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기사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 해에 내가 자교(慈敎)를 우러러 들으니, 신풍(新豊)의 집이 영체(零替)하다고 하였는데, 어찌 한갓 국척(國戚)일 뿐이겠는가? 바로 계해년063) 훈신(勳臣)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내 마음이 어찌 견디겠는가? 집과 노비(奴婢)를 주어서 나의 옛날을 추억하는 뜻을 표시하라."
하였으니, 신풍은 영릉(寧陵)064) 의 국구(國舅) 장유(張維)이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5월 4일 임신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전(前) 보덕(輔德) 이보관(李普觀), 전(前) 사서(司書) 유언호(兪彦鎬)를 후일 정사(政事)에 곧 등용(登用)하여, 처분이 지나친 것을 후회함을 보이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보관 등이 서연(書筵)을 열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세손(世孫)이 아직 쾌히 회복되지 아니하였고 나도 바야흐로 고요히 조섭(調攝)하고 있는데, 이때에 어찌 이를 청할 수 있는가?"
하고, 처음에는 귀양보내기를 명하였다가 곧 도로 정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처분한 두 사람을 이미 특별히 석방하였다. 이로 인하여 요속(僚屬)이 학문을 권장하는 문을 막으면 이는 어찌 어린 세손에게 학문을 권장하는 뜻이겠는가?"
하고, 곧 뽑아 쓰라고 명하였다.
5월 5일 계유
이보관(李普觀)을 사간(司諫)으로, 김상묵(金尙默)·유언호(兪彦鎬)를 정언(正言)으로, 윤득맹(尹得孟)을 장령(掌令)으로, 송담(宋霮)·한집(韓鏶)을 지평(持平)으로, 김재순(金載順)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언양현(彦陽縣) 양군(良軍) 2백 명을 경주(慶州) 등 고을로 옮겨 정하고, 봉화현(奉化縣) 양군 1백 명을 안동(安東) 등 고을로 옮겨 정하며, 합천군(陜川郡) 속오(束伍) 2초(哨)를 상주(尙州)·성주(星州) 등 고을로 옮겨서 정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사직(司直) 구선행(具善行)을 비국 당상에 차임(差任)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구선행이 이미 장임(將任)을 해면하였는데, 홍봉한이 묘모(廟謨)065) 에 참여함이 마땅함으로써 비변사 당상관에 차임하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외방에 있는 삼사(三司)를 파직하라고 명하고, 변지(邊地)에 전금(錢禁)을 신칙(申飭)하였으니, 모두 홍봉한이 아뢴 바이다. 대사간(大司諫) 임준(任㻐), 집의(執義) 남학종(南鶴宗)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5월 6일 갑술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여 농사 형편을 물었다. 승선(承宣)에게 제도(諸道)의 방미방(放未放)066) 의 장계(狀啓)를 읽어 아뢰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영구히 서인(庶人)을 만드는 것은 본래 율문(律文)이 아닌데, 하물며 중한 바가 어떠하기에 어찌 감히 조선(朝鮮)의 방미방(放未放)에 실리겠는가? 해당 도신(道臣) 조운규(趙雲逵)를 파직하라."
하였으니, 조운규는 이때 관북(關北)의 도신(道臣)이었다.
5월 7일 을해
유신(儒臣)에게 입시(入侍)를 명하였다. 교리(校理) 홍억(洪檍)은 《장의전(張儀傳)》을 읽고, 수찬(修撰) 이성수(李性遂)는 《진진전(陳軫傳)》을 읽었으며,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성(洪晟)은 《맹상군전(孟嘗君傳)》을 읽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주(周)나라 도(道)가 쇠하여 성인(聖人)의 도가 다시 세상에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임협(任俠)067) 과 변사(辯士)의 무리가 비로소 천하에 횡행(橫行)하였다."
하였다.
5월 8일 병자
승지가 입시(入侍)하니 사부선생안(師傅先生案)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 《소학》을 강(講)한 것이 과연 5월 초3일이었던가? 73세인 이달에 다시 《소학》을 읽으려고 하니, 옛 해를 추억하는 뜻이다. 오늘은 마땅히 이 전(殿)에서 내가 유신(儒臣)과 더불어 《소학》을 강(講)할 것인데, 장관(長官)과 부제학(副提學)을 갖추어 명을 내리게 함이 마땅하다. 사복시 정(司僕寺正) 김귀주(金龜柱)를 동벽(東壁)068) 에 제수하고, 비록 조강(朝講)이 아니더라도 사체가 중하니 영감사(領監事)가 같이 입시(入侍)하여 이름을 ‘망팔 소학강(望八小學講)’이라고 하고 예방 승지(禮房承旨)를 입시하게 하라. 이는 선정(先正) 문경공(文敬公)069) 이 소학 동자(小學童子)라고 하는 뜻이며, 또한 《소학지남(小學指南)》을 특별히 지은 뜻이다. 동몽 교관(童蒙敎官)으로 하여금 동몽을 거느리고 입정(入庭)하게 하며, 조명정(趙明鼎)을 부제학으로 특별히 제수하라."
