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7권, 영조 42년 1766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1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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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정유

과차(科次)178)  를 정하여 입시(入侍)하니, 서울과 시골에 각각 한 사람을 뽑으라 명하고, 서울의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이원(李遠)과 시골의 수석을 차지한 유학 김홍철(金泓哲)에게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기를 명하였다. 김홍철의 시권(試券)에 어비(御批)로 하교하기를,
"의주(義州)에서 절일제(節日製)에 급제(及第)한 자가 나왔으니, 기이하다."
하고, 입격한 유생의 입시를 명하여 하교하기를,
"김홍철(金泓哲)은 의주 사람인데 절일제(節日製)에 수석을 차지한 것은 3백년에 없었던 바이니, 내가 매우 기뻐한다. 식년(式年)이 아직 멀었는데, 참봉(參奉) 자리가 마침 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구전(口傳)으로 비의(備擬)하여 내가 먼 지방 사람을 위로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10월 2일 무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소학》 명륜편(明倫篇)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13세 때 《소학》을 강하였는데 지금 73세에 이 글을 다시 강하니, 또한 이상하다."
하였다.

 

10월 5일 신축

임금이 태묘(太廟)의 동향 대제(冬享大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하였다.

 

10월 6일 임인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심양(瀋陽)의 예부 자문(禮部咨文)이 나왔는데, 바로 임천(林川)에 표류(漂流)한 백성을 내어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이전부터 표류민을 내어 보내면 으레 방물(方物)이 없는 사표(謝表)가 있었으니, 지금도 사행(使行)을 기다려서 삼가 사례하는 뜻으로 회자(回咨)를 찬출(撰出)하고, 따로 금군(禁軍)을 정하여 의주[灣府]에 내려 보내어 봉황 성장(鳳凰城將)에게 전하여 심양으로 보내도록 하며, 사표(謝表)도 짓게 하여 이번 사신 행차에 부쳐 보내게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또 전라 감사(全羅監司) 원인손(元仁孫)의 장계(狀啓)에 감영(監營) 아병(牙兵)의 조련(操鍊)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장령(掌令) 정언섬(鄭彦暹)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홍중효(洪重孝)를 대사헌으로, 송형중(宋瑩中)을 대사간으로, 김상집(金尙集)을 부수찬으로, 남태제(南泰齊)를 공조 판서로, 윤득양(尹得養)을 호조 참판으로, 박성원(朴聖源)을 병조 참판으로, 조덕성(趙德成)·이복상(李復祥)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7일 계묘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제조(提調) 박상덕(朴相德)을 체차하기를 허락하고, 이창수(李昌壽)로 대신하게 하였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내시사(內試射)를 행하였다.

 

10월 8일 갑진

달무리가 화성(火星)을 둘렀다.

 

10월 9일 을사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하교하기를,
"제도 경차관(諸道敬差官)이 요즈음 단지 그 이름만 있고, ‘경(敬)’이라는 한 글자의 중함을 알지 못하면서 그 명예만 요구하려고 하여 경비(經費)만 탕갈(蕩竭)시키며, 그 이름만 취하려고 하여 몸소 답험(踏驗)하지 아니하고 단지 강제로 실(實)을 만든다. 아! 내가 비록 덕이 박할지라도 아래 백성을 유익하게 하는 정사를 조금 아는데 맹랑(孟浪)하게 은혜를 베푸니, 어찌 참은혜라고 이르겠는가? 근래에 비총(比摠)179)  이 오로지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제도 감사(諸道監司)를 모두 적임자(適任者)를 얻었으면 내가 마땅히 정섭(靜攝)하는 가운데에서도 근심이 없겠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도신(道臣)이 어찌 신칙하지 아니하겠는가마는, 수령(守令)은 팔도(八道)라고 하더라도 바로 3백 60고을이다. 옛사람의 말에, ‘사람이 요순(堯舜)이 아니면 일마다 어찌 다 잘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미 비총을 하였으면 일도(一道)가 스스로 고르게 분배(分排)되었을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고르게 분배하였다고 이르지 말 것이다. 비총은 비록 고르다 하더라도 여러 고을은 오직 수령에게 달려 있다. 가까운 경기(京畿)로써 말하더라도 양천(陽川)은 그 결총(結總)은 혹시 많으나 빠진 것이 있고, 김포(金浦)는 그 결총이 과연 적으나 지나치게 비총(比摠)한 것이 있으므로, 3백 60고을로써 통틀어 말한다면 원수(元數)에 모자람이 없으니, 도신(道臣)에게 폐단이 없고 경비(經費)에도 흠축(欠縮)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아! 나의 늙은 나이에 어찌 사소(些小)하고 과분(過分)함을 계교하겠는가? 만약 혹시 재결(災結)에 해당함에도 재결에 들지 않은 것이 있어 비총 가운데 섞여서 들어갔다면, 경비는 비록 줄어짐이 없을지라도 외로운 백성들이 어찌 능히 구중(九重)180)  에 호소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이 마음이 어찌 놓이겠는가? 아! 3백 60주(州) 백성은 모두 옛 해에 사랑하고 가여워하던 백성인데, 혹시 수령의 잘못으로 인하여 만약 고르지 못한 폐단이 있으면, 어찌 늙은 나이에 백성을 위하는 뜻이겠는가? 분등(分等)이 지난 뒤에 마땅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근만(勤慢)을 염문(廉問)할 것이니, 이를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팔도에 분부하여 수령에게 엄하게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시동(尹蓍東)과 이휘지(李徽之)를 승지로 삼았다.

