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기사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좌·우 통례(左右通禮)는 일찍이 옥당(玉堂)을 겪은 사람으로써 비의(備擬)하라고 명하였다.
7월 2일 경오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선(臺選)의 훌륭함은 송(宋)나라와 같음이 없는데, 그때 문언박(文彦博)·범중엄(范仲淹)·부필(富弼)·여정(余靖)·구양수(歐陽脩) 등이 조정에 널리 참렬하였으니, 그 간선(簡選)하고 또 엄격함이 어찌 요즘과 같이 그 사람을 묻지 아니하고 통청(通淸)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국가의 체통이 엄하지 아니함은 오로지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하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대저 관방(官方)의 효잡(淆雜)함은 요즘과 같음이 없으니, 전당(銓堂)을 신칙(申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윤광례(尹光禮)가 상소한 뒤로 성심(聖心)의 격뇌(激惱)함이 여러 번 연교(筵敎)에 드러났다.
7월 3일 신미
유성(流星)이 위성(胃星) 밑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3, 4척 가량이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좌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제배(除拜)한 지 수일이 되어도 숙배[命肅]하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엄한 교시를 내리니, 윤동도가 대명[胥命]하였다.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이 무슨 승강이를 할 단서가 있는가?"
하니, 도제조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좌상이 작년에 최익남(崔益男)의 소척(疏斥)을 당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말을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녹(祿)을 생각하고 지위(地位)를 보전하려 한다.’는 것으로 지목을 삼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좌상이 홀로 논핵(論劾)을 입었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김치인(金致仁)·한익모(韓翼謨)가 같이 논핵을 입었습니다."
하였다. 윤동도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 일[本事]을 잊었다."
하니, 윤동도가 말하기를,
"신의 당한 바는 실제의 말입니다."
하매, 홍봉한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이후(李)가 개정(改正)을 당하였으나 그 뒤에 거듭 복상(卜相)되자 곧 일을 보았는데, 좌상이 당한 바는 이후와 같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상직(相職)을 제배(除拜)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생각이나 한 바이겠는가?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니, 윤동도가 말하기를,
"이 하교를 받들었으니, 어찌 감히 다시 인혐(引嫌)하겠습니까?"
하였다.
7월 4일 임신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수어사(守禦使) 이창수(李昌壽)에게 내린 교서(敎書)를 읽으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그 형이 일찍이 유수(留守)를 지냈는가?"
하니, 도제조 홍봉한이 말하기를,
"그러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형제가 앞뒤에 이 임명을 받았으니, 역시 영광이다. 교서 가운데 이 말이 없으니 흠(欠)이다."
하고, 홍봉한에게 한 글귀를 지어서 본초(本草) 가운데 보태어 넣으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윤득우(尹得雨)가 지은 것을 읽어 아뢰자,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지은 바가 그래도 좋지 못하니, 내가 친히 짓겠다."
하고, 불러 주며 쓰게 하였는데, ‘여섯 달 뒤에 상하(上下)가 전석(前席)에서 병부(兵符)를 받았으니 이것이 어찌 헤아린 바이겠는가? 10년 사이에 형제가 남성(南城)에서 절월(節鉞)을 맡았으니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하고는, 인하여 하교하기를,
"천고(千古)에 임금과 신하가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마땅히 중신(重臣)의 전가지보(傳家之寶)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7월 5일 계유
이유수(李惟秀)를 대사간으로, 유수(柳脩)를 집의로 삼았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차대(次對)를 행하지 아니하고 다만 비국 당상만 대한다.’는 하교가 있었는데, 이날에 단지 대신과 유사 당상(有司堂上)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였다. 대사헌 서명신(徐命臣)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소회(所懷)로써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의 ‘일이 이르러 이에 응하면 나의 마음은 예전과 같다.[事至斯應 我則如故]’라는 말을 이끌어 힘쓰기를 우러러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 한 달에 여섯 번 차대하여 그 임금은 부르지 아니하는 날이 없는데, 그 신하는 일체 모두 머뭇거리며 심지어 무단히 부름을 어기고, 혹은 곧바로 시골로 내려가니, 나는 바로 이 한 가지 일에 나라의 흥망(興亡)이 매였다고 한다."
하였다.