하였다.
임금이 《소학》을 거듭 강(講)하였다. 왕세손(王世孫)이 시좌(侍坐)하고 영사(領事) 홍봉한(洪鳳漢), 지사(知事) 남태제(南泰齊), 특진관(特進官) 김선행(金善行), 참찬관(參贊官) 조명정(趙明鼎)·김화진(金華鎭), 시강관(侍講官) 김귀주(金龜柱), 기사관(記事官) 최광벽(崔光壁), 편수관(編修官) 김재옥(金載玉), 기사관 차봉원(車鳳轅)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먼저 좌의정·우의정에게 입시하기를 명하고 또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동몽을 거느리고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먼저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유성지모(惟聖之謨)’까지 강(講)하고 묻기를,
"무릇 몇 대문(大文)인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열 대문입니다."
하매, 영사(領事) 이하에게 각각 한 대문씩 돌려가면서 읽으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사(知事)070) 는 옛 옥당(玉堂)인데, 음성도 늙었다."
하였다. 옥당 상하번(上下番)에게 한 대문을 더 읽으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아까 내가 강한 것이 조금 잘못되었으니, 마땅히 다시 강하겠다."
하고, 곧 전편(全篇)을 외우고 말하기를,
"이제야 소학 동자(小學童子)의 일을 닦았다."
하였다. 각각 문의(文義)를 진달하라 명하니,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망팔(望八)의 정섭(靜攝)하시는 중에 옛 해의 일을 거듭 닦으시니, 심히 거룩하고 거룩하십니다. 옥음(玉音)이 평상시보다 나으시고 경(經)을 외우심이 막힘이 없으시니, 신은 경사롭고 다행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 글의 경신편(敬身篇)은 1부(部)의 요지(要旨)가 됩니다. 무릇 몸을 공경히 하는 데 관계된 공부는 전하께서 이미 체득하고 행하시어 지극함을 쓰지 아니함이 없으신데, 다만 성후(聖候)가 가까스로 조금 회복하는 즈음에 당하여 마땅히 병이 조금 나을 때에 경계하심을 마음에 두시고 항상 경(敬)의 한 글자로써 몸을 보호하고 아끼는 방법을 겸하여 하시면, 천화(天和)071) 가 빨리 회복되어 종사(宗社) 억만년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연(本然)의 성(性)은〉 예전에도 부족함이 아니었거니와, 지금에도 어찌 유여(有餘)하겠는가072) ?[昔非不足 今豈有餘者]’라는 것은 시(始)와 종(終)을 이루고 상(上)과 하(下)를 관철시키는 말인데, 나는 13세부터 이 책을 강(講)하여 지금 73세에 이르렀으나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이 있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다스림으로써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학문을 겸하여 예전에 드문 거룩한 법을 이루었으니 ‘큰 덕은 반드시 수한다[大德必壽]’는 것을 여기에 더욱 징험하겠습니다."
하였고, 남태제(南泰齊)가 말하기를,
"성상의 학문이 이미 고명(高明)한 경지에 이르셨는데 이제 부족하다고 하교하시니, 이는 바로 문왕(文王)이 도(道)를 바로 보면서 보지 아니한 것과 같이 하는 뜻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왕세손에게 한 대문(大文)을 강(講)하라 명하니, 왕세손이 ‘다행히 이 떳떳한 성품이 하늘이 다하도록 떨어짐이 없다.[幸玆秉彛極天罔墜]’는 대문을 강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차차 소자(嗟嗟小子)’는 무슨 뜻인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소학(小學)》이기 때문에 소자(小子)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하교하기를,
"나도 또한 소자로서 자처한다."
