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경자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6월 3일 신축
변득양(邊得讓)을 사간(司諫)으로, 이혜조(李惠祚)·이동우(李東遇)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승정원에서 춘방(春坊)의 정사(呈辭)088) 를 받아들이면서 도승지(都承旨)에게 정당(停當)089) 하게 하지 않은데다 이미 원규(院規)에 어긋났고 금직(禁直)하는 사람의 사단(辭單)까지 받아들였으니, 더욱 온당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그 받아들인 승지를 중하게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6월 5일 계묘
조운규(趙雲逵)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정경인(鄭景仁)·윤석렬(尹錫烈)을 정언(正言)으로, 임성(任珹)을 사간(司諫)으로, 김교재(金敎材)를 부응교(副應敎)로, 정후겸(鄭厚謙)을 지평(持平)으로, 구상(具庠)을 헌납(獻納)으로, 정환유(鄭煥猷)·이일증(李一曾)을 장령(掌令)으로, 홍명한(洪名漢)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초8일 창덕궁(昌德宮)에 동가(動駕)하는 전교(傳敎)를 쓰게 하였다. 초8일은 바로 명릉(明陵)090) 기신(忌辰)인데, 장차 진전(眞殿)에 참배하기 때문이다. 여러 달을 정섭(靜攝)하는 중에 이 전교가 있자, 신민(臣民)들이 모두 경축하며 기뻐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전라도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두 영군(營軍)이 번(番)에 오를 때에 병사(兵使)가 여산(礪山)에서 친히 점검(點檢)하는데 반천리(半千里)091) 를 1년에 4, 5차례 왕래하니, 폐단을 끼침이 염려스럽습니다. 청컨대 우후(虞候)로 하여금 대신 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각 고을에 거사비(去思碑)를 세우는 것은 명백한 금령(禁令)이 있으니, 청컨대 다시 갑진년을 한정하여 미처 묻어 두지 아니한 것과 새로이 세운 것은 나타나는 대로 율(律)을 시행하고, 비를 세울 때에 금하지 아니한 수령과 발현할 때에 관에 있는 수령은 같은 율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고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심수(沈鏽)가 말하기를,
"광흥창(廣興倉)은 달마다 늘어나는 포흠(逋欠)이 가장 고질의 폐단이 됩니다. 청컨대 해당 관원을 중하게 감처(勘處)하소서. 이 뒤에 두 창고(倉庫) 관원의 차례에 따라 승천(陞遷)하는 자는 해장(該掌)의 포흠 유무(有無)를 본조(本曹)092) 에 물은 뒤에 다른 관직(官職)에 의망(擬望)해서 차출(差出)하여 해유(解由)의 법을 거듭 밝히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고 해당 관원은 오등 제서율(五等制書律)과 금고 오등(禁錮五等)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이번 거둥 때에는 전후부 고취(前後部鼓吹)를 없애고, 회가(回駕)한 뒤에 수가(隨駕)한 장교(將校)와 군병(軍兵)은 재주를 시험하여 시상(施賞)하며, 내국(內局)·승정원(承政院)·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수가한 하인(下人)에게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시상하도록 명하였다.
6월 6일 갑진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회가(回駕)할 때에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서 참배하는 전교를 쓰게 하였고, 관광(觀光)하는 많은 선비는 성균관(成均館)에 분부하여 수거안(袖擧案)을 받들라고 명하였다.
6월 7일 을사
서명응(徐命應)·조엄(趙曮)을 방면(放免)하였다. 의금부 현시 죄수와 형조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6월 8일 병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서 종각로(鍾閣路)에 연(輦)을 멈추고 승지에게 명하여 관광하는 백성들과 지영(祗迎)하는 유생(儒生) 등을 불러 ‘여섯 달을 잠잠한 가운데 전배(展拜)하러 가는 길에 너희들을 보니 몹시 기쁘다.’고 유시(諭示)하였다.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서 예(禮)를 행한 뒤에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마땅히 상전(賞典)이 있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담(李潭), 좌통례(左通禮) 윤붕거(尹鵬擧)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우통례(右通禮) 유성모(柳成模)에게는 준직(準職)하며, 뜰에 들어온 대신(大臣)과 국구(國舅)에게는 숙마(熟馬) 1필을 면급(面給)하고, 그 나머지는 각각 숙마 1필을 내려 주며, 입시(入侍)한 한림(翰林)·주서(注書)에게는 아마(兒馬)를, 인의(引儀)에게는 현궁(弦弓)을, 수복(守僕)·본전 하인(本殿下人)에게는 미포(米布)를 제급(題給)하라고 명하였다.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서 전배(展拜)하고, 태복시 정(太僕寺正) 이성수(李性遂)와 내승(內乘) 정여증(鄭汝曾)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역림(歷臨)하였다가 환궁한 뒤에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관이 입대(入對)를 청하여, 하의(賀儀)를 행하기를 힘써 청하니, 15일에 고묘(告廟)하고, 인하여 교서(敎書)를 반포하며, 제도(諸道)는 봉전(封箋)만 하고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은 모두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6월 9일 정미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윤붕거(尹鵬擧)를 승지(承旨)로 특별히 제수하였으니, 윤 붕거는 북도 사람이었다. 전(前) 감사(監司) 조영순(趙榮順)을 비변사(備邊司) 부제조(副提調)로 차출했으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진달한 때문이었다.