7월 6일 갑술
임금이 태묘의 추향 대제(秋享大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헌관(獻官)을 늙고 병든 사람으로 채워서 차임(差任)하고 집사(執事)를 구차하게 채웠다 하여, 해당 당상관을 먼저 파면한 뒤에 나문(拿問)하고 해당 낭관은 호남 연변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삼경(三更)에 승지(承旨)가 입시(入侍)하였다.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나가서 원례(院隷)118) 로 하여금 태묘(太廟)에 가서 행례(行禮)하는 절차를 계속해 알아 가지고 들어와 아뢰게 하라 하고, 예식을 마친 뒤에 비로소 물러가기를 명하였다.
7월 7일 을해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대신(大臣)과 호조 판서가 같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유시(諭示)하겠다. 13세 때 일을 73세에 또 당했으니, 또한 귀한 일이다. 내가 작은 술자리를 베풀고자 하니, 석 달을 전기하여 도감(都監)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하니,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자오니, 흠탄(欽歎)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금년 진연(進宴)은 한결같이 고례(古例)에 따라 할 것입니다. 성후(聖候)가 여러 달 편찮으신 나머지에 이제 지난 역사에 드문 경사를 만났으니, 이날에 종(鍾)·고(鼓)·관(管)·약(籥)의 음악을 듣고 남산(南山)과 북두(北斗)의 수(壽)를 절하며 올린다면, 신 등이 물러가 구렁에 빠져 죽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여한(餘恨)이 없습니다."
하매, 전 병술년119) 내외연 의궤(內外宴儀軌)를 가지고 들어오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외연(外宴)을 허락하였으니, 내연(內宴)도 옛 해의 예(例)에 따라서 허락할 것이다. 아! 나의 추모(追慕)하는 마음으로써 나이 더욱 늙고 기운이 더욱 쇠한데,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하니, 아무리 힘써 강권(强勸)할지라도 마음에 어찌 즐거워하겠는가? 모든 찬품(饌品)은 작년의 예(例)에 의하여 정지하고 인삼정과(人蔘正果)는 고례(古例)를 따라 특별히 감하며, 모두 지화(紙花)와 오미(五味)를 쓰고, 진작(進爵)은 수대신(首大臣)120) 과 국구(國舅)·종친(宗親)·의빈(儀賓)·수당(首堂)·호판(戶判)이 하며, 연회에 참여하는 여러 신하는 종친·문(文)·음(蔭)·무(武) 정1품, 기사 제신(耆社諸臣), 의정부 서벽(議政府西壁), 시임 비당(時任備堂), 훈부 유사 당상(勳府有司堂上), 판윤(判尹)·도위(都尉)·부위(副尉)·육승지(六承旨)·한림(翰林)·주서(注書)·유신(儒臣)은 시임(時任)·원임(原任)을 물론하고, 양사(兩司)의 시임으로 서울에 있는 자는 진참(進參)하며, 도총부(都摠府)·병조(兵曹) 시위(侍衛), 내승(內乘) 군직(軍職), 선전관(宣傳官), 춘방(春坊) 배위인(陪衛人)은 일체로 반(盤)121) 을 허락한다."
하였다.
헌부와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7월 8일 병자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전악(典樂)을 불러서 진연(進宴) 때의 주악(奏樂)하는 절차를 묻고, 어제(御製)의 몽금척(夢金尺) 6장(章)을 쓰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이복상(李復祥)을 발탁하여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삼았다.
조영순(趙榮順)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7월 9일 정축
진연 도감 당상(進宴都監堂上)에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김한구(金漢耉)·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예조 판서 정홍순(鄭弘淳)을 차하(差下)하였다.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영순(趙榮順)이 지금 승지가 되었는가?"
하니, 도제조(都提調)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조영순이 지금은 변화하여 두루 통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인물(人物)을 만들어 이룬 것[陶鎔]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숙부(叔父) 조관빈(趙觀彬)은 변화하기가 어려웠으나, 글은 잘하였다. 이복상(李復祥)의 승자(陞資)를 사람들이 혹시 너무 급하다고 이르나, 나는 느낀 바가 있다."