하였다. 강을 마치자 왕세손이 하례 올리기를 청하고, 왕세손이 먼저 천세(千歲)를 부르니, 여러 신하들이 산호(山呼)073) 하였다. 교관(敎官)에게 명하여 동몽(童蒙)을 거느리고 앞에 나오게 하여 모두 첫머리 대문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몽이 모두 기특하고 준수(俊秀)하다."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문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다섯 달 전에 이를 어찌 헤아렸겠는가? 아! 제사(題辭) 한 편(篇)은 또한 추모(追慕)하는 뜻이다. 옛 역사에 어찌 오늘날처럼 《소학》 강(講)이 있었겠는가? 입시(入侍)한 세 영사(領事)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 지사(知事)와 특진관에게는 각각 반숙마(半熟馬) 1필을 내려 주고, 옥당 상하번(玉堂上下番)과 예방 승지(禮房承旨)는 가자(加資)하며, 주서(注書)는 6품에 올리고 겸 춘추(兼春秋)는 승서(陞敍)하라."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소학》 강(講)은 사체가 중하기 때문에 사체를 갖추어서 하였는데, 비록 입시하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입직(入直)한 유신(儒臣)은 입시한 사관(史官)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오늘 입직한 상·하번(上下番)은 우직(右職)에 조용(調用)하고, 옥당(玉堂)의 책색(冊色)·서리(書吏)에게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題給)하게 하며, 그 나머지 이례(吏隷)에게도 등급을 나누어 시상(施賞)하여 오늘의 일을 후세에 없어지지 아니하게 하고, 입시한 동몽(童蒙)은 해사(該司)로 하여금 각각 지필묵(紙筆墨)을 주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네 글자 두 글귀[四字二句]를 친히 지어서 강연(講筵)에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에게 화답(和答)하는 글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김기대(金器大)를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삼았다.
5월 9일 정축
구선행(具善行)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부여(扶餘)·은진(恩津) 두 고을의 상의원 노비(奴婢)의 도고(逃故)074) 가 진적(眞的)한 것은 곧바로 탈감(頉減)075) 하고, 해원(該院)076) 으로 하여금 해당 고을에 엄하게 신칙(申飭)하여 출생(出生)과 물고(物故)를 사실에 따라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출생을 보고하였으면 어찌 이런 폐단이 있겠는가? 아! 시노비(寺奴婢)도 백성인데 어찌 백지(白地)에 징포(徵布)하게 하겠는가? 어찌 한갓 해원(該院)뿐이겠는가? 노비가 있는 시(寺)는 모두 그러할 것이니, 이와 같으면 함항(咸恒)077) 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금년 안에 일체로 출생을 보고하되 즉시 탈하(頉下)078) 하게 하며 보고를 태만히 하는 수령은 먼저 파직하고 해유(解由)는 10년을 구애(拘碍)하게 하라."
하였다.
심이지(沈履之)를 석방하였으니, 그 부모의 늙음을 대신(大臣)이 진달해 아뢰었기 때문이다.
5월 10일 무인
서명응(徐命膺)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어제(御製) 《양한사명(兩漢詞命)》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고, 도승지 서명응(徐命膺)에게 읽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왕세손(王世孫)이 이때 모시고 앉았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문장(文章)은 《한서(漢書)》와 같은 것이 없다."
하였다.엄광(嚴光)079) 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왕세손에게 묻기를,
"광무제(光武帝)가 만약 자릉(子陵)080) 을 썼으면, 한(漢)나라가 크게 다스려졌겠는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광무제가 자릉을 쓰지 못한 것은 개탄스럽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린아이의 말이 어찌 좋지 아니하겠는가?"
하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그러합니다."
하였다.
정여직(鄭汝稷)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았다.
김선행(金善行)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승지 서명응(徐命膺)에게 어제의 어제(御製)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내가 왕세손에게 즉경(卽景)을 지어 올리라 명하였는데, 잠시 동안에 지어 올렸다."
하고, 왕세손이 지은 이 글도 또한 어제책(御製冊)에 올리되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서체(書體)로 써서 넣으라 명하였다.
5월 12일 경진
서명응(徐命膺)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5월 14일 임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이조 판서 서지수(徐志修)를 체차(遞差)하기를 허락한다 명하고, 특별히 정홍순(鄭弘淳)을 이조 판서로, 조명정(趙明鼎)을 형조 판서로 제수하고, 정실(鄭實)을 형조 참판으로, 이태상(李泰祥)을 좌 포도 대장(左捕盜大將)으로 삼았다.
