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7권, 영조 42년 1766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1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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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무진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방포(放砲)를 시험하였다.

 

9월 2일 기사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시사(試射)·시방(試放)한 것을 반상(頒賞)하였다.

 

지평 이지승(李趾承)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듣건대 옛 사람은 연음(燕飮)할 때에 반드시 경계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임금의 한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원이 되니, 엎드려 원하건대 더욱 함양(涵養)을 더하소서. 언로(言路)가 열리고 막힘이 진실로 나라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에 관계되니, 더욱 간하는 말을 듣고 받아들이기를 넓히소서. 관(官)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는 것은 천공(天工)164)   아님이 없으니, 더욱 어려워하고 삼감을 더하소서. 나라의 재용(財用)은 백성의 생명이 매인 바이니, 더욱 절약하기를 힘쓰소서. 돌아보건대 지금 문손(文孫)165)  의 나이가 바야흐로 젊어 총명이 날로 열리니, 반드시 몸으로 행하여 가르치는 뜻을 생각하시어 자손을 편안히 하는 좋은 계책을 극진히 하소서."
하였고, 장령 안겸제(安兼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태평[豊豫]할 시기에 마땅히 감손(減損)하는 절차를 생각할 것이며, 안락한 처지에서는 마땅히 위태로움을 염려하여야 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중화(中和)의 덕(德)을 더욱 힘쓰시어 나라가 영구히 편안하기를 기원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신이 또 삼가 보건대 세손 저하(世孫邸下)는 덕성(德性)이 이미 이루어졌고 이치를 살핌이 이미 익숙하시니, 안일함을 경계하는 일을 삼가지 않을 수 없으며 타이르고 가르치는 방법이 더욱 시급합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온 지 5일 만에 비답(批答)이 없이 도로 내렸는데, 동부승지(同副承旨) 윤면동(尹冕東)이, 대간(臺諫)의 상소가 비답을 받지 못하였다 하여 아뢰매, 비로소 ‘마음으로 가상히 여기니 어찌 유의(留意)하지 아니하겠는가?’라는 비답을 내렸으나, 긴요하지 아니한 장주(章奏)를 받아들였다 하여 해당 승지를 체차(遞差)하고 이 뒤로는 일체 엄금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대간의 상소가 끊어져서 진실로 긴요하지 아니한 데에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였고, 엄한 하교가 내리자 승정원에서 받아들이는 거조가 없었으니, 승정원의 규례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다.

 

9월 3일 경오

임준(任㻐)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승지가 입시(入侍)하였다. 어필(御筆)로 여덟 글자를 써서 내려 승지에게 정서(淨書)하여 용정(龍亭)에 간직하라 명하고, 고취(鼓吹)·전도(前導)로 예조(禮曹)에 모셔 가도록 하여 여러 늙은이에게 선유(宣諭)하고, 해당 낭관(郞官)으로 더불어 연회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그 가운데 나이가 80이 된 사람에게는 면주(綿紬) 1 필씩 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사민(四民)을 불러들이고 차등을 두어 쌀을 내려 주었다. 잔치를 감독하는 승지가, ‘잔치에 참석한 여러 늙은이가 각자 배부르게 먹고 바야흐로 문밖에 일제히 이르러 절하고 축수하면서 뛰고 춤춘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사민(四民)을 구휼하는 정사는 어찌 한갓 주(周)나라를 본받는 것이겠는가? 바로 우리 조가(朝家)의 법이다. 하물며 옛 양로연(養老宴)에 이미 유시(諭示)하였었고, 《오례의(五禮儀)》에도 또한 이르기를, ‘뭇 늙은이가 지팡이를 짚고 들어온다.’고 하였다. 갑자년166)  에 궤장(几杖)을 받고 연회를 마치자 곧 그때 제조(提調)와 예조 판서로 하여금 내가 받은 음식과 전정 악고(殿庭樂鼓)를 가지고 기사(耆社)의 여러 신하와 더불어 같이 기영관(耆英館)에 가서 잔치를 베풀고 오게 하였다. 그때 자성(慈聖)께서 내전(內殿)에 임하여 보신 것이 황연(怳然)히 오늘과 같으니, 옛일과 부합(符合)함이 또한 어찌 우연하겠는가?"
하고, 여러 늙은이들에게 관현악(管絃樂)을 내려서 그 집에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의금부와 형조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고, 3일을 한정하여 승정원과 각사(各司)에서 패(牌)를 쓰지 말라고 명하였다.

