. 또 ‘유득양(柳得養)이 높은 소리로 아뢰기를, 「이 뒤에 만약 다시 당(黨)을 하면 이는 난신 적자(亂臣賊子)입니다.」고 하였다.’는 데에 이르러 묵표(墨標)를 하라고 명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번 일은 비록 하교가 없을지라도 해동(海東)의 신하된 자는 어찌 권하여 이룩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희정당(熙政堂)에서 원량(元良)061) 과 더불어 한밤에 손을 잡고 여러 신하에게 타이른 것을 이제까지 잊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이번 일은 한 꿰미[一串]에 연달은 것이겠는가? 그런데도 예사 일과 같이 보니, 신하의 분의(分義)가 있다고 이르겠는가? 하물며 그때에 말하기를, ‘다시 만약 이를 하면 난신 적자이다.’라고 하여, 그 임금이 이미 들었고 사관(史官)이 이미 기록하였으며, 하늘이 밝게 임하였고 어린 세손도 들었는데, 말하기를, ‘《일기》를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나도 또한 의심하였다. 《일기》를 가져다 보았으나 역시 찾지 못하였는데, 어린 세손이 마침 모시고 앉았기 때문에 이를 물으니, 이는 바로 5월 18일이었다. 아! 깊은 밤의 일을 능히 마음에 새겨서 이제까지 외니, 만약 깊이 체험하지 않았다면 어찌 잊지 아니함이 이와 같겠는가? 우리 나라는 희망이 있다. 우리 나라는 희망이 있다. 오늘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어린아이만도 못하고, 귓전에 바람 지나듯이 하여 그는 없다고 말하는가? 《일기》에 기록한 곳에 먼저 동그라미를 치라고 명하였다. 아! 다시는 전과 같이 범연히 여기지 말고 자세히 보아서 해동(海東)의 신하가 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난신 적자(亂臣賊子)’ 네 글자는 얼마나 엄한 것인데, 어찌 감히 금령(禁令)이 없음으로써 구차하게 미봉(彌縫)하는가? 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전 좌의정 김상복(金相福), 영부사 윤동도(尹東度)에게 아울러 삭직(削職)의 율을 시행하여, 한구석 청구(靑丘)로 하여금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도리가 있도록 하라."
하였으니, 대저 세 사람은 바로 희정당(熙政堂)에 입시(入侍)한 세 대신(大臣)이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한광회(韓光會)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정홍순(鄭弘淳)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신응현(申應顯)을 사간(司諫)으로, 이경옥(李敬玉)을 부교리(副校理)로, 임일원(任一源)을 장령(掌令)으로, 이혜조(李惠祚)를 지평(持平)으로, 권영(權穎)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4월 20일 기미
문과(文科)·무과(武科)의 방목(榜目)을 발표하였다. 문과·무과 장원(壯元)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고 신은(新恩)062) 으로서 어버이를 받든 자에게만 유가(遊街)하게 하였다. 이때 약원(藥院)의 직숙(直宿)을 거두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 하교가 있었다.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사은 정사(謝恩正使)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烜)과 부사(副使) 김선행(金善行)을 같이 들어오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일행이 모두 무사히 갔다가 돌아왔는가?"
하니, 김선행이 대답하기를,
"왕령(王靈)을 힘입어 모두 무사히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악사(樂師)가 악(樂)을 배워 가지고 왔는가?"
하니, 김선행이 말하기를,
"배워 가지고 왔습니다."
하였다. 악사 장천주(張天柱)에게 명하여 악기(樂器)를 가지고 들어와서 생(笙)을 불고 거문고를 타게 하여 각각 한 곡(曲)씩 연주하게 하였다. 인하여 악공(樂工)을 잘 가르쳐서 성음(聲音)을 번거롭고 촉박하게 하지 말도록 경계하라고 명하였다.
이재간(李在簡)을 수찬(修撰)으로, 정상순(鄭尙淳)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4월 25일 갑자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서울에 올라온 수령(守令)을 모두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제도(諸道)의 농무(農務)를 물었다.
4월 26일 을축
내국 제조(內局提調) 심수(沈鏽)의 체차(遞差)를 허락하고 김양택(金陽澤)을 이에 대신하게 하였다.
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전 영부사 윤동도(尹東度), 전 좌의정 김상복(金相福)에게 직첩(職牒)을 주어 서용(敍用)하기를 명하고, 홍봉한과 김상복을 다시 상신(相臣)에 제배(除拜)하였다.
4월 29일 무진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파주 방어사(坡州防禦使)를 묘당(廟堂)에서 추천하는 일을, 우의정은 그렇게 하라고 하고, 좌의정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임무를 중하게 함이 마땅하니, 묘당에서 추천함이 가하다."
하였다. 대사헌 한광회(韓光會), 대사간 임준(任㻐)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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