5월 15일 계미
하교하기를,
"전에 이미 하교하였거니와, 아! 금지 옥엽(金枝玉葉)이 어찌 조선 양반(兩班)에게 뒤지겠는가?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의 아들〉 이진복(李鎭復)을 6품에 올린 뒤에는 검의(檢擬)가 아득하다. 정관(政官)도 또한 어느 왕조(王朝)의 외손인가? 이제 갑자기 생각나서 교하(交河)를 바라보니, 이 마음이 갑절 더한다. 해당 정관을 한 등(等)을 월봉(越俸)하라."
하였다.
5월 17일 을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승문원(承文院)의 입직(入直)을 궐(闕)한 관원에게 금추(禁推)를 명하였다.
입직한 선전관(宣傳官)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여 《병학지남(兵學指南)》을 외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그 아들을 경계하기를, ‘기름진 땅의 백성이 지혜롭지 못한 것은 방탕한 때문이고 척박한 땅의 백성이 모두 의(義)에 향(向)함은 수고롭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오늘 금군(禁軍)을 불러 보고 인하여 입직한 선전관을 불렀다. 능마아청(能麼兒廳)을 설치한 뜻이 어떠한 것인데 세력이 없는 금군은 처음부터 잘 외우고 고량(膏粱)081) 의 서울 무관(武官)은 추생(抽栍)한 약간(若干)의 줄[行]도 모두 외우지 못하였다. 이와 같다면 능마아청(能麼兒廳)에서 〈병서(兵書)를〉 강(講)할 때에는 자원(自願)에 따라 강하였는가? 일이 몹시 해괴하다. 《병학지남(兵學指南)》의 진법(陣法)을 모두 왼 뒤에 체직(替直)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9일 정해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여선응(呂善應)을 집의(執義)로, 이행원(李行源)을 사간(司諫)으로, 이우철(李宇喆)·이지회(李之晦)를 장령(掌令)으로, 최광벽(崔光璧)을 지평(持平)으로, 이진복(李鎭復)·안성빈(安聖彬)을 정언(正言)으로, 이기경(李基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재간(李在簡)을 교리(校理)로, 서유량(徐有良)을 수찬(修撰)으로, 조준(趙㻐)을 문학(文學)으로, 남언욱(南彦彧)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동벽(東壁)을 차출(差出)하여 신록(新錄)을 가까운 시일에 거행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집의(執義) 남학종(南鶴宗)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이조 판서가 들어왔는가?"
하니, 도승지 김화진(金華鎭)이 말하기를,
"세 번 패초(牌招)하여도 나오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이조 판서가 소본(疏本)이 상달되지 못함으로써 이와 같이 세 번 패초를 어겼는데, 어찌 감히 성상의 처분에 대하여 버티고 승강이한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간 일로써 승강이하는 것은 일체 받지 말고 단지 목전(目前)의 정세(情勢)로서 관사(官師)082) 가 서로 경계하는 글만 받아들일 것이다. 이로 인하여 듣건대 양성(陽城)083) 이 어찌 이르지 않았던가? 근친(覲親)하기 위하여 올린 휴가원(休暇願)을 모두 승정원에 머물러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고례(古例)에 없는 일이니, 어찌 양성의 뜻이겠는가? 이 뒤로는 전례에 의하여 받아들이라."
하였다.
5월 20일 무자
이형규(李亨逵)를 응교(應敎)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정창성(鄭昌聖)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홍문록(弘文錄)은 대신(大臣)의 연주(筵奏)로 인하여 하교하였는데, 정관(政官)의 지나치게 버티고 승강이함으로 인하여 이틀 동안 나를 괴롭혔고 홍문관에서 무단히 패초(牌招)를 어김으로 인하여 또한 이틀을 괴롭힘을 받았으니, 이것이 어찌 3백 년 세신(世臣)이 73세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그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겠는가? 서명응(徐命膺)은 패초(牌招) 가운데 명자(命字)를 옛말처럼 보고 공공연히 패초 어기기를 일삼으며, 이형규(李亨逵)는 특별히 제수한 뒤에 그 조부를 들어서 하교하였는데 자신이 그 손자가 되어 어찌 감동(感動)하는 뜻이 없겠는가? 정창성(鄭昌聖)은 새로이 제수한 동벽(東壁)에 불과하나, 그러나 이 홍문록(弘文錄)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동(東)에나 서(西)에나 무슨 지나치게 버틸 것이 있겠는가? 세 유신(儒臣)을 아울러 중하게 추고(推考)하고 궁문(宮門) 열기를 기다려 사은(謝恩)하게 하라."
하였다.