임금이 숭정전 월대(崇政殿月臺)에 나아가 거안(擧案)한 유생(儒生)을 시험하여 서울과 시골에 각각 한 사람을 뽑았다. 서울의 수석을 차지한 민정렬(閔鼎烈)과 시골의 수석을 차지한 송환억(宋煥億)에게는 전시(殿試)에 곧바로 나아가게 하고, 지차(之次)인 이만식(李萬軾)에게는 회시(會試)에 곧바로 나아가기를 명하였다.
김재록(金載祿)을 지평(持平)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이담(李潭)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삼았다.
6월 10일 무신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입격 유생(入格儒生)을 불러들여 송환억(宋煥億)에게 앞에 나오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先正)의 몇 대손(代孫)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5대손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얼굴이 심히 아름답다."
하였다.
황경원(黃景源)을 대제학(大提學)으로, 홍낙성(洪樂性)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삼았다.
6월 11일 기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계유일기(癸酉日記)》를 가지고 들어오라 명하고, 이만식(李萬軾)의 아버지 이혼(李混)을 신설(伸雪)한 일을 읽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지억(李之億)은 제2인(第二人)으로서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고, 임석헌(林錫憲)도 또한 그러하였다."
하고, 드디어 이만식을 전시(殿試)에 직부하라고 명하고, 뒤에 예(例)로 삼지 말 일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싣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과제(科第)는 지극히 중하다 하여 더 깊이 생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 윤시동(尹蓍東)의 장계(狀啓)에 의하면, ‘작년에 옮겨 보낸 곡식 값을 지금 바야흐로 고기[魚]·미역·양대(凉臺)093) 로써 전례에 의하여 해포(該舖)에 거두어 보냈는데, 금년 봄에 옮겨 보낸 곡식 값을 일시에 아울러 독촉하면 진실로 가긍(可矜)하다.’고 하였으니, 청컨대 가까운 규례에 의하여 명년 봄을 기다려 거두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장령(掌令) 정환유(鄭煥猷)가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간(司諫) 임성(任珹)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윤붕거(尹鵬擧)를 승지(承旨)로 특별히 제수한 것은 비록 우로(雨露)가 땅을 가리지 아니하는 것 같은 성상의 뜻에서 나왔으나, 아무리 북관(北關) 사람이라 하더라도 위(魏)·주(朱) 두 씨족(氏族)에 비하면 지체와 문벌이 더욱 미천(微賤)하여 장헌(掌憲)094) 을 개정하라는 요청을 전에 이미 윤허를 얻었은즉, 승선(承宣)095) 의 직무는 왕명(王命)을 출납하여 책임이 심히 중하니, 사람마다 외람되이 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윤붕거를 제수하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금이 사람을 쓰는 것은 삼무사(三無私)096) 를 받들어야 한다. 우주(宇宙)가 처음 창조되고 사람이 처음 날 때에 어찌 아무 사람은 선비가 되고 아무 사람은 서인(庶人)이 될 것을 미리 분배(分排)하였는가?"
하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성이 인혐(引嫌)하니, 사임하지 말고 또 물러가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사방(射放)을 시험한 사람에게 반상(頒賞)하고,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에게 찬품을 내렸으며, 어제(御製)를 써서 내려 운(韻)에 맞추어 화답해 올리라고 명하였다.
6월 12일 경술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이번 반교(頒敎)는 중한 바가 비록 있을지라도 1년에 세 번 하례(賀禮)하는 것은 마음으로 그윽이 겸연(歉然)해 한다. 외방(外方)의 물선(物饍)을 모두 감하였는데, 경기(京畿)는 의정부·육조(六曹)의 물선을 감하지 아니함으로써 이제 장문(狀聞)을 보니 그 수(數)가 많았다. 일찍이 옛날에 청둥오리[靑頭鴨]의 일로써 이미 유시(諭示)하였는데, 봄에 나서 여름에 자라는 것은 어찌 곡초(穀草)뿐이겠는가? 새·짐승도 그러하다. 이러므로 비록 어공(御供)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받을 것 외에는 한 생선이나 한 꿩이라도 차마 더 받을 수 없다. 아! 《술편(述編)》에 ‘금수(禽獸)라고 이르지 말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오늘날 여러 신하가 비록 나를 위해 하례를 행한다 하더라도 무지(無知)한 많은 어족(魚族)과 새·짐승을 하례를 행하기 전에 먼저 솥에 넣어서 삶으니, 이것이 어찌 어진 정사이겠는가? 이 여름철을 당하여 성탕(成湯)097) 이 그물 세 면(面)을 풀어 주는 뜻에 어긋나며, 또한 옛 해에 한 물건을 사랑하고 아끼는 거룩하신 뜻을 우러러 체득하는 일이 아니다. 아!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에, ‘봄에 초목이 스스로 즐거워한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한 반찬[物饍]을 인하여 근 백 마리의 꿩과 닭을 하루아침에 솥에 넣으니, 이것이 어찌 《맹자(孟子)》 ‘곡속장(觳觫章)’의 뜻이겠는가? 날마다 꿩과 생선을 이바지하는 것도 오히려 부족한 것이 아닌데, 하물며 다른 것이겠는가? 이번 반교(頒敎)에 음식물 가운데 실과 외에는 일체 모두 제감(除減)하여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조재홍(趙載洪)의 아들을 조가(朝家)에서 그대로 벼슬길을 저지(沮止)할 수 없으며 그도 또한 스스로 막음은 옳지 못한데, 하물며 지금은 더욱 다름이 있을 듯합니다. ‘과거(科擧)에 나아가고 벼슬을 제수하는 데에 조금도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을 일찍이 우러러 진달한 바가 있었으니, 청컨대 거조(擧條)에 내어 반시(頒示)하여 밝게 알도록 하소서."