하였다. 해서(海西)의 정포 장계(旌褒狀啓)를 읽으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이미 하교하였다. 아! 효자(孝子)·충신(忠臣)은 드물다고 이를 만한데, 한 가지 일로 인하여 효자가 되고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충신이 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는가? 도신(道臣)의 한 장계에 10여 인이 있으니, 나는 지나치다고 여긴다. 증자(曾子)의 효(孝)를 맹자(孟子)가 가하다고 하였으니, 어찌 살피지 않을 수 있는가? 해당 도신을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작(進爵)은〉 왕세손빈(王世孫嬪)과 내명부(內命婦)인 화유(和柔)·화녕(和寧)·화길(和吉)·청연(淸衍)·청선(淸璿)으로 거행할 일을 분부(分付)하라. 치사(致詞)는 옛 해에 영빈(寧嬪)이 명부(命婦)의 반수(班首)가 되었기 때문에 있었으나, 이번은 왕세손빈의 치사 외에는 거행하지 말고 치사의 작(爵)은 왕세손의 예(例)에 의하여 거행하며, 나머지 다섯 ‘작’은 명부 다섯 사람에게 분배(分排)하도록 일체 분부하라."
하였다.
7월 10일 무인
대신(大臣)과 비국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번 호남 봉명 선전관(湖南奉命宣傳官)이 중로(中路)에서 작고(作故)하였는데, 해당 도신(道臣)이, 영암 군수(靈巖郡守) 윤면구(尹勉矩)가 대신 표신(標信)을 받은 것을 미안하다고 이르면서 품처(稟處)하기를 장계(狀啓)로 청하였습니다. 막중한 표신을 받들어 가질 사람이 없으면 지방관이 도신(道臣)을 경유하여 싸서 받들고 상경(上京)하는 것이 체통을 얻었다고 이를 만합니다. 도신의 청한 바를 청컨대 안서(安徐)122)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또 제도(諸道)의 습조(習操)와 합조(合操)를 아울러 예(例)에 의하여 거행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안주(安州)의 청천강(淸川江)을 소준(疏濬)123) 한 역사(役事)로써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장오(李章吾)에게 숙마(熟馬)를 하사하였으니, 홍봉한이 아뢴 때문이었다.
우의정(右議政) 서지수(徐志修)가 또 사직 상소를 올리니, 임금이 온화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함께 오라고 명하자, 서지수가 명을 받들고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손을 잡고 돈독히 권면(勸勉)하였다. 서지수가 먼저 기거(起擧)를 삼갈 것을 진달하고, 또 사령(辭令)과 희노(喜怒)를 마땅히 그 절도(節度)에 맞고 맞지 아니함을 자세히 살필 것을 진달하였으며, 끝으로 청렴한 관리를 장려해 쓰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깊이 유념하겠다.’는 하교가 있었다.
7월 11일 기묘
삼공(三公)·육경(六卿)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경과(慶科)의 일을 우러러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우의정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우의정 서지수(徐志修)가 말하기를,
"이 지나간 역사에 드물게 있는 경사를 당하여 어찌 과거(科擧)를 베풀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전례(前例)를 상고해 보면 평복(平復)한 뒤에 증광시(增廣試)를 설행하는 법이 있는데, 신등이 전례를 알지 못하고 정시(庭試)를 베풀 것으로 우러러 청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의 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정시라 하더라도 설행하지 아니하려고 한다."
하였다. 서지수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모든 일에 이미 절약해 줄이는 뜻을 보였으니, 비록 과거(科擧)의 일이라도 그 수(數)를 줄이면 이것도 절약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여러 신하를 특별히 부르셨으니, 옛일로써 말하면 바로 송나라 인종(仁宗)이 천장각(天章閣)에서 부필(富弼)·범중엄(范仲淹) 등을 불러서 천하의 이병(利病)124) 을 조목(條目)으로 진달하게 한 것입니다. 그때 범중엄 등이 진달한 가운데 첫째 조건의 일은 요행(僥倖)을 막는 것이었는데, 요행은 곧 안에서 은택(恩澤)을 내리는 것과 조정 신하가 아들을 임명하는 폐단입니다. 근래에 요행의 폐단이 없지 아니하기 때문에 인심이 안정하지 아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서지수가 말하기를,
"작년에 작(爵)을 받으실 때에 신이 아악(雅樂)에서 번음(繁音)을 금할 일을 우러러 진달하였는데, ‘여민락(與民樂)’은 이름이 매우 좋으니, 이번 진연(進宴)에는 이 곡(曲)으로 무절(舞節)을 삼으면 가히 화평한 음악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서지수가 또 말하기를,
"신이 호조 판서로 있을 때에 ‘나인(內人)에 궐(闕)125) 이 있으면 수본(手本)을 해조(該曹)에 내리라.’는 뜻으로써 특별히 중관(中官)에게 하교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거룩한 일입니다. 그 뒤에 두어 달 동안은 중관이 두어 사람을 수본으로 하였고 그 뒤에는 다시 수본이 없었으니, 무릇 일의 해이함이 이같은 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경이 오늘날에 주달할 일이 아니다. 살아 있는 궁인(宮人)을 어찌 궐(闕)을 만들 수 있는가?"