5월 21일 기축
양사(兩司)에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정광충(鄭光忠), 장령(掌令) 이지회(李之晦), 지평(持平) 최광벽(崔光璧)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부제학(副提學) 서명응(徐命膺)은 이미 행공(行公)하는 사람으로서 바야흐로 관록(館錄)084) 을 거행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다른 정세(情勢)가 없으면 진실로 받들어 응함이 마땅합니다. 하물며 옥후(玉候)가 연달아 정섭(靜攝)하시는 중에 계시면서 깊은 밤에 하교하여 말씀이 간측(懇惻)하시니, 누가 감히 황송하고 감격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런데 줄곧 명령을 어기고 거만하게 하며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니, 분의(分義)와 사체(事體)가 모두 한심합니다. 청컨대 서명응에게 빨리 삭출(削黜)의 율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뢴 바가 자못 체통을 얻었다. 어젯밤 하교를 듣고 비록 돈어(豚魚)라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릴 것인데, 서명응은 누구이기에 어찌 감히 이와 같은가? 이 사람을 징계하지 아니하면 다른 자를 어찌 말하겠는가? 갑산부(甲山府)에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다. 정광충 등이 의율(擬律)을 잘되지 못한 것으로써 인피(引避)하니, 사임하지 말고 또 물러가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정언(正言) 안성빈(安聖彬)·이진복(李鎭復)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관록(館錄)의 명이 내렸는데, 서명응이 끝내 명을 받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엄한 하교를 거듭 내려서 먼저 체직(遞職)을 명하고, 사헌부의 계달로 인하여 서명응을 귀양보냈다. 조엄(趙曮)을 부제학으로 특별히 제수하니 조엄이 또 명을 받들지 아니하므로, 삼수부(三水府)에 귀양보내라고 명하고 아울러 배도(倍道)하여 압송(押送)하게 하고, 서호수(徐浩修)는 권점(圈點) 가운데 이름을 쓰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서호수는 서명응의 아들이었다.
이담(李潭)을 부제학(副提學)으로, 민홍렬(閔弘烈)을 교리(校理)로, 안표(安杓)를 부교리(副校理)로, 유현장(柳顯章)을 우윤(右尹)으로, 이주국(李柱國)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본관록(本館錄)을 행하였다. 4점(點)은 이헌경(李獻慶)·이보관(李普觀)·박상로(朴相老)·서유원(徐有元)·윤일복(尹一復)·정창순(鄭昌順)·홍경안(洪景顔)·윤사국(尹師國)·이치중(李致中)·유언호(兪彦鎬)·홍검(洪檢)·이택수(李澤遂)·윤홍렬(尹弘烈)·조준(趙㻐)·이득일(李得一)·송지연(宋志淵)·김노순(金魯淳)·심관지(沈觀之)·송재경(宋載經)·윤양후(尹養厚)·홍용한(洪龍漢)·정상인(鄭象仁)·정후겸(鄭厚謙)·김상묵(金尙默)·김한기(金漢耆)이다. 4점 이상을 뽑았는데, 무릇 25인이었다.
5월 22일 경인
도당록(都堂錄)을 행하여 6점(點) 이상을 뽑았는데, 무릇 26인이었다. 관록(館錄) 가운데 윤일복(尹一復)을 뽑아내고 관록 외에 이진복(李鎭復)·이복상(李復祥)을 추록(追錄)하였다.
정후겸(鄭厚謙)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복상(李復祥)·이득일(李得一)을 수찬(修撰)으로, 홍용한(洪龍漢)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는데, 즉시 사은(謝恩)하지 아니한 때문에 아울러 문겸 선전관(文兼宣傳官)에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또 윤양후(尹養厚)·정상인(鄭象仁)을 부교리로, 이헌경(李獻慶)·김노순(金魯淳)을 수찬으로, 윤사국(尹師國)을 부수찬으로 삼았으니, 모두 신권(新圈)085) 이었다.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를 친히 써서 제조(提調) 김양택(金陽澤)에게 친히 주면서 말하기를,
"선경(先卿)의 충직 청간(忠直淸簡)함을 내가 진실로 생각한다."
하고, 인하여 봉사손(奉祀孫) 김두항(金斗恒)을 과(窠)086) 를 기다려서 조용(調用)하기를 명하였다. 김양택은 고(故)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아들이다.