하자, 우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조재홍의 아들뿐만 아니라, 조재연(趙載淵)·조재부(趙載溥) 등의 아들도 같고 다름이 있게 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대제학(大提學) 황경원(黃景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엎드려 교명(敎命)을 받들어 보니, 신을 양관(兩館)098) 대제학으로 삼은 것은, 허물이 많은 신이 위로 그릇된 은혜를 번거롭게 하였으니 명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국가에서 문형(文衡)을 두는 바는, 반드시 그 문장(文章)이 박아(博雅)하고 지위와 명망이 높은 사람을 골라서 삼관(三館)의 장(長)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본조(本朝) 4백 년 동안 홍유(鴻儒)·숙학(宿學)이 또한 많았으나, 이경(貳卿)099) 에서 이 관직에 제배(除拜)한 자는 아주 적었습니다. 신은 어리석고 둔하여 아는 바가 없으며 문장이 시용(時用)에 적합하지 못하고 지위와 명망이 뭇사람의 마음을 복종하기에 부족한데, 하루아침에 흠이 있고 미천한 이를 뽑아서 문병(文柄)100) 의 중함을 맡기니, 이는 어찌 신이 꿈에나 기대한 바이겠습니까? 또 신이 왕년(往年)에 당한 바 사람들의 헐뜯은 말은 지극히 위태롭고 깊은데 차점(次點)으로서 이 문병을 맡으면 또한 격례(格例)에 어긋납니다. 구구(區區)한 사사로운 의리가 감히 명령에 응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에게 새로 제수한 문형(文衡)을 도로 거두어서 사사로운 의리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의 문재(文才)는 대신(大臣)에게 들어서 익숙하게 안 지 오래인데, 지금 이 임무는 경을 버리고 그 누구이겠는가? 지난날의 일은 씻은 지 오래인데, 다시 무엇을 끌어 말하겠는가?"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윤양후(尹養厚)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이 이만식(李萬軾)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라는 명령에 대하여 그윽이 구구(區區)한 우견(愚見)이 있었으나, 신은 신진(新進)의 생소(生疎)함으로써 연석(筵席)을 파하기 전에 미처 주선하지 못하여, 한마디 말로 다투어 고집하지 못하고 물러나와 직차(直次)101) 에 엎드려 경경(耿耿)102) 함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은사(恩賜)는 다른 과(科)와 같지 아니하니, 비록 수석에 있을지라도 〈전시에〉 직부(直赴)함은 바로 특별한 은전(恩典)입니다. 더구나 날짜가 조금 간격이 있는 뒤에는 격례(格例)에 어긋남이 있으니, 진실로 후폐(後弊)에 관계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빨리 성명(成命)을 정지하여 과거(科擧)의 격례(格例)를 엄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을 내려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6월 13일 신해
승지가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반교(頒敎)는 비록 이미 하교하였을지라도 막중한 태실(太室)103) 에 예(禮)를 펴지 아니하고 이를 행하면 이 마음이 불안(不安)하니, 재명일(再明日)에 먼저 전알(展謁)을 행하고 돌아와서 곧 숭정전(崇政殿)에 앉아서 하례를 받겠다. 아! 반드시 반교(頒敎)를 일컬은 것은 예(禮)를 오히려 갖추지 못하는 것인데, 지금은 이미 전알을 행하고서 하례를 받는다고 일컬음은 뜻이 대개 깊다. 그 임금은 정례(情禮)를 태실(太室)에 펴고 그 신하는 예문(禮文)과 같이 하례를 행하면 양쪽이 아름답지 아니한가?"