하였다. 서지수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시니, 신은 감격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예전에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다스림이 선제(宣帝)만 못하나, 문제는 말을 듣고 받아들이기를 잘하여 혹은 연(輦)을 멈추고 간(諫)함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천하가 용동(聳動)하여 문제를 선제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임금은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도리가 더욱 중합니다. 이같은 일은 뭇 신하가 비록 진달할지라도 위에서 유시(諭示)하면 뭇 신하들이 어찌 환히 밝게 알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제(宣帝)는 좁아서 진실로 논할 것이 없고, 문제(文帝)도 논할 만한 것이 많으나 신부인(愼夫人)의 옷이 땅에 끌리지 않게 하였으니, 그 검소한 덕을 숭상할 만하다."
하였다. 이조 판서 조명정(趙明鼎)이, 사람은 많고 벼슬자리는 좁아서 비록 쓸 만한 인재가 있더라도 골라서 쓸 길이 전혀 없다고 하면서 여러 대신(大臣)에게 하순(下詢)하여 처리하기를 청하였는데, 홍봉한이 말하기를,
"예전에 있어서는 바야흐로 유읍(腴邑)의 외직을 맡았거나 혹은 가까스로 외임(外任)에서 체차된 자는 감히 제택(第宅)을 짓고 전원(田園)을 경영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으로 보면 이를 범하는 자가 처음부터 죄에 저촉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또 간능(榦能)의 일컬음이 있어 그 칭양(稱揚)하고 감싸줌이 도리어 간소(簡素)하고 청렴한 자보다 앞섰으니, 풍속이 어찌 퇴폐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백성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한때의 전관(銓官)이 비록 공도(公道)를 넓히려고 할지라도 또한 어찌 그 사이에 손을 쓸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좌의정 윤동도(尹東度)는 말하기를,
"지금의 중요한 방법은 수령(守令)을 고르고 벼슬길을 맑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며, 서지수는 말하기를,
"허다한 쌓이고 막힌 사람을 마침내 사람마다 소통(疏通)하게 할 수 없으니, 오직 그 가운데에서 어진 자를 뽑아 쓰고 그 다음은 여러 사람이 가장 억울하다고 일컫는 자를 뽑아서 차례차례로 잘 골라 쓰면, 한 사람을 써서 천백 사람이 스스로 억울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니, 엄체(淹滯)를 진발(振拔)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한 바가 여기에 있다. 우의정이 오늘 아뢴 가운데, ‘이번 정시(庭試)는 어찌 전일에 비할 것인가’라고 이른 것은 크게 살피지 아니한 것이다. 그 마음은 순일(純一)하여 다른 뜻이 없겠으나, 그 말은 대단히 한심하다. 우의정 서지수를 파직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우의정의 마음은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그 마음을 안다."
하였다. 윤동도가 말하기를,
"나라에서 정승을 두는 일이 가볍지 아니한데, 이미 그 마음에 다른 뜻이 없음을 알았으면 다시 생각하시는 도리가 있음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한 바가 이에 있으니, 경 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 나는 마땅히 정시(庭試)를 실행하지 아니할 것이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제 우의정의 망발(妄發)로 인하여 과거(科擧)의 일을 만약 지체한다면, 신 등의 억울함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경과(慶科)를 설행하면, 일이 널리 사람을 뽑는 것이 마땅한데, 우의정이 정시의 수(數)를 감하라는 말은 지극히 괴이하다."