 

10월 10일 병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전라 감사 원인손(元仁孫)의 분등 장계(分等狀啓)로 인하여 재결(災結) 2천 결(結)을 더 주고 지차(之次) 고을에는 구 환곡(舊還穀)의 3분의 1을 정봉(停捧)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정언 유지양(柳知養)이 전계(前啓)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소회(所懷)로써 삼사(三司)의 귀양간 신하를 모두 탕척(蕩滌)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요즈음 처분은 사기(辭氣)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고심(苦心)인데, 곧 석방을 청하였으니, ‘나라 안에서 함께 살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형(兄)의 아우로서 그 형이 희정당(熙政堂)에서 밤중에 음관(蔭官)으로서 강개(慷慨)히 아뢴 뜻은 생각하지 않고, 처음 연석(筵席)에 올라와 혼동(混同)하여 두둔해 주었다. 이미 그 형을 본받지 아니하였는데, 또 어찌 그 임금을 존경하겠는가? 진실로 괴이쩍은 일이다."
하였다. 유지양이 인피(引避)하여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아뢴 바에 의하였다.

 

10월 11일 정미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인삼을 복용한 것이 지금까지 몇 근(斤)에 이르는가?"
하니, 의관(醫官) 이이해(李以楷)가 대답하기를,
"임신년181)  부터 이제까지 백여 근이 넘습니다.
하였다.

 

10월 12일 무신

이정철(李廷喆)을 대사간으로, 강윤(姜潤)을 집의로, 이헌묵(李憲默)을 사간으로, 정환유(鄭煥猷)·채위하(蔡緯夏)를 장령으로, 심관지(沈觀之)를 헌납으로, 이세연(李世演)·이동현(李東顯)을 정언으로, 서명선(徐命善)을 응교로, 홍낙명(洪樂命)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10월 14일 경술

임금이 태묘(太廟)의 망제(望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지영하였다. 어전(御殿)에 돌아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강필리(姜必履)의 장계(狀啓)에 의하면,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이번에 바다를 건너던 역관(譯官)이 익사(溺死)한 일로써 부물(賻物)을 보내고 겸하여 위령제를 지내려 하며, 살아서 돌아온 각 사람에게도 증급(贈給)하는 물품이 있어 차왜(差倭)를 정하여 영송(領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례(前例)를 가져다 상고하니, 계미년182)  에 바다를 건너던 배가 치패(致敗)하여 차왜가 나올 때에 조정에서 특별히 향접위관(鄕接慰官)을 정하여 접대하였습니다. 지금 이 차왜의 허접(許接)과 부의(賻儀)·증급 등 물품을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와 치제(致祭) 일절(一節)을 허락할 것인지의 여부를 아울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분부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차왜가 부의와 증급 등 물품을 가지고 온 것은 이미 이웃 나라와 우호(友好)하는 뜻에서 나왔으며, 또 계미년의 전례가 있으니, 향접위관(鄕接慰官)이 접대하는 것과 부의·증급 등 물품을 나누어 주는 것은 마땅히 전례에 따라 거행할 것이나, 치제의 일절에 이르러서는 전례에 없는 바일 뿐만 아니라, 사체에 있어서도 심히 미안한 바가 있으니, 이는 결단코 아울러 행하기를 허락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로써 분부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장령 정환유(鄭煥猷)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희증(任希曾)을 지평으로, 정창순(鄭昌順)을 부교리로 삼았다.