하였다.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장령(掌令) 이일증(李一曾)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호조 정랑(戶曹正郞) 한광경(韓光綮)은 비루(鄙陋)하고 자질구레하여 비방을 불러 일으키니, 청컨대 파면해 버리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정에 사람을 쓰는 것은 오로지 과거(科擧)에 있으니, 절제(節製)와 별과(別科)를 물론하고 법례(法例)의 엄중함은 같습니다. 저번 이만식(李萬軾)은 시골 지차(之次)104) 로서 초선(抄選)을 입어서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라는 명이 있음에 이르렀으니, 보통 격식으로 헤아리면 비록 방목(榜目)을 발표할 때라 하더라도 일체로 급제를 내리는 것은 은전(恩典)이 범람함을 오히려 면치 못할 것인데, 하물며 전지(傳旨)를 이미 중외(中外)에 반포하고 탁호(坼號)가 이미 수일을 지났는데도 특교(特敎)가 이어 내려서 중비(中批)로 제직(除職)하는 것과 같음이 있으니, 그 과규(科規)를 엄하게 하고 요행(僥倖)을 막는 도리에 있어서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만식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저번에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옛 대신(臺臣)은 ‘이 꽃이 핀 뒤에는 다시 꽃이 없다.[此花開後更無花]’라는 어비(御批)를 받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계사(啓辭)를 멈추었다. 어제 하교는 내가 비록 정성이 모자라지마는 거의 돈어(豚魚)와 같은 미물도 감동할 만하니, 그때 입시(入侍)한 양사(兩司)도 다투지 않고 물러갔다. 한 유신(儒臣)이 그 뒤에 진차(陳箚)하였으니, 나는 구차하다고 말한다. 무슨 마음으로 이를 아뢰는가? 빨리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그날 전교는 이미 입시(入侍)할 때에 내렸는데 말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능히 법에 의거하여 다투고 고집하지 못하였으니, 대간(臺諫)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켰습니다. 유신(儒臣)에 이르러서는, 이미 소회(所懷)가 있으면 어찌하여 전석(前席)에서 바로 진달하지 아니하고서 자리에서 물러간 뒤에 차자(箚子)를 올려 도로 정지하기를 청합니까? 끝까지 침묵한 자에 비교하면 비록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 거조(擧措)가 뒤바뀌고 그릇됨이 큽니다. 청컨대 입시한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를 아울러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처음 계달에서 이미 유시하였는데, 그가 만약 배척한다면 어찌 수일을 귀머거리처럼 있다가 이제야 진계(陳啓)하는가? 구차함이 유신(儒臣)보다 심하다."
하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일증(李一曾)이 인피(引避)하여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만식에게 급제를 내릴 때에 사간(司諫) 임성(任珹), 장령(掌令) 정환유(鄭煥猷), 부교리(副校理) 윤양후(尹養厚)가 입시하였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물러갔기 때문에 양사(兩司)에서도 다투지 아니하였다.’는 하교가 있었다.
왕세손(王世孫)에게 수가(隨駕)하기를 명하였다. 중궁전(中宮殿)에 진하(陳賀)할 때에 왕세손의 행례(行禮)는 그만두고 대내(大內)에서 표리(表裏)105) 만 올렸다. 중궁전의 치사(致詞)는 전례에 의하여 수정(修整)하였으며, 왕세손궁의 하례는 권정례(權停禮)로 거행하였다.
6월 14일 임자
특별히 이헌경(李獻慶)을 사간(司諫)으로, 구상(具庠)을 장령(掌令)으로, 유언호(兪彦鎬)를 부교리(副校理)로, 홍검(洪檢)을 수찬(修撰)으로, 정창성(鄭昌聖)을 부응교(副應敎)로, 이보관(李普觀)을 보덕(輔德)으로 제수하였다.
6월 15일 계축
임금이 태묘(太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배(展拜)를 마치고 대신(大臣)에게 봉심(奉審)하라고 명하였으며, 묘사(廟司)·전사(殿司)를 승서(陞敍)하고 수복(守僕)에게 미포(米布)를 제급(題給)하라고 명하고 인하여 환궁(還宮)하였다.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교서(敎書)를 반포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몸이 불편하여 영위(榮衛)가 회복되지 아니하니, 미류(彌留)106) 하는 근심이 오래 간절하였고, 전례(展禮)를 행하여 효성(孝誠)을 펴니, 다행히 병이 낫는 경사로움을 보았다. 곧 아름다운 법을 거행하여 널리 덕음(德音)을 드날렸고, 생각하건대 나의 작은 몸으로 큰 업적(業績)을 이어받았다. 73세의 장수(長壽)에 이르렀으니, 절선(節宣)의 방도를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4백여 년의 기업(基業)을 이었으니, 매양 살얼음을 밟는 두려움이 있다. 전번에 동궁(東宮)이 조섭(調攝)을 잘못하여 병에 걸렸으니, 과궁(寡躬)이 근심이 쌓여서 병을 이루었다. 조손(祖孫)이 서로 의지하는 마음으로써 밤낮으로 애가 타서 손상을 입었고, 나이가 더욱 높은 지경에 당하여 봄·여름 동안 질질 끌면서 편치 못하였다. 중간에 격체(隔滯)한 증후가 먼저 나았으니 칭하(稱賀)를 비록 허락하였으나, 시종(始終) 각부(脚部)의 담(痰)이 병이 되어 걷기가 오히려 어려웠다. 