 

9월 4일 신미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한림 추소시(翰林追召試)를 설행하여 강흔(姜俒) 한 사람을 뽑았다.

 

9월 5일 임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김치인(金致仁)과 예조 판서 이사관(李思觀)이 탄일(誕日)에 진하(陳賀)할 것을 우러러 청하고 여러 신하가 여러 번 잇따라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사정이 다름이 있어서 40년을 허락하지 아니한 일을 지금 어찌 허락하겠는가?"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 신회(申晦)의 장계(狀啓)에 의하면, ‘도신(道臣)의 행차에 수신(帥臣)이 5리(里) 길에 나와서 대기(待期)하였다가 교서(敎書)·유서(諭書)를 지영(祗迎)하도록 새로 정한 규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순행해 지나갈 때에 병사(兵使) 이장오(李章吾)가 병을 일컬으며 5리 길에 나오지 아니하였고 공장(公狀)도 와서 올리지 않았으니, 체통에 관계되는 바로서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교서·유서의 지영(祗迎)은 이미 특교에 정한 규식이 있는데, 병사가 예(禮)를 폐하고 나오지 않았음은 대단히 미안스런 일이나 이는 오히려 병을 칭탁할 수 있거니와, 공장(公狀)을 올리지 않은 데 이르러서는 체통이 있는 바이니 신칙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병사 이장오를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대사헌 신위(申暐)가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어제 상소를 받아들인 승지를 체차(遞差)하라는 명은 간언을 널리 받아들임에 흠이 있고 또한 효(孝)의 도리에 손상이 있다는 것으로써 소회(所懷)를 진달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이는 비록 그대로 할 것이나, 어버이를 위하는 외에는 모든 사직하는 글을 〈금지함은〉 바야흐로 정섭(靜攝)하는 때를 당하여 이것도 또한 간략함으로써 번거로움을 제어하는 방법인데 어찌 금함을 풀겠는가?"
하였다.

 

윤시동(尹蓍東)을 대사간으로, 김재순(金載順)을 집의로, 이재간(李在簡)을 사간으로, 김재천(金載天)을 헌납으로, 신일청(申一淸)을 장령으로, 유성모(柳成模)·최광벽(崔光璧)을 지평으로, 이명빈(李命彬)·강지환(姜趾煥)을 정언으로, 정존겸(鄭存謙)을 부제학으로, 박성원(朴聖源)을 동의금으로 삼았다.

 

9월 6일 계유

영부사(領府事) 윤동도(尹東度), 판부사(判府事) 김상복(金相福), 우의정 김치인(金致仁), 판부사 서지수(徐志修), 예조 판서 이사관(李思觀), 참판 윤동섬(尹東暹)이 청대(請對)하니,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의 청대함이 신하의 분의(分義)는 그러하나, 나의 괴로운 마음은 금년에 더욱 깊다. 내 마음에 개연(慨然)스러운 것을 지금 유시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예(禮)를 행한 뒤에 지금 며칠이 지났는가? 아! 조선은 시임(時任)만 있는데, 이제 이 일이 있은 연후에 〈와서〉 보기를 요구하는가? 나의 생각에는, 조선은 원임(原任)이 없다고 여긴다. 원임 여러 대신(大臣)을 모두 서명(胥命)하게 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합문(閤門)에 나아가서 여섯 번 계달하니, 사교(辭敎)가 점점 엄하여 군함(軍銜)을 띠고 시골에 있는 사람을 아울러 금추(禁推)하라고 명하고, 서울에 있는 여러 대관(臺官)들을 아울러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인하여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는 명을 내렸다. 이경(二更)에 비로소 내국(內局)에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였는데, 탕제(湯劑)는 들지 아니하였고,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유수(柳脩)를 승지로 삼았다.