하였다. 형조에 명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7월 12일 경진
승지가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지수는〉 삼대(三代)가 정승이 되었으니, 드물게 있는 일이다. 그 조(祖)와 그 부(父)의 아들로서 안상(安詳)하고 단아(端雅)함이 가상한데, 지금에 이르러 제배(除拜)하지 아니하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비록 그러하지마는, 변화하기 어려운 것은 기품(氣稟)이다. 어제 그 사은(謝恩)을 받았는데 이제 갑자기 처분하는 것은 내가 어찌 즐겨서 하겠는가? 내가 어찌 즐겨서 하겠는가? 신서(臣庶)는 알지 못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한번 연석(筵席)에 올라 뜻을 거스림이 있어 그러한 것인가?’ 할 것이다. 경과(慶科)와 정시(庭試)를 그 임금은 비록 경중(輕重)을 비교한다고 하더라도 그 신하는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영상과 좌상은 전례(前例)를 본 뒤에 두려워하면서 다시 청하였으니 신하의 분의가 당연하겠으나, ‘비록 정시를 행할지라도 많이 뽑지 말라.’고 하였으니, 한 자리에서 세 정승의 마음이 어찌하여 다른가?"
하였다.
7월 13일 신사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 내연(內宴)에 좌차(座次)를 북벽(北壁)에다 전례에 의하여 자리를 배설(排設)하고, 시각이 되면 중엄(中嚴)과 외판(外辦)은 보통 의식과 같다. 왕비(王妃)가 자리에 오를 때에 악(樂)을 시작하고 봉보(奉寶)가 앞에서 인도하여 자리에 오른 뒤에 악을 그친다. 산선(繖扇)·시위(侍衛)는 보통 의식과 같다. 왕세손(王世孫)이 먼저 배위(拜位)에 나아가고 왕세손빈(王世孫嬪)도 배위에 나아간다.
‘국궁(鞠躬)·사배(四拜)·흥(興)·평신(平身)’을 창(唱)하면, 왕세손과 왕세손빈이 국궁하고 악(樂)을 시작하며, 사배·흥·평신하면 악을 그친다. 여령(女伶) 두 사람이 나아가서 정문(正門) 밖에 당하여 새로 지은 악장(樂章)을 먼저 창(唱)하고 뒤에 찬(饌)을 올리면 악을 시작한다. 휘건(揮巾)을 올리면 악을 시작하고 올리기를 마치면 악을 그친다. 꽃을 올리면 악을 시작하고 올리기를 마치면 악을 그친다.
전빈(典賓)이 왕세손을 인도하여 동문(東門)을 거쳐 수정(壽亭)에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서게 하고, 상식(尙食)이 치사(致詞)하는 잔(盞)을 왕세손에게 올리면 왕세손이 잔을 받아 자리 앞에 나아가 꿇어앉고 상궁(尙宮)이 앞에서 받들어 자리 앞에 놓는다. 왕비(王妃)가 잔을 받으면 악을 시작하고 마시기를 마치면 악을 그친다. 왕세손이 부복(俯伏)하면 상궁(尙宮)이 나아가 잔을 받아 왕세손에게 올리고, 왕세손이 잔을 받아서 상식(尙食)에게 주어 수정(壽亭)에 놓는다. 배위(拜位)에 나아가서 ‘궤(跪)’를 창하면, 왕세손이 꿇어앉는다. 상의(尙儀)가 나아가 자리 앞에 당하여 치사(致詞)를 읽는다. 읽기를 마치면 상궁이 꿇어앉아 전교(傳敎)를 청한다. 동쪽 계단 위에서 서쪽을 향해 서서 전교하기를, ‘옛날 거룩한 행사에 따라서 그 술잔을 올린다.’고 하면, 상식(尙食)이 만두(饅頭)를 올린다. ‘부복·흥·사배·흥·평신’을 창하면 왕세손이 부복하고 악을 시작하며, 흥·사배·흥·평신하면 악을 그친다. 전빈(典賓)이 왕세손을 인도하여 동문을 거쳐 좌석에 나아간다.
전빈이 왕세손빈을 인도하여 서문(西門)을 거쳐 수정(壽亭)에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서게 한다. 상식(尙食)이 치사(致詞)하는 잔을 왕세손빈에게 올리면, 왕세손빈이 잔을 받아 자리 앞에 나아가 꿇어앉고 상궁이 앞에서 받들어 자리 앞에 놓는다. 왕비가 잔을 받으면 악을 시작하고 마시기를 마치면 악을 그친다. 왕세손빈이 부복(俯伏)하고 상궁이 나아가 잔을 받아 왕세손빈에게 올리면, 왕세손빈이 받아서 상식에게 주어 수정(壽亭)에 놓게 한다. 배위(拜位)에 나아가서 ‘궤’를 창하면, 왕세손빈이 꿇어앉는다. 상의(尙儀)가 나아가 자리 앞에 당하여 치사(致詞)를 읽고, 마치면 상궁이 꿇어앉아 전교(傳敎)를 청한다. 서쪽 계단 위에서 동쪽을 향해 서서 전교하기를, ‘옛날 거룩한 행사에 따라 그 술잔을 올린다.’고 하면 상식이 다면(茶麵)을 올린다. ‘부복·흥·사배·흥·평신’을 창하면, 왕세손빈이 부복하고 악을 시작하며, 흥·사배·흥·평신하면 악을 그친다. 전빈(典賓)이 왕세손빈을 인도하여 서문을 거쳐 좌석에 나아가게 한다.