제향(祭享)을 친히 행하지 못하니 묘전(廟殿)을 바라보며 두려움이 더하고, 조회(朝會)를 오랫동안 정지했으니 침석(枕席)에 있으면서 탄식이 일어난다. 다행히 조종(祖宗)의 도우심을 힘입어 문득 탕환(湯丸)107) 의 효력을 얻었다. 진전(眞殿)에 길이 사모하는 슬픔을 펴고 인하여 육상궁(毓祥宮)에 역배(歷拜)하였으며, 태실(太室)에 삼가 배알하는 의식을 행하고 또 동궁과 더불어 함께 하였다. 몇 달을 오래 끌던 병이 쾌히 나았으니, 어찌 처음에 이를 생각이나 했겠는가? 해를 지나도록 오래 궐(闕)한 예(禮)를 몸소 행했으니, 이는 조종(祖宗)께서 묵묵히 도우심을 힘입었다. 지난 역사를 찾아도 보기 드문 일이었고, 뭇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기쁨을 함께 하였다. 태묘(太廟)의 영(靈)이 복을 내리시니 보좌(寶座)에 임하여 발걸음이 편안하여 어긋남이 없으며, 재계하여 효성을 펴니 난여(鑾輿)에 오르는데 발자취를 띔이 평상시와 같았다. 나타나는 아름다움이 빛나니 장차 밝은 복을 종사(宗社)에 보답할 것이며, 떳떳한 법을 이에 행하니 기뻐하고 사랑하는 정성은 신린(臣隣)에게 위로될 만하다. 이미 종묘(宗廟)에 고유(告由)하고 다시 넓은 전정(殿庭)에서 유시(諭示)한다. 아! 하례를 받는 것은 신(神)의 도움을 빛내는 바이니 이미 기쁨을 꾸미는 뜻을 보였고, 고명(誥命)을 선포함은 백성의 마음을 보답하는 바이니 경사를 반포하는 뜻을 편다.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지어다."
하였다.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이 지어 올렸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윤득우(尹得雨), 좌통례(左通禮) 이명준(李命俊), 상례(相禮) 조태명(趙台命), 태복시 정(太僕寺正) 박사해(朴師海), 필선(弼善) 변득양(邊得讓)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우통례(右通禮)는 준직(準職)하며, 입시(入侍)한 승지(承旨)와 치사관(致詞官)에게는 반숙마(半熟馬)를 한림(翰林)·주서(注書)에게는 아마(兒馬)를 주고, 찬의(贊儀)는 수령(守令)을 제수하며, 통례원(通禮院) 하인(下人)은 미포(米布)를 제급(題給)하고, 내국 제조(內局提調) 이창수(李昌壽)에게는 숙마(熟馬)를, 수의(首醫) 이태원(李泰遠)에게는 숙마를 면급(面給)하라고 명하였다.
한익모(韓翼謨)를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삼았다.
도년(徒年) 이하는 계본(啓本)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놓아 보내고, 의금부(義禁府)와 형조(刑曹)의 시수(時囚)를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도승지(都承旨) 김화진(金華鎭),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시건(李蓍建)이 아뢰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 조영순(趙榮順), 강원 감사 민백흥(閔百興), 통제사(統制使) 윤태연(尹泰淵), 남병사(南兵使) 이방수(李邦綏),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남익상(南益祥), 우수사(右水使) 유혁(柳爀),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민지열(閔趾烈)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이를 윤허하였는데, 수령과 변장(邊將)이 한 사람도 하고(下考)108) 에 있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6월 16일 갑인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사간(司諫) 이헌경(李獻慶)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고, 윤붕거(尹鵬擧)의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장령(掌令) 구상(具庠)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만식(李萬軾)의 일에 이르러 답하기를,
"어저께 하교는 한낱 이만식을 위함이 아니고 고심(苦心)함이 있었는데, 이제 연달아 계달하니 만만(萬萬) 뜻밖이다. 아! 한 과(科)도 이와 같은데, 세 정시(庭試)를 어찌 남겨 두겠는가? 대신(臺臣)이 이미 법을 집행했으니, 내가 어찌 한 정시(庭試)를 아끼겠는가? 이제 명을 내리려고 하나 아직 십분 참작하겠다. 내가 비록 쇠모(衰耗)하였지마는, 어찌 차마 구차한 임금이 되어 ‘빨리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하교를 내리겠는가? 대신(臺臣)이 마음대로 하라."
하니, 구상이 인피(引避)하여 체차(遞差)하기를 청하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조영순(趙榮順)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권영(權穎)을 장령으로, 윤석주(尹錫周)·이태정(李台鼎)을 지평(持平)으로, 노정원(盧廷元)·신상권(申尙權)을 정언(正言)으로, 남운로(南雲老)를 집의(執義)로, 홍억(洪檍)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6월 17일 을묘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설행하여 이동욱(李東郁) 등 네 사람을 뽑았다.
사간(司諫) 이헌경(李獻慶)이 윤붕거(尹鵬擧)를 정계(停啓)한 뒤에 물의(物議)가 있으므로 인피(引避)하여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부효(浮囂)한 자의 소위이다. 마땅히 선왕(先王)의 영혼(靈魂)에 고하고 양관(兩觀)109) 의 법을 바로잡은 연후에 나라의 기강(紀綱)을 세울 수 있다."