 

서명선(徐命善)을 폄체(貶遞)하여 풍산 만호(豊山萬戶)로 삼았고 조준(趙㻐)을 고(古) 풍산 만호로 삼았으니, 관직(館職)을 즉시 숙사(肅謝)167)  하지 아니한 때문이었다. 12일 뒤에 도로 정지하였다.

 

9월 7일 갑술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는데, 환궁(還宮)할 시각에 하교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옥당(玉堂)이 입대(入對)하기를 청하니, 아울러 체차(遞差)할 것을 명하였다. 협련군(挾輦軍)의 교체(交替)와 경희궁(慶熙宮) 궐문(闕門)에 자물쇠를 내리는 일로 표신(標信)을 내려서 승지 임준(任㻐)·유수(柳脩) 등이 작납(繳納)하였는데, 승전색 중관(承傳色中官)이 표신을 두고 들어갈려고 하자 유수가 꾸짖어 도로 반납하게 하였기 때문에 유수는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지우고 여러 승지는 모두 체차(遞差)할 것을 명하였으며, 임준과 유수는 의금부에 내려 처분을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무신(武臣) 이달해(李達海)를 승지로 제수하였는데, 가주서(假注書) 임희우(林希雨)가 이달해는 초토(草土)168)  에 있다고 아뢰니, 내승(內乘) 정여증(鄭與曾), 선전관(宣傳官) 이경무(李敬懋)를 승지로 제수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을 모두 면직하라 명하였으며, 내국 제조(內局提調) 이창수(李昌壽)를 체차(遞差)하고 박상덕(朴相德)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9월 8일 을해

2품 이상과 육조(六曹)에서 문안하니, 답하기를,
"대신이 없는데 조정을 위하여 문안하는가? 조신(朝臣)이 모두 보니, 문안을 그치고 지영(祉迎)도 그치라."
하였다.

 

9월 9일 병자

회가(回駕)할 때에 의열묘(義烈廟)에 역림(歷臨)하였다가 초경(初更)에 환궁(還宮)하였다.

 

이유수(李惟秀)·이성원(李性源)·엄인(嚴璘)·박사해(朴師海)·홍지해(洪趾海)를 승지로 삼았다.

 

9월 12일 기묘

전(前) 우의정 김치인(金致仁)을 좌의정에 제배(除拜)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을 영부사(領府事)로, 김치인(金致仁)을 내국 도제거(內局都提擧)로 삼았다.

 

9월 13일 경진

대전(大殿)의 탄일(誕日)이므로, 정원·옥당(玉堂), 조정 2품 이상, 육조 당상관(六曹堂上官)·봉조하(奉朝賀)가 문안하였다.

 

9월 14일 신사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평안 감사(平安監司) 신회(申晦)의 분등(分等) 장계(狀啓)로 인하여 우심(尤甚)·지차(之次)의 고을은 3분의 1을 대봉(代捧)하고, 우심한 고을의 성향곡(城餉穀)은 3분의 1을 받아서 본읍(本邑)에 머물러 두며, 우심한 고을의 구 환곡(舊還穀)은 절반을 정봉(停捧)할 것을 청하였으며, 충청 감사 이중호(李重祜)의 장계로 인하여 아병 습조(牙兵習操)를 정지할 것을 청하니, 아울러 윤허하였다.