전찬(典饌)이 왕세손에게 찬(饌)을 올리고 전찬이 왕세손빈에게 찬을 올리며, 전찬이 왕세손에게 꽃을 올리고 전찬이 왕세손빈에게 꽃을 올린다. 전빈(典賓)이 명부(命婦)를 인도하여 함께 들어와서 서쪽 계단 배위(拜位)에 나아가게 하고, ‘국궁·사배·흥·평신’을 창하면, 명부가 국궁하고 악을 시작하며, 사배·흥·평신하면 악을 그친다. 전빈이 명부를 인도하여 자리에 나아가 명부에게 찬을 공궤(供饋)하고 꽃을 흩는다. 전빈이 명부를 인도하여 서문을 거쳐 수정(壽亭)에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서게 한다. 상식이 첫째 잔을 명부에게 주면 명부가 받아서 자리 앞에 나아가 꿇어앉고 상궁이 앞에서 잔을 받들어 자리 앞에 놓는다. 왕비가 잔을 받으면 악을 시작하고 첫째 정재(呈才)를 올린다. 명부가 잔을 받아서 다시 수정에 놓고 곧 자리에 나아가면 상식이 초미(初味)를 올린다. 전찬이 왕세손과 왕세손빈에게 탕(湯)을 올리고 집사(執事)가 명부에게 탕을 공궤하며, 올리기를 마치면 악을 그친다. 치사잔(致詞盞) 외에 반수(班首)의 치사는 없다. 무릇 잔과 찬을 올릴 때에는 왕세손 이하가 모두 자리 뒤에 부복(俯伏)하고, 올리기를 마치면 자리에 나아가며, 그 뒤에는 모두 이를 모방한다.
둘째 잔에서 다섯째 잔까지 잔을 올리고 찬을 올릴 때의 모든 절차는 첫째 잔과 같고 정재(呈才)는 미수(味數)에 따라 올린다. 다섯 잔을 마치면 곧 처용무(處容舞)를 올리고 악이 그친다. 상식이 나아가 찬을 거두고 전찬(典饌)은 왕세손과 왕세손빈의 찬을 거두며, 집사는 명부의 찬을 거둔다. ‘가기(可起)’라고 창하면, 왕세손·왕세손빈이 함께 배위(拜位)에 나아가고 명부도 배위에 나아간다. ‘국궁·사배·흥·평신’을 창하면, 왕세손과 왕세손빈 및 명부가 모두 국궁하고 악을 시작하며, 사배·흥·평신하면 상궁이 나아가 자리 앞에 당하여 꿇어앉아서 예(禮)를 마쳤다고 아뢴다. 왕비가 자리에서 내려오면 악을 시작하고 대내(大內)로 돌아가면 악을 그친다. 전빈이 왕세손과 왕세손빈 및 명부를 인도하여 나간다."
하였다.