하고, 먼저 이헌경을 체직시키고 승정원으로 하여금 함문(緘問)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헌경이 들은 바가 없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 일을 안 뒤에야 탕제(湯劑)를 들겠다. 이헌경이 만약 바르게 진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난신 적자(亂臣賊子)이니, 마땅히 친히 묻겠다."
하고, 함사(緘辭)를 받아들인 승지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함문(緘問)하여 세 차례에 이르자, 이헌경이 이웃에 사는 사인(士人) 이정섭(李廷燮)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정국(庭鞫)을 베풀기를 명하여 이정섭을 두 차례 형문(刑問)하고 청금록(靑衿錄)에서 영구히 지워버려 인류(人類)에 끼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헌경은 처음에는 남간(南間)에 가두었다가 영구히 서인(庶人)을 삼아 시골로 내치라 명하였고, 이정섭은 곧 장폐(杖斃)되었다.
특별히 정존겸(鄭存謙)·이명준(李命俊)을 승지(承旨)로, 조영진(趙榮進)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제수하였다.
전(前) 장령(掌令) 구상(具庠)을 이성현(利城縣)에, 장령 권영(權穎)을 해남현(海南縣)에, 지평(持平) 윤석주(尹錫周)를 장기현(長鬐縣)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이때 권영과 윤석주가 처음에 시골에 있다고 일컬었다가 엄교(嚴敎)로 인하여 나와서 숙배(肅拜)하였는데, 윤석주가 또 연달아 이만식(李萬軾)의 일을 아뢰자 처음에는 구상은 이성 현감(利城縣監)으로, 권영은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보직(補職)하였고, 윤석주는 영구히 시종안(侍從案)에서 삭제(削除)하라고 명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권영·윤석주가 처음에는 외방에 있다고 일컬었다가 곧 출숙(出肅)한 것은 임금을 속이는 죄를 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써 아뢰자, 이에 세 사람을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대각(臺閣)을 규피(規避)하여 제수함이 있으면 문득 외방에 있다고 일컬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오늘날 조정 신하가 만약 대간의 천망[臺望]에 든 것을 들으면 모두 말을 타거나 나귀를 타고 달아나니, 도적이 만약 쳐들어오면 이 무리는 모두 장차 달아날 것이다. 그러니 누가 나라를 위하여 절의(節義)를 세우겠는가?"
하였다.
이창수(李昌壽)를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6월 18일 병진
승지(承旨)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조영진(趙榮進)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고, 이만식(李萬軾)의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임금이 도정(都政)을 친히 행하였는데, 도승지 정존겸(鄭存謙), 이조 판서 정홍순(鄭弘淳), 참판 이최중(李最中), 참의(參議) 이복원(李福源), 좌부승지(左副承旨) 박사해(朴師海), 병조 판서 김상철(金尙喆), 참판 윤득우(尹得雨), 참의 임준(任㻐), 참지(參知) 홍성(洪晟)이 입시(入侍)하였다. 서명신(徐命臣)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수훈(李壽勛)을 사간(司諫)으로, 서지수(徐志修)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정기안(鄭基安)을 우윤(右尹)으로, 심각(沈殼)을 좌윤(左尹)으로, 이지회(李之晦)·이수일(李秀逸)을 장령(掌令)으로, 김화중(金和中)을 지평(持平)으로, 구수국(具壽國)을 헌납(獻納)으로, 윤광례(尹光禮)를 정언(正言)으로, 함계군(咸溪君) 이훈(李櫄)을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윤득양(尹得養)을 부사(副使)로, 이형규(李亨逵)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이방일(李邦一)을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로 삼았다.
6월 19일 정사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제주 목사(濟州牧使) 윤시동(尹蓍東)은 늙은 어머니가 있는데 오래 먼 바다 섬에 있으니 효(孝)로 다스리는 정사에 있어서 진휼(軫恤)하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하다’는 뜻으로써 아뢰니, 체차(遞差)를 허락한다고 명하였다.
6월 21일 기미
임금이 교자(轎子)를 타고 창교(倉橋)에 임하여 농형(農形)을 살피고 경기(京畿) 백성을 불러서 경기 고을의 농사 형편을 물었다. 환궁한 뒤에 태복시 정(太僕寺正) 윤득맹(尹得孟)을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6월 22일 경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6월 23일 신유
예조(禮曹)에서 경과(慶科)를 날을 골라 거행하기를 계달하였는데,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 심수(沈鏽), 병조 판서 김상철(金尙喆)의 체차(遞差)를 허락한다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어버이가 늙은 까닭으로써 사면하기를 간절히 진달하니 임금이 특별히 사임(辭任)을 허락하고 복상(卜相)을 명하였으며, 또 새로이 복상(卜相)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비록 구애됨이 있을지라도 지벌(地閥)과 명망(名望)이 있는 바에 스스로 그 지위에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정승을 정하였다."
하고, 드디어 서지수(徐志修)를 제배(除拜)하여 우의정으로 삼았다.
조운규(趙雲逵)를 호조 판서로, 박상덕(朴相德)을 병조 판서로, 심수(沈鏽)를 판윤(判尹)으로, 김상철(金尙喆)을 예조 판서로, 홍검(洪檢)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특별히 김상묵(金尙默)을 교리(校理)로, 윤훙렬(尹弘烈)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제수하였다.