 

임준(任㻐)을 청도군(淸道郡)에, 유수(柳脩)를 고산현(高山縣)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장오(李長吾)의 직(職)을 잉임하라고 명하였다. 이장오는 척리(戚里)169)  로서 갑자기 장임(將任)을 지냈고 또 서곤(西閫)170)  에 제수되었는데, 청천강(淸川江)을 막으려고 하여 병영(兵營)의 재물 여러 만 냥[鉅萬]을 허비하였으니, 인심이 놀라고 분통(憤痛)해 하였다. 도신(道臣)에게 실례함으로 인하여 대신(大臣)이 연중(筵中)에 아뢰어 파직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잉임하라고 명한 것이다.

 

김종정(金鍾正)을 대사헌으로, 이복상(李復祥)을 대사간으로, 이진규(李晉圭)를 집의로, 이행원(李行源)을 사간으로, 이장로(李長老)를 지평으로, 유운우(柳雲羽)를 정언으로, 원경렴(元景濂)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9월 15일 임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좌승지(左承旨) 정여증(鄭與曾)을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도승지(都承旨) 이유수(李惟秀)는 품계가 가선(嘉善)인데 한번 도승지를 지내면 자리를 내리는 예(例)가 없고, 무승지(武承旨)는 비록 품계가 높을지라도 좌목(座目)에 따라 도승지에 오르는 예가 없기 때문이었다.

 

임준(任㻐)과 유수(柳脩)를 석방하였다.

 

9월 16일 계미

전 영부사(領府事) 윤동도(尹東度), 전 판부사(判府事) 김상복(金相福)·서지수(徐志修)를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조영순(趙榮順)을 부제학으로, 정존겸(鄭存謙)을 대사헌으로, 윤승렬(尹承烈)을 필선으로, 김종정(金鍾正)을 경기 감사로, 윤동도(尹東度)를 영부사로, 김상복(金相福)·서지수(徐志修)를 판부사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시(入侍)하였다.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한광회(韓光會)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경기 감영(京畿監營)의 표하군(標下軍) 원수(元數)가 1백 90명에 불과한데, 장계(狀啓) 가운데 과녁을 맞추어 응당 시상(施賞)할 자가 자그마치 1백 80여 명에 이르렀고, 친비(親裨)의 참사(參射)도 전교(傳敎)의 밖에 매었는데 오중(五中)·사중(四中)·삼중(三中)·사분(四分)이 낭자(狼藉)하니, 청컨대 도신(道臣)을 파직하고, 원장계(元狀啓)를 물시(勿施)하며, 새 도신이 도계(到界)171)  하기를 기다려서 다시 시사(試射)·시방(試放)하여 장문(狀聞)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예조(禮曹)에서 9월 22일 왕세손(王世孫)의 탄신(誕辰) 하례를 계품(啓稟)하니, 권정(權停)을 명하였다.

 

9월 20일 정해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문신(文臣)의 삭시사(朔試射)를 건명문(建明門)에서 행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여 《소학(小學)》의 사어장(射御章)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80을 바라보는 금년에 몇 달을 오래 폐하였다가 이제 법강(法講)을 여니, 이것도 뜻밖이다."
하니, 지사(知事) 황경원(黃景源)이 말하기를,
"사람을 가르치는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미 태교(胎敎)를 말하였고, 또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 장(章)은 가장 체인(體認)할 곳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년은 바로 내가 13세에 스승에게 나아간 해이다."
하고, 어필(御筆)로 네 글자 두 글귀[四字二句]를 써서 내려, 여러 신하에게 화답(和答)해 올리라고 명하고 인하여 찬(饌)을 내려 주었다.

