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무진
장령 홍상직(洪相直)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은 사람됨이 아첨하고 행신이 비굴하며, 전 지평 김양심(金養心)은 그가 장시(掌試)하였을 때에 공정하지 못하였다 하여 심지어 문임(文任)의 천망(薦望)에서 뽑아 버리기를 청하였는데, 문형(文衡)을 제배(除拜)함에 이르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의기 양양(意氣揚揚)하게 나와서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 사람은 족히 꾸짖을 것이 못되나 그 직무는 아끼지 않을 수 없으니, 빨리 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두 글자의 지목(指目)한 말이 어찌 그리 박절한가?’라는 말로써 비답하였다.
11월 3일 기사
우의정 김양택(金陽澤)이 세 번 상소하여 사직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승지에게 명하여 함께 들어오게 하자, 김양택이 명을 받들어 입시(入侍)하였다. 증 영의정 김진규(金鎭圭)의 집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병조 참판 박성원(朴聖源)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하교하기를,
"박성원은 과연 충자(沖子)199) 에게 공(功)이 있어 특별히 승자(陞資)한 것은 뜻이 대개 깊었다. 이미 충자에게 공이 있었으니, 어찌 노쇠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지 아니하겠는가? 한번 숙배(肅拜)하고 사은(謝恩)하는 것이 신분(臣分)에 당연한데, 한결같이 외방에 있으니, 고상(高尙)한 선비가 아니다. 내가 어찌 구차히 하겠는가? 특별히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참판 황경원(黃景源)의 체차(遞差)를 허락하고, 참의 권도(權噵)를 사체(辭遞)하여, 이은(李溵)을 참판에 홍낙명(洪樂命)을 참의에 제수하였다.
윤급(尹汲)을 이조 판서로, 조영진(趙榮進)을 대사헌으로, 황경원(黃景源)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형조 판서 심수(沈鏽)에게 경기(京畿)의 심리 문안(審理文案)을 가지고 입시(入侍)하여 복주(覆奏)하라고 명하였다.
11월 4일 경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김양택(金陽澤)이, ‘사교(辭敎)를 엄하고 급하게 하지 말고 성학(聖學)을 더욱 함양(涵養)하기를 힘쓰며 자주 주연(胄筵)200) 을 열고 춘방(春坊)을 지극히 고르며 대각(臺閣)을 너그럽게 용납하고, 명기(名器)를 삼가고 아끼라.’는 몇가지 조목으로써 우러러 힘쓰게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이은(李溵)을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잉임하고, 서명응(徐命膺)을 이조 참판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영의정 윤동도(尹東度)를 돈독하게 타일러서 함께 오게 하였다.
11월 5일 신미
도승지에게 명하여 영의정 윤동도를 돈독히 타일러 함께 오도록 하였는데, 이때 윤동도가 강상(江上)에 있으면서 명을 받들지 않으니, 면상(免相)을 명하였다.
윤동도(尹東度)를 판부사(判府事)로 삼았다.
11월 8일 갑술
헌부 【장령(掌令) 홍상직(洪相直)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병조 좌랑 양주익(梁周翊)은 처지(處地)가 비천(鄙賤)한데 외람되이 현직(現職)에 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1월 9일 을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판돈녕 한익모(韓翼謨)를 선혜청(宣惠廳) 당상에 차출(差出)하라고 명하였다.
조숙(趙)을 대사간으로, 이태정(李台鼎)을 지평으로, 신회(申晦)를 판윤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좌윤으로, 김상철(金尙喆)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11월 11일 정축
양사(兩司)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월 12일 무인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옛 해에 희정당(熙政堂)에서 정섭(靜攝)할 때에 그 청(廳)이 넓고 커서 자리로 막았었는데 요즈음은 나무로 만들어 막았으니, 이는 필시 중관(中官)이 자문감(紫門監)201) 에 분부한 것이다. 이 폐단을 이미 알았으니, 이 뒤에 이와 같이 하는 자는 해조(該曹)에서 초기(草記)하여 바로 ‘제서유위(制書有違)의 율(律)’을 시행할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일찍이 전례(前例)가 있기 때문에 허락하였는데 고요히 이를 생각하니, 이미 허락한 뒤에는 목상(木商)이 피를 본 파리와 같아서 하나를 허락하면 열을 취할 것이다. 추성(鄒聖)202) 은 부근(斧斤)을 〈산림(山林)에 삼가라는〉 훈계가 있고 염계(濂溪)203) 는 뜰에 풀도 오히려 아꼈는데, 어찌 연례(年例)로 삼아 예비하겠으며, 이제 산이 벌거숭이가 된 때를 당하여 이와 같이 많이 취하겠는가? 오늘 내수사(內需司)에 계하(啓下)한 것을 그만두게 할 일을 비국(備局)에 분부하라."
하였다. 우의정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204) 묘(墓)에 성소(省掃)할 때에 요전상(澆奠床)을 갖추어 주게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광성 국구(光城國舅)의 표석(表石)을 친히 쓰셨는데, 그때에 미처 시호(諡號)를 내리지 아니하여 ‘시(諡)’자 밑에 두 글자를 비워두고 쓰지 아니하였습니다. 시호를 내린 뒤에 즉시 써서 새기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밑에서 쓰는 것은 감히 할 바가 아니므로, 아직 새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이어서 쓸 것인데, 진실로 귀하다. 시호의 글자가 무엇인가?"
하매, 우의정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문충(文忠)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세한 송백(歲寒松栢)의 하교가 있었는데, 우의정도 능히 이를 계승(繼承)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친히 시호의 글자를 쓰고 말하기를,
"내가 옛 해의 어필(御筆)에 이어서 늙은 나이에 이를 썼으니, 진실로 귀하다."