6월 24일 임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라에서 정승을 골라 새 정승이 임명되었으니, 신이 이미 국가를 위하여 기뻐하며 이어서 신의 몸이 장차 무거운 짐을 벗을 것을 다행스러워합니다. 지금은 공격(公格)110) 과 사의(私義)가 일각(一刻)이라도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 니다. 종형제(從兄弟)가 같이 정승의 자리에 있으니 예전에 이런 예(例)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다만 신의 집에서 이미 행한 전례로써 말할지라도 신의 두 당숙(堂叔)이 전후에 배상(拜相)했을 적에 신의 아비가 문득 분의(分義)를 이끌어 사면하였으니, 엎드려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체직(遞職)시켜 중한 임무를 여러 날 헛되이 얽매어 두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경이 우의정과 더불어 모두 3대(代)를 배상(拜相)하였으니, 이는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경이 규례에 의하여 좌상(左相)에 오른 것인데, 어찌 사임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左相)이 사면하고자 하는데, 전례(前例)가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대답하기를,
"옛 상신(相臣) 조익(趙翼)과 이시백(李時白)은 친사돈간으로서 행공(行公)하였고, 이유(李濡)와 김창집(金昌集)은 사촌간으로서 행공하였으며, 홍치중(洪致中)과 이태좌(李台佐)는 남매(娚妹)111) 간인데 행공하였습니다."
하였다.
교리 김상묵(金尙默)을 갑산부(甲山府)에 귀양보내어 배도(倍道)하여 압송(押送)하라고 명하였으니, 즉시 숙명(肅命)하지 아니한 때문이었다.
6월 26일 갑자
김상묵(金尙默)을 귀양보내는 명을 정지하고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율을 시행하게 하였으니, 백 살이 된 종조모(從祖母)가 있기 때문이었다.
6월 27일 을축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이번 성후(聖候)가 평복(平復)되신 데 대한 진하(陳賀)는 진실로 드물게 있는 경사인데 종신(宗臣)이 연고가 없으면서 불참한 자가 많으니, 신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친부(宗親府)로 하여금 현고(現告)하여 논책(論責)해야 합니다. 학릉군(鶴陵君) 이시(李榯), 여평군(驪平君) 이후(李)는 전후의 공회(公會)에 한번도 진참(進參)하지 아니하였으며, 학릉군 이시는 세수(歲首)에 은혜를 입어 가자(加資)하였는데 아직도 숙배 사은(肅拜謝恩)하지 아니하였으니, 더욱 지극히 해괴합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또 진차(陳箚)하여 사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 예조 판서 서지수(徐志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용루(庸陋)함이 백에 하나도 남과 같음이 없어서 춘관(春官)112) 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바야흐로 사면하기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엎드려 태사(台司)113) 의 새로운 임명을 받드니, 신이 창황(惝怳)하고 놀라서 여러 날을 지나도록 마음을 정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나라의 안위(安危)가 정승을 고르는 잘잘못에 있으니, 그 신중히 할 바가 진실로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신의 본말(本末)을 이미 천감(天鑑)이 굽어살피시는 바인데, 이제 갑자기 인망(人望) 밖의 사람을 뽑아서 사방(四方)의 청문(聽聞)을 놀라게 하였으니, 성조(聖朝)의 거조(擧措)가 어긋나고 그릇됨이 이에 이를 것을 뜻하지 못하였습니다. 아! 이 성(盛)하고 가득함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정(人情)의 같은 바인데, 전번에 관각(館閣)의 제수도 오히려 3세(世)를 연달아 함으로써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물며 이 임명된 바는 또 관각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겠습니까? 친혐(親嫌)으로서 응당 피(避)할 것에 이르러서는 아래에 있는 자로서 체차(遞差)함이 마땅한데, 오히려 직명(職名)으로써 거취(去就)를 논하게 되니, 도리어 외람되고 두려워서 감히 아울러 진달하지 못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아! 이번 새로운 배상(拜相)은 진실로 시망(時望)에 합하여 경에게 속(屬)함이 오래이며, 나라를 위하는 단심(丹心)은 푸른 하늘이 증명할 만하고, 개제(愷悌)114) ·순근(醇謹)함은 대소(大小) 관원이 함께 아는 바이다. 하물며 좌상은 3대(代)를 상직(相職)에 있었으며, 경도 3세(世)를 상직에 제배(除拜)된 것은 국조(國朝)의 왕첩(往牒)에 있을 뿐만 아닌데, 어찌하여 좌상의 차자(箚子)가 아침에 이르렀는데 경의 상소가 저녁에 이를 수 있겠는가? 경 등의 마음을 볼 수 있으니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보상(輔相)은 사체가 중하며 전례(前例)가 분명하니, 내가 어찌 이제 유시(諭示)하겠는가? 모름지기 의탁하는 중함을 체득하여 곧 일어나서 일을 보살펴 중망(重望)에 보답하라."
하였다.