 

10월 17일 계축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당상 무신(堂上武臣)에게 삭사(朔射)를 시험하였다.

 

10월 18일 갑인

임금이 중일청(中日廳)에 나아가 시사(試射)하였다.

 

10월 20일 병진

소대(召對)를 행하고 마치자,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호서(湖西)에 재결(災結) 1천 5백 결을 더 주고 우심한 고을은 구 환곡(舊還穀) 3분의 1을 정봉(停捧)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대사헌 홍중효(洪重孝)가 전계(前啓)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동몽(童蒙)을 불러서 강(講)을 시험하여 시상(施賞)하였다.

 

10월 21일 정사

영부사(領府事) 윤동도(尹東度)를 제배(除拜)하여 영의정으로 삼았다.

 

김노진(金魯鎭)을 대사간으로, 안성빈(安聖彬)을 지평으로, 한익모(韓翼謨)를 판돈녕으로 삼았다.

 

10월 23일 기미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한학 전강(漢學殿講)을 행하고 겸하여 이문 제술(吏文製述)을 행하였다. 전강(殿講)에 수석을 차지한 직강(直講) 강정하(康正夏)와 제술에 수석을 차지한 부수찬(副修撰) 김상집(金尙集)에게 각각 반숙마(半熟馬) 1필을 주었다.

 

10월 24일 경신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거(都提擧) 김치인(金致仁)의 사임을 허락하고 영의정 윤동도(尹東度)로 대신하게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은데 무엇을 감히 숨기겠습니까? 유도(儒道)를 숭상하고 존중함은 바로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가법(家法)이며 또한 전하께서 일찍이 배양(培養)하고 붙들어 세우는 도리에 권권(眷眷)하시던 바입니다. 신이 배상(拜相)한 첫 입대(入對)에 우러러 힘쓰시기를 청한 바가 있었는데, 유의(留意)하겠다는 하교를 받았습니다. 경년(頃年)의 처분은 신 등이 비록 심히 어리석고 미욱할지라도 전하의 고심(苦心)에서 나오신 것을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만, 세대(世代)가 이미 먼 뒤에는 모든 일을 단지 대체만 보니, 누가 능히 전하의 고심을 신 등과 같이 알겠습니까? 전하께서 40여 년을 임어(臨御)하사, 거룩하신 덕과 위대한 업적은 역사에 다 쓸 수 없으니, 무엇이 후세에 법이 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홀로 이 일에 있어서 후세 사람이 논의하는 바가 있으면, 신이 망극(罔極)한 은혜를 받아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으로 삼으려는 마음으로써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감히 처분을 바로 청하지 못하오니, 오직 전하께서 목연(穆然)히 멀리 보시고 연연(淵然)히 깊이 생각하사, 성덕(聖德)을 더욱 빛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괴이할 것은 없으나, 당(黨)의 근본은 은사(隱士)이다. 매양 선조(先朝) 정유년183)   사이의 일을 생각하면, 내가 마음이 아프다. 경년(頃年)에 송명흠(宋明欽)이 동교(東郊)에 머물 적에 한 소장을 올린 것은, 서울 사대부(士大夫)가 지시해 가르친 것이 아닌가? 이어서 김양행(金亮行)이 속에 가득한 마음으로 또 한 소장을 올렸으니, 지금 이 무리를 은일(隱逸)이라고 이를 수 없다. 내가 만약 소중함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장차 나를 무엇이라고 이르겠는가?"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성상의 뜻은 효도를 생각하시는 괴로운 마음에서 나오신 것을 신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만, 신의 진달한 바도 한결같은 고심(苦心)에서 나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랑(吏郞)184)  ·한림(翰林)·산림(山林)185)  ·균역(均役)은 내가 지키기를 고집하였으나, 체계(髢髻)186)  와 방백(方伯)의 솔권(率眷) 【집안 권속(眷屬)을 데리고 부임함.】  등의 일은 심히 관계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서 허락하였다."
하였다.