 

9월 21일 무자

3일 동안 감선(減膳)하라고 명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거두어 간직하는 절후에 천둥하고 번개치는 이변이 있으니, 놀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늘에 응하기를 반드시 실심(實心)으로 하고, 백성을 걱정하여 반드시 실지의 은혜를 베풀며, 허비를 막아서 경용(經用)을 유지하고, 애증(愛憎)을 아껴서 요행(僥倖)을 막으며, 원기를 북돋우어 바른 말을 이르게 하고, 사령(辭令)을 삼가서 공정(公正)을 힘쓰며, 작은 일에 얽매이지 말고 시일(時日)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면, 어찌 재이(災異)를 돌려서 상서로움을 만드는 한 큰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때에 맞추어 바로잡아 구(救)하니, 마음으로 이를 가상하게 여긴다. 어찌 감히 노쇠하다고 하여 스스로 힘쓰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수찬 이득일(李得一)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함양(涵養)의 독실함과 계구(戒懼)의 간절하심이 오히려 미진함이 있습니까? 사기(辭氣)가 혹시 공평함을 잃는 데 이르고, 상벌(賞罰)이 혹시 과중(過中)함에 돌아가며, 명기(名器)가 점점 가벼워지고, 경용(經用)이 궁핍함이 많으며, 찬축(竄逐)이 잇따르고 금고(禁錮)해 버림이 많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는 나의 부덕(不德)함이니, 더욱 스스로 힘쓰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성원(李性源)을 대사간으로, 윤양후(尹養厚)를 헌납으로, 조준(趙㻐)을 교리로, 홍경안(洪景顔)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내쳐 물리치어 하늘의 견책(譴責)에 보답할 것을 비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를 갈고 닦아서 성취시키기 위하여 너무 안일함을 경계한 것인데, 경이 어찌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하였다. 김치인이 도우(屠牛)를 엄금하여 여러 고을에 도리어 허록(虛錄)을 짓는 폐단을 신칙하고, 성균관에 생원·진사의 과시(課試)를 행하도록 신칙할 것을 청하니, 아울러 윤허하였다.

 

9월 22일 기축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관하(李觀夏)를 거제부(巨濟府)에 정배(定配)하기를 명하였다. 이때 내수사(內需司) 관원이 김해부에서 노비(奴婢)를 추쇄(推刷)하였는데, 아직 추쇄를 마치지 아니하여 관공(官供)172)  을 걷은 때문이었다.

 

9월 25일 임진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형조 판서 심수(沈鏽), 참판 원경렴(元景濂), 참의 김면행(金勉行)에게 심리 문안(審理文案)을 가지고 들어와서 복주(覆奏)하라고 명하였다.

 

9월 27일 갑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서 진전(眞殿)에 전알(展謁)하고, 휘령전(徽寧殿)에 나아가서 예(禮)를 행하였다.

 

장령 신일청(申一淸)이 천둥의 이변(異變)으로 상소하여 진계(陳戒)하니, 의례적인 비답(批答)을 내렸다.

 

9월 28일 을미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선비를 시험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서유린(徐有隣) 등 20인을 뽑았다. 어필(御筆)로 어제(御製) 한 글귀[句]를 써서 내려,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해 올리라고 명하였으며, 방방(放榜)한 뒤에 환궁(還宮)하였다.

 

9월 29일 병신

임금이 숭정전 월대(崇政殿月臺)에 나아가 국제(菊製)173)  를 설행(設行)하고, 문·무(文武)의 신은(新恩)174)  에게 입시(入侍)를 명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영부사(領府事) 홍봉한(洪鳳漢)이 친상(親喪)을 당하였는데, 기사년175)  에 영부사 유척기(兪拓基)와 임신년176)  에 판부사(判府事) 정우량(鄭羽良)이 친상을 당하였을 때에 승지를 보내어 치조(致弔)하고 부의(賻儀)를 넉넉하게 보내었으며 일로(一路)에 명하여 호상(護喪)하였고, 본도(本道)에서 역부(役夫)를 주었으니, 청컨대 이 예(例)에 의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예단(禮單)을 보니, 나랏일이 아득하다. 모든 일은 해조(該曹)의 초기(草記)에 의하여 거행하고 판재(板材)177)  도 또한 골라서 보내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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