하였다. 김치인·김양택이 말하기를,
"자획(字畫)이 선조(先朝)와 체(體)가 같습니다."
하였다. 김양택이 말하기를,
"세상에 보기 드물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은혜는 진실로 감격하여 울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11월 14일 경진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북도 개시(北道開市)의 자문(咨文)이 이제 비로소 나왔으니, 청컨대 회자(回咨)를 전례에 의하여 찬출(撰出)하고 금군(禁軍)을 정하여 파발마를 타고 의주(義州)에 내려 보내어 곧바로 봉황 성장(鳳凰城將)에게 전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안표(安杓)를 파직하라고 명하였으니, 살옥(殺獄)의 격식을 어긴 때문이었다.
11월 15일 신사
내국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어필(御筆)로 ‘일소(逸少)205) 는 당년에 그 붓[筆]이 무엇이었던가? 지금 80을 바라보는 늙은이는 한 가지 버들일세[逸少當年其筆何 于今望八一枝柳]’라고 써서 내리어, 모각(模刻)해 간인(刊印)하여 대신·구경(九卿)·승지·옥당(玉堂)·한림(翰林)·주서(注書)에게 반사(頒賜)하기를 명하였다.
11월 17일 계미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월 18일 갑신
임금이 영빈방(寧嬪房)에 임하였다가 의열궁(義烈宮)에 들렀다.
11월 19일 을유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당하(堂下) 무신(武臣)의 삭사(朔射)를 친히 시험하였다.
11월 20일 병술
임금이 태묘의 동지(冬至)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하고, 인하여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전 동래 부사 강필리(姜必履)의 장계(狀啓)에, ‘차왜(差倭)가 바다를 건너는 역관(譯官)으로서 호행(護行)하기를 개청(改請)한다고 하면서 서계(書契)를 가지고 나왔는데, 역관을 다시 보내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與否)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분부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니 원래 개청한 일이 없는데, 전례(前例)를 살피지 아니하고 범연히 다시 보내기를 청하였으니, 강필리를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서용(敍用)하지 아니하는 전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조숙(趙)을 파직하라고 명하였으니, 억지로 인피(引避)한 때문이었다. 장령 임해(任瑎)가 전계(前啓)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금위 대장(禁衛大將) 이윤성(李潤成)은 스스로 두려워하거나 삼가지 아니하며 마음과 손이 점점 넓어져서 신영(新營)의 삭봉(朔捧)을 창설해 쓰고 주소(鑄所)에서 유기(鍮器)를 별도로 만들었습니다. 후일의 폐단을 경계함이 마땅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조현명(趙顯命)의 춘첩자(春帖子)에 ‘동지날 교서(敎書)를 내리시니 왕의 마음을 점칠 수 있다.[至日能垂綍 王心已可占]’라는 글을 외면서 전교를 쓰라고 명하여 군공(群工)206) 에게 힘쓰기를 신칙하였다.
11월 23일 기축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박사해(朴師海)를 대사간으로, 조엄(趙曮)을 공조 참판으로, 신만(申晩)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지춘추(知春秋)로, 서명응(徐命膺)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11월 24일 경인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전 영의정 윤동도(尹東度)를 다시 영의정에 제배(除拜)하고,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윤급(尹汲)을 지춘추로, 정존겸(鄭存謙)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삼았다.
11월 25일 신묘
영의정 윤동도(尹東度)가 곧바로 명을 받들지 아니함으로써 승지를 먼저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황감(黃柑)을 진전(眞殿)에 천신(薦新)하였다. 환궁한 뒤에 제주(濟州)의 황감을 진공(進貢)한 사람을 불러서 연사(年事)를 묻고 돌아가는 양식을 주라고 명하였다.
11월 26일 임진
임금이 숭정전 월대(崇政殿月臺)에 나아가서 황감을 반사(頒賜)하고 선비를 시험하였다.
영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서명(胥命)하니,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판부사(判府事) 김상복(金相福)이 친상(親喪)을 당하였으니, 치조(致弔)·치부(致賻)·호상(護喪)·급군(給軍)을 청컨대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11월 27일 계사
영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사직하는 소(疏)를 올리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도승지에게 명하여 유시(諭示)를 전하고 함께 오게 하였는데, 윤동도가 곧 명을 받들고 입시(入侍)하였다.
과차(科次)를 정하여 입시하니, 수석을 차지한 생원(生員) 김종수(金鍾秀)를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11월 29일 을미
예조에서 왕세손빈(王世孫嬪)이 증조모(曾祖母) 정경 부인(貞敬夫人) 윤씨(尹氏)의 상(喪)에 거애(擧哀)·성복(成服)할 것을 품계(稟啓)하니, 비답이 없었다.
좌의정이 입시(入侍)하니, 하교하기를,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경이 이미 우제(虞祭)를 지났다고 하여 저번에 승지가 이미 내 뜻을 유시하였는데, 옛 법을 따라 강계(薑桂)207) 를 권하는 것은 스스로 차례가 있는 일이다. 먼저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나의 권권(眷眷)한 뜻을 유시하였으니, 이 뜻을 헤아려서 모름지기 스스로 보호할 일을 사관을 보내어 홍 영부사(洪領府事)에게 전유(傳諭)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30일 병신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전 금위 대장 이윤성(李潤成)을 서용(敍用)하고 다시 전임(前任)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장령(掌令) 임해(任瑎)가 전계(前啓)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병방 승지(吏兵房承旨)가 세초(歲抄)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형조 판서 심수(沈鏽)에게 명하여 각도의 심리 문안(審理文案)을 가지고 입시하여 복주(覆奏)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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