 

영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진소(陳疏)하여 지난해에 당한 바로써 분의(分義)를 이끌어 사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위(位)가 보상(輔相)에 있으면서 어찌하여 한결같이 나를 괴롭게 하는가? 지나간 일은 쾌하게 씻어버리고 그 임명한 것에 사례하며 인하여 저녁 입시(入侍)에 참여하라.’는 뜻으로써 비답(批答)하였다.

 

10월 25일 신유

임금이 익릉(翼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김양택(金陽澤)을 특별히 우의정으로 제배(除拜)하고 하교하기를,
"옛날을 추억하건대 광성 국구(光城國舅)187)  의 뒤에는 오직 경 한 사람이다. 아! 옛 해에 경의 아버지와 더불어 주원(廚院)188)  에서 같이 임무(任務)를 보살폈고, 도총부(都摠府)에 같이 입직(入直)하였으며, 도사(圖寫)에 같이 참여하였는데, 50년 전의 일을 추억하니 황연(怳然)히 어제와 같다. 오늘날에 경을 배상(拜相)할 것이라 생각하였겠는가? 진실로 이는 만만 뜻밖이다. 내 마음이 이와 같은데 경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하물며 오늘날이겠는가? 승선(承宣)에게 명하여 소자(小子)가 옛 해를 추억하고 선경(先卿)을 생각하는 뜻을 유시(諭示)하게 하였다. 아! 지금 경을 배상한 것이 어찌 나의 뜻이겠는가?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니, 한결같은 마음을 공정하게 가져 우리 나라를 보좌하라."
하였다.

 

약방에서 문안하니, 답하기를,
"보호하는 직책에 있었는데 사관(史官)에게 같이 오기를 명하였고, 심지어 저녁 입시(入侍)에 같이 참여하기를 명하였는데, 신패(申牌)가 이미 알려졌은즉, 비록 명을 받들지 못하였더라도 사관(史官)은 서로 지키고 있으면서 어찌 그 답(答)이 없고 잠잠히 소식이 없는가? 아! 여섯 달을 병이 침면(沈綿)한 나머지에 겨우 조금 나았는데, 이와 같이 구차하니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진실로 스스로 탄식할 만하다."
하였다. 내국 도제조(內局都提調) 윤동도(尹東度)의 사면을 허락하고 다시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을 도제조로 삼았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 이 하교를 들었으면 즉시 하는 것이 마땅한데 신시(申時) 후에 하였으니, 녹사(錄事)가 해태(懈怠)하여 그러한가? 유사(攸司)로 하여금 치죄(治罪)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동도가 곧 서명(胥命)하니, 하교하기를,
"진실로 나의 부덕(不德)함에 말미암은 것인데, 일국의 원보(元輔)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대명(待命)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26일 임술