7월 14일 임오
임금이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지평 이종영(李宗榮)이 상소하여, ‘제관(祭官)을 초계(抄啓)하여 녹(祿)을 주고 말[馬]을 주며, 내직(內職) 가운데 30과(窠)는 문·음·무(文蔭武) 복직(復職)의 계제(階梯)로 삼으며, 외직(外職) 가운데 변지(邊地)와 묘천(廟薦)126) 을 제외하고 30삭(朔) 과(窠)로 만들어서 문·음·무를 교체(交替)하게 하고, 각영 편비(各營褊裨) 가운데 참하 무변(參下武弁)127) 을 차송(差送)하여 군무(軍務)를 알도록 할 것’을 청하였는데, ‘조목을 진달한 것이 경륜(經綸)의 뜻이 없지 아니하니 깊이 가상하다.’는 말로써 비답(批答)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강필리(姜必履)의 장계(狀啓)에 의하면, ‘고부 차왜(告訃差倭)가 지금 이미 귀순(歸順)하였는데, 구구도주(舊舊島主)의 유물(遺物)을 뽑아 내고 단고부(單告訃)를 시도주(時島主)의 서계(書契)로 개찬(改撰)하여 왔으니 변경의 근심을 진압하고 먼 지방 사람을 회유(懷柔)하는 도리로써 헤아리건대 접견을 허락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는데, 도서(圖書)가 없는 유물은 비례(非禮)가 크고 무의(無義)가 심합니다. 그러므로 본부(本府)128) 에서 줄곧 퇴각하였고 묘당에서 번거롭게 계문하지 못하게 한 것은 사체를 존중하고 약속을 엄하게 하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지금은 이미 그 서계(書契)를 고쳐서 단고부(單告訃)로 변하였은즉, 성조(聖朝)의 무유(撫綏)하는 도리에 있어서 그 회례(回禮)를 허락하는 것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하니, 장청(狀請)에 의하여 시행하고 특송(特送)에 비하여 조금 후하게 하는 뜻으로 호조·예조 및 해당 고을에 분부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이를 윤허하고, 본부(本府)에서 사리에 의거해 쟁집하였다 하여 특별히 말[馬]을 내려 주고 임역(任譯)에게도 시상(施賞)하게 하였다. 사간(司諫) 이육(李堉)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7월 15일 계미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가 호조미(戶曹米) 1백 석, 전미(田米) 40석, 병조목(兵曹木) 10동(同)을 진연청(進宴廳)에 획급(劃給)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쌀 90석, 전미 40석, 목(木)129) 10동만 획급하기를 허락하였다.
7월 16일 갑신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연(進宴) 때 선상(選上)130) 을 엄금하고, 당물(唐物)131) 로 옷을 지어 입는 자는 일체 사치를 힘쓰지 못하게 하며, 또한 그 지아비를 매질[笞]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지평 이종영(李宗榮)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제관(祭官)을 고르고 엄체(淹滯)를 떨치게 할 일로써 다시 전의 말을 거듭하여 누누(縷縷)이 진달하니,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인하여 나이가 60세가 지난 자는 대축(大祝)에 차출(差出)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7월 17일 을유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승지(都承旨) 홍낙성(洪樂性)이 말하기를,
"어제 어제(御製)하실 때에 문자(文字)를 물으셨는데 신 등이 재식(才識)이 둔하고 거칠어서 능히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으니, 이제까지 황송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그때 내시(內侍)의 대답은 비록 물으심으로 인하였다 하더라도 진실로 후일의 폐단에 관계가 있으며 조정 신하를 가볍게 여기는 염려가 없지 아니하니, 책을 가지고 들어와서 상고해 보는 것만 같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아뢴 바가 진실로 옳으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7월 19일 정해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술잔[爵]을 받을 때에 인삼차[蔘茶]를 올릴 것을 청하니, 생강차로써 인삼차를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7월 20일 무자
임금이 효장묘(孝章廟)에 거둥하였다가 환궁(還宮)할 때에 의열궁(義烈宮)에 역림(歷臨)하였다.
이미(李瀰)·홍술해(洪述海)를 승지로 삼았다.
7월 21일 기축
황경원(黃景源)을 이조 참판으로, 권도(權噵)를 이조 참의로, 안윤행(安允行)을 대사헌으로, 이해중(李海重)을 대사간으로, 정창성(鄭昌聖)을 부응교로, 임성(任珹)을 보덕으로, 한익모(韓翼謨)를 공조 판서로, 김원택(金元澤)을 판윤으로, 이창수(李昌壽)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7월 23일 신묘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김원택(金元澤)은 원임 대신(原任大臣)의 아버지인데 대질(大耋)132) 을 누리고 상경(上卿)에 이르렀으니, 조가(朝家)에서 직사(職事)를 책임지울 필요가 없습니다. 사송(詞訟)은 더욱 어려운데 판윤을 헛되이 띠고 있으니, 청컨대 본직을 체차(遞差)하소서."
하매, 이를 윤허하였으니, 김원택은 김상복(金相福)의 아버지이다.