5월 23일 신묘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선행(金善行)에 대한 교서(敎書)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왕언(王言)을 대찬(代撰)하는 것이 얼마나 중한 것인데 전에 이미 신칙하였거늘 지금 교서의 글이 지나치게 과장(誇張)하였으니, 다른 지제교(知製敎)로 하여금 지어서 올리게 하라. 이 뒤로는 지제교를 바로 예문관에서 계하(啓下)하여 그릇된 버릇을 일체 씻어 버리게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 대한 패(牌)를 청한 일로써 승지(承旨)를 체차(遞差)하고 정고(呈告)한 사람은 시종안(侍從案)에 부첨(付籤)하기를 명하였다. 대사헌 정광충(鄭光忠)이 인피(引避)하기를,
"대신(臺臣)이 입궐(入闕)하지 아니하면 문득 정사(呈辭)하는 것은 바로 전례(前例)인데, 차대(次對)의 명이 내린 뒤에 신이 장관(長官)으로서 진참(進參)하였으니, 하료(下僚)가 사직(辭職)을 제출하는 것은 그 형세가 당연합니다. 이제 듣건대 두 하료가 현고(現告)에 들었다고 하는데, 신의 진참으로 인하여 죄를 요대(僚臺)087) 에게 옮기고 승정원에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어찌 감히 구차히 자리에 있겠습니까? 청컨대 체차(遞差)하여 물리쳐 주소서."
하였는데, 헌부는 이미 분간(分揀)하였으니 사임하지 말라고 비답(批答)하였다.
5월 27일 을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왕세손(王世孫)이 시좌(侍坐)하고 춘방(春坊)이 같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소학편제(小學篇題)와 입교편제(立敎篇題)를 읽고, 왕세손이 이어서 열녀전(列女傳)에서 재과인의(才過人矣)까지 읽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너에게 묻고 너에게 배우려고 한다. 쇄소 응대(灑掃應對)가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근본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왕세손이 대답하기를,
"쇄소 응대를 행하여 《소학》의 도(道)를 다하고 그것을 들어다 두게 되면 치국 평천하가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습여지장(習與智長)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릴 때는 장성(長成)한 때와 다르기 때문에 비록 타고난 바탕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배우고 익힌 연후에 점차로 순숙(純熟)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금(古今)의 다름이 없다.[其無古今之異]’라고 하였는데, 예전은 어떠하고 지금은 어떠하며, 지금은 어찌하여 예전과 다른가?"
하니, 대답하기를,
"《전기(傳記)》에 잡되게 나온 것이 많으나 오히려 온전한 글이 되지 아니한 때문에 고금이 다름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풍화(風化)에 만(萬)의 하나라도 도움이 있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만약 그 공효(功效)를 말하면 크나, 이는 주자(朱子)의 겸사(謙辭)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학》은 바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인데, 어찌하여 열녀전(列女傳)의 내용이 들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람이 생겨난 근본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에 첫머리에 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뱃속에 있는데 그 어머니가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아기를 배어서 움직일 적에나 고요히 있을 적에나 착한 일을 행하면, 그 아들이 나서 저절로 어진 사람이 됩니다. 이러므로 아기를 배었을 때에 태만할 수 없음을 보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달은 바로 내가 스승에게 나아가서 배운 달인데, 지금 73세에 15세된 어린 손자와 더불어 다시 강(講)하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오늘 입시(入侍)한 승지(承旨)·옥당(玉堂)·춘방(春坊)·한림(翰林)·주서(注書)에게 각각 현궁(弦弓)을 내려 주어, 뒷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오늘의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춘방(春坊)의 말을 듣건대 옥음(玉音)이 보통 때보다 낫다고 하니, 경사롭고 다행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73세에 15세된 어린 손자에게 배웠으니, 이상하다고 이를 만하다. 세손(世孫)이 강(講)을 정지한 지 오래인데, 문의(文義)가 정통(精通)하여 전일에 글을 읽고 실천한 보람을 징험할 수 있으니, 매우 아름답고 매우 아름답다."
하였다. 인하여 대사성(大司成)에게 명하여 유생(儒生)을 거느리고 《숙야잠(夙夜箴)》을 가지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각각 지필묵(紙筆墨)을 내려 주었다.
5월 28일 병신
이최중(李最中)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고유(高裕)를 장령(掌令)으로, 김서구(金敍九)를 지평(持平)으로, 이영중(李永中)·임정원(林鼎遠)을 정언(正言)으로, 윤홍렬(尹弘烈)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정보(李鼎輔)가 졸(卒)하였다. 이정보의 자(字)는 사수(士受)인데, 고(故) 판서 이일상(李一相)의 증손(曾孫)이다. 4세(世)를 연달아 문형(文衡)을 맡아서 장시(掌試)가 공평하므로, 당시의 논의가 이를 매우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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