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서지수(徐志修)를 같이 들어오라 명하여, 임금이 서지수에게 이르기를,
"어제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기신(忌辰)에 내가 소식(素食)을 행하였다. 비록 승안(承顔)하지는 못하였으나 추모(追慕)하는 마음은 깊다. 오늘날 임금과 신하가 간격(間隔)이 없으니, 내가 하교한 데에 대하여 경 등은 어떻다고 여기는가? 내가 아니면 어찌 신축년189)  의 일이 있었겠는가? ‘서생(書生)이 조정에 가득하고 백도(白徒)190)  가 벼슬을 바란다.’는 말은 진실로 이상하다. 그 가운데 공명(功名)을 바라는 자가 혹시 있었으나 또한 나라를 위하는 자도 많이 있었다. 경년(頃年)에 서종일(徐宗一)이 서덕수(徐德修)를 신설(伸雪)하기를 청할 때에, 고(故)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서덕수가 거짓 자복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다. 김용택(金龍澤)은 처지(處地)가 어떠하였던가? 심상길(沈尙吉)은 괴이한 짓을 하였고, 정인중(鄭麟重)은 떠들썩하게 지껄여댔다. 비록 대훈(大訓) 가운데 ‘영세(永世)토록 개정(改正)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이미 서덕수와 백망(白望)을 신설(伸雪)하였으니, 김용택도 신설함이 가하다. 김용택은 네 사람의 경우와 더욱 다르다."
하였다. 도제조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다섯 사람의 마음도 모두 나라를 위하는 데에서 나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고, 인하여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며 하교하기를,
"내가 어찌 성모(聖母)를 생각하지 아니하겠는가? 김용택을 대훈(大訓)에 두면 효(孝)가 아니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책비(責備)의 마음으로써 대훈에 두었으나, 애당초 역(逆)에 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복택(金福澤)의 죽음은 억울하나, 누(累)는 없다. 김용택의 억울함을 밝게 씻으면 삼전(三殿)을 배알(拜謁)할 면목이 있으니, 우의정의 배명(拜命)은 오히려 말절(末節)이다."
하였다. 도승지 윤득우(尹得雨)에게 대훈을 읽어 아뢰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황형(皇兄)의 마음도 나의 오늘날 마음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대훈을 읽다가, ‘아울러 역(逆)으로 처단하라.’는 데에 이르러,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 글귀로써 보더라도 성상의 뜻은 역률(逆律)로 논한 것이 아닙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김용택으로 머리를 삼았는데, 문지(門地)가 높았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문지 때문이요, 그 죄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심히 중대한데, 경 등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미 그 죄가 아님을 알았으면 오늘날 처분을 어찌 중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서지수(徐志修)는 말하기를,
"그 죄가 아님을 알았으면 처분함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제조(提調) 박상덕(朴相德)이 말하기를,
"이름이 이미 대훈에 실려 있는데, 어떻게 하면 신설(伸雪)하는 방법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이름을 지워버리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정인중(鄭麟重)의 무리는 〈공명(功名)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선신(先臣)이 매양 말하기를, ‘〈공명을〉 바라는 것은 족히 죄될 것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일찍이 이 일로써 주상 앞에 아뢰었으며, 또 말하기를, ‘비록 대훈 가운데, 「아울러 역(逆)으로 단정하라.」는 하교로써 볼지라도 자연히 그 역이 아님은 밝혀진다.’고 하였으므로, 신은 선신에게 들은 바로써 오늘날에 대답합니다."
하였고, 박상덕이 말하기를,
"이들은 모두 국변(國邊) 사람입니다."
하였으며, 서지수가 말하기를,
"좌의정이 아뢴 바 ‘역(逆)이 아니라’는 말은 옳으니, 참으로 역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심(公心)이니, 경의 말이 옳다."
하매, 서지수가 말하기를,
"신은 감히 공심(公心)이라고 할 수 없으니, 선신(先臣)에게 들어서 그러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에 비로소 선경(先卿)의 마음을 알았다. 을해년191)   이전에도 이미 알았는가?"
하니, 서지수가 말하기를,
"단지 〈공명을〉 희망(希望)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박상덕이 말하기를,
"하늘의 공(功)을 탐한다고 이르는 것은 가하나, 역(逆)은 아닙니다."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대훈 끝에 너댓 줄 성교(聖敎)를 따로 내려 이 무리를 신설(伸雪)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보(洗補)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세보’는 택배(澤輩)라는 ‘택(澤)’의 글자를 ‘차(此)’ 자로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정인중(鄭麟重)의 무리도 대훈 가운데에서 다 벗어나지 아니하겠는가?"