6월 28일 병인
임금이 의릉(懿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하였으니, 여섯 달 만에 처음 있는 예(禮)이다. 도로 월대(月臺)에 나아가 향군(鄕軍)을 불러 농사의 형편과 비가 온 것을 물었다.
6월 30일 무진
정언 윤광례(尹光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일에 대신(臺臣)이 이미 정계(停啓)하고 문득 인피(引避)한 것은 진실로 어그러진 일이라 하겠지마는, 이로써 위엄과 노여워하심을 거듭 가하여 소문의 근거를 핍박해 힐문(詰問)하시니, 진실로 대각(臺閣)에 베풀 바가 아닙니다. 선비라고 이름하는 그가 비록 무상(無狀)하다고 하겠지마는, 밤중에 정국(庭鞫)하여 듣는 자들이 놀라고 의혹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밝은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신이 어리석고 죽을 죄를 진 생각에는 그윽이 두렵건대 자손에게 편안한 계책을 물려주는 데에 흠(欠)이 있을까 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나라의 경사가 무강(無彊)함은 전사(前史)에 없는 바인데, 요즘 은수(恩數)가 점차 넓어지고 범람한 가자(加資)가 간혹 불어나서 명기(名器)가 가볍고 관방(官方)이 문란하니, 신은 그윽이 성조(聖朝)를 위하여 애석해 합니다. 지나간 일은 비록 따라잡기 어려우나 오는 것은 오히려 경계할 수 있으니, 엎드려 원하건대 정신을 머물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부효(浮囂)는 바로 망국(亡國)의 근본인데, 몸이 선비가 되어 국정(國政)을 간예하여 대신(臺臣)을 지휘하였으니, 이는 3백 년에 없던 바이다. 팔형(八刑)115) 〈가운데〉 난언(亂言)과 조언(造言)을 한 사람이 겸하였고, 《청금록(靑衿錄)》에서 이름이 삭제된 자가 감히 선비라고 말하겠는가? 이는 나라를 무시하는 것이니, 응당 처분하겠다. 이정섭(李廷燮)이 비록 무상(無狀)할지라도 공초(供招)를 받지 아니하고 곧바로 형신(刑訊)한 것은 내가 스스로 후회한다. 그때 대간(臺諫)의 직에 있는 자가 한 사람도 바로잡아 구(救)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진실로 내가 인도해 거느리지 못한 소치이다. 기쁨을 기념하는 행사는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신하를 위하는 것도 아닌데, 한 달 안에 상전(賞典)이 연달았으니, 아마도 너무 지나칠 것을 염려하여 오히려 두려움이 느껴진다. 이제 그대의 상소가 이 일에 소중함을 비록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숨김이 없는 마음을 내가 가상히 여긴다. 비록 그러하나 백성을 선비라고 한 것은 결단코 예사로 비답(批答)하기 어렵다. 말한 바는 우선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우승지(右承旨) 박사해(朴師海)가 나와 말하기를,
"신도 또한 대간(臺諫)의 상소 가운데 당연히 피혐(避嫌)할 사람인데, 향을 전함은 사체가 중하므로 부득이하여 들어와서 참여하였습니다. 이제 이미 예식을 마쳤으니, 감히 물러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체통을 얻었다. 여러 승지들은 어찌하여 오지 아니하였는가?"
하자, 도제조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대신(臺臣) 윤광례(尹光禮)의 상소 가운데, ‘남자(濫資)’라는 말로써 들어오지 못합니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담(李潭)과 안동 부사(安東府使) 김화진(金華鎭)은 모두 하직 인사차로 들어왔다가 역시 신자(新資)116) 로써 인혐(引嫌)하고 나갔습니다."
하니, 여러 승지와 황해 감사·안동 부사를 체차(遞差)하는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다가 황해 감사와 안동 부사는 곧 그대로 잉임(仍任)하라고 명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사직을 허락하고 윤동도(尹東度)를 좌의정에 제배(除拜)하라고 명하였다.
전(前) 정언 윤광례(尹光禮)를 흑산도(黑山島)에 귀양보내고, 기기 괴괴(奇奇怪怪)한 무리를 구차히 대각(臺閣)과 전당(銓堂)117) 에 충당했다고 하여 아울러 파직을 명하였다. 특별히 조명정(趙明鼎)을 이조 판서에, 한광회(韓光會)를 이조 참판에, 이미(李瀰)를 이조 참의에, 이사관(李思觀)을 형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사간 이수훈(李壽勛)을 삼수부(三水府)에 귀양보내고, 헌납 홍검(洪檢)을 기장현(機張縣)에 정배(定配)하며, 장령 이지회(李之晦)는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으니, 엄한 하교를 내렸는데도 즉시 논계(論啓)하지 아니한 때문이었다. 입시(入侍)한 여러 대신(大臣)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가 곧 도로 거두었다.
김양택(金陽澤)을 판윤으로, 남태제(南泰齊)를 판의금으로, 이헌묵(李憲默)을 사간으로, 정문주(鄭文柱)를 장령으로, 이택수(李澤遂)를 헌납으로, 이명훈(李命勛)을 정언으로, 정창성(鄭昌聖)을 부응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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