대신(大臣)과 비국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어머니의 병으로써 〈사임하기를〉 간절히 진달하니, 임금이 내국 도제거(內局都提擧)의 사임을 허락하고 좌의정 윤동도(尹東度)를 내국 도제거로 삼았다. 홍봉한이 또 아우 홍인한(洪麟漢)도 번임(藩任)133) 에 있음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은 효(孝)를 먼저 하니, 경기 감사(京畿監司) 홍인한도 체차하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특별히 도승지(都承旨) 한광회(韓光會)를 경기 감사로 제수하여 오늘 교귀(交龜)134) 하기를 명하고 구(舊) 감사(監司)를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정존겸(鄭存謙)을 승지로 삼았다.
7월 24일 임진
강원도 암행 어사(江原道暗行御史) 홍억(洪檍)이 입시하니, 서계(書啓)를 읽으라 명하였다. 회양 부사(淮陽府使) 김광국(金光國)이 비루(鄙陋)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많이 행하였다는 데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무상(無狀)하다. 저번에 회양에 권일형(權一衡)을 특별히 제수하여 겨우 소생하게 하였는데, 김광국은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이런 야비한 정사를 행하여 이 백성들이 고통을 받음을 들으니, 아픔이 몸에 있는 것과 같다. 해부(該府)135) 로 하여금 중벌에 따라 감처(勘處)하게 하라."
하고, 입시(入侍)한 승지 이재협(李在協)을 특별히 제수하여 회양 부사로 삼고, 서계(書啓) 가운데 ‘모년(暮年)’ 두 글자는 신하로서 감히 바로 쓸 바가 아니라 하여 어사(御史) 홍억(洪檍)에게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25일 계사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명일 의열궁(義烈宮) 대상(大祥)에 친림(親臨)하는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윤동도(尹東度)가, ‘지극히 더울 때에 거둥하는 것은 정섭(靜攝)에 방해로울까 염려스럽다’는 뜻으로써 아뢰니, 임금이, ‘대신이 잘못이다.’라는 하교가 있었다.
7월 26일 갑오
임금이 의열궁(義烈宮)에 거둥하였다. 왕세손(王世孫)이 수가(隨駕)하여 곡(哭)하며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문학(文學) 1원(員)과 시직(侍直) 1원에게 혜빈궁(惠嬪宮)을 모시고 오라고 명하였다. 연화문(延和門)의 입직군(入直軍) 60명을 전후 패군(前後牌軍)으로 삼고, 하교하기를,
"내가 비록 늙었으나, 어찌 한 후궁[後庭]을 위하여 이를 하겠는가? 비록 그렇더라도 여섯 달을 추억(追憶)하면 어찌 오늘날에 이로 인하여 세손의 행례(行禮)를 볼 것을 뜻하였겠는가? 이는 진실로 만만(萬萬) 뜻밖이다. 의열원(義烈園)에는 일찍이 이미 임(臨)하였었고, 의열궁은 이제 입묘(入廟)함을 본다. 궁(宮)의 칭호와 원(園)의 칭호는 전에 이미 하교하였으니, 이 뒤에 의물(儀物)과 상설(象設)은 장래에 마땅히 차례로 할 일을 오늘 하교하여 한 통(通)을 써서 《의궤(儀軌)》의 예(例)와 같이 의조(儀曹)136) 에 써서 두게 하라."
하였다. 입정(入庭)한 승지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라고 명하였다.
7월 27일 을미
전 우의정 서지수(徐志修)를 서용(敍用)하고 판부사 김치인(金致仁)을 다시 우의정에 제배(除拜)하라고 명하였다.
심이지(沈履之)를 승지로 삼았다.
김상철(金尙喆)을 판윤으로, 이최중(李最中)을 공조 참판으로, 유언민(兪彦民)을 이조 참의로, 임준(任㻐)을 대사간으로, 이영중(李永中)을 장령으로, 정창순(鄭昌順)을 부교리로, 서지수(徐志修)를 판부사로 삼았다.
7월 29일 정유
임금이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祗迎)하였다.
우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사직 상소를 올리니, ‘저번에 사면(辭免)을 허락한 것은 비록 선경(先卿)의 고사(故事)를 이루려 한 것이지마는 마음에 그윽이 애석하게 여겼다.’고 비답하였다.
수찬(修撰) 윤홍렬(尹弘烈)을 삼수부(三水府)에, 부수찬 김상묵(金尙默)을 갑산부(甲山府)에 귀양보내고 모두 삼배도(三倍道)137) 하여 압송(押送)하게 하였으니, 윤홍렬은 즉시 응명(膺命)하지 아니하고 김상묵은 시골에 있다고 일컬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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