하매, 서지수가 말하기를,
"이 무리가 다 벗어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대훈 가운데 ‘가탁자중(假托藉重)·교무패역(矯誣悖逆)·병단이역(並斷以逆)’ 등의 글귀는 모두 세보(洗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이 헤아려서 세보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서지수가 말하기를,
"아래에서 지우고 고칠 일이 아니니, 위에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국시(國是)’의 글귀를 불러 주며 쓰게 하였다. 서지수가 말하기를,
"‘국시’ 두 글자는 애초에 옳고 그름을 논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의리(義理)’로 고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고, 김치인이 말하기를,
"‘의리’의 글자가 진실로 좋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을해년 이후로 의리가 더욱 밝아졌으니, 대훈의 어구(語句) 가운데도 이정(釐正)할 것이 없지 아니하다. 또 김용택(金龍澤)은 이희지(李喜之)·심상길(沈尙吉)·이천기(李天紀)·정인중(鄭麟重)의 무리와 처지가 다르다. 오늘 시임·원임 대신에게 이미 심복(心腹)으로 깨우쳐 말하였으며, 원래 대훈 가운데의 이 구절(句節)에 부표(付標)하여 내리니, 이에 의하여 세보(洗補)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다시 서지수·김치인에게 명하여 원래 대훈 가운데 ‘아! 이 무리들이 가탁 자중하여 공을 탐하고 상을 바라며 심장이 서로 연결하여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이니, 이는 이른바 「나라를 열고 집을 승계하는 데에 소인은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인심을 마땅히 바로잡고 제방을 마땅히 엄하게 할 것이다.[噫此輩 假托藉重 貪功望賞 膓肚相連 一而二 二而一 寔所謂 開國承家 小人勿用者也 人心宜正 隄防宜嚴]’라는 42글자를 개보(改補)하게 하였다. 이를 마치자, 하교하기를,
"동궁(東宮)을 세우기를 청하는 것은 대신의 책임인데, 이정소(李廷熽)가 먼저 발설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당시의 사기(事機)가 대신(大臣)이 먼저 발설하였다가 버림을 당하면 종사(宗社)가 위태롭기 때문에, 이정소가 먼저 발설한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백세(百世)의 신분(臣分)을 세운 것이다."
하였다. 서지수가 말하기를,
"이정(釐正)한 구절에 오히려 모호(糢糊)한 점이 많으니, 다시 편차인(編次人)에게 명하여 품정(稟定)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원래 대훈 가운데 ‘택배(澤輩)’와 같다는 구절은 개보(改補)할 것이 아니고, ‘병택배(並澤輩)’라는 구절은 ‘차배(此輩)’로 고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10월 27일 계해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대훈 가운데 정인중(鄭麟重) 무리의 이름자는 그대로 두려고 한다."
하니, 좌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어제 연중(筵中)에서 이미 〈공명(功名)을〉 희망(希望)한다고 하교하셨으니, 역(逆)이 아니면 세보함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각각 그 뜻을 진달하라."
하였다. 좌참찬(左參贊)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처분이 빛나고 밝아서 다시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고, 공조 판서 남태제(南泰齊)는 말하기를,
"김용택(金龍澤) 한 사람뿐만 아니라, 나머지 네 사람도 모두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공명을〉 바라는 것은 단지 나머지 일입니다. 또 대체를 보고 자질구레한 곳은 너그럽게 용서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자세히 말하겠다. 이 무리들은 조금 어긋난 길로 들어갔는데, 대체로 말하면 한구석 청구(靑丘)에 오늘날 신자(臣子)가 된 자는 삼종(三宗)192)  의 혈맥(血脈)은 단지 황형(皇兄)과 나만 있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를 배반하는 자는 달아날 곳이 없다."
하고, 남태제에게 앞에 나오라고 명하여 말하기를,
"경의 말이 준급(峻急)하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남태제는 네 사람이 전혀 〈공명을〉 바라는 마음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을 우러러 진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 사람을 일체로 김용택에게 견주었으니, 남태제의 말이 지나치다."
하니, 남태제가 말하기를,
"다섯 사람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단지 나라를 위하는 대체만 논하였습니다. 그들의 행신(行身)은 말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고, 형조 판서 심수(沈鏽)가 말하기를,
"처분하심이 밝고 공정하시니, 어리석은 신은 별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김용택은 처지(處地)가 나라와 더불어 휴척(休戚)193)  을 같이한다."
하매, 남태제가 말하기를,
"이희지(李喜之)의 처지도 나라와 더불어 휴척을 같이합니다. 전하께서 심지어 삼종 혈맥(三宗血脈)으로써 하교하시는데, 만약 해동(海東)의 신하가 된 자로 하여금 과연 모두 오늘날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찌 무신년(戊申年)의 역란(逆亂)194)  이 나겠습니까? 이로 미루어 보건대 다섯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명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고, 김치인이 말하기를,
"신도 듣건대 이희지가 국사(國事)에 말이 미치면 한숨쉬며 눈물을 흘린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며, 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는 말하기를,
"처분(處分)이 광명(光明)하시니 다시 진달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신이 합문(閤門) 밖에서 남태제와 수작할 때에 신도 또한 전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행 사직(行司直) 구선행(具善行)은 말하기를,
"처분이 광명하시니, 기쁘고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며, 판윤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처분이 이미 내렸으니, 신도 여러 신하의 의견과 같습니다. 〈공명(功名)을〉 바라는 것과 나라를 위하는 것을 나누어 말하면, 나라를 위하는 편이 많았습니다."
하였고, 승지 심관(沈鑧)은 말하기를,
"〈공명을〉 바라는 것은 그 행신(行身)에 있고, 나라를 위하는 것은 나라를 위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였으며, 교리 정창순(鄭昌順)은 말하기를,
"지난번의 하교는 진실로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남태제의 계달한 바, ‘다섯 사람은 구별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 말이 옳습니다. 〈공명을〉 바라는 여부는 계교해 논할 필요가 없고, 다만 나라를 위하는 충성을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덕수(徐德修)·백망(白望)·김용택(金龍澤) 세 사람은 나라와 더불어 망함을 함께하는데,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이에 배반하는 자는 어찌 조선의 신하라고 이르겠는가?"
하였다. 다시 정 창순에게 앞에 나오기를 명하고, 말하기를,
"네 사람의 일이 과연 어떠한가?"
하니, 정창순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위해 수고로움을 다하는 자는 공명을 바라는 마음이 반드시 없지 아니한데, 이에 수보(酬報)하는 방법은 또 성취함이 어떠한지를 보는 것이니, 그 충성하기를 원하는 정성만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정창순의 말이 옳다."
하였다. 정창순이 말하기를,
"공명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하여 역안(逆案)으로 단정(斷定)한다면, 반드시 이런 이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창순의 말이 옳다. 한(漢)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의 여러 명신(名臣)들도 어찌 〈공명을〉 바라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한 고조(漢高祖) 때의〉 소하(蕭何)·조참(曹參)과 〈한 광무제(漢光武帝) 때의〉 마원(馬援)·등우(鄧禹) 등이 〈밝은 임금에게〉 붙따른 것은 어찌 〈공명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처분함에 있어 이미 〈공명을〉 바라는 것으로 하교하였으니, 대훈(大訓) 가운데 말이 역안(逆案)에 관계되는 것은 낱낱이 세보(洗補)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편차인(編次人) 조명정(趙明鼎)에게 명하여 여러 구절(句節)을 읽어 아뢰게 하고 말이 역안(逆案)에 관계되는 것은 개보(改補)하게 하였다. 개보를 마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미 모두 이정(釐正)하였으니, 대훈 끝에 첨부한 것과 고묘(告廟)·반교(頒敎) 등의 글도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뽑아 버리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물으시는 아래 여러 신하들의 우러러 대답한 것은 공의(公議)를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조명정이 말하기를,
"신이 대훈을 처음 간행(刊行)할 때에 주서(注書)로서 입시(入侍)하였는데, 또 편차인(編次人)으로써 이제 개보(改補)를 담당하였으니, 일이 우연하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훈을 세보(洗補)한 뒤에 한 건(件)을 대내(大內)에 들이고 곧 반포(頒布)하게 하라."
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전의 대훈은 도로 거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로 거두라."
하였다. 김치인이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종정(金鍾正)의 분등 장계(分等狀啓)로 인하여 재결(災結) 1천 결을 더 주어 우심한 고을의 옛 포흠(逋欠)은 우선 정퇴(停退)할 것을 청하고,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응순(金應淳)의 분등 장계로 인하여 우심한 고을의 옛 환곡(還穀)을 절반 정봉(停捧)할 것을 청하니, 아울러 윤허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이조(吏曹)의 당상·낭청에게 같이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여 수령강(守令講)을 시험하게 하였다.

 

10월 28일 갑자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윤득우(尹得雨)가 말하기를,
"재작일(再昨日)에 대훈(大訓)을 이정(釐正)할 때에 전교 가운데 글자를 산개(刪改)한 것이 있기 때문에 지금 가지고 들어와서 품정(稟定)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에 반사(頒賜)한 대훈과 첨간(添刊)한 대훈을 모두 아울러 환수(還收)하여 세보(洗補)한 뒤에 다시 반포(頒布)하라."
하였다. 전교를 쓰라 명하고 말하기를,
"아! 을해년195)   이후에 의리(義理)가 더욱 밝아졌으니, 대훈의 구어(句語) 가운데에도 개정할 것이 없지 아니하다. 오늘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에게 이미 심복(心腹)을 유시(諭示)하였고, 원래의 대훈 가운데 자구(字句)는 부표(付標)하여서 내리니, 이에 의하여 세보(洗補)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30일 병인

임금이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에 쓸 향(香)을 숭정전 뜰에서 지영하였다.

 

한광조(韓光肇)를 대사헌으로, 임해(任瑎)·홍상직(洪相直)을 장령으로, 최민(崔)·권극(權極)을 지평으로, 구익(具㢞)을 정언으로 삼았다.

 

우의정 김양택(金陽澤)이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병으로 깊숙한 마을에 엎드려 있어 겸대(兼帶)한 금오(禁吾)의 직을 장차 단자(單子)를 올려 사면하기를 청하려 하던 차에 특지(特旨)가 갑자기 내려 신을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하시니, 명을 듣고 두려워서 오내(五內)196)  가 끓어오르는 듯합니다. 근시(近侍)가 임하여 별유(別諭)를 내렸는데, 수십 줄의 사지(辭旨)가 온순하게 먼저 옛날을 생각하시는 하교를 내리시고 다시 힘쓰기를 기약하는 뜻을 보이시며, ‘내 마음이 이와 같은데 경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라는 하교까지 하셨으니, 글자마다 은혜로운 말씀이 살에 젖고 뼈에 스며서 삼가 절반도 읽기 전에 황송하고 감격하여 눈물이 흐릅니다. 신은 본디 어리석고 비루(鄙陋)한 처지로 외람되이 큰 은혜를 입어 차례로 옮겨서 지위가 숭품(崇品)에 이르렀으나, 위로는 성상의 정치를 돕지 못하고 아래로는 선대(先代)의 아름다움을 이어받지 못하여 충(忠)과 효(孝)가 함께 허물어졌으니, 몸을 어루만지매 부끄럽고 슬픕니다. 매양 연석(筵席)에 오르면 문득 선신(先臣)의 충정(忠貞)을 일컬으시며 신을 사랑하시고 신을 용서하셨는데, 이제 또 이로 말미암아 상신(相臣)의 직위에 발탁하여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하는 공(功)을 책임지우려 하시니, 어진 사람을 골라 세우는 도리에 또한 그릇되지 아니합니까? 반복해 헤아려도 그 까닭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정성을 진달하니, 말이 진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라건대 새로운 직함(職銜)을 거두시고 현덕(賢德)이 있는 자를 다시 고르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복상(卜相)하던 날에 승선(承宣)에게 특별히 명하여 먼저 나의 뜻을 유시하였는데, 경의 글을 살펴보니 한결같이 어찌하여 지나치는가? 경의 집의 충정(忠貞)은 내가 이미 안다. 선경(先卿)의 충성한 바탕은 마음으로 항상 흠탄(欽歎)하였는데, 경이 팔좌(八座)197)  의 지위에 올라 매양 입시(入侍)할 적에는 선경과 비슷하였다.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정승을 얻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고, 또 지금 정승의 자리는 믿는 바가 깊으니, 경은 모름지기 소자(小子)의 이 뜻을 체득하고 오늘의 국사(國事)를 돌아보아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며 곧 조정에 나오라."
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헌 한광조(韓光肇)가 전계(前啓)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한광조가 정리(情理)에 있어 직무에 행공(行公)하기 어렵다고 여겨 체차(遞差)를 허락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상중(喪中)에 있는데 고기[肉]를 권한 예(例)가 있는가?"
하니, 좌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일찍이 가중(家中)의 일기(日記)를 보니, 신의 조부가 이 은전(恩典)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전교를 쓰라 명하고 말하기를,
"아! 어느 날에 잊겠는가? 경은 어찌 한갓 경만 위하겠는가? 진실로 나라 일을 위할 것이다. 아! 3년상(三年喪)을 생각하니, ‘창연(悵然)’ 두 글자도 허름한 말이다. 특별히 승선(承宣)을 보내어 나의 권권(眷眷)한 뜻을 유시(諭示)하고, 겸하여 경의 자제(子弟)들에게 그윽한 뜻을 보이니, 경은 모름지기 나의 이 뜻을 알지어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이 뜻을 알지어다. 어찌 몸을 위해서이겠는가?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보호하도록 하라."
하였다. 입시(入侍)한 승지에게 명하여 홍 영부사(洪領府事)198)  에게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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